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난 운이 사는 걸 동수에게 좀 보여주고싶었을 뿌니고...

 

 

 

 

 

다시 만난 그날부터, 널 보는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오늘까지.

 

네 마음 속으로 한발한발 걸어 갈수록, 발이 잡아당기는 진흙탕에 빠지는 기분.

질척거리고, 어둡고, 우울하고, 비명보다 무서운 침묵속으로 한 걸음씩 끌려가는 느낌.

너와 재회하고 다시흘러가기 시작한 나의 시간. 다시금 떨어지기 시작하는 모래시계의 별가루들.

몇개의 달이 이지러지고 채워지던 그 기간조차도 나는 벌써 지옥으로라도 도망가고 싶을만큼 그렇게나 괴로운데. 숨이 막히는데.

 

그 긴 시간동안 그저 그 속에서 홀로 서있었을 너는 도대체 어떻게 버텨왔던거니. 응?


 

텅 빈 방안. 동수는 오롯히 혼자 남은 침묵 속에서 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떴다.

침실이 따로 달린 넓은 방안이다. 지금껏 지나온 어둡고 화려한 흑사초롱의 분위기와는 달리, 평온함이 있었다.

청나라풍이 섞인 방안에는 대체로 입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네 개의 의자가 달린 동그란 탁자가 창가에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소용돌이모양의 받침대 위에 같은 모양의 청자 호롱 세개가 한쌍을 이룬 등잔이 올려져 있었다.

 

소박한 나무결을 살렸으나 아름다운 꽃모양으로 조각된 창살로 장식된 창은 미닫이였다. 

창이 없는 벽에는 아래부분이 문갑이 딸린 서가로 들이차 있고, 적지 않으나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닌 정도의 책들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부분부분 서가 선반에 아무것도 올리지 않은 여백을 두어 갑갑하지 않게 서가를 정리해 두었고, 오른쪽 아랫칸에는 다도 도구를 담은 쟁반이, 왼쪽에는 지필묵을 담은 상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쓸모없는 장식품 같은 것은 없고, 모두 다 쓰임있는 것들 뿐이다. 어린아이가 살고 있는 방안 답지 않은 질박한 방안이나,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무엇보다 은은하게 배어있는 운의 꽃향기가, 이곳이 운이 머무는 처소임을 절실하게 느끼게 했다.


'흑사초롱 안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들고 조용한 곳입니다.'


운이 인주로써 누리는 유일한 사치인듯 구향이 그리 조용히 말해주었다.


어두운 곳을 싫어하는 운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같은 유난히 밝을 커다란 등잔과, 나머지 세개와 달리 유난히 높아서 아이가 앉으면 딱 맞을 것같은 의자가 동수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안이나, 아무렇게나 열어본 문갑 안에는 아이가 좋아할법한 장난감이나 그림책 같은 것이 들어있다. 이 방의 또하나의 주인의 것이다. 한결같이 귀엽다. 처음보는 아이의 물건이 생소한 동수는 괜히 슬쩍 손가락으로 건드려보았다. 아이의 뺨을 만지는 기분이 든다. 

 

반대편 벽은 침실로 들어서는 문이었다. 문갑을 닫고 반대편으로 돌아온 동수는 머뭇거리다가 침실문을 열었다.

바깥보다 훨씬 작은 공간이되,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끼게 하는 방안이었다. 흑사초롱에 들어와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다. 

마치 운 내면 자체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그는 괜히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 보았다.

 

제곁에 있었던 십년이 한결같이 스스로의 진실에 침묵하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 곳은 오롯히 운의 속내 같은 방안이다.

장용위나 다림방에서와 달리 이안에서는 운의 내음이 짙었다. 방안 곳곳에 정향꽃과 옥잠화의 고혹한 향기가 배어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왼쪽은 벽에 붙은 침상이고 만져진다는 느낌조차 없을 값진 명주솜 이불이 덮혀있었다. 

단정하게 놓은 어른 베개 옆에 어른 손바닥만한 작은 베개가 딱 붙어 놓여 있다. 바스락거리는 메밀이 들었다. 이 역시 열이 많은 어린아이를 위한 것이다. 

 

정면은 제법 큰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자개로 꾸며진 벼루모양의 서랍딸린 경대가 직사각형 상자처럼 야물게 닫혀있고, 벽에는 꽤나 고가일법한 산수화가 걸려 있다. 

오른쪽은 밝은 햇볕이 문풍지 가득 비쳐드는 창이다. 창 아래에는  작은 둥근 탁자와 앉아서 졸기 딱 좋아보이는 크고 편안한 의자 하나가 있었다. 탄력있는 버드나무 의자에는 푹신하게 편안하도록 담비 털가죽으로 된 방석이 깔려있다. 작은 탁자 위에는 연꽃 봉오리모양 자그마한 호롱과 통통한 참새모양의 향로가 있다. 절대 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다. 이것 역시 준휘를 위한 것인 듯 했다. 


동수는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면서 침상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운이 냄새다..."


옛날에 같이 나누어덮던 싸구려 무명이불과는 비교도 안될 최고급 명주솜과 비단으로 만든 이불이긴 하되 같은 사람의 향이 나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언뜻 보면 그저 한 어른의 평범한 방안이지만, 무엇하나 아이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아주 소중히 사랑받았을 아이의 삶이 느껴지는 듯도 하여서 동수는 왠지 안심이 되기도 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앉아있던 침상에서 시선을 돌리자, 침상 곁에 놓인 붉은 칠을 한 작고 아담한 머리장이 보였다. 

그 위에는 국화꽃이 아로새겨진 나무상자가 올려져있다. 동수는 생각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상자를 열어보았다. 


"...이건...."


하얗고 깨끗하게 다려져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준휘의 것으로 보이는 배냇저고리였다. 

너무 작아서 이런 옷을 입을수 있는 사람이 있나 싶을정도로 작았고, 말린 꽃을 넣은 향낭과 함께 들어있어 희미한 꽃내음이 났으나, 지울수 없는 갓난아기의 젖내가 나는 듯 싶어서 가슴이 덜컹 뛰었다. 

 

태어나서 처음 입는 옷. 태어나서 처음 낳아준 어머니에게 안길 때 입었을 첫 옷. 


동수에게는 지금 현재 3살된 준휘의 모습밖에 없다. 

아기가 생기고, 뱃속에서 자라서 열달후에 태어나 갓난아기부터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 같은건 동수 역시 가족의 삶같은 건 겪어보지 못한지라 상상이 되질 않았었다. 

 

허나 이리도 작고 귀여운 옷 한벌에, 손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무언가가 쫙 타고오르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작고, 작고, 조그만 생명체가 있을수가 있나. 


순간적으로 이렇게 작은 아기를 안고 앉아있었을 운이 저절로 상상이 되었다. 

이만큼이나 작았을, 살아있는 아기를 품고 오직 혼자서, 그만큼이나 더 어린 운이.

스무살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운이 나도 몰라주는 내 아이를 안고 숨막혀했을 그 시간을. 


"작았구나...."

손으로 들어올려 가만히 가슴이 끌어안아보았다. 이 작은 옷이 맞았던 그 갓난 아기때부터 안아줄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거 같아?'


칼로 갈라내듯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던 운의 목소리.


아니, 애써 냉정한 척 쏘아붙이던, 그 속에 담겨있던 저에 대한 숨겨진 원망. 


아마 누구보다도 돌아가고 싶어했을 운. 허나 돌이킬때마다 남았을 잔인한 상처.


 


"이제 슬슬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어느새 다시 돌아온 월영이 동수에게 말을 건낸다. 


"알겠습니다."


동수가 가만히 옷을 접어 상자에 넣었다. 마지막까지 손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 아쉬운 감촉을 뒤로 하고, 그는 조용히 뚜껑을 닫았다.


"좋은 방이네요."


"인주님 처소니까요."

동수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답하는 월영. 허나 침실 안까지 발을 들이진 않고, 그저 바깥 문밖에서 동수를 보고만 있다.


"왜 들어오지 않으시는겁니까?"


동수의 물음에 월영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 그곳은 인주님의 침실입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대답인 듯 말한다. 해가 동쪽에서 뜨지 서쪽에서 뜨지 않지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거기까지만 오시는 겁니까?"


익숙하게 방밖에서 기다리는 월영을 바라보았다. 

"제게 침수 시중을 들라 명하신 적은 없으시니까요."

이게 지금 농담인가. 아니면 진짜 저걸 사실이라서 그냥 말하는 것 뿐인가. 운의 최측근 세 사람 중 가장 모를 사람이다. 

".....한번도?"

명령을 받는 군인처럼 소리없이 운을 수행한 그의 오랜 시간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가 서있는 모든 것이 익숙해보였다. 

맘만 먹으면 저 자리에서 한달도 거뜬히 서있을 것 같다. 흑사채에서 운과 가장 오래, 가장 가까이 있었다는 사람. 


"제가 그 안까지 들어간 건 딱 두번입니다."


월영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저 젊고 수려한 청년의 뚜렷한 얼굴을 보았다. 

 

타고난 귀태, 크고 훤칠한 키, 다부진 몸을 지녀 좋은 가문 혈통이라는 게 한눈에 보인다. 

높은 실력의 무예가 몸에 배어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맑은 시선이 곧고 또렷하여 타고난 천성이 강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새파랗게 젊은 사내. 망설임없고 결단력있는 말투, 진중한 예의범절은 최고의 스승에게 좋은 교육을 받은 증거, 솔직하고 긍정적인 천성은 순수하고 다정하여 항상 주변에서 아낌받고 자랐다는 의미다. 

 

실제로 검선의 수제자이고 천주조차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탐내는 인재, 이 자의 총명하고 현명함이 깃든 얼굴은 확실히 남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


"첫번째는 그분이 인주가 되신 날이고"

그날은 월영 스스로가 운에게 처음으로 저를 보인 날이다.

"마지막은 주군께서 아기님을 낳으신 날입니다."

그날은 운 스스로가 월영을 처음으로 부른 날이다.

"준휘가...태어난 날...."

천천히 되새기는 동수의 나직한 목소리. 바로 어제 일을 말하는 것처럼 월영은 무표정했다.

"당신께서 아드님을 얻으신 날이죠."

저 업무 보고성 말투에 지독한 비틀림이 느껴지는 건 제 옹졸한 착각인가. 동수는 쓰게 웃었다.
 
운의 방안 어디에도 제 편은 없다. 이 공간의 공기마저 오직 여운의 편이 되어 자신을 몰아내듯 공격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자신보다 저자가 이 방에 서있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리는 그림이다. 

"당신은 그날 있었단 거군요."

어두운 목소리이지만 딱히 월영에게 나쁜 감정은 없어보인다. 

그저 고요하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냥 본인에게 하고싶은 말인듯 했다.

"저도 여기에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럼..."

"그 날 그분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처음 만났을때부터 지금까지 월영의 목소리는 한결같았으나, 그 한마디만으로도 한기가 뼈까지 몰아치는 것 같다. 

동수는 팔을 움찔 떨었다. 월영이 무서웠던 게 아니라, 그 말 자체가 무서웠다. 그말이, 그뜻이, 그 사실 자체가.

"전 별채 밖에 있었지만, 전혀 몰랐습니다. 주군께선 비명은커녕 소리한번 내지 않으셨으니까."

".............어째서?"

어째서. 동수의 떨리는 말투에 여전한 월영의 목소리가 답을 잇는다.

"전 그저 그분의 수하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주인의 뜻을 헤아리겠습니까. 다만."

"............다만..?"

"저라면 아마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 그럴겁니다. 그때는 안팎으로 적이 많았으니까."

겨우 스무살에 역대 최연소로 인주의 자리에 오른 어린 아이를 달가워하지 않을 오래된 다른 사람들이란 굳이 살수집단이 아니어도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그자의 무방비한 빈틈을 노려 공격한다는 건 어린아이 옛날 동화에도 있는 쉬운 설정. 내려오는 방법들이란 늘 그렇듯 항상 진부하고, 전해지는 이야기들이란 그저 뻔하지만. 그만큼 정석적이고 진리이다.

"그분은 그저 혼자서 그 시간을 견디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누구도 모른다는 거다. 운이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혼자서 이 방안에서 그 시간을 버텨낸 건지. 아무도.

"그리고 주군께서는 그 날이 다 지나기 전에, 검을 쥐고 흑사채를 정리하셨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 껍질밖에 없는 인형인것처럼 서늘한 눈을 하고 수많은 피를 뿌렸던 그날. 

" 그날 이후로는 없습니다. "

 

단순한 보고를 올리듯이 그렇게 정리하는 그 말이, 그 사실이 동수의 심장을 서늘하게 쥐었다. 

 

"이제 그만 가시겠습니까?"


들어올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살짝 옆으로 비켜서 가벼운 손짓으로 바깥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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