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 세요.”

말에 생긴 공백은 주의를 바짝 기울여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짧았다.

나는 찰나의 빈틈이 만족스러웠다. 내게 따라붙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카운터석을 향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 하교하는 시각은 꽤 이르다. 그래서인지 포와로는 한산했다. 이른 오후 특유의 나른한 공기 속에 커피 내음이 섞여들었다. 카페 내부로 들어설수록 마음이 푸근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남자를 상대하기 편하다는 말은 아니다.

“어라? 코난 군은 조금 전에 올라갔을 텐데?”

포와로의 점원, 아무로 토오루는 으레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후루야 레이가 아닌 아무로 토오루는 하이바라 아이를 어디까지나 에도가와 코난의 친구로서 인식할 테니 저 물음은 왜 코난도 없이 혼자 왔냐는 의미였다.

쿠도 군은 일부러 따돌리고 왔다. 갈림길에서 헤어진 뒤 집으로 가는 척하다 그대로 먼 길을 돌아 이곳 포와로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했냐면 이쪽도 나름 알아보고 싶은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 수집의 달인에게 한 번쯤 거꾸로 정보를 캐내 보기도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햄 샌드위치 5개 포장 부탁해.”

근방에서 꽤 알아준다는 햄 샌드위치는 아직 먹어 보지 못했다. 당연하다. 햄 샌드위치의 레시피는 이 남자가 발명했고 나는 그를 피해 다니기 바빴으니까. 언젠가 아유미가 검지를 문 채 아무로 씨가 만든 햄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며 그리운 듯 말했을 때는 순수하게 그 맛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흠, 포장이라……. 포장은 별로 권유하고 싶지 않네. 햄 샌드위치는 만들고 나서 바로 먹어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거든.”

“어머. 얼마나 대단하신 샌드위치길래 포장도 안 되는 걸까?”

나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옅게 웃으며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가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 두 팔꿈치를 조리대에 얹었다. 덕분에 눈높이가 낮아져 그의 시선이 카운터석에 앉은 내 시선과 얼추 직선으로 맞닿았다.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야. 권장 사항이 아닐 뿐이지. 포와로 햄 샌드위치는 일반적인 샌드위치랑 달리 따뜻한 게 핵심이거든. 따뜻하면서도 너무 무르지는 않게, 아삭 바삭한 식감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재료를 살짝만 데우는 거야. 양상추는 적정 온수에 담갔다가 물기를 빼고, 빵은 일부러 딱딱한 걸 준비해 뒀다가 미리 찜통에 넣어 두고. 그렇게 하면 맛이 좀 더 진하게 느껴져.”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그가 자연스레 재잘거렸다. 표면적으로는 어린아이를 상대한다는 상황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는 노래라도 부르는 듯 나긋했다. 사근사근한 눈매를 살며시 덮은 앞머리가 연하고 보드라웠다. 나는 말할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는 금발의 앞머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아삭했던 식감이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물러지는 건 나도 어쩔 수 없어. 물론 포장용으로 일반적인 햄 샌드위치를 만들면 되지만, 아무리 그래도 포와로까지 왔는데 소문의 햄 샌드위치는 한번 먹어 봐야 하지 않겠어?”

그가 방긋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포와로까지 왔는데’라는 말에는 알 수 없는 함의가 느껴졌지만─내가 그를 피해 포와로에 발길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겨냥하는 듯했다─ 어쨌든 그의 말에는 전반적으로 귀여운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후루야 레이의 또 다른 인격인 아무로 토오루를 잘 알지 못하지만, 조금 전의 대화를 통해 살짝이나마 본질을 엿본 듯했다.

그는 비록 잠입 수사의 일환일지라도 그 역할에, 현재는 카페 점원으로서 역할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 진지하고 모든 일에 성실한 스타일. 본인은 사는 게 피곤할지 몰라도 남들에게는, 특히 사회에서는 인정받는 유형의 인간일 것이다. 그러니 젊은 나이에 관리직까지 올랐겠지만.

나는 새롭게 알게 된 면모에 진심으로 흥미를 느꼈다. ‘귀여운 자부심’이라는 평가는 빈말이 아니다. 한없이 수상쩍게 느껴지는 완벽한 미소도 실은 서비스직의 본분을 다하려는 노력이었다면 그건 또 나름대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그럼 하나는 여기서 먹고 갈게. 나머지는 포장용으로.”

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빵, 햄, 양상추, 마요네즈, 올리브오일과 같은 재료들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찬장 어디선가 찜통을 꺼내 드는 모습에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찜통에 빵을 찐다느니 어쩌느니 했었지. 어김없이 그의 손길이 닿아 있는지 찜통은 새것인 양 반짝반짝 윤이 났다.

그가 빵 두 장을 찜통에 넣고 쿠킹 볼에 마요네즈를 짰다. 그 옆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스. 꼭 된장처럼 생겼는데 실제로도 된장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햄 샌드위치의 비결은 저 소스인 것 같았다. 내가 소스를 쳐다본다고 눈치챘는지 그가 작게 웃으며 된장이라고 말해 주었다. 된장이라……. 샌드위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남자가 하는 음식이라면 뭐든 맛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럼 나머지 네 개는 박사님 몫이겠네? 아무리 박사님이래도 네 개는 무리 아닐까. 이거, 이래 봬도 먹고 나면 배부르거든.”

마요네즈와 된장을 섞어 빵 위에 소스를 바르고, 그 위에 햄을 한 장 얹어 올리브오일도 바르고. 재료 위에서 춤추는 기다란 손가락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으면 그가 또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적어도 아무로 토오루는─ 수다 떨기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그중 두 개는 옆집 남자 몫이니까.”

순간 그의 손이 우뚝 멎었다.

그가 아래를 향한 시선을 조금만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임을 증명하듯 무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이 말을 하려고 이곳에 왔대도 과언이 아니다.

“옆집 남자라면…… 그 대학원생?”

대학원생을 발음하는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기어들어 갔다.

그가 언짢음을 숨기지 못해서 나는 혼자서 이곳까지 방문한 일에 보람을 느꼈다. 아무로 토오루라면, 아니. 버번이라면 반드시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고 생각했다.

“응. 남의 일에 어찌나 참견이 심한지 내가 누구랑 무슨 얘기를 했는지까지 다 알려고 든다니까.”

나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올리브오일이 어정쩡하게 발려진 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박사님이 안 계실 때 후루야 레이와 APTX4869의 데이터가 담긴 USB를 교환한 다음 날. 옆집 남자 오키야 스바루는 또 양손에 카레가 든 냄비를 들고 박사님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수상쩍은 미소만은 여전했지만 그날따라 그는 이상하게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 “그래서 그 남자와 얘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평소와 같은 대화에 예고도 없이 끼어든 질문. 나는 입까지 가져다 댄 홍차를 마시려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 “포와로의 그 남자 말입니다. 어제 잠시 이곳에 방문한 모양이던데요.”

옆에 있는 박사님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포톡신에 관한 일이다. 그런 일을 남에게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었다. 박사님만은 예외지만 그랬다가는 실수로라도 신이치에게 누설될 염려가 있었다. 그러면 그 바보 같은 러브코미디 탐정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 데이터로 완벽한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는 보장도 없기에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기밀에 부치는 방식이 모두에게 좋았다. 특히 조직에 잠입한 상태에서 민감한 데이터를 유출해 나에게 건넨 그 사람, 후루야 레이를 위해서도.

하지만 내가 그와 만났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오키야 스바루는 이미 파악을 끝냈다는 얘기였다. 이 남자가 시도 때도 없이 일삼는 도청과 해킹에는 이미 진절머리가 날 정도니까. 돌연히 그가 과거에 저지른 수많은 악행이 떠올라 나는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고 날카롭게 내뱉었다.

─ “어차피 도청기로 다 듣고 있었잖아? 이렇게 돌려 묻는 의도는 뭘까?”

─ “확실히 듣고 있었다면 이렇게 돌려 묻지 않습니다만, 설치해 둔 도청기는 누군가가 깨끗이 회수해버린 모양이라서요.”

대답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그동안의 도청과 해킹은 암묵적인 사실이었을 뿐 그가 대놓고 인정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주춤대는 사이 그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 “그런 깔끔한 작업은 그 남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반신반의하며 물어봤습니다만, 딱히 부정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어제 방문한 사람은 포와로의 그 남자가 맞는 것 같네요.”

후루야 레이에게 묘한 존경심이 싹텄다. 그는 박사님이 집을 비운 날을 골랐을 뿐 아니라 오키야 스바루의 감시 또한 소홀해진 틈을 타 나를 만나러 왔던 것이다. 그런 데다 내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한 수많은 도청기는 어느 틈에 전부 회수했는지. 정말이지 후루야 레이는 생각보다 엄청난 인물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말했니?”

오키야 스바루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느라 잠시 멀어진 의식이 다시 또렷해졌다.

“말할 리가. 그냥 같이 케이크를 먹었을 뿐이라고 했지. 실제로도 그랬고.”

“그렇구나.”

그가 안심한 듯 다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조용한 실내에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리는 가운데, 그가 작업을 이어가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나저나 초등학생의 일거수일투족에 흥미를 느끼다니, 기분 나쁜 남자가 따로 없네.”

“동감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 남자 몫의 샌드위치에 겨자를 넣어도 괜찮을까?”

“…….”

분명 장난스럽게 던진 말일 텐데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엄숙해서 나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건 좀 참아 줘. 행여나 박사님이 드시면 큰일 나니까.”

“그래? 아쉽네.”

그가 정말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가 문득 내보인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 놀라웠다. 이런 장난기를 가진 사람인 줄은 몰랐다. 내가 여태 박사님의 집에서 봐 온 후루야 레이는 늘 담백하고 사무적인 태도였으니까. 집에서는 일 얘기만 하니까 당연하지만. 어쨌든 나는 당황하는 와중에도 아무로 토오루와의 만남이 꽤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남의 샌드위치에 겨자를 넣느니 마느니, 설마 그런 농담도 내뱉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가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상대가 오키야 스바루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의 추리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정확히는 그가 오키야 스바루여서가 아니라 버번의 철천지원수이자 우리 언니의 전 애인, 모로보시 다이─코드 네임 라이이기 때문에.

어느 날 사는 집에 불이 나 얼떨결에 쿠도가에 얹혀살게 된 그 남자는 대놓고 수상쩍게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조직의 기운이 느껴져 바짝 긴장한 나와 달리 신이치는 그를 하염없이 신뢰했는데, 그때부터 혹시나 한 심증은 미스터리 트레인 사건 이후 확증으로 바뀌었다. 신이치의 입에서 직접 ‘우리 편’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다. 그는 도청과 해킹처럼 수상쩍은 행동을 일삼았지만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이것 역시 나의 추측이지만,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를 보호하려는 이유는 아마 죽은 언니를 향한 죄책감 때문이겠지.

“자, 먼저 샌드위치 하나 완성.”

그가 완성된 샌드위치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접시에 담아 주었다. 내가 한 입을 맛보는 사이 그가 부지런히 유리잔을 꺼내 오렌지 주스를 따랐다. 본인이 마시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가 내 앞에 컵 받침을 놓더니 그 위에 주스를 올려 주었다.

“……주스는 시킨 적 없는데.”

“서비스. 목이라도 막히면 큰일이니까.”

그는 또 방긋 웃고는 나머지 샌드위치를 마저 만들었다. 미소에 동요하는 것도 잠시, 나는 입안에 퍼지는 맛과 식감에 집중했다. 따뜻하면서도 푹신푹신한 식감. 올리브오일이 발린 햄이 살짝 느끼하다 싶을 때 아삭한 양상추가 끝 맛을 상쾌하게 잡아 주었다.

그러니까, 맛있었다.

별것도 아닌 재료들이 한데 모여 더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맛. 나는 어느새 한 조각을 해치우고 두 번째 조각을 입에 물었다. 맛있는 건 맛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정말 맛있는 샌드위치였다.

“맛있어?”

포장용 샌드위치는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모양인지 그는 어느새 네 개의 샌드위치 위에 차례로 빵을 덮고 있었다. 나는 빨대로 주스를 빨아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없거나 평범한 경우라면 그다지 유명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둥 거리낌 없이 빈정거렸을 텐데, 이건 정말로 맛있으니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그 대학원생이 만드는 요리보다는 확실히 맛있을 거야.”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고 나는 또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어지간히 싫어하나 보네, 그 옆집 남자.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처음에는 완전히 익지도 않은 스튜를 들고 찾아왔거든.”

“호오……. 이를테면 도청기로 오가는 대화를 듣다가 사건에 끼어들기 위해 허겁지겁 만들어 온 것 같은, 그런 음식인 거네?”

“빙고.”

역시. 이 남자는 오키야 스바루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리고 오키야 스바루를 이토록 싫어하는 그의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아무래도 옆집 남자는 모로보시 다이인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로 토오루는 마찬가지로 사 등분 한 샌드위치 네 개에 가지런히 랩을 씌웠다. 슬슬 마무리 단계인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쫓겼다. 나는 샌드위치를 입에 서둘러 쑤셔 넣었다.

“박사님한테도 안부 전해 줘.”

봉투 안에 차곡차곡 샌드위치를 담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럴게. 얼마야?”

“아, 이건 내가 계산하는 거니까. 괜찮아.”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눈만 깜빡였다.

“몇 개가 그 대학원생 입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좀 탐탁지 않지만, 어쨌든 오늘은 네가 여기 와 준 첫날이니까.”

오늘이 포와로에 처음 온 날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점원이 되고 나서는 한 번도 들르지 않았으니, 아마 그가 말한 ‘첫날’이란 내가 그를 만나러 온 첫날 정도의 의미였다. 하지만 첫날이 됐든 둘째 날이 됐든 내가 그에게 얻어먹을 이유는 되지 못했다.

“아까 오렌지 주스로 충분해.”

“정말 괜찮으니까.”

그는 완벽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웃고는 있지만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린 빈틈없는 웃음. 하지만 나라고 물러날 뜻이 있지는 않았다.

“싫어. 당신한테 빚지는 거, 별로 내키지도 않고.”

그가 아무리 조직에 잠입한 스파이고 본모습은 경찰이라 한들 내게는 변함없이 불편한 상대였다. 고작 샌드위치를 얻어먹는 게 뭐 그리 대수냐 싶지만 어쨌든 이 남자에게는 아주 조금의 빚도 지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는 가벼운 호의처럼 보여도 그 속에 어떤 꿍꿍이가 숨겨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마이너스가 될 만한 요인은 남겨 두지 않는 편이 좋았다.

나의 태도와 눈빛에서 뿌리 깊은 불신감을 읽었는지 아무로 토오루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계산하는 대신, 너는 내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로. 그럼 빚지는 것 없이 깔끔하겠지?”

“아니, 그건 깔끔하다기보다 아주 부당하게 느껴지는데…….”

반론의 여지 없이 내가 불리했다. 그런 건 초등학생이라도 알았다. 설마 겉모습이 어린애라고 나를 정말 초등학생 수준으로 여기는 걸까. 내가 정말 그 터무니없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럼 내 소원을 먼저 말할게. 들어 보고 맘에 들면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맘에 안 들면 그냥 네가 이 샌드위치 값을 지불해. 어때?”

뭐가 됐든 저 남자가 샌드위치 값을 치르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소원이 무엇일지는 조금 흥미가 생겼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상체를 숙여 내 귀에 바짝 다가왔다. 앗 할 틈도 없이 좁혀진 거리에 내 몸이 딱딱히 굳었고 예민해진 신경으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시호 씨. 앞으로도 종종 포와로에 들러요. 일의 진척이나 변동 사항을 얘기하기 더 수월할 것 같으니까. 갈 때마다 도청기 회수하는 것도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서요.”

시호 씨라는 호칭. 예의 바른 존댓말. 담백하고 사무적인 말투.

후루야 레이다. 나는 귓속으로 정확하게 꽂히는 말을 그저 멍하니 듣고 있었다.

“물론, 그 남자한테는 비밀로.”

그가 다시 상체를 일으켜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가 바로 완벽한 웃음을 지었기에 나는 방금 들은 말이 환청이었나 의심이 들었다.

대체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일의 진척이나 변동 사항이라면 필시 그가 넘겨준 데이터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에게 데이터를 넘겨받은 이상 나에게는 일의 진행 상황을 보고할 일정 정도의 의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남자한테 비밀로 하라는 뒷말은 아마, 오키야 스바루를 겨냥한 말이겠지. 그날도 일부러 도청기를 전부 회수한 모양이니까.

“어때. 소원 들어줄 마음이 좀 생겼어?”

그가 방긋 웃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아니, 방금은 소원이라기보다 명령 내지는 지시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과연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내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샌드위치 값을 낸다면 이전에 우리가 USB를 두고 한 거래에 차질이 생겨버린다.

아, 그러고 보니 그날 한 거래의 내용이 뭐였더라? 나는 USB를 받았고 그는 무언가를 요구했다. 뭐였지…… 뭐였더라…… 아, 그래. 그는 내가 미야노 시호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조직으로 데려갈 거냐는 말에 그는 부정했고 재판에 회부할 거냐는 말에는 모호하게 답을 회피했다. 그때도 참 이상한 거래라고는 생각했는데.

“……오늘처럼 종종 들르면 된다는 거지?”

“그렇지.”

“내용을 주고받을 방식 같은 건…….”

“그런 건 천천히 생각해도 돼. 일단 네가 와 준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

대화의 흐름이 묘하게 그날과 겹쳐져 나는 무심코 눈썹을 찡그렸다.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대답은?”

“……좋아. 소원…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들어줄게.”

사실 소원이라는 단어보다는 밀명密命이라든지 밀령密令이라는 말이 훨씬 어울릴 것 같지만 일단은 소원이라 쳐 두자. 본의 아니게 무거워진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고 싶으니까. 솔직히 지금 내린 선택이 타당한지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단지 오키야 스바루가 모로보시 다이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그의 페이스에 정신없이 휘둘리고 있었다.

문득 나를 보는 시선을 느끼고 나 또한 그를 마주 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든 봉투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일단 샌드위치다. 샌드위치를 받고서 얼른 이 가게를 나가자. 생각은 그다음에 해도 좋다. 그리고 다음부터 이 가게에 올 때는 조금 더 신중하게 굴자. 그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이 남자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애초에 그에게서 정보를 빼내 보겠다는 가볍고 순진한 마음으로 이곳을 찾은 내가 바보였다. 이 남자와 단둘이 얘기하다 보면 혼이 다 빠져 나가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가져가는 거다. 저 샌드위치를. 그렇게 생각하며 팔을 뻗었다.

“……?”

하지만 그만큼 팔을 뒤로 빼버리는 몸짓에 힘이 쭉 빠졌다. 이건 또 무슨 장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읽은 것일까, 그가 또 옅게 웃었다.

“유비키리겐만指切り拳万(*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그가 새끼손가락만 펼친 왼손을 나에게 뻗으면서 말했다.

“…….”

유비키리겐만이라니. 약속을 지키자는 의미에서 어린아이끼리 곧잘 하는 소꿉놀이와 같은 행동을, 지금 여기서, 우리 둘이 하자는 걸까. 아니, 확실히 나는 초등학생의 몸이니까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그가 어서 걸어 달라는 듯이 새끼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약속이란 말을 썼지.

“당신, 약속 참 좋아하네.”

내키지 않았지만 머뭇머뭇 새끼손가락을 올려 그의 손가락에 얽었다. 내 엄지보다 큰 손가락에 하염없이 작기만 한 내 손가락이 얽히면 그가 어둡고 단단한 손가락에 힘을 꾹 실었다.

“거짓말하면 바늘 천 개 먹일 거야.”

“어머나, 무서워라.”

아무리 노래 가사라고 한들 이 남자가 말하면 어째 진심으로 느껴져 등골이 서늘했다.

그가 천천히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멀어지는 온기가 내게는 조금 아쉬웠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하이바라 아이 쨩.”

“…….”

하이바라 아이로 불리기는 처음이라서 나는 또 당황했다.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봉투를 건네받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다음에 또 봐, 아무로 씨.”

마찬가지로 내가 그를 아무로 씨로 부른 것도 처음이었다. 어디까지나 이곳은 포와로이고 어디까지나 그는 지금 아무로 토오루니까. 나는 달랑달랑 봉투를 흔들며 가게 문을 나섰다. 실제로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데 체감상으로는 한 시간쯤 흐른 느낌이었다.

딸랑. 문을 열자 그곳에는 행인들의 웅성거림과 발소리, 눈앞을 빠르게 스쳐 가는 자동차들의 잔상.

순간, 조금 전 일이 모두 꿈같이 느껴져 황급히 뒤돌았다. 유리 너머 아무로 토오루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웃고는 왼쪽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왜인지 내 새끼손가락에도 열이 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우물쭈물 어떤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런 웃는 얼굴로 사사로운 스킨십을 하는 건 조금 반칙이라고 생각해.■


*유비키리겐만: 指切り拳万유비키리 겐만(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 嘘ついたら針千本飲ます 우소츠이타라 하리센본 노마스(거짓말하면 바늘 천 개 먹일 거야) … 라는 노래를 부르며 약속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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