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이 익살스레 웃었다. 궁금하면 당장 인스타그램을 켜고 그레그 아델만의 스토리에서 불타고 있는 문제의 키스 동영상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지난 날의 과오를 그렇게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는 쉽게 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트 맥퀸은 신사답게 거절했다. 미켈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근데에….”하고 말을 늘인다.


  “아트,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그 다음이라니.”

  “피자 보이 데리고 사라졌잖아, 너.”

  “걔랑 사라졌다고?”

  “당연히 자빠뜨리러 간 줄 알았어.”


  음담패설을 지껄이면서도 용케 순진무구한 눈빛을 꾸며낸 미켈은 뾰족한 어깨뼈를 들썩이며 아트를 공격했다. 유독 날카롭게 생긴 관절이 어깻죽지를 콕콕 찌른다. 뭐든 한마디 해 보라는 뜻이다. 아트는 힘없이 포크를 놓았다. 밝은 파란 눈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 침묵을 유지하다가 포크를 다시 집어 들며,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맛살이 찌푸려진 모양을 보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미켈은 끈질기게 추궁하는 대신 진위여부를 파악한답시고 아트의 눈동자를 한참이나 들여다 보다가 놓아주었다. 시시한 자식이라고 한마디 하면서.


* * *


  벽면에 가득 붙여놓은 포스터가 열린 창문에서 불어온 바람결에 나풀거린다. 서글서글한 얼굴로 미소짓는 재커리의 하이스쿨시절 사진과 페이스북에 올라왔던 가장 최근 사진을 나란히 배치해 프린트했다. 붉은 상자 안에 하얀 글씨로 때려박은 ‘실종자를 찾습니다’하는 문장이 눈을 사로잡았다.


  재커리 코넬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 5.8피트, 130파운드, 마른 체격.

  컬럼비아 컬리지 신입생, 9월 27일 오전 1시 친구와의 전화통화를 마지막으로 연락 두절됨. 최종목격지는 캠퍼스 내 도서관….


  황금색 뒤통수가 포스터 앞에서 알짱거리며 한참이나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윌 마셜이었다. 그는 두터운 근육으로 울퉁불퉁한 팔뚝을 들어올리고는 그 위에 거칠게 눈두덩을 비볐다. 코 훌쩍이는 소리가 약간 흠이었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태연한 얼굴을 잘만 꾸며냈다.


  괜찮아. 윌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우는 건 재커리를 찾고 난 다음 일이다. 지금 괜히 눈물을 보였다간 재수 옴 붙을지도 몰라.


  재커리는 살아 있어. 애도할 필요 없다. 심호흡을 수 차례 반복하고 나니 쿵쾅거리던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윌 마셜은 보다 생산적인 생각에 몰두하기 위해서 ‘빨간 거미줄’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윌 마셜이 쉐어하는 방 세 칸짜리 아파트먼트의 곰팡이투성이 벽. <셜록 홈즈> 등의 추리 영화에서나 보던 빨간색 거미줄이 그 벽면 위에 그럴싸하게 쳐져 있었다. 각기 연관된 단서를 붉은 선으로 팽팽히 이어서 연관관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도식화 한 것이었다. 거미줄의 한가운데에는 재커리 코넬의 포스터와 메모지에 끼적인 독특한 쥐 문양 그림이 자리했다. 문양의 아래에는 철자법이 헷갈린 듯 두 가지 방법으로 받아적은 고유명사가 써져 있었다. 윌 마셜은 아직도 둘 중 어느 쪽이 맞는지 몰랐으나, 어떻게 읽는지 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무스쿨루스 클럽.’


  윌은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한 메모지를 하나 꺼내들었다. 간밤에 만난 미친놈의 바지주머니에서 훔친 것이었다. 


  ‘23번가, 식료품점 계산대. 롭 존슨.’


  메시지가 가리키는 바에 대해 확신은 가지 않지만, 그래도 무언가 중요한 단서인 듯 했다. 그레그 아델만까지 캐내는 데 벌써 반 년도 넘게 소비했다. 다음 단계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서둘러야 했다. 시간이 길어지면서부터는 재커리가 살아 있을 거라는 믿음을 이어가는 건 끔찍하게 힘들어졌다. 윌은 매일 매 순간마다 무너질 것 같은 절망 속에서 살고 있었다.


  메모지를 무의식중에 구겨쥐었던 모양이다. 화들짝 놀란 윌은 투박하고 큰 손으로 조심스럽게 메모지를 비벼 곧게 폈다. 압정과 붉은 끈을 새로 꺼내어 메모지를 ‘그레그 아델만’의 프로필과 연결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펜을 들어서 메모지의 여백에 ‘아트 맥퀸’이라고 썼다.


  ‘나는 아트 맥퀸이야.’


  세상 그 어떤 이름이 오만하게도 예술(Art)을 등에 업는단 말인가?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윌은 정말이지 입에 담기에 낯부끄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심 그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그런대로 선견지명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이름의 주인에게는, 못 배우고 자라 어휘력이 딸리는 윌 마셜로서는 미처 다 묘사할 수 없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다.


  검은 머리에 시릴 듯한 파란눈을 타고나는 건 아일랜드계에서 주로 보이는 특징이었다. 그런 면에서 아트 맥퀸은 전형적인 아이리쉬였다. 윌은 펜트하우스의 초현실적인 파티조명과 숨이 막히도록 잘 어울리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광대뼈가 올라붙으며 양 뺨을 움푹 패이게 만들고, 깎아지른 듯한 골격을 따라 불그스름한 혈색이 음영처럼 드리웠다. 좌우로 잡아당긴 얄팍한 입술, 그늘지고 음습한 인상을 주는…. 약간 약에 쩐 정키 같았는데, 요즘은 또 그런 게 잘 먹혔다. 프랑스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섹시함이라면서.


  윌보다는 몸집이나 키가 작았지만 그 남자 역시 여전히 큰 편이었다. 그토록 분위기 있는 사람은 어딜 가나 인기가 있다. 그레그 아델만과 친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아마 집안에 돈도 좀 있을 거고, 인생이 아주 살만하겠군. 윌은 빈정대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니까 사람 쉽게 보고 다짜고짜 달려들어서 주둥이를 부딪힌 거 아니겠어.’


  그 안하무인의 작태를 떠올리고 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 못 참을 지경이었다. 문을 잠그고 집을 나왔다. 일을 그만둔 뒤로부턴 다른 다섯 명의 룸메이트와 일상 패턴이 많이 달라져서 이렇게 문단속 하는 일이 늘었다.


  한번 샘솟기 시작한 짜증은 바깥바람을 쐬고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보드카에 절어있던 아트 맥퀸의 혓바닥이 입 안 민감한 곳을 어떻게 건드렸는지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리고 어떻게 돼 먹은 매너인지, 눈을 게슴츠레 올려뜨고서 키스하는 내내 타 죽을 것 같이 쳐다보던 그 새파란 시선까지도….


  “으읏, 진짜 미친 놈….”


  그레그 아델만 이 개자식. 친구도 꼭 지 같은 등신 또라이만 사귀나 보지? 얼굴이 시뻘개진 윌 마셜은 화를 참다 못해 굴러다니는 깡통을 거세게 걷어찼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찌그러진 캔이 나뒹굴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거세게 발을 굴렀다. 대낮부터 마약에 쩐 놈 취급하는 대로변 행인들의 시선에 뺨이 다 따갑다. 얄팍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끈을 당겨 여몄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떤다. 대기화면에 알림이 떠 있었다.


  [윌]

  [유니폼 돌려주러 오는 길이야?]


  무슨 유니폼? 고민한 건 잠깐이었다. 아, 간밤에 사정 사정 해서 겨우 빌려 온 ‘그 유니폼’. 윌 마셜은 난처해서 입술을 꾹 다문다. 커다란 덩치로 엄지 두개를 톡톡거리며 답장을 쓰는 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애처로움까지 느껴졌다.


  [야 미안…. 뭐가 묻어서 빨았어….]


  윌은 그레그 아델만의 파티에 잠입하기 위해서, 작년에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피자 체인점에 들러 유니폼을 빌렸다. 소름끼치는 발상이기는 했는데, 어떻게 해서든 그레고리 아델만과 얼굴을 마주 봐야 하는 상황에서 메신저란 메신저는 전부 차단 당해버렸으니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았어, 인마. 급한 일이라니까 일단 빌려줄게. 근데 네 체격에 맞는 게 AJ 유니폼밖에 없어서 걔 라커에서 꺼내줄 거니까, 내일까진 가져와야 돼. 그새끼 내일 근무거든.”


  워낙 친했던 코워커가 일 년이 지나는 사이 매장 코디네이터로 승진해 있었던 덕택에 가능한 일이었다. 손가락을 두 번이나 걸고 약속한 뒤에 감사의 뜻을 진하게 표출해야 했다. 모종의 도둑질을 사주한 셈이라 대가는 싸지 않았다. 비싼 밥을 한 턱 내겠다는 선언마저도 내걸어야 했다.


  비싼 값으로 빌려 온 장비의 힘은 대단했다. 윌 마셜은 피자가 들지 않은 텅 빈 캐리어를 들고, 모자를 눌러쓴 채로 건물 입구에 포진한 보안요원들을 지나쳤다. 그레그의 파티가 있는 날이면 외부인이 워낙 많이 출입하는 까닭에 그들의 경계도 한 풀 꺾이곤 했다. 게다가 파티 참석객이 사적으로 배달음식을 찾는 건 전에도 수차례 있던 일이기 때문에 배달부의 출입이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이 미친놈아!! AJ 지금 출근했는데 뭐라고 말해?! 이 새끼, 자기 옷 빨리 안 돌려주면 집에 가겠다고 난리 났어!]


  뿔이 난 악마 이모지로 빽빽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윌은 후드로 덮인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무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에 마땅히 답장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석적으로라면 펑크 난 쉬프트 대타를 뛰어줘야 맞겠지만 윌은 곧 죽어도 지금부터 24번가의 롭 존슨을 찾아가야 했다. 눈치만 보고 있는데 다급히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옷 빌려준 친구 제이미였다.


  “여보세요, 제이미-”

  -윌! 너 지금 어디야. 집 근처야? 너 사는 곳이 우리 피자가게 근처잖아, 그렇지?

  “어, 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긴 했는데-”

  -좋은 생각이 났어. 너 당장 우리 매장으로 와. AJ는 내가 붙잡아 둘 테니까, 얼른 이리 와서 네가 얼굴 보고 부탁 좀 해. 그러면 바로 해결이야!

  “아니, 잠깐만…무슨 소리야? 뭘 부탁해?”

  -M사이즈 예비 유니폼이 하나 있어. AJ한테는 존나 작아서 입었다간 자칫 남자 스트리퍼처럼 보이겠지만…. 네가 와서 부탁하면 아무튼 입어줄 거야. 이해했지? 그니까 얼른 오라고!


  제이미가 막무가내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그 중에 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윌은 일단 제이미가 지시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휴대전화를 후드 안쪽으로 집어넣어 귀에 바짝 붙였다.


  “제이미. 이해가 되긴 뭐가 돼? AJ랑 나는 한번 만난 적도 없는 사인데, 내가 부탁한다고 입어줄 리가 있어?”

  -이해 못하겠어?! AJ 걔는 게이야!

  “뭐? 그래서?”

  -세상 그 어떤 게이가 윌 마셜을 보고 마음이 안 동하겠느냐고? 아, 시끄럽고…. 얼른 오기나 해!


  전화가 싱겁게 끊어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미 전화가 끊긴 휴대전화 액정을 쳐다보던 윌은 방금 들은 말이 칭찬인지 아니면 성소수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인지 고민하느라 혼란스러워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이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피자집 문을 열고 윌이 들어섰을 때 제이미는 체격이 좋은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애걸복걸하는 중이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나 손가락을 떠는 모양으로 미루어 꽤 곤욕을 치르는 중인 듯 했다. 도움이 갈급한 소매치기 피해자처럼 보이던 제이미의 찌푸린 눈이 윌을 발견하고 나서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크게 뜨였다.


  “윌! 왔구나아!”


  반가운 외침이 터져나오는 동시에 제이미가 붙잡고 있던 체격 좋은 남자도 윌을 돌아보았다. 상황으로 봤을 때 아마 AJ가 이 남자일 것이다. 그을린 피부와 뿔테안경, 포마드로 머리를 정갈히 넘겼고 옥스퍼드셔츠와 스크래치 진 쇼츠를 입고 있었다. 윌은 이 남자가 신경질적인 표정을 얼굴에서 순식간에 싹 지우는 놀라운 순간을 목격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제이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윌과 AJ를 서로 통성명시켰고, AJ는 원래 그런 성격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윌의 사과와 부탁을 아주 흔쾌히 받아주었다. 제이미가 이따금 메신저로 뒷담화 했던 것과 달리, AJ는 호쾌하고 잘 웃는 사람 같았다.


  “저도 이 근처 사는데…. 괜찮으시면 제 유니폼 다 마르고 나서 받으러 갈게요. 공원까지 조깅 나가는 김에요. 성함이 윌이라고 하셨죠?”

  “마셜. 윌 마셜이요. 그래주시면 제 입장에서야 편하겠지만…. 그래도 빌려가서 제때에 돌려주지도 않는 큰 실례를 저지른 주제에, 그건 너무 죄송해서….”

  “하하. 괜찮아요. 들으셨다시피 예비 유니폼도 있는데요. 그렇지, 제이미?”

  “아, 그렇고말고!”


  윌은 조금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가 지금처럼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면 꼭 흑백영화의 금발 미인들이 ‘난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것처럼 순진무구한 이미지가 있었다. AJ는 윌의 그런 귀엽고 섹시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더 동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부드럽던 AJ의 태도는 전자레인지에 돌려 완전히 녹인 버터처럼 미끌미끌한 수준이 되었다. 멀리서 제이미가 구토하는 시늉을 할 정도였다.


  “실례라니 가당치도 않아요. 제이미의 친구라면 제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윌, 그래서 말인데 번호 좀 주겠어요?”

  “아…. 네.”


  AJ는 아주 유연한 말솜씨로 끝끝내 윌의 전화번호를 받아가기까지 했다. 윌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순순히 휴대전화를 넘겨줬다. 그는 조금 외톨이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붙임성 있는 사람들이 유들유들한 말솜씨로 밀어붙이는 것에 약했다. 요즘은 그래도 좀 나아진 편이지만 어릴 때에는 기껏 열심히 번 돈을 CD강매꾼따위에 어버버거리며 넘겨주기 일쑤였다. 똑부러진 성격의 재커리가 아니었다면 여태 모아놓은 돈도 잘 없는 빈털털이가 되었을 것이다.


  “벌써 가시게요?”

  “할 일이 있어서요.”

  “연락할게요.”


  AJ가 아쉬운 티를 내며 전화하겠다는 손동작을 해 보였다. 제이미가 예측한 대로였다. 윌은 조금 싱겁게 웃고 피자집을 나왔다. 그레그 아델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새끈한’ 외모야말로 윌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오늘 그 장점 한번 제대로 발휘하는군. 윌은 쇼윈도우 너머에서 아직도 불타고 있는 AJ의 눈빛을 보면서 천천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23번가 식료품점에서 롭 존슨을 찾으랬지….’


  그리고 천천히 할 일을 생각해냈다. 23번가. 벽에 꽂아 둔 쪽지의 내용을 되새겼다. 이 쪽지가 ‘무스쿨르스 클럽’과 관계되어 있다면…. 그러면 23번가에서 뭔가 재커리에 관련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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