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포 주의. 

*엔드게임의 내용이....들어가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이라면 주의해주세요.

*영화 내용따윈 쌈싸먹는 개핵날조로 이루어질 글이 됩니다. 저는 개봉일 조조로 영화를 보았고 다시는 보지 않을 예정입니다.... 이제 기억도 잘 안납니다....











토르가 주저 없이 향한 곳은 지구의 대표자들이 사태 이후 설립한 국제기구였다. 인구의 증발로 일어난 혼란은 한 국가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나 큰 차원의 문제였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상상해 본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미스터리 소설 마니아라거나 공상에 잠긴 어린아이의 머릿속이 아니라, 이성적인 시선으로 대규모 실종사태를 예측해 본 사람이. 당연하게도 없었다. 이러한 국가적 재난에 앞장서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자들은 인류의 실종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정보다 3차 세계대전이나 핵전쟁을 대비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자가 몇십 배는 더 현실적인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세계는 난데없이 공상 과학 소설의 설정 같은 일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각국은 당장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전 지구적 국제기구를 부랴부랴 세웠다. 수뇌부가 남은 국가라면 모두가 이에 가입했고, 그렇지 않은 국가도 참가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그리하여 세계 대전과 냉전, 테러도 야기해내지 못한 통합이 이루어졌다. 세계 평화를 부르짖던 인권가들 혹은 정치가들이 살아있었다면 퍽이나 반길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다시없을 역사적인 결성 가운데에도 국가에 따라 힘과 발언권이 다름은 변함없었다. 미국과 와칸다가 상위국에 존재했음도 물론이다.




“나는 내 백성들의 무사 정착과 영토를 요구하는 바이요.”




미국 지부에 오색의 빛과 함께 나타난 느닷없는 신의 등장으로 긴급회의가 열렸다. 토르는 자리에 서 빼곡하게 들어찬 정부 인사들의 홀로그램을 하나하나 살폈다. 날카로운 시선이 감투만 썼을 뿐 평범한 인간들인 자들을 압도하며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다들 눈만 굴리며 신의 눈치를 보았다. 토르는 확신했다. 이 자리에 제대로 된 자는 없다. 그렇다면 뜻을 피력하기가 보다 쉬워진다. 



그러나 인간들도 가만히 넘어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러다가는 터무니없이 순순하게 우주인 -자칭 신- 의 요구를 들어주게 생겼어. 먼지가 되어 사라진 대통령을 대신해 그 자리에 오른 전 부대통령이자 현재의 미합중국 대통령이 헛기침을 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토르의 눈 또한 그에게로 날아가 박혔다. 예리한 푸른 빛은 실제로 직시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소름을 일으켰다. 그는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공포를 애써 무시하며 입을 뗐다.




“그러나… 이건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고-”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 같군.”




토르가 말을 자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모일 시간도 없이, 긴급호출을 받아 각자의 나라에서 홀로그램을 켠 이들은 그들의 등 뒤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었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은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존재가 호락호락하게 넘어올 존재가 아님을 파악했다. 그와 밀고 당기는 외교를 할 수가 없다는 것도. 



토르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진다. 창밖의 천둥소리와 조화된 그의 음성은…… 위압적이고, 공포스러우며, 거대했다. 




“이건 부탁이 아닐세. 명령… 이라고 하는 건 조금 그렇군. 그래, 내가 건네는 관대한 제안이라고 해 두지.”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토르는 느긋하게 저들의 답을 기다렸다. 아무리 머리를 굴린다 해도 저들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것이었다. 그리고 토르는 기꺼이,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몰아붙일 수 있었다.




“……요구하는 것이 무어라고?”



초조함을 참지 못한 누군가가 불쑥 물었다. 토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많지 않소. 약간의 땅과…… 자유. 그것이면 되오.”

“…….”

“그대들에게 금전적 지원을 바라는 것도 아니며, 강탈할 생각도 없소. 말했듯 나의 백성들은 민간인이 다이고, 혼란스러운 이 때 지구를 향해 칼을 겨누지도 않을 것이니. 겨눌 칼도 없지만.”

“…….”

“물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긴말하지 않을 것이오.”




꿀꺽. 아시아 대표 중 하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뒤였다. 이 천둥신이 바라는 것은 자신들에게 어떠한 부담이 되지 않았다. 원한다는 영토조차 그들과는 상관없는 먼 곳이 아니던가.



토르는 옆에 세워두었던 스톰 브레이커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빛이 반사되어 스톰 브레이커의 형형한 날이 번쩍이고, 더 많은 이들의 목울대가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할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토르는 아주 잘 알았다. 동등한 자들과 대화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고, 이쪽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두 번째 경우였다. 토르는 저들과 동등하게 조약을 맺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평화롭게 지구에 도달했다면 그리 했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동등한 조약이라면 저쪽이 내준 무언가에 응당한 무엇인가를 이쪽 또한 내놓아야 한다. 토르는 저들에게 내줄 것이 없었고 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저들의 두려움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외교와 화술에 능달하지는 않으나 무능하지도 않았다. 토르가 잠시 집중해 힘을 끌어올렸다.



이번에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모든 이들의 머리 위 전등이 한순간 꺼졌다가 켜졌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금 인간들에게 차올랐다. 우주적 존재에 의해 인구의 반 이상을 잃은 그들이었다. 눈앞의 이의 심기를 거스르게 했다가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그가 지구의 편을 들어 활동해왔다 해도 자신의 백성들보다 이쪽의 목숨을 중히 여기겠는가? 심지어 저들의 수명은 인간의 몇 백배이며 신체 능력도 상상 이상으로 월등하다 했다. 살기가 애꿎은 쪽으로 향하게 된다면…….



너무 오래 생각할 시간을 주어서도 안 되는 법이다. 토르는 덤덤하게, 그러나 짜증이 분명히 전해지도록 말의 길이와 높낮이를 조절했다.




“그럼, 그대들의 방식으로 결정을 내리겠소? 투표 말이오. 현명한 판단을 하리라 믿소.”




스톰 브레이커를 만지작거리는 손끝에 또렷하게 번개가 튀었다. 푸르고 밝으나 분명하게 화상으로 전해졌을 번개는 고민하던 이들의 결단을 재촉했다. 토르의 손가락이 스톰 브레이커 위에서 내려왔다. 충분했다. 힐끔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던 이들이 하나 둘 토르의 말에 찬성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맨 마지막으로 남은 이가 반쯤 죽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노르웨이 대표였다.




“좋네…… 그렇다면 노르웨이는 기꺼이…….”




토르가 낮게 웃었다. 천둥소리는 그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지는 듯했다. 전대미문의 천둥과 번개를 한 번 더 강조한 토르가 힘을 거두었다. 겁에 질린 인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토르는 짤막한 말로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아스가르드는 그대들의 협조를 기쁘게 받아들이겠소.”

 

 








“아무것도 없군요.”

“아무것도 없지.”



텅 빈 들판과 바다를 응시하며 토르와 발키리가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여기에 나라를 세우자고요?”

“함선에서 내가 분명 지구로 향하자 하지 않았나?”

“그건, 그랬죠.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으니까 말입니다. 발키리가 허탈하게 읊조렸다.



“저들에게 많은 것을 받아내서는 안 돼. 그들에게 우리는 낯선- 우주 밖의 존재에 불과하지. 지금은 더욱 더 그런 존재를 꺼릴 때고.”



토르가 지적했다.



“난민에 대한 호의인 척 해도, 자원과 물자를 더할수록 우리에게 관여하려 하겠지. 이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게 있나 궁리할 테고. 차라리 이렇게 관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도록 두는 것이 낫네.”

“그 말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백성들이 이 텅 빈 들판을 기쁘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는데요. 폐하.”



발키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터는 아주 잘 고르셨네요. 아무것도 없어서 뭘 세워도 되긴 되겠어요. 조소하며 흘린 말에 토르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렇겠지, 아버지가 봐 둔 터인데. 발키리가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나중에 말해주지.”

“……됐습니다.”




나중이라는 말 뒤로 제대로 된 설명이 따라온 적이 없다. 발키리는 헛된 반문을 집어치우고 푸른 천처럼 깔려 너울대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아스가르드의 바다와 끝을 연상시켰다. 그 광활하고 아름다운 바다와 이곳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저 너머에 우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생각하고 말았다. 분명 조각나고 타오르는 아스가르드를 목격했음에도, 고향의 증거가 모조리 사라지지 않다면 어떨는지, 그렇다면 지친 백성들에게도 희망이 주어지지 않을는지 하는 생각이 솟는 거였다.



그러나 그들의 고향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소실되는 것을 목격했으며, 저 바다의 짙푸른 색이 아스가르드의 색과 비슷하다 한들 그 위의 하늘은 명백하게 고향의 것과 차이가 났다. 그녀의 짧고도 허망한 생각은 바로 부스러졌다. 다 해져 얼룩덜룩하게 물든 넝마 같은 회색빛 하늘이 음울하게 머리 위에서 운다. 흐리고, 모두의 얼굴에서 생기를 앗아가는 그런 하늘.




“…….”




심기가 불편한 그녀의 왕 탓이었다. 발키리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왕의 상처를 섣부르게 건드릴 작정은 없었다. 헬라와의 전투로 모든 것을 잃고 사아카르에 떨어진 자신에게 혹 누군가가 살짝이라도 이를 언급했다면…… 그자는 목과 몸이 분리되어 시체가 되었으리라. 발키리는 그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것이 죽고 사라져 절망이 잠식할 때의 심정을.




피난선의 항해가 이어지는 동안 토르는 나라와 백성을 잃은 왕이라기에는 제법 멀쩡해 보였다. 발키리는 생긴 대로 그의 신경줄이 아주 무디다고만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차츰 강인한 정신력 말고도 다른 것이 토르를 진정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구로 가자며 호기롭게 외치던 것과는 다르게, 때때로 토르는 밤에 -우주 한가운데에서 밤과 낮을 구분짓는 것이 우습기는 했으나- 잠들지 못하고 그의 작은 왕좌가 놓인 자리에서 드넓은 우주를 응시하고는 했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지 눈 아래 그늘을 달고 돌아다닐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토르의 곁에 붙어 그의 어깨나 등을 쓰다듬고 도닥이는 것이 그, 로키였다.



두 사람이 어떤 유년시절을 보냈는지 발키리는 모른다. 하지만 헤임달에게 넌지시 물은 바에 의하면 그들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고 아주 아주 복잡한 듯했다.



-라키가 여덟 살 때 뱀으로 변했다가 폐하를 찔렀다며? 진짜야?


헤임달은 눈도 꿈적 않고 대답했다.


-아, 물론 그랬습니다. 다만 폐하 역시 여덟 살이었던 왕제님을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린 적이 있지요.



발키리는 뜨악한 얼굴로 때마침 복도를 지나가는, 방금 들은 말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게 딱 달라붙어 저들끼리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게? 


헤임달이 덧붙였다. 


-품고 계신 의문의 답이 단순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발키리가 의자에 푹 꺼지듯 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그래. 속을 읽힌 기분에 조금 빈정이 상했다. 저 형제가 대체 무슨 관계인지 알아내기 위해 떠보던 것이었는데. 빙빙 돌린 질문의 어디에서 속내를 간파당한 것인지. 그녀는 괜히 세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헤임달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그제야 발키리가 권유했던 잔을 든다. 뭐, 나쁜 건 아닌 것처럼 보이니까 됐나. 발키리는 생각하던 것을 그만두고 새 술을 땄다. 



토르와 로키는 내내 같은 방을 썼다. 좁은 피난선의 구역을 나누고 방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이 공동 생활을 해야했는데, 그나마 토르는 왕이라는 이름으로 독방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들은 토르는 만고의 진리를 고하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럼 그와 로키가 같은 방을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그 방에는 침대가 하나였다.



다 큰 형제가 한 침대를 써…? 발키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토르와 그의 옆에 앉은 로키를 흘겼다. 시선을 눈치 챈 로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그녀를 비웃는 표정을 짓더니 토르의 귀에 입을 대고 무언가를 속닥거린다. 속삭임을 들은 토르는 풀어진 얼굴로 로키를 밀어내며 웃었다. 익숙한 듯 보이는 그 교환은 아주…… 그래, 수상했다.



그러다 발키리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언제였던가. 뺀질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하는 왕제의 뒷목을 잡고 잘난 마법으로 엔진 문제나 해결해 보라고 끌고 갈 때였던가. 저보다 키는 크지만 영 힘없는 몸을 질질 끌고가던 발키리는 잡아 늘어난 로키의 옷 아래로 커다랗게 잇자국이 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로키와 같은 방을 쓰는 것은 폐하였고 로키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방에서 나오는 날이 거의 없었으며 두 사람은 잠드는 시간만큼은 꼭 지켰다. 그렇다는 것은……



이번에도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챈 로키가 킥킥 웃었다.



-드디어 알았어?

-두 사람, 형제잖아?

-오, 토르에게만 향하는 경어라니, 왕과 왕제를 이렇게나 차별해서야.

-대답해.



로키는 샐쭉하게 대답했다.



-입양됐어. 여기에는 아주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그 뒤로 로키는 거리낌 없이 대놓고 행동했다. 은근하게 토르의 턱선을 매만진다던가, 식사를 하다 제 몫을 그에게 먹여준다던가, 눈꼴이 시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대피시켜야 하네.

-압니다. 하지만 어떻게요?

-코모도어를 써.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다면 더 많은 백성을 거기에 태울 수 있겠지. 어떻게든 지구로 갈 테니, 거기를 목적지로 삼아.



로키가 제안했다. 발키리는 딱딱하게 굳은 토르가 로키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을 보았다. 떨리는 입술이 여기까지는 들리지 않을 작은 속삭임을 전한다. 로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남을 거야. 왕의 동생이자 백성들의 구세주라면 응당 이렇게 행동해야지. 그렇지? 토르?



그때 포격이 더해지며 피난선이 크게 흔들렸다. 대화는 끝이었다. 발키리는 어떻게든 멀쩡한 구역의 백성들을 모아 코모도어로 인솔했고, 급히 문을 닫았다. 맨 마지막으로 코모도어에 올라탔기에 그녀는 엉망이 된 피난선 내부를 조금 더 길게 눈에 담을 수 있었는데, 문이 닫히는 틈새로 토르가 로키의 어깨를 꽉 붙잡는 것이 보였다. 로키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토르의 손 위에 놓이는 것도.



그리고 토르에게 물었을 때 그는 남은 이가 자신뿐이라 했다. 그리 말하는 토르의 눈은 고통에 차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발키리는 왕의 심정을, 연인을 잃은 심정을 지독하게 이해했다. 자신을 감싸고 죽은 연인을 지켜보아야만 하던 심정은 사무치도록 더.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창백한 안색을 한 왕에게 애도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가 현실을 부정한다거나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않기만을 여신들께 빌 뿐이었다.



최소한 토르가 자신이 왕이라는 것과 이에 따른 책임을 잊으려 하지는 않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았다는 것도. 폭정을 일삼는다거나 패악을 부릴 것 같지는 않다. 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쪽에서 나서서 두들겨 패 줄 것이지만.



‘대신 설마, 혼자 술을 퍼마신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묘한 감정에 발키리가 콧잔등을 찡긋했다. 그리고 바람이 간질이는 코를 문지르며 옆을 살폈다. 괜한 감상에 젖은 건 이쪽만이 아닌 모양이다. 토르도 내내 목석처럼 앞만 바라보고 있다. 못 보던 새 새로 생긴 커다란 무기를 단단히 쥐고. 스톰 브레이커라 했던가, 발키리는 왕의 힘이 넘실대는 도끼를 훔쳐보았다. 바이프로스트까지 불러내는 무기라니. 어쩌면 토르는 선왕보다도 강력한 왕이 될 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주 밖을 나서기 위해 길게 여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행이었다. 지구와 다른 세계는 몹시도 멀었으니까. 




“…….”

“…….”




이대로 어색한 침묵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은데. 발키리는 무어라도 말을 꺼내기로 했다. 그녀가 어두운 눈으로 들판을 바라보는 토르에게 질문했다.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땅과 자유만 주어진 거라면, 당장에 생활은 어떻게 하죠?”


바람이 불어 토르의 옷이 흩날렸다. 품이 큰 후드의 끝자락이 일렁거린다. 토르가 그녀를 돌아보며 답했다.


“지원을 요청해야지.”

“흐음?”


발키리가 미심쩍게 코를 울렸다. 토르의 입가로 마른 웃음이 희미하게 걸렸다.


“그나마 나은 이들에게.”





새 아스가르드가 될 곳을 천천히 다시 훑어 본 토르는 발키리와 함께 백성들이 몸을 추스르고 있을 어벤져스 기지로 돌아왔다. 찰나의 시간을 공유한 것에 불과하나 토르는 이곳의 이들이 지구의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올바른 이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저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것도. 토르는 그동안 자신도 어벤져스라는 이름에 속해 지구의 평화를 위해 힘썼던 것을 짚으며 그들에게 호소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네들의 요청을 하나 들어주겠네. 무엇이든.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그리고 토르의 예상대로, 지구의 영웅들은 고민하기는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가 무리가 되지 않는 것을 부탁해서이기도 했다. 토르는 아주 기본적이며 전혀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을 것만 제시해 부탁했던 것이다. 목재라던가, 벽돌이라던가 하는 것들. 도리어 반대편에서 정말 그것만으로 되겠냐며 식재료와 더한 것을 왕창 안겨주기까지 했다. 



토르는 거듭 감사를 표하며 그들이 건네는 물건을 받았고, 백성들이 들판과 바닷가에 집을 세우고 쉴 곳을 마련하는 것을 도왔다. 엉성하게 박힌 나무 울타리와 작은 집들이 하나 둘 솟아났고, 민가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토르의 몫인- 오두막이 세워졌다. 발키리가 머쓱한 듯 중얼거렸다. 




“…왕의 처소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좀, 소박하군요.”


토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충분하지. 심려하지 말게.”

“……충분치도 않고, 심려도 됩니다만.”


토르는 미간을 좁히며 진지하게 받아치는 발키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발키리가 거푸 한숨을 내쉰다. 


“폐하, 당장 몇 달은 버틸 수 있겠지만, 식량도 땔감도 그냥 모조리 다 부족하다는 거 아시죠?”

“알고 있네.”



토르의 목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아직도 해결해야 하는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뜨겁게 치솟으려던 감정을 간신히 억제한 토르는 잠시 눈을 감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기분을 읽어냈는지 발키리가 다른 곳을 둘러보겠다 보고하고는 곁을 떠났다. 토르는 혼자가 되었다.



생각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필요한 것이 많았다. 식량은 일차원적인 문제였다. 아스가르드의 전부가 사라졌다 보아도 좋았다. 서적 하나 건진 것이 없으니, 시간이 그들을 통과하면 영화롭던 그들의 문화와 역사가 신기루처럼 꺼질지도 몰랐다. 토르가 숨을 바투 뱉었다. 그는 왕이었고, 나라가 쇠락하게 둘 수 없었다. 부흥과 융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과거를 기억하고 계승시키는 것은 해야했다.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도, 그들이 위기에 빠졌다는 것도 빠짐없이 기록해야 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또, 로키가 떠올라서였다. 



-남은 것이 없으니 완전히 나라를 새롭게 세우는 셈이 되겠네.

-그렇지. 하지만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우리, 흠? 자신만만하시군.

-물론.



토르는 로키의 귓등에 입맞추며 그의 맨 어깨를 쓰다듬었다. 간지러워. 툴툴거리던 로키가 길게 숨을 끌었다.



-형은 좋은 왕이 되겠지. 

-왜, 아버지로 변한 채 통치하던 것이 그리우냐?

-아니, 아니야. 이젠 관심없어.



로키가 토르와 마주 보도록 몸을 돌렸다. 직전까지의 정사로 울긋불긋한 흔적이 새겨진 몸이 얇은 담요 아래에서 가까워졌고, 거짓없이 애정이 담긴 녹색 눈동자가 토르를 보았다. 토르. 로키가 그를 불렀다. 부푼 입술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토르. 로키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두 번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고 제 얼굴만 뚫어지게 보는 왕을 향해 웃으며 그의 안대를 쓰다듬는 것이다. 



-이제 정말로 그를 닮게 되었군. 

-로키.

-오딘도 분명 훌륭한 왕이었지만. 그래도 형이 더 나을 거야. 적어도 형은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모두를 속이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 거짓말은 늘 형보다는 나에게 속한 것이었잖아, 그렇지?



대수롭지 않은 평상시의 어조 속, 그 속에 감추어진 떨림을 토르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동생이 무엇을 생각하며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았다. 로키의 씁쓸한 말투가 토르의 가슴 언저리를 아릿하게 베었다. 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그래. 그러하지 않으마. 



토르가 로키의 손을 끌어내려 입맞추었다. 로키의 서늘한 체온을 녹이는 것이 자신이어서, 자신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회상이 끝나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온 토르는 생각보다도 안이 좁다는 것을 파악했고, 생각보다도 지낼만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나헤임과의 전쟁 도중 사용하던 막사는 이보다 더 끔찍했다. 이 정도면 호사스러웠다. 토르가 고개를 돌려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아직 꾸며지지 않은 오두막 안에는 가구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텅 빈,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만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를 압사시킬 것 같다.


토르는 이곳이 제게 주어진 감옥이라 생각했다.


그가 천천히, 한쪽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폐부 깊이 숨을 들이켜 꿉꿉하고 눅눅한 공기를 몸 가득 채웠다. 눈꺼풀이 무겁게 닫혔다. 땅과 자유를 얻어내고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동안 토르는 한시도 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잡다한 것마저 검토했고 나서서 주도했으며 모든 일에 참여했다. 곁에 선 발키리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져 갔으나 무시했다. 그러던 그에게 비로소 명상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거였다. 좋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괴로운 기억만이 떠올라 그를 괴롭게 했으니. 방금 떠올렸던 기억이 그러하듯이. 



슬프지만 찬란한 기억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토르의 사고는 빠르게 감겼다. 심장을 옥죄이는 절망과 재를 뒤집어쓴 듯 색을 잃은 기억만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눈을 깜빡이자 좁은 오두막에 니다벨리르로 향하던 포드가 덧씌워졌다. 로켓과 대화하다 눈물을 떨어뜨렸었지. 더이상 잃을 게 뭐가 있겠나? 그리 말하는 순간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가 토르를 짓눌렀고 응결된 슬픔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닦으며 그는 다시금 복수를 다짐했다. 복수를 마무리할 때까지 나약해지지 말자 스스로를 채근했다. 



그리고 지금, 토르는 쏟아지는 기억에 파묻혔다. 그를 익사시킬 것처럼 밀려오는 기억에는 빠짐없이 로키가 있었다. 그의 모든 시간에 로키가 물들어 있었다. 토르의 뺨에 물길이 생겼다. 아무도 없는 어둑한 집. 춥고 어두침침하고 누추한 공간에서 토르는 이곳에 없는, 죽어버린 연인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가 나약하다는 증거였고, 실패했다는 증거였으며, 패배자라는 증거였다. 물에 젖은 나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미 눅눅한 나무 바닥에 동그란 물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로키는 늘 그에게 감상적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으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이토록 감상적으로 만드는 인물은 자신뿐임을. 토르는 감정에 정직한 사람이었다. 로키를 향한 감정에, 그를 향한 사랑에.



-토르, 사랑해. 



감정이 너울치며 밀려왔고, 토르는 속절없이 이에 잠식당했다. 그는 니다벨리르로 향하던 길 이래 처음으로 울었다. 목놓아 부르짖는 오열은 아니었다. 눈을 부릅뜨고 쏟아지는 눈물만을 내보내는 소리없는 울음이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처절했고, 더 토르를 흔들었다.


신의 감정이 비를 불렀다. 빗물이 창을 때렸다. 그러나 토르에게는 유리를 부술 듯 뒤흔드는 빗소리보다 그의 턱에서 떨어져 바닥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가 크게 들렸다. 눈물은 그치지 않았고, 그는 천천히 양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침내 억누르지 못한 낮은 흐느낌이 오두막의 정적을 깨뜨렸다. 



새 아스가르드에는 제법 오래 비가 내렸다. 














다음편부터 본격날조와 행복회로가 가동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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