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보스 10

W. 마음에 닿았네




   YK의 회장이 별세했다는 기사는 그 다음날 아침 특보로 기사화되었다. 세상이 떠들썩해진 것도 잠시 그의 죽음에 YK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무너질 거라 생각했던 체계는 오히려 굳건해졌다. MOLLO 내에서는 강 다니엘을 차기 보스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성운이 그를 보스로 내세운다고 해도 반대할만한 이들은 없었다. 자신을 추앙하는 놈들을 제외하면.


“회장님이 바라신대로 되고 있네요.”

“그러게.”


   성운은 해외에서 날라 온 편지를 다시 펼쳐보았다. 오래전부터 미뤄왔던 일이었다. 눈에 밟히는 누군가 때문에 최대한 미루고 미뤘지만 이젠 더 이상의 핑계거리가 없었다.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심각한 성운의 미간에 진영이 보나마나 그 일 때문일 거라 확신했다.


“사과는 했어요?”

“.........해야지.”

“큰 형님, 이렇게 맘 약해진 거 처음 보네요.”


   진영이 키가 작은데다가 몸집이 평균 사이즈임에도 불구하고 배로 커 보였던 성운이 작아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한편으론 이 사람을 작아보이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지성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도 했다.


“단 한 번도 어려웠던 적 없는데. 어렵네.”

“형님일이 형 일인 것처럼 생각해줬어야 줘.”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네.”


소소하게 터뜨린 웃음에 사과라는 걸 하러 가야겠구나, 다짐하는데 관린이 헐떡이며 성운의 사무실을 열고 들어왔다.


“하 형,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형님들이 형 괴롭혀.”


   관린이 지칭하는 형 호칭은 지성이었다. 관린이 처음 지성과 만났을 때 그는 싸우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형님이 아니라 형, 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형이라는 부르는 범위가 늘어났는데 그건 관린, 스스로가 가깝다고 여기거나 아낀다는 증표가 되기도 했다.


“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네.”


   트집이라 하긴 힘든 딴죽을 건 놈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걔 중에는 이 조직에 처음부터 몸담았던 놈도 있고 3-4년은 있었던 놈도 있고 이제 들어온 지 반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놈도 있었다. 공통점이라고는 강한 자에 대한 큰 동경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지성은 지금 상황에 대한 이유를 찾으라 하면 그 마음이 백 퍼 작용하고 있다고 확답할 수 있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성운을 따라 들어온 놈들이 대다수였고 아직 미흡하지만 싸움터에서 확실한 자기 어필과 실력을 갖춘 강 다니엘로 이어지며 보스가 없는 상황에서도 건재한 이 완벽한 조직에 불만인 건 윤지성 하나라는 것이었다.


“멍청한 애들 머리 굴리는 건 전개가 뻔해서 재미가 없는데.”


   멍청하다는 표현에 발끈한 놈들의 표정이 꿈틀댔다. 위협은 수도 없이 당해봤기에 무섭지도 않았다. 자신을 가지고 샌드백처럼 패기라도 할 건가 생각했던 지성은 후한이 두렵지도 않나 생각했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기라도 할 건가, 아! 그러기엔 여긴 MOLLO 구역인데, 등의 생각을 하며 그들 중 대표라 할 수 있는 놈이 구구절절 떠드는 것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됐고, 내가 니네들한테 질 거 같진 않은데- 머릿수만 빼면.”

“하- 단물만 빨아먹으면서 호위호식하고 있는 주제에 무슨 자신감인지-”

“툭 치면 넘어갈 거 같이 생겨가지고는 박쥐마냥 목숨 부지하고 있으면서-”

“어중간하게 알고 설쳐대는 것들이 가장 짜증나긴 하는데.”


   박쥐, 세이렌, 바이러스 같은 단어들은 회사의 사정을 자세하게 모르는 아랫놈들이 지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지성은 MOLLO와 YK의 균형을 유지하고 양쪽의 정당성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걸 모르는 놈들은 지성이 언제든 MOLLO나 회사를 팔아 버릴 수 있는 박쥐로 여기거나 보스나 성운 옆에서 바다의 세이렌마냥 홀리며 제가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젠 차기 보스가 될 강 다니엘 곁에서 그 짓을 하고 있으니 눈엣가시였으며 무슨 백신 없는 바이러스처럼 여기곤 했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싫고 그럴 이유도 없고 이런 고삐 풀린 것들을 제압하는 건 우진이 할 일이었다.


“무슨 온실 속의 화초마냥 입 털어대는데 직접 확인해봐.”


   어떤 뒤담화든 지성에게 타격을 주진 못했다. 하도 들어왔던 것들이라 매일 아침 듣는 뉴스 앵커의 멘트 같았다. 그가 불만인 건 자신을 마냥 약한 놈으로 본다는 점이었다. 지성이 그들 중 한 놈을 집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금방 도발당한 녀석이 고릴라 같은 몸집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걸어 나왔다. 주먹이 빨랐지만 우진보다 느렸다. 몸집이 커 동작도 컸지만 잘못 파고들다간 붙잡힐 게 분명했다. 틈은 만드는 거라 팔 하나 내어주면서 호신용 무기로 경동맥을 가볍게 찔렀다.


“죽었으니 저쪽에 찌그러져 있어.”


   피가 맺힐 정도였지만 거기까지였다. 절묘하게 깊이를 조절한 셈이다. 죽음이 코앞에 마주한 것에 고릴라는 식은땀을 흘렸다. 지성은 팔이 금 간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다음을 불렀다. 고릴라가 그들 사이에서 꽤 실력자였는지 주춤거리는 분위기 속에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날선 무기를 손에 쥐고 다가왔다. 칼을 갓 잡아 본 아이처럼 휘젓는데 눈으로 쫒다가 금간 팔로 막아냈다. 깊고 날카로운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를 악 물며 발로 뻥 차 쓰러트리고는 다른 한 놈의 심장 부근으로 가진 무기를 찔러 넣었다. 피부의 겉 부분을 뚫고 들어오는 감각에 남자가 굳은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발밑에 깔린 남자는 지성의 팔에 박힌 제 칼과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에 생각했다. 잘못 건드렸다고.


“더 할 거야?”


   지성이 칼을 뽑아내며 물었다. 처음의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당황한 기류가 그들을 좀먹고 있었다. 망했다, 라는 눈빛들을 빠르게 주고받기 시작했다. 힘없는 어린아이, 혹은 귀하게 자란 공주님마냥 지켜지고 보호받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2대 1도 거뜬히 제압해버린 것에 패닉 상태였다. 지성이 싸움터에서 멀리서 관망하듯 있으며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진과 성운이 함부로 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지성의 싸움 방식에 있었다. 지성 스스로도 싸움 센스가 좋은 것도 아니고 체력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기를 잘 다루는 것도 아니었기에 선택한 방식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 한순간의 방심을 틈 타 적의 급소를 노려 제압하는 것인데 늘 몸에 상처를 만들어내니 성운과 우진은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버럭 화내가 일수였다.


“아직도 이런 놈들이 있네.”

“그러게 싹을 자를 게 아니라 뽑을 걸 그랬네.”

“혀....형님...!!”

“하성운이 아주 우습게 보였네.”


   성운은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열이 빠르게 머리끝에 몰린 감각에 피부가 천천히 무뎌져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다 바닥으로 팽개쳐 짓밟아서 우위에 서 있는 게 누군지 철저하게 가르쳐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의 등장만으로 안색이 창백해진 조직원들이 죽는다, 라는 비상등이 그들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려대 그 누구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다. 성운의 기백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움직이는 놈들은 다 죽었다고.


    여러 번 지성에 대한 불만이나 경고를 내비친 놈들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성운은 그런 소리들을 잡소리로 묵인 시켜왔다. 형제라고 말하기엔 적들의 귀에 잘못 들어가면 악용할 것 같았고 그냥 두면 이상한 소문이 부풀려져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지성이 그 선이 낫겠다 말했다. MOLLO의 명분. YK와의 다리. 그래서 큰 형님 하성운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로 있는.


“머리 박아!!!!”


   윤지성 하나 때문에 조직원들을 다 갈아 버리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기에 성운은 도깨비 같은 무시무시한 표정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군기를 바짝 잡았다. 그의 말에 한 치의 토라도 달다간 잡아먹힌다, 는 두려움과 무서움에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가 진영과 관린에게 잠시 맡기고 다급하게 부른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은 지성에게로 바로 향했다. 반 깁스를 하고 있는 팔을 보며 성운은 매우 속이 상했다.


“내가 너 싸우지 말라고 했지.”

“형, 그 잔소리는 제가 이미 했으니 다른 거해요.”


성운이 우진을 째려보았다. 우진은 겁내지 않고 씨익, 웃기만 했다.


“강이랑 왔으면 이런 일 안 당했을 건데 왜 혼자 왔어.”

“그것도 했어요.”

“넌 조용히 하고.”


성운이 으르렁 거렸다. 깨갱한 우진이 지성의 뒤로 얼굴을 숨겼다.


“이젠 그놈들이 나 안 얕보지 않겠어?”

“........팔 내줬으니 당연히 그래야지.”

“성운 형 무서워서 두 번 다시 안 덤비지.”

“오늘 같은 일이 또 안 일어난다는 보장 없잖아.”

“그 땐 꼬마보스가 알아서 해주겠지.”

“많이 든든한가 보네.”


우진이 병실에서부터 알아봤다며 혀를 끌끌, 찼다. 얄미운 눈초리라 지성이 우진에게 꿀밤을 먹였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맞아준 우진은 아프지 않은데도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왜 혼자 온 건데.”

“싸웠다고 보긴 그렇지만 응어리를 그냥 둘 순 없어서.”


   그렇게 심각하고 상처받은 얼굴로 우진과 성운이 굽히지 않으면 한 공간에 같이 있지 않을 것처럼 자리를 피해놓고는 세우던 자존심 곱게 접어 온 것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지성은 늘 그랬다. 자신들과의 문제에서 필요한 자존심을 세우다가도 말았다.


“우리 형 못 살겠다. 담부턴 안 그럴게. 내가 성운 형 감시할 거다.”


우진이 지성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아 허리를 둘러 안았다. “미안해, 진짜 잘못했어.” 지성이 우진의 어깨를 감싸며 당겨 안았다.


“내가 네들 앞에서 자존심 세우면 개다, 진짜.”

“후회할 말은 안 하는 게 나은데.”

“맞아요, 형 인생은 자존심으로 만들어졌잖아요.”


우진이 말을 해놓고 성운이 슬쩍 쥐는 주먹과 불룩 선 이마의 핏대에 움찔했다. 나, 한다면 한다. 성운의 중대한 결심에 우진은 못미더워 했고 지성이 배시시 웃었다.




*     *     *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집중하던 성운은 초조해하는 다니엘의 심정이 시야 밖에서부터 느껴져 의문을 품었다. 그렇다고 대번에 살갑게 굴며 감정을 위로할 사이좋은 관계가 아니었기에 일을 마무리하고 펜을 놓았다.


“알고 싶은 게 뭔데.”

“윤지성이요.”


두루뭉술한 말에 성운의 사고가 멈칫거렸다. 구체적으로 물어본 게 아니라서 얼굴을 쳐다보는데 다니엘의 얼굴이 근심이 가득해서 숨을 삼키다가 사례 걸릴 뻔한 성운이 헛기침을 여러 번 하며 이내 아! 했다.


“별일 아니야.”

“팔 불구가 됐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별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걔는 전장에 보내지 마라.”


   성운은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그가 말하는 바를 정확히 캐치해내려고 애썼다. 성운은 원숭이 같이 여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니던 다니엘의 처음을 기억하고는 많이 의젓해진 모습에 흐뭇해했다.  한편으로는 윤지성의 일로 말도 없이 찾아오는 것에 맘을 놓아도 되겠다 싶었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 곱씹어 볼만 한데 그런 과정이 없이 말부터 튀어나왔다.


“하- 이제 보니 강이 연애하고 있었구나?”

“여, 연- 애라뇨! 아닙니-”


   쨍그랑- 면역력이 없던 단어를 들은 것도 모자라 제 감정과 상태를 들킨 것에 화들짝 놀란 다니엘이 크게 당황했다. 말을 더듬고 허공에다 헛손질을 하는 것도 모자라 엉덩이를 들썩 들썩 거리는 게 처음 보는 모습이라 신선하긴 했지만 그가 MOLLO에서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 아니었으니 성운은 옆에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살기에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다니엘이 의도치 않게 똑바로 성운을 마주했다. 그 어떤 맹수보다 매서운 카리스마를 가진 성운의 분위기와 눈빛에 압도되어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 수용하겠다는 눈빛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하지 마라.”

“저라면 혼자 안 둡니다.”


뒤통수 거하게 맞은 성운이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어리둥절해진 다니엘이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민망해 했다. 몸을 앞으로 접어가며 포복절도를 하던 성운이 신기하게 웃음을 딱 멈추었다.


“걔 잘 부탁한다.”


   성질을 내더나 갑자기 온화해진 것에 흐름을 못 따라가던 다니엘이 당황한 마음을 숨겼다. 염라대왕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매서운 성운의 형제 한정의 다정한 표정에 다니엘은 2n년의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머리회전을 했다.


“큰 형님, 제가 이 자리까지 안 올라왔으면 윤지성 여전히 KOEL에 있는 겁니까?”

“왜 둬. 당장에 버렸지.”

“회장님의 뜻이셨습니까.”

“네가 생각만큼 잘 해줘서 많이 기특했다. 윤지성도 널 꽤나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았고.”


   그러니까 결론은 윤지성 하나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채찍질했다, 였다. 놀란 표정 못 감추고 입은 손으로 가리고 성운을 쳐다보는데 엄청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한편으론 어디 멀리 떠날 사람처럼 느껴져서 표정을 제가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정갈히 했다.


“회사 일은 많이 익숙해 졌어?”

“아, 네.”

“민현이가 많이 도와줘?”

“아직은 제가 도맡아서 할 수 없어서 도움 많이 받습니다.”

“대들보 하나로 지붕을 지탱할 순 없다. 여러 기둥이 함께 있기 때문에 굳건히 서 있는 거다.”


MOLLO는 그렇게 성장해 왔다, 고 연혁사를 말하는 성운을 보며 다니엘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닮았다. 마음가짐이, 자신의 자리가 주는 무게를 견뎌내고 하나보다는 전체를 보는 눈이, 개개인 보다는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생각하는 것이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똑 닮았다. 외동인 다니엘은 형제란 것은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성운이 다니엘 옆의 1인용 소파에 앉음과 동시에 레드블랙 머리색의 남자가 들어왔다.


“소개하지. 우리 조직 고문변호사 권현빈이다.”


소개를 받은 그는 업무용 미소를 지으며 다니엘에게 악수를 청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매력적인 저음이었다. 그는 다니엘의 맞은편에 앉아 일명 계약서라 불일만한 서류를 보여주며 서명을 요구했다. 그 종이의 이름은 임명장이었다.


“나는 해외 일에 신경 써야 되어서 앞으로 조직 일 신경 쓰기 힘들 거다.”

“그 말씀은...”

“네가 힘 써야 한다는 소리지.”

“아....”

“겁내진 마라. 아까도 말했다시피 혼자일 필요는 없으니까.”


   성운이 무의식에 굳게 꽉 쥔 다니엘의 주먹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 온기가 가장 처절했던 순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회장님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버지 다음으로 멋지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어느 순간의 다짐이 가슴을 세차게 흔들었다.


“법적인 문제는 앞으로 이 녀석과 상의해.”

“그 외에도 조직 일이라면 무엇이든 상의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딱딱하게 굴지 말고 많이 친해져. 자주 보고 자주 이야기하고 그래.”

“차차 친해지겠죠.”





*     *     *



“이름도 바꿔야 되는 거예요?”

“범죄 피해자의 경우에는 흔한 일이지만 김재환 씨가 원치 않으면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출근하자마자 황 본부장의 부름으로 본부장실로 간 재환은 이미 본부장과 대면하고 있던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는 예의상 입 꼬리만 살짝 끌어올려 웃었다. 앉으란 소리도 없었는데 재환은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남자는 김사무엘이라고 소개했다. 재환은 영화 속에서만 듣던 이야기라 잠자코 들고 있다가 던진 질문은 이름에 관해서였다.


“그럼 안 바꿀래요. 전 김재환 할래요.”

“그렇습니까.”


수긍의 표현이었다.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다만, 김재환 씨가 MOLLO의 일원이었던 과거가 모두 사라질 뿐입니다.”

“그거 달라지는 건데.”


서명을 하려던 재환의 손이 멈추었다. 김재환일 이유가 없다며 순박한 눈동자가 뚫어지게 사무엘을 쳐다보았다. 뱉은 말 외의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아서 사무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가수가 되고 싶은 거지, 연예인이 되고 싶은 건 아닌데요.”


재환이 양지로 나가는 길을 포기해버릴 것처럼 허탈하고 담담하게 말을 했다. “그게 그 소리 아닌가요?” 사무엘이 개구진 표정을 슬쩍 지으며 딴죽을 걸었다. 재환의 이상한 고집을 모르지 않는 민현이 눈치를 조금 살피다가 늘 재환에게 져주는 입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무엘에게 부탁했다.


“무리인 건 아는데 못하는 거 아니잖아? 얘가 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을까?”

“의미가 없지 않아요?”

“가셔도 될 것 같은데요.”


당찬 대꾸에 민현은 물론 사무엘도 당황하고 말았다. 체념의 미소를 지은 사무엘이 다른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에는 서명 해주셔야 합니다.”


신변 보호 승낙에 대한 내용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재환은 이 이야기가 아까 들은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김재환 씨 가수로서의 길은 아마존 강과 같아요. 거기엔 악어도 있고 물뱀도 있고 피라냐 떼들도 있죠. 그것들에게 위협을 당할 때 전폭적으로 보호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내 몸은 내가 잘 지키는데 그게 필요한 가요?”

“재환 씨 더 옛날 과거 들어서 아는데 잘 알지 않아요?”


말문이 막힐 리 없는 재환이 입술을 오물조물거리며 매우 당황해했다. 민현이 걱정스런 마음에 재환의 표정을 살폈다. 약간 창백한 얼굴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얼굴을 홰 돌려 민현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본부장님이세요? 민현이 손 사레를 치며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무엘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재환 쪽으로 밀어 넣으며 펜을 다시 쥐어주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이야기는 방송 심의 규정을 지켜서 거르는 걸로 하면 될 거 같네요.”


찝찝했지만 아무것도 지우지 않아도 되고 아무도 버리지 않아도 오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에 오리마냥 입술을 내밀고 서명 란에 사인을 했다.


“서명은 했는데 본부장님이 설명해주는 거죠?”

“저 있다고 격식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분 많이 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주어진 임무를 완료한 것에 생긋 웃는 사무엘이었다. 갑자기 보여주는 따뜻한 태도에 당황해하는 것도 잠시였다. 민현이 여러 가지 가정들을 감안해보고는 이상한 점을 물었다.


“내가 부탁했다고 이렇게까지 신경 써줄 놈이 아니잖아, 너.”

“그냥 넘어가시죠.”


사무엘이 다 식은 차를 마시며 다시 웃었다.


“앞으로의 회사 일은 전적으로 본부장님에게 갈 겁니다. 법적인 부분은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주시면 됩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사무엘은 다음에 올 때 카페인 없는 차를 달라고 요구하며 떠났다. 당돌한 요구에 재환이 그에 대해 물었다. YK 고문 변호사. 짤막하게 답했다. 재환이 회장님이나 이사님만 만날 수 있는 거 아니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민현은 사무엘의 말을 곱씹었다. 회사 일의 결정에 우선권을 준다는 말이 신경이 쓰였다. 분명 제가 짜놓은 시나리오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예상하고 있는 시기보다 빠르게 착착 이루어지고 있었다.


“능력이 좋은 가봐.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보통 해외로 스카웃되지 않아?”

“그럴 뻔했지.”

“근데 언제부터 생각했어? 가수 시켜주는 거.”

“너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기분 좋게 웃은 민현은 떠올렸다. 컴퓨터 화면 속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그로부터 몇 년 후, 상처투성이 얼굴로 관심 없는 사람들 앞에서 재롱 떨 듯 노래를 부르던 모습을 연이어 떠올렸다. 노래를 부를 때 환해지던 표정이 끝나자 불빛이 꺼지듯 어두워졌다. 그래서 민현은 방법을 모색해 재환을 빼내왔다. 이 당시 일어났던 조직 항쟁이 황민현의 요구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자신과 지성 형만 아는 사실이었다. 



“네 힘으로 올라가. 뒷백 같은 거 안 해 줄 거야.”

“그렇지만 든든한 지원군은 되어준다 이거지?”

“뜨기만 해 우리 회사가 주최하는 행사에 열심히 초청할 거니까.”

“우와- 거기까지 생각해놨어? 결정은 네가 아니라 위에서 내리는 거 아냐?”

“네가 올라갈 때 쯤, 나도 그냥 여기에 있진 않을 거니까.”



당찬 포부에 재환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멋짐의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황갈량의 천리안이 거기까지 닿았냐며 놀려댔다.









####

다음편은 에필로그입니다. (텀이 평소보다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대로 보내긴 저도 아쉬워서 불은 못 지르겠고 불씨라도 만들어보려고요.


늘 적고 싶었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뚜하뚜)


맘닿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