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콧물은 노란색이 아니였다. 

 책은 우리가 색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다 구라를 쳤다. 그게 문제냐고 하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암튼 이동혁에겐 그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1.

 기말고사가 끝났다. 기말이 끝난 다음 날 교실은 시끄러웠다. 이미 졸업이라도 한 것처럼. 한껏 신이 난 애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는데 이동혁은 그런 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자고 있다는 말이다. 어젯밤 게임을 밤새 하느라 방금 눈을 붙였다는 건, 이제노만 알았다.


 "아주 시험 끝났다고 대학 붙었어? 아직 수능도 안 봤다 얘들아. 전학생 왔으니까 다들 눈 좀 뜨고. 이제노 이동혁 안 깨우냐."

 "야 일어나."

 "학교가 아주 찜질방인 줄 알지?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엎어져자고 있어. 전학생 들어올 때 박수 안 치는 새끼들 다 청소 남길 거니까 고개 들자."


 아 담임 말 왤캐 많어... 겨우 눈을 반 쯤 뜨고 고개를 들었더니 담임은 금세 이동혁에게 관심을 껐다.


 "재민아 들어와."


 야 뭔데.. 우리 전학생온대? 이동혁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이제노를 봤다. 방금 말씀하셨잖아. 하암- 근데 이 때 전학 와도 돼? 공부 안 하나보지. 이동혁은 그 말이 왠지 재수 없어서 이제노 팔뚝을 한 번 치고, 눈을 비볐다. 눈이 시렸다.

 어... 아직 꿈인가. 이게 뭐지. 이제노 팔뚝이 무슨 스위치라도 됐나. 아닌데 나 존나 많이 쳤는데. 이동혁은 다시금 눈을 비비고, 창문에서 밀려들어오는 다양한 빛에 혼미해졌다. 엥... 나 진짜 꿈 꾸는 건가. 이동혁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교실 문이 처음 보는 색으로 칠해져있었다.

 아 왜 이러지. 진짜 꿈인가? 지금 학교 아니면 백퍼 지각일 텐데. 아. 갑자기? 진짜로? 이동혁의 세상은 교실 앞문이 열리자마자 단번에 칠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나재민은, 이동혁 눈에 처음 보는 색을 쏟아부었다. 이게 색이 맞나? 이동혁은 원초적인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흑백이 아니다. 그럼, 컬러라는 건데. 그게 색이라는 건데. 아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왜? 그러니까... 이동혁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한 번 책상에 박아보려다 이제노 손에 막히곤 눈이나 몇 번 비벼댔다. ...와 미친 진짜 쩐다.


 "안녕 얘들아. 내 이름은 나재민이고…"


 원래 어떤 감각이 퇴화하면 다른 감각이 신기할만큼 발달한다던데 이동혁은 반대로 시각이 발달하고 청각이 퇴화됐는지 나재민의 말을 귀에 담지 못했다. 그냥 계속, 아무 생각도 못한 채로 멍하니 나재민의 얼굴만 바라보면서 입을 벌렸을 뿐이였다. 그러다 순간 스쳐지나가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운명의 상대. 동화나 소설에서나 나오는 얘기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그거. 이동혁은 그런 강의를 들을 때 마다 꿈나라로 도망친 전적밖에 없어서 아는 거라곤 유치원생도 아는 기본 지식 하나 뿐이였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색이 칠해진다. 이동혁은 색이 칠해졌다. 자기 피부색이 남들보다 짙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까만줄은 몰랐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암튼 이동혁의 세상엔 색이 칠해졌다. 이동혁은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 저절로 성립되는 문장이였다.



 2.

 오글거리게 무슨 운명씩이나 붙이냐고 했던 때를 기억한다. 그게 웃기게도, 이동혁은 그 단어를 속으로 뱉어보자마자 어딘가 왈칵하고 터져나와서는 금세 눈물이 맺혔다. 이제노는 이동혁이 드디어 미친 줄 알았다. 슬픈 영화를 봐도 가오잡는다고 허벅지 꼬집으면서 눈물을 참던 걸 다 봤는데, 벌써 여섯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동혁아 왜 그래... 애들이 너만 봐. 나재민도 이동혁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쟤는 어디 아픈가. 왜 나 들어오자마자 울지. 근데 왜 자꾸 나 보지. 나 보고 우는 것 같잖아. 나재민은 동그란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했지만 코끝이 짙어진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쟤 우는 구나.

 담임은 이동혁에게 관심도 주지 않고 나재민에게 자리를 배정해주자마자 나갔다. 괜찮은 건가. 나재민은 우는 애 옆자리에 앉게 된 것에 조금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짝은 아니라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한데. 이동혁은 나재민이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점점 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제노는 나재민한테 괜히 제 친구의 못생긴 표정을 보여주는 게 미안해서 툭툭 쳤지만 이동혁은 날카롭게 이제노 손을 쳐냈다. 아 방해하지마. 나 지금 중요한 장면이야. 훌쩍이면서도 내치는 손은 빨라서 볼을 긁적였다. 우는 거 맞아? 나재민은 그 상황이 얼른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어색하게 웃어보였지만 그 웃음에 맞춰서 또 한 방울이 떨어지고, 나재민이 이동혁 옆자리에 다다랐을 땐, 이동혁이 단번에 나재민에게 안겼다. 그냥 안겼으면 모르겠는데 이동혁은 보란듯이 더 크게 울어댔다.


 "재민아... 보고 싶었잖아!!!"

 "너 이동혁이랑 아는 사이야?!"


 보고 싶었잖아.

 처음 보는 사이에서 할 말은 아니다. 그럼 전에 본 적이 있다는 말인가? 나재민은 눈을 크게 뜨곤 머리를 굴렸다. 우는 얼굴만 봐서 알 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눈물만 뚝뚝 흘리더니, 안기자마자 서럽게 소리내서 울어대는 이동혁에 나재민 손이 본능적으로 이동혁을 감싼다. 나재민은 잠시 기억을 더듬느라 이제노 말을 씹고는 본능적으로 이동혁 등을 토닥였다. 울지마, ...동혁아. 방금 본 명찰을 기억하곤 일단 뱉었다. 천천히 토닥이면서 생각해보는데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 잘 잊어버리는 편도 아닌데다 줄곧 같은 동네에서만 살았어서 잊어버릴 일도 없을 텐데. 내가 이동혁?이랑 아는 사이였나. 이름이 흔해서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우는 거 보면 특별한 사이였던 거 같은데. 그러면서도 토닥거리는 손은 멈추질 않았다. 아니라고 해도 우는 애를 가만히 둘 순 없으니까. 그리고 그게 헛되지는 않았는지 이동혁은 점점 울음을 그쳤다.


 "다 울었어?"

 "...웅."

 "너네 아는 사이야?"

 "재민아 짝 바꿔달라고 하자."


 너네 나 안 보여? 대답은 해줄 수 있잖아. 알겠어. 근데 너네 아는 사이야?



 3.

 나재민은 이제노와 자리를 바꿨다. 이동혁은 울어서 부어버린 얼굴로 평소보다 더 조잘조잘거리다가 나재민 눈을 마주칠 때면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애처럼 입을 합 다물었다. 와 이게 진짜 운명이라는 건가 진짜 미쳤다 심장 튀어나올 거 같아. 나재민은 이동혁의 말에 열심히 대답을 해주면서 눈을 꼭 맞추고 떼질 않았다. 이동혁이 시선을 돌려도 그대로였다. 나재민한테 그건 그냥 습관같은 거였는데, 나재민 눈이 이동혁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깊어서 자꾸 어색하게 대화가 끊겼다. 근데 금세 이야깃거리를 찾고 다시 텐션이 오르는 걸 보면, 나재민은 이동혁과 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귀여우니까.


 "동혁아 사문이래."

 "웅. 같이 봐."


 이동혁이라고 크게 써있는 책은 거의 새거였는데, 표지도 그랬지만 안도 잘 펴보지도 않은 듯 뻣뻣했다. 자기도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였지만 그 책이 너무 이동혁같고 웃겨서 나재민은 또 완전히 풀어진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아니야. 동혁아, 펜 들어야지. 펭귄 피규어가 달려있는, 몬스터 주식회사 필통에서 꺼낸 펜마저 이동혁 같아서 나재민은 결국 소리내서 웃었다가 입을 막았다. 아 귀여워. 너 이거 좋아해? 이동혁은 필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재민 팔찌가 필통이랑 같은 색이였다. 사실 이 색 좋아해? 라는 물음이 더 맞았겠지만. 나재민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색이지.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다고 이동혁은 생각했다. 



 4.

 기말이 끝나면 축제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축제 기간이였다. 축제 준비 덕에 수업은 엉망이 됐고 고삼은 축제준비에 껴주지도 않아서 주구장창 영화나 봤다. 이제노랑 몇몇만 영화를 브금삼아 자습을 했고 이동혁은 틈만 나면 모든 시간을 체육으로 바꾸려들었다.


 "재민아 너 축구 잘 해?"

 "나 발목 다쳐서 운동 잘 안 해."

 "아-"


 이동혁이 당장이라도 갈아신으려던 축구화를 다시 사물함에 던졌다. 나도 그냥 쉬려고. 이제노가 미쳤냐는 듯 눈을 뜨고 바라봤지만 이동혁은 눈으로 욕을 한 번 해주고 나재민이랑 걸었다. 야 너가 축구 하자며. 입모양을 완전히 알아들었지만 모른다는 듯 귀만 후벼팠다.


 "아~ 이제노 선수 덩치만 믿고 덤볐다가 넘어졌거든요. 스포츠는 몸이 아니라 기술인데 말이죠. 아 박지성 선수, 슛- 실패! 누가봐도 실패였는데 아쉬운 표정 뭐지? 빠른 시일 내로 이름 개명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해설위원이라도 되는 양 중계하는 이동혁 덕에 나재민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매점에서 초코빵이랑 피자빵 고민했을 때 빼고 처음 보는 표정이였다. 집중하면 부리처럼 튀어나오는 입술이 귀여워서 쭉 늘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또 중계할 일이 생기면 작은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재잘댄다. 그걸 보고 있는 것도 좋은데, 아까 이제노가 뻐끔거리며 이동혁한테 했던 말을 알아들어서, 그게 신경이 쓰였다. 나 때문에 앉아있는 거면 안 그래도 되는데. 가만히 있어도 움직이는 걸 보니까 나가면 얼마나 잘 뛸 지 상상이 됐다.


 "동혁아 넌 안 뛰어?"

 "아. 나 운동 안 좋아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서 웃어보인다. 이동혁은 자기한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발언은 스스로도 좀 찔렸기 때문에. 입축구를 하던 이동혁이 결국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앉아서 발을 움직이면 나재민은 그걸 보고 이동혁 등을 떠밀었다. 가서 골 좀 넣어줘. 답답해서 못 보겠다. 솔직히 조금 한계라서 이동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로 그럼 그럴까, 하고 이제노랑 바톤터치 했다. 재민이 초록색 좋아하는데. 내가 또 뛰어다녀줘야지. 재민아 잘 봐! 벌써 신난 듯 이제노 축구화를 빌려신고 신발끈을 꽉 맨다. 하고 싶으면 하지. 나재민은 이동혁이 진짜 착한 애라고 생각했다. 제노야 동혁이 날아가는데. 그러니까 왜 앉아있었대?

 이동혁은 미친듯이 뛰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고갈나지 않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원래 밥먹고 축구하러 학교 다니는 애기 때문에 잘했다. 나재민이 장난식으로 한 말에 부응이라도 하듯 들어간지 오 분 만에 골을 넣고 다시 날아다니면서 나재민한테 윙크했다. 봤어? 봤어 재민아? 나재민은 응원단이라도 되는 듯 팔을 흔들어주느라 바빴다. 그냥 사귀지 그래 얘들아. 이제노가 질린다는 듯 말했지만 역시나 그랬듯 씹혔다. 잔디야 넌 나랑 사귈래?



 5.

 색이라는 건 생각보다 별 거 없었다. 그러니까 그냥 좀 더 원래 알고 있던 것 보다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거 빼고는. 여러 소설에서 색이 보이면 인생이 바뀐다는 얘기를 했던 것 치고는. 그런 이동혁한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옷이였다. 이동혁은 나름 -자칭- 패션피플의 자부심이 있었는데 옷장을 여니 가관이였다. 이동혁은 도서관에서 아무도 몰래 미술 색 조합 어쩌고 책을 훑어보며 색을 익혔다. 이름만 다르던 색들은 다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지 못했던 때의 이동혁은 패피가 아니라 패테였다고 자책했다. 어쩐지 가아끔 누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라. 세상 당당한 표정으로 가끔 리듬도 타주면서 걸으면 다 간지난다고 했는데. 난 또 부러워서 보는 줄 알았지. 그 날 이후로 이동혁은 옷장을 탈탈 털고는 옷을 색별로 정리했다. 다른 사람은 다 못 본다고 해도 재민이는 보일 테니까. 그리고 일단 눈에 보인 이상 이런 색의 옷을 입을 수는 없었다.

 이동혁이 존나 돈을 모아서 샀던 후드티는 색도 무난해서 보이는 사람들도 다 잘 산다고 했는데 구라였다. 세상엔 사기꾼들이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동혁은 물이라도 빠질까 -색을 아는 사람이 본다고 해도 패피이고 싶었다.- 매번 손세탁했던 그 후드가 개구린 핑크색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눈물을 훔치고 구석에 쳐박아놨다. 아 근데 재민이는 셔츠 안에 핑크색 입던데. 원래 좋아하나?


 [사진]

 [야 이거 어때]


 옷 살 때 불도저처럼 결제해대던 이동혁에게 브레이크가 생겼다. 디자인보다 더 중요해져버린 게 색이였다. 색을 볼 수 있다는 디자이너의 제품은 확실히 달랐다. 비싸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그 값어치를 했다. 사기꾼 아니였구나.


 [이걸 왜 사?]

 [이거 오천원이면 사지 않아?]


 그걸 생각 못 했네. 이제노 눈에는 아무것도 없는 반팔이 이만원이나 할 뿐이였다. 어차피 볼 사람은 재민이 밖에 없는데. 이동혁은 좀 그런가, 생각하다가 운명에 이만원도 투자못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살게 재민아. 나 진짜 너한테 이만원 쓴다? 와. 나 피방 20시간 포기하고 너 골랐어 재민아.



 6.

 너 지금 뭐랬냐. 패션이 뭐, 뭐? 이제노가 요즘 이동혁 패션이 왜 잠잠해졌냐고 순수한 물음을 던질 때였다. 야 나 지금 진짜 고민하고 인싸템 입었는데. 요즘 형광초록 트랜드거든? 됐다. 진짜... 이제노 알지도 못하면서. 잔뜩 눈을 흘기자 이제노가 억울한 표정으로 무지티가 원래 인싸템이냐고 물어와서 씹었다. 나재민은 아침부터 투닥거리는 둘을 보다가 잔뜩 심술이 나서 입까지 튀어나온 이동혁을 보고는 예쁘다고 한 마디 해줬다. 역시 초록색 좋아하는구나. 짙은 보라색을 받쳐입은 나재민을 보고 이동혁도 잘 어울린다며 칭찬파티를 시작했다. 이제노만 또 외딴섬이였다.


 "너네 사귀어?"

 "...그래 보여?"


 별 뜻 없이 던진 말에 이동혁이 잔뜩 굳어선 묻는다. 아니. 재민이가 너랑 왜 사귀겠어. 이동혁은 운명이라도 들킨 줄 알고 책상 밑으로 틱틱 뜯던 손톱을 찢고는 이제노에게 던졌다. 아오 이제노 왜 이렇게 얄밉지.


 "손톱 뜯지마 동혁아. 피 나겠다."


 나재민이 이동혁 손을 잡고 말한다. 언뜻 피가 비치는 걸 봤는지 미간이 찌푸려졌다. 라이언 밴드 하나를 꺼내서 감아주는 손이 빠르다. 표정은 완전 굳어있었는데, 입으로 나오는 건 걱정이라서 이동혁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다정하든가 무심하든가 하나만 하던지... 나재민이 이렇게 굴 때면, 꼭 심장을 밖으로 토해낼 것만 같았다.



 7.

 주말마다 학원을 다니는 이제노를 두고 이동혁과 나재민은 자주 만났다. 아마 나재민이 전학을 오고 나서부터 거의 빠지지 않고. 다른 애들처럼 피씨방을 간다거나 가끔은 이동혁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둘이 보러가기도 했다. 꼭 남들 다 하는 데이트같이. 이동혁은 이게 데이트라고 생각했다. 운명의 상대가 둘이 만나서 노는 게, 데이트가 아니면 뭐야. 하루종일 나재민이랑 붙어있고, 나재민과 연락하고, 주말엔 나재민이랑 만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콜라 마실 거지?]


 영화 시작 오 분 전이다. 아 존나 늦었다. 평소엔 어차피 십 분은 광고한다며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재민을 만날 때면 이동혁은 시간을 정확히 지키려고 애썼다. 굳이 일찍 나와 기다리는 나재민이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아서. 또 삼십분씩 기다렸을까봐 이동혁은 다리에 힘을 주곤 뛰었다. 웅, 하고 최대한 귀엽게 답장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고.

 아 진짜 운명의 상대가 맞긴 맞나보다. 얘기도 안 했는데 캬라멜 팝콘을 들고 서있는 나재민에 이동혁이 또 감동해서 얼굴을 감싸쥔다. 센스 미쳤다. 나 이거 먹고 싶은 거 어떻게 알았어? 사실 매번 올 때 마다 먹는 거면서 그냥 나재민이라서 이동혁은 유독 과민반응을 했다. 들어가자며 웃는 얼굴이 새햐앴다. 나재민의 말간 웃음에 이동혁은 고장난 로봇마냥 어색하게 따라 웃어보였다. 와 지금 표정 개 어색했을 거 같애.


 "이따 밥 뭐 먹을래? 내가 살게."

 "한우?"

 "야."

 "장난이고 마라탕 먹으러 가자. 너 저번에 먹고 싶다고 했잖아."


 언제 얘기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렇게 말한다. 이동혁은 아직 불이 켜진 영화관 의자같이 빨개졌다. 나재민은 그게 특별하지 않은 것처럼 반응했다. 금방 불이 꺼지고 나재민이 스크린에 시선을 두자 이동혁은 나재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재민을 만난 이후로 영화가 재미없어졌다.

 색을 볼 수 있는, 일퍼센트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관은 없었다. 예전엔 영화나 드라마가 이동혁의 유일한 낙이기도 했는데, 스크린에서 눈을 돌리면 그것보다 더 영화같은 장면들이 펼쳐져서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당장 옆에 앉은 나재민과 같이. 보지 않을 건데도 자꾸 영화관에 오는 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하는 건, 다른 데이트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였다. 다른 데에서 만나자고 하고 싶어도 생각나는 게 없어서.

 훨씬 비싸긴 해도 색이 칠해진 영화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동혁은 그걸 언젠가 나재민과 집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오는 색에 대해 이야기하고, 감상하고 같이 느끼고 싶은 게 많았다. 이동혁에게는 밋밋한 그런 영화보다, 색이 칠해진 것들이 흥미로웠다. 그러고보니 나재민과 색에 대해 이야기 해본 적이 없었다. 이동혁은 나재민이 색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니까 조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이동혁은 자기도 모르게 가끔 티를 내기도 했지만.

 영화가 끝나고 둘은 좀 걸었다. 밥을 먹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고 자주 이렇게 걷는 걸 좋아했다. 걸어다니면서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이동혁은 색을 보고 나서 부터 눈에 다양한 것들을 담는 일에 시간을 썼다.


 "저기 가볼래?"

 "너 기타 칠 줄 알아?"

 "아니."


 그냥 구경하는 거지. 아무도 기타를 쥐어본 적은 없었지만 이끌리듯 들어갔다. 전엔 몰랐는데, 대부분의 기타는 검은색 혹은 흰색 아니면 나무 본연의 색이였다. 그리고 이동혁은 그 잔잔한 색 가운데서 혼자 반짝이고 있는 빨간색 일렉기타에 끌렸다. 재민아. 이동혁은 손으로 그 기타를 가리켰다.


 "저거 진짜 쨍하다. 그치."

 "어?"


 왜? ...아. 또 실수했다. 조심해야 하는데 자꾸 그게 안 됐다. 처음에는 몰라서 그랬고, 나중에 색이 보이는 걸 밝히는 게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잘 안 됐다. 이동혁은 숨기는 일에 별로 재능이 없었다. 미안 재민아. 이동혁의 말에 앞에 있던 사람들이 뒤를 돈다. 뒤를 돌아서 이동혁을 쳐다봤다. ...그냥 닥치고 있어야지. 나재민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나갈까? 하고 물었다. 시선이 더 몰리기 전에 나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8.

 운명의 상대와는 어떤 사이가 되는지, 이동혁은 잘 몰랐다. 사실 관계라는 걸 사회가 정의해주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보통 운명이고 그러면 결혼... 하고 그런 거 아닌가? 이동혁은 나재민과 나란히 걷는 상상을 하다가 손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진짜 말도 안 돼.

 다시 돌아와서, 이동혁은 나재민이랑 어떤 사이인지 생각했다. 일단 같은 반. 짝꿍. 그리고, 친구. 운명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였다. 그게 싫다기 보다는 뭔가 확실한 것들이 이동혁에게는 필요했다. 정확하게 하고 싶었다. 운명이라서가 아니라, 나재민을 좋아해서. 운명이라서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건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재민아 이따가 같이 가. 같은 방향도 아닌데, 나재민은 이유도 안 묻고 끄덕였다. 꼭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여서.


 하늘에 점점 주황색 물감이 퍼졌다. 이동혁은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하늘만 봤다. 갑자기 긴장돼서, 좀 정리를 하고 이야기하려고. 나재민은 고개를 든 이동혁 얼굴이 처음보는 것 같이 느껴졌다. 동그랗기만 하던 얼굴의 선이 옆에선 뚜렷하게 보여서, 근데 그게 뾰족하지는 않아서 좋았다. 뭐가 생각할 게 많은지 표정이 찌푸려졌다가 돌아오고 또 찡그렸다가 풀어진다. 전에 봤던 것들과는 조금 다른 종류인 것 같았다.


 "야."

 "응. 동혁아."

 "넌 제일 좋아하는 색이 뭐야?"


 좋아하는 색? 그건 왜?

 대답을 고민하기 전에 그런 질문을 들어볼 일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부터 생각했다. 색을 볼 수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화가? 컬러 영화를 찍은 감독? 그게 아니면, 운명의 상대 정도.

 이동혁은 자주 색에 대한 얘기를 했다. 무슨 의도로 한 질문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나재민은 이동혁 앞에서 처음으로 굳었다. 먼저 색을 볼 수 있냐고 물었으면 좀 괜찮았을까. 나재민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모르는 것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난 노란색."


 색은 볼 수 없지만 어떤 분위기인지는 알고있다. 조금 밝고, 명랑한 색이라고 정의했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동혁에게 어울릴만한 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름을 가진 색이였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이동혁.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동혁이 꼭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처럼 말해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처럼 말해서. 그게 아니기를 빌었다.


 "동혁아. 너 색 볼 수 있어?"


 기다린 대답 대신, 예상했던 대답 대신, 나재민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한다. 색을 볼 수 있냐는 게, 무슨 말이야? 나재민은 꼭 색을 볼 수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못 한 사람처럼 말했다. 그럴리가 없는데도.

 운명이라는 건 한사람한테만 나타나는 게 아니잖아. 그게 운명이야? 그게 어떻게 운명이야. 나재민이 색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이동혁은 자신의 세상을 칠한 게 나재민이 아니였는지 생각했다. 그럴리가 없는데. 나재민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눈으로 처음 보는 빛들이 들이닥쳤는데.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 아니, 이해하고 싶지가 않은데, 상황으로는 이해가 돼서. 그래서 이동혁은 억울해졌다. 억지로 받아낸 운명이였으면 억울하지 않았을 것도 같다. 어느 날 문득 손에 쥐어진 운명이 이제와서 혼자만의 운명이란다. 이 말을 하면, 나재민은 이해할 수 있을까? 너가 내 운명의 상대야. 너는 모르겠지만. 장난같았다. 내가 나재민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장난처럼 느껴질 것 같았고, 지금 이 모든 게 장난같았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을 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였던 척.


 "내가 색을 어떻게 봐. 일 퍼센트도 안 된다는데."


 평소처럼 가볍게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나재민은 이동혁이 거짓말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동혁은 정말 숨기는 데에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이동혁이 입술을 하얗게 질리도록 씹는다.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려다 그만뒀다. 스스로 그래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노란색 이름이 귀엽잖아. 그치. 그래서 그냥 좋아하려고. 그냥 그런 뜻이야."


 애써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눌러대는 이동혁을 못 본 척 했다.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너가 울어 동혁아.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나재민은 울지 말라고 토닥이려던 손을 애써 눌러둔 채로 한참 이동혁이 바라보던 하늘을 봤다. 하늘은 까맸다.



 9.

 나재민은 여전히 흑백 속에 살면서, 다채로운 웃음을 지었다. 가끔은 이동혁이 착각 할 만큼. 나재민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느낄 만큼.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약자가 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 소수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약자가 된다.

 삶의 목표를 세상을 물들이는 것으로 잡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는 말이다. 대부분은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면 꿈이라고 여겼지만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색을 볼 수 있게 된다. 그게, 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서, 찾아오는 운명을 기다리지 않고 운명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몇 년, 몇 십년이 지나고 나면,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간절함은 패배감으로 바뀌었다. 컬러화 된 사람들은 범죄의 표적이 됐다. 이동혁은 자꾸 그걸 잊었다. 그리고 혹여나 나재민이 이것때문에 모르는 척을 하는 건 아닐지 생각했다. 그냥 그런 생각은 할 수 있는 거니까.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10.

 이동혁과 나재민은 멀어졌다. 눈치없는 이제노까지 진지하게 물어올 정도면 그냥 반 전체가 안다고 보면 됐다. 사실 얘기하자면 이동혁이 일방적으로 피한 거였지만. 이동혁은 더는 옷을 고르느라 시간을 쓰지도, 더 이상 체육시간에 앉아있지 않았다. 대신 쉬는시간 점심시간 가리지 않고 교실에 붙어있는 나재민의 눈에서 벗어나려는 듯 하루종일 축구만 했다. 창가자리인 나재민의 자리에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작은 뒷통수가 여기저기 쏘다니는 게 한 눈에 보여서 나재민의 시야를 벗어날 순 없었지만.

 이동혁은 나재민이 전학 온 이후로 겨우 눈은 부릅뜨고 있던 수업시간에 축구로 날린 체력을 보충하느라 고개 조차 들지 않았다. 이상할 만큼 늦었던 교과서도 이미 다 와서, 나재민은 더 이상 깨울 핑계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다시 되돌아올지를 몰라서,


 "동혁아."

 나재민은 항상 이동혁을 불렀고,


 "어. 미안. 나 지금 가야돼서."

 이동혁은 항상 나재민을 피했다.


 학원도 다니지 않는 이동혁은 출석을 찍었던 피씨방에도 오질 않았다. 나재민이 제대로 이동혁 얼굴을 마주한지도 벌써 그 날 이후로 일주일째였다. 방학식인 오늘도 역시 이동혁은 나재민을 마주하지 않으려 부러 이제노 쪽으로 몸을 돌려앉았다. 이제노만 힐끔힐끔 나재민 눈치를 봤고, 이동혁 표정은 나재민에게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이동혁 반응이, 나재민이 느끼기엔 뭔갈 오해했던 것 같아서. 그래서 기다려주고 싶었다. 근데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였고 먼저 손을 내밀어봐도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안 했다. 이동혁은 나재민의 눈을 마주치면 애써 괜찮은 척을 했던 게 다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 그랬지만 나재민은 더 기다려줄 수가 없었다. 오늘이 지나면 꼭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말이 대청소지 대충 청소하는 척을 하던 아이들은 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라도 앉아있으면 병이 걸리는 것처럼. 그리고 제일 귀찮은 청소가 걸린 이동혁은 이제야 텅 빈 교실을 닦고 있었다. 이동혁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몇 번 걸레를 끌고 다닐 뿐이였다. 그리고 애써 혼자 앉아있는 나재민을 무시하려 노력할 뿐이였다. 나재민은 또 시간이 있냐고 묻는다면 도망갈 이동혁을 알았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끝나고 잠깐 남아. 동혁아."


 교실을 나가려던 이동혁 발이 멈췄다가, 작게 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11.

 며칠간 제일 먼저 교문을 통과하던 이동혁은, 피씨방을 제안하는 애들의 말에도 이젠 습관이 되어버린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그리고 이상해보이지 않게 미리 짐을 싸지 않았던 것처럼 천천히 가방에 뭘 넣는 시늉을 했다. 교과서나 낙서할 때 쓰는 공책 같은 거. 공부도 하지 않는 이동혁에겐 하나도 쓸 일이 없는 것들이였다. 종례가 끝나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이동혁은 꾸역꾸역 작은 가방에 집어넣었던 것들을 애들이 다 사라지자 하나씩 다시 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방이 완전히 비고 나서야 뻣뻣했던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이동혁 자리에서도 창 밖은 잘 보였다. 여름의 한 낮은 노란색이였다.

 나재민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눈을 마주할 용기는 아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나재민 뒤에서 비추는 색을 따라 눈을 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잠깐 울컥 또 눈물이 나게 만들었다. 나재민이 볼 수 있게 만든 게, 나재민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왜 그래 동혁아."


 뭘 묻는 지 모를리가 없었다. 사실 이동혁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조금 억울했다. 속상하기도 했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상처받았다. 근데 그게 나재민 잘못이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그래서 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가 내 운명이라서. 너가 나를 보고도 여전히 노란색이 뭔지 몰라서. 너 잘못이 아니라서. 아무것도 적합하지가 않았다.

 이동혁은 대답 대신 눈을 꽉 감아버렸다. 차라리 색을 다시 앗아갔으면 싶은 마음이였다. 혼자 볼 수 있는 색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야만 볼 수 있게 되나보다. 근데 이동혁은 그 중에서도 불행하게 혼자만 운명을 찾아서, 그래서, 차라리 보통 사람들처럼 암흑 속에 갇혀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 암흑 속은 누구나 함께 볼 수 있는 세상이니까. 이동혁에게만 보이는 다채로운 세상은 이동혁 혼자만의 세상이니까. 가끔은 정말 혼자만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감정이나 상황을 다 뒤로하고 이동혁은 나재민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더는 운명이 아니라고 해도 이동혁은 나재민을 좋아했으니까. 수업시간 내내 엎드려있기만 할 뿐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을 만큼 좋아했으니까. 아니, 지금도 좋아하니까. 그냥 다시 평소처럼, 이제노처럼 단순한 친구사이로 지내지 않는다면 앞으로 계속 나재민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보단 마음을 숨기는 게 차라리 나았다.

 꾹꾹 감정을 눌러댄다. 잘못하면 흐를 것 같은 눈물도 꾹꾹 삼켜냈다. 그냥 운명이라는 것만으로 나재민에게 드는 모든 감정들이 착각이였던 건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렇게나 주워입은 초록색 셔츠 위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짙어졌다. 도저히 옅어질 수 없는 마음이였다. 그래도 노력해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 애써 밝게 웃어보였다. 나재민도 알았다. 이동혁이 정말로 웃고 있지 않다는 걸. 색은 볼 수 없어도 더 까맣게 번진 것을 구분할 줄은 알았다. 그냥 그것마저 보이지 않는 척을 했을 뿐이였다.


 "재민아 나 떡볶이 사줘."


 이동혁은 억지로 웃으면 티가 났다. 그리고 그렇게 다 젖은 얼굴로는 아무도 속아주지 않을 거였다. 근데 나재민은 그냥 덩달아 웃어보였다. 더는 뭘 묻지도 않았고 의심하지도 않았고 알아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르는 건 많았다. 이동혁이 느끼고 있는 감정들과 상황 중 나재민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근데 하나도 먼저 손을 댈 수 없다는 것만 알았다. 괜찮다고 위로 하지 않았다. 괜찮지 않을 것도 알았다. 그냥 다시 보기만 해도 웃었던 때로 돌아가자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가자."



 12.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누가 그랬는지, 이동혁은 그 말에 오백만번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사이로 돌아오는 건 이동혁의 생각보다 간단했다. 애초에, 친구사이가 아니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나재민은 여전히 똑같이 이동혁을 똑같이 대했다. 방학이지만 항상 그랬듯 자연스럽게 만나서 데이트를 했고 달라진 게 있다면 영화관 대신 피씨방을 더 자주 갔다. 그냥 더는 영화관에 가기 싫었다. 나재민은 게임을 아예 안 했었는데, 이동혁이 열심히 알려준 덕분에 제 몫을 할 정도는 됐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피씨방에 있기도 했다. 알바생 형이랑 안면도 터서 가끔 유통기한 지난 핫바같은 걸 주기도 할 만큼 자주 갔다.


 "야야 세 시 방향!"

 "뒤 조심해."

 "야야야 잠만 일단 나 살려."


 캐리해주겠다더니 여포짓하다 위치만 알려준 이동혁이 현란하게 키보드 위를 움직였다. 살려달라면서 죽었다. 가다가 급히 방향을 튼 나재민이 안전한 공간을 찾으러 움직였다. 이동혁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나재민의 치킨마요를 들어 한 입 넣었다. 아예 나재민을 보면서 컵을 들고 먹었다. 몇 명만 더 죽이면 치킨이라고 진짜 집중하네. 앞에 진짜 치킨 놔두고. 위치를 파악하느라 신중하게 움직이는 손을 보다가 떠올랐다. 아. 며칠 뒤에 나재민 생일인데.


 "야 너 뭐 필요한 거 없어?"

 "먹어도 돼."

 "아니..."


 나재민의 말에 자동적으로 움직이던 손을 멈춘다. 벌써 바닥이 보이는 치킨마요를 숟가락으로 헤집어 대충 많이 보이게 만들곤 내려놨다. 나 진짜 몇 입 안 먹었는데 양 개 작네. 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생일 선물 뭐 갖고 싶냐고."

 "갖고 싶은 거 없어. 나도 너 선물 못 챙겨줬잖아."

 "그 땐 너가 없었잖아."


 혼자 두 명을 상대하기엔 가지고 있는 게 동나서 죽었다. 갑자기 선물 얘기를 하는 이동혁을 보는데 또 여기저기 묻히고 먹어서 먹은 티가 다 났다. 나재민은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휴지를 주고 다시 컵을 이동혁 손에 쥐어줬다.


 "나 다 먹어?"

 "어. 그거 먹고 햄버거 먹으러 가자."

 "나 돼지 아니다. 너가 이거 버릴까봐 먹는 거야."

 "알지. 학교에서 너 환경상 줘야 되는데."

 "죽을래?"


 빵빵하게 채워서 동그래진 얼굴과 똑같이 동그란 주먹을 들어보인다. 동혁아 또 묻었어. 어디? 여기. 꽉 채운 볼을 찌르자 이동혁이 눈을 크게 뜨며 기겁했다. 너 진짜 얼굴에 뱉기 전에 하지마. 이동혁이 나재민을 째려봤다. 장난 아닌데. 나재민이 휴지를 들고 이동혁 턱을 쥐었다. 꼭 드라마에서 봤던 키스라도 하는 자세처럼 눈을 맞춰온다. 까끌거리는 휴지가 볼을 스쳐 지나갔다.


 "봐봐. 묻었잖아."


 자기 말이 맞다는 듯 웃어보이는 나재민이 또 신경쓰였다. 아무래도 밀어넣은 것들이 꽉 막힌 기분이다. 체할 것 같애. 



 13.

 집에 와서야 생각이 났다. 나재민 생일선물. 아무리 물어봐도 얘기해주지 않을 거다. 나재민은 자기가 주는 건 당연하다는 듯 굴었으면서 이동혁이 줄 기회는 잘 주지 않았다. 그냥 자기가 주는 것만으로도 바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넘겼다.

 나재민이 좋아하는 게 뭔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나재민은 이동혁이 뭘 좋아하는 지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데 이동혁은 도통 생각나는 게 없었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항상 나재민이 이동혁한테 맞춰와서. 뭐 먹을까? 하고 물으면 이동혁이 좋아하는 것들을 늘여두며 고르라고 한다던가 전에 먹고 싶어했던 걸 이야기 해서. 이동혁이랑 관련된 게 아닌 정말 나재민이 좋아하는 걸 찾기는 어려웠다.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이 정도면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동혁은 다시금 김칫국을 마시려다가 관두고 그냥 자기가 가지고 싶은 목록을 뒤졌다. 신발.. 은 너무 비싸고. 케이스... 는 안 끼고 다니던데. 옷? 그냥 무난하게 옷 사줄까. 생각해보면 나재민은 다른 애들보다 옷에 관심이 많았다. 저번에 보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거 있는데. 안 어울릴까봐 사지는 못하고 들어가서 보고만 있었는데 나재민한테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색도 예뻤다. 초록색.

 나재민이 정말 초록색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이제는 나재민을 보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색이였다. 그리고 언젠가 나재민이 색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좋아할 것 같았다.



 14.

 이상하게 이동혁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피씨방 이후로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제일 먼저 축하해주겠다 선언했으면서 밤엔 연락도 없었다. 하필이면 개학식 날 생일이네. 개학식은 단축수업 안 하잖어. 형이 학교 끝나면 피자 쏜다~ 일찍 가서 일 빠로 생일빵 때릴거야. 이랬으면서 이미 도착한 나재민 옆은 비어있었다. 나재민은 이동혁이 원래 그리 일찍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문자를 할까 고민하다 결국 오 분 전이 돼서야 전송버튼을 눌렀다.


 [왜 안 와?]


 전 날에 밤 새다 늦잠 잤나. 그럼 연락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 거 챙기는 데에 예민한 편이니까. 일찍 자서 연락이 없는 거겠지 싶었는데 여전히 카톡방엔 나재민 문자만 쌓였다. 동혁아 종 쳤다.


 "다들 방학 잘 보냈냐. 멍청하게 이동혁처럼 개학식 날 아픈 놈 없지? 제노는 쌤들 오시면 이동혁 질병결석이라고 말씀드리고."

 "동혁이 어디 아프대요?"

 "감기래. 개새끼도 아니고 다 큰 놈이 여름감기 걸리고 앉았네. 너네도 조심해라."


 감기. 요즘 감기 독하다던데. 담임이 나가자 마자 나재민이 휴대폰 담당한테 가서 물었다. 나 오늘만 봐주면 안 될까. 다른 애들처럼 공기계라도 가져오는 성의를 보이던가 이게 무슨 당당함이냐 재민아. 한 번만. 너 진짜 내가 생일이니까 봐준다. 들키면 너 죽고 나 너 두 번 죽일 거니까 걸리지마.

 교칙 같은 걸 위반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일부러는 더더욱. 나재민은 다시 돌려받은 폰을 켜고 다시 이동혁에게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여전히 보지 않았다. 어제부터 아픈 거 같은데 그럼 약 먹고 다시 자는 건가. 중간에 깨면 보려나. 더 뭔갈 보내면 괜히 잠이 깰까 그만뒀다. 눈이 뻑뻑해서 몇 번을 비비고 폰을 넣어둔다. 어제 늦게 잔 탓인가.



 15.

 당연하게도 개학식 날 수업은 한 두 교시 빼놓곤 방학 썰풀기 시간이였다. 애들은 수업하기 싫어서 전 시간에 했던 얘기를 또 했고 나재민은 이제 뒷 말을 이어붙일 수도 있었다. 그러다 얘기가 끊기면 꼭,


 "쌤 오늘 나잼 생일이에요. 노래 부를까여? 하나, 둘, 셋, 넷!"


 벌써 세 번째 축하노래. 옆 반 애들도 지겹겠다. 축하해주는 건 좋은데 별로 관심받고 싶어하지 않는 나재민은 불편하게 웃고 금세 화제가 넘어가길 기다렸다. 누가 다시 얘기를 시작하면 나재민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계속 눈이 피로했다. 따갑고 가끔 흐릿해졌다가, 순식간에 빛이 확 들어와 눈을 꽉 감아버릴 수 밖에 없기도 했다. 어른어른 보이는 처음 보는 것들이 나타났다가 눈을 비비면 사라져있었다. 



 16.

 자고 일어났더니 열두 시였다. 이동혁은 요즘 자꾸 밤 새서 어제 기절잠 잔 줄 알았는데 아파서 그랬는지 몸 전체가 뜨거웠다. 감긴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엄마, 하고 부르려했는데 목도 부었는지 말도 못 할 것 같이 아파서 결국엔 전화버튼을 누르고 껐다. 와 나 좀 똑똑한 거 같애.

 벨소리가 울렸는데도 반응이 없다. 엄마 아들 아퍼. 근데 배고파. 왜 안 와. 카톡을 보내는 게 빠를 것 같아서 다시 폰을 들었는데 나재민한테 온 문자가 쌓여있다. 평소랑 똑같이 지각할까봐 보내는 문자. 그 위에 익숙한 숫자가 떠있었다. 아. 아 오늘 나잼 생일이네! 개학식이구나. 엄마 학교에 전화 했나. 제일 먼저 축하해주겠다고 기다리라고 해놓곤 아홉 시에 자서 열두 시에 눈떴다. 이동혁 우정존심 상하네. 뭐라고 보내지...


 "아들 학교 가기 싫어서 그냥 잔 거야? 아픈데 폰 할 때는 안 아픈가봐?"

 "아 아냐 나 진짜 아퍼..."


 변명을 보내거나 늦은 축하말이라도 보내려 이것저것 쓰다 지우는데 문이 열렸다. 의심의 눈초리가 뒤따라와서 아니라고 입을 여는데 목소리가 진짜임을 말해주고 있어서 더 이상 잔소리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이따가 보내야겠다. 어차피 나재민은 이동혁처럼 폰 안 내지도 않고 끝나자마자 본다면 신경쓰일 거 같아서.



 17.

 나재민은 매 시간 종이 치고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폰을 확인했다. 폰 받아가놓고 게임도 안 하고 딱히 노래를 듣지도 않았고 쉬는 시간에도 이동혁한테 답장이 왔는지 확인하는 게 다였다. 신경쓰여서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폰을 확인했을 땐 숫자는 사라져있었다. 답장은 없었다. 그래도 일어났나보네. 죽 먹었으려나. 약은 먹었나. 또 뭔갈 보내기엔 이상한 거 같아서 그대로 폰을 끄곤 가방에 넣었다.



 18.

 원래 잘 안 아픈 몸이라 한 번 아프면 조금 힘들었다. 약 먹고 열은 내렸는데 목은 여전히 잠겼다. 그래도 아까처럼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라 기지개도 펴고 물도 마시니까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여름이라 다행인 점은 해가 빨리 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잼 저녁 먹고 있을라나. 그래도 생일이 끝나기 전엔 봐야했다. 이동혁은 예쁘게 개어놓은 후드에 먼지가 앉는 걸 볼 수가 없었다.


 [머해 밥 먹냐]

 [방금 밥 다 먹었어]


 다음 말을 고민하고 있는데 바로 답장이 온다. 나재민 원래 폰 잘 안 보는데.


 [감기라며 괜찮아?]

 [엉 갠찬]
 [글고 나 감기 아니야 ㅋㅋ 그냥 어제 야식 먹고 체해서 그래]


 감기라고 하면 나오지 말라고 할 게 뻔해서 거짓말했다. 이동혁은 다른 애들한텐 안 그러는데 자꾸 나재민한텐 속이는 게 늘어갔다.


 [너 지금 어디야?]

 [집이지]

 [나 지금 간다 운동장에 있엉]

 [아프면 안 와도 돼 동혁아]


 이럴까봐 구라친 건데. 진짜 감기라고 했으면 절대 오지 말라고 못 박았을 나재민을 생각하니 좋은 선택이였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양치랑 세수만 하고 갈겡. 천천히 와.



 19.

 이동혁이 체한 게 부끄러워서 감기라고 속일 애는 아니였다. 체해서 그런 거라는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나재민은 굳이 따져묻지는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얘기했을테니까. 그리고 오늘은 이동혁을 보고 싶었으니까.

 나재민은 원래 생일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이 아니였다. 보통은 날짜를 모르고 지내다 연락을 받는 게 대부분이였고 그마저 방학이 겹치는 때가 많아 특별하게 보내지도 않았다. 근데 이동혁이 몇 번이나 생일 얘기를 꺼내서, 특별한 날이라고 얘기해줘서,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졌다. 이동혁이랑 보내고 싶었다. 운동장이 이동혁네 집에서 거리가 먼 편이 아니라 혹시 먼저 기다리고 있을까봐 나재민은 문자를 보자마자 옷을 챙겨입고 나갔다. 요즘은 해가 질 때 쯤이 되면 조금 추웠다.

 벤치에 앉아 툭툭 바닥을 건드렸다. 흙먼지가 이는 게 뿌옇게 보여서 그만두고 고개를 돌린다. 하늘을 보니 점점 물들어가는 듯 했다. 또 눈이 따가워져서 그냥 꽉 감아버린다.


 [나와있어?]

 [응]


 다 왔을 때 쯤 나와도 되는데 왜 또 일찍 나와있냐고 묻는다. 거의 다 왔다는 뜻이다. 나재민은 이동혁이 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섰다. 멀리 있어도 동그란 이동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점점, 다양하게 퍼진다.



 20.

 걸어오는 이동혁을 시작으로 그 주위로 빛이 퍼진다. 처음엔 옅게 퍼져가다 점점 그것들이 진해진다. 이동혁이 칠해진다. ...아. 꿈인가? 나재민은 멍하니 이동혁이 걸어오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이동혁이 나재민을 발견하고 손을 방방 흔들어대도 움직임이 없이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동혁이 움직일 때 마다, 가까워져올 때 마다 마법같이 빛이 퍼졌다. 그리고 나재민은 본 적이 없어도 그게 색이라는 걸 알았다. 색. 이동혁이 칠한 색. 진짜일까. 혹시 아까처럼 잘못 보고 있는 걸까봐 눈을 꽉 감아버리곤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리고 눈을 떴는데도, 사라지지 않았다. ...진짜다.



 21.

 어느새 완전히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과, 이동혁이 선물이라며 내민 초록색 후드티와, 예쁘게 시선을 맞춰오는 이동혁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며 나재민의 현실성을 앗아갔다.

 나재민은 그게 어떤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느낀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믿기지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재민이 본 영화엔 죽은색밖에 없었으니까.



 22.

 평소라면 똑같이 웃어보이며 손을 내밀었을 나재민이 멍하게 눈만 맞춰오는 걸 이동혁은 의아해했다. 왜 주냐는 건가? 혹시 오늘 생일인 거 모르는 건가.


 "생일 선물이야."


 그렇게 얘기하는 이동혁이 꼭, 나재민에겐 생일선물 같았다. 나재민의 세상을 완전히 색칠해버린 이동혁 그 자체가 나재민에겐 두 번 다시 없을 선물 같았다.


 "...색 예쁘다."


 천천히 한 글자씩 곱씹 듯 말하는 나재민의 이동혁 눈이 커졌다. 


 "...뭐라고?"


 색. 예쁘다고. 잘 골랐네.

 색이라는 거. 나재민의 입에서 나올 일이 없던 나오지 않았던 단어였다. 색 예쁘다.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잘못 이해한 건 아닌지 이동혁은 몇 번이나 되새긴다. 색 예쁘다. 예쁘다는 표현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쓸 수 있었던 건지 잠시 고민했다. 나재민은 색을 볼 수 없다. 분명히 색을 볼 수 없었다. 이동혁의 세상이 물들었을 때도 나재민은 여전히 흑백에서 살았다. 근데, 그런데.


 "나도 이제 보여 동혁아."


 운명. 거부당했다고 생각했던 운명. 정말 운명이 맞았다고, 이동혁의 운명의 상대가 나재민이고, 나재민의 운명의 상대도 역시 이동혁이였다고. 그렇게 말한다. 믿기지가 않는다. 처음 색이 칠해졌을 때 보다도 더. 나재민의 운명이 이동혁이다. 성립하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문장을 떠올리자 이동혁은 또 울컥 눈물이 찼다. 진짜. 운명이야?


 "울지마."

 "너 왜 이제 나타나."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내밀고 원망하듯 쳐다본다. 미안해. 감기 때문인지 울어서 그랬는지 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는 이동혁을 꽉 안아버린다. 나재민도 덩달아 나오려던 눈물을 꾹 참았다. 그러게.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좋아해 동혁아."


 울지 말라는 듯 토닥이는 나재민을 밀어내곤 눈을 마주친다. 꿈인가 싶어서. 자꾸만 들을 수 없는 말만 듣는 것 같아서. 나재민의 눈을 마주치면 알 수 있었다. 진짜인지 아닌지. 깊게 맞춰오는 눈에 호흡이 엉킨다. 그만 울고 싶은데 나재민이 자꾸 이동혁을 울렸다.


 "너는?"


 이동혁이 좋아하는 색을 물어봤을 때처럼, 나재민도 똑같이 물어온다. 나도. 끝끝내 대답을 못 했던 나재민과 다르게, 이동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이니까. 더는 스스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꾸 눈을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서 잔뜩 구겨져버린 후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재민은 대답을 듣자마자 멀어진만큼 이동혁의 코 앞까지 다가갔다. 볼을 감싸쥐고 다 젖은 얼굴을 엄지로 닦아준다. 다 젖은 이동혁 눈이 흔들렸다.


 "나 감기 걸렸는데..."

 "옮겨."


 그 순간 나재민의 입술이 이동혁과 맞닿았다.




만 18세가 되면 운명의 상대를 알 수 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온 세상에 색이 물들고 전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느낄 수 없던 것들이 느껴지게 될 것이다.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단 0.3%라고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이보다 높은 확률을 가질 것이라 예측한다. 하지만 여전히 확률은 1%를 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컬러화 된 사람들은 범죄의 표적이 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열다섯 배나 높은 것으로 알려져있어 정확한 통계를 내는데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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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꼭 아프지 말라는 말이 마치 사랑한다는 말의 대신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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