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날조/캐붕 0 

사람 죽이고 도망다니던 서서가 조인을 만났다면? <에서 시작된 날조 


첫사랑의 열병은 짧았고 후유증은 길었다. 

돌이켜 보자면 그랬다는 뜻이다. 그는 한 번도 머리가 길었던, 깡말랐던, 지저분했던, 그리고……그리고……별을 등지고 웃었던 여자를 잊었던 적이 없다. 여전히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다. 말했다시피, 이것은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것은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오래 전의 이야기였으니까. 


벼락처럼 들이친 여자를 기억한다. 비가 오던 날이었고, 그는 아직 학생 티를 벗은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장수였다. 그리고 여자는 벼락처럼 들이쳤다. 

나 좀 숨겨 줘.

그의 옷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속삭이던 여자는 그보다 어려 보였고 검은 나시 티를 입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빨아 입었는지는 몰라도 너덜너덜한 옷이었다. 서늘한 여름밤, 빗속에서 부드러운 안개처럼 입김이 일었다. 숨을 몰아쉬는 여자에게서는 피 냄새가 났다. 그런 것은 물비린내로도 쉽게 지워내기 힘들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귀신에라도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였다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운좋게도, 혹은 조자효에게는 불행하게도,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촌 형은 이 여자와 마찬가지로 도망 중이었고, 조자효는 여자에게서 그의 사랑하는 형을 겹쳐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선득한 눈……. 흉흉한 녹빛은 잘 벼려낸 유리 조각을 닮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자면 그랬다는 뜻이다.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물었다. 


"어째서 도망치고 있습니까?"


여자가 답했다.


"사람을 죽였거든."


그는 여자에게 우산을 씌워 주며 다시 물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여자는 젖은 머리를 그제야 쓸어넘기며 사납게 웃었다. 사람보다는 금수에 가까운 눈빛이다. 아, 그러고 보니 여자의 팔에는 빼곡하게 문신이 들어차 있었다. 어쩌면 질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였다.


"그는 천하에 다시 없을 쓰레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죽였습니까?"

"이 천하에 너무 쓰레기가 많은 탓에 감히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뿐 쓰레기가 아니었단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중 최고는 나라를 팔아먹을 동탁이고, 감히 처죽여도 모자랄 동탁의 수하들이 그 이후요, 내가 죽인 것은 삼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죽였습니까?"

"하고 많은 쓰레기들, 발에 채이는 쓰레기들……하지만 보세요, 그놈은 내 친구의 아내를 죽였단 말입니다. 그런 놈을 내버려두란 말입니까?"


여자는 경계하듯 청년을 노려 보았고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여자를 신고하는 대신 가볍게 어깨를 끌어당겨 우산 속으로 감추었다. 여자의 몸이 굳었다. 청년이 속삭였다.


"피 냄새가 납니다."

"……."

"채 죽이지 못한 흉흉한 기색까지. 제가 숨을 곳을 압니다."

"……잠시 숨겨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만?"


그는 묵묵히 여자의 등을 밀었다. 오래 도망다닌 탓인지, 여자의 피부는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여자는 그제야 토를 달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그러므로 이는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었다. 훗날의 악연을 떠올린다면 더더욱.


민가의 버려진 집에 도착한 여자는 미심쩍게 청년이 건넨 수건을 받아들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친절하면 되려 의심되는데."

"신고하려면 진작에 하지 않았겠습니까?"

"맞긴 한데……저 도망 잘 치거든요. 발이 빨라서. 거리에선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막다른 곳까지 몰아넣고 그런 거 아니죠?"

"이래봬도 장수입니다만. 놓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수라고?"


허탈한 얼굴로 조자효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여자가 중얼거렸다. 시발. 어쩐지 피 냄새를 너무 잘  맡더라니.


"어려 보이는데."

"……그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난 날건달이고. 못 배워먹은 놈이 어려 보이는 게 뭐 어때서요?"


낄낄 웃은 여자가 머리를 탈탈 털었다. 그제서야 느슨해진 기색에 조자효는 주섬주섬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앉지 않았다. 깨진 창 너머로 들이치는 별빛을 들이 마실 뿐. 

어느새 비가 그친 후였다. 하늘이 맑았다.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나다니듯 달 없는 밤에는 별이 제 맵시를 뽐내나 봅니다, 여자가 중얼거렸다. 먼지가 가득 앉은 창틀을 손으로 쥐며.


"공부를 아예 안 한 것 같지는 않은데."

"공부를 해 봐야 뭐합니까? 머릿속에 장서관을 쑤셔 넣은 놈이어도 뇌물 없으면 죽도 밥도 아닌 세상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방법이? 의병? 아, 관두세요. 여긴 윗대가리부터 썩어빠졌어. 그런 놈들에게 고개 숙이려고 공부할 바엔 평생을 도망자로 살겠습니다."


평생을요. 짓씹는 목소리는 사나웠으나 조자효는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서 서러움을 읽어 낸다.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모실 생각이 있습니까?"

"가능하다면 언제나."

"그렇다면 어째서 출사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소용없는 시대임을 알아서죠."


여자는 지독하게 피로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가 있다면……목숨이라도 바쳐 따를 터지만, 저 같은 인재를 써 주겠습니까? 세상에 배우고 집안 잘난 치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자효는 아주 충동적으로 여자의 곁에 다가가 섰다. 먼지 묻은 창틀을 짚으며 여자에게 묻는다. 


"만약에……그런 주군이 있다면?"


여자는 조자효는 바라보지도 않은 채, 뭐가 그리 아름다운지, 별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웃는다.


"그럼 내 평생을 바치겠지."

"그렇다면 언젠가 당신에게도 길이 있을 겁니다."


그제야 여자는 조자효를 바라본다. 

사나운 눈매가 누그러진다. 그때만큼은 그 눈동자가 유리가 아닌 옥석을 닮아 반짝였다. 가치 있는 것이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 해서 연꽃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듯…….

아름다웠나? 모르겠다. 여전히 여자는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화장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드러난 깡마른 팔에는 문신이 빼곡했다. 질 나쁜 이들과 어울리는 치라는 것도 제 입으로 말한 후였다. 젖은 머리는 매끄럽지 않고 축축할 뿐으로 정말이지 여자는 미인은 죽어도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아름답지 않은 것도 반짝일 수 있는 것이다.

허리를 굽혀 박장대소하던 여자가 눈물을 닦으며 씩 웃는다. 그리고 조자효의 손을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비록 지금은 도망자 신세지만, 어머니께 한 번 입은 은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갚는 것이라 배웠으니……언젠가 이 난세에서 다시 만난다면, 이 은恩은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요."

"떠날 생각입니까?"

"다시 떠나야죠."

"붙잡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은 져야죠. 그 새끼가 아무리 쓰레기였어도, 붙들린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제 긍지입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조자효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묻는다.


"그럼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말씀해 주신 대로요."


여자는 쏟아지는 별을 맞으며 웃었다. 달이 아니어도 아름다웠다.


"공부를 해 봐야죠. 길을 찾아야 하니까……."


그러니 그 순간은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조자효에게 박혀 아주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순간이 빠져나간 후에도 그는 한때 그것이 박혔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했다. 여자는 아름답지 않았으나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이들이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는 어렴풋이 그 이름조차 모르는 여자를 떠올리며, 이 난세에서 다시 마주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온 것이고…….

다시금 찾아온 두 번째 만남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마침내 다시 마주한 여자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홀로 장례식장을 지키던 여자를 떠올린다.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었다. 조자효는 그것이 잠시 불쾌했다. 

이제 와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여자를 잊었던 적이 없으나, 순간 이후 사랑한 적도 없었으므로, 그것은 그저 아름다웠던 추억의 편린을 망가트린 여자에 대한 불쾌였다. 


이제 그는 탕비실에 앉아 체스 말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여자를 삐딱하게 바라본다.


"분명 주어진 일이 있을 텐데요."

"아, 꼬우면 자르던가."


그 책사는 심드렁히 답하며 폰으로 퀸을 콱 짓눌렀다. 악취미라면 악취미다.

조자효는 잠시 그 여름밤을 여자가 기억하는지 떠 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들은 너무 많은 길을 걸어 왔다. 어쩌면 처음부터 여자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재미있습니까?"

"뭐가요."

"그런 식으로 살면 재미있습니까?"

"아, 꺼지세요. 왜 시비야? 일 안 합니까?"


서원직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들었다. 조자효는 한 걸음 다가선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때와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저 비는 언제 그칠지 모른다는 점 하나뿐.

하늘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흐린 날씨였다. 


"……길을 찾긴 한 겁니까?"

"길?"


서원직의 눈에 잠시 빛이 들었다. 그리고 여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합의한 줄 알았는데?"

"약속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그럼 이제 하면 되겠네. 꺼지세요, 장군. 공연히 시비 걸지 마시고."

"물음에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 시발. 진짜. 살다살다 별. 야!"


우당탕! 체스 판을 밀어 치워버린 여자가 조인의 가슴팍을 거칠게 떠밀었다. 


"남이 기껏 찾은 길을 망가트려 놓고 뻔뻔하게 그런 것을 물을 처지나 되는 줄 압니까?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왜 하필 유비였지?"

"그 사람만이 나를 알아봐 줬으니까. 나를 필요로 했으니까."

"주군 또한 널 필요로 했음에도."

"말은 바로 하셔야지. 그게 필요해서 부른 겁니까? 유비가 가지기엔 배 아픈 패여서 부른 거지? 책사고 장군이고 차고 넘치는 분이 제가 왜 필요했겠습니까? 보세요, 정말로 필요했다면 이렇게 한가하게 사는 꼴을 두고 보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었어야지."


왜? 뜻을 관철하지 못한 수많은 충신들처럼 여자가 곡기를 끊고 죽어버리지 않아서? 아니면 죽기 위해 애쓰지 않아서? 그것은 참된 신하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니다. 조자효는 불쾌했다. 무엇 때문에?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순간이 현재의 여자 탓으로 더럽혀지는 것이 불쾌했다. 또다시 속삭였다. 


"그럴 거라면 죽었어야지……."

"화풀이하지 마세요, 장군."

"왜 죽지 않지?"

"죽었으면 좋겠나?"


서서는 사납게 웃으며 조인의 멱을 끌어당겼다. 여자의 녹색 눈동자는 총기로 번들거렸다. 아니다. 저것은 광기다. 광기에 가까운 것이다. 절벽 아래 떨어져 내린 이들이 마지막으로 내보이는 안간힘이나 다름없다. 이미 죽은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것은 이미 죽었다. 신념이 꺾인 순간 죽어 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껍데기, 오직 껍데기뿐인 것이다……. 


"그럼 나를 죽이시오, 장군. 나를 죽여 보라고."

"……."

"나를 죽이고 이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란 말이야!"


벼락처럼 소리쳤다. 그리고 조인은 서서의 목을 쥐었다. 여자는 보란 듯이 웃었다. 아, 그 웃음만큼은 달라진 것이 없군그래. 


그러니 네가 죽었어야지. 영영 네놈을 기묘한 여름밤으로만 기억할 수 있게.

그러나 영영 뱉어지지 않을 말이기도 했다. 결국 조자효는 서원직을 죽이지 못했다. 그뿐으로 남을 이야기다. 정말이지, 그뿐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여자 또한 그 여름밤을 아주 오래 기억했다는 사실이다. 왜 어떤 추억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아름다울 수 없을까?

답을 찾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기에, 그 책사와 장군은 그저 침묵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달을 볼 수 없을 모양이었다. 그리고 별 또한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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