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력적인 묘사와 남성 캐릭터가 조금이나마 나옵니다.

* 본 글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과 지역 그리고 기업은 전부 허구입니다.






초소형 무선 이어폰을 빼내고도 가영은 떨리는 손을 멈추지 못했다.

그동안 숱한 상황을 보고 들었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투명할 정도의 살기와 또렷한 폭력. 애비를 두려워하던 차진규가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조수석에 벗어둔 두툼한 카디건을 입었다. 추운 건 몸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폭도 아니면서 하는 짓은 조폭 뺨친다는 CC컴퍼니 사장에게 열중한 놈이 무슨 짓까지 하는지, 알고 있었다. 멍청한 수작이니 똑똑한 여자들이 어련히 알아서 해결하리라 여겼건만.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

처음부터 전부 죽여버릴 생각으로 J캐피탈에 입사했다. 내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으니, 내 손으로 직접 죽여야만 했다. 그래야 잠이라도 편안하게 잘 것 같았다. 그랬는데. 지금 고작 이런 일에 이렇게까지 벌벌 떨고 있다.

“당신들, 대체 밤마다 잠은 어떻게 자는 거야?”

꼴사납게 떨리는 목소리가 우습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머리를 굴리기 전.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을 감기로 한다.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를 가졌던 그 애의 버릇처럼.


된장찌개가 부글부글 끓는다. 맛있는 향이 거실까지 넘실대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앉아 있자니 좀이 쑤셨다.

“가만히 있어. 괜히 역정 내실라.”

눈치 빠른 혜숙이 조용히 달래며 상을 차린다. 꼼짝없이 죽을 맛이다. 은채가 서둘러 카페에 들어서자 금자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뒤로 사람이 셋이나 쫓는데 그대로 나가선 딱 한 마디를 했다. 택시 탈까, 이거 탈까. 그래서 현서가 내미는 열쇠를 받아들었다.


금자와 혜숙이 사는 집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인데 어제도 온 것처럼 마음이 녹았다. 왈칵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지만, 냉랭한 금자를 보곤 꾹 참았다.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옆으로 가는 것도 어려웠다. 은채는 이게 뭔지 안다. 처음 흥신소 이야기를 했을 때 할머니가 보인 반응과 비슷했기에. 그렇지만 여전히 어렵다. 절절거리게 된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법이다.

밖은 벌써 어둑하다. 점퍼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는데 확인도 않고, 정좌를 한 지 1시간은 넘은 것 같다. 수트 차림이 아니라 다행이라 할까. 검은 티셔츠에 검은 조거팬츠 아래 주황색 양말. 혹시 싫어할까 봐 카키색 항공점퍼는 뒤에다 벗어두었다. 행순이 껄렁해 보인다며 유달리 싫어하는 옷이라 괜히 신경 쓰였다. 허벅지 위 주먹이 곰실곰실 쥐어지고 풀린다. 이제야 손등의 살갗이 드문드문 까진 게 보였다.

“밥 무라.”

된장찌개가 마지막으로 놓인 상 앞에 금자가 앉는다. 아까 한의원에 갈 거라 했던 말이 생각나 또 속상하다.

“얼른 먹어, 은채야.”

수저를 억지로 쥐여준 혜숙이 계란말이를 콕 찍어 쌀밥 위에 올려준다. 밥과 계란말이를 떠서 입에 넣어본다. 뜨끈하고 묵직한, 울음이 나오는 맛이다. 그래도 울지 않는다. 울면 먹기 힘드니까. 두부와 애호박이 잔뜩 들어간 된장찌개. 구운 김과 콩자반. 일미 무침. 잘 익은 김치가 입안에서 씹힌다. 그렇게 금자가 하려는 말을 꼭꼭 씹어 삼킨다.

투박한 손바닥에 고스란히 남은 세월의 흔적만큼 싸움꾼에게서 볼 수 있는 안광이 또렷한 그의 마음을 먹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안쓰러워, 혜숙은 계속 반찬을 밥에 올려준다. 계속 계속. 그 옛날, 자신에게 언니가 해주었던 것처럼.



그릇을 싹 비운 은채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식사를 끝낸 지 오래다. 투명하고 낡은 유리컵에 가득 채워진 보리차까지 전부 마셨다. 이제 배가 터질 것 같은데 어쩐지 헛헛하다. 흥신소를 차린 직후, 반년이 넘도록 본가에 못 갔다. 오지 말라고 해서. 혹시 말 안 듣고 갔다가 할머니가 잔뜩 화내다 쓰러질까 무서워서.

대신 여전히 장사 중인 옆집 장미에게 안부를 물었다. 매일같이 전화하니 귀찮아 하면서도 언니는 할머니가 병원에 갔다, 뒷산에 올랐다, 동네 할머니들 모여 놀러 간단다 꼬박 전해주었다. 거기에 맞춰서 선물도 보내고, 대절 버스까지 보냈다.


그러다 주말이었나. 사무실에 대충 늘어져 있는데 비가 쏟아졌다. 가슴이 덜컥댔다. 길이 유달리 험한 동네에 혼자 있는 행순 씨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혼자 골목길에서 미끄러지면. 그 길로 집에 갔다. 벌컥 들어가 여전히 꼿꼿하고 탄탄한 몸을 꽉 안았다. 2시간 거리의 동네는 해가 쨍쨍했다. 대뜸 뛰쳐 들어온 몸뚱이를 재우기라도 하듯, 행순이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그날 은채는 약속 하나를 했다. 할머니보다 먼저 죽지 않기로.

“아야.”

“네.”

“느그 할매는 아시나.”

“……응.”

“뭐라 하시대?”

“…그냥, 먼저 죽지 말라고.”

금자가 묵묵히 밥상을 치운다. 숙인 머리를 쓸어준 혜숙이 가서 도왔다. 그릇 담는 소리가 차곡차곡 들리고, 부스럭부스럭한다. 아직도 꿇고 있는 무릎 앞에 종이백이 놓였다.

“가가서 무라. 만날천날 사 묵지 말고.”

가만히 끄덕인 은채는 종이백과 점퍼를 챙겨 현관으로 갔다. 제 운동화 말고는 다 낡았다. 그게 아파서 서둘러 신는데 목소리가 들린다.

“내 며칠 쉴끼다. 돌팔이래도 으사가 쉬라면 해야지. 뱅원을 댕기든가 하고.”

“….”

“가라, 고마.”

제대로 보지도 않는 금자의 몸을 은채가 꾹 안았다. 운동화가 끼워진 발이 현관에서 넘어왔는데도 아무도 혼내지 않는다. 현관 등이 꺼질 때까지 그러고 있는 등을 툭 하고 두꺼운 손이 친다. 옆에서 울먹이는 혜숙에게 웃어준 은채가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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