다른 사람

w.겨울왈츠










"야, 일어나."


뭔가 좋은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귓가로 내질러진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산통을 깬다. 아, 머리야. 이마를 짚고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뜨자 교복으로 말끔하게 갈아입은 민현이 쯧쯧 혀를 차고 있다.


"아 왜 깨워."


다시 침대로 머리를 묻으며 외면하자 민현이 이번에는 내 핸드폰을 바로 눈앞으로 들이민다. 지잉- 울리다 멈추는 화면 위로 부재중 통화 세통. 모두 엄마다. 아 좋은 꿈은 무슨. 망했다. 그 틈을 타고 이번에는 윙윙대며 민현의 전화가 울린다. 또 우리 엄마. 내게 핸드폰을 내미는 민현에 하읍,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꼬락서니를 보고 길게 한숨을 쉰 민현이 제가 전화를 받는다.


"네, 아줌마. 아... 종현이형이요?"


민현은 대놓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숨 쉴때마다 술냄새가 풀풀 새어나오고 얼굴에 이건 뭐냐, 오바이트라도 한 건가. 퉁퉁 부어선 산발이 된 머리를 감싸쥐자 민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돌린다. 뭐, 왜, 못봐주겠다 이거냐.


"형 지금 자는데. 바꿔드려요? ...아, 그래요? ...아닐거에요. 네, 요즘 형 맘잡고 얼마나 착실한데요. 걱정마세요. 아... 네, 말씀 전할게요. 네에, 들어가세요."


세상 싹싹하고 사근사근하게 전화를 받은 민현이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내게 손을 내민다. 덩치에 안어울리게 좁다란 손바닥을 멀거니보다 민현을 올려다봤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 단호한 눈빛. 주섬주섬 지갑을 찾아 현금을 세어보다 슬쩍 2만원을 내밀었다.


"어허. 한장 더 내놔."
"야, 고작 전화 한번 받아줬다고!"
"그럼 다시 아줌마한테 전화한다? 맨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술 처먹고 업혀들어온다고?"


어린 놈의 시키가 뭐가 저렇게 야무져. 강탈당한 3만원을 아쉽게 바라보는데 주머니에 찔러넣은 민현은 교복 넥타이를 매고있다. 몇신데 벌써 나가? 시계를 보니 6시반이다. 쓸데없이 부지런한 새끼. 휘적휘적 거실로 걸어가 냉장고를 열어둔 채 차가운 물을 들이키다보니 갑자기 의문이 든다.


"아니, 엄마는 이 새벽에 전화는 왜 한거야?"
"너 어제 룸싸롱이라도 갔냐?"
"루,룸... 뭐?"


마시던 물을 그대로 내뿜었다. 저 미성년자 새끼가 뭐라는거야 진짜. 냉장고가 삐삐삐-하며 경고음을 뱉아내자 민현이 성큼성큼 걸어와 냉장고 문을 닫고서 단정한 눈매로 또박또박 말을 한다.


"새벽 1시에 '내 인생의 장미'라는 이름으로 카드 50 긁혔다던데?"
"장미? 내 인생의 장미이?"


아 어제 일찌감치 필름이 끊겨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만 쥐어짜고 있는 나를 힐끗보던 민현이 가방을 챙겨들고 현관으로 나선다 아, 하며 멈춰선 저 멀끔한 놈이 나를 한심하게 돌아본다.


"아줌마가 전해달라셔. 한번만 더 술집에서 긁은 카드 내역 날아오면 카드 다 정지시키신다고."
"뭐?"


그놈의 장미가 뭐냐고. 우선 기억부터 복원해야한다. 어제 식전부터 소주로 시작해서 2차로 선술집으로 갔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야, 황민현. 근데 나 어제 어떻게 들어온거야?"
"아까 얘기했잖아. 업혀왔다니까."


저놈의 시키는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구나. 막 현관을 나서던 민현이 고개짓으로 주방 쪽을 가르킨다.


"술깼으면 밥이나 처먹어."
"이 놈의 시키가, 너 형한테 말 그따구로 할거야?"


야 형이 혼내고 있잖아. 이 시키야. 내 말이 우습냐 지금? 잔뜩 열을 올리는 나에도 픽하니 웃음이나 흘린 민현이 집을 나서고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아, 어제 누구랑 있었더라. 민기에게 전화를 걸며 주방을 기웃대려니 가스레인지 위로 해장국이 끓고있다. 그래, 황민현이 해장국 하나는 기가막히게 끓이지. 국자째로 맛을 보자, 아 벌써 속이 풀리는것 같애.











-야이 멍멍이 시키야, 왜 이시간에 전화하고 난리야아.
"내 인생의 장미가 뭐야? 우리 어제 그런데 갔었어?"


내 말에 갖은 짜증을 내던 민기가 뭐? 하며 되묻는다. 뭔 장미? 하며 되려 나에게 묻는 민기의 목소리에 국자로 해장국을 휘저었다.


"새벽 1시에 거기서 50을 끊었단다 내가."


내 말에 민기가 아아, 하면서 바보 도트이는 소리를 내더니 또 왈칵 짜증을 낸다. 아 나 왜 다들 나한테 짜증이야.


-야 니가 그 시간에 갑자기 배고프다고 한우먹고 싶다고 쌩난리 쳐서 갔었잖아. 그 시간에 연 고기집 찾아내라고 우리한테 지랄해놓고 기억도 못하냐?
"한우집이라고? 이름이 뭐가 그래? 내가 그 시간에 50만원치나 먹었어?"
-옆자리 사람 마음에 든다고 같이 계산해준거도 기억 못하겠지. 암, 그럼, 김종현이 그렇지 뭐.


아, 진짜 술을 끊어야겠네. 미친 놈이네 나. 머리만 벅벅 긁다가 문득 생각난게 있어서 잠이나 자라며 전화를 끊으려는 민기를 붙잡았다.


"그럼 니가 나 업어서 데려다줬냐?"
-내가 미쳤냐?
"그럼? 동호인가? 또 누구 있었지? 설마... 지훈이?"
-뭐래. 고기 실컷 처먹고 또 술땡긴다고 3차 가자고 진상부리더니만. 그렇게 처마시더니 필름도 끊겼냐? 그 고딩 불렀던 거 생각안나? 너랑 같이 사는 엄마친구 아들.


내가아? 아 나 정말 술을 끊어야겠다. 술집으로 미자는 왜 불렀대. 개진상이라고 해도 할말이 없다. 아니 근데 황민현 이 시키는 왜 말을 안해?


-근데 걔 이름이 뭐랬지?
"민현이?"
-그래, 작년에 너네집에서 봤을 땐 잘 모르겠던데. 야, 사복입고 나오니까 끼깔나게 잘생겼더라. 걔 뭐먹고 그렇게 잘 컸냐?


하긴, 민현이가 좀 정변하긴 했지. 지방 소도시에서 공부 좀 한답시고, 아니 공부만 잘했던건 아니고- 노래도 잘하고 얼굴도 반반하긴 해서 인기도 많았지. 매년 반장에 우수상, 선행상, 봉사상 따위를 차고넘치게 받아오는 그런 성실하고 반듯한 모범생이었던 민현을 우리 엄마는 늘 자랑스러워했다. 아들은 난데, 남의 아들을 왜 본인이 자랑스러워하는건데. 그러던 엄마는 내 대학이 확정되고서 민현이도 서울로 보내라고 성화였다. 아들한테서 못다 이룬 꿈을 펼치고 싶은건지, 민현이를 뭐 판검사라도 만들고 싶은건지 엄마는 내내 민현의 어머니를 붙잡고 난 애는 더 넓은 곳으로 보내야한다는 둥 내내 서울 타령이었다. 고만고만한 대학에 붙어선 공부가 다 뭐냐 매일 술이나 마시는 날 보고 뭘 배우겠냐만은, 귀가 한없이 얇으신 민현이 어머니는 민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등떠밀어 지금의 학교로 전학시켰고 졸지에 황민현과 나는 같이 살게 됐다.



친한 친구끼리도 같이 살면 틀어진다던데. 아 질풍노도의 청소년이랑 같이 사려니 죽을 맛이다. 집에서 면학분위기 조성하래서 매일같이 벌이던 술판도 접고, 담배 냄새에 아주 질색팔색을 해서 집에선 담배도 못펴, 친구들 놀러오는건 작년 민기가 마지막. 게다가 진짜 어찌나 깔끔을 떠는지. 그새 키가 불쑥 자라서는 날 내려다보며 잔소리를 하는데. 아우 진짜. 내가 형이라서 참는다.


어쨋든 모든 의문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밥을 퍼고 해장국을 끌어안고 식탁에 앉았다. 아, 힐링된다. 한참 찹찹대고 먹다 민현에게 「해장국 땡큐」라는 문자썼다. 막 전송을 누르려는데, 에이 갈취한 3만원에 해장국비, 수고비 다 포함이지뭐. 하고 지워버렸다. 부지런히 해장국을 퍼먹다가 갑자기 훅- 뭔가가 지나갔다. 뭐지 이 쎄한 기분은. 아닐거야, 고개를 탈탈 흔들고서 다시 한술 뜨는데.


-야 어린 노무 시키가 너 왜 그러케 싸가지가 없냐. 어? 형이 말하면, 네에-하는 법이 엄써요. 어? 요새보면은 너 형이라고도 안하드라. 너, 진짜 그러다가 나한테 혼나아.


아 무슨 훈장질이야. 불쑥 떠오른 기억에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이다. 아니지 틀린 말도 아니다. 민현은 조곤조곤 사근사근거리며 세상 사람한테 다 친절하면서 나만보면 폭언에 한심하게 쳐다보지, 틈만 나면 잔소리하지, 막말하지. 그래, 한마디 하길 잘했네. 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해장국으로 고개를 박고있는데, 또 앞뒤가 잘린 필름처럼 훅 돌아오는 기억이 있다.


-황미년 너어, 왜 나한테만 못되게구냐구우. 징차 사람 섭섭하게.


엄머, 나 미쳤나봐. 들고있던 숟가락을 챙그랑 떨어뜨렸다. 아 진짜 이놈의 술! 술을 끊어야지. 술을... 깊은 반성을 하고 있으려는데 갑자기 드륵대며 핸드폰이 울리기에 움찔 놀라 어깨를 떨었다. 이시간에 누군가 싶어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아 옹성우다.


-종현아, 이제서야 짬나서 연락한다. 서울은 몇신지 모르겠다. 자고 있는거 아닌가 몰라.


성우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대화가 끊어질세라 안자, 전혀, 괜찮아.라는 답장을 쏟아냈다. 1이 없어지고 답장이 떠오르는 그 시간이 목마르게 길었다. 내 힐링푸드 해장국도 잊고 핸드폰을 부여잡고 화면만 쏘아보고 있었다.


-잘 지냈어?
-난 잘지내지. 요새 많이 바빠?
-어, 계속 바빴어. 연락못해서 미안ㅠㅠ
-아니아니 괜찮아.


대답 자판기처럼 난 성우가 마침표도 찍기 전에 답장을 쏟아냈다. 민기가 봤으면 아우 질린다 너.하면서 소름 돋는 표정을 하겠지. 하지만 나는 별거없는 내용에도 오랜만의 연락이 무슨 사랑고백이라도 되는 듯 미어지게 웃음이 났다.



사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술이나 퍼면서 인생을 낭비했던게 아닌데. 새내기 시절, 나름 부푼 꿈을 안고 꼬박꼬박 앞자리에서 성실하게 필기도 하고 교수지원센터 같은 곳에서 주최하는 특강같은데도 다니고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해보려했었다. 옹성우와 연애를 하기 전에는 말이다. 성우는 강의 때는 어디서 뭘하는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다가 해만 떨어지면 나타나서 과동기들을 우르르 몰고서 술집으로 향했다. 학교 앞에 안가본 술집이 없을정도로, 학교앞 상권에 혁혁한 공을 세웠었지. 성우는 타고난 말술에 워낙 말재간이 좋아서 그에게 홀린듯 와하하 웃다보면 있으면 모두가 어느새 취해있었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를 때쯤이면 성우는 또 날 그렇게 꿀떨어지는 눈으로 보며 샐샐 웃었더랬다. 그런 날들이 반복될수록 뭐야 얘가 날 좋아하나? 라는 생각에 멀찌감치 피하곤 했었다. 술 먹기 전 과동기들과 입을 털때는 또 그렇게 세상 공평한 인류애를 펴길래 좋아하는게 아닌가 난 늘 긴가민가 했었다. 한번은 성우가 취해서 뭔가 끈적한 눈빛을 보내길래 자리를 옮기려 일어서려던차에 덥석 손목을 잡아왔다. 새벽이 깊어 모두가 취해있었고 주인아줌마만 카운터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잡힌 손목이 아파 빼내려고 바르작대는 사이 성우가 대뜸 입술을 갖다댔다. 뭐,뭐야, 하며 당황하는 사이에 입술을 파고든 성우는 원래 키스가 이런건가 싶게 정신을 쏙 빼놓는 스킬을 시전해 나를 파르르 떨게 했었다.



그렇게 낮에는 코빼기도 안보이다가 밤이면 술마시고 키스나 하며 한학기가 지났다. 종강파티에서 성우는 유쾌하게 웃으며 유학을 간다고 했었다. 아니, 저런건 나한테 먼저 이야기해야하는거 아닌가. 아연실색해있는 사이 그간 학교에 안나온게 다 그 유학준비 때문이었다고 머쓱하게 웃었다. 저 미친 새끼가 진짜. 꼭지돌게 열받는 내가 폭음을 하고 널부러져있을 때 성우가 내 손을 꼬옥 잡으며 그랬었지. 장거리연애가 힘들겠지만, 기다려달라고. 자주 연락하겠다고. 그렇게 성우가 유학이라는 걸 떠난지 1년이 지났다. 그사이 날보러 한국에 들어오는건 고사하고 처음엔 자주하던 영상통화도 뜸해지고 급기야 문자가 이렇게 일주일에 한번 올까말까한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엔 롱디가 힘들고 보고 싶어서 술을 마시다, 연락없는 옹성우 때문에 빡쳐서 마시고, 요즘은 그냥 술을 안마시면 허전해서 마시고. 알콜릭처럼 매일같이 술을 마시니 어제와 같은 사단이 난거겠지. 내 마음이 이렇게 헛헛하다고, 옹성우야.



-보고싶다 종현아



그럼에도 성우의 문자 한마디에 내 마음은 사르르 녹고야 만다. 텅 빈것 같던 마음이 급속도로 채워지며 입가로 웃음이 피었다. 나두! 나두 엄청 보고싶어.라는 답장을 쏜살같이 보냈다. 다정한 성우의 목소리가 들리는것 같아 발을 구르며 웃다 까르르하는 웃음소리에 내가 놀랐다. 혼자 있는 집임에도 뭔가 부끄러워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이제 밥먹으러 들어간다는 성우에 그래 얼른 먹어 맛있게 먹고 몸 조심하고 학교 잘다니고... 구구절절 답장을 썼지만 성우는 식사 중인지 메세지 옆의 1도 없어지지 않는다. 한참 답장을 기다리다 한숨처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해장국을 한술 뜨려는데 아, 다 식었어. 민현이가 있었다면 밥은 안먹고 문자질이라고 승질이란 승질은 다 냈겠지. 다시 가스레인지로 들고가서 냄비를 팔팔 데우며 씁쓸해진 입가를 쓸어봤다.





+ 퐈하하핫 현생에 충실하겠다 그래놓고 이렇게 빨리 와서 부끄럽네요... 주말에 밀린 영상 몰아보다 막막 또 불타올라 무계획으로 시작하고 봅니다. 주말이니까요. 뻔하지만 그냥 이런 년북 써보고 싶어쒀요ㅠ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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