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저 좀 살려주실 수 있는지.

안유진은 85인치 대형 TV 앞에 앉아 2편째 재생되고 있는 영화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넋을 놓고 보았다. 영화관에서파는 L 사이즈의 팝콘도 두통이나 비워낸 민주는 세 통째에는 카라멜 솔티 어쩌고 팝콘을 먹으면서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브라운관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무슨 자동차로 건물을 부수고 난리야. 유진은 점점 졸음이 쏟아지는 걸 참으며 브라운관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학교로 직접 찾아왔길래 또 어디라도 가는 줄 알았건만 바로 집으로 돌아온 민주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몇 시간째 분노의 질주만 보고 있었다. 유진은 민주 몰래 시간을 확인해본다. 퇴근해야 하는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민주님.”

“….”

“저 오늘 퇴근….”

“한편 더 볼 거야. 그때까지 집에 갈 생각하지 마.”

 

 

왜요? 소리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걸 가까스로 삼켰다. 오늘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니까 참자. 유진은 편하긴 엄청 편한 1인용 소파에 기대어 앉아 다시 영화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카체이싱 장면들이 익사이팅 하긴 하지만,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산산조각 부서지는 자동차들을 볼 때마다 자꾸 자신이 흠집 낸 김민주의 비싸디 비싼 차가 생각나 죽을 맛이었다.

 

2번째 시리즈가 끝나고 드디어 잠깐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민주는 옷을 갈아입어야겠다고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고 유진은 쿠션감이 좋은 의자에 널브러지듯 누워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지루함에 발버둥 쳤다.

 

 

“유진씨.”

 

 

깜짝이야. 언제 들어왔는지 혜원이 부르는 이름에 놀란 유진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그 바닥에 닿는 것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탁탁 털고는 슬쩍 웃어 보인다.

 

 

“오늘 밖에서 민주 아가씨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가씨께서 분노의 질주를 보실 때는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그런 거였어요? 유진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기분이 좋은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민주에 대해서는 모든 걸 알고 있는 혜원도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아서 유진은 덜컥 겁이 났다. 진짜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혹시 몇 편 볼 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편.”

“그럼 Lv3 정도로 화가 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Lv.3? 만렙이 몇이지? 위험한 건가? 유진은 가늠이 잘되지 않아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다. 어찌 되었건 자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이긴 했다. 평소처럼 나대다간 큰일 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유진은 입조심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런 유진을 보며 혜원은 아가씨 심기를 거스를만한 언행은 주의해달라고 말하곤 방을 빠져나갔다. 다시 자리에 앉아 머리를 굴리던 유진은 지금 케이크를 맛있게 먹고 나서 방을 청소하고 있을 채원 생각에 허벅지를 탁 내려쳤다. 아, 채원이. 그냥 집에 가라고 해야지.

 

 

“나 오늘 늦을 것 같아.”

-뭐야! 저녁 사준다며!

“내일 사줄게.”

 

 

너어는 맨날 그런 식이더라! 하고 쫑알쫑알 화를 내는 채원의 목소리에 유진은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떼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간다.

 

 

“나도 사주고 싶은데, 지금 못 가게 됐어.”

-주인님 때문에?

“내가 그릏게 브르즈 믈릈쯔!”

 

 

이를 악물고 답하는 유진의 목소리에 까르르 웃던 채원이 갑자기 목소리를 다듬는다.

 

 

-유진아. 진짜 내가 치웠지만, 지금 장난 아니다. 진짜 완전 대박 깨끗해.

“수고했어,고마워. 케이크는 먹었어? 먹고 집에 가.”

-이미 먹었지. 진짜 맛있어.“

“언니가 손목을 내어주고 얻은 귀한 케이크니까 당연히 맛있겠지.”

-뭐래, 아무튼 나 지금 청소 너무 열심히 해서 힘 빠져서 집에 못 가. 자고 있을게.

“그럼 문단속 잘하고 자고 있…으아아악.”

-뭐야

“아니야, 어, 끊는다.”

 

 

자고 있으라 말하며 뒤를 도는데 집에서 늘 입고 있는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민주가 귀신처럼 문 앞에 서 있었다. 황급히 전화를 끊고 언제 돌아오셨어요. 하고 말해도 한쪽 눈썹을 삐죽 올린 채 유진의 손에 들린 핸드폰만 가만히 바라보고 서있다.방에 조명도 켜지 않아서 어두 컴컴한데 왠지 민주의 눈빛만은 불을 쏘아대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세 번째! 세 번째 시리즈 봐요! 와 재미있겠다! 기대된다!”

 

 

유진이 호들갑을 떨어도 민주는 제자리에 선채 미동도 없다. 진짜 무섭게 왜 저러는 걸까. 유진의 동공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유진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천천히 자신의 자리에 앉은 민주는 꺼져있는 TV 화면을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러 방의 조명을 환하게 켰다. 순식간에 밝아진 실내 탓에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눈을 가리려던 유진이 쥐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으로 떨구고 만다. 혹시, 바닥에 흠집이라도 났을까 유진이 다급한 동작으로 허리를 굽히기 직전, 민주가 재빠르게 유진의 핸드폰을 발로 차서 저 멀리로 보내버렸다. 아무리 막 굴려서 거지꼴을 한 핸드폰이라지만 데굴데굴 굴러 벽에 탁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걸 보니 마음이 쓰라리다.

 

 

“왜, 왜, 왜 그러세요.”

“영화 볼 때 핸드폰 꺼두는 건 기본 상식인 거 몰라?”

 

 

지금은 영화 안 보잖아요.라고 했다간 LV.10을 맛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벽에 부딪혀 아직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신의 분신 같은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괜한 초조한 기분에 유진은 다리를 덜덜 떨며 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졌다.

 

 

“그건 네가 붙인 거야?”

 

 

유진의 손목에 붙어있는 밴드를 보며 민주가 묻는다.

 

 

“채원이가 붙여줬어요.”

“…그렇게 밴드 붙일정도로 아팠어? 엄살이지, 너.”

 

 

누가 누구보고 엄살이래, 지는 겨우 손바닥 까진걸로 주치의 불렀으면서.

 

 

“아프다기보다, 멍이 흉하게 들어서….”

“됐어.”

 

 

말을 자르며 민주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혜원을 불렀다. 영화볼 때는 핸드폰 끄는게 기본상식이라더니, 지도 안껐으면서. 하고 유진은 정말 민주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투덜거렸다. 그러며 구석에 쳐박혀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향해 내가 곧 구하러 갈게. 하고 말을 거는것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혜원이 들고 온 통안에는 연고와 밴드가 종류별로 들어있었다. 혜원에게 건네받자마자 민주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거친 손길로 유진의 손목에 붙어있는 밴드를 떼어내었다. 유진은 도대체 이 사람이 뭘 하나 싶어서 멀거니 그 동작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 번도 발라본 적이 없는지 민주는 연고를 한 움큼이나 짜서 로션 바르듯 상처 위에 치덕거릴 정도로 문대었다. 그리고는 겨울 왕국의 올라프 캐릭터가 인쇄되어 있는 큰 밴드를 뜯어 철썩 소리가 나도록 손목에 붙여주었다. 아, 하고 아파하거나 말거나 민주는 자신이 붙여준 밴드 위에 통안에 들어있는 펜을 꺼내 M이라고 글씨까지 적었다.

 

 

“M은 뭐예요."

“민주의 M. 내가 붙인 거라고 표시하는 거야. 내가 갈아줄 때까지 이거 떼지마.”

“씻고 나서는 어떻게 해요.”

“씻고 나오면 내가 다시 붙여줄게.”

“네?”

“오늘 4편 볼 거니까, 집에 못 갈 거 같은데.”

 

아니, 왜 한편이 더 늘었어요. 하고 물어도 김민주 님은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싸늘한 표정으로 유진의 얼굴을 훑어보고는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재생되는 분노의 질주의 세 번째 시리즈. 유진은 어지럽게 움직이는 오프닝 화면을 보며 두 눈을 감았다. 아, 진짜 진심으로 누군가 저 좀 살려주실 수 있는지.

 

 

 

 

 



 

빚은 갚고 싶지만 노예는 하기싫어 2

 

 

 

 

 




분노의 질주 사건 이후 유진은 민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다시는 분노의 질주를 연속해서 보고 싶지 않았다. 4편을 다 보고 난후, 눈알이 빠져나가는 고통에 유진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안경이라도 있으면 렌즈라도 뺐지. 유진은 그때의 기억에 진저리 치며 소파에 앉아있는 민주를 곁눈질로 훔쳐보다가 결국 마음을 굳혔다. 그렇지만 오늘은 꼭 말해야만 한다.

 

 

“저기…”

 

 

애견 잡지를 뒤적거리며 시간을 때우던 민주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밍밍이의 목욕을 끝냈는지 티셔츠의 앞쪽이 다 젖은 유진이 접어둔 소매를 바르게 피곤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자세로 선다. 빤히 바라보는 민주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민주 주변의 어딘가로 이리저리 시선을 옮겨대는 꼴로 보아서 무언가 부탁할게 있는 모양이라고 김민주는 생각했다.

 

 

“제가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조금 일찍 퇴근해도 될까요?”

“응. 안돼”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대답하길래 된다는 줄 알았다. 평온한 거절에 유진의 얼굴이 잠시 활짝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민주는 피식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는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말 다 했으면 가보라는 듯 턱으로 문밖 어딘가를 가리켰다.

 

 

“친한 친구 생일이라서요. 좀 보내주세요.”

“김채원?”

“걔 말고요.”

“조유리?”

“걔는 어떻게 알…. 아무튼 걔도 아니에요.”

 

 

남의 사생활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하는 표정으로 유진이 손을 내저었다. 혜원이 전해준 유진의 친구 이름은 저 두 사람이 전부라 민주는 조금 흥미가 생긴다는 듯 꼬았던 다리를 풀며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다리 위에 펴두었던 잡지를 접어 테이블 위로 밀어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럼 누구?”

"보내주실 거예요?"

“나랑 지금 흥정해? 누구냐고.”

 

 

왜 이렇게 내 친구한테 관심이 많아. 유진은 양주먹을 티나지 않게 살짝 쥐었다가 폈다. 오늘 오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을 편하게 감지 못할 거라던 생일의 주인공 원영을 떠올려본다. 원영은 인간관계가 습자지만큼 얇아서 생일 당사자인 장원영 그리고 김채원, 조유리, 안유진 꼴랑 네 명이 모이는 게 다일게 뻔했다. 하지만 유진은 무조건 오늘 생일 모임에 가고 싶었다. 원영이 그만큼 소중한 친구라서? 아니! 여기서 빨리 탈출하고 싶으니까! 장원영이 사는 술이니까! 오랜만에 미친 듯이 놀고 싶으니까!

 

 

“장원영이라고 있어요. 보내줘요.”

“생일에는 보통 뭐해? 호텔 빌려서 파티라도 하니?”

“호텔은 무슨. 그냥 술집에서 술이나 마시는 거죠.”

 

 

유진은 점점 자신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눈을 반짝이는 민주가 부담스러워 주춤주춤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술집? 그 드라마에 나오는 좁고 청결해 보이지 않는 그런 곳? 하고 묻는 민주의 말에 유진은 항상 즐겨 찾는 단골 술집을 떠올려 봤다. 맞다. 좁고 청결하지 않다.

 

 

“뭐, 대부분 그렇죠.”

“나도 갈래.”

“예?”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듯 되묻고 유진은 입을 가로막았다.

 

 

“나도 간다는 말이 그렇게 소리 지를 일이야?”

 

 

하며 눈살을 찌푸리며 민주가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꼰다. 약간 마음이 상한 것 같다. 분노의 질주가 눈앞에 아른거리자 유진은 황급히 양손을 내저으며 어색하게 웃으며 바보같이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민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거긴 엄청 더럽고 좁거든요. 불편하고 힘들게 뻔해요. 그러니까….”

“오늘 일한 거 시급 두 배.”

“7시까지만 가면 됩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대답에 유진은 비굴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머리로는 재빠르게 오늘의 시급을 계산했다. 친구들아 너네들 보다 돈이 소중해서 미안해.

 

 

 

 

 

 

 

조금 늦었다. 김민주가 이 옷 저 옷 다 입어보는 바람에. 처음에는 무슨 재벌 모임에서 입을 법한 옷을 입고 나와서 놀란 유진이 자신의 집보다 더 큰 드레스룸에서 나름 평범한 옷을 골라주느라 진땀을 뺐다. 왜 안 오냐고 재촉하는 채원의 메시지에도 유진은 혹을 달고 간다 말하지 못했다. 예민하고 싹수없고 커다란 혹.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이상한 콧노래를 흥 걸리는 뒷좌석의 민주를 룸미러로 흘끗 보곤 한숨을 몰래 내쉰 유진은 보조석의 안전벨트를 양손으로 꾹 쥐었다.

 

 

“와아- 여기야?”

“네.”

“생각보다 큰데?”

“거기 아니고 여기, 지하요.”

 

 

옆에 3층으로 되어있는 프랜차이즈 술집을 보고 신나하는 민주의 시선을 돌려 그 옆 허름한 건물의 간판을 가리켰다. 그리곤 유진은 별다른 말없이 좁고 가파른 계단을 먼저 터덜터덜 내려간다. 학교 선배가 후배들을 등쳐먹을 생각으로 학교 앞에 차린 작은 감성 술집이다. 술쟁이 김채원이 선배와 친해져서 대부분의 모임은 이곳에서 한다. 잘 뒤따라오고 있나 싶어서 유진이 뒤돌아본 민주의 광대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아무래도 미지의 공간을 탐험하는 듯한 느낌인 듯싶었다. 두 눈이 말도 안되게 반짝거린다.

 

문을 열자마자 큰소리로 웃으며 중앙 테이블에 모여앉은 익숙한 얼굴들이 일제히 안유진을 본다. 그 와중에 잔을 높게 치켜든 원영이 안유진! 여기! 하고 유진을 불렀다. 친구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손을 들었던 유진은 뒤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손을 내리고 몸을 살짝 비켜섰다. 그리고 공간 안으로 민주가 들어서자 순식간에 누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왁자지껄하던 테이블이 조용해진다.

 

 

“얘는 아시죠?”

“안녕, 김채원.”

“안녕하세요.”

 

 

채원이 허리만 엉거주춤하게 숙여 인사했다. 얘는 조유리, 얘가 오늘 생일인 장원영이에요. 하고 한 명 한 명 소개를 하고 유진은 대외적 미소를 짓고 있는 민주의 옆에 얌전히 앉아 쏟아지는 친구들의 눈총을 받아냈다.

 

 

“그리고 이분은 다들 알지? 김민주님”

 

 

하지만 그런 눈총은 애써 무시한 채 유진은 꿋꿋하게 민주의 소개까지 끝마치곤 냉큼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원영은 ‘생일이라며? 축하해.’ 하는 민주의 무덤덤한 목소리에 감사합니다. 하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미쳤니? 저 사람은 왜 데리고 와?’

‘지가 따라오겠다는데 어떻게 말려. 나는 그런 힘없어.’

‘하여튼 너는…’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 복화술로 잔소리를 퍼붓는 채원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는데, 몸을 틀어서 등지고 있던 민주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따끔하게 꽂혀온다.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다정하게 해?”

“하하! 뭐 먹을 거냐고요. 뭐 드실래요?”

 

 

유진은 메뉴판을 펴서 민주의 앞에 내밀었다. 한참을 읽어 보던 민주는 봐도 모르겠다는 듯 적당한 것으로 시키라며 메뉴판을 밀었다. 봐도 모른단다. 이런 음식은 먹어보지 못해서. 그 말에 민주의 눈치를 보고 있던 친구들이 순식간에 재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나도 그랬단다 얘들아. 적응하렴, 적응하면 편해.

 

 

“안유진 나 물티슈 좀.”

“넵”

 

 

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메뉴판을 들고 미니바를 정리하고 있는 선배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술병을 정리하면서도 눈은 불편한 의자에서도 다리를 꼬고 앉아 유리 원영 채원을 차례로 돌아보며 궁금한 것을 묻는 민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누구야?”

“그냥, 아는 사람.”

“너 저렇게 예쁜 사람 안다고 왜 말 안 했어?”

 

 

제가 그걸 왜 선배한테 말해요. 유진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는 물티슈를 한 움큼 쥐며 500 두잔 가져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왔다. 얼빠진 얼굴로 예쁘다고 하는 거 보니 부탁하지 않아도 여기서 제일 좋은 재료로 제일 맛있는 걸 만들어올게 뻔했다. 가져온 물티슈의 껍질을 벗겨 김민주가 내민 손에 살며시 올려주고 유진은 어색한 자리가 불편해 몸을 조금 비틀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표정이 풀어진듯한 친구들은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맥주를 한, 두 모금씩 마신다.

 

빠르게 500cc 두잔을 손에 쥐고 온 선배가 테이블에 내려두면서 김민주에게 눈길을 보내지만, 민주는 그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닥했을 뿐이다. 그 표정에 더 반한듯한 얼굴로 선배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되돌아갔다. 주책이야, 진짜.

 

 

“민주님 술 마셔도 돼요?”

“응. 나 술 좋아해.”

“그래요?”

 

 

나 태어나서 한 번도 취한 적 없어. 민주의 말에 앞에서 원영이 생일이니까 원샷! 같은 아무 말이나 던지고 제 얼굴보다 큰 듯한 500cc 잔을 들고 맥주를 쭉쭉 들이켜고 있던 채원이 눈을 반짝였다.

 

 

“저도 술 좋아해요!”

“그래?”

 

 

유진은 별로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라서 맥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감자튀김 하나를 입에 넣었다. 같은 술쟁이만 만나면 급격히 흥이 오르는 채원은 원영과 자리를 바꾸고는 민주의 옆자리에 바짝 당겨 앉아 자신의 주량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술 잘 마시는 게 어떻게 자랑이 되니? 유진은 유리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진짜 한 번도 취한 적 없어요?”

“응.”

“거짓말. 그럼 취할 만큼 많이 안 마셔본 거 아니에요?”

 

 

명백한 채원의 도발이다. 민주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한 모금 마신 맥주잔을 내려놓고 채원을 천천히 관찰하듯 훑어보며 차분하게 입을 연다.

 

 

“그럼 한번 볼래?”

“네?”

“내가 얼마나 잘 마시는지.”

“어떻게….”

“내기해.”

 

 

유리랑 교양수업 이야기를 잠시 하던 유진은 민주가 내뱉은 ‘내기’라는 단어에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곤 곧바로 헉 소리를 내며 유진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김민주의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을 눈앞에 뒀을 때의 불타오르는 김민주.

 

 

“술 내기요?”

“응.”

"대박 좋아요!"

 

 

아, 안돼. 채원아 미친 소리 하지 마. 민주를 향해서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채원을 향해 해보지만, 이미 유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며 민주는 반쯤 남은 맥주를 깨끗이 비워내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불길해. 유진은 채원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무슨 술내기야. 얌전히 마시고 집에 가.”

“왜? 김민주님이 하자고 했어.”

 

 

너도 노예 3호 하고 싶냐. 유진이 민주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채원의 귓가에 속삭였지만, 채원은 그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귀찮게 구는 유진을 밀어내고는 민주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내기면 뭔가 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채원이 이기면 일주일 동안 안유진 시급 3배. 김민주가 이기면 일주일 동안 안유진 시급 0원.”

“뭔 소리야. 잠깐만!”

 

 

유진이 이제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두 사람을 떨어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 이렇게 두 배 받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며 민주를 말려보지만, 민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술기운이 조금 올라온 채원은 자신이 친구를 구하겠다며 도전! 을 외치고 난리다.

 

 

“도전할 거면 날 걸지 말고 널 걸어!”

“유진아! 오늘이 노예 해방의 날이야. 시급 3배!”

 

 

양팔을 하늘 위로 뻗고 소리를 지르는 채원을 이미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유진은 이마를 짚었다. 마음대로 해라, 그래. 허탈하게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제 몫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실 뿐이다.

 

맥주로는 밤을 새워도 안될 거라며 민주는 이 술집에서 파는 제일 독한 술을 가져오게 했다. 독한 만큼 가격도 비싸서 채원이 호시탐탐 노리던 술인데, 선배가 그 술을 꺼내오자 채원은 신나서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원영도 유리도 테이블 위를 손으로 두드리며 즐거워하고, 선배도 오늘 최고 매출을 찍을 것 같다며 싱글벙글이었으니, 그 사이에서 죽상을 한건 안유진뿐이다. 채원이 이긴다면 좋겠지만, 진다면 일주일 동안 열정페이 노예로 살아야 한다. 유진은 세팅되는 술잔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김민주는 한 번도 취해 본 적이 없는지 독주가 급하게 들어가는데도 얼굴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채원은 여태껏 잘 마시는 모습을 많이 봐왔으니 놀랍지도 않고. 독한술 한 병이 금세 비워졌는데도 둘 다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기계처럼 계속해서 입안으로 술을 털어 넣었다. 어느새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학생들도 모여들어 구경하기 시작했고, 유진은 괜히 창피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유진이는 좋겠네. 채원이가 너를 위해 저렇게 술도 마셔주고.”

"니 눈엔 저게 나를 위한 걸로 보이니?”

“아아니이”

 

 

재미있다는 듯 원영이 낄낄 웃었다. 내기가 길어지자 유리는 금세 흥미가 떨어졌는지 감자튀김을 질겅질겅 씹으며 자신이 필기한 강의 노트를 들여다본다. 아무튼 주변에 친구라곤 이상한 애들뿐이라 생각하며 유진은 선배가 가져온 두 번째 병의 뚜껑을 여는 김민주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만해요 민주님 잘 마시는 거 알았으니까.”

“놓을래?”

 

 

놓으라고 하면 놓아야 한다. 유진은 손을 가볍게 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던게 분명한데, 이제는 승부욕이 발동한 것 같다. 유진은 그런 민주는 포기하고 채원에게 그만하라고 잔을 뺏으려 하다가 맞을 뻔했다.

 

 

“안유진! 너는 빠져!”

 

 

하는 채원에게 유진은 나의 소중한 노동의 대가가 걸려있는데 어떻게 빠지냐며 울상을 지었다. 샷잔으로 스트레이트. 그리고 빠른 속도로 마셔댄 탓인지 두 번째 병이 3분의 2가량 비워졌을 때 순간적으로 채원의 몸이 휘청거렸다.

 

 

“김채원 괜찮아?”

“어! 왕정갱차낭!”

 

 

왕정 갱차는 게 어떻게 괜찮은 거니. 유진은 잔뜩 걱정 어린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보아도 채원은 한계인 거 같아서 유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다음 잔에 손을 뻗는 민주의 옆으로 다가가 몸을 기울였다.

 

 

“저, 그냥 일주일. 아니 2주 시급 안 받을 테니까. 무승부로 해요.”

“…뭐?”

“채원이 너무 많이 마셨어요. 쟤 포기 안 할 거 같으니까, 그렇게 해줘요.”

 

 

술 마시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잘 먹기도 하지만, 이렇게 많이 마시면 다음날 고생 엄청 하거든요. 정말 정신이 없어 보이는 채원이 옆에 앉아 어깨를 내어주는 원영에게 기대는 걸 보고 유진이 중얼거렸다.

 

 

“친구가 걱정된다 이거지?”

“민주님도 걱정되죠.”

 

 

이렇게 급하게 마시면 속 엄청 버려요. 그리고 오늘 일 알면 저 혜원 씨한테 혼난다고요. 진지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고 웅얼거림에 가까울 정도로 말을 내뱉는 유진을 빤히 보던 민주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자신 앞에 비어진 잔을 뒤집어 놓는다. 술내기에서 술잔을 뒤집는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어서 당황했다. 어? 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마셔야 한다고 팔을 휘젓는 김채원만 시끄러울 뿐이다.

 

 

“그래. 내가 졌어.”

“그냥 무승부로 하면….”

 

 

졌다고. 민주는 가볍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어 차에서 대기하던 운전기사에게 유진의 친구들을 집까지 잘 데려가라 지시했다. 채원을 어떻게 하나, 택시를 타야 하나 고민하던 유리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민주는 술값도 전부 블랙카드로 결제하고는 생일을 망친 것 같아 미안하다며, 작은 생일선물이라고 말해 원영은 거의 김민주의 팬클럽이 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유진은 오늘 너희들이 처마신 게 자신의 2주 시급이라며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아, 그런데.

 

 

“쟤네 기사님 차에 태워보내면 민주님은 집에 어떻게 가요?”

“혜원 오라고 하면 돼.”

 

 

그러고선 바로 혜원을 부른다. 정신을 잃어서는 테이블에 널브러져 내가 이겨써! 안유진 노예 해방! 유진이즈프리! 주인님! 유지니는 자유에요! 하고 헛소리를 하는 채원을 끌어 유리와 원영의 품에 안겨주고 유진은 혀를 찼다.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김민주가의 베테랑 운전기사님이 안전하게 집에 잘 데려다줄 것이다. 세단에 세명을 태우고 나서 유진은 자신의 영혼도 그곳에 태워 보냈다. 유진 역시도 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술을 많이 마신 김민주를 혼자 두고 가는 건 인간으로서 몹쓸 짓 같아서 유진도 민주와 함께 혜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혜원씨 올 때까지 좀 걸을래요?”

 

 

그냥 서서 기다리기 뻘쭘해서 건넨 유진의 말에 민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춥진 않아요?”

“별로.”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도 걸음걸이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김민주가 이제 신기할 지경이다. 술 냄새도 나지 않는 것 같고. 얘는 찐이네. 하고 생각하면서 유진은 웬만한 일에는 민주에게 나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술 정말 잘 마시네요.”

“잘 마신다고 했잖아.”

 

 

침묵이 답답한 유진이 필사적으로 아무 말이나 건네보지만 민주는 퉁명스러운 대답만 돌려줄 뿐이다. 어색해 죽겠어! 혜원씨! 언제 와요! 유진은 마음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걸음을 민주에게 맞춰 내디뎠다. 걸음이 빠른 편인데 느릿하게 유유자적 걷는 민주와 속도를 맞추다 보니 조금 답답하다.

 

 

“안유진.”

“네?”

“업어.”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 선 민주가 내뱉은 말에 유진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업으래.

 

 

“갑자기?”

 

 

정말 업기 싫다는듯한 유진의 말투와 행동에 민주는 아무 말 없이 바지의 뒷부분을 올려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보여준다. 새 운동화를 신은 탓인지 맞닿아있는 부분이 붉게 부어오를 정도로 상처가 나있었다.

 

 

“아니, 이걸 왜 지금 말해요?”

 

 

치료비 청구! 먼저 그런 생각이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린 유진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는 민주 전용 손수건을 깔아주곤 앉게 했다. 그리곤 신발을 살며시 벗겨내어 지갑에 넣어둔 밴드를 꺼내 상처 위에 조심히 붙여준다.

 

 

“아파요?”

“쫌.”

“이런 걸 서민 체험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밴드 항상 가지고 다녀?”

“네. 언제 어디서 뭐한테 물릴지 모르잖아요.”

 

 

라고 대답한 안유진은 헤헤,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민주가 여분으로 유진에게 건네준 M이 적혀있는 밴드를 붙인 민주가 아무 말도 없이 유진을 노려보기만 하자 유진은 으이차 하고 몸을 돌려 업히라는 듯 등을 내주었다.

 

 

“혜원씨 올 때까지만 업어드릴게요.”

“됐어, 밴드 붙였잖아.”

 

 

이거 붙여도 다시 걸으면 엄청 쓰라려요. 유진은 빨리 업히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못 이기는 척 슬쩍 업혀오는 민주 때문에 조금 웃음이 날것 같지만 꾹 참고는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앓는 소리가 날것 같아서 힘겹게 참아낸 유진은 두 다리로 버틴채 업힌 민주를 한번 추스렀다. 그리곤 팔에 힘을 주고 한걸음 한걸음 조용히 걷기 시작한다.

 

 

“내가 왜 져줬는지 알아?”

 

 

한참을 말없이 업혀가던 민주가 대뜸 물어온다.

 

 

“모르겠는데요.”

“진짜 몰라?”

 

 

네. 진짜 모르겠어요. 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이 없다. 눈치로 방금전 자신의 대답은 민주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유진은 본능적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기로 한다.

 

 

“어…제가 2주 시급을 0원으로 한다고 해서?”

 

 

얼빠진 유진의 목소리에 민주가 유진의 귀바퀴를 힘을 줘 잡아당겼다.

 

 

“아파요.”

 

 

엄살을 떨어봐도 별다른 대꾸가 없다. 유진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다 그냥 김민주 변덕이 죽 끓듯 하니까 져주고 싶어졌나 보다. 하고 속편하게 마음먹었다. 유진은 점점 팔에 힘이 빠져나가 다시 한번 팔을 추슬러 본다. 금방 올 줄 알았는데 혜원은 왜 이렇게 깜깜무소식인지. 괜히 업어준다고 허세 부렸나. 유진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후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네가…나…걱정된다며."

“어! 혜원씨다!”

 

 

등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린 민주와 유진이 동시에 외쳤다. 그래서 민주의 작은 목소리는 밤공기의 차가움에 묻혀 빠르게 사라졌고, 유진은 라이트를 비추며 다가오는 차가 반갑다는 듯 홀가분하게 손을 풀어 민주를 내려주었다. 둘의 근처에 차를 세우고 빠르게 내리는 혜원의 반듯한 얼굴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있었던가 유진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혜원씨 너무 반가워요.”

“혜원.”

 

 

유진의 인사 너머로 나지막하게 자신을 부르는 민주의 목소리에 혜원이 가볍게 유진을 무시하고 차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올라타기 직전 멈칫한 민주가 혜원의 곁에 바짝 서서는 귓가에 낮게 속삭인다.

 

 

“빨리 왔네.”

“네. 날이 추워서 감기….”

“왜 이렇게 빨리 왔냐고.”

“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차에 타는 민주를 보며 혜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

 



 

 

 

 

 

번쩍 눈이 떠졌다. 민주는 층고가 높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머리맡에 놓인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이런 이른 시간에 눈이 떠진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그런 고민을 해봐도 머리가 아프다거나 속이 울렁거린다거나 하는 증상은 없다. 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민주는 침대에 내려와 거울 앞에 섰다. 확실히 얼굴이 조금 붓기는 했다. 안유진이 오기 전에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욕실로 걸음을 옮긴다. 몸이 가뿐하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어?”

“유진씨가 몸살감기로 오늘은 출근하지 못하셨습니다.”

“몸살감기?”

 

 

술은 내가 다 마셨는데, 왜 지가 아파. 그렇게 안 보이는데 몸이 약하네. 민주는 혜원이 들고 온 동그란 계란프라이 두 개를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란프라이를 먹고 유진에게 건네려고 했던 ‘오늘의 할 일’을 뒤적이다가 민주는 심심하다는 듯 침대 위에 엎드렸다. 몽글몽글한 침대의 감촉에 기분이 좋은 것도 잠시 다시 천장을 바라보곤 제 배를 손가락 두 개로 통통 두드려본다. 심심해, 안유진이 없을 때는 뭐하고 놀았더라. 그냥 별거 안 했던 것 같지만, 뭘 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심심해.

 

 

“혜원.”

“네.”

“갈래.”

“어디를요?”

“안유진 집.”

 

 

침대에서 뒹굴뒹굴한 탓에 부스스해진 머리를 치켜들고 신이 난 목소리로 말하는 민주를 보며 혜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유진을 데려다주기 위해 도착한 원룸 건물 앞에서 민주는 그 작은 집에 들어가 보고 싶어 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유진의 강경한 거부로 들어가지 못해 입을 한 움큼 내밀고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아가씨는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니까. 혜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민주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학가의 원룸촌과 매우 어울리지 않는 비싼 세단이 골목길에 비스듬하게 주차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거나 말거나, 선글라스를 빼꼼 내려쓴 민주가 어제 들어가지 못한 유진의 집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프다고 하니까, 김민주가에서 신뢰하는 셰프에게 부탁해서 죽도 만들어왔다. 운전기사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가방을 뺏어 손에 들고는 민주는 건물 현관에 들어서자 마자 눈에 띄게 당황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로 돌렸다. 3층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3층입니다.”

"엘리베이터는?"

“없는 건물인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 없이 3층까지 어떻게 올라가?라는 민주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우전 기사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다가 걸어서요? 하는 얼빠진 대답을 내놓았다. 민주는 한심한 듯 운전기사를 한번 노려봐주고는 계단을 느리게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며 중얼중얼 험한 말을 내뱉었다.

 

302호라고 써진 현관문 앞에 서서 벽을 짚고 숨을 고르던 민주는 핸드폰에 자신을 비춰 정돈하고는 곁에 따라온 운전기사를 보며 계단을 향해 턱짓했다. 올라오면서 생각해보니 여자 혼자 사는 집인데 남자가 들어가는 것이 좀 그렇다. 내려가서 차에서 기다려. 하는 민주의 말에 그럼 올라오기 전에 말했어야죠. 하는 표정을 잠시 지었던 그였지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운전기사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자 흐뭇하게 웃은 민주는 손가락 하나를 쭉 펴서 초인종을 길게 눌렀다. 안유진 문 열어, 집 앞이야.

 

-띵동

 

인기척이 안 느껴진다.

 

-띵동 띵동

 

두 번 연속 울리고 귀를 기울이니 문 안쪽에서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구세요, 하고 맥빠지는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민주가 ‘나’ 하고 짧은 대답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민주가 왔다고 하면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누구시냐구요오오”

 

 

하고 끝을 길게 늘어트리는 잠긴 목소리가 들리지만 민주는 말없이 다시 초인종을 짧게 반복해서 눌렀다.

 

 

“아이씨 누구냐고…!”

 

 

체인이 걸려있는 문이 한뼘정도 열리며 얼굴을 내민 안유진의 짜증스러운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엉켜서는 입을 쩌억 벌리는 유진의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민주는 나야. 하고 방긋 웃는다.

 

 

“문 열어”

“여긴 무슨 일로?”

“열고 말해.”

“아니.”

“사람 불러서 문 부수기 전에 열어.”

 

 

네. 유진은 황급히 문을 닫았다가 체인을 제거하고 다시 문을 열어주었다. 민주가 성큼 현관으로 들어서자 유진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불을 온몸에 돌돌 말고 좁은 원룸의 주방에 바짝 붙어선 유진은 소리 없는 절규를 하며 눈알만 도로록 굴린 채 서있었다.

 

 

“너 보기보다 약하다?”

“…어, 정말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거 먹어.”

 

 

민주는 들고 있는 종이가방을 한 뼘 정도 되는 싱크대 위에 올려주고는 두리번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좁긴 하지만 상상보다는 정리 정돈이 잘 되어있다. 싱글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의자 하나, 행거에 늘어져 있는 옷들. 자신의 욕실보다 작은 집은 처음이라 신기한 눈으로 여기저기 살펴보는 민주의 눈동자가 또 한 번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걸음을 떼며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며 구경하는 민주를 두고 종이팩에 들어있는 보온병을 꺼내들었다.

 

 

“이거 죽이에요?”

“응. 내가 만들었어.”

“으악?”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침대 위에 걸터앉아있던 민주의 날카로운 눈빛이 날아와 꽂힌다.

 

 

“으악, 맛있겠드악”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는 유진을 못마땅하게 계속 보던 민주는 입을 잠시 삐죽거리곤 다시 말을 덧붙인다.

 

 

"장셰프님이 만들어주신 거야.”

“오!”

 

 

저 반응은 진짜다. 장셰프님 요리 정말 맛있는 거 같아요. 하면서도 유진은 힘이 없다는 듯 보온병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고 느리게 걸어와 민주가 앉아있는 침대의 옆에 걸터앉았다.

 

 

“뭐야.”

“제가 지금 너무 힘이 없어서요.”

 

 

그러더니 쓰러지듯 누워 이불을 목 끝까지 덮는다. 꾀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굴도 붉은 것이 열도 있는 모양이다. 삐죽빼죽 솟아있는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놔둔 채 유진이 두 눈을 감는다.

 

 

“많이 아파?”

“자고 나면 괜찮아져요.”

“병원 갈래?”

“잘래요.”

 

 

열 있는 거 같은데, 약은 먹었어? 민주의 질문이 쏟아지는데 유진은 벌써 잠든 것인지 대답이 없다. 무작정 찾아오긴 했지만, 민주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그대로 침대에 걸 터 앉은 채 숨소리만 고르게 내뱉는 유진을 내려보았다. 혼자서 아픈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보니 민주는 언제나 혼자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 까지는 아니었지만 오빠, 언니들도 있었고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분들도 항상 함께 했었고. 나이를 먹은 후에는 개인비서 혜원이 늘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다. 매끄러워 보이는 유진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평소보다 체온이 높은 게 분명한 열이 손끝에 느껴진다. 이렇게 열이 날 때는 항상 바로 병원으로 가곤 해서 집안에서 하는 응급처치 같은 건 그저 드라마나 만화 같은 것들을 통해서 접했을 뿐이다. 어떻게 했더라. 민주는 몸을 일으켜 욕실밖에 잘 개어져 있는 수건 하나를 찬물에 적셨다. 차갑게 해야 겠지? 물을 꼭 짜서 가지고 나와 알맞은 크기로 접어 깊이 잠이 든 유진의 이마 위에 얹어 주었다. 잠시 뒤척이던 유진이 다시 편안한 표정을 한다.

 

그런 유진을 보며 자신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는 걸 민주는 알지 못했다.

 

 

 

 

 

 

 

 

 

 

유진은 자는 내내 자동차 한 대가 자신을 쫓아오는 꿈을 꾸었다. 어디로 도망가도 어느새 뒤에 따라붙어 자신을 쫓아오며 뭐라 뭐라 떠드는 자아가 있는 자동차. 겨우 따돌렸다고 생각했을 때, 어느새 등 뒤에 서있던 자동차가 갑자기 속력을 올려 자신의 몸에 부딪혀왔다. 그 충격에 깜짝 놀라 악하고 소리를 내며 유진은 눈을 번쩍 떴다. 몇 시인지 가늠이 안되지만 방안이 어스름했다. 지금 몇 시지 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묵직한 것이 이불을 꾹 누르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헐, 가위인가! 가위에 눌린 건가! 싶어서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랬더니 꺅, 하는 비명과 함께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침대 아래로 떨어진다.

 

 

“야.”

 

 

바닥에 떨어진 민주가 몸을 반쯤 일으키고 소리를 지른다. 너무 묵직해서 가위눌린 줄 알았는데, 아침에 왔던 민주가 침대에 같이 누워 있었나 보다. 유진은 재빠르게 불을 켜 바닥에 앉아 잔뜩 신경질이 난 표정으로 머리를 정리하는 민주의 정수리를 보았다. 왜 집에 안 갔지?

 

 

“아직, 안 가셨네요.”

“왜 안 갔냐는 말로 들린다?”

“아니, 그건 아니고요.”

 

 

그러고 보니 어깨 위에 뭔가 축축한 것이 달라붙어있다. 뭔가 싶어서 슬쩍 집어 드니 집에서 발걸레로 쓰고 있는 수건이 젖은 채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설마, 그 수건을 바라보는 김민주의 표정이 굉장히 뿌듯해 보이는 것이 착각이길 바란다.

 

 

“이거….”

“응, 내가 해줬어.”

“그러니까 이걸로….”

“너 열 있길래, 이마에 얹어줬어.”

 

 

아, 발걸레인데요. 하고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칭찬을 바라는듯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민주에게 유진은 쓰게 웃으며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수하고 싶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여전히 민주는 침대에 멀뚱히 앉아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할 일이 없으면 가져온 죽이나 좀 데워주던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불평을 말할 수가 없는 유진은 몸을 가벼이 움직였다. 여전히 조금 찌뿌둥하긴 했지만, 아침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스트레칭을 하듯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아침의 일을 생각해본다. 어디서 노예에게 휴식이 어디 있냐며 잡으러 온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심심해서 놀려고 온 게 분명했다. 유진은 능숙한 동작으로 보온병을 열어서 그릇 두 개에 나눠 담아내었다.

 

 

“배고프죠?”

“응”

“이거 같이 먹어요.”

 

 

작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말없이 미지근한 죽을 먹는다. 세트로 이루어지지 않은 식기에 젓가락과 숟가락이 짝이 맞지 않는 것도 처음이다. 그래도 민주는 배가 고파서인지 집에서 늘 먹는 음식들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앞에 앉은 유진이 ‘와 진짜 맛있어요’ 하는 말들이 더 맛있게 만들어줬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유진.”

“네?”

“오늘 일한 걸로 시급 처리해 줄게.”

“진짜요?”

 

 

갑자기 유진의 얼굴이 밝아진다. 싱글벙글 웃으며 유진이 죽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먹는 걸 보며 민주는 얼굴에 티가 나지 않도록 속으로만 가볍게 웃었다.

 

 

 

 

 


 

**

 

 

 

 

 

 

 

황금연휴다. 유진은 연휴가 시작되는 날 학교 정문을 붙잡고 눈물을 훔쳤다. 이제 학교 간다는 핑계도 말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김민주에게 끌려가야만 했다. 나는 민주님 좋던데? 그날 그렇게 술을 마신 이후로 채원과 원영, 유리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셋은 민주의 편이 되어있었다. 그럼 니들이 노예 해보시지! 하는 유진의 외침에도 셋은 재미있을 듯. 하며 속을 뒤집어 놓았다.

 

민주는 테이블 위에 태블릿PC를 내려놓으며 가고 싶은 곳을 골라 보라고 했다. 사진을 손가락으로 사진을 넘기니 런던부터 하와이까지 TV로만 봤던 세계의 관광지들의 모습이 한가득이다. 유진은 해외까지 끌고 가서 노예질을 시키려고 한다며 속으로 쓴 눈물을 삼켰다.

 

 

“민주님. 저 여권 없는데요.”

“뭐?”

“여권 없어요.”

“그거 태어날 때 다 주는 거 아냐?”

 

 

외계인을 본 것처럼 어떻게 여권이 없을 수가 있냐는 눈빛을 하는 민주 덕분에 유진의 귓가가 조금 붉게 변했다. 아직 해외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래요.라는 말에 미간을 조금 찌푸리던 민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탁자 위에 있던 태블릿PC를 손으로 쓸어버리듯 옆으로 밀어버렸다. 탁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본능적으로 유진은 몸을 숙여 태블릿PC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놔둬.”

“…?”

“그냥 두라고.”

 

 

그 말에 엉거주춤하던 유진은 이미 손에 쥐어진 기계를 다시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여전히 일을 시키긴 하지만, 예전보다는 줄어들긴 했다. 요즘에는 주로 나란히 앉아서 게임을 하거나, 밍밍이와 놀아주거나, 관상어들에게 밥을 주는 게 전부 일 정도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유진은 그런 마음으로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민주가 시키지도 않은 집안일들을 도왔다. 물론 도우미 분들과 친해진 탓이다.

 

 

“그럼 국내에서 가고 싶은데 있어?”

“황금연휴 때 어디 가면 사람 엄청 많을 텐데.”

“있냐고.”

“어… 제주도?”

 

 

제주도? 거기 우리 집 리조트 있는데.

 

 

 

 


 

 

**

 



 

 

 

 

"다리를 조금 더 일자로요."

 

 

왜 황금연휴에 제주도까지 와서 내가 얘한테 골프를 가르치고 있어야 하지? 몇 번이나 가르친 동작을 반복하던 유진은 모자를 올려 쓰며 땀을 닦았다. 이렇게 하라고? 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되묻는 민주를 보다가 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주도로 떠나기 전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혜원이 자신을 불러내던 순간 알아챘어야 한다.

 

 

‘며칠 후에 아가씨가 중요한 골프모임이 있으시거든요.’

‘네.’

‘유진씨 중학교 때 골프 특기생이셨더군요.’

 

 

휴가라더니! 휴가라면서! 제주도로 이동하는 민주의 짐에는 보기만 해도 질리는 골프 가방 두 개가 나란히 실렸다. 유진은 비행기에서 은근슬쩍 민주에게 골프 쳐본 적 있냐고 물어봤더니 민주는 ‘쳐본 적 있다’라는 대답을 했다. 그 말에 안심을 한 자신의 바보 같음을 탓해본다. 김민주는 정말 ‘처본 적’만 있을 뿐이다. 골프공 때리는 거야 누가 못해.

 

 

“아니요. 하체는 고정하고요. 상체로만 이렇게 돌려서….”

“왜 이렇게 만져?”

 

 

유진이 민주의 허리에 손을 얹었더니 고개를 획 돌리고 도끼눈을 뜬 채 그런다. 얼마 전에는 업기도 했는데, 허리 정도 만지는 거야. 하고 대답하면 뺨이라도 때릴 것 같아서 유진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매너손 몰라?”

“장갑 꼈잖아요.”

“그래도 만지지 마.”

 

 

쏘아붙이는 말투에 유진은 괜히 졸아 고개를 끄덕였다. 만지지 말랬으니까, 일정 간격으로 손을 떼고 하체를 고정시키고 허리를 돌리라고 알려주었다. 매서운 눈을 한 민주가 획하고 골프채를 휘두른다.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골프공이 날아가고, 골프채도 같이 저 멀리로 날아간다.

 

 

“오, 홈런.”

“야.”

“가져올게요.”

 

 

유진은 골프채가 빠진 벙커를 향해 달렸다. 골프채 하나가 내 목숨 값보다 비싸다. 저벅저벅 벙커에 들어가 골프채를 꺼내왔더니 그 자리에 있지 제 뒤를 따라온 민주 때문에 경호원 둘과 캐디분이 줄줄이 따라왔다.

 

 

“재미없어.”

“혜원 씨가 완벽하게 가르쳐드리라고 했어요.”

“그냥 그날 너도 같이 가서 쳐.”

“전 수업 들어야죠.”

 

 

그렇게 말하며 유진이 벙커에서 주워서 내민 골프채를 손에 쥔 민주는 획획 몇 번 골프채를 휘두르더니, 있는 힘껏 다시 저 멀리로 던져버린다. 아, 진짜 왜 이래. 이번에는 물에 빠져 잠겨버린 골프채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골프채 없어져서 이제 못하겠네.”

“저쪽에 예비로 가져온….”

“저것도 다 물에 던져버릴까?”

 

 

아니요. 유진은 입을 일자로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랬더니 밝게 웃으며 장갑을 아무렇게나 벗어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장갑을 받아들자 민주는 팔랑팔랑 뛰어 골프카트에 올라탔다. 빨리 타라는 듯 유진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자 경호원과 캐디는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이라서 당황하지도 않은 채 뒤에 놓인 골프가방을 정리해 주었다. 유진은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느리게 카트 위에 올라탔다.

 

 

“이거 속도 얼마나 나는지 궁금하지 않아?”

“네?”

“이 카트 빠르게 개조한 내 전용 카트거든.”

“저 내릴게요.”

“밟는다. 꽉 잡아.”

“아, 잠깐만요!”

 

 

민주가 카트의 엑셀을 세게 밟는다. 늘 평화롭게 운행하던 전기 카트가 골프장의 잔디밭 위를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앞에 벙커!”

 

 

꺄하하! 민주가 크게 웃으며 벙커 앞에서 급커브를 돈다. 유진 쪽의 바퀴가 조금 공중에 떴다가 지면으로 쿵, 하고 충격을 주며 내려왔다. 유진은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옆에 손잡이를 있는 힘껏 부여잡았다.




앚페서.

삼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