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천명은 당신의 양심으로서, 당신을 지키는 것.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천명으로 살아왔다. 내 삶의 이유였고, 내 전부였다. 내 삶에 내가 없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당신이 있어서. 내가 없는 내 삶은 당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나는 행복했었다.


그래, 그랬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이가 잠자고 있는 작은 무덤을 끌어안았다. 흙냄새가 파고 들어오는 게 그리운 과거가 느껴지는 것 같아 잠시동안 그러고 있었다. 흙만 둥글게 쌓인 모습이 싫어 하난이 힘을 끌어와 작은 무덤과 그 주위를 풀로 무성하게 덮었다. 흙냄새만 나던 공간이 곧 풀 내음으로 가득 찼다.


솨아-

바람이 불어 하난의 주위에 있던 풀 내음을 널리 퍼트렸다. 하난은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을 느끼고 있다가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무덤에 자라난 풀을 가만히 쓸었었다. 그리고 뒤돌아 몇 걸음 걸어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난이 없어진 장소엔 무성한 풀과 무덤 위에 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그 날 이후로 하난은 이상해져갔다. 잔소리가 줄어들고, 명령에 고분고분 따라서 처음에는 드디어 자신의 말을 듣는가 싶었는데 점점 정도가 심해졌다. 최근에는 잔소리는커녕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 일이 거의 없고 명령을 내리면 작은 대답 정도가 전부였다. 뿐만 아니라 상소문과 정치적 일을 처리하던 하난이 돌연 일을 놓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제대로 일을 처리하던 이가 없으니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져 갔다.

신룡이 손을 들어 하난을 소환했다. 사실 백성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밤새 자신을 괴롭히는 건 눈 앞의 난초였다. 소환된 하난이 텅 빈 눈으로 서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게 괴로웠다. 늘 자신만 보던 눈은 이제 없었다.


“또 풀 향이구나.”

최근 들어 소환된 하난이에겐 풀 향이 진하게 났다. 또 산에서 앉아있다가 온 거겠지. 멍한 표정으로 서있다 신룡의 목소리를 듣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난이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

고개만 숙이며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하난에 신룡은 더 이상 화내지 못했다. 신룡은 점점 힘없이 말라가는 하난을 보고 목이 타는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소리 지르고, 툴툴거리고, 그리고 꽤나 잘 웃던 과거의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무엇보다 신룡 자신과, 신룡이 관련된 일에만 시선을 주던 하난이 더 이상 자신을 눈에 담지 않고, 궁에서 벗어난 자연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불안했다. 그 모습이 궁과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럴 순 없는데. 자신과 하난은 천명으로 이어진 존재다.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젠 자신과 하난 사이에는 ‘천명’ 이외에 연결고리는 없었다. 말 그대로 천명만이 아슬아슬하게 연결하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하난은…….


아.

자신이 과거 하난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내려 했다.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이제야 그리워하는 게 꼭 자신이 후회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감히. 내가.

얼마전까진 그렇게나 귀찮아했으면서. 지워지지 않는 생각에 애써 생각을 돌리려 위태롭게 서있는 하난에게 물었다. 그 순간에도 하난의 마른 몸이 보기 싫어 인상을 썼다. 왜, 자꾸 말라가는 것인지.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냐.”

“산에 다녀왔습니다.”

물은 것에만 대답하고 입을 다무는 하난에 신룡도 입을 다물었다. 사실 정말로 그것을 궁금해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하난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난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신룡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난이 죽은 아이에 무덤에 간 걸 알고 있고, 아이의 무덤에 가 있는 하난을 위해 선선한 바람을 보낸 것도 자신이었다.


텅 빈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렇게도 열망 가득한 눈으로 나를 봐왔으면서.


거기에다 요즘에는 난초 궁에서 ‘신룡님.’ 하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깊은 밤만 되면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소리가.

들을 수 있다면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까지 들리는 나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지, 혹여 누구에게 들킬까 작게 속삭이듯 내 이름을 부르는 하난은 퍽이나 순수했었다.

정작 내 앞에선 숨 킨다고 ‘폐하.’라고 하는 게 얼마나 어이없던지. 그러면 밤중에 그렇게 애타게 부르지 말 것을.


과거를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은 자신을 모른 채 신룡이 말했다.

“요즘에는 난초 궁이 조용하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었는데.”

“…….”

“왜 정작 내 앞에선 부르지 않는 것이냐? ‘신룡님.’이라고.”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난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짧게 흔들린 것을 보고 신룡이 웃음을 지었다. 며칠 만에 보는 하난이의 제대로된 반응이었다.


“……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모르는 것은 없으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것도 아시겠네요.”


무엇을 말이냐?라고 말하려 했던 신룡이 이어지는 하난의 말에 웃던 얼굴을 굳히며 이를 물었다.



“다시는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을, 말입니다.”


“…….”


“이젠 숨어서도, 폐하의 앞에서도, 다시는 부르지 않을 이름입니다.”


다시는. 그 말에 이번엔 신룡의 눈이 흔들렸다.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자신의 이름을 닳도록 속삭이고, 속삭이던 난초는 이제 없다? 다시는 자신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애타게 자신을 찾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고? 그럴 리가 없다. 네가 얼마나 나를 원하는지는 내가, 알고 있는데. 그런데....



‘세상에 돌이킬 수 있는 일만이 있는 줄 아십니까.’

‘반드시 처절하게 후회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어째서 지금, 네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지.

정신을 차리고 너를 똑바로 봤을 때야 알 수 있었다. 나를 향한 연모의 감정은 이젠 한 톨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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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돌이킬 수 있는 일만이 있는 줄 아십니까.반드시 처절하게 후회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어떤 분이 연재하는 텀에 대해 질문 주셨는데 평상시에는 그냥 살다가.. 하트♡가 30 가까이 되면 '아! 써야겠구나.. '하면서ㅋㅋ 그때부터 틈틈이 적어놓은 글을 수정해서 올립니다ㅎㅎ 음.. 그런데 3월달부터는 많이 바빠질 것 같아요ㅠㅠ 지금으로썬 3월 전에 한 편 더 쓰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부족한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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