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달에 중독법 행사에서 회지로 발간한 로맨틱코미디 썰 '애인이 이상해요'의 소설판입니다.

회지에 들어간 소설버전(교정 완료본)을 공개하며,

외전으로 들어간 '기우'와 '허니문 엑소더스'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회지에 대한 특전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기우: 두 사람이 처음 만나서 사귀게 된 이야기 / 허니문 엑소더스: 두 사람이 신혼여행 가는 이야기)

썰 버전은 백업이 없으니 앞으로는 이 글만 공개로 둘 것 같습니다!

상-중-하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10만자입니다.

표지디자인 타르프님(tarf_design)

상편: http://posty.pe/ndj733





히어로들에 대해 아이돌마냥 팬클럽이 있는 건 이 세계의 흔한 문화 중 하나였다. 제법 규모가 큰 것도 많았다. 히어로를 따라다니는 사생도 있었고, 안티도 있었고, 히어로가 드물게도 그룹인 경우 악성 개인 팬도 있었다. 패왕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 팬클럽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어쨌든 패왕도 엄연히 팬클럽이 존재하긴 했다. 그리고 유중혁은, 봐 버리고야 말았다.

김독자가 네X버 패왕 팬클럽에 가입한 것을.

김독자는 패왕의 목격담과 썰을 직접 조사해가며 패왕이 누군지 찾아낼 생각으로 복수의 칼을 갈며 가입한 것이지만, 구하기도 힘든 자기 찍힌 사진이 생짜로 지갑에 있는 걸 본 유중혁으로서는 혼란스러웠다. 이 사진을 구할 정도라면 어지간히 히어로 패왕에 대한 집착이 있지 않고는 어려울 것이다. 팬클럽에서 이런 사진 한두 장을 팔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가격도 꽤 나갈 것이다. 근데 그런 사진이, 김독자의 지갑에 있다고? 돈도 얼마 못 벌고 히어로를 추적할 만한 인맥도 없는 평범하고 가난한 회사 계약직 김독자에게? 유중혁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상황을 정리하면,


내 애인이 어떤 히어로에게 빠진 것 같은데, 그 히어로가 나인가 보다…….


…돌아버리겠군.

상황의 모든 어이없음과 혼란스러움은 차치하고서라도, 유중혁은, 처음엔 조금 상처받기도 했다. 김독자는 분명 자신의 인생에 사랑할 남자는 유중혁 단 한 명뿐이라고 누누이 이야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패왕은 남자고, 유중혁도 남자고, 아 물론 유중혁이 패왕이긴 한데, 어쨌든 지금 둘은 다른 사람이다. 이쯤되면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이다! 그리고 김독자는 유중혁도 사랑하지만, 유중혁이 아닌 패왕 역시 사랑하는 게 거의 분명해 보였다.

분명히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데 그 애인과 같은 성별의 히어로를 좋아해서 구하기 어려운 사진까지 구하고 팬카페도 가입하다니? 히어로가 무슨 여자 아이돌이야? 언제부터였지? 김독자, 언제부터였나? 유중혁은 혼자서 생각하다가 혼자서 자기 자신을 질투하다가 그 질투의 대상이 자기 자신임을 다시 깨닫고 화를 가라앉히는 보기드문 기현상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유중혁은 올곧은 남자였고 히어로였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을 긍정적이고 바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놀라운 사람이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유중혁의 애인 김독자는 그동안 취미라고 할 게 없었다. 동거하는 애인으로서 관찰한 김독자의 하루는 일하고, 유중혁과 지내고, 이북 내려받아서 웹소설 조금 읽는 정도가 전부였다. 김독자의 인생은 사실 유중혁과 하는 연애를 제외하면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자극이 없는 삶이었다. 그렇다고 김독자가 본인의 생활을 윤택하게 챙기지도 않았다. 옷도 기성 브랜드에서 적당히 되는대로 매우 기초적인 아이템을 사서 돌려 입는 게 전부였고, 가구나 식기도 아무거나 싸게 사려고 들었다. 매일 먹는 밥조차 제대로 챙기지 않기 일쑤였다. 유중혁을 만나기 전부터도 딱히 큰 취미가 없다고 한 걸 보면 그전에는 얼마나 삭막한 삶을 살았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간혹 이런 경우 심각한 워커홀릭이라 직장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삶의 가치를 채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김독자는 그런 부류에 속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김독자는 확실히, 자기가 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일을 통한 자아실현은 눈곱만치도 안 되는 듯했다. 물론, 유중혁은 몰랐지만, 그 바닥에서 자아실현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미친놈일 테고 …다행히도 김독자는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그 모든 정보에 의거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았다. 유중혁은 세상 그 누구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세로 김독자제일주의를 다시 마음 한가운데에 왕으로 모셔놓고 마인드컨트롤을 시작했다. (객관과 중립의 의미는 이미 흐려졌다.)


행복의 필터를 쓰고 보면 이것은 유중혁의 애인 김독자에게, 나름의 취미가 생겼다는 소식이나 다름없었다. 김독자의 단조로운 삶에 애인(유중혁) 외의 다른 즐거움이 생긴다면, 그건 김독자의 인생에 좋은 일이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덕질을 응원해주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에 있어서 이지혜가 해준 한 마디는 매우 큰 힘이 되었다.

<그럼 사부 애인은, 사부의 원래 모습과 히어로 모습 다 좋아하는 거잖아?>

단언컨대 이지혜는 정말 최고의 사이드킥이다. 정말 감동적으로 뼈를 때리는 한 문장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유중혁으로선 얼마나 기분이 좋은 상황인가? 내(유중혁)가 내(패왕) 정체를 밝히지도 않았는데 둘 다 좋아하다니? 유중혁 입장에선 자신이 애인의 취향을 완벽히 만족시키는 남자로 인정받은 것 같기도 했다. 유중혁은 이지혜의 도움과 마인드컨트롤의 힘을 받아 그날 밤을 다시 평온하게 잠재워 보낼 수 있었고, 당분간 김독자의 덕질을 모르는 척 해주기로 했다. 사진도 고이 다시 지갑에 모셔놓고, 지갑을 만지지도 않은 척 바지 주머니에 넣어 놓았다. 유중혁은 상쾌하고 깨끗한 기분으로 김독자 옆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김독자는 상쾌하게 일어나 유중혁(패왕)한테 모닝키스를 하고는 아지트로 출근해 본격적으로 패왕(유중혁)을 잡아 족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한수영에게 사진에 금칠했냐고 욕에 욕을 하긴 했지만, 한수영이 준 정보가 패왕에 대한 가장 좋은 정보라는 건 머지않아 금방 알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히어로들이 신변을 숨기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패왕은 정말 정보가 없었다. 마왕 김독자도 아무리 애를 써봤자 한수영이 준 사진 이상의 것을 구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정보 수집력에 대해 도전을 받은 기분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쨌든 이 정도로 신비주의라는 건, 실제 일상생활에서 가족이라거나 애인 같이 잡기 쉬운 약점이 있다는 소리렸다. 김독자는 그 약점부터 잡아야 했다. 마왕이 괜히 마왕이 아니다. 김독자는 아주 침착하게 패왕의 소중한 사람(※김독자다.)에 대한 실마리라도 잡아내면 그 사람부터 잡아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독자는 한수영에게 본격적으로 돈을 쥐여주기 시작했다. 알아주는 뒷세계 해커 한수영은 무력행사보다는 조작질과 정보수집 이용을 잘하는 김독자에게 최고의 패였다. 제일 먼저 세운 김독자의 의뢰목표는 그거였다


신변을 못 찾겠다면 주변이라도 다 파헤쳐 놔.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특히 패왕에게 흘러 들어가는 모든 돈의 경로를 찾아.

그날, 남의 돈줄은 작살낼 의뢰를 넣어 놓고 정작 김독자는 퇴근하면서 애인을 위한 감색 코트를 새로 샀다. 어쨌든 요즘엔 그놈의 검은 코트가 꼴 보기 싫었다. 그것도 유중혁이 입으면 좋으니 어쩔 수는 없었지만, 기왕이면 좀 다른 걸 입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유중혁에게 겸사겸사 선물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담당한다던 서에서 기다릴까 싶었다. 하지만 경찰서 앞을 한참을 서성여도 유중혁은 오지 않았다. 하긴 유중혁이 공식적인 경찰공무원 신분도 아닌데 여기로 퇴근 안 할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본업이 본업이다보니 경찰서 앞에서 서성이는 것도 마음이 조금 껄끄러워, 김독자는 한참을 헤매다가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이밍 좋게도 김독자가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아주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중혁아!

집에 들어가려던 유중혁은 뒤에서 달려와서 폭 안기는 김독자를 보고 내심 놀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추위에 새빨개진 독자의 코끝이었다. 기다린 걸까? 유중혁은 추운데 밖에 오래 있지 말라며 김독자의 어깨를 잡아끌고 현관으로 들어왔다.

나 줄 거 있어서 너 퇴근하길 기다렸는데.

퇴근이라니. 유중혁은 당연히 자신의 아지트 위치를 김독자에게 알려준 적이 없다. 유중혁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디서?

그, 사거리에 있는 경찰서에서…… 거기 아니야? 근데 거기 안내 맡은 사람은 새로 왔나 봐. 너 잘 모르더라.

유중혁이 대충 둘러댔던, 히어로 일 하느라 안면이 있던 경찰서 지부에서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오늘은 외근이었다. 담부턴 괜히 춥게 헤매지 말고 미리 연락을 해라. 어차피 나는 거기 없을 때가 더 많으니까.

애인으로서 미덥지 못한 반응이었으나 김독자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 대신 득의양양하게 쇼핑백을 꺼냈다. 네 선물. 유중혁이 내심 기대하는 표정으로 쇼핑백을 열었다가, 찰나 놀람에 표정이 굳어졌다. 쇼핑백 안에서 나온 것은 척 보기에도 회사원 월급으로 사기 비싼 명품 코트였다. 결국 뒷세계의 큰손 김독자는 설정붕괴를 감수하고서라도 애인한테 명품을 입히고 싶었다. 미쳐버린 사랑은 언제나 신중함을 이기기 마련이었다. 유중혁은 한 번 옷의 질을 확인하고 눈을 깜박이더니, 상표를 보고 다시 한번 김독자를 쳐다보았다.

김독자 네가 이걸 어떻게……?

우리 중혁이 줄려고, 내가 돈 모아 샀지!

김독자의 얼굴은 뿌듯함 그 자체였다. 벼르고 별렀던 것을 에라 모르겠다 하고 저질러 버리니 오히려 후련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유중혁은 갑자기 마음속이 심각해졌다. 각종 후원금, 히어로정부 지원금, 부모 유산으로 말단 회사원 김독자(※자캐 설정)보다 돈을 많이 받는 유중혁으로서는 이건 정말 뜨악할 일이었다. 마치 한 푼 두 푼 설날 세뱃돈 모은 초등학생이 엄마 생일 축하해준다고 그 돈으로 백화점 1층에서 스카프 사 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유중혁은 김독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지 않을까, 의심했었고, 이 모든 상황은 그에게 한 가지의 강한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애인을 의심하다니, 나는 쓰레기다…….

유중혁의 목이 메었다. 도대체 세상의 그 어떤 바람 피우는 사람이 자기 경제적 분수를 아득히 초과하는 선물을 사겠는가? 다른 사람과 양다리를 걸치면 그럴 돈이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유중혁은 쓸데없는 의심을 했던 자기 자신을 깊게 참회했다. 그 모든 야근의 나날 동안 받은 초과근무수당이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 돌아왔다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대한민국 직장인으로서 할 수 없는 사랑을 김독자가 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자기도 조만간 김독자한테 깜짝 이벤트를 해주기로 했다.

그날 밤 유중혁은 김독자를 껴안고 오만 주접을 다 떨다가, 잠시 화장실에 가는 척을 하며 몰래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그리고는 예약 날짜에 맞춰, 그 날 우리 밖으로 나가지 않겠냐고 김독자에게 제안했다. 동거한 이후로 아주 오랜만의, 새삼스레 건네는 데이트 신청이었다.

당연히 김독자는 곧바로 수락했다.




그날 밤, 유중혁이 잠든 사이 김독자의 핸드폰에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수영이었다. 김독자는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전화를 받았다. 한수영이 일을 열심히 한 모양이었다. 김독자가 원한 패왕 주변의 경제적 흐름이 거의 도식처럼 정리되어 PDF 파일로 날라왔다. 이 정도면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김독자는 무감한 눈으로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전화기에 대고 속삭였다.

그새끼 자금줄 다 끊어.

김독자의 별명이 마왕인 이유.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들은 죄다 하수다. 진짜는 목표물 주변의 인간관계를 씨를 말려 죽이고, 돈 들어올 구멍을 막아 다급하게 만드는 것이다. 김독자는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이었고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데에 철저했으며, 익숙했다.

그러나 김독자는, 꿈에도 몰랐다. 그것이 훗날 둘의 두근두근 데이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유중혁의 아지트에는 오래간만에 반가운 얼굴이 등장했다. 히어로들의 조력자 유상아였다. 유상아는 유중혁이 처음 요청한 이후로도 나름대로 혼자서 계속 마왕의 행적을 조사해온 모양이었다. 결국 정확한 신변은 알아내지 못했다며 미안해했지만, 이윽고 유중혁의 손아귀에 들어온 정보는 상당히 귀한 자료였다. 마왕과 관련이 있거나 손을 잡았던 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모든 회사와 조직의 목록이 주루룩 정리되어 있었다. 꼼꼼한 유상아는 단순한 목록에서 그치지 않고 각 기업, 조직들이 어느 시기에 어떤 사건으로 인해 마왕과 관련이 있었는지, 또한 그 사건의 중요성과 그 사건에서 마왕이 개입한 비중이 대략 어느 정도나 될지까지 퍼센티지로 정리해놓았다.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정말 괴물 같은 사람이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까딱 숙여 유상아에게 고마움을 표하고는 재빨리 책상에 앉아 자료를 훑어보았다.

척 훑어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제법 유명한 이름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마왕은 생각보다 훨씬 더 거물인 모양이었다. 큰 대기업부터 시작해서, 여러 it기업과 다목적 기업, 그리고…….


미노소프트?


유중혁은 순간 보이는 익숙한 이름에 몸을 움찔, 떨었다. 당연히 이 정도로 많은 곳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면 마왕이 굳이 미노소프트라고 연관이 안 되어있을 리는 없긴 했다. 그러나 미노소프트는 그 목록 중에서도 꽤나 상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목록의 정리된 순서는 마왕이 개입한 사건의 연도를 첫째로 고려했고, 둘째는 마왕과 연관이 있을 비중과 확률이었다. 말인즉슨 미노소프트는 아주 최근까지도 마왕과 연관된 일이 있었으며 그 비중도 굉장히 높았다.

유중혁은 자연스레 미노소프트의 계약직으로 굴려지던 김독자를 생각했다. 잦은 야근과 불규칙한 근무 주기. 모든 것이 단숨에 꺼림칙해지기 시작했다. 김독자야 그래도 회사의 제일 말단이라고 하니까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적겠지만, 유중혁은 더 결심했다. 마왕은, 반드시 잡아야 된다. 아무리 김독자가 말단 사원이어도 혹시 모른다. 마왕이 미노소프트를 통해 자금을 빼돌리고, 애꿎은 김독자의 월급통장이 대포 통장으로 오인당하여서 돈을 압류당한다든지 하는 일 정도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모든 야근도 내부에서 일어나는 비리를 감추기 위해 돌아가는 의도적 프로세스일지도 몰랐다. (※아니다.)

유중혁은 언제 한 번 이직할 생각이 있는지, 자신이 먹여 살릴 테니까 일을 쉴 생각은 없는지 김독자하고 얘기해보기로 생각했다. 아니 아예 고급 식당도 예약해 놨겠다, 차라리 이번에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할까 싶었다. 유중혁 요리 솜씨가 기깔나기도 하고 김독자도 유중혁 요리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둘이 밖으로 나가 외식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분위기는 잡을 수 있을 때 잡아야 했다. 드물게 밖으로 나가는 김에 뭐라도 더 준비해서 진지한 미래 계획을 세워볼 때였다.


마침 때는 월말이었고, 유중혁은 월급이 들어올 날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유중혁에게는 월급이 없었다. 그 대신 후원금이나, 정부에서 지원하는 히어로 보조지원금이 있었다. 그런 돈들이 대외적으로 정부의 도움을 받아 은행에 등록해 둔 '히어로 패왕'의 기부 후원 통장으로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다른 히어로들은 그 통장을 어떤 식으로 쓰는지는 유중혁도 잘 몰랐으나, 적어도 유중혁은 그 돈 관리에 있어서 철저했다. 히어로 통장에 있는 돈은 여러 가지로 쓸 데가 많았는데 그 범위가 장비와 시설을 수리하는 것부터, 다른 히어로 보조 인력들에게 줄 만한 의뢰비, 외주비, 사이드킥에게 주는 월급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잠깐 정줄을 놓았다간 돈이 물 새듯 나가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유중혁은 그 통장의 돈을 철저히 개인의 것과 분리해 놓고, 매달마다 자기 개인 통장에 자신의 월급으로 정해놓은 일정 금액이 송금되도록 하였다. 이지혜의 월급 역시 정해져 있긴 마찬가지였다. 그다음 남은 돈은 각종 잡비로 들이고, 병원비로도 쓰고, 정말 드물게도 일이 많았고 정부에서 인정할 만한 공적을 세웠다 하면 자체적으로 인센티브를 계산해서 조금 더 받는 형식이었다. 유중혁 개인의 자산도 있었으나 그 역시 유중혁은 철저하게 은행에 묶어 둠으로써 과소비를 방지했다. 그래도 유중혁은 그 세우는 공적의 인센티브만큼으로도 김독자를 먹여 살릴 수 있을 수준이었다. 유중혁은 진정성 있고 능력 있는 청렴 강직한 히어로였다.

안 그래도 이번 달은 큰일도 많았고 인센티브도 많을 예정이었다. 마왕이 개입한 거대 무기 거래를 막아낸 게 주된 이유였다. 그 돈을 받으면 김독자에게 줄 선물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기왕이면 질 좋은 금방에서 커플링 한 쌍 정도는 문제없겠다. 유중혁의 결정은 빨랐다.


유중혁은 그날 퇴근하자마자 바로 종로의 귀금속 거리로 향했다.

김독자의 반지 사이즈는 애저녁에 알아 놓은 상태였다. 김독자의 취향도 대충이나마 알았다. 적당히 화려하지 않고 심플하면서, 단아하면서도 예쁜 것. 유중혁은 거기다가 김독자의 하얀 손가락에 끼워졌을 때 얼마나 예쁠지를 가장 중요하게 가늠하면서 신중하게 반지를 골랐다. 유중혁은 김독자에 관한 한 물건을 고를 때 끝없이 까다로워서, 금은방 직원은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신성한 제사 예물이라도 고르는 듯한 그 기색에 종내에는 직원조차 감화되어 같이 열심히 반지를 골랐다.

애인분이 엄청 좋아하시겠어요.

기어이 엄청난 가격의 반지를 포장하여 품질보증서까지 같이 넣던 직원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오늘 장사는 대박이다라는 노골적인 표정이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내밀었다. 그런데,

손님, 이거 카드가 안 긁히는데요?

직원은 결제하다 말고 뚱한 표정으로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유중혁은 미간을 좁혔다가 핸드폰을 켰다. 은행 앱은 참으로 야속하게도 굉장히 느릿하게 로딩되었고, 그래서 유중혁은 그 민망한 상황 앞에서 한참 후에야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센티브는 그렇다 치고, 분명히 어제 개인 계좌로 들어왔어야 할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다. 직원은 유중혁의 표정을 한 번 쳐다보고, 자신이 방금 포장했던 반지 상자를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유중혁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유중혁에게 난생처음으로 겪는 금전적 수치였다. 유중혁은 당황을 애써 숨기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졸지에 유중혁은 돈도 없는데 직원을 들들 볶으며 이래라 저래라 금이 몇 k여야 한다 서너 시간 동안 까탈을 부린 희대의 진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유중혁은 다급하게 은행으로 찾아갔다. 시간은 이미 지나서 은행은 죄다 문을 닫았고, ATM기 앞에만 불이 허옇게 켜져 있었다. 유중혁은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패왕 명의의 계좌를 조회했다. 그런데 화면에 뜨는 문장은 뜻밖이었다.


[고객님의 계좌가 범죄 관련 사항에 연루되어 이용이 정지되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은행에 문의하세요.]


세상에 범죄를 잡는 히어로의 계좌가 범죄에 연루되는 게 어딨어?

유중혁은 너무나 황당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하나하나, 패왕의 명의로 등록된 모든 대외용 계좌가 정지된 걸 발견하자 황당은 당혹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허겁지겁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미 상담 시간이 지나 상담원과 연결하실 수 없다는 기계음의 무미건조한 답변만이 걸려왔다. 유중혁이 입술을 깨물며 전화를 끊자, 타이밍 좋게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어제 예약했던 식당이었다.


[유중혁 고객님의 식당 예약 선금이 정상적으로 결제되지 않아,]

[예약이 취소됩니다.]


영문도 모르고 유중혁과 김독자의 데이트 계획이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그 순간 유중혁은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누군가를 반드시 죽여버리기로 했다. 참을 길 없는 분노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도 모르고 마음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돌아와 잔뜩 굳은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웠고, 그에 놀라 눈치를 보는 김독자에게 부드러운 말 한마디도 해주질 못하고 침묵했다. 다행히도, 하루도 가지 않아 유중혁이 누구를 죽여야 할지는 자명해졌다. 새벽같이 일어나 재깍 찾아간 은행의 답변은 간결했다.


엄청난 금액의 비자금이 히어로 패왕님의 계좌로 입금되었어요. 경찰이 현재 수사하고 있습니다.


계좌의 이체내역을 받아본 유중혁은 이를 갈았다. 어마어마한 금액 옆의 입금자명은 유중혁을 도발하듯 자랑스럽게 쓰여 있었다. 입금자명은, 마왕이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이 새끼를 죽이면 되는구나.

이번 월급 빼서 김독자에게 맛있는 것도 먹이고 반지도 끼우고 프로포즈도 하려고 했는데, 이 새끼가 다 망쳐놓았구나.


당장 모든 돈이 급했다. 유중혁은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지만, 정식으로 등록된 히어로 중에서도 범죄에 발을 들이게 되는 케이스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에 경찰 조사는 조금 더 진행해봐야 안다고 했다. 어떻게 유중혁의 능력으로 금방 해금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 달 월급이 당장 안 들어온다고 해서 생활이 급박할 만큼 유중혁이 준비성이 없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다른 부분에서 일어났다. 이지혜였다.

[사부 이번달 월급 왜 안 와?]

히어로 명의의 계좌에 이지혜의 월급까지 묶여 있던 탓이었다. 유사시 자신에게 월급을 못 주는 일이 생기더라도 사이드킥의 월급은 꼭 먼저 챙기려던 유중혁이었다. 히어로 명의의 계좌들 전체가 통째로 동결될 줄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유중혁이 차마 답장을 보내지도 못하는 사이 이지혜는 마음이 급한 것인지 다닥다닥 새 문자를 보내왔다.

[사부]

[우리 월급날 아니었어?]

[은행에 알아봐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

[이번 달 월급 없어?]

[아니지?]

날아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결정타였다. 유중혁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이지혜의 월급을 안 줄 수는 없었다. 이게 히어로와 사이드킥이라는 특수한 자리라서 노동 착취가 적용이 안 되는 거지 이지혜가 해내는 일의 업무량은 어지간한 직장인과 비견될 만했다. 그런 일을 시키면서도 유중혁이 죄책감을 덜 가질 수 있었던 점은 첫째 이지혜가 원하는 진로였고, 둘째 정부로부터 승인받은 공식적인 일자리였으며, 셋째 유중혁이 이지혜의 월급을 무척이나 후하게 책정해서 금전적으로 어려움이 없게 한 결과였다. 당장 학교도 안 다니는 애가 종종 밤까지 새며 일한 돈도 못 주면 그게 임금체납 악덕 사장이지 어떻게 히어로가 되겠는가. 솔직히 자신이 데이트 한 번 참고 한 달 가난하고 말면 될 일이었다. 김독자 제일주의였지만 김독자에게 엄청난 해악이 되지 않는다면 도덕성도 버릴 수 없었던 유중혁은 결국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다가, 은행 앱을 열었다.


그렇게 한 달 치 생활비만큼 준비해둔 비상금 통장의 돈은, 이지혜의 월급으로 쑥 빠져나갔다.


일단 보내긴 보냈지만, 달력을 보면 한숨만 나왔다. 이번 달, 식사를 예약한 날짜는 둘의 100일 기념일이었다. 그러나 유중혁의 현 상황에서는 도저히 무언가 이벤트를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당장 사비로 아지트의 시설과 장비들을 수리해도 모자를 판이었다. 기념일에는 김독자도 뭘 준비하기는 하던데, 어떻게 서로 논의해서 맞출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유중혁은 이내 다시 머리를 짚었다.

김독자가 명품 코트를 샀는데 무슨 돈이 남았겠어……?

유중혁이 알고 있는 것은, 말단 사원 김독자(설정)이다. 유중혁의 눈에서야 자기 애인이 지금 영혼까지 끌어모아 명품 코트를 사고 거지가 되었을 게 틀림이 없었다. 당장 월급이 안 나오고 계좌가 동결된 유중혁 본인의 통장 사정보다도 김독자의 것이 더 걱정되는 수준이었다.

설정이 아닌 현실의 뒷세계 큰돈 김독자가 들숨에 만원 날숨에 만원을 벌고 있다는 것을 유중혁이 모르는 바람에 유중혁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이지혜 월급 주고 남은 비상금을 세어보고, 한숨 한 번 쉬고, 한 달 생활비를 생각해보고, 한숨 한 번 쉬고, 묶어놓은 자산을 깰까 계산해보고, 한숨 한 번 쉬고……. 어떻게든 한 달을 그럭저럭 지낼 수는 있는데, 딱, 데이트는 완전히 무리인 꼴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유중혁의 히어로 계좌와 개인 자산을 다 합쳐도 김독자의 자산의 반이 안 될 테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유중혁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 자연히 혼자서 고민을 계속하던 유중혁은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위안이 되는 결론은 아니었고, 다음과 같은,

마왕 그 새끼는, 이 패왕이 반드시 조진다.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한 감정적 결론이었다.




물론, 객관적인 시야를 가질 수 있는 유중혁이 마왕에 대한 단순한 적개심만으로 그런 결론을 내린 건 아니었다. 히어로 명의의 계좌가 동결되었다는 일은 굉장히 중대한 건으로, 의혹을 풀지 못하면 당분간의 모든 활동이 어려울 수 있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빌런과 싸우다가 다치면 쓸 병원비가 없고, 당장 수리해야 할 장비와 시설들이 넘쳐나는데 그것까지 모두 개인적인 자금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언제까지 금융 관련 조사에만 묵묵히 잡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히어로 명의로 빌런과 내통했다는 불명예가 기사로라도 잘못 퍼지면 일은 점점 더 골치 아파진다. 당장 패왕이 마왕을 잡아버리든 뭐든 해서 둘 사이의 악의적인 관계망을 드러낼 수 있으면 마왕의 비자금이 패왕을 통했다는 누명은 벗을 터였다.

이 모든 이유와 더불어 생각해보면 더 마왕을 족치고 싶어졌다. 김독자랑 보낸 시간도 별로 없는 요즘이었는데, 이젠 정말로 폭탄이 터져버려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일이 잔뜩이다.

유중혁은 자신이 김독자를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 김독자는 어쩌나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봐도 정말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 같은데, 김독자가 밥은 잘 챙겨 먹을지부터 시작해서, 외롭지는 않을지, 김독자가 자기 없다고 히스테릭해져서 길을 걷다가 돌을 발로 차고 자기가 꼬꾸라져서 뒤통수가 깨지진 않을지, 하여간 세상 별것이 다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도 유중혁의 행복회로는 착실히도 돌아갔다. 예전 같았으면 김독자에게 삶의 즐거움은 유중혁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지금은 김독자에게 패왕이 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패왕을 좋아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미아도, 자신이 챙겨주지 못할 때도 알아서 모 아이돌 그룹을 파면서 콘서트도 다니고 음원도 들으면서 잘만 지냈던 기억이 있었다. 유미아는 산이나 들이 아니라 고척돔으로 체조경기장으로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쏘다니면서 삶의 활력을 찾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히어로는 콘서트를 안 하는데 김독자는 어디를 가야 하는 거지? 없어서 집 밖으로 잘 안 나가는 건가?―김독자도 비슷한 방식으로 외로운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인이 부재하면 집에서 하릴없이 우울하게 소설 좀 읽다가 오매불망 유중혁만 기다리던 김독자는 이제 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팬카페도 가입했는데 뭘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유중혁이 조금 야근을 한다 하더라도, 패왕으로서의 활동을 많이 하면 패왕 팬인 김독자는 그것도 좋을 것이다.



원인의 형태와, 원인이 결과랑 연결되는 방식이 유중혁의 생각과 많이 다르긴 했지만, 기묘하게도 유중혁의 생각은 틀리진 않았다.

패왕이 활동할수록 김독자의 기분이 좋아지는 건 사실이긴 했다. 패왕이 모습을 많이 드러내면 많이 드러낼수록, 김독자가 끊어버린 자금줄 때문에 사정이 급하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인터넷에서 검색기능을 사용해 패왕 목격담을 하나씩 골라내었고, 최근 기간에 급격하게 늘어난 목격담의 수치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경찰에 금융 관련 문제로 출석하는 모습은 얼굴도 안 찍히고 기사조차 나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정체를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김독자는 틈만 나면 자신의 개인 핸드폰으로 가입한 패왕 팬카페의 글을 훑어보았다. 뒷세계용 폰이나 가짜 명의의 아이디를 쓰기엔 사소한 일이었고, 오히려 이쪽이 덜 위험했다.

[요새 패왕님 활동 많다던데 찍사 없나요ㅠㅠ?]

그런 글도 간간이 올리면서, 어느새 김독자의 패왕 팬카페 방문 숫자와 활동 수치는 늘어나고 있었다. 남들 보기에는 완전 패왕 얼굴 한 번 보려고 안달이 난 팬 같았다. 이런 사람이 이 팬카페 내에서 한둘인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들킬 염려도 없고. 김독자는 약간의 악취미가 있었기에 싫어하는 사람의 팬카페 안에 가서 좋아하는 사람인 양, 같은 편인 양 행세하는 것에 나름의 쾌감과 희열을 느끼는 중이었다.


단 하나 김독자가 예상치 못한 점이라면,

유중혁이 그 모든 글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중혁이 김독자의 아이디를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딱히 유중혁이 김독자의 포털사이트 개인 아이디까지 일일이 신경 쓸 정도로 집착적인 애인인 것은 아니었지만, 예전에 한 번 메일을 주고받았을 때 봤던 그 아이디를 기억하고 있던 탓이었다. 김독자는 팬카페에 가입했을 당시 닉네임도 쓰지 않았다. 닉네임도 쓰지 않고 블로그도 쓰지 않고, 인터넷을 잘 못 하는데 순수하게 패왕을 너무 좋아해서 팬카페에서 자주 나타나는 사람 정도의 컨셉이었다. 당연히 김독자의 글에는 닉네임 대신 아이디 첫 다섯 글자 정도가 공개되어 보였으며, 김독자가 혹시 이 중에 있을까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팬카페를 챙겨보던 유중혁의 눈에 그 글들이 안 보일 리가 없었다. 유중혁은 보자마자 글을 쓰는 방식, 띄어쓰기, 말버릇, 단어들로 인해 그게 김독자임을 알았다.


그리고 유중혁은 크게 안심했다.


자신의 예상대로였기 때문이었다. 통했군, 다행이야, 정도의 느낌이었다. 여전히 다른 남자의 얼굴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김독자의 모습이 조금 낯설고 찝찝하긴 했지만 자기 자신에게 질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정말 다행히도 그 다른 남자도 자기 자신인데 어쩌겠어, 이 정도면 참 괜찮은 일 아닌가. 유중혁은 팬카페에 올라오는 김독자의 글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은은한 미소를 띠는 일이 잦아졌다. 한 번은 이지혜가 그런 유중혁의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여기기도 했으나, 유중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럴 때마다 유중혁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딱 한 가지, 진심으로 유감스러운 착각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패왕이 바로 나라는 걸 알면, 넌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유중혁이 진실을 알게 된 김독자의 표정이 어떨지 알게 되는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다.




유중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지내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김독자는 아주 오래간만에 신이 나 있었다. 패왕을 쫓는 일이 그에게 다른 종류의 활력을 준 것만큼은 확실했다. 반 년 전부터 꾸준히, 나는 이 지긋지긋한 판에서 손 떼겠다고 했던 모습이 무색했다. 신나게 정보를 수집하고 주변 인맥에 연락을 해대며 패왕에 대한 추적을 좁혀가는 꼴이 우스웠다. 그 모든 과정을 구경하던 한수영은 한 마디 던질 수밖에 없었다.

너 진짜 패왕 존나 사랑한다.

그 말에 김독자는 곧바로 정색했다.

씨발, 기분 더러우니까 그딴 식으로 얘기하지 마라.

하지만 누가 봐도 너 지금 존나 신났는데?

그거야 되게 오랜만이니까 그렇지.

오랜만이라고 함은 김독자가 본격적으로 혼자서 무언가를 목표로 잡은 것을 의미했다. 사실 김독자는 그냥 타깃과 일대일로 붙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긴 했다. 점점 실력이 유명해지고, 참여하게 되는 판이 커지면서 어지간한 일은 다 남의 손을 빌리게 되다 보니 그럴 일이 없어졌을 뿐이었다.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사람 잡는 게 무슨 취미냐.

한수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걸로 따지자면 한수영 본인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굳이 한 마디 정도는 던질 수밖에 없었다.

너 손 뗀다 손 뗀다 하더니, 넌 진짜 이 판 죽어도 못 떠나겠다.

그 말을 듣자마자 김독자는 전에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언젠가는 떠야지.

반년 전에 손 뗀다 손 뗀다고 해 놓고선 결국 아 이 거래만, 아 이거만, 하고 계속 찔끔찔끔 이거저거 해온 사람이 누군데. 김독자 너지. 이제 걔랑은 헤어졌어? 그 중혁인지 하혁인지…… 시발, 왜 물컵을 던지고 지랄이야!

한수영은 김독자가 집어던진 물컵을 가볍게 피했다. 김독자가 제대로 작정하고 던졌으면 맞췄을 수도 있는데, 던진 궤적이 비뚤어진 걸 보니 적지 않게 동요했던 모양이었다.

얼씨구.

한수영은 팔짱을 꼈다. 반년 전에 애인이 생겼다고 했을 때는 웬일인가, 얼마나 갈까 싶었지만, 여전히 질리지도 않고 저 지랄을 해대는 걸 보니 정말 참사랑이긴 참사랑인가 싶었다.

우리 중혁이랑 나는 존나 잘 사귀고 있으니까 걱정 마. 내가 씨발,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붙잡고 살 거야.

너 여기서 손 떼고 결혼한다며? 언제 떼게.

김독자는 눈을 잠시 깜박였다. 본인도 할 말이 없어서 말문이 막힌 듯 했다. 잠시 후 김독자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몰라. 패왕 새끼만 잡아 족치고 나면 먼저 프로포즈 하든지 할 거야.

하혁이는? 먼저 프로포즈 안 하든?

김독자가 멈칫거렸다. 김독자가 알기론 유중혁도 김독자도, 나이가 스물 여덟. 세간의 기준으로 결혼을 생각해볼 만한 나이이긴 했다. 그래도 요샌 서른 넘어서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 얘기는 시기상조 아닌가? 아직 결혼 생각하긴 우린 멀었어, 하는 생각과 함께, 언젠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더 유예하지 못할 시기가 오면 그때는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김독자는 속이 좀 복잡해졌다.

중혁이는 우리같은 바닥 인생들이랑 달라서 존나 바뻐.

짭새짓 하느라?

죽는다, 한수영.

아무리 그래도, 너 진짜 걔랑 결혼할 거면, 그전에 여기서 손 떼지 않으면 큰코다치겠는데. 어디까지 조회할 수 있는진 몰라도, 니 명성이 없는 것도 아닌데. 우연히 애인이 니 소문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럴 일 없어. 걔 담당하는 거 무슨 외국인 불체자 잡는 쪽이더만.

그으래?

그래서 막 늦게 들어오고 다치고 그러잖아, 속상하게…….

김독자는 그러고는 정말로 인상을 찌푸리곤 입을 다물었다. 따발따발거리던 입이 순식간에 위아래로 맞물리고, 금세 조용해지는 걸 보던 한수영은 혀를 찼다. 찐 사랑이구먼, 진짜 찐 사랑. 하필 저 녀석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묘하게 마음이 껄끄러웠다. 김독자에게 소중한 존재가 생긴 일은 친구로서는 축하해줄 일이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축하할 일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생각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김독자가 변명을 중얼거렸다.

내가, 너랑 현성씨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이 바닥 떴지. 우리 유승이도 있고…….



세상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사람 대부분은 자신의 가정은커녕 직장조차 마음에 들게 정할 수 없다. 태어나는 나라부터 지역과 가족의 분위기까지, 앞으로 인생에 겪을 불행들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는 삶이니 비록 마왕이라 하더라도 김독자에게도 동정할 거리가 있긴 했다. 한수영은 김독자가 자신의 모든 일을 청산하고 싶어 하는 걸, 끝없이 염증 내는 걸 꽤나 자주 봐왔다. 그러나 뒷세계의 원한 관계라는 건 끝없이 엮이고 엮여 도무지 끝나질 않았다.

그 단순한 사실을, 김독자는 유승이의 아비가 마왕을 죽이려던 이들의 칼에 맞아 죽을 때에 깨달았다. 차마 수습할 수 없는 길을 걸어왔구나 싶었다. 김독자는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발아래에 무언가가 많이 쌓여 있었다. 마왕의 악명이 생길 때까지 마왕은 너무 많은 것을 밟고 올라가 있었다. 마왕 본인에겐 차마 손대지 못하더라도 마왕 '패거리'나 그 '라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갖은 일이 많았다.

이현성이 머리 한쪽이 완전히 푹 패여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김독자는, 그만할까 생각했었다. 그저 방해되어서, 걸리적거려서, 김독자의 신변에 위협을 가했기에 망하게 한 상대들은 그 원한을 절대 잊지 않았다. 애꿎은 화는 주변인의 몫이었다. 원래 목표는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소년원에 끌려가서는 몇몇 깡패들과 연이 닿고, 조롱당하고, 어쩌다가 범죄의 끄나풀로 이용당하고, 감옥을 드나들다가 어디의 따까리로 찍혀서 칼 맞아 죽을 삶. 거기서 죽지 않기 위해서 조금 머리를 굴렸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가 죽기도 할 뿐이었다. 원래 그런 바닥이었다. 그래서 원래 그런 바닥에서 원래대로 했더니 결과는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앞이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더 악랄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있는 원한 관계를 무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독자는 주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좀 더 많은 사람과 손을 잡았다. 마약을 빼돌리고, 싼값에 제공하고, 정보를 교란하고, 때로는 총칼을 들었다. 원한이 많아질수록 안전이 필요했고 안전을 위해 힘이 필요했다. 힘이 세지면 다시 원한이 많아졌다.

신유승이 큰 조직의 보스였던 자기 아버지를 잃고도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그 아버지와 마왕의 친분 덕이었다. 김독자는 감옥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막아 준 신유승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가 죽자마자 신유승의 보호자를 선언했다. 영향력 있는 거래 상대가 점찍은 사람이니 결국 새로 보스가 된 자도 뭐라 말도 못하고 신유승을 보호하게 되었다. 김독자가 아니면 자신은 어디로 팔려나가거나 토막나 죽을 것을 알았던 유승은 어느 날 독자에게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가 저의 구원이에요.

그 말에 김독자는 코웃음을 쳤었다. 구원? 야 씨발 유승아, 두 번 다시 그런 무서운 소리 함부로 하지 마라. 어지간해선 신유승이 무슨 일을 해도 무조건적으로 지원해주고 지지해주던 김독자가 처음으로 아이 앞에서 내뱉은 쌍욕이었다. 마왕한테 구원이 어디 있니?

자리에 있었던 이현성은 김독자의 서슬에 움찔하면서도, 신유승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김독자는 자신에 대해 일말의 관대함도 두지 않으려고 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주장하기엔 김독자에게 얽히고설킨 관계가 너무 많았다.

칼 맞아 죽기 쉬운 바닥에서 지 좋은 사람만 칼 안 맞고 안 죽게 하려니 일이 꼬이는 게 당연하지.

냉정하게 중얼거리는 한수영도 정작 김독자에 의해 목숨을 건지기는 했다. 수영은 김독자에 의해 사망 처리된 후에야 그 지긋지긋한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한수영이 그 보답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김독자가 애인이 생기고, 정말로 이 바닥을 뜨겠노라 호언장담하면서도 결국 손을 씻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때마다 한수영은 질문했다.

합법 결혼 포기할래? 너 사망처리하고, 신분 죄다 싹 세탁하고.

그러나 그때마다 김독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뒷세계에서 유명한 김독자였다. 얼굴을 아는 사람도 적지만 있었다. 어지간히 큰 사건에 묻어가는 게 아니라면 갑자기 짠, 마왕이 죽었답니다! 한다고 믿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을 마왕이라고 갖다 대며 신원을 위조한대도 일치하지 않는 게 너무 많았다. 마왕으로서 보유중인, 김독자의 명의로 된 거액의 돈들도 처리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 이주, 한 달 두 달을 미뤄가다가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김독자가 평온하게 유중혁과 삶을 이어가는 꿈을 아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일단, 패왕 새끼 얼굴 한번 보고 조져주고, 이번에 현성씨가 무사히 입지 굳히면 다시 조용하게 살 거야. 계속 존나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는 다들 잊어버릴지도 모르지.

안 그래도 이현성이 너 패왕 잡아달란 거 보고 돕고 싶다고 하던데.

아 좀, 별거 아니니까 그러지 좀 말지.

네가 공고 낸 게 어디 하루이틀 퍼지다 말 일이었냐. 하여간 일 안 벌린다면서 일 벌리기 선수야.

김독자는 착잡한 마음으로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해서 봉투에 집어넣었다.

아 난 몰라 한수영. 니가 알아서 하던가. 난 퇴근한다.

퇴근이라는 말에 한수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김독자와 한수영이 대화를 나누던 곳은 김독자의 아지트였고, 이 폐건물에 있는 사람이라곤 한수영과 김독자 뿐이다. 사장은 물론이거니와 상사도 없다.

퇴근은 무슨, 니가 언제 출근이라도 했냐? 여기가 회사야?

너도 퇴근해라, 한수영. 수고했다~내가 수당은 짭짤히 챙겨줄게.

한수영은 김독자가 굳이 퇴근이니 수당이니 단어를 선정하는 이유를 익히 짐작했다. 보나 마나 그 하혁인지 상혁인지한테 멀쩡한 회사 다닌다고 구라 쳐 놨겠지. 어쩌면 유중혁과 사는 평범한 회사원인 자기에 너무 이입하는 게 아닌지,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한수영이 그러거나 말거나, 집에 갈 짐을 챙기면서 어둡던 김독자의 얼굴이 훅 밝아지기 시작했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놈의 유중혁,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저 폭탄 덩어리랑 사랑에 빠졌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놈 고생길은 훤할 게 분명했다.




남의 생각들은 개의치도 않고 김독자는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조금 들떠 있던 건 사실이었다. 당장 먼 훗날이 될 결혼식에 대한 걱정보다는, 눈앞에 다가온 유중혁과의 데이트 날짜가 더 신이 났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야근도 잦은데 그날은 꼭 시간을 내겠다며 미안해하던 유중혁의 모습이 눈에 선명했다. 우리 중혁이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 놈은 내가 혼내줄 거고! 중혁이는 여전히 날 사랑하니까 상관없어! 김독자는 또다시 머릿속에 각종 걱정은 싹 지운 채, 기대에 부풀어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 통의 문자를 받게 되었다.

청천벽력같은 데이트 연기 통보였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기도 했다.




김독자에게 마음이 편치 않은 선언을 하고 나서, 유중혁은 그날 일부러 집 안에 늦게 들어갔다. 김독자가 안 자고 기다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확실히 김독자도 일이 바쁜 모양이었는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잠들어 있는 김독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유중혁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답장이 오지 않은 걸로 마음이 상했다는 건 분명히 느껴지긴 했다.

당장 내일부터 경찰과도 긴밀하게 협력해서 마왕을 쫓고 개인적인 금융 관계가 없었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보다도 김독자를 어떻게 달래줄지 막막했다. 거짓말을 하기는 싫었고, 댈 이유도 도저히 없었다. 갑작스럽게 계좌가 동결되는 일이 보통 사람들에게 얼마나 있겠는가. 다른 직장도 아닌 하필 경찰계에서 일하는 사람이 월급이 밀릴 리가 있나? 그렇다고 김독자에게 자신이 히어로라고 밝히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내가 히어로였는데 빌런과 금전 관계의 의혹을 받아 수사받는 중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하는 애인을 신뢰하겠는가?

유중혁은 처음으로 김독자에게 어떤 말을 할 자신이 없어졌다. 이상하게, 마왕과 엮이기 시작한 이후 제대로 굴러가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유중혁은 김독자가 일어나기도 전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요리 실력을 발휘하여 김독자의 아침은 맛있게 차려주고 나서였다. 고작 먹을 거로 사죄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일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단 일이 수월했다. 이미 '패왕'이 히어로로서 공식적으로 정부에 등록되어 있었고, 입금자 쪽인 '마왕'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패왕으로 인해 손해를 보았던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조사를 위해 나온 경찰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유중혁은, 이내 돈이 흘러들어온 경로를 받았다. 이름 없는 노숙자의 것으로 만들어진 계좌는 돌고 돌아 들어온 돈을 패왕의 계좌에 꽂아버렸다. 결과적으로는 범죄에 관련된 돈이 고스란히 은행과 경찰 수중에 돌아온 꼴이니 어떻게 그 금액적 손해는 무마되긴 했지만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패왕 하나 족치자고 이 거액을 그냥 통장에 단숨에 꽂아버리다니, 돈이 얼마나 썩어나면 그랬는지. 경찰들이 패왕과 협력하여 마왕을 좇으려고 하면서도, 쉽사리 패왕을 수사선상에서 제외하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유중혁은 돈이 돌고 돈 경로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입출금 장소들은 대체로 예전에 보았던 마왕과 연이 있었던 회사들 근처 ATM에 몰려있었다.

가장 많이 거쳐간 곳은, 방배역 근처의 ATM이었다.

방배역은 김독자의 회사 미노소프트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실제로 돈이 입출금된 위치들은 미노소프트와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유중혁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일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 마왕이야 워낙 발도 넓고 거래 관계가 많으니까 여러 회사와 접점이 있을 수 있지.

하지만,

또,

미노소프트?

왜 자꾸 김독자가 다니는 회사가 이런 대목에서 한 번씩 눈에 밟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 신경이 쓰였다. 경찰은 시민의 안전과 빌런의 추적을 위해 패왕과 협력하고 있었고, 비록 그것이 사심인 걸 알면서도 중혁은 경찰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미노소프트 회사와 그 주변 일대의 CCTV기록이 전부 필요하다. 골목 구석구석까지.

이미 있는 기록을 다 뒤져볼 순 없었다. 안 그래도 회사 밀집 지역이고 너무 방대한 범위였으니 빠짐없이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대충이라도 살펴보고, 앞으로도 그 주변을 감시해볼 필요가 있었고, 특히 ATM에서 돈을 입금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야 했다. 유중혁은 미노소프트 근처를 한 번 돌아보기로 했다. 협조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경찰에 CCTV를 요청하고, 경찰차를 타고 다니며 미노소프트 근처를 확인하면서도 유중혁은 마음이 급했다. 자료를 조사한다던 유상아도 한참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연락이 없고, 이지혜도 아지트를 지키면서 마왕에 대한 소문을 정리한다며 감감무소식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했고 하고 있기도 한데 유중혁은 괜히 마음이 급했다. 그렇게 방배역부터 이수역, 내방역, 서초역, 고속터미널까지 한 바퀴 쭉 돌아 다시 방배경찰서로 돌아왔다. 첫술에 배부르랴마는 정말로 짚이거나 보이는 것도 없었다. CCTV 기록들이 모이기 전까지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서로 돌아온 그는 문득, 김독자가 생각나선 핸드폰을 열어 네X버 패왕 팬카페를 켰다. 자신에 대해 쏟아지는 수많은 관심은 필요 없었고, 오로지 김독자가 무슨 글을 올렸는지가 궁금하고 조금 불안할 뿐이었다. 김독자의 아이디 앞글자를 치자 회원 정보는 금방 떠올랐다. 활동 정보 중 최근 단 덧글에 New가 떠 있었다. 가벼운 메모 게시판 댓글들이었다.


[제목: 패왕님은 어느 동네 자주 가시나요?]

글쓴이: 패왕사랑해

패왕님 출몰지역 알고싶어요 ㅠㅠ물론 범죄 있는 그 어디든 가시겠지만ㅠ

└9158: 조만간 방배역 근처에 보이실거란 얘기가 있던데^^;

└패왕사랑해: 진짜요? 대박 땅값도 비싼데 거기 사시나?

밑으로는 김독자(9158)가 몰라요, 거기 회사 많은데 히어로 그만두고 새 일자리 구하시려는 듯ㅎㅎ 하는 댓글을 달아놓고 있었고, 기분이 상한 글쓴이가 김독자한테 욕을 퍼붓는 댓글의 향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뭐라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보는 패왕 유중혁으로서는 상당히 이상한 광경이었다. 댓글의 내용도 그렇고, 구체적인 지역이 나온 것도 조금 찝찝했다. 기분이 안 좋아진 유중혁은 폰을 껐다. 뭔가 이상했다.


김독자는 어떻게 내가 방배역으로 갔던 걸 알고 있지?


간혹 히어로 사생 중에 히어로들의 이동 루트나 계획을 너무 잘 알아내서 빌런들이 역이용하는 예도 있어 사회적 이슈로 다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김독자는 자신이 알기로 패왕 '덕질'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정보 조작이나 추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설마 김독자가 그 정도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유중혁은 조금 놀라웠다. 아니, 무언가 찜찜했다. 마왕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미노소프트와, 김독자가 대답하는 내용의 구체적임이 꺼림칙했다. 이쯤 되면 김독자에게 말해줘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유중혁은,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결국 9158에게 쪽지를 보냈다.

[히어로 패왕 정보를 구하신다던데]

[제가 패왕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좀 많습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까요]

아마 지금처럼 매일 꾸준히 패왕 팬카페에 출석하고 있는 김독자라면 반드시 이 쪽지에 답하겠지. 결혼까지 생각이 드는 상대로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우선 김독자가 정확히 패왕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야만 했다. 만약 정말로 아이돌 같은 우상으로만 여긴다면, 정작 자신의 애인이 그 상대라고 했을 때는 또 어떻게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잠시 후, 답장은 매우 빠르게 돌아왔다. 김독자는 주저 없이 약속을 잡겠다고 하며, 서울 어디 사시나요 하고 묻고 있었다.

이게 나였기에 망정이지 이상한 의도를 가진 납치범이면 어쩌려고 이러지?

유중혁은 나중에 김독자의 안전 수준을 점검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은, 일부러 거처에서 가까운 지역을 몇 개 골라 대었고 김독자는 기뻐하는 듯했다. 한가한 날짜를 대보라길래 언제든 괜찮다고 하니 김독자가 주저 없이 날짜를 고른다. 참 미묘하게도 그건 유중혁이 데이트를 신청했다가 문자로 철회한, 바로 그 날이었다. 쓰린 속을 느끼며 유중혁은 심호흡을 했다. 혹시 지금 제가 괜히 헛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괜시리 진실을 알렸다가 모든 게 엉망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마왕에 대해 곤두선 신경이 마음속을 어지럽혔다.

[그럼 그날 사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만날까요?]

[발신인: 9158]

유중혁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네]


그리고는 직후,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스스로를 의심하다가 이내 양손으로 머리를 싸맸다가, 결국에는 전화기를 들고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유중혁의 얼굴을 못 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데이트 약속 파기로 바람맞은 것도 짜증나는데 어젯밤도 오늘 아침도 중혁이 얼굴을 못 보다니, 말이 돼? 셀카라도 찍어 보내달라고 조르고는 싶은데, 데이트를 멋대로 취소해버린 괘씸한 애인한테 화났다는 티는 내고 싶었다. 일부러 차려준 음식도 손도 안 대고 나왔는데 먼저 얼굴 보여달라고 매달릴 수는 없었다. 꼭, 지금 먼저 연락하면 지는 것 같았다.

우리 중혁이를 정말 사랑하지만 이런 일까지 참아줄 수는 없어.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도 뒷세계에서 일이 터지면 약속을 갑작스레 미뤄버린 적이 많았다는 건 싹 잊은 상태였다. 김독자는, '난 그래도 그럴 때 왜 데이트 못 하는지 이유는 다 대줬다.'라는 명제 하나로 자신의 양심을 보호하는 중이었다. 진실은, 김독자는 이유를 죄다 거짓말로 지어내서 약속을 파기했고 유중혁은 너무나 정직하여 차마 거짓말을 못 하느라 이유도 못 대고 급작스럽게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였지만.

한수영에게서 패왕의 이동 경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김독자의 표정은 계속 부루퉁했다. 전화였기에 망정이지 한수영이 눈앞에 있었다면 날이 갈수록 못생겨진다고 까일 상이다. 별개로 들은 내용은 흥미로웠다. 패왕은 오늘 아침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경찰들과 같이 한국은행으로 이동하였다가, 또다시 서로 갔다가, 무슨 꼬리를 잡았는지 방배경찰서로 간 모양이었다. 방배경찰서와 실제 방배역은 의외로 거리가 있었으나 서에서 굳이, 잠시 나와 방배역 쪽까지 들렀다가 다시 돌아가기도 하였다.

의미심장한 점이었다. 패왕이 돌아본 루트에는 미노소프트를 포함하여 김독자와 은밀히 협력 관계에 있던 회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의 거래 내역을 꽤 많이 잡아낸 듯했다. 제법 오싹하고, 스릴있었다. 유중혁한테 임시로 자신의 평범한 신상을 꾸미기 위해 직장으로 대고 다닌 회사이니만큼, 미노소프트와 마왕의 연관 관계는 찾기가 굉장히 힘든데, 아무래도 실력 좋은 정보원이 저쪽에도 있는 모양이었다. 뭐, 마침 패왕이 그쪽 주변에서 돌아다니기로 했다면 오히려 이쪽에선 땡큐다. 중혁이에게는 출퇴근한다고 해놓고서, 그 근처에서 패왕의 행적을 밟으면 일석이조다.

나도 당분간 미노소프트로 가 볼까?

니가 거긴 또 왜 가?

왜, 거기 내 직장인데. 출근해야지.

얼씨구.

농담이야. 그 잘나신 패왕 얼굴이나 좀 볼까 싶어서 그러지.

한수영은 김독자의 스타일을 뻔히 알았다. 정체가 어찌 되었든 간에, 김독자는 겉으로 보기엔 정말 힘없고 무해한 민간인으로 분류되는 편이었다. 아마 패왕같이 청렴 강직한 본투비 선의 히어로 스타일들은 껌뻑 넘어갈 것이다. 김독자가 멀쩡히 다니기만 한다면 그 누구도 김독자를 빌런으로 의심할 수가 없다. 어지간히 평범하고 약하게 생긴 외형을 이용해서 민간인인 척 접근해보겠다 이거지. 김독자는 그런 짓을 꽤 좋아하기도 했다. 김독자가 그런 평범한 가짜 김독자에 이입할 때마다 한수영은 질색하면서도, 안쓰럽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김독자가 절대 이룰 수 없는 가짜라는 점에서였다.

너 정말 패왕 사생 같네.

나 사생 맞긴 맞아. 나 패왕 팬카페도 가입했거든?

소름 돋는다.

한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돌렸지만, 김독자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히죽 웃기 시작했다. 흘긋 김독자의 어깨너머로 바라본 화면 한가운데에는, '패왕 팬카페'라는 카페명이 크게 박혀있었다. 한수영은 혀를 내둘렀고, 김독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댓글을 달면서 활발히 활동 중이었다.

[조만간 패왕님이 방배역에서 보이지 않을까요?]

너 그런 건 왜 쓰냐?

어? 위대하신 패왕님께서 사생들에게 좀 시달려 보시라고. 히어로가 일하는 와중에 팬들이 달려들어서 범죄를 진압할 기회도 놓치고 피해 커지는 기사 어디 한두 번 보냐? 패왕은 아직 그런 적이 없는 것 같더만.

어차피 걔 팬덤이 그렇게 크지도 않던데.

한수영은 중얼거렸으나 김독자는 그냥 그 일을 하는 것 자체로 희희낙락하고 있는 듯했다. 마이너스 스토킹도 도가 있지, 그렇게 생각하던 한수영의 눈에, 새로운 New가 들어왔다.

야, 너 무슨 쪽지 받았는데?

어?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화면을 몇 번 톡, 톡, 두드리자 1863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낯선 이에게서 온 쪽지가 보였다. 한수영은 쪽지를 읽었고, 김독자는, 패왕 본인이 보냈는지도 모르고 쪽지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덧붙였다.

내가 지금 찐 사생을 잡아낸 것 같네?




아무리 김독자가 유중혁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히어로 정보를 알아보려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나오는 게 유중혁이면 놀랄 것이다. 그리고는 유중혁이 어떤 사람인지 의심할지도 모른다. 혹여 유중혁이 패왕의 극성팬인 줄 알고 배신감에 빠질지도 몰랐다―유중혁 역시 자신의 남은 인생에서 사랑할 상대는 김독자뿐이라고 누누이 말해왔기에,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김독자가 유중혁 말고 다른 누군가를 팬심으로 사랑한다면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유중혁은 그래서는 안 됐다. 김독자는 못 견뎌 할 것이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덕질을 참아줄 자신의 넓은 아량에는 더할 나위 없는 확신과 자부심이 있었지만, 김독자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김독자가 속상해할 것이 눈에 훤했다. 그동안 지금까지 둘이 연애해온 모든 나날을 되새겨보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무척 사랑하여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는 멋진 남자였지만 그에 반해 김독자의 도량에 대해선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냉정했으며 현실을 볼 줄 알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객관적이고 냉정하며 현실적인 선택으로 타인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 상대는,

……미안하지만, 부탁이 있다, 이지혜.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사이드킥이었다. 미안하다는 말과 용돈도 빼먹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이지혜는 용돈 몇 장을 받더니 금세 얼굴이 밝아졌고, 무엇보다도 사부의 '그' 애인을 본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쾌히 응했다. 히어로와 사이드킥과의 계약 조건에 히어로의 연애사 뒤치다꺼리를 해준다는 말은 전혀 없었으나, 호기심이 모든 대의명분을 이긴 듯했다. 이지혜의 들뜬 얼굴에 불안해진 유중혁은, 절대로 티 내지 말고, 그냥 김독자가 패왕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만 알아오라고 누차 강조를 했다. 이지혜는 유중혁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나만 믿어 사부!를 연발했다. 진심으로, 그 누구보다도 믿기 어려웠다.

대망의 약속 전날, 이지혜는 정말 패왕의 사생인 척 보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고등학교 동창 중 찐 돌덕들에게 연락을 돌려서 이것저것을 물어봤으며, 사생의 마음가짐과 사생으로서의 자세를 익히기 위해 심사숙고했다. 자기가 택시를 타고 따따불을 외치며 패왕이 출동한 지역으로 달려가던 이야기, 패왕이 나타나서 빌런과 싸울 때 열심히 끼어들어 백통 대포카메라를 들이대다가 경찰에게 잡혀 통제구역 밖으로 끌려 나온 이야기, 패왕과 관련한 모든 기사를 모아서 패왕의 동선을 캐려다가 빌런으로 오인받아서 조사받았던 이야기까지 하나하나 레퍼토리를 지어내고 열심히 외웠다. 그 모든 스토리를 머릿속에 박아넣으면서도 이지혜는 생각했다. 우리가 듣보라서 정말 다행이다. 진짜로 이렇게 따라오는 애 있으면 완전 무섭겠다, 하고. 지혜는 평소 안 바르던 틴트까지 바르고는 아지트 밖을 나섰다. 유중혁이 그 뒤를 불안한 눈길로 배웅했다.

그 날 이지혜의 오른쪽 귀에는 평소 없었던 피어싱이 한 개 붙게 되었다. 피어싱처럼 보이지만 유사시에 쓰기 위해 만들어놓은 녹음기 겸 무전기였다. 별다른 의도는 아니었다. 유중혁은 이지혜와 김독자가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하게 될지 너무 궁금했으며 그 모든 내용을 직접 듣고 싶었다. 이지혜가 나눴던 이야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상세하게 전달할 리가 없었다.

어찌 보면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을 대하는 애인의 모습을 알고 싶은 집착적인 면이기도 했다. 그러나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기실 유중혁은 김독자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일조차 거의 없었으니까. 이지혜가 혹시 모를 말실수를 할 때 야단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장비였다. 유중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다른 손으로 마왕에 대한 자료를 검색했다.



약속 장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어폰을 통해 지혜가 있을 카페의 소음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 들리더니만 아주 희미하게 음악이 들리고, 지혜가 누군가에게 인사했다.

9158님이세요?

네, 접니다. 혹시 1863?

김독자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답게 작고 희미했지만, 유중혁은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말로 9158이 김독자다. 유중혁은 왠지 모를 흥분에 뛰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그러니까 나 아닌 다른 남자를 덕질하는 애인의 모습을 엿보는데 그 다른 남자도 나인 아주 괴상하고 짜릿한 순간이었다.

패왕에 대해 알고 계신다면서요.

네, 그렇죠.

그게 좀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인지…….

두 사람은 통성명을 끝내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김독자는 낯선 사람 앞에서 긴장한 것인지 말이 많지 않았고, 지혜가 있던 사교력 없던 말재주 다 끌어와서 말을 돌리고 있었다. 이지혜는 생각보다는 잘 하고 있었다.

제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패왕님 덕질해왔으니까 당연하죠. 패왕 직찍 정말 암암리에 돌아다니는 거 아세요? 가면 쓴 거긴 한데 그것도 다 제가 찍은 거예요. 제가 막 패왕님 보려고 택시한테 막 십만원 십오만원 지폐다발 주면서 최고로 밟아달라고 한 적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젠 ■■경찰서가 제 얼굴을 안다니까요, 패왕 쫓아다니는 애라고.

아, 그러면 주실 정보가…….

저야말로 확인하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예?

9158님이, 진짜 패왕 좋아하는 사람인지요. 제가 이거 금쪽같이 얻은 자료인데 돈 받는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막 뿌리고 다닐 수는 없는 거거든요. 패왕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분들한테만 조금씩 드리려고 하는데 9158님 최근에 가입하시곤 활동도 많으셔서 연락드린 거예요. 근데, 진짜 패왕 좋아하시나요? 좋아하는 거 맞으세요?

한순간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지혜의 득달같은 질문 공세에 눌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김독자는 한동안 침묵했다. 유중혁도 덩달아 뛰는 가슴을 제 왼손으로 짓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무엇인가 잔뜩 억누른 떨리는 목소리로, 김독자의 대답이 이어졌다.

저는,


저는, 제 인생을 바칠 정도로 패왕을 사랑합니다.


툭,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유중혁의 왼쪽 귀에서 이어폰이 흘러내려 빠졌다. 유중혁은 그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방금 들었던 김독자의 음성을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했다.

인생을 바칠 정도로 패왕을 사랑해요… 제 인생은 패왕 없이 존재할 수 없어요… 저는 유중혁보다 패왕이 좋아요… 당장이라도 패왕과 사귈 수 있다면 헤어질 거에요…….

실제론 이렇게까지 말한 건 아니었지만 유중혁의 마음에는 그거나 그거나 비슷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와 사귀면서도 단 한 번도 저렇게 절절한 고백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김독자의 사랑고백 리메이크 사이클 악순환ver. 을 돌리던 유중혁은 잠시 후에야 다시 이어폰을 주워 낄 수 있었다.

…그러면 친구 때문에 패왕을 알게 된 거에요?

예, 카페 활동 날짜 보시면 아시다시피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는데 너무 푹 빠져버려서. 제 친구도 패왕의 오랜 팬이라 되게 궁금해해서, 저에게 보여주고 막 그러다가 어느새 보니 저도 좋아하고 있더군요. 그거 때문에 회사도 패왕님이 자주 나타나신다는 지역으로 이직했다니까요?

미노소프트에 다닌 게 그 이유 때문이었어? 유중혁은 그 친구가 누군진 몰라도 반드시 김독자와 절교시키고 싶었다. 이 와중에도 유중혁이 약속 장소에 차를 몰고 들어가서 문을 열며 절교하라고 외치지 않는 단 한 가지 이유는 패왕이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중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유중혁은 이지혜가 뭔가를 더 캐내길 바랐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이지혜의 몸이 이지혜를 먼저 움직였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네.

사부의 애인이 사부(패왕) 빠돌이래서 엄청 흥미롭게 듣고는 있었는데, 너무 재밌게 듣느라 방광이 터질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부 애인이 사부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고 있는 걸 보는 건 정말 꿀잼이었지만 일부터 처리하고 오자. 이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독자가 있는 쪽 복도 끝에 화장실 표지판이 삐죽 보였다. 지혜는 김독자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때,

파직

이지혜는 자신의 오른쪽 귀를 감싸며 풀썩, 엎어졌다. 김독자가 당황하며, 괜찮으세요?를 연발했지만, 지혜는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무전을 통해 듣고 있던 유중혁 역시 제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반사적으로 빼냈다. 이지혜가 김독자 옆을 지나는 찰나 도청기에서 엄청난 노이즈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전파가 혼선된 것 같은 소리였다. 이지혜는 김독자의 손길을 무시하고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피어싱 형태의 도청기를 툭 꺼버렸다. 사부가 난리를 칠 테지만 당장 귀청이 찢어지는 것보다야 낫지. 아직도 멍멍한 귀를 한 번 문질러 주고, 손을 찬물에 한 번 씻어 정신을 차리면서 이지혜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노이즈, 뭐였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노이즈는 김독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극도로 심해졌다. 이지혜는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화장실 문 너머를 노려보았다.


무전기가 꺼진 직후 유중혁은 굉장한 불안에 시달렸다. 갑자기 도청기에서 굉장한 잡음이 나더니, 김독자가 이지혜의 안부를 물었고, 도청기가 꺼졌다.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지혜는 자신의 소중한 사이드킥이었으며 김독자는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애인이었다. 유중혁은 자기가 알고 있는 온 연락망을 동원해서 해당 장소 근처에서 일어난 범죄 테러가 없는지 계속 물어보았으나 대답은 같았다. 아무 일도 없다. 유중혁이 참다못해 코트를 챙겨입고 직접 현장으로 가려던 바로 그 순간 이지혜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끝났어]

[도청기 꺼놔서 미안]

유중혁은 이지혜의 문자를 받고 다시 코트를 얌전히 벗어 걸어놓았다. 이지혜가 도청기를 의도적으로 껐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날 뻔도 했지만, 이유 없이 다른 일을 할 아이가 아니었다. 유중혁은 가만히 앉아 마왕에 대한 일에 다시 집중하면서 이지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지혜는 금방 돌아왔다. 유중혁은 벌떡 일어나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지혜가 더 빨랐다.

사부, 사부 애인 좀 이상한데.

뭐?

이지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보란 듯이 커피에 잔뜩 젖어서 지직거리는 도청기가 있었다. 유중혁이 단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도청기 기종이었다.

이게 사부 애인 옷에서 보이길래 내가 몰래 떼냈거든.

유중혁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 들어갔다. 이지혜는 문밖을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부 애인이랑 헤어지자마자 미행이 붙었어. 실력이 대단한 놈은 아니라서 따돌렸지만. 그러고 보니 마왕과 관련된 기업들 중에 미노소프트도 있지 않았어?

더할 나위 없이 변하는 유중혁의 안색을 보며 이지혜는 입을 열었다.



사부 애인한테, 마왕 끄나풀들이 붙은 것 같은데?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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