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는 어느곳에서도 리네이밍되거나 재창작된 적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혼 일기


4장 : 모두 다 기억해요




지민은 자신이 안하무인이며 성질이 엄청나다고 생각하지만(대부분의 사람들도 지민을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정국의 눈에 그런 지민의 행동들은 대체로 귀엽게만 보였다. 전정국은 그보다 더 엄청난 것들을 많이 보며 살아왔기 때문에. 전정국이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난 우성 알파임에도 나름의 인간성을 타고난 것은 그간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 컸다. 저렇게 되진 말아야지. 그 마음을 먹게 하는 사람들이 이 집안엔 참 많았거든. 단지 까칠하거나 불같은 성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의, 도덕, 예의란 것은 생전에 가져본 적도 없는 사람들. 위선은 잘만 떨면서 자기들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눈 하나 깜짝 않고 할 사람들. 그게 바로 태생적으로 쥐고 태어난 권력이라 믿는 짐승 같은 알파들.


그 사실을 잠시간 잊었던 건 생각보다 달콤했던 결혼 생활 탓이다. 잊었다기보단 무시하고 있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정국의 앞에 앉은 사람에게선 감추지 않는 오메가의 페로몬이 풍겼다. 노골적일 정도라 우성 알파인 정국이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정국은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이 사람을 그저 오늘 상대해야 할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생각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입에서 임신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진.


‘가장 최근 러트가 언제셨어요?’


어째서 오늘 처음 보는 사람과, 그것도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만나 이딴 질문을 듣고 있어야 하지. 무슨 상황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결혼할 땐 어떻게든 갈라놓을 것처럼 굴더니 막상 결혼 이후엔 손 놓은 듯한 집안 어른들이 이상하다곤 생각은 했었다. 다만 언젠가 임신에 대한 압박으로 돌아올 줄 알았지.


‘우성 임신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확인서에요.’


다른 사람과 애를 가지라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사람이면 어느 정도 상식선은 지켜야 할 거 아냐. 이건 무슨 막장 드라마도 뛰어넘는 극단적인 전개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상대방이 내민 서류에는 손끝도 대지 않았다. 대신에 정국은 답답한 속을 커피로 축였다. 상대는 그런 정국이 고심 중인 걸로 받아들였는지 계속해서 임신 얘기를 해댔다. 지금 전정국이 애나 갖자고 여기까지 나온 걸로 보이나. 정국은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중간에 툭 짤랐다.


‘왜 이런 걸 하세요?’


나름의 예를 갖춘 말이었다. 물론 기저에는 혐오감이 짙게 깔려있었지만.


‘누군들 대한민국 최고 알파의 자식이 낳고 싶지 않겠어요.’

‘저 결혼했는데요.’

‘알아요. 전국민이 다 알잖아요.’


하. 점점 머리가 뜨거워졌다. 사람이 너무 큰 분노에 들이닥치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버퍼링이 온다. 정국은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그래 봐야 우성 알파인 정국 앞에선 맥도 못 추릴 텐데 상대방은 담이 센 건지 아니면 정국의 성격을 좋게 본 건지 제 할 말을 잘도 이어갔다. 보통 지민이 하는 말들은 별 대꾸 없이 잘 듣는 정국이지만 그 사람의 말은 듣고 있기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아무래도 열성이 우성을 임신할 수는….’

‘입 다물어요.’


여전히 겁먹지 않고 웃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다. 어차피 이 자리를 뜨면 더 볼일도 없을 테지만. 정국은 회사로 들어가자마자 회장실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는 보지 말죠.’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나던 정국이 순식간에 비틀대며 의자를 짚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처음엔 빵 몇 쪼가리 먹은 속에 쓴 커피를 들이부어서 그런가 했다. 애써 정신을 차리며 걸음을 옮기던 정국은 이내 완전히 주저앉아 버렸다. 그깟 어지럽고 속이 아프고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삽시간에 달아오르는 몸을 느끼며 정국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러트 사이클에도 꼬박 꼬박 약을 챙겨 먹으며 페로몬은 칼 같이 절제하는 정국에겐 보통 때라면 일어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어지러워 흐려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상대가 보였다. 괜찮냐는 말 하나 건네지 않는 얼굴은 어쩐지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사람도 없어 조용한 공간을, 정국은 숨을 헐떡이며 둘러봤다. 도와달란 말 한마디 내뱉기가 힘겨울 만큼 어지러운 시야에 낯설지 않은 검은 정장들이 눈에 띄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기가 어떤 함정으로 걸어 들어왔는지를.


그 순간에 정국은 지민을 생각했다. 그리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정국은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약 기운과 겹쳐진 돌발적인 러트 사이클의 영향일 것이다. 그래서 그 날의 정황을 기억하는 사람은 저뿐이라는 사실이 지민은 아주 억울했다.


그날 박지민은 여느 때처럼 집에서 쉬고 있었다. 당시 지민의 기분은 늘 좋질 않았다. 몇 년을 쉬지 않고 활동하다가 집에만 있으려니, 물론 처음엔 좋았지만 슬슬 노는 것도 지쳐갔고 좀이 쑤셨다. 활발히 활동하는 태형이 부럽기도 했다. 꼭 집에만 있는 탓은 아니었다. 집에만 있는 자신의 사용가치에 대한 객관화가 되기 시작한 즈음이었달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할 땐 드라마라도 찍는 기분에 도취되어 있었는데, 무섭도록 조용하다 못해 싸늘한 정국의 집안 분위기에 어떤 무력감마저 들어가던 시점이었다.


[지민 씨 정국이 거기 있어?]


윤기는 지민에게 원래대로라면 질부라고 해야 했지만 남들 볼 때가 아니면 그냥 지민 씨라고 불렀다. 별 거 없는 문자였지만 순간 지민의 기분은 아주 쌔해졌다. 박지민은 언제나 제 촉을 100% 신뢰했다.


[회사에 없어요?]

[아아 알겠어]

[뭔데요]


당장 비서실 전화만 눌러도 알 수 있는 전정국의 행방을 왜 민윤기가 몰라? 지민이 미심쩍하는 동안,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신경 쓰지 마 별일 아냐]


별거 아닌 게 아닌데 뭘. 지민은 확신했다. 전정국이야 어디든 지 맘대로 나다닐 수 있는 정도의 직위긴 했지만, 이렇게 윤기에게서 연락이 온 적은 처음이었다. 요즘은 줄곧 기분이 찝찝하고 불안했다. 초조해져선 손톱을 뜯던 지민이 정국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있어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예상을 빗나가질 않는 연결음을 듣자마자 지민은 당장에 겉옷을 챙겨 입었다. 이 씨발.







박지민은 상상력이 풍부했다. 지난 7년간 연예계 생활을 하며 볼꼴 못 볼 꼴 다 보아온 탓이라. 그동안 받아보던 영화며 드라마 시나리오의 극단적인 전개들도 한몫했다. 천성이 비관적이라 늘상 최악을 생각하는 탓도 컸다. 그래서 지민은 윤기를 닦달해 겨우 알아낸 주소로 갈 때까지도 온갖 상상을 했다. 하필 그가 보내준 주소에 떡하니 G호텔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어서 더 그랬다. 진짜 이걸 죽여야지. 온갖 쌍욕을 하며 엑셀을 밟아 도착한 호텔에서 지민은 얼굴을 아는 정국의 회사 직원을 반쯤 족쳐 호텔 방으로 달려갔다. 스위트룸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만 내렸을 뿐인데도 복도에 페로몬 냄새가 너무 짙어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지민은 이대로 돌아갈까도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제 눈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양가감정이 들었다. 어차피 박지민이 이 페로몬 향을 맡은 이상 진작에 엎어진 물이었다.


그후 지민이 마주한 풍경은, 여기로 오는 동안 상상한 최악보다 더 최악이었다. 본래 우성 알파들은 성관계에서도 거친 편이었다. 번식과 성적인 우월감으로 평생을 사는 부류들이라 그런가. 물론 평소에는 그들도 나름 자제를 했지만 확실히 러트가 닥쳤을 때의 관계는 차원이 달랐다. 동물적인 욕구만이 남은 포식자들 같달까.


물론 지민은 단 한 번도 정국에게서 그런 위압적인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우성 알파라는 놈과 수도 없이 떡을 치고 결혼까지 했지만 정국은 지민이 대충 겪어봤던 알파들과 비교해도 무척이나 젠틀했고 다정한 편이었다. 그래서 어느새부턴가 박지민은 전정국이 원래 별종이겠거니 생각해왔다. 전정국이 제게 맞춰주었던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 하고.


그때의 정국을 지민은 잊을 수가 없었다. 침대 위에 맨몸인 채로 다른 사람과 엉켜있는 정국은 무척이나 흥분해있었다. 미쳐 날뛰는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방은 온통 우성 알파의 독한 페로몬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지민 같은 열성은 단 몇 분도 견딜 수 없는 공기. 지민은 그동안 정국이 제 앞에서 얼마나 알파처럼 굴지 않기 위해 애썼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누구보다 강한 페로몬을 지닌 전정국의 본성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나서야.


실은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성격이 죽어도 못 그랬다. 지민은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겨우 말소리를 꺼냈다.


‘너 지금 뭐 해?’


그제야 정국이 돌아봤다. 풀려서 초점조차 흐려진 눈은 평소 지민이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정국이 제정신이 아니란 것쯤은 말 안 해도 알았다. 그래서 더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처음 본 전정국의 낯선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 같아서. 근데 그 앞에서 도저히 어떡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도전장 내미는 기분으로 이 결혼을 한 박지민에게도 더한 최악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믿고 싶지 않아서.


‘…미쳤냐?’

‘…….’

‘씨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하… 하…. 낮은 숨소리만 반복됐다. 그 사이 얼굴도 모르는 오메가가 욕지거리를 하며 옷을 주워 입고 나갔다. 그 사람의 몸에서 나는 정국의 페로몬 냄새에 지민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제 3자가 나가자 스위트룸에는 정국과 지민만이 남게 됐다. 아니, 어쩌면 박지민이 제3자인가.


정국의 땀으로 젖은 머리칼과 몸을 보며 지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메가는 어쩔 수 없는 오메가였다. 정국이 뿜어내는 페로몬은 이제껏 지민이 경험한 적 없던 수위였다. 이 상황을 피하려 지민은 일단 이곳을 나가려고 했다. 어차피 곧 전정국에게 잡혀버렸지만.


원래도 힘이 세긴 했지만 정국은 평소와 비교해도 초월적인 힘으로 지민을 잡아당겼다. 덕분에 지민은 스위트룸 문까지는 가지 못하고 벽으로 밀쳐졌다. 차라리 그냥 눈깔이 돈, 이성 따위 남아있지 않은 알파였으면 좋겠는데 눈앞의 정국은 애매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미쳐있는데 언뜻언뜻 지민이 아는 그 표정이 스쳤다. 울 것 같기도, 그저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정신이 나갈 거면 완전히 나가든가. 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는데.


‘놔-’

‘…….’

‘놔, 이, 미친 새끼야.’


지민은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헛손질만 했다. 이 순간에도 정국에게 흥분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 정도였다. 잡힌 손목도 너무 아팠다. 욕을 해봐야 정국은 꼼짝도 안 했다. 뜨거운 숨을 사이에 두고, 결국 지민이 고개를 떨궜다. 얜 지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붙잡고 있는 걸까. 이 상황이 정국이 자초한 게 아니란 것쯤은 암만 지민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무력해지는 거다. 전정국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이 어마어마한 몰상식과, 아마 그 핏줄의 족쇄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전정국의 태생이. 그런 전정국과 결혼한 자신이. 어쩌면 사랑까지 한 박지민 참 인생 조졌구나 싶어서. 그 프러포즈, 그냥 말장난처럼 넘겼어도 되는 건데. 그냥 그때처럼 연애나 했으면 얼마 못가 질렸다고 헤어지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난 너랑 뭐가 더 하고 싶었던 걸까.


‘왜 너랑 결혼해서 이 꼴을 보고….’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이렇게 허탈하고. 이렇게 심장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거 같고. 우성 알파도 못 낳을 날 탓하게 되고. 내가 열성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애초에 결혼 따위를 하겠다 마음먹은 것부터가 원흉이었고 모든 재앙의 시초였다. 지민은 제가 답지 않게 어리석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각인해요 우리.’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정국이 지민을 으스러지게 안고 중얼거렸다. 지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박지민이 전정국 앞에서 운 건 맹세코 그때가 처음이었다.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부모님을 보고도 씩 웃던 박지민인데 그저 눈앞의 정국을 보는 게 바늘로 심장을 쑤시는 것만 같았다.


‘응? 하자….’


정국의 얼굴이 애처로웠다. 흥분과 서글픔이 섞인 얼굴은 정국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약기운 탓인지도, 아니면 정국이 감춰오던 속내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건 어차피 저는 이 집안에서 바라는 아이는 낳지 못할 거란 사실이었다. 지민은 헐떡이며 울었다. 자꾸만 품에서 벗어나려는 지민을 정국이 꽉 끌어안았다. 거센 몸이 불안하게 떨렸다.


‘……이혼해.’


전정국은 약 기운 탓에 전혀 기억 못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혼이란 말은 박지민의 입에서 최초로 나왔다. 그게 섣불리 충동적으로 내뱉은 단어였다곤 해도, 단지 전정국 겁주기 위한 말이었다고 해도, 지민은 제 입에서 제일 먼저 그 말이 나왔다는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순간도 잊은 적 없다.


‘……!’


우선은 그 공간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어 정국을 뿌리치고 돌아서던 지민이 그대로 다시 잡혔다. 정국이 저를 잡고 늘어진 탓이다. 발버둥 치던 지민은 정국에게 밀려 침대 위를 굴렀다. 가지 말라며 정국은 달려들고 지민은 밀쳐냈다. 둘이 넓은 침대를 뒹굴다가 지민이 먼저 정국을 걷어찼다. 지겹도록 옭아매듯 달라붙던 정국이 폭주한 건 수간의 사고 같은 거였다. 잠시 깨었던 약 기운이 다시 정국을 덮쳤다. 생전 처음 본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 보다 익숙한 지민의 페로몬이 정국에게 더 강한 자극이 됐다. 지민 역시 한계치를 초과한 듯 확 터지는 짙은 향기에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고,


‘…….’


마치 혈관을 끊길 것처럼 뜨거운 느낌과 함께 숨이 막힐 듯한 고압감에 정신을 차렸을 땐 딱딱한 대리석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뜨거운 피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게 제게서 나는 피라는 걸 지민은 뒤늦게 알았다. 아픈 건 잘 안 느껴졌는데 전정국이 사람이라도 죽은 것마냥 너무 울어대서. 그래서 알았다.







*







지민의 소속사로 새로운 시나리오가 전해졌다. 반신반의하며 미팅을 하고 온 호석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지민아 이거 대박이다! 그는 회사 휴게실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누워있는 지민 옆에 앉아 시놉시스를 꺼내 들었다. 이거 김수원 작가 차기작에 차감독 알지, 차감독이 연출이래. 제작사도 이름 있고 사전 제작이라 환경도 훨씬 좋을 거고, 무엇보다 내년 초 편성이란다! 그냥 들어가서 찍기만 하면 되는 거야! 무엇보다, 그쪽에서 너를 주연으로 쓰고 싶대! 이거 완전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 아니냐.


지민은 그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천장만 보고 있었다.


“안 해요.”

“뭐? 왜 안 해 이걸?”

“안 한다면 안 해요.”

“니가 주연이라니까? 게다가 상대 배우가 누구냐면-”


아아 안 들을래. 지민이 아예 제 귓구멍을 막는 시늉을 했다. 호석은 어이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시 승승장구하겠다고 의욕을 불태우던 놈이 이 조건 좋은 작품을 왜 안 한다고 뻗대? 니가 지금 그럴 처지가…. 거기까지 말하던 호석은 어느새 선글라스를 벗은 지민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거 하면 나 평생 전정국이랑 못 헤어져요.”

“…이것만 하고 헤어지면 안 될까?”

“농담이죠?”


…응. 진심 섞인 농담. 호석은 영 포기하기엔 아쉬운 듯했지만 지민이 대차게 거절하니 더는 말을 꺼내진 못했다. 물론 박지민의 입장에서도 무지하게 아깝기는 했다. 전정국 때문에 들어갈 뻔했던 작품까지 놓쳤는데 이런 기회쯤은 보상 차원에서라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합리화까지 해보았지만….


지민의 눈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휴대폰으로 향했다.


“뭐 기다려?”

“기다리긴 뭘 기다려요 내가.”


함께 상담소에 갔던 날 이후 정국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이쯤이면 또 갖은 핑계를 대며 사람을 불러내고 귀찮게 굴겠다 싶은데도 이상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제발 그만 하자고 했던 게 이제야 먹혔나. 알겠다고 하던 게 정말 진심이긴 했나보다. 지민은 안도했고, 한편으론 더욱 불안해졌다. 진짜로 끝난 거 맞아? 그 똥고집 쩌는 알파 새끼가 또 무슨 일을 치지 말란 법이 어딨냐고.










정국은 요즘 회사, 그것도 자신의 사무실에만 콕 처박혀 지냈다. 밥도 웬만하면 시켜먹고 부하 직원들이 다 퇴근한 후에도 회사에 남아 야근을 했다. 한가할 땐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영화를 봤다. 집에 귀신이라도 나오세요? 졸지에 정국 때문에 매번 퇴근이 늦어지던 비서가 정말 궁금한 듯이 물었다. 정국은 대답하지 못했다. 집에 귀신보다 더한 게 나온다고. 박지민의 환영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괴롭다고 그 말을 했다간 아마 회장님 귀에 전해져 어디 병원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확실히 얼마 전 저의 집에서 했던 그 날의 섹스는 트라우마였다. 그게 섹스인지 뭔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삽입하고 사정만 하면 다 섹스인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도 섹스인가. 그 후로 정국은 아주 울적했다. 그래서 지민에게 연락하기도 질려버린 건, 절대로 아니지. 당연히.


“배달 앱 켤 줄 몰라?”


윤기가 혼자만 불이 켜져 있는 정국의 사무실로 들어오며 혀를 찼다. 손에는 2인분의 초밥이 들려 있었다. 삼촌을 셔틀 시키는 대단하신 조카님 납셨다. 초밥이 든 쇼핑백을 건네자 정국은 대꾸도 없이 열심히 포장을 뜯어 초밥부터 당장 입에 집어넣었다.


“너 회사에서 먹고 자고 한다니까 누나가 너 드디어 마음잡았냐고 좋아하더라.”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데?”

“그런 것 같다고 했지.”


박지민이랑 있던 집에 있기가 무서워 들어가지도 못하고 벌벌 떠는 바보 천지가 당신 아들이란 걸 알면… 어떻게 하실는지. 윤기는 잘 알기 때문에 굳이 바른대로 말을 하진 않았다. 민윤기도 이제는 나이 들어서 집안에 부는 피바람이 좀 귀찮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거든.


“전화해볼까.”


초밥을 입에 집어넣던 정국이 심각하게 말했다. 그 대상은 아마도 박지민이겠지. 2인분 몫의 초밥은 전부 다 정국 거였다. 초밥엔 손도 대지 않은 윤기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구질구질하다 조카야.”

“보고 싶어.”

“그건 더 구질구질하고.”

“그거 말고 뭘 할 수 있는데….”


삼촌은 알아? 알지? 겪어봤잖아. 정국의 부담스러운 눈빛이 윤기에게로 향했다. 글쎄. 이혼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자면…. 시간이 해결해준단 소릴 했다간 경멸의 눈초리를 받을 것만 같다. 윤기는 부러 뜸을 들였다.


사실 윤기는 종종 전처와 연락도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당장에 이혼했을 땐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느낌이었지. 집안의 반대 때문에 이혼하게 된 정국과 달리 윤기의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였지만 어쨌건 진이 빠지는 일이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주긴 하더라고.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사람의 행동을, 여전히 이해는 못 해도 인정하게는 되는 순간이 오긴 왔다. 몇 년이 지난 뒤에.


물론 전정국은 그 몇 년을 기다릴 성미 따위는 못 된다. 몇 년씩이나 박지민이 제게서 떠나있는 걸 참을 수 있는 놈이었다면, 애초에 그 난리를 떨지도 않았겠지. 그걸 잘 아는 윤기라 말은 입 속에서만 맴돌았다.


“지민 씨한테도 시간을 좀 줘봐.”

“…….”

“그래도 사람이 숨은 쉬고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난 그냥….”

“그냥 내버려 둬 좀. 여기 질려서 도망간 사람을 그렇게 숨도 못 쉬게 몰아붙여서 되겠냐?”


말로는 윤기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가 식욕으로 치환되는지 말없이 입에 초밥을 욱여넣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웅얼거린다.


“누가 도망갔다고 그래.”


지민이 형 도망간 거 아니거든.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떼쓰듯 하는 말에 윤기는 허 웃었다. 오죽하시겠어요.




*







“어머 실물이 더 멋지네요.”


연예인한테 그 말은 욕 아닌가? 자격지심이 밀려왔지만, 지민은 관계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며 비즈니스용 미소를 띠었다. 안 한다고 바락바락 거절할 땐 언제고 지민은 시나리오를 속독한 뒤 호석에게 말했었다. 미팅 안 잡아? 전정국이 박지민에게 연락을 뚝 끊은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석 달도, 한 달도, 보름도 아닌 딱 일주일 만.


“우리 주인공 캐릭터랑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지민 씨.”

“감사합니다. 저한테도 영광이에요.”


이렇게 좋은 제작자님이랑, 감독님 작가님이랑…. 지민은 대부분 제멋대로 굴었지만 진짜 필요한 자리에선 너스레를 떨 줄도 알았다. 안 한다더니 왜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지 미심쩍긴 했으나 어쨌건 호석은 기뻤다. 이제 지민도 만신창이가 된 이미지를 극복하고 발돋움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마치 아비 된 마음으로 눈시울도 붉혔다.


“처음에 지민 씨가 작품 거절했다고 해서 솔직히 섭섭했거든.”

“아 그건… 제가 이런 작품에 이렇게 큰 역할을 맡아도 되나 걱정도 들고 자신이 없었거든요.”

“난 또 내 대본이 별로인가 했지.”


갑자기 변덕을 부려서 드라마를 하겠다고 나선 이유? 별건 없다. 죽 끓듯 하는 박지민 변덕이 또 다시 발동한 거지 뭐. 솔직히 전에 날아간 드라마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니 그리 찝찝할 것도 없겠다 싶고, 좀 찝찝하면 뭐 어때. 지민은 당장 눈앞의 성공이 고팠다. 보란 듯 다시 사람들 앞에 나서서 나 아직 건재하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또… 분명 제 거절이 연락으로 갔을 텐데도 불구하고 여즉 연락이 없는 전정국을 보니 뭔가 욱하기도 해서.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솔직히 그 고생을 했는데 이 정도 서포트는 위자료라고 생각해도 되잖아. 어?








 

 

- 근데 왜 갑자기 박지민이에요? 김성헌이 하겠다고까지 했는데 갑자기 바꾸는 거 너무 아깝지 않아 이사님? 걔 이번에 칸도 간다며.

- 그렇긴 한데… 돈 대주는 사람 말 들어야지 어쩌겠어. 작가님이 쫌만 이해하자.

- 나도 이해는 하는데, 아까워서 그러지 아까워서….

- 박지민 이번에도 망하면 진짜 배우 인생 끝이야. 그 이미지로 어떻게 다시 성공하겠어. 열심히 할 거야. 그거 하나 믿자고.

- 근데 이거 돈 대주는 게 J그룹이라는 거 정말이에요?

- 원래 H쪽에서 투자받기로 했는데 갑자기 J그룹에서 광고까지 다 사겠다고 해서 얼씨구나 했지. 덕분에 제작비도 늘고 감독님이랑 작가님도 좋잖아.

- 뭐 그렇긴 한데, 신기해서 그렇지. 이혼했다고 앞길 막는 경우는 봤어도, 이혼했는데 이렇게 밀어주는 경우는 또 처음이네.

- 뭐, 위자료 같은 건가 보지.


자기조차 그렇게 생각해놓고도 막상 남들 입에서 듣는 건 기분이 사뭇 달랐다. 무척이나 드러운 기분이랄까. 내 저놈의 꼰대들을 확 그냥! 가방을 가지러 돌아갔다가 안에서 나는 말소리를 듣던 지민은 낮게 욕을 읊조렸다.


하지만 지민은 성격대로 당장에 그 문을 열고 들어가 깽판을 놓거나 따지지는 못했다. 솔직히 다 맞는 말이라서. 굳이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저들의 죄라면 문 앞에 누가 있는지 확인도 안 하고 자기들끼리 떠든 것이요.


결국 가방은 호석이 가져왔다. 차 뒷좌석에 말없이 앉아있던 지민은 집으로 가겠느냔 호석의 말에 종종 가던 라운지 바의 이름을 댔다. 술 마시게? 호석의 물음에 창밖만 보던 지민이 대꾸했다. 새 작품도 하게 됐는데 기분 좋아서 한잔 하려고요.








다른 일이 있다며 호석은 지민만 내려주고 떠났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란 말도 함께. 웬만하면 무슨 일 만들지 말란 의미다. 지민은 라운지 바에서 홀짝홀짝 술을 마셨다. 이미 미팅 때 가벼운 와인을 마신 후라 술이 더 땅겼다. 다른 말로는… 꿀꿀하다고 해야 하나.


결국 박지민은 암만 보란 듯 잘살아보자 맘 먹어도 전정국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운수대통해 어떤 성공을 거둔다 해도 전정국보단 잘 살 수 없다는 게 지민은 참 억울했다. 그렇게 대단한 놈이랑 결혼하지 말걸. 보란 듯이 비웃어 줄 수 없는 제 처지가 이렇게 답답하게 느껴지긴 처음이다. 내가 그놈이랑 진짜 무슨 스폰 관계로 만났으면 몰라. 답지 않은 연애결혼이기까지 했어서 그래서 더 이 사단이 난 거 아닌가. 연애할 때는 제가 영화 하나 찍는 것도 마뜩잖아 하더니 이혼한 뒤에야 서포트해 주겠다는 전정국도 또라이 같다.


양주를 단번에 삼킨 지민이 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휴대폰은 조용했다. 호석은 소속사의 다른 배우 일로 늘상 바빴고, 요즘 자숙을 마치고 슬금슬금 해외에서 촬영 중인 태형도 바빴고, 심지어는 전정국도 바쁘신 모양인지 연락이 없다. 하기야. 대한민국 돈은 걔네 기업이 다 쓸어 모으는데 바빠야지. 당장 죽을 것처럼 굴더니 이렇게 산뜻하게 연락을 뚝 끊은 정국이 지민은 한편으론 어이없기까지 했다. 이렇게 말끔히 안녕할 거면 도대체 그동안 왜 그렇게 괴롭혀댔는데? 그래서 저를 괴롭혀댄 게 문제인지 이렇게 연락이 없는 게 문제라는 건지. 지민은 구분 없이 구시렁구시렁 욕을 했다.


한참 욕을 하던 지민이 다시 빈 잔을 채울 때,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지민은 취한 손짓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익숙한 이름이 떴다.


김남준 변호사


지민이 비식 웃었다. 역시나.


“왜요. 전정국이 또 뭐래요? 무슨 트집 잡아요?”


받자마자 다짜고짜. 참 밥 말아 먹은 전화 예절이었지만, 전화기 너머의 남준에겐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남준은 역시 마찬가지로 인사는 생략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 다행히 그건 아니고요. 제가 출장 갔다 오늘 와서 사무실에 선물 보내주신 거 이제야 봤네요. 감사 인사가 늦었죠.

“……아.”


얼마 전에 호석에게 말해 남준의 로펌으로 선물을 보냈던 게 생각이 났다. 뭘 보냈는지도 모르지만. 왜 감사 인사를 이 시간에 전화로 하고 난리인가 싶지만. 지민은 그러냐며 성의 없게 대꾸했다. 그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긴 해서 전화기 너머의 남준이 예의상 물어왔다.


- 술 드세요?

“예. 기뻐할 일이 있어서요.”


기뻐할 일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치고는 지나치게 가라앉아있다. 남준이 그걸 의심하든 말든 지민은 덧없는 포장을 했다. 그래야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니까. 아니 이미 자존심은 아까 상할 대로 상해서 제 발밑에서 나뒹굴고 있었지만, 마지막 남은 가오는 지켜야 할 거 아냐. 원래 박지민한텐 이런 게 목숨보다 중요하다.


그러시구나. 무슨 일인진 모르지만 축하드려요. 덤덤한 남준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지민이 푸우 하는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엉킨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변호사님. 저랑 한잔하실래요?”


떠들고 싶은데 말할 사람이 없어서요.









왔어요 변호사님? 남준이 도착하자 지민은 꼬인 발음으로 남준을 맞이했다. 그러고 보니 정국 쪽과 변호사를 대동하고 만난 이후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면 변호인과 의뢰인의 관계도 끝난 것이 아닌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박지민의 이혼을 담당했던 김남준만 영원히 고통받는 중인가.


지민은 이미 취할 대로 취한 것 같았다. 평소에도 늘 멋대로 구는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욱 저기압 같아 남준은 조심스러웠다. 남준이 몇 달간 경험한 지민은 정말 어지간한 성격이었다. 성질 한번 참…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한 적도 여러 번이다. 다혈질이라 욱하기도 자주 하고 본래 태도가 까칠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내킬 때면 세상에서 제일 쿨한 척 기분파로 굴다가 다시 100도씨로 끓어오르는 것도 금방. 저 성격에 어떻게 굴지의 대기업 자제인 전정국과 결혼을 한 걸까 궁금하기도 했지. 그 미스터리는 그 똑똑한 변호사라는 김남준도 아직 풀지 못했다.


“제가 이제는 정말로 자유의 몸이거든요.”

“네 축하드려요.”


사무적으로 대꾸한 남준에게 지민이 씩 웃어 보였다. 김 변호사님은 참 사람이 영혼이 없어서 좋아요. 그러며 남은 술을 들이켠다. 취하신 거 아니에요? 그만 드시는 게…. 불리한 말에 박지민은 대꾸하지 않는다. 억지로 대답하는 건 상담실에서로 충분했다. 물론 요즘 지민은 상담실에도 나가지 않았다. 용서하기인지 뭔지를 한 이후론 없는 스케줄 핑계를 대로 예약을 미루고 미루는 중이었다. 다시 석진의 앞에 앉으면 제가 무슨 이야길 할지, 그 상황을 별로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인정한다. 박지민이 은근 회피성 기질이 있다. 근데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어? 내 상황이 된다면?


“변호사님도 내가 불쌍해요?”


조금 전까지 축하를 들어놓고 지민이 대뜸 물었다. 남준은 이젠 당황하지도 않았다.


“별로요. 아직 젊고, 돈도 많잖아요?”


너무 진심을 말해버렸나. 말하고서야 살짝 눈치를 봤는데 지민은 그 대답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화를 안 내는 걸 보면.


“사람들은 다 제가 그 집에서 쫓겨난 줄 알거든요.”


남준도 익숙한 말이었다. 그거 진짜야? 박지민 소박맞았다는 게 사실이야? 주변에서 물어오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는걸.


“근데 내가 박차고 나온 거예요.”


지민은 그걸 뿌듯하게 여기는 듯도,


“내가 먼저 이혼 얘기 꺼냈어요.”


자책하는 듯도 했다. 먼저 헤어짐을 결심한 건 나예요. 지민이 거의 다 빈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후회하세요?”


한 모금 마신 술 탓인지 아니면 지민이 취해있어 덩달아 분위기를 탄 탓인지, 남준이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질문을 했다. 사실 전부터 궁금하긴 했다. 이혼한 걸 후회하세요? 이혼 변호사로 일하며 남준이 만난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은 아주 홀가분해 했고, 어떤 사람들은 아주 기가 질려했다. 법적으로 부부의 인연이 끝난 뒤에 후회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물론 김남준의 일은 그들의 이혼 절차를 돕는 거지 그 이후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회요?”

“못 들은 걸로 하시죠.”

“후회해도 된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

“뭔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할 것 같아요 내가?”


왜 이혼을 했냐고요? 그 자식이랑 결혼한 게 제 인생 최고의 잘못이죠. 그 유명한 인터뷰 영상은 남준 역시 알고 있었다. 아마 그거 모르는 사람 없을걸? 남준 역시도 지민이 이혼을 후회씩이나 할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몇 달간 남준이 보아온 지민은 그랬다. 하지만….


“끝난 건 끝난 거잖아요. 그걸 뭘 어떻게 하는데요…. 후회하면 어쩔 건데요?”


남준은 제가 착각을 하는 건가 싶었다. 눈앞에서 술에 취해 중얼대는 박지민은 어쩐지 그 영상 속의 사람과는 아주 많이 달라 보여서.


그러고 보니 박지민 저 성격에 어떻게 전정국과 결혼까지 했을까 신기했었는데, 김남준이 바보였다. 사랑하니까 결혼했겠지.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산 사람이 비단 저뿐만은 아닌 것 같아, 남준은 어쩐지 지민이 측은하기도 했다.









으응. 취한 지민이 바 테이블 위로 늘어졌다. 어쩌면 김남준은 전화를 걸었을 때 지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런 미래를 예감했는지도 모르지. 매니저님한테 전화할까요? 전에 호석과 한 번 본 적이 있는 남준이 지민의 휴대폰에서 전화번호부를 찾았다. 그러나 엎드려 있던 지민이 팔만 들어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다 무너진 발음으로 말한다. 호텔에서 잘래요.


그러고 보니 여기가 호텔이군. 남준은 지민을 부축해서 내려갔다. 지민의 이름으로 체크인을 하고, 지민을 부축해 호텔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지민은 침대에 닿자마자 철푸덕 떡처럼 늘어졌다. 저건 인간이 아니야. 떡이야. 남준이 어느새 땀이 배어 나오는 와이셔츠를 털며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고민한다. 만취 상태의 연예인이자 클라이언트를 혼자 호텔 방에 두고 가도 되는가. 역시 매니저한테 연락은 해야겠지. 다시 지민의 휴대폰을 가져가려는데, 그대로 곯아떨어진 줄 알았던 지민이 몸을 웅크린 채 말한다.


“공일공… 사삼공사…”

“네?”

“전화 걸어요. 공일공, 사삼공사, 공구공일.”

“아, 네.”


아는 사람인가 보군. 남준은 지민이 부른 대로 휴대폰에 번호를 입력했다. 공일공사삼공사공구공일. 그리고 뜬 이름은.


전남편놈


“박지민 씨 이거 혹시…”

“박지민 지금 취했다고 해요. 정신 못 차리고 누워 있다고.”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 말을 너무 또박또박 잘하고 있기는 한데…. 술을 많이 먹은 것도 맞는 말이니까. 남준이 과연 취한 사람의 말을 들어도 되는가, 괜한 불똥이 튀는 건 아닌가 고민하는 새 지민이 옆에 널브러져 있던 제 자켓을 담요처럼 덮었다. 그 몸짓이 본래의 박지민답지 않게 너무도 처량해 남준은 약간의 동정심마저 들 뻔했다.


“박지민 다 죽게 생겼다고, 잔말 말고 튀어오라고 해요….”

“진짜 해요?”

“…속고만 사셨나.”


하아. 아무래도 이 직업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남준은 푹 한숨을 쉬며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거 맞아? 연결음이 몇 번도 되지 않아 금방 끊어졌다.


-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남준에게도 익숙했다. 반가운 듯한 목소리에 남준은 어쩐지 더 뻘쭘해졌다.


“안녕하세요 저….”

- 누구시죠.

“김남준 변호사입니다.”


휴대폰 너머로 적막이 흘렀다. 이런 상황은 (그러니까 술에 취한 사람의, 그것도 자기가 이혼을 도운 사람의 전남편에게 전화를 하는 상황 말이다.) 겪어본 적 없는 남준이 다음 말을 꺼내려 뜸을 들일 때였다. 그 사이를 정국의 목소리가 침묵을 갈라왔다. 지난 몇 번의 만남으로 김남준이 파악했던 전정국과는 어떤 괴리마저 느껴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순간에 변할 수 있냐.


- 지민이 형이랑 있어요?


만약 지금 눈앞에 전정국이 있었다면 김남준 등골에 소름이 오싹 돋지 않았을까. 명백한 적대감이 전화로도 느껴질 정도이니.


“지금 박지민 씨가 많이 취하셨거든요.”

- 술 마셨습니까?

“네, 좀 많이 드셔서. 혹시 오실 수 있나요? 여기 G호텔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혼한 남편한테 취했다고 데리러 오라고 하는 건 진짜 이상하지 않나. 김남준의 상식이 충돌을 일으킨다. 그런 뻘한 통화를 하는 동안 지민은 자기가 전화를 걸라고 해놓고는 이불에 얼굴까지 파묻고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낚인 것 같은데…. 취한 사람 주정에 휘말려서 괜한 짓 한 거 아닌가. 혹시 오기 좀 그러시면 그냥 매니저님한테 오시라고…. 남준이 뒤늦게 말을 정리하는 사이 휴대폰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듯 거친 숨소리 같기도 하고, 급히 문을 열고 나가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소리가.


“여보세요?”

- 갈 거니까,

“…….”

- 박지민한테 손대지 마요.


손 댈 생각 없는데요. 남준은 어이없는 웃음을 참았다.


- 보고 있으세요. 아니, 그냥 근처에 있으세요. 혹시 취해서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

- 금방 가요.


심지어 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뭔데. 이거 뭔데. 남준은 당최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예…라고 어설프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는 척하고 있던 지민이 그제야 빼꼼 고개를 들더니 남준의 표정을 살폈다.


“뭐래요? 온대요?”

“…….”

“안 온대요?”

“…….”

“아 그 자식이 뭐라는데요!”


전정국 반응이 궁금해 속이 뒤집어지는 박지민도, 박지민 취했단 전화 한 통에 손대지 말라고 으름장까지 놓고 튀어나오는 전정국도, 둘 중 누구도 헤어진 사람들의 반응이 아닌데.


당신들 어쩌다가 이혼까지 하셨어요. 남준은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곧 오신다고 하니까 전 가볼게요.”


전정국은 박지민이 취해 무슨 짓 할지 모르니 주위에 있으라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박지민은 멀쩡한 상태인 것 같으니. 괜한 불똥 튀기 전에 자리를 떠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현명한 판단을 한 남준이 옆에 걸쳐두었던 제 겉옷과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는 호텔 방을 나가기 전 잠시 멈추었다.


“전에 전정국 씨랑 둘이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날 지민 씨랑 전정국 씨 쪽 변호사분이 늦으셔서 둘이 있었는데, 저한테 물으시더라고요. 이혼 안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냐고요.”

“…….”

“저는 박지민 씨 변호사니까 그런 방법은 모른다고, 어쨌든 한쪽이 원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결국엔 법적 이혼으로 끝나게 되더라고 대답했거든요.”


지금도 그 대답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준은 제가 변호사 생활을 하며 깨달은 것을 이야기한 것뿐이니까. 하지만 제 말이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 그때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걸 생각하게 되는 게 남준에게도 어떤 마음의 짐처럼 느껴지긴 했다.


“제가 어떻게 대답하는 게 맞았을까, 오늘은 생각이 많아지네요.”


지민은 대꾸하진 않았지만 멍하니 누워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김남준이 하는 말들을 어떤 식으로든 곱씹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개무시하고 있든가.


“어쨌든 저는 제 의뢰인이, 박지민 씨가 행복해지길 바라요. 새 출발이란 게 꼭 모든 게 새로워야 한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과거에 지민 씨를 괴롭히던 것들을 떼어놓는 것이기만 하다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여기 무슨 법정인 줄. 나 무슨 미드 보는 줄. 지민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럼 잘 쉬세요. 남준이 나가는지 문이 열리고 도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마자 미적지근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지민은 그 눈물을 닦아 내지도 않았다. 닦아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언젠가 꼭 이렇게 생긴 방에 누워 울고불고하던 게 생각이 나서.


똑 잘라내지 않고서야 절대 잊을 수 없는 나쁜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그 기억 속 정신도 못 차리고 각인을 하자던 정국이 무척이나 또렷하게 기억난다. 박지민은 아직도 여전히, 그날 호텔 방에서 다른 오메가와 뒹굴던 전정국을, 정신을 놓고 절 다치게 했던 정국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내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왜 용서를 해야 해? 안 그래도 살면서 누굴 용서해본 적따위 손에 꼽았다. 내가 더 불쌍한데, 내 처지가 더 엉망진창인데 왜 전정국을 용서하냐고. 걔가 뭐라고.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이런 생각까지 해가며 전정국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존나 억울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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