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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으로 맺어진 계약은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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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시가 이스콰이를 향해 불을 뿜었다. 당연하게 그 불길은 그의 등 뒤에 있던 진 준과 아론에게도 뻗어왔다. 휴고가 빠른 움직임으로 아론을 끌어 당겨 불길에 휘말리는 건 피했다. 진 준도 두 사람에게 바짝 붙었다. 하지만 불길을 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이스콰이!"

 새된 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무리 그가 펜데타 용종이어도 지금은 사람 모습이었다. 다치면 피를 흘리고 멍도 드는 사람 모습이었다. 아론은 내려 앉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휴고가 그 가슴을 손으로 막았다.

"헤엑! 아롱! 심장 터지갯써!"

"이, 이스콰이가… 불길에…!"

 아론이 허우적 거리는데 바닥이 진동하며 나무가 쓰러졌다. 세르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일행을 덮쳤다. 무시무시한 눈동자가 세 사람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아론은 무릎이 덜덜 떨렸다. 뒷걸음질 치고 싶은데 불길속에 있을 이스콰이가 걱정돼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살아있는 개의 냄새로군."

 낮고 웅웅 거리는 목소리가 스멀스멀 두려움을 몰고왔다.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아론의 어깨가 뒤로 밀렸다. 진 준이 검을 뽑고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그간 보지 못했던 증오가 서려있었다. 아론은 머릿속이 텅빈듯했다. 타오르는 불길만 바라보았다.

"휴, 휴고. 이스콰이를 구…."

 이스콰이를 구해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근처에 휴고가 없었다. 휴고는 진 준의 곁에 있었다. 아론은 두려움에 떨며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다. 이스콰이가 무사하길 바라면서.

"널 알고 있다. 잿빛늑대."

"뭐, 영광이라고 해야되나."

 진 준은 손에 든 검을 더 꾹 말아쥐었다. 진 준이라고 눈 앞에 있는 거대한 토룡종이 두렵지 않은건 아니었다. 아무리 분노와 증오에 눈이 멀었다지만 10년 전 처럼 마구잡이로 뛰어들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사실 이런 평정심을 유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함께 와 준 동료들 덕이었다.

"펜데타의 뿔을 이리내."

"가져가. 저 불구덩이에서."

 진 준은 용종의 표정을 읽을 줄 몰랐다. 하지만 분명 저 눈빛은 분노였다. 세르시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그와 동시에 이스콰이가 불길속에서 나타났다. 아론은 눈 앞의 토룡종이 분노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이스콰이!"

 화상을 입거나 아팠을까 걱정했는데 그는 멀쩡했다. 입고있던 가죽 갑옷만 조금 불에 그을렸을 뿐이었다. 안심이 되는 한편으로 당장 불길 밖으로 나서지 않은게 원망스러웠다. 밖에서 이렇게 전전긍긍하면서 그를 부르고 기다렸는데!

"왜 이제서야 나와요!"

"넌 정말 내 걱정 엄청하네."

"이게 재밌어요?"

"밤이 잘 익었어."

 속껍질까지 잘 까진 노랗게 익은 밤이 이스콰이의 손에 들어 있었다. 잘 익은 밤냄새가 다디단 군고구마와 비슷했다. 밤을 든 그는 무표정했으나 그것을 아론의 입가에 가져가며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론은 그것을 거부 할 수 없었다. 남은 하나를 자신의 입에 넣었다.

"이스콰이!"

 세르시가 우렁차게 그를 불렀다. 반지를 내놓으라는 말에 이스콰이는 배가 찢어져라 웃기 시작했다. 이스콰이가 이렇게나 크게 웃는 것은 처음 봤다. 진 준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아, 치졸한 밀고자새끼, 지 아내한테도 말을 안했나보네. 그 값싼 주둥이로 다 말하고 다녔을 줄 알았는데."

 이스콰이는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여주었다. 마치 그 자신의 반지를 자랑하듯 했다.

"그걸 내 남편에게 가져다 주고 널 잡아먹어 버릴테다."

 이스콰이는 시종일관 웃긴 이야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세르시의 말에 웃어젖혔다. 거기엔 한 치의 조롱도 담겨있지 않아서 더 조롱처럼 느껴졌다. 세르시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 이스콰이를 죽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소름돋는 가정에 아론은 슬쩍 이스콰이의 손을 잡았다.

"네 남편이 이걸 찾는 이유? 내가 찾아오라고 했거든. 그럼 너는 살려주겠다고 했지."

"뭐라고?"

 세르시가 이전보다 더 큰 분노를 담아 물었다. 놀란건 이스콰이의 아군인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스콰이가 '치졸한 밀고자'에게 반지를 찾아오라고 했고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그것을 시켰으며 그 아내는 진 준에게 그 일을 맡겼다는 뜻이었다.

"안타깝게 됐어. 다 죽겠네."

 내가 먼저 찾았으니까. 이스콰이가 웃자 세르시가 다시금 불을 뿜어냈다. 잠자코 지켜보던 소년 휴고가 높이 뛰어올라 세르시, 토룡종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아론은 경악했지만 휴고는 아무생각이 없어보였다. 옆에 있었다면 등짝이라도 먼지나게 뚜드렸을텐데! 저런 위험한 짓을 서슴없이 하다니, 미쳤다, 미쳤다!

 세르시가 산 아래, 진 준의 고향 방향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워낙 큰 몸집 덕분에 오래 구르지는 않았다. 이스콰이가 자신의 등 뒤에 꽂혀있던 그림자 가르기를 휴고에게 던져주었다. 재주도 좋다. 날아간 검을 턱 하니 잡아낸 휴고가 그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진 준 또한 황급히 휴고를 쫓아갔다. 아론도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스콰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스콰이, 빨리요!"

"휴고가 나서기로 했으니 내가 남아야지."

 둘이 이 싸움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하지만 네 사람은 딱히 작전을 세우지 않았다. 진 준이 자신이 세르시를 죽이게 해달라는걸 휴고가 극구 말렸을 뿐이었다. 당연했다. 그의 몸엔 언제 발동 될지 모르는 검은 가시가 심긴 상태였고 그는 언제든 이성을 잃을 수 있었다.

"상대는 용종이에요! 휴고 혼자서는 안돼요. 아직 어리잖아요!"

 어리다기 보다는 어리숙하다에 가까웠다. 물론 전투에 능숙하고 자신보다 오래 살았다는 것도 알고있지만 아는거랑 불안한거랑은 달랐다.

"휴고도 목을 베는 혈맹이야."

"나도 알아요, 그치만…!"

"휴고보다는 저 늑대새끼를 신경써."

 이스콰이가 턱짓했다. 아론보다 먼저 달려갔던 진 준이 멀지 않은 곳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냥 서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검을 쥔 오른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마.

 이스콰이는 진 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진 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론과 이스콰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려있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이성과 본성이 한 데 뒤섞인 혼돈이었다. 아론은 소리쳤다.

"진 준! 검을 손에서 놓으면 안돼요!"

 자신이 검에 새긴 축복은 늑대의 피를 억누르고 스스로를 해하려는 저주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끌어올린다. 그러니까 검을 놓지만 않으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진 준의 동공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늑대의 피가 그의 이성을 잡아먹고 있었다. 아론은 조심스럽게 마법을 써, 주변의 나무 뿌리로 그의 손을 결박했다. 검을 더 꽉 쥐도록. 그러자 그것을 알아챈 진 준이 우악스럽게 나무 뿌리를 마주 잡아 뜯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검을 턱 끝에 가져다 댔다.

"안 돼, 진 준!"

 아론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이스콰이가 움직였다. 그는 진 준의 손을 잡아 말렸다. 이게 그가 남아있던 이유였다. 세르시가 분명 저주를 발동시킬테니 휴고, 이스콰이 둘 중 하나는 진 준이 스스로를 죽이지 않도록 싸워야했다.

 진 준이 팔을 크게 휘둘러 이스콰이를 떨어뜨리고 다시 스스로의 목을 베려 했다. 이스콰이는 재빨리 거리를 좁혔다. 그것을 반복했다. 아론도 최대한 진 준을 구속하려고 했다. 막 진 준이 이스콰이를 다시 떨어뜨렸을 때였다. 진 준이 쥐고 있던 검을 날렸다. 분명 이스콰이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아론을 향했다. 진 준의 손에서 벗어난 검은 아론을 향해 맹렬히 다가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아론은 마법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놀란 숨이 턱 끝에 매달렸다.

"헉, 헉…."

 검이 진 준의 손을 떠났다. 굳건한 의지를 지키고 있던 말뚝은 땅에 처박혔고 진 준은 이성을 잃었다. 늑대의 피가 그를 잠식했다. 그는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이스콰이는 그것을 말렸다. 어떻게든 진 준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둘 수 있다면, 검을 다시 그의 손에 쥐어 줄 수 있다면…! 아론은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검을 들고 틈을 엿봤다. 그 순간 늑대의 본능이라는 게 하나가 떠올랐다.

"아우우!"

 아론이 어설픈 하울링을 시작했다. 이스콰이가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곧 진 준이 아론을 따라 하울링을 하며 상황이 바뀌었다. 진 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울링에만 집중했다. 늑대는 무리의 하울링을 반드시 함께해야 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진 준은 아론 일행을 자신의 무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다행이 먹혔다!

"아우우, 아우우우."

 그 순간 이스콰이가 진 준을 결박하는데 성공했다. 아론은 빠르게 마법으로 진 준을 묶었다. 혹시 혀라도 깨물까 재갈도 물렸다. 이성을 잃은 진 준의 저항이 심했지만 이스콰이를 떨치는데 쉽지 않아보였다. 검을 든 아론이 빠르게 두 사람에게 가까워졌다.

"이스콰이, 이 검을 진 준과 가까이 둬 주세요. 이성이 잠깐은 돌아 올…."

"아론!'

 멀리서부터 메아리를 타고 들려온 이름. 휴고의 목소리였다. 아론은 재빨리 휴고를 찾았다. 휴고가 다급하게 부르기에 세르시가 이쪽으로 오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크고 무시무시한 발톱 중 하나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아론을 향하고 있다.

"아론, 피해!"

 멀리서 들린 휴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고 뾰족한 무언가가 날아왔다. 숨을 멈추었다. 그러면 이 상황도 멈출 것처럼.

"젠장!"

 이스콰이가 드물게 당황하며 손을 뻗었지만 그것은 너무 빨랐다. 미처 피하지도 못했다. 검은 가시 저주는 정확하게 아론의 왼쪽 가슴을 뚫고 파고들었다. 파고드는 그 힘에 못이겨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서 쥐고 있던 '굳건한 의지를 지키는 말뚝'을 놓치고 말았다. 아론은 황급히 셔츠를 잡아당겨 가슴을 내보였다. 검은 가시가 박힌 자리에 가시나무가 새겨졌다. 멀리서 세르시의 포효가 웃음처럼 골을 울렸다. 비웃고 조롱하는 포효였다.

"어…."

 내가… 검은 가시 저주에 걸렸다고? 그것을 인지한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양 손이 의지를 벗어나 목을 움켜쥐었다.

"퀼! 크윽…!"

 이스콰이는 단숨에 진 준에게서 벗어나 아론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서둘러 아론의 손을 결박했다. 그동안에 진 준이 자신의 몸을 감싼 나무가지와 뿌리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이었다.

"말뚝을… 말뚝을 내 몸에 박아."

 온 몸을 덜덜 떨었다. 곧 이로 혀까지 씹을 것 같았다. 이스콰이는 무표정하고 침착하고 깊이 호흡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침착하지 않다고 느꼈다. 살다보니 당신의 이런 표정도 보게 되는구나.

"검에 새긴 축복이 날 지켜줄테니까… 나 혀 씹을 것 같아, 빨리!"

 곧 진 준이 다시 스스로를 해하려 할 것이다. 이스콰이는 빠른 동작으로 아론의 손을 놓고는 보라색 스카프를 풀어 입에 가져다 댔다.

"세게 물어."

 아론은 자신의 목을 붙들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흉터가 있으니까 거기에…. 빗나가면 안돼."

 입가의 스카프를 있는 힘을 다해 물었다. 목을 감싼 자신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숨통이 막히며 시야가 흐려졌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진 준은 자신을 감고있던 모든 나뭇가지들을 제거하고 아론과 비슷한 모습으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스콰이는 떨어져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아론은 고통을 견디려 재갈을 더 꽉 씹었다. 무서워. 검에 찔려봤기 때문에, 그 고통을 알아서 더 무서웠다. 검 끝이 아론을 향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악!"

 비명은 다른 곳에서 터져나왔다. 이스콰이는 검을 진 준에게 찔러넣었다. 아론은 그것을 확인할 새도 없었다.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더니 숨통이 트였다. 양팔이 결박되었다. 눈을 뜨려고 여러번 깜박였다. 맺혀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따라 주륵주륵 흘렀다. 가쁘게 숨을 고르자 위에서 이스콰이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쫄았어?"

 그가 웃었다. 얄궂은 그의 웃음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안심만 됐다. 옆에서는 불이 나고있고 진 준은 고통에 몸부림 치는데 마음이 놓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곧 끝나."

 세르시의 포효, 비명, 굉음이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진 준은 자신의 본성과 이성을 두고 싸우며 몸에 박힌 검을 뽑으려고 애썼다. 혼돈속에서 아론은 잠깐 평화를 누렸다. 이스콰이의 그늘에 숨어 그것을 만끽했다. 흥얼흥얼 이스콰이는 콧노래를 불렀다. 그냥 안심이 됐다.

 메아리와 함께 휴고의 포효가 길게 이어졌다. 이어지는 하울링에 진 준이 응답했다. 천천히 결박이 풀리고 아론은 자신의 손이 더이상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려있던 재갈이 풀렸다. 비로소 자유였다. 아론은 이스콰이의 목에 매달렸다. 이스콰이는 그의 무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세웠다. 다리가 후들거려 똑바로 서있기 힘들었다. 이스콰이는 아론을 진 준의 근처까지 부축하고는 진 준의 어깨에 박혀있던 검을 가차없이 뽑았다. 피가 진 준의 어깨를 적셨다. 아론은 자신이 입에 물었던 이스콰이의 스카프로 진 준의 어깨를 눌렀다.

"으윽… 고맙습니다, 퀼 공."

 이스콰이는 대꾸 없이 산 아래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진 준의 어깨에서 뽑아 든 검을 들고서.

창작 소설 쓰는 쉰쉰(프사는 우리집 짹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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