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빠 먹어야 돼 너. 이리 와."

"자깜만. 나 압빠랑 얘기하구 이짜나."


말이나 못하면. 민이는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바닥을 내보인다. 민이의 마음 속 넘버원은 매일 씻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저가 아닌 바로 민현이었다. 제 빠방을 로보트로 변신 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슈퍼맨. 육아의 현실을 제대로 느끼기 전엔 나도 꽤 순진한 부모였다. 저렇게 단호히 기다리라고 하면 퍽 오래도 기다렸었지. 어디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아이의 육아에 있어서 '빨리' '얼른' 등의 재촉하는 말투는 좋지 않다고 했던 걸 주워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은 자연스레 저를 사악한 부모로 만들었다. 싫다는 애를 붙들고 약을 먹인다던가, 치카치카를 시킨다던가, 원하는 장난감을 차지하기 위해 생떼를 부리는 아이를 모른 척 해버린다던가 말이다.


"아빠 힘드셔. 그만 괴롭히고 이리 오시지."

"티러!"


네살배기 아이가 제일 까칠해지는 순간이다. 로보트의 변신을 위해서라면. 그 조그만 게 싫다는 의사표현은 아주 강력해서 눈에서 뿅 하고 레이저가 쏘아 나간다. 요즘은 부쩍, 싫어! 안 돼! 하지마! 아냐! 같은 부정적인 말투가 확연히 늘었다. 네 살은 다들 그렇다고 하던데. 훈육은 해도해도 끝이 없구나. 그렇게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다가도 소리를 크게 낼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한 템포 참아본다. 그런 나의 깊은 속도 모르고,


"민이, 빠빠 다 먹고오면 해 줄 거야."


민현의 한 마디에 쫄랑 식탁으로 뛰어오는 민이다. 얄미워 죽겠어. 요 애기나, 저 애기나.




"안 돼."

"흐아아앙. 아티!!!! 아티!!!!!"

"재환아, 그냥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만 사주자."

"형도 혼나."


아주 저만 악마가 따로 없다. 자꾸 버릇 들이면 안 된다니까. 민현은 항상 속 좋게도 민이의 속셈에 홀랑 넘어가버리곤 했다. 밖에서는 그렇게 거절도 깔끔하게 잘하면서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는 아예 다른 자아가 튀어 나오나보다. 그렇게 민이에게 당하는 게 본인이면서도 아직 부족한 건지. 


"아티는 안 돼. 집에 에이스도 있고 댄디도 있고 루크도 있잖아."

"아냐! 아티!!"

"스읍, 황 민."

"민아, 예쁘게 말해야지. 아티 사주면 우리 민이 카봇 네 개나 있는 건데? 이제 아티가 마지막,"


등이 시원했다. 손 매운 거 봐. 옛날의 맹하기만 하던 재환은 눈치가 언제 저렇게 빨라졌지, 하는 생각이 들만큼 똑부러지는 성격으로 변했다. 저를 매섭게 쳐다보는 재환의 눈이 지금 제 종아리 옆에 딱 붙어있는 제 피붙이와 너무도 붕어빵이라서 웃음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한 대 더 얻어 맞기는 싫어 겨우겨우 입꼬리를 내렸다. 


"형! 안 된다고 했다. 손목 계속 아프고 싶어?"

"그래도 민이가 저렇게 갖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계속 실랑이를 하다가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우아앙, 하고 뱃심 좋게 우는 애를 독하게 뒤로하곤 민현의 손을 끌고와 걸었다. 하지만 우리 형. 군말 없이 따라올 그런 사람은 아니지. 내게 엉거주춤 끌려오며 다시 또 시작되는 설득.


"재환아. 근데,"

"형이 문제야. 이제 네 살이나 돼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안 된다구."


어느새 완전히 제 아들 편에 서버린 민현이었다. 잡고있던 손을 언제 놓았나 싶었더니 언제 또 저기까지 가버렸는지.


두 사람은 아주 비밀스런 대화를 하는 듯 보였다. 민현은 제가 들고 있던 장난감 박스를 민이에게 건네며 하이파이브를 짝 해댔다. 그리고는 민이의 주먹만한 엉덩이를 통통 때리며 출발 신호를 보내는 거다. 뭣 때문인지 꽤나 자신감이 생긴 듯한 민이가 제 몸집만한 장난감 박스를 부둥켜 안고선 뚜벅뚜벅 잘도 걸어온다. 시켰네 시켰어. 뒤에 황민현 업었다 이거지?


"짼 압빵! 민이 아티 사주데여. 압빠 말 잘 들으께요."

아, 웃으면 안 되는데 또.


"음...그러면 민이 치카치카도 열심히 할 거야?"

"웅!"

"아빠한텐 네 해야지, 민아."

"녜!"


민현 아빠의 말씀이라면 껌뻑 죽는다. 민현의 말이 끝날세라 재빨리 제 말을 고쳐 말한다. 눈치 빠른 건 진짜 형이랑 똑같다니까.





2:1 싸움에 결국은 내가 또 져버렸다. 제가 모으는 카봇 컬렉션 중 제일 최근에 나온 모델을 얻어내고 나니 한층 기분이 좋아진 민이는 신난다며 내게 박스를 뜯어달라고 자리에서 방방 뛰어댔다. 위험해. 민현 아빠랑 손부터 씻고 오세요. 


황민현. 어디 된통 당해봐라. 조금은 못된 마음이긴 하지만 내가 카봇 조립에 미숙한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카봇 제작 회사는 진짜 천재들만 모였나,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애들 장난감 퀄리티를 무슨 이정도씩이나. 그 덕에 하루종일 키보드를 두드리고, 퇴근해서는 민이의 슈퍼맨이 되어주기 바쁜 민현은 결국 터널 증후군이라는 병까지 얻었다. 게다가 아이의 성별이 남자이다보니 수차례 카봇 변신을 시키고선 꼭 한바탕 레슬링을 해야지만 놀이의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손목이 시큰시큰하다는 민현이 안쓰러워 저도 조립 방법을 배워보려 하긴 하였으나 그것도 사실은 시도조차 불가능에 가까웠다. 짼 압빠는 만디디마!  하는 민이 덕분에. 그 말을 무시라도 하는 날엔 아주 사단이 난다. 이걸 기뻐해야 돼, 말아야 돼.


"빠방."

"공격!! 발차기!!!"

"시더. 빠방!"


이번에는 또 빠방이다. 차로 바꿔달라는 민이의 관심을 돌리려 회심의 발차기 스킬을 펼쳤지만 역시나 누굴 닮았는지 앙 다문 입술이 너무나도 단호하다. 제 행동을 재촉하는 민이의 손길에 다시 한 번 로보트의 관절을 합체시키는 민현이었다.


"으흥흥, 형이 형 무덤 판 거야. 이제 일주일은 맨날 아티만 해달라고 할 걸."

"진작 재환이 말을 들었어야 됐는데."

"형은 혼 좀 나야 돼."


그렇게 붕붕붕.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번. 제 발 언저리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던 민이는 어느새 제 빠방을 가져다 민현의 눈 앞에 쓱 내밀었다.


"로봇뚜!"


제게 카봇을 허락하지 않는 민이의 행동에 기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고 생각했던 것은 아주 사치스러운 고민이란 걸 깨달았다. 고마워 민아. 아빠한테 카봇 안 줘서.




시간적 배경이 아주 무작위로 휙휙 바뀔 거라서 임신중인 짼이 나오다가도 그 다음 편엔 아이가 쑥 커져있을 수도 있구요 네..그렇습니다. 개연성 없어요.   

@Ha_lan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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