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죠죠 애니메이션 다시 보고 있습니다(현재 진도는 2부 끝).

어쩐지 다시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꺼내 봤습니다. 이걸로 미완만 3개째... 그것도 장르별로...

하지만 이 글에는 애착도 미련도 많아서 말이죠. 가능하면 완결까지 쓰고 싶네요.





6월(2)


우체통에는 두 종류가 있다. 편지를 보낼 때 집어넣는 커다란 우체통과, 편지를 받을 때 쓰는 작은 우체통이다. 큰 쪽은 일본이든 미국이든 – 세부적인 모양은 조금 다를지언정 – 똑같이 빨간색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카쿄인도 모르지만 아마도 눈에 잘 띄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면 적당히 납득할 수 있다. 작은 우체통은 어디건 천차만별이었다. 옛 집의 작은 우체통은 아파트에 딸려 있었고, 그 우체통 자체가 작은 아파트 같았다.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탁한 색깔이며 차곡차곡 쌓인 모양까지. 지금 사는 집의 우체통은 마당에 있었고, 커다란 우체통처럼 빨간색이었다. 모든 사람의 눈에 띌 필요는 없으니 다른 색으로 칠해도 좋았을 테지만, 굳이 바꿀 만큼 빨간색이 싫었던 것도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날 아침 그 작은 우체통에는 눈에 확 띄는 하얀 봉투가 들어 있었다. 홀리가 보낸 국제우편이었다. 카쿄인은 어쩐지 평소보다 두껍고 무겁게 느껴지는 하얀 봉투를 손끝으로 가볍게 더듬었다. 사실 실제로도 그랬다. 하얀 봉투를 열자 두 개의 봉투가 나왔다. 초록색 봉투와, 조금 더 작은 하얀색 봉투였다. 초록색 봉투는 홀리의 것이다. 카쿄인은 그것을 한쪽에 내려놓고 하얀 봉투를 이리저리 살폈다. 안에는 카드 같은 것이 든 것 같았다. 그리고 뒷면에는 보낸 사람 이름이 있었다. ‘마츠히사 아키에’.

카쿄인은 셰리와 함께 쇼핑을 갔던 것을 떠올렸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작은 카드를 샀던 것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그 카드를 봉투에 넣어 홀리에게 함께 보냈던 것도. 물론 카쿄인은 자신의 집 주소를 알고 있었다 – 하지만 이 집의 주소를 적어서 보내기가 저어되었고, 야스노리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번인가 주저했다. 결국은 홀리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홀리는 그 점에 대해 이제까지 언급한 적이 없었지만, 카드는 제대로 아키에에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 결과가 여기에 있다. 카쿄인은 하얀 봉투와 그 위에 적힌 아키에의 이름을 오래오래 내려다보았다. 아키에에게는 이름이 두 개 있었고, 어느 쪽인가 하면 마츠히사 쪽이 카쿄인 자신에게도 더 익숙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순간 이 자리에 적혀 있어서는 안 될 이름이었다. 언젠가 아키에가 카쿄인에게 다짐하듯 말했던 것처럼. 나는 네게 있어서는 언제든 카쿄인 아키에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적어서 보내셨어요. 카쿄인은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망설임의 흔적이라도 찾는 것처럼. 보지 않아도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도무지 그럴 수는 없었다.

“카쿄인! 카쿄인, 집에 있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어딘지 다급하게 들렸다. 카쿄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폴나레프가 문간에 서 있었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카쿄인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너 괜찮아? 카쿄인은 그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지만 모르는 것으로 해 두기로 했다. 카쿄인은 고개를 저으며 눈짓했다. 폴나레프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 있잖아... 죠타로가 지금 경찰서에 있어!”

“...왜죠?”

“누굴 좀 때렸나 봐.”

사실 그 말에 카쿄인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죠타로는 이유 없이 누군가를 두들겨 패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다른 사람을 때리지 않는 비폭력주의자도 아니다. 애초에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부터가 죠타로가 4대 1로 싸움을 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도무지 이유는 이해할 수 없지만, 죠타로에게 시비를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은 바다의 물방울만큼이나 많이 있었다. 뭐, 그렇다고 죠타로가 그 상대를 때려죽이거나 하지는 않았을 테니 이것은 그저 적당히 수습될 만한 일이었다. 그럴 터였다.

“그렇습니까. 그럼 조사를 좀 받은 후에 집에 옵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그 녀석 유치장에서 안 나간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

“...네?”

어쩐지 몹시도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카쿄인은 정신없이 폴나레프를 따라 집을 나섰다. 폴나레프는 아침에 죠타로가 혼자 나가는 것을 보았다. 왜 그가 혼자 다니는지 좀 궁금했다. 설마 카쿄인하고 싸운 건 아니겠지? 동생들 화해를 시켜 줘야겠다고 했더니 셰리가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끼어들지 말라며 잔소리를 했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마침내 죠타로에게 전화를 했더니 경찰이 받았다. 조사 결과 별 일이 아니었으니 데리고 돌아가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죠타로는 나가지 않겠다며 폴나레프를 돌아보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폴나레프는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 이유를 물었으나 죠타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결국 이유를 듣지도 설득하지도 못 한 폴나레프는 카쿄인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집까지 찾아왔다.

“...왜 애초에 경찰서에 가기 전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땐 정신없었으니까 그랬지! 그리고 말야, 난 너희들이 싸웠다고 생각했다니까?”

“우리가 정말 싸웠다면 제가 말해 봐야 죠타로는 안 나올 텐데요.”

“...그러네.”

“안 싸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 그래?”

아마도 죠타로는 카드를 든 채 망연해 있는 카쿄인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 말없이 혼자 나갔을 것이다. 원래 그들은 그날 오전에 함께 장을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카쿄인은 한숨을 쉬었다. 죠타로에게는 면목이 없었다. 혼자 나갔다가 어디서 누구와 시비가 붙은 것인지, 또 왜 나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직접 만나 보면 어떻게든 알게 될 것이 분명했다.

미국의 경찰서는 일본과 많이 달랐지만 경찰의 표정만은 똑같아 보였다. 도무지 죠타로가 왜 나가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카쿄인은 또다시 기시감을 느끼며 그가 죠타로를 데려갈 거라고 설명했다. 마음 깊은 곳이 수런거렸다. 뭔가가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 감각에 쫓기듯 카쿄인은 하이어로팬트 그린을 뻗었다. 가느다란 촉수가 경찰서를 온통 감싸며 퍼져나갔다. 멀리, 더 멀리, 아래로, 더 아래로 – 마침내 카쿄인은 유치장에 돌아앉은 죠타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굳은 듯이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카쿄인?”

“......”

“야, 왜 그래 너?”

“...아니야...”

“뭐?”

“저 사람은, 죠타로가 아니에요.”

“...뭐?”

매우 비슷한 느낌이긴 했다. 거의 똑같아 보일 만큼 닮은 얼굴이기도 했다. 아니, 아마도 그것은 죠타로 본인일 것이다. 하지만 죠타로가 아니었다. 죠타로의 표정이 아니고, 분위기가 아니었다. 실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럼 저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죠타로의 몸에 든 죠타로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니. 영혼을 바꿔치기하는 스탠드라도 등장한 것일까?

“...폴나레프.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엥? 내가 같이 안 가도 괜찮아?”

“만약 스탠드로 공격당한 거라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한 사람은 뒤에 남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야, 카쿄인, 너 진짜 괜찮겠어?”

폴나레프가 뭔가 더 말하는 것 같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카쿄인은 비틀거리며 모퉁이를 돌았다. 정신을 차려야 해.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며 온 몸에 하이어로팬트 그린을 휘감아 떨리는 다리를 지탱했다. 나는 이렇게 약해서는 안 돼. 차츰 떨림이 잦아들고 자세가 안정되었다. 카쿄인은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죠타로가 앉아 있는 유치장을 마주했다. 뒷모습은, 뒷모습만은 정말로 죠타로 같았다.

“...쿠죠 군?”

죠타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카쿄인은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이 사람은 죠타로가 아니다. 죠타로보다 조금 더 어린 표정이, 어딘지 방심한 듯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카쿄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철창 쪽으로 한 발 다가섰다. 죠타로는 아니다. 적어도 그가 알던 죠타로는 아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쿠죠 죠타로가 맞다.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비슷할 수는 없다. 그럼 대체 뭘까. 다른 세계의 쿠죠 죠타로? 그런 사람에게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날, 나는 무슨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더라?

“...너.”

“여기서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면서요.”

“...그래.”

“그러지 말고 이리 나오세요.”

“내가 나가지 않는 게 모두에게 좋아.”

“그게 무슨...?”

다음 순간 죠타로의 등 뒤에서 스타 플래티나가 커다랗게 모습을 드러냈다. 카쿄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이제까지 한 번도 스타 플래티나가 그를 이런 식으로 본 적이 없었다. 사냥감을 바라보는 듯한 난폭한 눈으로, 시선을 돌리면 곧바로 몸통을 꿰뚫을 듯한 날카로운 기세로 그것이 그를 보고 있었다. 혹시 이 죠타로도 제어할 수 없는 걸까.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내뻗던 첫날의 기억이 아련히 머릿속을 스쳤다. 하이어로팬트 그린이 카쿄인의 몸을 감싸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 촉각은 어렴풋한 경계를 나타내듯 촉수보다는 나뭇가지에 가까워 보였다.

“...네놈도, 보이나.”

죠타로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카쿄인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철창을 통과하는 순간 죠타로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카쿄인은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오른쪽,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죠타로는 그게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하지 못 한 것 같았다. 오른쪽? 그가 생전 처음 듣는 단어처럼 그 말을 따라했다. 카쿄인은 왼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한참 후 죠타로는 미심쩍은 얼굴로 제 오른손을 뻗어 그 손바닥을 맞추었다. 카쿄인은 고개를 저었다. 죠타로는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스타 플래티나의 주먹을 뻗었다. 왼쪽, 오른쪽. 죠타로의 제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죠타로는 이제 정말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문제없네요.”

“...뭐가, 말이냐.”

“스탠드를 잘 다룰 수 있잖아요. 그러니 괜찮아요, 밖으로 나와요.”

“내가 스탠드를 써서 널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나?”

“정말 그럴 생각이라면 이런 철창 같은 건 아무 제약도 안 될 텐데요.”

카쿄인은 고요히 확신했다. 이 사람은 그의 죠타로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쿠죠 죠타로였다.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예리하게 날이 서 있어도, 위협하는 듯한 목소리와 말투를 했어도, 어딘지 어린 티가 남은 표정에 순간순간 한참 나이든 사람 같은 표정이 섞여들어도, 분명 죠타로였다. 그렇다면 여기 둘 수 없다. 죠타로가 밖으로 나와선 안 될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자, 그때는 홀리 씨를 언급하니 나왔던 것 같은데, 이번엔 어떨까.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여길 나간다고 치지. 그 뒤에 나는 어디로 가는 거지?”

“네?”

“내 집은 일본이다. 여긴 일본이 아니야. 정확히는 내가 알던 시대조차 아닌 것 같군. 나는 어차피 갈 곳이 없어. 어디로 가라는 거냐?”

“...시대?”

“이봐, 내 질문에 대답을...”

“나와 함께 가면 돼요. 그보다 시대라니, 무슨 말이죠? 쿠죠 군은 어느 시대에서 왔다는 건데요?”

아니, 그럴 리가. 말은 별 이상 없이 잘 통하고 있었다. 시간이 100년만 차이나더라도 단어나 말투부터 알아듣기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죠타로는 묘한 얼굴로 카쿄인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해는 몇 년이냐.”

“2018년이에요.”

“...내가 아는 ‘올해’는 1987년이다.”

카쿄인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죠타로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스타 플래티나의 모습은 어느 샌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카쿄인은 낯선 죠타로와 함께 그들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폴나레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미리 눈짓을 던져 두었다. 폴나레프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전부 뱉으려다 목에 걸린 듯한 얼굴로 슬금슬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둥 머리는 끄트머리만 조금 움직여도 엄청나게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런다고 의미가 있었을지는 알 길이 없지만. 죠타로는 그것을 보았는지 말았는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카쿄인은 다소 어색하게 그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뒤늦게 어떤 방을 쓰라고 말해야 할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죠타로는 죠타로니까 죠타로의 방으로 가라고 해야 할까? 그랬다가 진짜 - 아니, ‘이 세계의’ 라는 표현이 정확할까 - 죠타로가 돌아오기라도 하면?

“...일단 제 방을 쓰시면...”

“...필요 없다. 군식구가 주인 방을 꿰차고 앉다니 농담거리도 못 되고.”

“하지만...”

“나는 어차피 감옥에서도 잘 있었으니 신경 꺼라.”

죠타로의 시선이 흘끗 응접실 탁자 위를 향했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 위에는 조금 전 급하게 집을 뛰쳐나가느라 미처 정리하지 못 한 편지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카쿄인은 죠타로를 이끌고 부엌 쪽으로 향했다. 물을 한 잔 건네자 죠타로는 별 말 없이 받아 마셨다.

“네놈 혼자 사는 집인가?”

곧이어 떨어진 질문에 카쿄인은 드물게도 잠시 망설였다. 어느 쪽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죠타로와 함께 산다는 걸 숨겨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죠타로와 그의 관계에 대해서는. 카쿄인은 미국에서는 제 성적 지향이나 죠타로와의 관계를 숨길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폴나레프에게도 셰리에게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하지만 상대가 다른 세계의 죠타로라면 어떨까. 저 죠타로는 다른 누군가와 잘 지낼 운명인데 카쿄인의 이야기를 듣고 쓸데없는 책임감 따위를 느끼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아뇨, 친구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카쿄인이 아는 쿠죠 죠타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눈썹을 꿈틀거렸을 법한 발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없다. 당장이라도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카쿄인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눈앞의 이 죠타로가 자기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그가 아는 죠타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죠타로는 흥미 없다는 듯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럼 네놈의 친구가 돌아왔을 때, 내가 여기 있으면 곤란하지 않겠나.”

“아, 아니요. 친구라면 이해해 줄 겁니다. 정 안 되면 압둘 씨네 잠깐 신세를...”

“압둘?”

죠타로의 눈가에 미미한 표정이 어렸다가 금세 사라졌다. 뭐였지, 지금 그건? 카쿄인은 잘못 본 건가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이 죠타로는 그가 아는 죠타로보다 훨씬 감정을 누르는 데 익숙해서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아까 1987년에서 왔다고 했지. 1980년대는 지금보다 좀 더 - 뭐랄까, 자신을 능숙하게 제어하는 것에 높은 점수를 매기는 그런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살아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네. 카쿄인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럼 또 내가 집주인을 쫓아내고 여기 눌러앉는 꼴 아닌가?”

“...네? 아, 아뇨.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장 쿠죠 군의 상황이 어렵게 된 거니까, 친구도 당연히 그렇게 하라고 할 겁니다.”

“...그 호칭 치워라.”

“네?”

“쿠죠 군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럼 뭐라고 부르죠?”

“죠타로라고 불러.”

“우리는 서로 이름으로 부를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을까요.”

“내가 상관없다는데 뭐가 문제지?”

“그렇게 예의 없이 구는 건 제가 불편해서요.”

뭐, 밖으로 내놓고 말할 수 없는 속내로 말하자면 예의와는 손톱만큼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카쿄인이 ‘죠타로’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아는 죠타로 한 사람뿐이다. 아무리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같은 영혼을 가진 게 아닐까 싶도록 비슷해 보인대도 명백히 다른 사람에게 그 호칭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죠타로는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구기며 카쿄인을 노려보았다. 분명히 말해서 엄청난 기세였고, 카쿄인은 집이 조금씩 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음, 역시 죠타로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그 바다의 물방울같이 많은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저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위축되는 기분인데, 거기서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다니.

“...그, 쿠죠 군이라는 호칭이 정 싫다면 ‘죠죠’는 어떤가요?”

“...죠죠...”

죠타로가 그 호칭에 썩 만족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따라하듯 그 단어를 한 번 입 안으로 굴린 후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린 티가 남았다고 생각했던 얼굴에 수십 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듯한 표정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저건 뭘까. 그리움? 카쿄인은 그 단어를 한 번 떠올리다 조심스럽게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그가 아는 단어들 가운데서라면 그것이 가장 가까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들어맞는 느낌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부정적인 느낌이 섞여 있어 더욱 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흘렀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죠타로는 돌아오지 않았다(카쿄인이 짐작한 대로였다). 더불어 낯선 죠타로가 사라지지도 않았다. 낯선 죠타로도 죠타로는 죠타로라 고집이 더럽게 셌고, 카쿄인이 아무리 말해도 응접실 소파 위에 몸을 대충 구겨 넣고 잠을 청하는 짓을 절대로 그만두지 않았다. 카쿄인은 그 나름대로는 시위할 생각으로 무릎담요를 몸에 감고 그 옆에 주저앉아 보았다. 죠타로는 곰과 별이 그려진 담요를 한참 보았을 뿐 별다른 말도 반응도 없었으나, 깜빡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자기 방 침대 위로 옮겨져 있었다. 카쿄인은 떠메고 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잠드는 편도 아니건만 도대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조차 짐작할 수가 없었다.

폴나레프는 하루에 한 번씩 집에 들러 죠타로의 눈치를 살피며 카쿄인에게 뭔가 새로 알게 된 것이 없는지 캐물었다. 카쿄인은 고개를 저었다. 죠타로의 휴대전화는 낯선 죠타로가 입고 있던 옷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걸 알고 나니 알맹이만 다를 뿐 껍데기는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만 더 강해졌다. 압둘의 점에도 뾰족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카쿄인은 홀리나 죠셉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지, 알린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할까? 조치를 취했어야 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죠타로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마당 구석에 고기와 물과 커피 껌을 놓는 카쿄인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녀석을 기르는 건가.”

“저희 집 개는 아니지만 종종 들러서요.”

“네가 기르지도 않으면서 밥까지 준다고?”

“신세진 것도 있고, 좀... 그러네요, 정이 들었을까요.”

카쿄인은 대꾸하면서도 이기가 좀 있다 오기를 바랐다. 이틀 전 죠타로와 마주친 이기는 문자 그대로 맹렬하게 짖어댔다. 카쿄인조차 놀랄 만큼 격렬한 적의였다. 모래로 만들어진 스탠드체까지 개의 등 뒤에 어른거렸다. 카쿄인은 이기를 말리려고 애썼지만 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죠타로는 피할 생각조차 없는 양 둘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휙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이기는 카쿄인의 마당에서 밥을 먹지 않고, 물 한두 모금만 급히 넘기고는 고기와 커피 껌을 챙겨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제가 물어 놓고도 죠타로는 카쿄인의 답변에 별 반응이 없었다. 뭐, 그가 제대로 반응하는 것이 있기는 한지 묻는 쪽이 빠를지도 모른다. 원래의 죠타로도 말이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성격이었는데 이 죠타로는 한층 더했다. 그나마 첫날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날이었고, 사흘째는 하루 종일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심하다는 생각에 카쿄인 쪽에서 먼저 말을 걸기도 했지만 죠타로는 내키지 않을 때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음, 역시 죠셉에게는 알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카쿄인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전화를 걸었다. 정작 죠셉은 바빠서 제대로 통화할 시간조차 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카쿄인은 망설이다 사정을 간략하게 적어 메일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죠셉이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정작 나온 말은 영 엉뚱한 것이었다.

- 그냥 내버려두거라, 카쿄인.

“...네?”

-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다.

“그게, 무슨...”

- 녀석은 곧 자기 세계로 돌아갈 거고, 그러면 내 손자도 돌아올 게다. 유일한 문제는 그간 네가 고생을 좀 하겠다는 건데... 나는 지금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으니 죠타로가 돌아오거든 맛있는 거라도 먹여 달라고 하는 게 어떻겠냐?

“네? 아니, 그건 괜찮습니다만... 정말로 괜찮은 건가요?”

- 그래, 확실하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단다. 다 이리 될 일이어서 이렇게 된 거니까.

그 말은 퍽 이상하게 들렸다. 하지만 카쿄인이 재차 물을 새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카쿄인은 하릴없이 전화를 놓고 죠타로의 동태를 살폈다. 죠타로는 응접실 소파에 누운 채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깐 정도는 괜찮을까. 카쿄인은 잠시 망설이다 밖으로 나왔다. 압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그가 집에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폴나레프가 따라붙었다. 집을 감시하기라도 했냐는 질문에는 펄펄 뛰었지만 그래서 더 수상해 보였다. 압둘은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고 웃으며 차를 내왔다.

“나도 뭐라고 설명하긴 어렵군. 점괘도 영 애매하게만 나왔고... 하지만 죠스타 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별 일은 없을 거다. 그분의 스탠드는 일족의 위험에 강하게 반응하니, 죠타로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도 있었다면 벌써 알고 계실 테니까.”

“그렇습니까...”

“확실히 느낌이 좀 묘하긴 했다만 딱히 우리에게 뭘 어떻게 할 생각도 없는 듯하고.”

“죠타로인걸요. 제가 알던 죠타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죠타로인데 그런 짓을 할 리 없어요.”

압둘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카쿄인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미지근한 온기에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조금 전의 말은 어쩐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죠타로가 뭔가 나쁜 짓을 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가 그들을 해치거나 괴롭히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있다. 하지만 저 죠타로를 보고 있을 때면 이따금씩 굉장히 안 좋은 느낌이 드는데, 그 이유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죠타로가 카쿄인을 노려본 건 첫날 하루뿐이었다. 위협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그날뿐이었다. 그런데 왜.

“카쿄인. 네가 힘들다면 죠타로를 내가 데리고 있어도 괜찮다만?”

“...예?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괜찮아요.”

“죠타로가 저렇게 된 게 네 탓도 아니고, 너 혼자 책임을 져야 할 일도 아니다. 죠타로만 수락한다면 나는 아무 문제도 없으니 한 번 이야기는 꺼내 보는 게 어떻겠나?”

카쿄인은 괜찮다고 두어 번 더 말했으나 압둘은 완고했다. 폴나레프까지 옆에서 거드는 데는 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카쿄인은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말문을 열어야 귀찮으니 저리 가라는 느낌으로 들리지 않을까.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현관문을 열고 보니 죠타로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생각에 잠긴 사람’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한 완벽한 모습이다. 그 완벽한 조각상 같은 남자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집 물건을 전부 훔쳐 달아나기라도 하면 어쩔 생각이냐.”

카쿄인은 무심코 웃고 말았다. 죠타로가 농담을 건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말투도 표정도 영 아니긴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안 그랬잖아요?”

“이제부터 그럴 수도 있지.”

“굳이 제가 돌아온 다음에요?”

“값나가는 물건을 어디 두었냐고 물을 셈일지도 모르잖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이제 심문할 시간인가요?”

죠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웬일로 조금 이어지나 싶던 대화가 끊어졌다. 카쿄인은 약간 당황하며 죠타로를 돌아보았다. 죠타로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죠죠? 카쿄인이 별명을 부르자 그는 조금 전보다 약간 더 잠긴 목소리로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너도 2P가 되고 싶었나?”

“...2P...?”

2P가 뭐지? 카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긴 한데 그 단어라면 죠타로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아서 이 질문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도 그 외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카쿄인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게임의 2번 플레이어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거.”

“아, 그랬죠. 매번 혼자 하니까 서글프기도 했고, 뭐 그렇게 거창한 거 아니라도 2P 색깔이 초록색인 경우가 많아서요. 제가...”

“초록색을 좋아하니까?”

“...네. 말한 적 있었나요?”

죠타로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모자 그늘 너머로 카쿄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돌아선 어깨가 바위처럼 굳고 고독해 보였다. 카쿄인은 그 등을 감싸 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저 죠타로는 그가 아는 죠타로가 아니어서. 저 죠타로가 품고 있는 숱한 고뇌와 문제가 무엇인지 그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서. 카쿄인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공연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할 말 있으면 해라.”

“...그... 죠죠. 압둘 씨가... 자기 집에 와서 지내도 괜찮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내가 갔으면 좋겠나?”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안 간다.”

칼로 자르는 듯한 대답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대화가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 카쿄인은 입술을 달싹이다 몸을 돌렸다. 도저히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희미한 의문이 힘에 겨웠다. 죠타로는 ‘너도 2P가 되고 싶었나’ 하고 물었다. 즉 그에게 2P가 되고 싶다고 말한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다 - 그건 누구였을까. 다른 세계의 카쿄인 노리아키? 순간 싫은 느낌이 등골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 카쿄인은 두 팔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 왜 자꾸 이런 느낌이 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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