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부는 잠에서 깼다. 들쳐진 이불 아래 냉랭한 기운이 슬쩍 곁을 파고들었다.


"왔어요."

"응. 자고 있었나 보군."


조용히 들어올 작정이었는지 목소리가 머쓱했다. 한기에 시라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겨울 초입 밤은 쌀쌀하고 밖에서 들어온 이의 몸은 눈뭉치마냥 서늘하다. 코에 진동하는 단내에 시라부는 본능적으로 아이가 어미 품을 찾듯 꼼지락거리어 그에게 다가가 마음껏 껴안았다.


"향이 나요."


대답이 없어도 굳이 듣지 않아도 시라부는 이유를 알았다. 어느 신이나 영물의 피 냄새일 것이었다. 이곳에서 홀로 밤만을 기다리며 살 줄을 모르고 신관을 준비하던 시절 달달 외우던 서적 어느 한 귀퉁이에 적혀있던 정보였다. 영장물과 비슷하지만 결코 그 존재의 기질이 다른 것들은 향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였다. 오늘 같은 단내를 역겨울 정도로 뒤엎은 채 그가 돌아오던 날, 본능적인 불안감에 전전긍긍하며 해가 떠오르길 기다렸다. 동이 틀 무렵 시라부가 본 것은 비바람이라도 휘몰아친 듯이 침대를 흠뻑 적신 어떤 축축한 기운이었다. 기분 나쁜 황금빛 액체 자국이 흥건했다.

오늘은 어떤 이들의 목을 베고 팔다리를 찢으며 살아남아서 돌아왔을까. 더듬대는 손끝에 딱딱한 턱이 매만져졌다. 신전도 황궁도 아닌 산꼭대기에서 홀로 살던 괴물.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신의 분노를 사 신도 인간도 아닌 끔찍한 존재로 해가 뜨면 전쟁터에 끌려가고, 죽기 전에 밤이 찾아오면 처소로 돌아가 다음날 그를 부르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는 가여운 전쟁귀라고 하였다. 인간도 신도 아닌, 피와 타인의 목숨을 제물로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는 굴레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노예라 하였다.

옆으로 누워 시라부의 얼굴을 조용히 쓰다듬던 그가 손을 치우고 천장을 향해 똑바로 누웠다. 시라부는 그의 몸 위에 그대로 올라타 태초부터 둘이 한 몸이었던 것처럼 제 몸을 포갰다. 엎드려 누워 그의 등 밑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그를 감싸 안았다. 덩치가 팔 척이라 감싼 양손의 끝이 도무지 만날 생각을 안 한다. 고향의 당산나무가 생각났다. 좋은 향이 났고 딱딱했지만 머금은 수분기가 이상하게 말랑거리는 느낌이다. 맞닿은 살면적이 간지럽게 근육들이 요란히도 꿈틀댔다. 그 움직임은 피부를 타고 생생하게 전해져 어느 예감으로 변태해 시라부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가 흥분했다거나 몸을 뒤척거려서가 아니었다. 그의 신체는 지금 회복하는 중이다. 부러지고 함몰된 뼈는 고쳐지고, 짓뭉개져 도축된 고깃덩어리처럼 생명력 없이 벌떡거리는 피부는 공간이 메워지며 다시 차오른다.

시라부는 그의 심장 가까이에 귀를 기울였다. 칼이나 창 따위가 아니라 사나운 짐승이 갈기갈기 물어뜯어 찢었는지 과거 밤들과 달리 움푹 패어있다. 외부와 심장 사이를 가로막던 단단한 근육이 사라지니 제물로 바치기 위해 배를 갈라 갓 꺼낸 염소의 심장처럼 심박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시라부는 이럴 때마다 그가 아직 살아있음을 실감하며 안심하고 또 절망한다.

늑골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건반이라도 치던 모양새를 어설프게 따라해 또박또박 누르던 손은 이내 힘을 잃고 만다. 시라부의 등허리를 감싸 안은 팔이 묵직하고 또 뜨끈해서 의욕을 잃은 탓이다. 그래도 시라부는 여전히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장난스레 무릎을 접어 올려 발끝으로 그의 종아리와 무릎 허벅지를 차례대로 천천히 쓸었다. 조금의 마찰에도 겹쳐진 몸아래 그의 중심이 뜨겁고 단단해진다.


"시라부."


곤란한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시라부는 입을 들이밀어 남은 말을 먹어치웠다. 보이는 게 없으니 무작정 들이댔는데도 입술은 잘도 목적지에 닿았다. 맞댄 그의 입술은 매번 놀라울 만치 말랑거린다. 시라부는 그의 얼굴을 감히 두 손으로 감싸본다. 그러쥔 그의 양볼에 우물이 생겨났다. 생애 처음 호흡을 떼본 사람처럼 그는 정신없이 시라부의 숨을 좇아 들이마셨다. 벌어지는 입술의 끝은 분명 고운 호선을 그리고 있을 터였다. 평생 저에게 얼굴을 보일 수 없어 어둠이 나리는 밤에만 들어오는 당신이 이 밤에 눈뜬 장님이 된 저에게 기꺼이 미소를 보여주시며 입술을 벌리신다면 저는 받아들일 수밖에요. 시라부는 입술을 벌렸다.


초야를 치르던날 밤에 그가 고백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 네가 나와 관계를 가진다면 언젠가는 반인반신의 아이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순간부터 너는 보통의 삶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지만 모르는 채로 맞이할 바에.. 네가 나를 미워하게 되더라도 알리기로 그 오랜 시절부터 결심했었다고.

시라부는 대답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특별했어요. 제 친구는 모두 일찍 병들거나 죽고, 목숨을 연명하고 싶다면 멀리 떠나야만 했죠.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가요. 평범한 삶은 처음부터 저와는 어울리지 않았죠. 영원히 볼 수 없는 당신과 함께하는 여생이라니. 더할 나위 없이 저와 어울리는 삶이네요. 입맞춤은 삽입만큼 뼈아팠다. 시라부는 생각했다. 애초에 두 눈이 멀어 그를 볼 수 없는 신세였더라면 저는 욕심조차 품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욕심은 밤이 짧아질수록 커지다가도 다시 밤이 길어지는 날에는 참을 수 있을 만큼 줄어들었다. 내 욕망마저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나의 변덕스러운 반려. 전쟁귀. 인간도 신도 아닌 괴물. 우시지마 와카토시.







[우시시라] 손끝에 괴물





신탁이 내려왔다. 10년 5월에 태어나 살아남은 자를 외로운 산 지배자의 반려로 바쳐라. 의심할 여지 없지 시라부를 가리키는 명령이었다. 그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이 성인식을 치르기도 전에 몇 차례 전염병으로 죽었고, 기껏 생존한 이들은 누구도 전쟁에만 차출되면 사지를 멀쩡하게 보존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학자들은 숙청을 당했으며 장사꾼들은 독살을 당했다. 시라부가 성인식을 무사히 치르고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여자들은 목숨을 부지하긴 했으나 안전을 위해 제 발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잘 있어 시라부. 다 신의 뜻이니.

시라부는 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게 만들어진 인간이니 굳이 애쓰려 수고하지도 않았다. 시라부를 원하는 신탁에 모두가 놀라기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네 인생의 지난 과정들은 결국 신의 개입에 의한 결과물이었구나. 염세적으로 말하는 모친의 말에 시라부는 성이 났다. 저주가 아니었어. 저 위에 누군가가 너를 원했던 거지. 어머니의 한숨 섞인 감탄이 듣기 싫어 시라부는 분을 참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따졌다. 그럼 앞서 죽은 애들은요. 대체 무얼 위해서 하루살이처럼 죽어나간 거죠. 신도 아닌 어머니에게 덤벼든다고 답을 들을 리 만무하였지만 시라부는 억울함을 토할 곳이 필요했다. 신에게 있어 우리는 그저 미물일 뿐이야 시라부. 수천 명의 삶과 죽음을 한낱 변덕으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신은 위험해. 그러니 시라부, 그곳에 절대 안주하고 안락함을 느끼지 마렴. 빠져나올 수 있다면 도망치는 게 좋겠지만 어렵겠지. 그래도 항상 기회를 엿봐. 죽일 수 있다면 죽여서라도 돌아와. 시라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탁을 거부한 인간의 말로엔 죽음이나 그에 비견될 고통만이 존재했다. 순종이 아니다. 분명 어딘가에서 그가 우리를 지켜볼 것이 뻔했으니 제 의사를 숨겼을 뿐이었다.



그러는 시라부는 재물과 음식을 잔뜩 짊어진 장정들이 험해지는 비탈길과 끊이지 않는 크고 작은 사고들고 죽거나 밤새 몰래 도망치는 것까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어찌할지 몰라 쩔쩔매기를 며칠 반복해서야 마지막 남은 사내까지 그를 떠나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신탁을 받았단 말이다. 나는 반드시 저 산꼭대기에 올라가야 한다."

"이래서 샌님들이랑은 뭔 말을 안 하지. 야. 이 산이 어떤 산인줄 알아?"

"그렇지만 신탁이.."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이 산 한 번 등정했다는 사내 하나 없는 곳이야. 꼭대기에 신전이 있을지 저승이 있을지 아무도 몰라. 네가 죽든 살아서 그곳에 도착하든 어차피 누구도 네 소식은 못 전해들어. 내가 지금 너를 죽이고는 내려가 입 싹 씻어도 된다고."

"센 척 그만해. 죽일 용기 있었으면 진작 죽였겠지. 멍청한 새끼."

"그러는 너는 산 제물로 바쳐지는 주제에 무슨 지극정성을 바라냐. 이만하면 나는 최선을 다했어. 꺼져줄게. 너 혼자 실컷 올라가봐."




그가 뒤를 돌자마자 시라부는 어지러운 정신에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여태 몸도 정신도 멀쩡했으니 당신이 틀림없다.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시라부가 눈을 떠보니 그는 정신을 잃은 어느 산기슭이 아닌 분지 형식의 산꼭대기에 도착해 있었다. 궁전에 가까운 여름별장 양식의 저택이 터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었는데, 시라부의 눈길을 끈 것은 저 멀리 잘린 인간의 머리통 몇 구가 열맞춰 전시된 숲의 초입이었다. 시라부가 길을 떠날 때 동행하던 사내들의 수와 꼭 맞았다. 재수 없게 시험을 했구나. 괜히 동정심이 일어 시라부는 눈을 내리깔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휑하니 뚫려 크림색의 기둥과 지붕이 아니었더라면 이곳이 사람 살만한 집이라는 걸 모를뻔했다. 벽도 문도 없는 이상한 곳이었다. 필요가 없으니 굳이 더하지 않은 것이겠지. 근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어째 이 안에는 바람 한 점이 들어오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먹을 것들이, 바닥에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사는 데에 부족함은 없겠다. 시라부는 느긋하게 감상을 내렸지만 곧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점점 불안해졌다. 촛불들이 제멋대로 하나둘 꺼졌다. 본능적인 직감이라 해두겠다. 시라부는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한 존재의 등장이 머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사방이 깜깜해졌다. 횃불을 마주한 고라니처럼 꼼짝않고 움직이지 못한 채로 그 무엇도 흐린 윤곽조차 보이지 않는 순간까지 굳어버렸다. 기억컨대 침실까지 가는 길에 문턱이나 계단 같은 건 없었다. 겨우 발걸음을 뗀 시라부는 대충 걸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침대가 닿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한 발 내민 순간 멍청하게도 낮에 읽다 대충 던져놓은 책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넘어지진 않았다. 곁의 누군가 그를 잡아주었다.


"조심해야지. 너는 밤눈이 어둡지 않나."

"누구세요."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얼굴도 확인 못하고 목소리만 허공에 둥둥 뜨는 마당에 이름만 띡 말해주시면 제가 뭘 알겠어요. 불은 왜 다 끄고 오세요"


시라부는 벌벌 떠는 와중에 할 말은 다 했다. 건방지다 혼을 낼 수도 있었지만 상대방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이해 부탁한다. 나는 네게 얼굴을 보일 수 없거든."

"정말 이상한 규칙이네요."

"굳이 정정하자면 명령을 받았거든. 신으로부터."

"저만 못 보는 건가요. 모두가 못 보는 건가요."

"인간은 내 얼굴을 볼 수 없어."

"이상하네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해 부탁한다."


똑같은 감탄과 양해 요청이 반복해 오가고 나서야 침묵이 깔렸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 시라부는 말했다.


"그럼.. 침실이나 가죠. 침대는 하나밖에 없던데, 바닥에서 주무시는 건 아니죠?"


은연중에 외면하고 있었지만 저는 이 어둠 속 사내의 반려로 이곳에 왔다. 마음 먹고 침대를 넣으면 수백 개는 더 들어갈 수 있게 넓기도한 건물에 침대가 달랑 하나 있는 이유야 뻔했다. 부축하는 손이 다가와 제 손을 찾는지 더듬길래 냉큼 양손을 내밀었더니 그는 그대로 시라부 팔을 잡아다가 안아 올렸다.


"어.. 이건 좀.."

"불편한가."

"당연하죠."

"밤눈이 많이 어두운 것 같은데, 차라리 이게 나을 것 같아서."

"예 뭐. 안심이긴 하네요. 그래도 다음부턴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엄연히 신체 건강한 사람인데."


천천히 이동하는 중간에 혹시 저가 맘대로 던져놓은 책에 우시지마가 걸려 넘어지지 않을지 긴장해 움츠러들었다. 불편한 것으로 짐작했는지 우시지마는 시라부를 좀 더 바짝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다."

"뭐가요?"

"인간이지 않나."


침대에 도착했는지 우시지마는 고개를 수그려 시라부를 내려놓았다.


"다치고, 병들고, 설사 아무런 변고 없이 무탈하게 살더라도 결국 늙어 죽는 사람이니까."

"그쪽.. 아니 우시지마씨. 통성명부터 합시다. 저는 시라부 켄지로입니다."

"알고 있다."

"네?"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네. 이미 들었지만 반가워요. 얼굴을 통 볼 수가 없으니 내가 지금 뭐에다 대고 반가워하는지는 모르겠네."


시라부가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었는데 그가 그 손을 맞잡았다. 지금 무슨 손을 내밀고 있냐 나도 참 멍청하다 채 생각하기도 전이었다. 시라부는 불퉁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불공평해요."

"뭐가?"

"저는 제가 지금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게 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당신은 제가 손을 내밀자마자 잡았잖아요. 보이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나는 신체조건도 시력도 인간과는 달라."

"그래서 얼마나 잘 보이세요 지금?"


대답 대신 등에 묵직한 것이 걸쳐졌다. 쓰다듬어보니 부드러운 모포 같았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어서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입이 절로 삐쭉 나왔다.


"조금 추워 보이는 것까지?"

"역시 억울하네요."


무방비했던 것이 시라부 탓은 아니지만 물처럼 흐르는 실크 재질의 의복이 그에게 안긴 상태로 옮겨진 탓에 조금 흘러내려 추위를 느끼긴 했다. 그러니까 그쪽은 볼 거 다 봤다 이거네. 스멀스멀 치솟는 반항심에 시라부는 조금 맹랑한 구석이 생겨 그에게 감히 명령했다.


"그럼, 저한테 한 번 가까이 와보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그의 입김이 코끝에 바짝 닿았다. 시라부는 민망해져 팔을 휘휘 내저었다가 닿은 그의 신체 어느 부위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피실피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어째 저에게 장난을 친 듯 싶었다.


"바짝 붙지는 말고요."

"뭐 하려는 거지?"

"배우자라면서요. 보지도 못 하는 거 만져볼 수는 있죠?"

"그래."

"만져라도 보게 적당히 가까이 좀 와서 앉아봐요."


침대 바닥이 특정 방향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시각이 차단되어 손끝에만 의존하려니 말초신경까지 바짝 긴장되었다. 천천히 뻗으려던 그의 손은 채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하고 우시지마에게 저지당했다.


"또 왜요."

"지금 그대로 팔을 뻗으면 내 가슴이다."

"웃겨. 금방까지 저 반쯤 헐거벗은 것도 봐놓고는. 저는 못 만진다 이거예요? 반려라면서요?"

"네가 싫어할줄 알았지."

"그건 만져보고 결정할게요."


비틀어 손을 빼냈지만, 막상 만져보려니 민망해 시라부는 팔을 조금 위로 뻗었다. 채 전부 뻗기도 전에 양 손바닥에 척하니 올라온 게 아마 그의 얼굴인 것 같았다. 손에 닿은 살거죽이 꽤 부드러운게 그의 볼이었다. 볼 위에 올라온 광대를 엄지로 쓸어봤다. 닿은 근육이 팽팽하게 땅기는 게 원래 이렇게 생긴 게 아니라 웃는 중인가 싶었다. 시라부는 그대로 턱아구도 만져보고 검지로 콧대를 슬슬 쓰다듬다 인중을 거쳐 입술을 지나려고 했더니 쪽 작은 소리와 함께 손가락에 말캉한 촉감이 느껴졌다. 아까 저녁으로 먹은 과일에 벌레가 들어있었나. 속이 간지러워 내장을 밖에 꺼내다 벅벅 긁어내고 싶었다. 두꺼운 눈썹까지 올라와 손가락으로 빗질을 하니 뻣뻣한 눈썹 숱들이 손길에 따라 움직였다.


"눈은 이제 감아도 좋아요. 이러다 눈까지 찔러버리겠네."

눈매는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잘생길 게 뻔한 얼굴이었다.


"이제 다 됐나?"

"아직 멀었어요."


어딘가 초조한 우시지마의 물음에 여유로운 척 대답했지만 시라부 역시 긴장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손가락으로, 그리고 손바닥으로 이마까지 훑어본 뒤에야 조용히 심호흡하며 조심스레 그의 머리숱 사이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을 수 있었다. 둥그런 두상을 아무리 쓰다듬어도 뿔 같은 건 없었다.


"괴물이라더니. 괴물 같은 구석은 없네요."

"어떤 걸 기대했길래 그런 생각을 했지?"

"그냥요. 뭐 뿔이나 날개 같은 거? 이왕 말 나온 김에 더 만져볼게요. 그래도 되죠?"

"글쎄."


웃음 섞인 목소리에 솔직히 심술이 나 어차피 보지도 못한 몸 실컷 만져나 보자는 마음으로 좀더 용기를 내 손을 미끄러트려 내렸다. 콧대를 타고 튀어나왔다 급격하게 떨어지는 인중을 눌러 턱을 향하려던 찰나 또다시 마중 나온 입술이 손가락에 부딪히자 시라부는 애써 눈을 질끈 감았다.


"웃지 마요."

"웃음이 나오는걸. 그래도 노력해볼게."

"다정도 하셔라. 뭐든 다 해주시네요."

"왜. 소원이라도 들어줄까."

"들어주시려고요."

"그래. 뭐든."


말할 때 기분 좋게 움직이는 목젖 주위에 시라부는 손가락 끝을 뱅뱅 굴렸다.


"아까 우시지마씨 말대로 저는 인간이고 언젠가는 죽겠죠."

"계속 인간이기만 한다면 그렇지."

"그럼 왜 저를 데려왔나요."

"원했으니까."

"직설적이시네요."

"없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죽기 전까지 저는 당신 얼굴은 못 보나요."

"그건 나도 모르겠지만 당장 신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보겠다고 애쓰다간 저주를 면치 못하겠지."

"제가 그러길 바라세요?"

"절대 아니지. 그리고 넌 그럴 사람이 못 되고."


어깨를 지나 팔뚝과 팔꿈치를 만졌다. 몸에 말랑거리는 부위라고는 입술이 전부인가 이 사내는? 감탄하며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난 손등에 다다르자 뒤집힌 손이 시라부의 손을 꽉 잡았다. 사정없이 시라부의 손가락 사이에 얽히고 비비다 깍지가 끼워지는 손가락은 무척이나 컸다. 손가락 틈새가 자비 없이 벌어져 괴롭힘을 당하는 양 아파왔다.


"아파요."

"미안하다."


금방 손가락이 빠져나왔지만, 이제는 시라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화답이라도 하듯 시라부의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다. 축축한 게 닿았다. 터져나오는 감탄사를 애써 막으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헐떡이며 그의 입술을 느끼다 시라부는 겨우 말문을 뗐다.


"있잖아요. 저는 그쪽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조금 속없는 인간처럼 보일까봐 차마 좋다고는 말 못하겠지만요."

"그게 결국 좋다는 뜻 아닌가."

"제가 인정을 안 했잖아요 아직은. 그럼 아닌 거죠."

"네 뜻이 그렇다면야."


수긍하며 다시 목을 점점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 축축한 촉감이 턱을 지나 입술 바로 옆까지 닿을 때 시라부는 비로소 다시 그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나리는 황홀함에 굴복할까 싶어 제 허벅지를 몰래 꽉 꼬집었다.


"간지러워요."

"알았다."


입술이 포개졌고 입 안에 침투해 엉겨붙는 우시지마의 혀에 굳어있던 시라부의 혀는 금방 동조하였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울렸다. 남의 타액을 달큰하다고 느끼는 날이 오다니. 죽을 때가 된 건지. 딴생각을 하다가 혼이라도 나듯 입술을 잠시 떨어뜨린 우시지마에게 아랫입술을 잡아먹혔다. 잘근잘근 씹다가 흐르는 타액을 핥은 그의 입술이 목덜미로 내려가자 시라부는 허전해진 입으로 말을 이었다.


"제 소원이라면 다 들어주신다고 하셨죠."


그의 입술이 떨어져나간 목은 축축해진 흔적 때문인지 전보다 더 서늘해졌다. 그는 잠시 하던 행위를 멈추고는 시라부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래."

"한낱 인간인 제가 신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보지 말라는 당신 얼굴, 감히 보려고 야단법석을 떨지는 않을 건데."

"계속 말해봐."

"그래도 역시 보고 싶어질 것 같거든요. 그러니 당신이 노력해주세요."


웃음소리가 달콤했다. 제가 아주 예뻐 죽겠다는 듯이 달게도 웃는 우시지마의 웃음에 시라부도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어떻게 노력해줄까."

"제가 같은 신이 되는 거죠 뭐. 기껏 내린 명령을 철회할 신은 없을 것 같고 저는 신화에 나오는 이들처럼 하지 말라는 짓 괜히 했다가 낭패 보는 타입은 아니라서."


우시지마는 이제 시라부에게 입맞춘 채로 웃어댔다. 터지는 웃음마다 훅 들어오는 공기에 시라부의 볼이 비눗방울처럼 사정없이 부풀어 올랐다 쑥 꺼지기를 반복했다.


"너는 정말이지.."

"그래서 대답은요."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불가능해."



하이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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