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천비가虎天飛歌
: 하늘을 가르고 날으신 호랑이를 노래하다





 대신 중 여인의 머릿수가 반이 넘었다. 남신男臣들은 편전에서 대면한 이가 또렷하고 분명한 말씨로 그건 아니 될 말씀이라며 일언반구에 자를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정책을 논의하면서도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하면, 심신이 미령하거나 연로한 자는 자주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그리 몸이 약해서야 쓰겠는가. 왕은 매번 혀를 끌끌 찼다. 의원들의 손이 떨어진 후 기력이 쇠했다, 하면 자택에서 쉬고 오라는 명이 하달되었다. 그 자리엔 또 여인이 올라섰다.

 치렁치렁한 대신복이 이제는 사라진 무희의 치마와 다를 바 없다는 상소문 끝에 복식까지 새로이 맞추었다. 시복時服과 조복朝服이 크게 달라졌는데 사냥할 때의 복장과 비슷하게 윗도리는 짧아지고 하의는 더욱이 단출해져 오랜 시간 업무를 보아도 편안하고, 당장이라도 산과 들을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이동성이 탁월했다. 특히 연로한 대신이나 아이를 보아 거동이 쉽지 않은 이들이 크게 반기었다.



제2장
불씨가 퍼지는 계절



 나라 꼴이 기묘하다. 나랏님은 이 땅 위에서 흐른 역사를 반反하고 뒤틀고 있다. 기실 왕은 하늘에서 점지한 이가 아니라, 망치러 온 귀鬼다.


 즉위 3년. 벽서 하나에 나라가 일렁였다. 반기를 들고 분에 차 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거나 괜한 이를 붙잡아 해치는 극악무도한 죄인이 늘고 있어, 지방관아의 포졸은 쉬는 날 없이 뛰어다니기 바빴다. 흉악하기 그지없는 벽서는 빠르게 찢기고 태워졌으나 이미 보인 것을, 퍼진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쥐꼬리에 붙은 불처럼 번지고 번져 마침내 궁으로 닿았을 때. 왕은 어찌하였는가.


“과인이 이 땅을 망치러 왔다?”


 망종芒種을 지나 보내고 하지夏至를 기다리던 시기인지라 한층 가벼워진 차림으로 소박한 오찬午餐을 즐기고 있었더랬다. 일전의 사내들이 즐기던 연회따위와는 사뭇 달랐다. 모두가 즐거이 먹고 있었으나 술은 한 방울도 없었고 그 곁에 앉아 시중드는 무리도 없었다. 정자 아래에선 나인들끼리 서로 육고기 먹느라 바빴고, 웃도리를 벗어젖힌 백정이 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화공畫工선생이 와선 껄껄 웃으며 그리기 바빴으니, 참으로 기묘한 모습이기는 했다.

 이번 오찬은 얼마 전 바다가 덮쳐 수많은 사상자가 났던 저 먼 바다 마을을 돕고 살린 지방 수령들과 관청에 소속된 자들을 불러 노고 치하와 함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왕은 이미 친히 교지와 필요 물자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관리인들까지 불러내었다. 개중엔 고을의 가장 웃어른도 있었는데 노령의 만신萬神으로서, 왕 역시 그를 익히 알고 있음이었다.


 예인 교육을 받고 있다는 지방 수령의 아이가 뽑아내던 구수한 가락이 삽시간에 멎었다. 어느 이는 노기를 가라앉히려 옷자락을 쥐기도 하고, 품의 아기를 달래기도 했다. 이를 고한 영숙은 침묵했다. 이토록 중요하고 좋은 자리에서 올릴 소리는 아닌 줄 알지만 그렇다 하여 제 판단대로만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머리에 둘러쓰고 있던 건巾을 풀어 내린 왕이 호탕하게도 웃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전하.”

“알았으니 내금위장은 그에 대해 조사토록 하고, 관련된 자는 결단코 사살하지 말고 생포하라. 내 직접 죄를 묻도록 하겠다. 또한 이와 관련해 백성들이 동요치 않도록 하라.”


 명을 받잡은 영숙이 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가자 왕은 가락이 끊겨 두 손을 꾹 붙든 아이에게 곶감을 쥐여주며, 재주를 볼 자리를 마련할 터이니 때가 되면 다시 보여달라 말했다. 단 한마디로 단단히 굳어있던 분위기가 누그러지기 시작하자 만신이 입을 열었다.


“이 늙은 몸 내려가걸랑 크게 굿판을 벌이든지, 신당을 치우든지 해야겠십니다.”

“어찌 그러는가.”

“나라님께서 귀라 하는데, 그라믄 지가 몰라봤다는 거 아입니꺼. 사람들이 내같은 노무老巫는 이제 못 믿는다는 건지, 아니믄 가까이에 있는 귀도 몰라보는 만신을 손가락질 하는 긴지 모르겠네예. 이래가지고 낯짝 들고 못 삽니다. 하이고. 만신이라꼬 전하께서 내려주신 비단도 여즉 있는데, 우얍니꺼. 고마 저 짝에서 소 가르던 칼로 콱 죽어야겠십니더.”


 왕은 또다시 웃었다. 이전보다 가벼운 소리였다.



 해시亥時가 넘어선 시각. 벽서를 붙인 범인이 잡히어 은밀하게 궁으로 들어왔다. 이미 잡힌 마당에 대역죄로 의금부에 압송될 것은 알았으나 용안을 대면할 줄로는 몰랐던 사내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실금부터 하였다. 이리도 보잘것없는 치가 한 것이 맞는가. 창 하나 없이 작은 횃불만이 앞을 밝히는 어둠 속에서 천안天眼이 길게 가늘어졌다.


“이런 벽서를 붙이면서도 목숨 내놓는 것은 두려웠더냐.”


 땅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호랑이. 사내는 호랑이를 떠올렸다. 언젠가 만났던 산호랑이.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무작정 내달렸던 그 옛날의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네놈이 주리가 틀려야 답을 내놓겠느냐. 전하의 하문이시다. 당장 답을 올리거라.”


 뒤이어 들리는 음성 역시 짐승의 것으로 들렸다. 아랫도리가 축축해지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사내는 이미 흠뻑 적셔진 머리통을 조아렸다.


“죽, 죽기 싫어서,…… 죽기 싫어서 한 일이옵니다.”

“죽기가 싫어 죽을 짓을 하였다?”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살려주십쇼, 제발…….”


 볼기가 찢어지고 손목 하나가 끊어진 뒤에야 사내는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았다. 얼마 전 귀한 남손님이 왔더란다. 단출하게 차려입고 얼굴도 꽁꽁 가렸으나, 사람 보는 일을 하니 보기만 해도 귀태가 흐르는 것이 보통 양반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방도 봐 드리고 석반도 내어주고 극진히 모셨는데, 다음날 우리 나리께서 배앓이를 하시었다면서 패거리가 쫓아온 것이 아닌가. 며칠을 갇힌 채로 배곯고, 맞은 통에 죽기 직전이 되자 일을 시켰더랬다.

 나라에서 주취酒醉를 엄숙히 다스린 이후 엽전 하나 제대로 못 만지던 사내는 살려주겠다는 약조와 먼저 받으라는 묵직한 행낭에 고민할 새도 없이 넘어가고 말았다. 일을 치르고 나면 세 배를 주겠다. 조청보다 달큼한 유혹과 살고저 하는 욕망에 닭이 울기도 전에 몰래 붙였다 털어놓곤 그대로 혼절했다. 사내의 말은 거짓이 아닌지 몸에는 멍 자국이 가득했다. 살가죽이 얇은 것이 객잔 주인이기까지 한 놈의 몸뚱이가 아니기도 했다. 꽁꽁 숨겨두었을 행낭 안에는 가금假金이 가득했다.


 이리도 어리석은 치가 있나. 심기가 불편했다. 생포하라 한 연유는 고작 사내 하나 분지르기 위함이 아닌 것을. 왕이 또다시 이를 갈려던 때, 그림자 하나가 들어와 예를 갖추었다.


“무엇이냐.”

“단도 하나를 뒤늦게 발견하여 보고 드리려 합니다.”

“단도?”


 받아들어 확인하니 낡고 투박하지만 길이 잘든 검이었다. 이 정도면 주인에게는 보물일 텐데, 어찌 이리도 경거망동했는가. 절로 영숙의 미간이 좁아졌다. 왕과 같은 심정일 것이었다.


“저자를 사살하려던 중 내금위가 들이닥치자 놀라 흘린 것 같습니다. 묻혀 있던 곳이 담벼락 바로 아래 수풀이었던 것이, 정황상 그리 보입니다.”

“허면 너는 지금껏 주변을 계속 살폈단 말이냐.”

“예, 영감. 저희 것이 아닌 발자국이 보이기에 그리했습니다. 먼저 말씀 올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아니다. 잘하였다.”


 검을 마저 살피다 말고 크게 놀라 왕에게 보이자,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 의미를 익히 아는 영숙이 고개를 숙였다. 너덜거리던 사내가 포승줄에 감겨 끌려나가고 뒤를 영숙이 함께 했다. 어둠 속에 둘만이 남았다.


“매번 장하구나.”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이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 있지 말래도. 일어서거라. 왕의 음성이 여느 때보다도 누그러졌다. 따스함에 손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명에 따라 몸을 일으키자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늘 그러했듯 그림자는 뒤를 따른다. 어둠 속, 두 발소리가 나란했다.


“이리 뒷길로 다니다 들키면 또 상선에게 혼이 나려나.”

“상선 영감께선 내금부를 돕고 있을 터이니 염려 마옵소서.”

“지밀至密은?”

“일찍 침소에 드신 줄 아옵니다. 뒷문으로 조용히 드십시오.”


 익숙한듯 자연스레 나오는 답에 왕이 웃었다.


“꼭 어마마마 모르게 산토끼 잡으려는 나를 도왔던 영숙이처럼 말하는 구나.”

“…내금위장께서도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어릴 땐 종종 그리 했지. 어마마마가 유달리 살생을 싫어하시어.”


 그림자는 어느 답도 내놓지 않았다. 무어라 하는 것이 옳을 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모르니 입을 다물었다. 왕과의 세월이 길다 하나 영숙보다는 짧았으며 그림자여도 자신에게 내려진 임무를 위해 내도록 바깥으로만 돌았다. 본영 중 제일 몸이 가볍고 검술이 능하다는 연유로 왕의 가까이에 있게 된 지도 얼마지 않았다. 해서, 제 평생을 바칠 주군임에도 잘 알지 못했다.


“또 그런 얼굴을 하는구나.”


 하지만 왕은 달랐다. 마치 전부 아는 것처럼 말하고 대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몸의 겉거죽부터 낱낱이 벗겨져 실오라기 하나 없이 던져진 듯한 착각이 이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잘하는 일을 했다.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묵묵히 그저 따르니 곧 그의 걸음이 멎었다.


“일찍 침소에 들긴 하여야겠어.”

“곤하신지요.”

“조금.”


 내금위장도 곁에 없겠다, 당장이라도 번쩍 들어 침소로 옮겨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강구하던 차에 손이 내밀어졌다.


“어찌.”

“좀 잡아다오.”

“하오나, 제가 감히….”

“거절하려고?”

“…….”


 결국 손을 내밀었다. 색 하나 없이 검기만 한 옷깃에서 떨어지는 손을 감싸 쥔 왕은 그대로 뒷짐을 진 채 걸었다. 전하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도 없음이오, 함부로 손을 뺄 수도 없음이니. 걸음을 맞추어 다시 따랐다. 왕이기 때문일까. 주군이기에 그런 것인가. 이이 앞에서는 늘상 이런 꼴이다.


“이리 잡고 걸으니 좋구나.”

“미천한 이 몸의 손이 무에가 좋으십니까.”

“그리 말하지 말라 일렀다.”

“…송구합니다.”

“사람은 누구도 미천하지 않다. 여인은 그런 존재가 아니야. 특히나….”


 돌아보는 왕의 눈이 어찌하여 물기어린 것인지. 무엇으로 인해 저리도 깊은 것인지. 내금위장이 두렵다던 화마와 가슴 속의 불꽃은 어디에 가고 이리도 깊은 밤하늘을 품었는지.


“너는 더욱이 그러해.”


 한낱 그림자가 어찌 감히 태양의 속을 알겠는가. 그저 고개를 떨구고 다음 말씀을 기다릴 뿐이었다.


“휘야.”

“예.”

“너는 네 이름이 좋으냐.”

“전하께오서 하사하신 제 명이자 숨입니다.”

“좋으냐 물었거늘.”

“……태어나 처음 가져본 것이라, 좋다고 말하기 어렵나이다. 그저 귀하고,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는 만족한 듯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일곱인 본영의 성명은 제각기 의미가 있고, 하나의 뜻을 이루고 있다. 일휘日輝는 개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받은 명이었다. 왕의 야망과 참뜻이 담긴 이름을 받은 본영은 그 길고 길던 밤, 눈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설운 과거는 삼켜내 온전히 그림자가 될 수 있도록. 그의 뜻을 펼치기 위해.


“아이들에게서 연통 온 것은 있느냐.”

“바다는 잠잠하나, 산새들이 운다 하였나이다.”


 알려지지 않는 뒷길 끝에 있는 작은 궁을 거친 후 당도한 비밀통로를 거닐며 왕은 말이 없었다. 좁은 길을 따라가자니 사위四圍가 고요하여 잊으려 노력하던 손의 감각에 자꾸만 신경이 흘렀다. 거칠고 단단하나 따듯했다. 왕족임에도 활과 검을 쥐어 굳은살이 잔뜩 배인 손 안에, 흉터로 가득한 제 손이 감겨있다니. 감촉만큼 이루 말하기 힘든 생경한 마음이 샘솟았다. 땀이 흘러 미끄러질 법도 한데 어찌 이리도 붙들고 계시는지. 그만 놓아달라 청을 올릴 성정이 아닌지라, 일휘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했다.


“네가 긴장을 다 하는구나.”

“…….”

“휘야.”

“예.”

“너는 행복하니?”

“……어찌 그러십니까.”

“답이 없구나.”

“살아있음이 복이고, 주군을 모실 수 있음이 더 큰 복이며 저의 기쁨입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본영은 모두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렇겠지. 왕의 대답은 조금도 기꺼워 보이지 않았다. 또 어느 괴로움 속에서 헤매이고 계신 것일까. 그는 이토록 곁에 있음에도 멀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물가에 앉아, 한없이 멀어져 가는 편주扁舟를 바라보는 듯하여 반걸음 다가섰다. 가지 마시옵소서. 곁에 있게 해주시옵소서. 어찌 이리도 멀어지려 하십니까. 당신은 나의 태양이오, 빛이 되어 이 세상에 내려 앉아야만 하거늘. 어인 연유로 매번 떠나려는 것처럼 하시옵니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 또 그런 얼굴 하지 말거라. 네가 그러면, 내 마음이 좋질 않다.”

“송구합니다.”

“안아 들어 달래기라도 하랴?”


 입매가 휘어지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낯빛이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어찌 매번 그리도 달래어 주시느냐 여쭈지 않고 그저 놀리지 마옵시라 작게 청했다. 다른 이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작은 소리를 들은 왕이 작게 웃었다.


“걱정 말아. 그저, 마음이 어지러워 그렇다.”

“흔들리시면 아니됩니다.”

“나는 어느 여인이든 희생 시키고 싶지 않다. 싸우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 사람으로 태어나 그것은 긍지가 아니더냐. 내 뜻을 이해하는 이라면 능히 따라줄 것을 안다. 허나, 내가 대업을 위해 중한 목숨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을 뒤집을 뜻을 가지신 분께오서, 하늘을 쥔 분께오서 어찌 그러십니까.”

“그러게 말이다. 나는 그러해야만 하느니.”


 이럴 땐 내가 한낱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야속하구나. 옅은 한숨과 미소를 남긴 왕이 장지문 안으로 사라졌다. 기척이 잠잠해지고 주변이 조용한 것을 읽은 일휘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영숙에게 향했다. 죄인에게서 증좌를 뽑고, 제대로 된 증언을 듣고 있으리라. 허하신다면 친히 그 치를 처리하고 싶기도 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잠재우기 위해.


 하명하신 일을 전부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온 일휘는 자꾸만 곱씹게 되는 감촉 탓에, 눈을 감지 못했다. 그렇다고 뜨고 있으려니 침수 드셨을 주군의 생각에 머리가 혼란했다. 어찌 이러는가. 모호한 감정은 모래알처럼 자꾸만 온간데에 걸리고 걸렸다. 뾰족한 나무뿌리라면 뽑아내면 될 것인데 그러지 못하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일각도 쉬지 못한 시야에 동이 트는 하늘이 가득히 담겼다.

 그제야 모래알이 무엇인지 알았다. 목끝에 숨이 차도록 샘솟은 그것이 가슴 안으로 기어들어왔음을 알았다. 혀끝에 걸리고, 손안에서 구르며 귓가에 머무르는 이것은 연모戀慕였다. 감히 하늘을 마음에 품었다. 주군에게 연군지정戀君之情 그 이상의 정을 어찌 품는단 말인가. 당장 쓸모없는 것들을 베어내야 함이 옳았다. 지금이라도 몸뚱이를 던져 그의 뜻에 흐트러짐이 없도록 해야했다.


특히나 너는.


 허나 그의 음성이. 당부가. 숨과 빛이 내려 앉았다. 눈이 부시도록 하늘이 맑았다. 감히 어명을 어길 수는 없음이라. 어찌 그의 것인 목숨을, 그의 뜻을 함부로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일휘는 닫힌 문 앞에서 가만히 인사를 올렸다. 이 마음은 간데 없이 사라지지 못할지언정, 충정은 똑같음을 아침해에 대고 맹세했다. 곧 기침하실 시각이다. 흐트러진 마음과 매무새를 다잡았다. 그림자는 여전히 말이 없다.



 날은 조용히, 그러나 차곡차곡 흘러갔다. 왕의 손엔 증좌가 모였고, 남신들에겐 그럴싸한 명분이 잡혔다. 뒤꽁무니를 밟히고 있다는 걸 모를만큼 마음이 급한 사내들이 입을 모았다. 서로의 손을 잡으며 의를 단단히 하고 머리를 숙여 충을 드러냈다. 여즉 어리고, 후사조차 없는 왕을 두려워하는 이 역시 그 속에 숨어 발발 떨고 있었다. 건드려선 안 되는 상대가 있다는 것 알고 있었음에도 반기를 들지 못했다. 서열 속 아래 축에 있기도 했거니와, 감히 여인을 두려워한다 말하는 것이 차마 부끄러웠던 탓이었다. 목이 달아나는 것보다 체면이 깎이는 걸 더욱이 못 견디는 작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잘만 모여, 작당모의를 했다.

 해가 더욱이 길어지고, 한낮의 더위에 웃통을 훌훌 벗어 두는 여인들이 많아지자 사내들의 분노는 더욱이 거세졌다. 나라꼴이 기묘하다. 왕은 귀신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여인들을 홀릴 수는 없는 일이다. 평민이나 천민도 양반네 뜻에 동참했다. 기실 왕이 즉위하신 이후로 배곯고, 길에서 죽는 일이 손에 꼽을 만큼 적어졌음에도 그러했다. 제 입을 채우는 것이 왕의 보살핌이자 정情임을 알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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