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막 샤워를 끝내고 몸을 닦아내고 있던 세미의 눈에 전에는 보지 못하던 무언가가 걸렸다. 분명 샤워 할 때도 이런 거 없었는데.


“안...지워지네.”


세미는 몇번 문질러 본 결과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결국 나왔구나, 나도.


세미의 쇄골 바로 아래에 문신을 한 것 처럼 새겨져있는 것은 알파벳 K였다. 아무리 여러 형태로 나온다지만 이건 조금 심하지 않나 싶었다. 겨우 이니셜 하나로 어떻게 운명의 상대를 찾는다는 말인가. 샤워 할 때 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거라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게 아니다. 어차피 언젠간 나올거라 생각했고 현재 사귀고 있는 사람도 없으니 그닥 흥분되거나 들뜨지는 않았다. 옷을 입으면 가려질 위치에 생겼다는 사실 하나는 다행이네. 세미에게 몸에 새겨진 네임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네임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의 몸에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름만, 성만 있는 경우와 풀네임이 모두 나오는 경우가 가장 흔한 형태였다. 사실 거의 모두 그러했다. 아주 가끔 이니셜만 새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은 가장 지독하게 딱 하나. K. 자연스레 주변에 K가 들어가는 사람을 떠올리게 되었다. 케이라...케이...케이...


주변 사람들 몇을 머리속에 나열해보다 기분이 나빠져서 관두었다. 가까운 친구들을 그저 네임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연애감정을 품고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의외로 현실적인 성격인 세미였기에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이었다. 이런거에 신경 쓰지 말자. 정말 신경 써야 할일 들은 따로 있잖아. 서브 위력도 더 높여야 하고 가장 중요한 토스 연습도...또...


세미는 티셔츠를 마저 꿰어입었다. 네임에 대한 생각은 금방 머릿속에서 점멸하고 말았다.



네임이 드러난지 2주가 되어갔다. 별 일은 없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 세미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 일도 없었고 세미가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고. 아, 시끄러운 일이 있기는 했다. 막 연습을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에 텐도가 세미의 네임을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던 일. 정작 세미는 굳이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서 이제 봤냐는 식의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텐도가 신나서는 K라니 너무 한거 아니냐며 ‘혹시 주변에 있지는 않을까?!’ 하고 허튼 소리를 했다. 세미가 대꾸 해주지 않아도 혼자서 잘 쿵짝을 맞췄다.


“와카토시도 들어가네?”

“켁!!”


뜬금없이 우시지마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텐도에 무시로 일관하던 세미가 깜짝 놀라서는 마시던 드링크를 내뱉을 뻔 했다. 사례가 들려 기침을 하고 있자 들어가지 않는 쪽의 야마가타가 거들었다.


“그러네. 와카토시에도 K가 들어가는구나. 생각보다 많을지도?”

“아니, 너희 왜 여기서 찾을 생각을 하냐고!”


겨우 진정을 한 세미가 민망해져서 버럭 소리치자 텐도는 신경도 안쓰고 계속해서 K가 들어가는 이들을 찾아냈다. 세미는 머리가 아파오는 듯 했다. 대체 왜 여기서 헛다리를 짚는거야. 애초에 나는 관심도 없는 운명의 상대를 왜 찾는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항상 ‘세미세미는 무드가 없어!’ 라며 나무라던 텐도 답기는 했다.


“그럼...네임이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을 제외하면 와카토시랑 시라부, 카와니시, 츠토무 뿐 인가?”

“저요?”

“세미와 4명의 기사단이구만.”

“오, 좋은데.”

“좋은겁니까?!”

“그럼. 와카토시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이잖아?”

“그렇군요!! 지지 않을겁니다!!”


결국 4명이 추려지자 야마가타가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의 치정싸움 각본을 짜야하는 것 아니냐며 세미를 놀려댔다. 고시키까지 합세해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 세미는 황당함과 동시에 어쩐지 창피해지기도 했고 우연히 목격한, 이름이 불리는 순간부터 표정이 어두운 시라부의 얼굴 탓에 마음이 쓰여 상황을 무마시켰다.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까지 들었다. 내가 벌린 일도 아닌데 미움만 받겠네. 남의 속도 모르고 장난만 치는 이들을 째려본 세미가 한숨을 쉬었다. 사실 평소엔 저들의 장난에 속편히 웃거나 거들던 세미였지만 자신의 얘기가 되니 달랐다.


“자자, 이 쯤 해. 이 중에 있을리도 없고 난 운명의 상대니 뭐니 관심도,”

“여기에 있을 수도 있죠.”


관심이 없다고 하려는 찰나에 카와니시가 선수를 쳤다. 꽤나 도발적인 발언에 세미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이상하다. 분명 목소리는 딱딱했는데. 말의 저의를 모르겠어 갸웃거리자 카와니시는 고개를 휙 돌리고는 자신의 발언 때문에 분위기가 타오르는 부실을 벗어났다. 세미는 안그래도 곤란한 상황인 와중에 폭탄을 던져놓고 나가버리는 카와니시가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조금 신경쓰였다. 불난 곳에 기름을 들이 붙다니, 귀찮은 걸 싫어하는 카와니시 답지 않았다.


이런 장난을 좋아하던가? 피어오르는 의아함에 문만 쳐다보고 있자 아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시라부와 눈이 마주쳤다. 실상은 시라부가 세미의 시야를 가로 막은 거지만. 그래놓곤 눈이 마주치자 마자 얼굴을 돌려버렸다. 정말로 미움받는걸까...장난친건 텐도인데 왜 나한테 이러는거야!


억울한 마음에 세미는 결국 시라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입을 열었다. 시라부의 아니꼽지 않은 시선이 다시 붙었다.


“저...시라부, 기분 많이 나빠...? 내가 사과해야 할 건 아니지만 니가 화난 것 같아 보여서 사과 할,”

“아닌데요.”


마음은 억울하다만 나오는 말은 어쩐지 변명이었다. 그런데 정말 화난 것 처럼 말을 뚝 끊고 몸까지 돌려서 가버리는 시라부에 세미는 어버버 하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누구 얼려버릴 것 처럼 쳐다봤으면서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런 부류의 장난을 아무리 싫어해도 그렇지 말을 뚝뚝 끊어버리다니, 정말 귀엽지 않단 말이야. 그래도 내심 기분 나쁘냐는 말에 긍정하는 대답을 들었으면 조금 상처 받았을 것 같아 은근히 안심이 되었다.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않는 시라부였으니까. 시라부 녀석. 짜증이나 낼 줄 알았는데 실은 날 이렇게 엮여도 되는 선배로 보고 있었나보다.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헛다리를 짚는 세미도 모른채 시라부는 혼란 속에서 가방을 챙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시라부는 앞서 나간 카와니시의 등을 빤히 바라보다 뒤를 돌아보는 카와니시가 시라부의 시선에 왜 그러냐고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를 지나쳐갔다. 가방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와니시의 얼굴이 미세하게 상기 되어 있다는 걸 알아챈건 시라부 뿐이었다.


아니기는 개뿔. 씨발. 거짓말이다. 기분이 나쁘다 못해 짜증이 났다. 시라부는 세미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었다. 세미에게 나타난 K는 완전히 사실을 입증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사실 시라부는 세미를 좋아했다. 더 정확히는 사랑했다. 예쁜 꽃을 보면 당연히 갖고싶잖아, 꺾어서라도. 그게 시라부의 사랑이었다. 조금 과할지도 몰랐다. 시라부에겐 아무래도 상관 없었지만.


시라부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세미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않을 거라는 걸. 시라부는 이름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새겨지지 않는 사람. 처음엔 애석하였으나 지금은 이름 따위 상관 없었다. 세미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으니까. 애초에 자신의 몸에 새겨질 이름이 세미가 아니었을 사실이 자명하자 그건 행운으로 바뀌었다. 적어도 볼때마다 비참해 지지는 않을테니. 세미의 이름이 아니라면 다른 이의 이름은 그저 불쾌할 뿐이었다.


처음엔 가벼운 사랑이었다.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나이의 달콤한 살랑거림이었고, 그저 옆에서 지켜보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지나치려 했다. 세미에게 있어서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 남으려 했다. 그가 후에 운명의 상대를 만나 행복해지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알게 되었다. 세미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카와니시 타이치


알고 싶지 않았던 이름의 주인은 시라부와 가장 가까운 친구인 카와니시였다. 빌어먹게도 알아버렸다. 정말 우연히. 철저히 숨기던 카와니시 였으니 같은 방을 쓰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지도. 항상 이불도 꼭꼭 덮고 자던 카와니시가 그 날은 답답했는지 이불을 옆으로 밀어내고 불쌍하게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아침에 우유를 마시며 깨우려다가 커다란 녀석이 온 몸을 구기고 자는게 한심해서 보고 있었는데 올라간 티셔츠 밑으로 글씨가 보였다.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숨기던 모습에 약점으로 삼을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 이름을 확인했다. 확인한 이름은 제 마음에 박혀있던 이름과 한치의 틀림도 없이 똑같았다. 마음에 돌이 내려앉았다. 쿵- 하고 큰 소리를 내고. 세미 에이타. 헛웃음이 나와서 카와니시를 깨우지도 않고 나와버렸다. 사실 그 정도 였다. 그냥 비참하고 질투가 나서 눈물도 안 나올 정도. 내가 사랑하는 이의 미래에 있을 사람이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 딱 그 정도.


시라부는 자조하며 한가득 부풀어 있는 마음을 생각보다 일찍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차곡차곡 쌓여가는 진실들이 시라부를 자극하고 온 마음을 주물러서 포기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세미의 네임을 들은 순간부터 짜증이 난 마음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세미는 의외로 현실적이라는 사실. 올곧고 강해 보이지만 세미는 아끼는 사람에게만은 마음이 약한 면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아끼는 후배이며, 세미는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이 없고 오늘 안 세미의 몸에 새겨진 글자는 겨우 K라는 사실까지. K라니. 이건 정말 운명이잖아.


하찮게도 달랑 이니셜 하나였다. 그것이 시라부의 선택지를 열었다. 시라부는 자기가 내린 결정, 처지, 미래까지 모두 뒤집어 버리기로 했다. 겨우 지워지지 않는 이름 따위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더 운명적이지 않은가. 시라부는 다른 운명을 믿기로 했다. 시라부의 눈이 빛났다.


하필 K여서.

하필 내가 너의 친구여서.

하필 나의 이름이 켄지로여서.

하필 내가 선배를 좋아해서.


정말로 미안해, 카와니시.


시라부는 카와니시가 세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미는 자꾸 신경이 쓰였다.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뭐가?”

“으응, 아무것도...”


밥알 하나하나를 셀 듯이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집어먹다 한숨처럼 흘러나오는 말에 착실히 대꾸해주는 야마가타를 보며 세미가 고개를 젓다가 아예 수저를 내려놓았다. 신경이 쓰였다.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꽤 예뻐하는 후배가 자꾸 자신을 피하는 것 같은데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저번에 텐도의 장난 이후에도 혹시 몰라서 확실이 해두었었다.


‘나는 운명인지 뭔지 그런거 잘 믿지도 않고 K니 뭐니 다 장난이니까. 알겠지? 난 전혀 너희 그렇게 안봐. 미안하게 됐어.’

‘잘 알겠으니까 그 얘기는 그만 하세요.’

‘그, 그래?”


그렇게 잘 끝냈는데. 카와니시에게도 따로 가서 해명 아닌 해명을 하자 카와니시는 시라부와 달리 모나게 구는 것 없이 웃으며 ‘그러세요?’ 했었는데. 그러니까 이건 문제가 아닐터였다. 그렇지만 정말 짐작 되는 일이 없었다. 사실 원래도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얼굴만 보면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불러도 쌩 가버리고, 어쩌다 말을 섞을때도 할 말만 하고 가버렸다.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세미는 결국 떠보는 것 없이 직구를 날리기로 결심했다.



“시라부, 내가 실수한 거 있어?”


연습이 끝난 후 탈의실엔 둘만 남아 있었다. 세미의 의도적인 연출이였다. 뒷정리 당번인 시라부였기에 기숙사로 돌아가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 입으러 온 시라부가 락커룸에 기대어 서있는 세미를 발견하고 잠깐 멈칫거린 후 재빨리 못 본 척 옷을 갈아입었다. 완전한 무시에 세미가 화라도 낼 줄 알았던 시라부였지만 의외로 세미는 묵묵히 있다가 조용히 툭 내뱉는 것이였다. 시라부는 세미에게 눈길 하나 주지않고 대답했다.


“아뇨.”


세미는 울컥하는 마음을 꾹꾹 누르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짜증의 기색이 여실해서 세미의 의도와는 다르게 세미가 참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그럼 왜 그러는데? 자꾸 나 피하잖아. 이것도 아니라고 할거야? 화난거 다 보이는데 말도 안되는 거짓말 할 생각 하지마.”

“아신다니 그거 다행이네요.”

“시라부!!”


세미가 화가 났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라부가 이죽거렸다. 세미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자 시라부는 아무렇지 않게 교복 마이를 꿰어 입고는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세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 마냥 세미의 앞을 지나쳤다. 세미는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어 시라부의 손목을 잡아챘다. 딱히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시라부의 발걸음이 멈췄다. 결국 뒤를 돌았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다. 세미의 날카로운 표정이 단숨에 풀렸다. 뒤를 돈 시라부의 표정이 예상 외의 것이었다. 무언가에 상처를 받은 사람처럼 아파보이는 눈을 하고 세미를 바라보았다. 세미의 손이 힘 없이 미끄러졌다.


“너...”


시라부의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의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보고만 있어도 미안해지는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며 뭐라 말을 하려다가 말문이 막혀서 고개를 조금 숙이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없이 이럴거라 생각은 안했지만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렇게 괴로운 얼굴을 하는거야? 도저히 모르겠는 시라부에 속이 까맣게 탔다. 화는 이미 풀리고 없었다. 세미는 복잡한 얼굴로 이번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조용한 세미의 목소리에 시라부가 시선을 돌렸다.


“내가...뭘 잘못했는지 말해 줘.”


시라부는 운동을 할 때 보다 가슴이 빠르게 뛰는게 느껴졌다. 이를 악 물었다. 세미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드러낸 얼굴을 보였다. 그런데 세미가 너무 필요 이상으로 다정해서 오히려 자신의 속이 뒤집어졌다. 마음까지 세미에게 이리저리 굴려졌다. 단지 가까운 후배에게 하는 말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울컥하는 감정이 이곳 저곳에서 쏟아져 내렸다. 원래 자신의 사람을 잘 챙기고 태생이 다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하는 말들은 마치 자신을 특별히 여겨서 그러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런 태도가 나를 대책없는 사랑에 빠트렸어요. 그래서 이번엔 내가 빠트리려고. 이를 빠득 갈았다. 세미의 진심 어린 얼굴이 시라부의 마음을 녹였다. 거짓을 말하기가 주저됐다. 지금 정말 나를 특별히 여기도록 만드려고 하는 거잖아. 더 이상 지체하면 안된다. 이번을 놓친다면 아마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터였다. 양심은 여유가 있을 때나 챙기는 거지.


세미는 대답도 없고 시선도 피해버리는 시라부가 스스로 말을 해주기 전 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자꾸만 낯선 얼굴들을 보여주는 시라부가 이상하게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꼭 울 것만 같이 말을 고르는 시라부가 세미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저는 이름이 나오지 않을 거에요.”

“응?”


중얼거리는 시라부의 말이 너무 뜬금없는 지라 세미가 되물었다. 시라부의 시선이 세미의 쇄골 아래쪽으로 꽂혔다.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아차린 세미가 몸을 굳혔다.


“선배는 정말 운명의 상대가 나타난다고 해도 거부하실 건가요?”

“갑자기 무슨...,”

“그럼 저는 어떡하라고요.”


시라부?

놀람과 의아함이 가득 담긴 부름에도 시라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감정이 잔뜩 눌러내린 말들이 세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선배는 상대 생각은 전혀 안 하시나 보죠. 선배만 기다렸는데 그런 얘기를 하시는 바람에 고대하던 순간이 썩 유쾌하진 않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엄청 상처받았어요. 난 보여줄 이름도 없는데, 상대는 업신 여기기나 했다니.”

“내가 언제...! 아니, 잠시만. 지금 K가 너라는 거야? 내가 이해한게 맞아?”

“네. 근데 세미 선배에겐 상관 없는 일이잖아요. 뭘 놀라고 그러세요.”

“아니, 난...대체 무슨 근거로...”


세미가 당황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런 이유일지는 상상도 못했어. 시라부가 K라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건지 세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시라부가 낯설었다.


시라부가 한 발작 멀어진 세미의 앞으로 두 걸음 다가섰다. 물러나기 전보다 더 가까워진 거리에 세미는 뒤로 더 물러서려 했으나 등에 닿는 감촉이 벽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언제부터인지 시라부의 표정은 다시 무표정으로 바뀌어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라부의 입이 떨어졌다.


“내가 선배를 좋아하니까요.”


꾸미는 것 없는 고백이었다. 묵직한 진심이 저릿하게 와닿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에게서의 고백이라 세미의 머릿속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변명에 어두워졌던 시라부의 표정과 아까의 상처를 받은 얼굴이 가슴에 와서 박혔다. 정작 고백을 한 당사자는 이제는 정말 담담하다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 세미는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죄책감에 의해서.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던걸까. 그동안 본의 아니게 상처를 많이 남겼을 것이다. 미안함에 견딜 수가 없어졌다. 세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정말 부원중에 있을거라고 생각 못했어. 게다가...아니, 미안해. 내가 너를 아프게 했겠지...”

“제가 싫으세요?”


세미와는 반대로 시라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전혀 고백을 한 사람같지 않아 이질감이 느껴졌다. 세미는 고개를 저었다.


“싫지 않아. 오히려...”

“그럼 저를 사랑해주세요.”

“난...”

“선배는 내 운명이잖아. 나를 사랑하게 만들게요.”


반드시 그렇게 만들테니까.


읊조리는 시라부에 세미가 고개를 들었다. 시라부의 올곧은 두 눈에 자신이 비쳤다. 사실 잘 모르겠다. 마냥 같은 포지션의 귀여운 구석이 없지만 미워할 수 없는 후배였는데, 연애감정을 품고 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거절의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처음과 달리 고백을 하고 나서는 맑아진 눈을 한 시라부였지만 그런 말을 한다면 잔뜩 구름을 몰고와 와르르 흘려버릴 것 같았다. 세미는 울 것 같이 찡그린 눈을 하고선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그럴게.


강압적인 듯 했지만 긍정의 말이 들려오자 마음이 탁 풀려버린 시라부가 세미를 와락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세미는 주저하던 손을 등에 얹고 마주 안아주었다. 시라부의 목소리가 물기 어려있었다.


“다행이다...드디어...”


터져나오듯 말하는 목소리가 세미의 마음까지 적셔서 그저 마주 안아주기만 했다. 온통 혼란스러웠다. 단숨에 바뀌어버린 관계도, 꽉 껴안아 오는 손길도, 자신의 마음 까지도. 모든게 혼란이였다. 쇄골 밑 시라부의 것일 이름이 어쩐지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정말 좋아하게 될까. 확신할 수 없는 마음인데 덜컥 약속을 해버려도 괜찮을지, 오히려 시라부에게 더 상처를 주는 일은 아닌지 두려움이 피어났다. 겨우 몸에 새겨지는 지울 수 없는 글자일 뿐인데 사람의 운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걸까. 너는 왠지 너의 운명의 상대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고 행복해질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날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안타까워져서 그런건지 밀어내야 하는 손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잠자코 안고만 있는 너의 몸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하나 새겨져 있지 않아서 자신이 없다고 말 할 수 없었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족쇄가 발목에 채워진다. 모든 상황에 위화감이 든다. 눈을 꾹 감았다.


너는 왜 새겨지지 않은 운명에 흔들리고 나는 왜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 흔들리고 있을까.


사랑은 사소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모든게 시라부의 계획대로 되어갔다. 날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세미의 마음에서 시라부가 심은 감정이 피어가기 시작했다.



“시라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침대에 기대어 앉은 시라부의 품 속에서 몸을 기대 앉아있던 세미가 고개를 들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지 멍한 얼굴의 시라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는 세미의 볼을 본 시라부가 손을 들어 얼굴을 콕 찔렀다. 볼 살이 있는 편이 아니라 말랑한 감촉은 아니었지만 부드러운 피부가 기분이 좋아 양 손으로 문질거렸다. 세미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하는 거야.”


세미의 기분좋은 웃음에 따라 미소를 지은 시라부가 세미의 얼굴을 잡고 고개를 다시 자신의 쪽으로 돌려 끌어 당겼다. 세미의 말캉한 입술에 몇차례 쪽쪽 버드 키스를 했다. 세미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가 싶더니 소리 내어 웃으며 몸을 더 깊게 묻었다. 파고드는 세미의 온도가 기분이 좋아 시라부는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행복했다.


세미와 연인이 된지, 세미에게 거짓을 말한지 세 달이 넘었다. 그 사이에 둘은 세미의 걱정과는 달리 달콤한 연애를 하게 되었다. 세미는 빠르게 시라부를 사랑하게 되었고 시라부는 무뚝뚝하게 굴었던 것은 언제냐는 듯이 그동안 주지 못했던 애정까지 가득 안겨주었다. 둘은 지금도 세미의 방에서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손만 잡아도 어색하게 굳던 세미는 언제 그랬냐는듯 이젠 진한 스킨쉽도 거부하는 법이 없었다. 시라부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시라부는 세미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확신을 한 그 날 카와니시에게 입을 열었다.


“세미 선배랑 사귀고 있어.”


시라부의 말에 눈에 띄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책을 넘기다 손을 멈춘 카와니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이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잘 됐네.”


목소리는 저녁 메뉴를 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평온했다. 시라부는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카와니시는 생긴거와 다르게 무르고 착해서 아마 이후로도 저에게서 세미를 뺏어가지 못할 것이다. 바보 같기는. 내가 모든 것을 알고 본인의 운명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영원히 말 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마저도 네 운명이겠지, 카와니시.


카와니시는 이미 시라부와 세미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척했다. 굳이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시라부의 입에서 나온 진실은 심장을 꽉 쥐고 흔드는 것 처럼 아팠다. 카와니시는 세미에게 이름을 보이며 사랑해 달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서 그에게 마음을 내보이고 그의 마음을 얻어서 마침내 서로의 이름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시라부는 카와니시와 함께 있는 방에 있는 시간이 줄었다. 선배에게 간 거겠지. 혼자 방에 남져질때면 이읃고 비참함이 찾아왔다. 외면하고 있던 처절한 감정이 어두운 저녁 하늘과 함께 카와니시의 주위를 애워쌌다.


허리에 있는 글자를 지금이라도 선배에게 보이면 나에게 와줄까. 최소한 세미의 마음에 돌을 던져 파동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아마 그와 사귀고 있는 사람이 남이라면 그리 했겠지.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품으로 데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시라부였다. 가장 가까운 친구인 시라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왜 하필 네가 선배를 좋아하는 거야? 그렇게 따져 물으며 멱살을 틀어쥐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내야했다. 때를 놓친 자신은 세미와 시라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원치 않은 눈물이 흘렀다. 문득 자각도 하지 못한 채 떨어진 눈물은 둑이 터진 것처럼 주륵주륵 쏟아져서 카와니시를 무너트렸다. 벽에 기대어 있던 카와니시가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아팠다. 너무 아파서 가슴이 뜯기는 것 같았다. 격통에 어쩔 줄 모르고 눈물만 흘렸다.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한심해서 머리가 핑 돌았다. 자책해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목이 메었다.


“사랑하는데...계속 사랑하고 있는데...”


울며 중얼거리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이름이 나오기 전부터, 바짝 긴장해 있던 자신에게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고 ‘세미 에이타’라는 이름을 처음 알려 주었을 때부터 줄곧 좋아해왔는데. 가까운 후배로만 보는 그에게 자신이 없어서 다가가지도 못하고 아닌 척 뒤만 쫒다가 어느 날 나타난 이름을 보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무색하게 이름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하고 카와니시에게 말 못할 고통만 안겨주었다. 자신은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시라부와 세미의 사이에 끼어드는 건 할 수 없다. 세미를 사랑하는 마음이 카와니시의 이기심을 압도하기에.


그래서 카와니시는 기다리기로 했다. 세미에게 이름을 보일 수 있을 때까지. 시라부와 세미의 견고한 사이에 틈이 생길 때까지. K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밝힐 수 있을 때까지. 카와니시는 기다리기로 했다. 기약없는 기다림에 지쳐 사랑이 죽어버리더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걸 알아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어쩌면 틈은 영원히 생기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카와니시는 운명을 믿었다. 선배의 운명은 나니까. 나임에 틀림없으니까. 당신은 원래 나의 것이었으니까.


긴 기다림이 카와니시를 말려 죽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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