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립 아카데미의 조슈아와 프라우. 날조 설정이 많습니다. 캐해석에 민감하신 분들은 열람을 주의해주세요!











아주 오랜 시간을 끊임없이 달렸다. 나는 나의 심장박동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말발굽 소리만이 나의 곁에서 뿌옇게 일어나 먼지 바람마냥 퍼졌다. 그것은 나의 것이기도, 내 뒤를 따르는 무리의 것이기도 했다. 그 둘을 구분하고자 귀를 기울이면 선연한 두려움이 갈기 속을 파고들었다. 뒤에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사실 외딴곳에 낙오된 것이 나라면. 이 길의 끝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나의 주인은 현명한 이로, 눈 옆에 차안대(경주마의 눈가리개)를 드리워 옆과 뒤를 보지 못하게 했다. 반쪽짜리 시야는 몹시 아늑했다. 나는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달렸다. 곧게 뻗은 길은 몹시 반듯하고 타당하고 마땅히 그래야 할 것처럼 그곳에 존재했다. 그럴 때면 이 길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완벽한 질주는 항상 짜증 나는 방해꾼에 의해 산산조각났다. 그 애는 까마귀였다. 차안대 덕분에 그 애가 어떻게 나는지 외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앞에 펼쳐진 길을 순식간에 등 뒤로 보내면서도 그 애의 새까만 깃털만을 훔쳐보았다. 까악까악 시끄럽게 구는 까마귀는 내 눈길을 끌려다 실패하면 어김없이 내 이마 사이에 발톱을 박아넣었다. 그리곤 자신의 날개로 시야를 덮었다. 깃털에선 뜨거운 쇠 냄새가 났는데, 어쩌면 내가 흘리는 피 냄새일지도 몰랐다.

뾰족한 부리로 성가시게 차안대를 쿡쿡 건드리며 까마귀가 말했다.

"너, 떨고 있구나? 이건 무서워서 하는 거야?"

어서 이 새를 쫓아내고 내가 제대로 달리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애에게 꺼지라고 하고 싶었지만, 멍청하게 '푸르륵'거릴 수만 있었다. 나는 주인처럼 말하는 법을 모른다. 

"아하하하, 차라리 내가 도와줄게. 어때?"

전혀 반항하지 못하는 사냥감을 얻은 까마귀는 더욱 신이 나서 지껄였다. 그 애는 자신이 몹시 매혹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는 양 목소리를 낮췄다. 카랑카랑하던 목소리가 지금은 꿀처럼 감미로웠다.

"네 눈알을 쪼아먹어 줄게."

"그럼 영영 겁먹을 필요도 없어! 눈이 먼 채로 나와 끊임없이 달리자."

그 말과 함께 곧 차안대가 멋대로 뜯겨나갔다. 나는 끔찍한 공포를 느끼며 강박적으로 앞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까맣고 반짝거리는 까마귀의 눈만이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무섭지? 거봐, 무섭지? 의기양양한 눈빛은 징글징글 나를 약 올렸지만 나는 대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곧 잔뜩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제안'이 귀를 찢을 듯이 울렸다.

"어디든 가자, 조슈아!"

 

조슈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온몸이 축축하고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귓가는 심장박동으로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이 빌어먹을 아침을 후회하기도 전에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성실하기 짝이 없는 그의 부사관은 아발론이 곧 엔타로니아까지 진입한다는 속보를 전했다. 그는 겨우 알았다고 대답하며 일어났다. 꿈에서 느꼈던 끝없는 불안감과 함께, 한 물음이 저절로 떠올랐다. 배신할 건가? 드디어?

지긋지긋한 악몽 같은 프라우 레망. 그는 아주 오래도록 그런 꿈을 꾸었다.

 

 

*

 

 

그 당시 갈루스 왕립 아카데미는 얼뜨기가 운영하는 와이너리 같았다. 이 얼뜨기는 한켠에 란다바이르의 유서 깊고 풍미 좋은 와인들-가령 리브리안의 수재와 도스의 귀족 자제-을 윤이 나게 닦아 수집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사르디나의 갑판 아래에 석 달 정도 뒹군 상한 포도즙-레오스의 반군 새싹이나 갈루스의 평민-을 세워두었다. 전자나 후자나 어찌 되었든 포도주이긴 했다. 기회는 평등하게, 결과는 탁월하게! 그렇다. 이 아카데미의 따분한 슬로건은 기본에 충실했다. 온갖 잡다한 아이들을 한데 모아둔 이 괴상망측한 아카데미는 교육 자체는 훌륭한 나머지, 동대륙의 귀하신 분들도 자기 자식을 보내길 꺼리지 않았다. 덕분에 새 시대를 열어갈 미래의 주역들은 태풍 앞의 호수처럼 위부터 아래까지 죄다 뒤섞였다.

아카데미가 아무리 번듯한 슬로건을 내걸어도 이 혼잡한 곳에 모인 아이들은 자신의 '영역'을 어른들만큼 잘 알았다. 대화를 여는 인사가 '넌 어디서 왔니?' 였으니 알만 하지 않은가. 출신지는 꼬리표처럼 아이들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게일문드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모여 다니며 으스대길 좋아했고, 알드 룬 출신들은 모두에게 친절했으나 내밀한 곳에선 국경을 철저히 지켰다. 학생자치회는 슈바이켄과 비에른 지역 아이들이, 마도 연구 학회는 대륙 북부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모두와 자유롭게 교류하면서도 철저히 분류 당하길 좋아하는 학생들. 그들로 이루어진 아카데미는 동대륙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선에 애매하게 걸리는 알갱이도 있는 법이다. 첫째로, 아무런 꼬리표도 붙지 않는 소수의 아이들이 있었다. 고향이 없는 그들은 꼭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살살 꼬드겨도 이전의 생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은연중에 노예나 사생아 출신으로 여겨지곤 했다. 이들은 부표처럼 떠다니며 아카데미에 자그마한 혼란을 가미했다.

조슈아 레비턴스도 여기에 속했다. 다른 '부표' 아이들이 남몰래 자신을 신 혹은 황제에게 '선택받은 아이'로 상상할 때, 조슈아는 그저 아카데미의 부품처럼 매끄럽게 일과를 수행했다. 조숙한 소년이었던 그는 주제 파악이 빨랐다. 고향과 부모, 그리고 과거가 없다는 것. 이 모든 부재는 그들이 언제든 소각할 수 있는 쓰레기라는 걸 의미했다. 조슈아는 담담하게 그의 처지를 받아들였지만, 정작 그가 아닌 누군가는 이게 영 못마땅한 것 같았다. 둥둥 떠다니던 그를 놓아주지 않으니 말이다.

이 무뢰배 역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외딴 알갱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슈아와는 반대로 수없이 많은 꼬리표를 달았다. 이런 아이는 전교생 중 딱 한 명뿐이었다.

"바로바로 이 몸 말이지, 프라우 레망! 하하하하!"

그래, 프라우. 너 말이야. 인제 와서 메타를 섞기엔 이미 1842자나 무겁고 현란하게 써버렸으니 좀 봐줘. "어쩔까나~" 어쨌든 프라우 레망이 첫날 받게 된 꼬리표는 역시나 '엔타로니아의 평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다음 날에 온실 유리창을 18개나 깨 먹으며 '미치광이', '정신 나간 자식', '절대 눈을 마주치면 안 되는 애'라는 영광스러운 꼬리표를 수집했다. 이는 조슈아 레비턴스가 알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프라우 레망이 그의 꽁무니에 졸졸 따라붙자 애석하게도 알 바가 되었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

"그거어떻게어떻게어떻게하는거야!"

프라우의 반짝반짝한 눈이 조슈아의 손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염동력을 처음 선보인 순간부터 저 보라색 눈깔은 맛이 영영 가버리더니 조슈아를 끈덕지게 쫓아다녔다. 그러니 조슈아 레비턴스의 뒤에도 새로운 꼬리표가 붙게 된 것이다. '정신 나간 프라우 레망의 그놈.' 딱히 영광스럽지는 않았다.

 

 

*

 

 

전투 과목은 꽤 비중이 커서 수업도 길고 잦았다. 예전엔 이론 위주로 형식적으로 돌아갔다는데, 올해 정권을 잡은 황태자가 대련과 실습 중심으로 죄다 개편해버렸다. 프라우에게는 방방 뛸 정도로 환영할만한 소식이었다. 조슈아에게는 아니었지만.

"와오, 드디어 노잼을 버틴 보람이 있네! 조슈아, 너도 좋지? 설레지? 떨리지~? 두근두근거려서 미칠 것 같지??"

묵직한 대검이 동전이라도 되는 양, 허공에 휙 던졌다가 받길 반복하는 프라우는 아주 산만해 보였다. 조슈아는 그녀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대련 상대를 외면하는 건 쉽지 않은 법이다.

아껴둔 먹잇감을 보는 듯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몇 주간 능력자는 능력자끼리, 비능력자는 비능력자끼리 대련해온 탓에 프라우는 징징대며 조슈아를 포기해야 했다. 딸기 케이크의 딸기부터 홀랑 먹는 프라우에게는 끔찍한 고행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이 정도로 네게 공들였으니 제대로 해줘야 해! 야, 듣고 있어?"

그럴 생각 전혀 없거든. 요 며칠간 프라우를 견디며 묵언 수행을 한 그는 그녀를 마주 보고 손을 뻗었다. 손아귀가 끝마디부터 하나하나 억세게 굽어졌다. 졸졸 따라붙는 저 자식이 성가셔서 미쳐버릴 지경이었으니 화풀이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조슈아의 눈에서 투지를 발견한 프라우는 그야말로 즐거워서 미치겠다는 듯 입꼬리를 찢었다. 대련의 시작을 알리는 종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잔상이 튀어나갔다. 누군가 활에 자그마한 그림자를 걸어 쏘아버린 것 같았다. 이 방정맞은 화살에는 화살촉이 아니라 살벌한 날을 세운 대검이 꽂혀 있었는데, 그 눈부신 궤적이 망설이지 않고 조슈아의 목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아슬아슬한 찰나에서야 조슈아는 단숨에 주먹을 쥐었다. 손아귀에는 누군가가 멋도 모르고 발을 들인 '공간'이 볼품없이 구겨져 있었다.

능력자는 능력자끼리, 이 규칙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비능력자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조슈아는 서늘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코끼리에게 사방으로 밟힌 것처럼 프라우가 찌그러져 있었다. 드디어 해방이군. 징글징글했던 질문 세례도 이제 안녕이다.

"….으윽…하아, 하… …"

끙끙대는 꼴이 상상한 것만큼 통쾌하진 않았다. 대련 강사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걸 확인하고 조슈아는 뒤를 돌려고 했다. 시원한 그늘에서 물이나 마시고 싶었다.

"하아…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야, 너…. 진짜 쩐다… 이거…… 정말 어떻게, 쿨럭… 하는 거야? 나도… 으으으으윽…. 이렇게 될 수 있나?"

그 질문에 천천히 떠나는 발걸음이 우뚝 섰다. 조슈아는 공격할 때보다도 더 꽈악 주먹을 말아쥐었다. 무시하자.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뒤를 돌아 프라우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궁금해?"

"하~? 드디어 대답하는 부분? 당연하지! 내가 몇 번을 물어봤는데, 쪼잔한 자식!"

그는 무릎을 굽히고 엉망진창 바닥에 눌어붙은 프라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자 뾰족한 엘프의 귓가에 속삭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우선은 지하에 있는 연구소에 들어가야 해. 피, 머리카락, 침, 피부조직을 채취한 뒤에는 너에게 맞는 실험을 받아. 보통은 목 뒤를 커다란 바늘로 찌르고 뼛속에 알 수 없는 약물을 주사하고, 식사마다 피를 뽑아서 네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검사하지…."

소년의 목소리는 낮고, 몹시 다정했다. 얼굴은 담담했지만,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적의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저주하는 건지 겁을 주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조슈아는 숨도 쉬지 않고 조곤조곤 말을 뱉었다. 프라우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난처한 얼굴을 하자, 출처를 모를 가학심이 더 진득하게 피어올랐다.

"거기서 주는 물을 마시면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그 날을 잊게 되는데, 네 체질이 특별하지 않으면 그 안에 거꾸로 처박혀야 할 수도 있고. 걱정 마. 모조리 잊어도 옆방 애들과 서로 도우면 그래도 이름은 꾸준히 들을 수 있으니까. 그 애가 버틴다면 말이야. 밤에는 너처럼 말을 듣지 않는 애들이 미끼 역할을 맡는데 너는 쓸데없이 원하는 것도 많으니 자주 할 수 있겠다. 이걸 3년 정도 반복하면 나처럼 될 수 있어…. 하지만 넌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네. 나이가 너무 많으면 안 되거든."

"…야…."

"알겠지? 한 번만 더 물어보면 죽여버릴 거야. 거긴 가끔 시체도 주워가니까."

드디어 대련 강사가 도착해서 쓰러진 프라우를 보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둘 모두를 무시하고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떴다.

 

그 날 저녁은 유독 식욕이 없었다. 내내 옆에서 쫑알거리던 애가 없어서 주변은 만족스러울 만큼 조용했는데도 그랬다. 최근 프라우는 정말 그를 단 한 순간도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애는 조용히 식사하는 조슈아 옆에 들러붙어서 교양 없게 떠들어 댔다. '그거 알아? 감자를 튀기면 엄청 맛있다는 거. 여긴 삶기만 하잖아! 진짜 감자알못이야~.' 지금은 어떠한 소음도 없었다. 꿈에 그리던 식사였다. 그러나 귓가에는 끊임없이 말들이 뱅글뱅글 돌았다. 프라우의 쓰잘데기 없는 질문, 이야기, 헛소리들. 그리고 낮에 자신이 뱉었던 잔인한 말들. 결국, 조슈아는 감자 샐러드엔 입도 대지 않은 채 짜증스레 포크를 놓았다.

"오늘 저녁 노맛이지 않냐?"

불쑥 다가온 목소리에 조슈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프라우가 그에게 다시 찾아온 것보다, 자신이 비열하게도 그녀를 기다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온몸을 반창고와 붕대로 치장한 프라우가 털퍼덕 옆자리에 앉는 게 보였다.

"왜 쫄고 그래? 두들겨 맞은 건 난데."

"너……."

"또 죽인다~ 조져버린다~ 태어난 곳으로 되돌려준다~ 협박하려구?"

뒷말은 안 했어. 떨떠름하게 굳은 조슈아를 보고 프라우는 히죽 웃었다.

"자, 우리의 안타까운 조쉬! 이 누나가 하나 가르침을 줄게."

그녀가 조슈아의 어깨에 느슨하게 팔을 걸치는 탓에 키가 큰 조슈아는 허리를 굽혀야 했다. 화려하고 경박한 손톱이 그의 파리한 뺨을 쿡쿡 찔렀다. 너무나 성가셔서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프라우는 낮의 일을 갚아주려는 듯 귓가에 느릿느릿 속삭였다.

"넌 절대 날 못 죽여."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조슈아가 한껏 찡그렸다. 대체 얘는 아까 뭘 들은 거야? 그게 문제인가? 프라우는 1도 아랑곳하지 않고 키득키득 웃더니, 조슈아의 식판에서 풋사과를 들어 으적으적 씹으며 말했다.

"죽을까 봐 무서워했잖아? 이얍! 이러기 직전에."

프라우는 능력을 쓰는 조슈아를 흉내 내듯 허공을 쥐었다가 폈다가 쥐었다가 폈다.

"엄청 무서운 얼굴로 협박할 때도~ 사실 겁먹었지? 난 그런 건 잘 알아보거든. 힘 조절 못할까 봐 쫄렸냐?"

"난 널 죽일 수 있어."

"헹. '난 널 죽일 쑤 이써'~"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그야 이 게임 심의 등급은 전체연령가고 너랑 난 플레이어블…. 하~ 네가 뭘 알겠냐. 여튼 맞다니까?"

미친놈 보는 듯한 시선을 충분히 만끽한 후 프라우는 윙크했다. 사과를 다 먹어치운 그녀는 이번엔 조슈아가 아껴둔 피칸 파이를 홀랑 집어 들고 냠냠 먹기 시작했다. 기가 찬 조슈아가 드디어 뭐라 입을 떼려고 하자 프라우는 전광석화처럼 꽁무니를 내빼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소리쳤다.

"궁금하면 내일 죽여보던가! 진짜 해봐, 짜샤! 원래 이런 건 한번 해봐야 안 무서운 거야."

그리고 조슈아는 또다시 덩그러니 남았다. 이번엔 진짜로 사방이 조용했다.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곱씹을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힐을 넉넉하게 받았는지 하룻밤 만에 컨디션을 회복한 프라우는 대련 상대로 어김없이 조슈아를 지목했다. 그리곤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모양새로 바닥에 찌그러졌다. 입만 살아서 끊임없이 지껄이는 것도 어제와 똑같았다. 프라우는 경박하게 웃다가 쿨럭거리고 다시 웃길 반복했다.

"봐, 못 죽이지? 이 세상에서 내가 모르는 건 없다구~"

조슈아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 꼬락서니를 내려다보았다. 시끄럽고 아둔한 멍청이. 그가 일부러 봐준 줄도 모르고 으스대는 모습이 기가 찼다. 하나하나 정정하자니 분명 이어질 궤변이 귀찮았다. 조슈아는 그냥 이 말 많은 환자를 의무실에 내팽개치려고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조그마한 몸을 가득 채운 근육 때문인지 프라우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게다가 다친 몸으로도 야단법석을 피워서 더더욱 애를 먹었다. 그런데도 발걸음은 몹시 가벼웠다. 왜일까? 한참이나 생각을 풀어둔 끝에 조슈아는 손끝에서 답을 찾았다. 무의식중에 염동력을 쓴 것이다. 그는 침상에 대자로 누운 프라우를 힐끔 보고, 의무실의 문을 꽝 닫고 나갔다.

 

그 날 이후로 둘은 꽤 가까워졌다. 예전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던 조슈아가 건성이나마 고개를 끄덕이거나 짤막하게 대꾸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 정신 나간 놈이라고 생각하니 떼어낼 자신이 없었다. 반면 프라우는 오히려 조슈아의 뒤꽁무니에서 아카데미 전체로 영역을 넓혔다. 그녀는 꼬리에 불꽃을 단 생쥐처럼 아카데미 이곳저곳을 미친 듯이 쏘다니다가, 조슈아가 평온함에 익숙해질 때 즈음에 무리에서 그를 휑 약탈했다. 열에 아홉은 프라우가 다짜고짜 여러 무기를 휘두르며 싸움판이 이어졌다. 아주 가끔, 열에 한 번 정도는 단순한 납치였다. 프라우는 조슈아를 데려다가 뜬금없이 그늘에 앉혀두고는 기다란 강아지풀을 질겅질겅 씹어대며 따분한 눈으로 태양을 구경했다. 반항하기도 귀찮고, 격렬한 대련보다야 농땡이가 억만 배는 좋은 조슈아는 그대로 널브러져 낮잠을 잤다. 오후, 수직으로 내리쬐는 햇살은 아무런 죄도 묻지 않는다. 햇살은 그저 눈꺼풀에 따사롭게 스며들었다. 낮에 잠을 청하면 암흑조차 온화한 주홍빛이다. 조슈아는 그 시간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륙 동부는 서부보다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고, 프라우는 이제 다 낡아빠진 엔타로니아 꼬리표를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축축하고 바람에서 기분 나쁜 냄새도 나.' 동부는커녕 아카데미 밖에 대한 기억도 없는 조슈아는 그냥 그렇구나 싶었다. 하지만 날이 짧아지면서 비가 자주 오기 시작하자 조슈아도 프라우를 따라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비정기적 낮잠 타임이 '우천 시 취소'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야구장처럼 여기도 돔을 씌우면 좋을 텐데!"

프라우가 또 알 수 없을 고대어를 뱉으며 찡얼댔다. 게다가 아무리 초능력자라고 해도 천장 아래에 태양과 바람을 둘 수 없었으므로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되었다. 조슈아는 굳이 짚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그가 둘 수 있는 게 오직 시끄럽게 쫑알거리는 프라우 레망뿐인 현실이 매우 유감스러웠다. 굳이 따지자면 조슈아는 '비교적 조용한 프라우 레망'을 선호했다.

 

낮잠을 자지 못 해서인지, 조슈아는 종종 악몽에 사로잡혔다. 어느 날엔 그가 아무렇게나 뱉어낸 연구소에 갇혀 있었고, 또 어느 날엔 다시 자신조차 잊고 새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남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산불 앞의 반딧불처럼 하나의 꿈 앞에서는 지루하게 퇴색했다. 그 꿈에서는 조슈아 레비턴스와 프라우 레망, 그리고 '괴수'가 등장했다.

 

 

*

 

 

여름과 가을이 덧없는 사랑마냥 순식간에 떠나고, 불청객마냥 찾아온 겨울이 아카데미를 허옇게 뒤덮었다. 눈 속에 파묻힌 아카데미 속에서는 새로운 수업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교수는 학생들을 연무장에 몰아넣는 대신 뒤뜰로 집합시켰다. 아이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자, 교수의 뒤에서 바퀴 달린 커다란 우리가 미끄러져 나왔다. 처음에는 모두가 빈 수레인 줄 알았다. 아카데미의 경비병이 창살을 흔들자 구석에서 무언가가 펄쩍 뛰기 전에는 말이다. 아이들이 질색하는 소리에 그것이 조금 더 쭈그러들었다.

"이건 뭡니까, 교수님?"

"정식 학명은 따로 있지만, 앞으로 우린 이것을 '괴수'라고 부를 겁니다."

"'괴수'요?"

익숙한 단어에 몇몇 아이들에게 힐끔힐끔 시선이 꽂혔다. '괴수'는 연고도 기억도 없는 주제에 초능력은 뛰어난 '부표'들이나 지금 심드렁하게 코를 파고 있는 프라우 레망을 지칭할 때 종종 쓰이는 말이었다. 대놓고 차별하진 않아도 아이들의 자그마한 조롱과 두려움은 언제나 먼지처럼 조금씩 쌓여 있었다. 조슈아는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창살 안쪽을 살펴보았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것 같은데, 영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요. 여기 이 괴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체로 자라게 되면 이 건물보다 큰 몸집을 갖춘 채, 온갖 것을 파괴하고 끊임없이 먹어대지요. 한번 성장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재앙의 씨앗이라고 할까요."

교수는 '괴수'에게 차가운 눈길을 보냈다.

"여태까지 우리 연구진들은 종종 이 괴수를 인공 합성하여 연구해왔지만, 연구실이 아닌 자연에서 샘플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몇 년 안에 번식하여 전 세계로 퍼질 것으로 예상하고요."

이번엔 학생들에게 시선이 스쳤다.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어리둥절한 이들과 남다른 통찰력을 빛내어 순식간의 어두워진 안색들이 섞여 있었다.

"갈루스 아카데미는 학생 개개인의 자기계발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의 위협에 맞서는 사명 역시 표방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선도하는 인재로서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세요. 다음 주부터 여러분은 일반 연구원과 동등한 지위에서 괴수에 어떻게 '대응'할지 탐구하게 될 겁니다."

짤막한 설명 끝에 교수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물론 아카데미의 자랑인 여러분은 훌륭하게 수행하실 거라 믿습니다."

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는 덜덜 떠는 괴수를 지켜보다가 끄덕임에 동참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는 작게 한숨을 삼키고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곳엔 프라우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 괴수에게든 교수에게든 흥미를 잃은 건지 조슈아를 보는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녀는 반갑다는 듯 손짓하더니, 짓궂은 애정을 담아 윙크했다. 조슈아는 어째서인지 그것이 무척 불길하게 느껴졌다.

 

조슈아는 그날 밤 어두컴컴한 방 안에 누워 생각해보았다. 괴수는 생물연구 탑 꼭대기에 갇혀 있다고 했다. 그곳은 기숙사와 멀지 않고, 보안 등급도 그리 높지 않다. 학생들에게 호언장담한 주제에 실상 아직은 핵심 연구 산업이 아닌가 보지. 담담한 판단 이후에는 오직 한 문장만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염력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그 순간 조슈아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 벌떡 일어났다. 그가 긴장한 나머지 자연스레 능력이 발현되어, 침대 옆 협탁의 모든 물건뿐만 아니라 협탁까지 허공에 둥둥 떴다. 조슈아는 둥실둥실 떠오르는 이불을 다시 꽉 잡아 내리며 몸을 떨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 등어리와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실수로 값비싼 화병을 깬 기분이었다.

그러나 밤은 충동의 요람이다. 나이를 덜 먹은 소년 소녀들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잠시 굳어있던 조슈아는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에 다가섰다. 문고리를 잡지 않았는데도 잠겨있던 문이 열렸다. 맨발로 복도를 걸으니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심장이 쿵쿵 뛰며 당장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복도를 지배하는 이 어둠이 몹시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생물연구 탑은 얼마나 더 매혹적일까? 그는 어떤 충동에 사로잡힌 채 몽유병 걸린 환자처럼, 혹은 유령처럼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그의 어깨에 무언가가 닿았다. 어떤 판단도 전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쉿."

어둠 속에 나타난 것은 프라우 레망이었다. 프라우의 머리칼은 살짝 타서 꼬불꼬불거렸는데, 요즘 한창 '무기'를 만든다면서 수업도 빠지더니 방금도 그랬나 보다. 프라우 레망은 어둠 속에 장난스러움을 여유롭게 드러내며, 도화선에 붙은 불꽃처럼 불길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조슈아는 조금만 더 긴장했다면 불쑥 튀어나온 프라우 레망의 머리통을 수박처럼 으깼을 거라는 사실에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심장이 가슴팍에서 미친 듯이 날뛰어서 차라리 토해내고 싶었다.

"아하하, 네 얼굴 좀 봐……. 유령인 줄 알고 기대했는데, 네 얼굴이 훨씬 무섭닼."

"이게 무슨 짓이지? 점호 시간 지난 거 몰라?"

"나야 연구할 게 쪼~금 남아서. 참나, 방금까지 복도를 으스스하게 걸어 다닌 게 누군데?"

"……빨리 꺼져."

애석하게도, 프라우 레망이 얌전히 꺼지지 않으리라는 건 조슈아가 가장 잘 알았다……. 1분 만에 10년은 더 늙은 그는 지친 얼굴로 복도 반대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짜증 나는 면상을 어둠 속에서 마주하니 까딱했다간 정말 멍청한 짓을 저지를 뻔했다는 게 실감 났다. 돌아가서 잠이나 자자 싶었다. 그런 그의 뒤를 프라우가 그림자를 대신하여 찰싹 따라붙었다. 

"조슈아, 너 악몽 꿨구나?"

악몽은 무슨. 한숨도 못 잤는데. 프라우 레망이 넘겨짚은 것 중에 제대로 맞는 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바로잡긴 귀찮았다. 조슈아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

"무슨 꿈이었는데?"

"…"

"어쨌든, 끝내주게 무서웠지? 내가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 알려줄까?“

조슈아는 무의식적으로 학생 식당에서 들었던 답을 말했다.

"일단 해보라고?"

"빙고! 띨빡 같은 수업도 도움이 되긴 하나보다, 야. 너 진짜 모범생 맞네?"

프라우는 간만에 말을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는 양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둠 속에서 그 목소리는 은근하고 유쾌했다.

"맞아. 나와 함께 네가 두려워하는 일을 하자. 그럼 더 이상은 두렵지 않을 거야. 날 믿어!"

조슈아는 치기에 사로잡힌 세계 제일의 머저리를 돌아보았다. 방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어느새 굳어있었다. 프라우의 말에 따르면 고대에는 진공청소기라는 괴상한 청소기구가 있었다는데, 그가 생각하기론 지금은 딱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프라우가 대신 온갖 보잘것 없는 것들을 와르르르 삼켜대니까. 지금도 말이다. 프라우가 버티고 선 복도가 그를 빨아들이는 시꺼먼 목구멍처럼 보였다.

문제는, 빨려 들어가는 게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탑으로 향하는 복도는 통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겨우 어둠에 적응한 조슈아는 바닥을 보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별빛이 그들의 발밑에 붙여둔 그림자가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곧 당도할 폭풍을 알리듯.

프라우는 호언장담만큼이나 아카데미의 지리를 꿰고 있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름길을 찾아 안내했다. 종종 예상치 못하게 잠긴 문을 만날 때면 조슈아가 염력으로 해결했다. 아무런 소음도 없이 깔끔하게 열리는 문을 보며 프라우는 몹시 아쉬워하며 감탄했다.

“내가 왜 여태 널 안 꼬셨지? 대박 편하네?”

조슈아는 대답 대신 고갯짓으로 프라우를 재촉했다. 둘 중 들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들은 식은 죽을 먹듯 손쉽게 연구 탑으로 진입했다. 마석으로 운행되는 엘리베이터-“그 엘리베이터는 진짜 구려. 왜 비등방성을 배제하지 않고 주춧돌을 따로 둔 거야? 비효율적이라고! 내 블레이드는 그걸 개선한 거지.”-를 타니 목적지는 금방이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연구실 속, 수많은 샘플들 사이에 가장 커다란 우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드디어 ‘괴수’ 앞에 당도한 조슈아는 숨을 죽였다. 그것은 지금은 잠을 자고 있는지 축 늘어져 있었는데, 안 그래도 하찮아 보이는 실루엣이 더더욱 조그만 형상을 띄고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그 시시한 모양새를 관찰했다. 프라우는 의외로 이런 자그마한 새끼가 무섭다는 조슈아를 비웃지도 놀리지도 않았다. 그저 꾸부정한 자세로 쉴 새 없이 하품하며 곁을 지켰다.

긴 시간 침묵을 지키던 조슈아가 드디어 프라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드디어 적색 경고가 머릿속을 울렸기 때문이다. 그가 손을 뻗기만 한다면, 이곳에 온 것만큼이나 손쉽게 원하는 걸 달성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그는 매우 영리한 아이라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또 멍청한 충동에 사로잡히기 전에 슬슬 돌아가고 싶었다.

“이만하면 됐어. 이제 가자.”

“가게? 왜~?”

프라우는 피식 웃으며 말꼬리를 동그랗게 말았다. 거대한 창문에서 쏟아진 별빛이 그녀의 두 눈에 흘러 들어가, 섬뜩한 궤적을 그리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잖아? 한번 해야 두렵지 않다고. 계속 네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마른 팔을 허공에 쭉 뻗자, 어디선가 생긴 거대한 칼날 세 개가 광채처럼 허공에 둥글게 펼쳐졌다. 프라우가 요즘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 블레이드는 허구한 날에 제멋대로 싸돌아다니며 목표를 쫓았다. 이젠 칼날도 주인은 따라 스산한 빛을 머금었다. 이 모든 게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이루어져서, 조슈아에게는 짤막한 단말마를 뱉을 시간만이 주어졌다.

“무슨 짓을…!”

“이런 걸 하고 싶었지? 겁쟁이 조슈아.”

프라우는 환하게 눈을 휘며 길게 휘파람을 불고는, 조슈아를 흉내 내듯 허공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칼날 하나는 유리장에 갇힌 괴수에게, 또 하나는 창문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나머지 하나에는 어느새 그녀가 올라타 있었다. 날아간 두개의 칼날은 마주한 모든 것을 깨부쉈는데, 주변이 원체 조용했기에 이 소리는 온 세상을 잘게 부수는 커다란 폭발처럼 들렸다. 유리가 깨지는 파열음과 경보 시스템의 따가운 음성이 참담한 교향곡을 이루듯 어우러졌다. 그 모든 소란 속에서 조슈아는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천재 초능력자 소년은 그가 끊임없이 상상하던 일탈(ver.프라우) 속에서 그저 경악했다. 저 미치광이가 몰고 온 폭풍의 눈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조슈아는 상황 판단이 빠른 모범생이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할 일을 찾아 몸을 던졌다. 쏟아지는 유리 조각들 사이로 괴수를 꽉 안아 들어 올리는 일 말이다. 프라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조슈아는 자신의 얄팍한 평정이 진작에 간파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는 괴수를 탈출시키고 싶었다. 혹은 아예 죽여버리거나. 단지 그곳에 갇힌 채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게 어쩐지 싫었다. 아마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그냥'이라고 프라우 레망을 흉내내야 했을 것이다. 프라우 레망은 곧 이유도 없는 우습고 멍청한 충동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실제로 할 생각은 단 한 톨도 없었는데 이 망할 프라우 레망이,

“자, 태워줄게!”

언제나 이렇게 무턱대고 일을 벌이고 손을 뻗어서,

“너 진짜… 제명에 못 죽을 멍청한 자식…!”

“그런 따분한 욕을 처음 들어본다, 야.”

억지로 손을 잡고 두려움을 목구멍에 쑤셔 넣고 삼키게 했다. 조슈아는 버둥거리는 괴수를 다시 고쳐 안고는 프라우의 블레이드에 올랐다. 블레이드의 안정성은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어서, 조슈아뿐만 아니라 프라우의 몸도 균형을 잡지 못하고 기울어진 채 파들파들 떨렸다. 조슈아는 이를 악문 채 프라우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손바닥에서부터 황금색 빛이 흘러나와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이거 뭐야?”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저주.”

“뭐?!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그는 다시 한번 프라우 레망의 질문을 무시했는데, 이번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프라우 레망이라는 썩은 동아줄을 끌어안은 채로 높다란 탑에서부터 바닥까지 끝도 없이 추락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두 사람과 칼날 세 개, 그리고 새끼 괴수는 아카데미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갈대밭에 착지했다. 비행 내내 너무 꽉 끌어안은 나머지 괴수가 터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던 조슈아는 겨우 숨을 돌렸다. 털썩 고꾸라진 그는 그제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언제 깨어난 건지, 괴수는 허약한 소년의 품속에서 버둥거리다가 빠져나갔다. 조슈아는 그것을 다시 잡지 않았고, 프라우는 그저 휘파람만 불었다. 잡는 이도 남을 이유도 없는 괴수는 은인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않은 채 둘을 떠났다. 갈대 사이로 자그마한 꼬리가 삐죽 튀어나왔다가, 부드러운 흙을 헤치며 땅을 파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윽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게 끝이었다. 멀리서 동이 터오자 두 탈영병의 머리칼에서 붉은 기운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동그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라우는 멋들어지는 말로 그들의 모험을 일축했다.

"우리, 멸망에 기여했을지도 모르겠네."

"…닥쳐."

정말 그랬다. 눈을 감자 괴수의 위험성을 구구절절 토해내던 교수의 얼굴이 풍선처럼 커지다가 펑! 터져버렸다. 어쩌면 그놈의 멸망이 당겨졌을지도,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무거운 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심각한 일인데도 어째서인지 마음은 따듯한 샤워를 하고 나온 듯 개운하고 차분했다. 근처에 티테이블이 있다면 홍차라도 내렸을 것이다. 기묘한 감정에 휩싸인 조슈아는 아카데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프라우와 눈을 마주쳤다. 평소와는 달리 딱히 눈을 피하고 싶지도 않고, 밤새도록 싸돌아다녀서 피곤하기도 하여 가만히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순간, 프라우가 갑자기 거리를 좁혔고, 입술에 뭔가 닿았다. 푸딩보단 단단했고 쿠키보단 말랑말랑하여 식감이 준수하긴 무슨 눈을 뜬 채 날벼락을 삼킨 조슈아는…… 연구실을 깨부쉈을 때보다 극적인 감정을 맛보았다! 한마디로 온몸에 소름이 돋고 뱃속에 나비 수천마리를 가둬둔 것 같았다.

“하고 싶은 표정이길래. 아니야?”

겨우 다시 마주 본 프라우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 낯짝을 보며 조슈아는 진심으로 그가 프라우를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아카데미의 침대로 돌아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터무니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동안 프라우가 다시 키스할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그 정도로 안온하고 지루한 일상을 살았다.

그러나 곧 전말을 알게 된 아카데미가 조슈아를 호출했고, 조슈아는 처음으로 만난 대마법사에게 두려움을 잊지 않는 법을 배웠다.

시시한 꿈 이야기는 이게 다였다.

 

 

*

 

 

아발론이 제국을 침입하기 시작한 후로 조슈아는 평소보다 프라우의 꿈을 더 자주 꾸었다. 눈알을 쪼아먹겠다는 프라우 레망은 어느 날엔 귀를 뜯어 먹어주겠다고, 또 어느 날에는 손목을 잘라주겠다고 유쾌하게 제안했다. 조슈아는 하루는 말이었고 다른 하루는 닭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흑염소인 적도 있다. 네 발이든 두 발이든 그는 프라우 레망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에 대해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날엔 조슈아 레비턴스가 되는 꿈도 꾸었다. 찬란한 여름날이었다. 숲이 시작하는 어귀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아름드리 잎사귀를 휘날렸다. 그 아래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나뭇잎을 따라 하늘하늘 흩날렸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바로 그곳에 편안하게 누워있었다. 그럼 프라우 레망은 다시 그에게 제안했다. 끊임없이, 질릴 줄도 모르고. 모든 일에 싫증을 느끼는 그녀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꿈일지도 몰랐다.

“조슈아.”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녀가 웃는 게 느껴졌다.

“나, 가지 말까?”

조슈아 레비턴스는 이보다 더 시시한 악몽은 없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사람의 혀를 얻게 된 보람도 없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수많은 아침과는 달리 천장이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패배를 깨달았다. 눈 앞에는 칙칙한 천장 대신 눈부신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딱 태양이 있으면 좋을 법한 곳엔 프라우 레망이 고개를 들이밀고 그를 굽어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조슈아가 그랬듯 쓰러진 상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드디어!’라는 듯한 희열과 ‘드디어.’라는 듯한 실망이 담겨 있었고 그 모든 것이 지극히 프라우 레망다웠다. 조슈아는 힘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프라우 레망…….”

근본도 없이 그저 투쟁만을 부르짖는 철없는 녀석. 그 빌어먹을 충동은 아직도 고치지 못했구나. 그러나 그녀는 옳은 말도 했다. 조슈아는 무슨 짓을 해도 그녀를 죽일 수 없다. 그것을 이제야 처절히 깨달았다.

언제나 그가 두려워하는 짓만 벌이는 프라우 레망은 또 한번의 승리를 직감했는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찬란한지, 역시 그의 눈을 멀게 할 작정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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