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4)


“...마셔라.”

죠타로가 잔을 내밀었다. 죠타로가 정신붕괴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의 공황상태에 빠진 카쿄인이 사시나무처럼 떨어댔기 때문에 조금 전 그는 혀를 차며 카쿄인을 식당 의자에 앉힌 참이었다. 카쿄인은 잔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떨어뜨리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죠타로는 다시 혀를 차며 카쿄인의 두 손을 다 끌어다가 잔을 꼭 쥐어 주었다.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그제야 약간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카쿄인은 숨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다시 한 번 물을 몇 모금 넘겼다. 죠타로는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간 그늘이 드리운 얼굴이 거의 음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섭나.”

“아뇨, 그런 것보다는...”

뭐, 이제까지 이따금씩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이지만 떨었던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카쿄인은 뒷말을 삼키며 남은 물을 다 마셨다. 그와 동시에 그 나름대로의 결의도 다졌다. 이 죠타로는 그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어쩌면 그 자신의 의지로 온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정답을 찾지 못 한다면 물러서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카쿄인이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가 미지수라고 해도 해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제대로 된 답 비슷한 것이라도 내놓으려면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당신 이야기를 해 주세요, 죠죠.”

“...내 이야기?”

“저는... 그러니까 당신이 아는, 당신 세계의 저는 죽은 거죠?”

“......”

“어째서죠?”

죠타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모자챙을 낮추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는 카쿄인의 맞은편 의자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식탁 위에 올린 손이 가늘게 떨렸다.

“...꽤나 시시한 이야기다만...”

죠타로는 그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해 겨울 쿠죠 죠타로의 인생은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평온하다 못해 시시하고 지루하던 일상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나고, 파국은 ‘스탠드’와 ‘DIO'의 이름을 하고 그를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DIO'가 100년 동안이나 죠스타 가와 악연을 맺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죽이고 그 몸을 빼앗은 가문의 오랜 숙적, 사악한 흡혈귀. B급 영화 설정으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얼굴이 너무 심각해서 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홀리의 생명까지 위태로워졌을 때는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마 믿을 수밖에 없어서, 죠타로는 DIO를 쓰러뜨리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일행은 네 명이었다가, 다섯 명이 되었다가, 또 네 명이 되었다가 다시 다섯 명이 되고, 마침내 여섯이 되었다가 - 단 하룻밤만에 세 명만 남았다. 사실 죠타로는 그것을 실감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누구의 죽음도 보지 못 했다. 그저 뒤늦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DIO를 쓰러뜨리고, 아침 해가 떠오르고,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죠타로는 마침내 사라진 세 사람의 빈자리를 실감했다. 그는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기어이 싸움이 벌어졌던 현장을 다시 찾아갔다.

한 명은 시체조차 없었다. 핏방울 하나 남기지 못 한 채 어딘지 모를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한참 나중에야 전해들을 수 있었다. 한 마리는 반쯤 무너진 건물 한구석에 고요히 누워 있었다. 죠타로는 그 시신을 조심스럽게 수습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건물을 나섰다.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곳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그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부서진 시계탑이 보였을 때는 정말로 시간이 멈춰 버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마지막 한 사람은 그 시계탑 위에 서 있었다고 했다.

죠타로는 시계탑 대신 뒤편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박살이 난 물탱크가 보였다. 안에 있던 물은 물탱크가 부서졌을 때 밖으로 흘러나와 이제는 거의 다 말라붙었다. 그 물에 섞여 바닥을 더럽혔을 사람의 피와 살점도 이제는 마른 바닥 곳곳에 흐릿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시신은 없었다. 죠셉과 죠타로를 후송할 때 스피드왜건 재단에서 함께 수습했다고 했다. 죠타로는 다만 시신이 있었던 자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왜 그들이 죽어야만 했을까?

목숨을 건 여행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 누군가가 죽어야만 한다면 관련이 있는 사람이 죽는 편이 그나마 납득 가능하지 않을까? 죠셉은 딸을 살리기 위해 여행길에 올랐다. 폴나레프는 여동생의 원수를 갚으려고 끝까지 따라왔다. 그들이나 죠타로 자신이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압둘은. 이기는. 카쿄인은. 죠타로는 다시금 부서진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카쿄인은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시계를 망가뜨렸다. DIO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서.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이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 세계의 그 누구도 오늘 아침의 일출을 보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카쿄인이 죽어야만 했을까?

죠셉은 죠타로를 위로하며, 많은 사람들이 DIO에게 정말 많은 것을 잃었다고 했다. 그래도 그 여행은, 그 지난 50일은 즐거웠노라고. 죠타로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힘든 여행이었고 이런저런 심적 부담도 많았지만 그 시간이 그저 우울하고 고되지만은 않았다. 사실 아름다웠던 나날이었다. 그래서 추억은 꼭 그만큼 눈부시게, 차마 되짚어 볼 수 없을 만큼 반짝반짝 빛났다. 죠타로는 죽은 이들을 생각했다. 영안실에 누워 있을 카쿄인의 시신을 생각했다. 그는 시신을 보러 가지 않았다. 보고 나면 뭔가를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 버렸음을 알면서도, 눈을 돌리면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다음날 죠타로는 또다시 부서진 시계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계는 아직도 멈춘 채 그대로였다. 마치 시간이 정말로 멈춰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죠타로는 DIO의, 아니 그의 스탠드 더 월드의 능력을 생각했다. 왜 하필이면 그런 능력이었을까. 이제 같은 능력을 갖게 된 스타 플래티나에 대해 생각했다. 왜 같은 능력이어야만 했을까. 가령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었다면. 백 보 양보해서 압둘과 이기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카쿄인은, 카쿄인만이라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순간 죠타로는 자신이 이 결말을 결코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필요한 일이었다 해도, 다 이렇게 될 일이라서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그 자신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일로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

그 순간 스타 플래티나가 잠깐 반짝였던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짧은 한순간이었다. 죠타로는 눈을 깜빡였다. 사람들이 뒤로 걸어가고 있었다. 자동차도 뒤로 달려갔다. 세계가 그를 남겨 두고 거꾸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서, 마침내는 스타 플래티나의 눈으로도 좇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순간적인 어지러움에 죠타로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잠깐 정도는 휘청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죠타로?”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죠타로는 눈을 떴다. 더없이 심각한 얼굴을 한 카쿄인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다음 질문에 죠타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쿄인은 다소 미심쩍다는 듯 그를 잠시 바라보았으나, 이내 죠셉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저도 폴나레프와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를 혼자 보내기는 위험할 것 같습니다. 둘로 나뉘어서 DIO를 포위하는 게 어떨까요?”

죠타로는 잠시 망연했다. 이것은 분명 최종전 직전의 그때였다. 그때 죠타로는 자신이 폴나레프와 합류해서 뒤를 따르겠다고 했다. 죠셉과 카쿄인은 DIO를 유인하며 도망치기로 했다. 그들은 여기서 갈라졌고, 그것이 카쿄인을 본 마지막이었다. 정말로 시간이 되돌아갔다. 죠타로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는 DIO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더 이상 카쿄인이 희생해야 할 이유 따윈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카쿄인의 목숨을 구하고 말 것이다.

“...카쿄인, 영감.”

두 사람이 죠타로를 돌아보았다. 죠타로는 잠깐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실패했군요.”

카쿄인은 고요히 물었다. 죠타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카쿄인은 시선을 떨구었다. 죠타로는 ‘수십 번을 다시 했다’고 말했다. 그가 첫 번째 시도에 곧바로 성공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 오지도 않았을 테고. 엉뚱하게도 그 다음엔 작년 12월의 일이 떠올랐다. 죠셉이 스탠드 사용자들을 초대한다며 ‘호그와트 입학초대장’을 보냈을 때, <해리 포터>가 뭔지 모른다는 죠타로에게 카쿄인은 ‘목덜미에 별 모양 반점이 있는 강력한 스탠드 사용자가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혈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사악한 흡혈귀를 물리치는 얘기’라고 설명했더랬다. 왜 그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당신도 시간을 멈출 수 있으니까 먼저 시간을 멈추고 공격하면 안 되나요?”

“불가능해.”

“어째서요?”

“우리 둘 다 시간을 멈출 수 있지만, 놈이 나보다 더 오래 멈출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어느 정도 움직일 수도 있으니 선공해 봐야 반격 당한다.”

“그러네요. 그럼... 연습해서 시간을 더 오래 멈출 수는 없을까요?”

“연습한다고 시간을 늘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만, 늘릴 수 있다 해도 불가능해.”

“그건 왜죠?”

“시간을 멈추면 놈이 알아차릴 테니까. 내가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걸 알면 놈은 더 심하게 경계할 거다. 그러면 정말로 다 죽을 수도 있어.”

카쿄인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하긴 저 쿠죠 죠타로가 이 정도 생각을 못 해서 수십 번 같은 짓을 반복했을 리는 없다. 카쿄인이 즉석에서 짜낼 만한 생각 따윈 그도 진작 해 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벌써 나자빠질 수도 없고. 카쿄인은 다시 새카맣게 물든 스타 플래티나의 팔을 생각했다. 그건 시간을 너무 많이 되돌린 여파일까. 아니, 잠깐.

“아, 잠깐만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힘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반격할 수는 없나요?”

“유감스럽지만 불가능하다.”

“...그래요?”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시간을 되돌린다는 건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간다는 정도의 느낌이라.”

“...아. 보스전 중간에 저장할 순 없다는 거군요.”

“덧붙여 말하자면 어떤 세이브 포인트인지는 고를 수 없다.”

“그건... 매번 최종전 직전으로만 돌아간 게 아니라는 뜻인가요?”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봤다.”

죠타로는 약간 사이를 두고 그렇게 입을 열었다. 회한과 슬픔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카쿄인이 본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였다. 카쿄인은 순간적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수십 번을 반복했다면, 만약 되감긴 시간이 하루가 아니라면 - 이 죠타로는 과연 몇 살일 것인가.

“녀석이 깨어난 건 4년 전이라고 했다. 영감에게 스탠드가 발현된 건 1년 전... 그 사이 어딘가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놈은 흡혈귀다. 태양빛과 파문에 약해. 스탠드만 없다면, 시간을 멈출 능력만 없다면 영감이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을 거다. 그러면 너는, 비록 나와 만나는 일도 없을 거고 만난다 해도 마음을 열어 줄 일은 없겠지만...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50일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게 스타 플래티나의 힘이라면, 내게 스탠드가 없었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는 거겠지.”

“...그렇...겠죠...”

카쿄인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정말로 하기 힘든 말만 남았다. 입 안에서 단어들이 모래처럼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운명이라면. 카쿄인은 다시 작년 12월을 생각했다. 그때 그는 뭐라고 했던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쿠죠 죠타로다. 언제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카쿄인 노리아키는 그의 동료 2일 뿐이다. 마지막에 거의 다 왔을 때쯤 죽어서 주인공을 각성하게 하는 역할. 그것이 정말 운명이라면. 운명의 수레바퀴가 그렇게 카쿄인의 죽음을 가리킨 것이라면. 죠타로가 그토록 발버둥 쳤는데도 단 한 번도 카쿄인을 구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면.

“...죠죠.”

죠타로는 카쿄인을 흘끗 돌아보고는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 마라.”

“...아직 아무 말도...”

“뭔지 알 것 같으니까 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다.”

“너무 애쓰지... 않아 보는 건 어떨까요.”

죠타로의 시선이 다시 카쿄인을 향했다. 카쿄인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죠타로는 웃지 않았다. 모자챙 아래에서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을 뿜었다.

“...정말이지, 슬플 정도로 똑같은 말이군. 어떤 세계라도 너는 너라는 거냐, 카쿄인.”

“......”

“51번째 시도에서 내가 너한테 모든 걸 털어놓았을 때, 네가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내가 너무 신경을 썼기 때문에 DIO놈이 눈치를 챘는지도 모른다고, 너무 기를 쓰지 말고 순리대로 흘러가게 두면 어쩌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

“듣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그 말을 굳이 했으니 나도 답례로 들려주마. 그 회차에서, 너는 내가 본 중에 가장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넝마처럼 난도질을 당한 채로 나타나서, 피를 빠는 괴물이 되어버린 너 자신을 참을 수 없으니 제발 죽여 달라고 했지. 아침 해가 뜨고, 너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죠죠.”

“그건 그냥 시간을 되돌리는 걸 그만두라는 뜻 아닌가?”

“...그러네요. 그만둘 수는, 없을까요.”

“...뭐라고?”

카쿄인은 식탁 아래에서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결국 내뱉고 말았다. 죠타로는 파랗게 타오르는 불꽃이 보이지 않을까 싶도록 화가 나 있었다. 어쩌면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의 손에 식탁이나 의자가 두 동강 나거나, 벽에 금이 갈지도 모른다. 스타 플래티나로 두들겨 맞으면 아프겠지. 카쿄인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도망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죠타로는 스탠드를 꺼내지 않았다. 식탁이나 의자를 부수지도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쿄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불쑥 멱살이 잡혔다. 초록색 눈동자가 더없이 가까이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냐.”

“시간을 돌리는 걸 그만두세요, 죠죠.”

“그러면 너는.”

“원래의 운명대로, 동료 2는 죽게 내버려두세요.”

죠타로는 카쿄인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 한 것 같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카쿄인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분명 저쪽 세계에서도 죠타로가 카쿄인을 더 많이 아꼈을 것이다. 최소한 50번 이상 시간을 되돌려 가며 살리려고 할 만큼. 하지만 카쿄인에게 있어서도 죠타로는 목숨을 걸어도 좋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별을 잡기 위해 허공으로 뛰었다. 결국은 목숨을 잃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운명이니까. 누구나 별과 하나가 될 수는 없으니까.

“어머님을 구했잖아요.”

“......”

“할아버님도 무사했잖아요.”

“......”

“그 세계의 저는, 그걸 위해서 목숨을 걸었을 겁니다.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그러니 저를 그냥 포기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세요.”

“...너는 내 운명이 아니니까 그냥 죽게 내버려둬도 된다는 거냐?”

“아마도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게 제 운명이었던 거겠죠.”

동료 2란 그러기 위해서 등장하는 존재니까요. 최종전을 앞두고 주인공을 각성시키는 일종의 인간 촉매 같은 것. 카쿄인은 그 말을 입 안으로 삼킨다. 죠타로라면 무시무시하게 화를 낼 테니(여기서 더 화내는 게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죠타로는 카쿄인의 멱살을 놓고는 반 발쯤 뒤로 물러섰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하, 그가 한숨처럼 토해내는 숨결에는 믿을 수 없게도 미묘하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카쿄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야 좋은 웃음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이 상황에 웃는다고?

“그게 네놈의 운명이니 나는 앞으로 평생 혼자 살라고?”

“...네?”

“이 세계의 나는 너를 가졌지만 그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아니, 그, 잠깐만요. 왜 평생 혼자 산다는 거죠?”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 놈하고 같이 살라는 거냐?”

“아니, 잠깐, 잠깐만요. 그렇게 말하면 꼭 당신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요. 아니, 제가 아니라 그 세계의 저겠지만, 아무튼 간에...”

“좋아하는 거 맞다만?”

“네? 아니,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잠깐’을 도대체 몇 번 말하는 거냐?”

“아니, 잠깐만요. 그게, 잠깐, 아니, 그게, 그건, 그럴 리가 없잖아요.”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건지 모르겠군. 이 세계의 나도 네놈을 좋아하는데 나는 못 하란 법이 있나?”

죠타로의 목소리가 슬슬 맹수의 으르렁거림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카쿄인은 의미 없이 ‘잠깐’을 몇 번 더 반복하다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언제 이랬더라? 아, 셰리였다. 병원에서 그녀가 느닷없이 고백했을 때, 그때도 카쿄인은 꼭 지금과 같은 상태였더랬다. 하지만 모든 세계의 쿠죠 죠타로가 카쿄인 노리아키를 좋아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나저나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죠타로와 사귀고 있다는 걸 숨기려던 그 모든 노력은 다 쓸데없는 것이었나.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카쿄인은 당황하며 죠타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았죠?”

“...내가 네놈을 좋아한다는 걸?”

“아뇨! 저하고, 그러니까... 이 세계의 죠타로가...”

“사귄다는 거? 같이 산다는 거?”

“어... 둘... 다요.”

“그런 거라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떻게요?”

“우선 첫 번째로, 폴나레프 놈이 왔을 때 네가 걱정할 테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우리가 그냥 적당한 친구라면 너는 내가 유치장에 드나드는 정도로 걱정 따위 하지 않을 거고, ‘돌아간다’는 표현을 쓴다는 건 너하고 내가 같이 살고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나는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좋아하지도 않는 놈과 공간을 공유할 생각이 없으니 같이 산다는 건 우리가 적당한 친구는 아니라는 뜻이지. 그게 두 번째다. 그리고 세 번째, 내가 아무리 말해도 네놈은 그 호칭을 바꾸지 않았지.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라서? 천만에, 너는 그런 놈이 아냐. 이유는 단 하나다. ‘죠타로’라는 호칭을 나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 쓰고 있기 때문이지. 바로 이 세계의 나 말이다.”

음, 그럼 정말로 처음부터 다 들킨 거였네. 카쿄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속여 보겠다고 기를 쓰고 있었으니 되짚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죠타로는 더 어이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카쿄인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죠타로를 돌아보았다.

“저도 알고 있나요?”

“뭐?”

“말해놓고 보니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하네요. 그러니까... 그쪽 세계의 저도, 당신이 저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나요?”

“눈치 빠른 놈이니까 아마 알고 있을 거다.”

“직접 말한 적은 없었나요? 그럼 모르겠네요.”

“...모른다고?”

“저도 몰랐잖아요. 아마 상상도 못 했을 것 같은데요.”

죠타로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부정하고 싶은데 조금 전 카쿄인의 반응을 본 다음이라 차마 부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혀를 차며 모자챙을 꾹 눌렀다. 그리고는 예상보다 훨씬 건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죠.”

“왜.”

“당신과 DIO가 장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저라는 장기말을 잃지 않고 승부에서 이겨야만 하고, DIO는 승부와 상관없이 저만 죽이면 이기는 셈이죠. 그런데 장기말이라고 해도 저는 사람이니까, 생각과 주관이 있어서 당신 뜻대로만 움직여 주지는 않았죠. 그래서 그렇게 많이 실패하지 않았나요? 왜 그냥 얌전히 살지 못 하는 거냐고 저한테까지 말했잖아요.”

“......”

“그런데 제가 당신의 말을 잘 듣는 장기말이 된다면, 좀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네가 죽었다는 건가?”

“사람은 다들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잘 보이고 싶어 하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저도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었을 거라는 뜻이죠.”

“그럼 살았으면 되잖아.”

“살아있는 것만으로 잘 보일 순 없죠.”

“어떤 꼴을 보건 죽은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만.”

“그건 죠죠 입장이고요.”

“그럼 네놈 입장은?”

카쿄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정작 그가 아는 죠타로에게도 해 준 적이 없는 말들이었다. 더불어 이 이야기를 한다 한들 죠타로가 이해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확신이 없었다. 별이 손 안으로 흘러 떨어진 것에 이유가 없다 해도, 카쿄인은 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을. 죠타로라면 카쿄인이 어떻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어떤 모습이라도 괜찮다고 진심으로 말해 줄 것을 알지만 카쿄인은 도저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을. 아마 이 죠타로는 그런 것들이 목숨보다 중요하냐고 물을 것이다. 반쯤은 기가 막혀서, 또 반쯤은 진심으로 궁금해 하며. 무척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목숨과 긍지를 저울에 단다면, 글쎄, 목숨이 조금쯤은 더 중하지 않을까. 하지만 살아 있는 한에는 긍지를 우선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결국은 긍지 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지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것들은, 전부 제 추측일 뿐이에요. 하지만 아까 슬플 정도로 똑같은 말을 했다고 했으니, 아마 그쪽 세계의 저도 비슷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당신을 좋아해요.”

“...그래서?”

죠타로는 아주 잠깐 당황한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카쿄인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저는 물러설 수가 없는 거죠.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으니까요.”

“나는 이미 네놈을 믿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도?”

“점수로 매긴다면 제가 저를 평가한 것보다 당신이 평가한 쪽이 더 높을 걸요.”

“...그런데도?”

“네, 그런데도. 가능하다면 그보다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거든요. 저는 당신을 뛰어넘을 수 없어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어떤 분야건 당신보다 더 대단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뭐 대부분의 사람한테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딱히 저만의 문제도 아니고요.”

“네놈, 나를 너무...”

“그러니까 적어도 당신 옆에 서기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마음에 어떤 보답을 바라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래요, 바라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을 만큼 저는 약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당신이 제 감정을 알아차렸을 때, 이런 놈의 눈에 들다니 짜증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으면 해요. 쉽게 말해서... 폼 잡는 거죠.”

카쿄인은 웃었다. 죠타로는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목숨을 버리다니, 같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에는 실제로 입에도 담았다. 바보 같고 멍청한 짓이라는 품평이 그 뒤를 이었다. 카쿄인은 다시 웃었다.

“맞아요, 바보 같죠. 하지만 저는 열일곱 살이었는걸요. 그저 그것만으로도 필사적이었어요.”

“꼭 지금은 한참 나이를 먹은 것처럼 말하는군.”

“일 년 반 정도는 더 먹었죠. 그리고 죠타로와 사귀고 있고요.”

“......”

“...죠죠. 아마 51번째 회차에서 저는... 당신을 포기하게 하고 싶었을 거예요. 하지만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절대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돌려 말한 거죠. 노력하지 말라고, 애쓸 필요 없다고. 당신이 저 때문에 망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너무 무서워서 저는 차라리 당신이 저를 버려 줬으면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당신이 그저 동료 2를 위해서 50번이나 똑같은 노력을 반복했다는 것이 기쁘고 부담스러웠겠죠. 저라면 그렇게 하지 못 할 테니까. 그래서 저는, 죽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생각 따윈 하지 못 했어요.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제가 그 옆에 서려면 한참 더 발돋움을 해야 할 테니까요. 적어도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럭저럭 동료 2에 걸맞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을지 모르죠.”

“...그래서.”

“저는 죽음이 두려워요, 죠죠. 사실 정말 많은 것들을 두려워하죠. 그리고 아마 평생 그런 두려움을... 공포를 극복하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겁쟁이고, 시시한 사람이라서. 하지만 지금은 이제까지보다 한층 더 죽음이 두려워졌어요. 제가 아는 그 죠타로가, 혹시라도 당신처럼 저를 살리기 위해 그 무수한 시간을 돌이키고 또 돌이킬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거든요. 그렇다면... 당신이 아는 카쿄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51번째 회차의 네놈도 내가 반복했다는 걸 알고 있었잖나.”

“당신이 저를 좋아한다는 건 몰랐죠.”

“내가 너를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뭐 달라질 게 있나?”

“저는, 뭐랄까, 당신이 그냥 동료 중 한 사람일 뿐인 제 죽음에 너무 오래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슬픔은 빨리 흘려보내고, 좋은 추억으로만 간직했으면 했겠죠. 기왕이면 조금은 더 멋진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고만 바라면서... 하지만 당신이 저를 좋아한다면 제 죽음은 그냥 동료 중 하나보다 훨씬 더 무거워지니까요. 그러면 저도, 뭔가는 양보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

“게다가 말이죠, 저도 겨우 마음이 통했는데 그 사람을 두고 죽고 싶지는 않거든요.”

죠타로는 한참 말이 없었다. 모자 그늘에 가려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카쿄인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후 죠타로가 나직하게 물었다.

“...정말 그걸로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하나.”

“모르겠어요, 죠죠. 당신이 그만큼 오랫동안 고생하면서도 이루지 못 했던 걸 그렇게 간단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을까요?”

죠타로는 다시 입을 다문 채 한참 카쿄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표정이 보이는데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다. 뭘 생각하는 걸까. 카쿄인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그 시선을 견뎠다. 시선으로 피부에 구멍을 낼 수 있다면 벌써 만화 속 치즈 같은 몰골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윽고 죠타로가 반 발짝 다가오며 다시 물었다.

“안아 봐도 되냐.”

카쿄인이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죠타로는 곧장 두 팔을 벌려 그를 덥석 끌어안고는 제 품으로 당겼다. 허리가 거의 뒤로 꺾일 지경이었다. 이래서야 질문의 의미가 없지 않나. 차라리 ‘이제부터 안겠다’ 하는 쪽이 일방적인 통보나마 의미가 있었을 듯하다. 카쿄인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애써 팔을 들어 죠타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가 겪어왔을 지난 시간들도 오래 묵어 곪고 일그러진 상처들도 고작 이런 걸로는 치유될 수 없겠지만 -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실로 잠깐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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