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듣는 바람

 

막 밭일을 마친 오오쿠리카라는 실내에 들어서며 한숨을 돌렸다. 부지의 여건상 그늘 가림막도 펼 수 없었던 대지는 거대한 찜통 같았다. 여물어가는 작물 사이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던 기분은 결코 자신만의 착각은 아니었던 듯 싶었다. 함께 보조를 맞추었던 하카타 토시로 역시 콧등에 스며든 땀 때문에 자꾸만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그런 이야기를 중얼거렸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날씨가 더웠던지라, 결국 예정되어 있었던 오후 작업은 통째로 취소되었다. 특별히 근시를 전담하는 날이 아니어도 언제나 주인의 손발을 자처하는 헤시키리 하세베가 직접 그 뜻을 전달했다. 자신을 향해 내려왔던 명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의기양양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하해와 같은 자상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를 오오쿠리카라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럴 바에야 계절이나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런 기후나 좀 바꿔줬으면 좋겠다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대놓고 그런 말을 해봤자 갑자기 단풍을 볼 수 있을 리 없었고, 주인에게 그저 충직하기만 한 녀석에게는 시비 거는 말로만 들릴 게 뻔했기에 오오쿠리카라는 일찌감치 자리를 피했다. 금방이라도 꼬장꼬장하게 따라붙어 뒷목을 잡아챌 것 같았던 목소리를 일단 피하고 보자는 마음으로 움직인 결과 도달한 장소는 서쪽에 위치한 별채였다. 가을 무렵에는 단풍을 심어놓았던 뜰과 석양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어서 어느 날이나 괜찮은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인기가 좋았지만 지금 같은 계절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그 이유인 즉, 이곳에는 공기를 얼음처럼 차갑게 만들어주는 냉방기를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깥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큼직한 창을 여러 개 내었던 자리는 어떤 기술자를 불러와도 설계에 문제가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혼마루에서 운용할 수 있는 각 분기별 자금 중 삼 할을 투자해야한다는 견적을 보고 나서야 주인은 뜻을 접었다.

 

그런 사정 때문에 이곳은 아무도 찾는 이 없이 조용해야 했는데, 때마침 우연히 발을 멈춘 장소에서 오오쿠리카라는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활짝 열린 창을 통해 불어온 바람에 실린 악기소리였다. 공기를 경쾌하게 흔드는 소리는 사람의 한 쪽 팔보다 길게 뻗은 줄이 매달린 악기, 고토(箏)가 만들 수 있었다. 그런 도구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오오쿠리카라가 알기로 이곳에서 단 하나 뿐이었다.

 

그것을 떠올리자마자 두 번 생각할 겨를 없이 발이 움직였다. 열기가 실린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 안쪽으로 향한 곳에는 짐작했던 대로 익숙한 상대의 모습이 비쳤다. 낯선 기척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연주에 여념 없던 녀석의 정체는 짐작했던 대로 츠루마루 쿠니나가였다.

 

어느 계절이나 대개 때 묻지 않은 흰옷을 고집하던 츠루마루는 오늘도 역시 익숙한 차림새 그대로였다. 그러나 녹지 않는 눈처럼 깔끔한 옷과 달리, 목덜미를 살짝 넘는 은발까지도 뒤로 모아 동여 묶어 숨김없이 드러난 얼굴은 바깥에서 열을 쬔 사람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흔적이 역력했다.

 

유심히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갸름한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간혹 잊을 만 하면 부는 바람은 열기를 실어 나르기 보다는 오히려 외부의 열기를 실어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후덥지근했다. 이런 곳에서 꼼짝 않고 몇 시간 내내 연습을 했다면 저런 모습이 될 법도 했다. 오오쿠리카라는 눈을 깜빡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을 뿐인데도 습한 공기가 뺨을 비롯한 피부에 생물처럼 달라붙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 연주는 반복되던 선율을 지나 절정으로 치달았다. 중간 중간 복잡한 박자의 화음이 들어가기 때문에 잦은 실수가 반복되던 구간이었다. 끄트머리에 골무를 낀 앙상한 손가락이 여러 개의 줄을 현란하게 넘나들었다. 화려한 음을 능숙히 자아내는 그 손가락은 의도적으로 밀착해 올 때는 깃털처럼 가볍게 신경의 첨단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오오쿠리카라는 환한 백주대낮의 순간에서 갑작스럽게 홀로 밤의 영역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중력을 거슬러 올라간 듯 피가 몰린 머리는 현실을 이상하게 왜곡했다. 오오쿠리카라는 일부러 눈을 내리 깔고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마치 머리를 슬며시 짓누르는 것 같았던 압력이 거기에 실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것보단, 조금 더 좋은 반응이 있을 텐데?”

 

그 때였다. 영원히 반복될 것 같았던 음악 대신, 츠루마루의 말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높낮음을 가리자면 확실히 낮은 쪽에 더 가까운 목소리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똑똑히 단어를 실어 날랐다. 사용자의 기분에 따라 호오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목소리는 말만 저랬지 기분이 썩 나빠 보이는 투는 아니었다.

 

“갈채를 받을 생각이었다면 장소를 잘 골랐어야지.”

“하하하, 그런가?”

 

예상대로 츠루마루는 일부러 팔짱을 끼고 들으란 듯 중얼거린 말에도 활짝 웃기만 했다. 실수 없이 연주해낸 것이 그저 뿌듯한 모양이었다. 오오쿠리카라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칸이 이어진 실내로 성큼 발을 들이고 나서야 주변의 환경이 곧이곧대로 보였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동쪽에 세워 가로로 펼쳐둔 병풍이었다. 총 6첩짜리의 병풍은 전부 펼치면 벽 하나 정도는 모두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지만 차곡차곡 접어놓으면 츠루마루나 오오쿠리카라 정도의 체격 정도로도 혼자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부피가 되었다.

 

츠루마루는 오전에 시시각각 각도를 다르게 하며 실내에도 비스듬히 손을 뻗었을 햇빛을 가리기 위해 그 병풍을 사용하고 있었다. 여섯 첩 모두를 펼쳐놓아 숨김없이 드러난 그림을 오오쿠리카라는 가볍게 훑었다. 그곳엔 지금 같은 계절에 어울리는 여름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위, 쪽배에 타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이 하나. 그리고 아마 기슭을 표현하려 했던 곳에는 가느다란 버들이 굽은 가지를 드리운 채 서늘한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이제 막 출발했는지, 아니면 반대편 기슭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는지 모를 사공은 일단 버드나무 쪽에 더 가깝게 그려져 있었다.

 

바람이라도 불어온다면 그 모든 소재가 생명을 지닌 듯 흔들릴 것 같은 유려한 필체의 그림은 오래 전 어느 화가의 역작이라고 했다. 주인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이름은 예전에 잊어 반쯤 지워진 날인을 봐도 정확히 떠오르진 않았다. 한때 이 작가의 모든 수집품을 모으겠다며 열의를 불태웠던 주인은 지난 번, 천하삼검이 모두 모인 것을 기념하던 연회에서 츠루마루가 모두를 깜짝 놀래킬 정도의 좋은 연주를 들려주자 등 뒤에 있던 것을 그대로 상품으로 내걸어 하사해버렸다.

 

반은 여흥, 반은 술기운에서 이루어진 결정이었지만 멀쩡히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도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기에 병풍은 츠루마루의 차지가 되었다. 자신의 방에 두고 쓰기에는 너무 컸고, 그렇다고 선심 쓰듯 공용 공간에 설치하는 것도 아쉽다고 입맛을 다시던 녀석은 드디어 이것을 활용하기 알맞은 장소를 찾은 모양이었다.

 

지금도 츠루마루는 병풍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오오쿠리카라를 향해 히죽히죽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을 보아달라는 듯 열렬한 시선이 뺨에 꽂히다 못해 따가웠다. 결국 원하는 대로 그쪽과 눈을 마주치자, 곧장 으스대는 말이 작은 입 사이로 튀어나왔다.

 

“어때? 정말 멋지지 않아? 잘 어울리지?”

 

어떻게 들어도 칭찬만을 원하는 질문이었다. 오오쿠리카라는 한껏 기대가 실린 츠루마루와 병풍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흠 없는 비단 위에 농담만을 다르게 하여 표현해 낸 한 폭의 수묵화는 그 계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그대로 잘라 담아 놓은 듯한 생동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츠루마루에게는 가까웠지만 자신이 있던 방향에선 멀게 보였던 버드나무의 그늘도 진짜 빛을 가린 음영처럼 선명했다.

 

“……나쁘진 않군.”

“그렇지~?”

 

츠루마루의 입은 활짝 벌어지다 못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 모습은 어쩐지 뿌리를 보존한 채 옮겨 심었던 꽃이 생각나기도 했다. 태양을 본뜬 모양의 샛노란 꽃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괜히 활기가 넘치던 인상의 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츠루마루는 그럴 듯한 제안을 꺼냈다. 다음에 그런 연회가 있다면 합주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좋은 포상을 노리자고.

 

“너는 피리를 불면 되잖아!”

“…거절한다.”

 

옆으로 쥐어 호흡을 불어넣어야 하는 악기를 다룰 수는 있었지만, 모두의 앞에서 보여줄 만한 실력까지는 되지 않는다고 오오쿠리카라는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반짝이던 안구 위에서 가볍게 호선을 그리던 츠루마루의 눈썹이 크게 튀었다.

 

“그럼, 검무!”

“…….”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츠루마루는 이쪽이 거듭 거절을 해봤자 쉽사리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한 번 흥이 오른 녀석은 몇 번이고 끈질기게 달라붙기 일쑤였다. 오오쿠리카라는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이곳은 혼자서 연습하기에는 몰라도 둘이 머리를 맞대고 오랜, 그리고 심도 깊은 대화를 하기에는 별로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미츠타다가.”

“응?”

“물양갱을 만들 것 같더군.”

“그래?”

 

한창 집중하고 있던 관심을 돌릴 만한 것으로는 미츠타다가 만들 간식이 제일이었다. 그의 예정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슬쩍 부탁하면 한 그릇 정도는 어찌저찌 짬을 내어 만들어 줄 것이다. 츠루마루의 눈이 다른 흥미로 반짝거렸다. 오오쿠리카라가 행동을 재촉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서는 냉큼 고토를 챙겨들었다.

 

어쨌거나 따로 접거나 포갤 수 없어 그 상태 그대로 들고 다녀야 하는 그 악기는 체구가 작았다면 혼자서 들기 벅찰 정도로 부피가 있었다. 여유가 없어진 츠루마루 대신, 오오쿠리카라가 병풍 쪽으로 다가갔다.

 

“……도와주지.”

“하핫, 고마워!”

 

감사의 말에 오오쿠리카라는 더 대답하지 않은 채, 천천히 병풍에 손을 뻗었다. 물살만 그려진 바깥쪽을 시작으로 조심스럽게 선에 맞추어 안 쪽으로 병풍을 접어나가던 오오쿠리카라는 그 폭을 네 개 정도 포갰을 때야 나직한 말을 중얼거렸다.

 

“…적당히 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불분명한 대상을 향한 경고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혼자서 미츠타다의 물양갱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던 츠루마루는 오오쿠리카라의 이상한 행동을 알아채지 못했다.

 

“카라 도령, 아직 멀었어?”

“다 됐다.”

 

오오쿠리카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병풍을 접었다. 그리고는 옆구리에 짊어지고 츠루마루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간간히 불던 후덥지근한 바람이 둘의 등을 두둥실 떠밀었다.

 

 

*

 

 

츠루마루가 다시 그 병풍을 펼친 것은 며칠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더운 계절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포기할 수 없다며 본래의 복장도 포기하고 쇄골과 겨드랑이를 훤히 드러낸 나시티를 입고 돌아다녔던 시시오가 결국에는 실내에서도 벌러덩 드러누워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야~. 덥다, 더워 죽겠다아!”

 

더위의 원흉 중 하나였던 누에는 온도에 구애받지 않는 생물처럼 여전히 거대한 먼지가 뭉친 것 같은 새카만 털을 부풀린 채 시시오의 어깨에서 자는 듯 미동이 없었다.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었던 것은 츠루마루였다. 자신의 방 한 쪽에 놓아두었던 병풍을 끌고 와 반만 펼쳐주어 상반신은 덮고도 남을 만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갑자기 생겨난 벽처럼 옆을 막아선 병풍의 지척에서 이리로, 저리로 뒹굴던 시시오는 턱을 바닥에 대고 엎드린 채로 눈동자만 위로 굴렸다.

 

시원하게 휘어진 먹의 물살은 당장 모든 것을 박차고 훌쩍 일어나 강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들던 와중, 더운 나머지 길게 내려와 뺨을 덮던 앞머리를 이마 위로 정리해 멀쩡히 드러났던 왼쪽 눈동자가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포착해냈다. 시시오는 갸우뚱 고개를 까딱거리며 츠루마루에게 질문을 던졌다.

 

“츠루마루, 원래 이 사공……. 이 방향에 그려져 있었던가?”

“뭐가?”

 

강 위에서 유유히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은 버드나무가 심긴 기슭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스로 노를 젓지 않아도, 물살을 따라 어디론가 유유히 흘러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시오는 그 먹선을 좇아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고정된 그림이 움직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시오의 말에 츠루마루가 다가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전체적인 인상에만 감탄했지 부분적으로 그림을 세세하게 훑어본 적은 없었다. 츠루마루는 대답을 기다리는 시시오에게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짤랑, 하고 창가에 매단 풍경이 맑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의 소리였다.

 

(完)



잡덕후/1차/2차/글

른닷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