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의) 죽고 죽음 주의

존의 결혼을 앞둔 셜록의 정신없고 깝깝한 마인드 팰리스 삽질 대장정. 

개를 위한 시리즈는 마카롱부터 쭉 이어지는 내용이라 전편들을 읽으시면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시점이 달라도요!





 

 

 

계획에 집착한다는 평을 받아도 개의치 않을 사람으로서, 존을 되찾기 위한 내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정말 그렇다. 존과 메리는 결혼식을 올릴 장소를 보기 위해 브리스톨로 떠났고 나는 그들의 미래 계획에 전혀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그게 무슨 계획이냐고 누군가가 나를 조롱한다면 그 면상에 대고 ‘오, 이건 계획의 일부일 뿐이야’라고 뻔뻔하게 대꾸해도 된다는 점에서 계획은 매력적인 전술이다. 내 마인드 팰리스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기에, 담요로 어깨를 덮고 레몬차를 홀짝이는 과거의 존 앞에 마주 앉은 나를 누구에게도 들킬 염려 없으며, 나의 계획이 난항을 겪고 있더라도 만인이 그 사실을 알 때쯤 나의 멋진 계획호는 이미 파편이 되어 해류를 따라 흐르고 있을 테고 나의 육신 또한 갈기갈기 찢겨 수치심을 느낄 수 없는 상태일 테니 죽기 직전까지 뻔뻔해도 괜찮다. 존이 말했다.

"그게 네 유언이라는 건 알겠어. 두고 보라고, 존! 모두 계획의 일부일 뿐이니까! 꽥."

쓴웃음이라도 웃지 않으려 했다. 공포심은 지극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웃음은 가벼운 수준으로도 내 몸을 흔들어 깨우기에 그렇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형편없이 노곤한 입으로 실성한 듯 웃는 게, 내가 웃어본 웃음 중 가장 진솔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 자신이 순수한 멍청이처럼 느껴졌으니까.

존은 두 손으로 머그를 붙잡은 채 얼굴 근처에서 천천히 기울이길 반복했다. 강철 같은 체력의 소유자라고 보아도 무방한 그는 감기에 걸린 상태다. 나와 다퉜음에도 불구하고 내 누명을 벗기겠다고 혼자 이스트본까지 갔었던 이 년 전 이맘때의 존이 내가 아는 존 중 가장 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 툭 밀면 픽 쓰러질 것 같은 몸 상태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약해진 면역력으로 나라는 병균과도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틀을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해 보일까 봐 걱정하는 나의 작은 실험쥐. 나는 실험대를 차지한 싱그러운 허브와 샛노란 레몬, 달디단 꿀로 그런 존을 기억했다.

"물론 내 기억에 의존한 네 모습이니까 네가 느꼈을 생각도 내 관찰로 인한 추측일 뿐이지만, 너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은 순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나는 동의하지 않는데."

머그로 입을 가린 존이 즉각 답했다.

"고작 레몬차 한 잔 만들어 줬다고 네가 나한테 부린 지랄을 용서했을까 봐? 어림없는 소리."

"상관없지. 여긴 내 마인드 팰리스니까. 다 마셔 줘. 날 위해서."

존은 소리 나지 않게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머그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둘레를 감싼 존의 두 손이 작다. 존이 말했다.

"네 마인드 팰리스니까 오직 너에 관해 말할 뿐이야. 내가 지금 하는 말도, 네가 생각하기에 내가 할 법한 말이고. 그러니까 추리하건대, 너, 나랑 또 싸웠지? 아니면 굳이 이렇게 깊은 곳까지 올 리 없잖아."

내가 아는 존은 내가 불리한 점에서만 눈치가 빠르다. 그러므로 이곳의 존도 그렇다. 나 또한 일관적으로 잡아뗐다.

"계획의 일부라니까."

"후회하려고 왔어? 아니면……위로가 필요한 거야?"

낼름, 존의 혀끝이 입술을 핥고 사라졌다. 늘 예기치 않은 찰나에 일어나서 때늦은 아쉬움만 남기는 일. 코카인을 섞은 마인드 팰리스는 자각몽과 같아서 나는 주인공이자 관객이다. 내 꿈속의 존은 일관성 있게 나를 유혹했다. 미끼를 물면 흥분한 신경이 나를 잠에서 깨울 뿐이었다. 짜증 나게.

"그런 거 아니야. 답을 찾으러 왔어."

"무슨 답?"

"내가 놓친 것. 보고 기억하지 못한 것. 간과한 것."

"그렇군.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아무것도. 아직은. 일단은 차를 마시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 줘. 네가 모르는 이야기를 해 줄 테니까."

"그래? 좋아."

기대로 빛나는 존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평온한 감정 상태를 유지하려면 간략해야 한다.

"네 시간으로 며칠 전, 너는 마이크 스탬포드와 술 약속이 있었지. 열 시에 돌아온다고 했었는데 자정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과거 모리아티가 너를 납치해 몸에 폭탄을 단 적이 있었던바, 합리적인 걱정을 한 나는 친히 너를 찾으러 갔었어. 너는 볼썽사납게 만취한 것도 모자라 너에게 관심 있는 게이의 추파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고, 사실은 그에게 응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내가 등장하자 내 질투를 유발하려고 내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을 일을 했어."

예상대로 존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거든? 내가 얼마나 헤픈데. 낯선 사람을 보면 내 번호로 인사하지. 그리고 그렇게까지 취하지는 않았었거든? 그리고 추파라니,"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반박할 기회를 줄 테니 내 이야기부터 들어 줘."

존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방금 네가 내 질투를 유발했다고 말했지. 존, 내가 느낀 감정이 질투심이었다는 건 그 일이 있고도, 너에게 이 레몬차를 만들어 주고도 한참 뒤에 깨달았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단어일지도 몰라. 너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그러니까 여기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고 내게 분명한 점이라곤 원인 제공자가 너라는 사실 뿐이었어. 너와 같은 공간에 있기 싫었기 때문에 나는 혼자 밖으로 나왔고, 내 공급자를 찾아가 일용할 양식을 구했어. 그래, 코카인 말이야. 샀다고 했지, 아직 주입했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더 들어줘.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너는 자고 있었지. 내 방에서."

목욕가운만 입고는. 대신 덧붙였다.

"고양이랑."

그러자 우리의 검은 고양이가 테이블 위로 사뿐히 뛰어 올라왔다. 존 곁에 앉아서 노란 눈을 밝힌 녀석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증언할 수 없는 목격자.

"존, 너에게 무언가를 하고 싶었어."

고양이에게 돌아간 존의 시선을 끌어왔다. 현재의 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억제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무언가’라는 모호한 단어를 택한 이유는 내가 하고자 하는 행동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였기 때문이고 그 행동이 또 다른 행동을 낳는다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었어.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걸 ‘무언가’라고 부르고 있어. 그게 뭐든지, 어쨌든 잠든 너를 위한 건 아니었기에 결국 하지 않았고, 네가 나를 방해할까 봐 너를 내 방에 가두고 네 방으로 갔어. 코카인이 나를 혼란에서 구해줄 거라고 믿었고 답을 찾기 위해 마인드 팰리스로 들어갔어. 그리고 그 결과, 비슷한 충동을 느꼈었던 과거의 기억을 발견해냈지. 잠든 너, 지켜보는 나, 혼돈. 뱀 사건을 조사하던 네가 조이스 교수에게 공격당해 의식을 잃고 병실에 입원해 있을 때. 그게 기원이더군. 다만 너에 대한 걱정이 너무 큰 나머지 눈치채지 못했었던 거야."

두 눈은 크게 뜨고, 입술도 약간 벌린 채, 반응할 틈을 찾지 못해 멈춰버린 존에게 기회를 주었다. 존은 입술이 달싹이고도 한참 후에 살그머니 운을 떼었다.

"다소…… 소화하기 힘든 내용을 한꺼번에 쏟아내는걸."

"아직 애피타이저 밖에 안 내놨어. 차라도 마셔. 도움이 될 테니."

내 말을 따라 존은 말없이 머그를 들었다. 기울이는 각도로 보아하니 절반을 마셨다.

"상상해 봐, 존. 이 마인드 팰리스 어딘가, 너는 아직도 그 병실에서 잠들어 있고, 나는 그런 네 곁을 서성이며 네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어. 그 셜록 홈즈의 머릿속에 있는 마인드 팰리스에선, 조이스 교수가 킬존이라는 방에 갇힌 채 다채로운 방법으로 해쳐지고 있어. 더 이상 새로운 방법이 떠오르지 않고 조이스 교수를 해치는 상상이 나에게 주는 흥미도 떨어졌을 때 다리가 피곤해지더군. 그래서 앉고 싶었지. 병실에는 멀쩡한 의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앉고 싶지 않았어. 네가 누운 침대에 앉고 싶었는데 왜인지는 몰랐고 왜인지 궁금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했어. 그리고 네 얼굴을 들여다보았어. 나쁜 약이 든 커피를 덥석 받아 마시고 태평하게 잠든 얼굴을. 그러니까 그다음엔 네 곁에 눕고 싶어졌어. 바로 그 순간,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거야."

내 말이 끝났다는 판단을 한 존은 헛기침했다. 그러나 홍조는 내려가지 않았다. 내 눈치를 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뭐…… 그게 정상적인 판단이지."

"아니, 존. 그건 멍청한 판단이었어! 그 멍청한 판단을 정상적인 판단이라고 받아들이는 네가 헷갈릴지도 모르니 그 멍청한 판단을 떠올린 셜록 홈즈를 멍청한 셜록 홈즈라고 부르자. 멍청한 셜록 홈즈는 그 멍청한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기는커녕 품지도 않은 채 넘어갔어. 왜 네 곁에 누우면 안 되는지가 아니라, 왜 그런 충동이 들었는지만 따지고 혼란스러워했어. 시작하지도 않은 게임에서 패배한 것처럼 느껴졌거든. 의식을 되찾은 네가 내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었다면 이제라도 답이 되었길 바라. 그런데, 그 멍청한 셜록 홈즈를 방문한 과거의 셜록 홈즈, 그러니까 코카인에 취한 채 마인드 팰리스를 방문한 셜록 홈즈는 그 멍청한 순간을 감지했고, 멍청한 셜록 홈즈가 해보지 않은 일을 하기로 했어. 현재의 내가 너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처럼. 취한 셜록 홈즈는 멍청한 셜록 홈즈가 멍청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했어. 그래서 충동을 따라 네 곁에 누웠지."

존의 눈이 또 한 번 조용한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 렇군……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잠들었어."

"뭐?"

"잠들었다고."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다가 결국 웃기로 한 존의 표정이 귀여웠다. 아, 쓰고 싶지 않은 이 단어를 계속 꺼내 버리는군. 다시는 그러지 말자. 나는 떠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농담이 아니야, 존. 그 반대로, 정말 대단한 발견이었어! 그전까지 마인드 팰리스에서 잠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마인드 팰리스를 방문하는 이유는 내 기억을 뒤져 단서와 답을 찾아내기 위해서지, 휴식을 취해서가 아니니까. 존, 네 덕분에 마인드 팰리스 내에서 신대륙을 발견한 거야. 꿈속에서 꿈을 꾸듯이, 너와 함께 잠든 내 눈앞에는 너에 관한 새로운 기억이 펼쳐졌어. 다만, 내가 알던 마인드 팰리스보다 더 환상적이고 추상적이며 원초적이었어. 더 흥미로운 점은, 내 능동적 의지력이 훨씬 약했다는 거야. 지금 차를 마시는 네 행동이 네 의지가 아니라 내 의지의 결과인 것처럼 말이야. 깨고 싶어도 깨어날 수 없었지. 내가 본 것은 내 무의식이 두려워질 만큼 놀라운 내용이었고, 상황은 내 의지가 아니라 네 의지대로 흘러갔어. 그 점 때문에 그것을 마인드 팰리스로 부를 수 있다면 내 것이 아니라 나란히 누운 네 것이 아닐까 싶어."

"그럴 리 없잖아."

존이 머그에서 입술을 떼더니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니까. 그 당시에 내가 기억하는 건 바닥에 깨진 컵뿐이야. 그리고 병실 천장이 보였지. 그사이에 흐른 시간은 내 머릿속에서 삭제되었다고. 네가 언제 병실에 와서 내가 깨어나길 기다렸는지도 몰라."

"뭐, 그래도 네 공헌이 크니까 우리의 마인드 팰리스라고 하지. 아무튼,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존은 응하리라.

"그러네, 네가 물어보니까."

"아무것도."

나는 덧붙였다.

"다만 몸이 간지러웠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워서 참을 수 없었어. 그리고 빛이 보였지. 그제야 내가 보았던 것이 어둠이었다는 걸 알았어. 눈앞에 무언가가 왔다 갔다 하면서 점점 눈이 뜨였는데, 그런 내가 처음으로 본 게 너였어. 날 그리고 있는, 새파랗게 어리지만, 명백한 너, 날름 나온 혀로 판단컨대."

나는 숨을 다듬었다. 약에 취한 채 꾸는 하룻밤의 꿈 치고는 소화할 게 많은 생이었으며 존과 함께한 순간은 허무할 정도로 짧았고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평화와는 거리가 먼 임종을 겪어야 했기에 실수로라도 그 근처에는 가기 싫었다. 담요를 덮은 성인 존을 보며 집중을 다잡았다. 샛노란 레몬, 달디단 꿀, 싱그러운 허브, 검은 고양이.

"너는 나에게 아주 많은 것을 가르쳐 줬어. 우리의 생이 끝났을 때, 취한 셜록 홈즈도 병실에서 깨어났지. 내 옆에 네가 누워있더라고. 그때 누군가 내 팔을 흔들어 깨웠고, 눈을 떠 보니 또 네가 보였어. 목욕가운만 입은 너. 그런 너를 피해 네 방에서 잠들어 있었던 나. 아래층에 그렉이 찾아왔다고. 그게, 네 시간으로는 삼 일 전 일인가?"

시간여행이란 혼란스럽군. 존이 끼어들었다.

"잠깐, 내가 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고? 뭘 가르쳐 줬는데?"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계획은 계획일 뿐. 불쑥 등장하는 변수가 재밌지 않다면 준비되지 않았다는 뜻인데.

"안 돼."

"듣고 싶은데."

"그럴 생각도 시간도 없어. 그러려고 온 거 아니야.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너에게 그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편지를 써서 주었어."

"그래? 내가 좋아하던가?"

머그로 얼굴의 반을 가리며 기대를 감추는 티가 역력했다. 내 목소리에서 동요하는 기색이 묻어날까 봐 입을 다물었다. 아닌 것 같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 담배를 피우면서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어물쩍 넘어가기만 했었다. 어물쩍 넘어간 이유는 몰라도 크게 실망했었던 내 감정으로 짐작건대, 그리고 굳이 그 감정에서 나를 구해주지 않았던 존의 태도로 결론 내리건대, 싫어했었던 것 같다. 마닉을 이용해 선물했던 연주도 악몽 같다고 평했으니 표현을 못 할 정도면 얼마나 끔찍하다는 소리인지. 어쨌든 존이 그 편지를 읽었을 당시 나는 죽어있었으니 감상을 모르는 게 당연한데도 그렇노라고 설명하지도 못하는 내 정신상태가 과연 건강한가 싶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게 될 거야. 몹시 나쁜 자식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하지 못하는 나, 정말 준비된 건가? 샛노란 레몬. 꿀.

"몰라. 보통 사람의 얼굴도 구분하기 힘든데 네 철면피를 어떻게 해석하겠어?"

역시나 존이 열 오른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철면피라니? 그게 아픈 사람한테 할 말이야? 처음부터 이렇게 솔직했다면 내가 이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잖아? 너 때문에 자살 명소로 유명한 절벽 위로 올라갔다니까?"

"나도 너 때문에 유치장까지 갔잖아. 아직 내 이야기 다 안 끝났어. 차 다 마셔."

내 명령에 머그를 기계적으로 올리던 존이 뚝 멈췄다. 섬세하게 발달한 그 얼굴 근육이 의심과 불만을 표하면 소시오패스조차 모르기 힘들 정도로 직관적이다.

"있었던 일 그대로 감상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 이야기를 해주러 온 것도 아니면 도대체 왜 온 거야? 답을 찾으러 온 거면, 질문은 뭔데? 그리고 왜 자꾸 차를 마시라고 강요하는 거야? 더럽게 시고 달아 죽겠는데."

"네 의심은 정말 고질병이군. 내 기억 오염시키지 마, 존! 너는 그 차를 매우 좋아했어."

"하지만, 맛이 조금……"

존은 잔뜩 인상을 쓰고 머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곧 다소 부주의한 손길로 테이블 위에 머그를 내려놓았다.

"잠깐. 나 이 기분 아는데."

때가 되었다. 그늘진 눈이 나를 보고는 더욱 구겨졌는데, 한순간 테이블을 가로질러 내 멱살을 잡을 것처럼 험악해 보여서 잔뜩 경계해야 했다. 이러니 실제 존에게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무서워.

"너, 셜록 홈즈……!"

"미안."

"너, 나한테? 약을 먹였어?"

소리친 존이 두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나는 재차 사과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어. 두 번이나."

"제정신이야? 도대체 왜! 아, 맙소사……"

"이제 디저트를 먹을 차례니까. 나에겐 메인보다 중요한 거지."

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고 나는 그 뒤로 가서 의자를 뒤로 빼 주었다. 드륵, 끌려 나오면서 옆으로 휘청 넘어가기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더니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내버려 둬!"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머뭇거리게 된다. 꿈에서라도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내 방으로 가야 해."

"뭐? 왜?"

앉은 채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존을 받았다. 겁을 먹으면 더 다친다는 어느 의사의 조언에 따라 과감하게 힘을 써서 나의 실험쥐를 들쳐메고 내 방으로 향했다. 기운 없이 버둥거리며 내게 수고를 안기는 존의 무게가 싫지 않다.

"내려, 내려놔!"

"네가 내 방에서 자고 있었던 건 절대, 절대로 내 잘못 아니야."

"뭐하게? 뭐하게?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존! 나 흥분시키지 말아. 흥분하면 잠에서 깨버린다고."

"내려놔, 이 자식아!"

반쯤 열린 문을 손끝으로 밀었다. 협탁의 스탠드 하나만 켜진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약기운에 져서 축 늘어진 존을 침대 위에 잘 눕혔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누운 존이 입을 우물거렸다.

"나 지금 아픈 거 알지."

"그럼."

"그러면서 나한테 약을 먹었어."

"맞아."

"뭐 하려고? 셜록, 제발 미리 말 좀 해줘."

"더 깊게 들어가려고."

"어, 어딜? 어딜 들어가?"

"우리의 마인드 팰리스에. 그렇게 부르자. 로맨틱해서 마음에 드니까."

미리 준비해 둔 은빛 트레이를 협탁으로 옮기자 내용물의 정체를 알아본 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안 돼, 셜록, 잠깐만. 이건 미친 짓이야. 네가 본 건 나랑 관계없어. 나를 봐, 나는 존이 아니야. 나도 네 기억일 뿐이고, 여기서 더 들어간다 해도 그저 네 깊은 무의식일 뿐이야. 경고하는 거야, 셜록, 이건 옳지 않아, 네 머릿속의 존 왓슨이라는 경보시스템이 울리고 있는 거라니까? 아주 위험한 짓이라고……"

내 옷깃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려는 존을 쉬쉬 달래 눕혔다.

"알아, 존. 걱정하지 마. 이렇게 충성스러우니 존이 아닐 리 없잖아. 너와 함께라면 어떤 모습을 한 모험이라도 기대돼."

마침내 혀도 굳어버려 가쁜 숨만 달싹이는 존에게 웃어 보였으나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잠든 몸에 갇힌 불안한 심리가 내게도 익숙해 그 옆에 걸터앉아 안심시켰다.

"이제 좀 알아줘, 내가 솔직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는 걸. 이게 내 방에서 잠든 너를 발견했을 때 하고 싶었던 일 중에 하나야. 취한 셜록 홈즈가 취하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 그 셜록 홈즈도 멍청하긴 마찬가지여서 덜 멍청한 내가 와 봤어. 그리고 네 말이 맞아. 나 너랑 또 싸웠어. 정확히 말하면 싸우는 게 사치일 정도로 어긋난 상태야. 너는 불만이 없어 보이지만, 난 아니고, 그렇다고 내 불만을 직접 표현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러니까 이 셜록 홈즈도 어쨌든 멍청하긴 마찬가진 것 같아. 존, 나는 겨울을 준비하고 있어. 긴 싸움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고생스럽군. 찾을 수 있는 건 뭐든지 찾아서 이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한다고. 그러려면 더 깊은 단계의 마인드 팰리스에 들어가야 하고, 온건하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네 협조를 구하려고 계획을 세웠어.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내가 네 옆에 눕는다면 깰 거고, 그렇다고 다짜고짜 바늘을 찔러 넣으면 나를 경멸할 거잖아. 그러면 슬퍼진 나도 잠에서 깨고 말 거야. 내 기억일 뿐인데도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해 주잖아? 그러니까 너무 싫어하지 말아줘, 존."

존의 소매를 걷어 올리자 벌어진 입술에서 ‘으으으!’라고 조절되지 않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밝은 피부가 감싼 살, 근육, 푸른 혈관. 곧고 다부진 몸을 이토록 추잡한 약물로 오염시키다니. 침을 꼴깍 삼키는 나를 존은 야릇함과는 거리가 먼 항의로 달랬다. 도움이 되는군. 존의 팔을 벨트로 감싸고 조인 후 주사기를 찾았다. 긴장 풀어, 실험쥐야. 곧 따라갈게. 새가슴처럼 빠르고 얕게 숨을 할딱이며 나를 보던 눈은 곧 초점을 잃고 아득해졌다. 나는 그를 옆으로 돌려 눕히고 그 뒤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같은 행복감에 젖어 존을 품에 안았다. 이불이 포근한지 존이 포근한지, 달큰하고 따뜻한 무게를 아무리 세게 끌어안아도 고프기만 했다. 잠이 쏟아졌다.

 

*

 

어둠을 볼까 봐 두려웠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보는 것이 어둠임은 알길 바랐다.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아는 채 어떤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지루한 영겁을 잊은 건 축복이었다. 그 영겁이 끝나면 온몸을 간지럽히는 붓과 찰나의 쾌락과 몸이 찢기는 고통,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영겁으로 이루어진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한 찰나, 나는 즉시 죽고 싶었다. 죽음을 택할 수 없는 건 지성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 악몽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이건 멍청한 계획이야. 당장 취소하겠어! 나를 구해줘!

"존, 내가 잘못했어!"

나는 우당탕 굴렀다. 내 몸이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판자와 가죽이 보이니 나에게 눈이 있다는 뜻이며, 네 다리 짐승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오니 나에게 귀가 있다는 뜻이다. 한순간, 나는 내가 말인가 싶었다. 다각다각이 아니라 찰박찰박 질척이는 발소리와 시리고 습한 공기로 겨울임을 아는 건 말의 지능으로도 가능한 일이니까. 마차를 구성함이 분명한 판자와 가죽을 보고는 짜증이 치솟았으니, 내가 정말 말이라면 나를 부리는 인간이 존 왓슨이어도 엉덩이를 힘껏 걷어찰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는 노동하고 싶지 않아! 그러자 평화가 찾아왔다. 존 왓슨이라는 이름은 그런 마법을 부리곤 한다.

"괜찮으십니까?"

누군가 물었다. 언어라! 축복받았군. 나와 소통하려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나의 상태를 살필 필요가 느껴졌다. 어느 시대에서나 지위를 뜻하는 검은 망토를 입고 있다는 점으로 첫째 안심했다.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상의는 장식마저 검어서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검은 바지와 검은 가죽 부츠 안의 몸도 나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목에 이상한 것이 스쳐 손으로 더듬어 본바, 주름 장식임을 깨닫고는 시대를 향한 반항심이 들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나는 인간이다. 존과 재회할 때까지 나를 소유한 주인을 죽이고 또 죽였던 우울한 삶을 반복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 소원했으면서, 지옥의 손아귀를 벗어나자마자 고작 복식에 불만을 품었으니.

"괜찮네."

적응 완료. 나라는 존재가 마차를 끄는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을 다루며 내게 안부를 물은 마부도 아니라, 마차에 들어앉은 인간임에 감사하기가 무섭게, 의자에 앉으려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 내게 시련이 닥쳤다. 왼팔이 재깍 말을 듣지 않는다. 공중에서 가늘게 떨리는 왼손이 내 것이 맞다. 삐걱거리는 불편함을 무시하고 왼손을 뺨에 대 보니 내가 아는 내 얼굴도 맞다. 염원해도 극복하거나 취소할 수 없으니 이 마인드 팰리스의 주인공은 역시 내가 아니라 존이다. 존의 장애가 나에게로 왔다면 적어도 존은 편안하기를. 서툰 동작으로 의자에 올라앉았더니 거기엔 내 것으로 보이는 손바닥만한 검은 천 조각이 있었는데, 그것의 쓰임을 유추하고도 머리에 쓰는 대신 그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마부가 외쳤다.

"눈이 녹아서 길이 엉망이군요. 서둘러서 죄송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성벽 안으로 들어가야만 해요."

창밖을 내다보았다가 가슴이 선득해졌다. 피로 젖은 전쟁터를 보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보니, 붉은 노을로 새빨갛게 물든 드넓은 농경지일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반갑습니다. 셜록 홈즈 님."

열린 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마부를 보았다. 찬 바람을 막기 위해 옷을 겹겹이 껴입은 팔, 희게 센 머리털과 꾀죄죄한 귀 정도만 보였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나?"

내가 자주 하는 말은 아닌데. 마부가 답했다.

"그야, 런던에서 오신 귀족 나리께서 잠꼬대로 시장님의 존함을 외치시면, 사건을 조사하러 오신다던 그분이시구나, 제 천한 머리로도 짐작합지요."

"사건?"

"네. 존 왓슨 시장님이요. 실종되시지 않았습니까?"

존에게서 모스 신호라도 받은 듯해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나와 숨바꼭질을 하자는 거야, 존? 좋아. 내가 술래면 더욱. 당장에 마차 밖으로 뛰어내려 우주처럼 광활한 존의 마인드 팰리스를 탐험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린다. 섬유 너머로 따뜻한 기운을 스미는 햇빛 한 조각에서도 존의 숨결을 느끼는 건 망상이 아니다. 신이 이번엔 내게 자비를 내리셨군.


시장 존 왓슨이 다스리는 마을은 엄격하고 단단하게 쌓아 올린 성벽으로 나를 맞이했다. 투구와 갑옷, 창과 방패로 무장한 보초들이 하나같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전시 중인가?"

내 물음에 마부가 답했다.

"항시요."

"누굴 상대로?"

"그건, 참……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이군요."

"왜지?"

마부는 뒤통수를 까딱거리며 말을 고르느라 내 인내심을 시험했다. 나라는 인간의 미덕엔 인내심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존이 나를 위한 지옥을 만든다면 내가 아는바 가장 끔찍한 지옥이 될 것이다. 마부가 말했다.

"미천한 제가 아는 건 오로지 떠도는 소문이니까요. 저는 물론이고, 아무도 그 괴물을 본 적이 없답니다."

"괴물?"

나는 거의 웃었으나 마부는 태연히 답했다.

"네, 그것과 마주치고도 살아남아 그것이 무엇이었노라고 알린 자가 없으니 괴물이라고밖에 부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저 시체만 남긴답니다."

성벽을 통과한 마차 곁으로 낯설고 소란한 풍경이 펼쳐졌다. 돌길을 따라 나무와 벽돌, 쇠로 구축된 집들이 늘어선 가운데 나와 비슷한 옷차림을 한 옛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을 바삐 꾸려나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쇠를 두드리고, 한쪽에서는 물을 긷고, 등을 밝히고, 소리치고, 흥정하고, 웃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불쑥 튀어나온 사람은 말을 탄 채 유유자적 어디론가로 향했다. 흙탕물이 묻은 부츠와 더러운 치맛자락 사이에서 용케도 새하얀 거위무리가 쏟아져 나왔고, 갑작스레 느껴지는 작고 하찮은 두들김은 나를 환영하며 내 마차에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인류가 콘크리트라는 가장 못생긴 발명품을 만들기 전의 모습. 마음에 든다. 드라마틱한 연출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라면 꿈인 기회를 틈타 존의 이마에 입술을 붙이며 감사해야지. 나는 중얼댔다.

"시체가 남는다면 단서도 남는 법인데, 이 마을의 경찰도 멍청한가 보군."

"경찰이오?"

"병사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닌가?"

"아, 레스트라드 님 말씀이시군요. 런던에선 그렇게 부르는가 보지요?"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겠다.

"그렇다네, 마부여. 말해주게. 범죄자가 아닌 괴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뭔가?"

"그야, 그 괴물이 하는 짓 때문이지요."

"무얼 어떻게 하는데?"

"그게 말입니다,"

마부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또 한 번 내 인내심을 갉아먹었다.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잔해만 남긴다고요. 총명하신 귀족 나리, 아무리 미천한 아랫것들도 사람이 으레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안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을 직접 보았다는 말 아닌가?"

"글쎄요.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다만……"

나는 마차 곁에서 칼싸움하는 아이들을 구경하며 마부의 느린 사고를 견뎌냈다.

"시체를 본 사람은 많으니까요. 시체가 늘 늑대에게 잡아먹힌 염소의 꼴을 하고 있다면, 잡아먹혔다고밖에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구미가 당긴다.

"시체가 자주 발견되나?"

"매일 아침이요, 홈즈 씨. 매일 아침."

"매일 아침? 참으로 흥미로운 곳이로군. 시체는 이 마을 내부에서 발견되는가?"

"오, 신이시여, 그럴 리가요! 성벽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곳 동쪽에 숲이 있는데, 괴물이 그 숲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통금 시간이 이르지요. 제시간에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마부는 물었다.

"혹시, 시장님이 성 바깥에 계실까요? 그렇다면 아주 큰 위험에 처해 계신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네. 내가 아는 그는 위험한 모험을 사랑하지."

"저런, 누군가 빨리 찾아내야겠습니다."

그러나 존이 위험에 처했대도 크게 걱정할 건 없다. 위험을 찾아간 게 그일 테니까. 나는 창틀에 손을 대고 바깥을 내다보며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길 안달했다. 낯익은 얼굴을 한 지나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모르는 존과의 인연이 느껴져 하나하나 캐묻고 싶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시린 공기에조차 존의 부름이 담겨있는 듯해 전할 길 없는 답을 품기만 하느라 마음이 닳았다. 아름다운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잔혹한 괴담으로 내 흥미를 사로잡은 매력적인 남자가 나를 기다리다 지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멋들어진 모자를 벗으며 나를 맞이한 레스트라드는 어쩐지 내 기억보다 더 젊어 보였고 그래서인지 조금 달라 보였다. 다시금 이곳이 나의 마인드 팰리스가 아니라 존의 시각이 반영된 마인드 팰리스라는 점을 되새겼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레스트라드의 외모가 매력적이어서 이성을 유혹하는 수단으로 쓰일 법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명백히 레스트라드가 그러한 사람으로 보였다. 적어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면 그래 보였다. 신경 쓰여.

레스트라드가 말했다.

"먼 길 와주어 고맙네, 참으로 오랜만이군. 건강은 좀 나아졌나?"

"내 건강?"

"지난 이 년간 혼수상태라고 들었는데, 사실이 아닌가?"

만나기 싫어서 둘러댄 변명이라는 이론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가벼운 지병일세. 먼 길 하느라 몹시 피곤한 건 사실이야."

"그렇다면 내 집으로 가는 게 어떻겠나? 해가 다 졌군. 일은 내일 시작해도 늦지 않아. 이곳의 밤은 위험하다네."

존과 재회하려면 아무래도 인내심을 길러야 할 듯하다. 나는 따졌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시장님이 실종된 비상사태에, 이 마을의 보안관으로서 그게 할 말인가? 실종된 이후 어떤 조처를 했고 어떤 소득이 있었지?"

내 닦달에 레스트라드는 대단한 회상이라도 하듯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었다.

"여전하군그래. 어디 보자, 수색조를 꾸며 찾아보았는데, 이 마을 안에서는 찾을 수 없었네."

"그럼 성벽 바깥은?"

"물론 찾아보았지. 하지만 흔적조차 없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누구며, 언제 있었던 일인가?"

"그에게 고기를 판 백정일세. 지금 감옥에 갇혀 있어."

"이유가 뭔가?"

"시장님을 마지막으로 본 자인 데다가, 그 이후로 무슨 일을 했는지 진술을 거부했고, 피로 뒤덮여 있었으며, 도둑질한 전과가 있다네. 분명히 그자가 시장님을 해쳤을 것이야. 자네가 할 일은 그자가 유죄라는 증거를 찾아내고 시장님을 어디에 숨겼는지 알아내는 것일세."

허리춤에 손등을 올리고 당당한 눈빛으로 보는 레스트라드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여전하군그래."

나는 그를 앞세워 감옥으로 향했다. 병영 지하에 자리 잡은 탓에 바깥 날씨보다 추웠고 온기라고는 레스트라드가 들고 가는 초가 전부인 혹독한 곳에 갇힌 불쌍한 백정은 네모지고 작은 방에서 큰 덩치를 잔뜩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보인 얼굴은 놀랍게도 안젤로였고 당장에라도 얼어 죽을 것처럼 보였다.

"제발, 덮을 것을 주십시오. 모두 자백하겠습니다."

"아하!"

레스트라드가 문에 작게 난 창살에 냉큼 얼굴을 대고 외쳤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돈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얼어 죽는다면, 혹은 시장님을 해친 죄로 교수형에 처한다면 돈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잘못했습니다."

"시장님께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시장님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나는 레스트라드를 밀어내고 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마침 문으로 다가온 그에게서 가축의 누린내가 났다. 내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에게 말했다.

"시장님을 납치하지 않았다면 무슨 죄를 자백하려는 건가?"

"도둑질했습니다. 여관 근처 집을 침입해 도둑질한 게 접니다! 시장님께 고기를 팔고 나서, 가게 문을 닫고 도둑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내 옆에서 레스트라드가 문에 대고 외쳤다.

"거짓말 마라, 그 집에 사는 아이가 도둑을 목격했으니. 그 아이가 말하기를 도둑은 여자라고 했다."

"그게 저였습니다!"

안젤로가 항변했다.

"허드슨 부인의 옷을 슬쩍했습니다."

"허드슨 부인이라고?"

반가운 이름을 듣고 유쾌해진 나와는 달리 안젤로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달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 주인 말입니다. 그 여관에 고기를 대서 여관의 구조를 제가 잘 압니다. 그녀의 장화와 망토를 슬쩍하고 뒤집어쓴 후에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도둑질을 한 후에 다시 장화와 망토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시장님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판 것 밖에요!"

잠잘 곳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내 곁으로 레스트라드가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무조건 지어내면 될 줄 아느냐? 네가 허드슨 부인의 장화와 망토를 훔친 걸 본 사람이 있느냐?"

안젤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도둑질하는 모습을 왜 보이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네가 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있느냐?"

"그렇지는 않지요! 몰래 들어갔다가 몰래 나왔습니다. 게다가 통금 시간이었는걸요."

"하!"

레스트라드가 입꼬리를 뾰족하게 늘였다.

"그렇다면 네 새로운 범죄를 어떻게 입증할 테냐! 그저 말뿐이로구나."

그러자 안젤로의 얼굴이 더 창백하게 질렸다. 데자뷰. 빙긋 웃음이 났다.

"내가 입증할 수 있네, 레스트라드."

"홈즈, 자네가? 어떻게?"

"그거야 간단하네. 이 자처럼 체구가 큰 사내가 여성의 장화를 신는다면 모양이 흐트러지고 흔적이 남을 걸세. 그것을 신고 근처의 집으로 이동해 도둑질했다면, 분명히 흔적이 남았을 테지. 나와 함께 여관으로 가서 허드슨 부인의 장화를 검사하는 것이 어떻겠나?"

순간, 내 곁에서 눈을 밝힐 존의 빈자리가 뼈에 사무쳤다. 마치 빈자리라는 물질적 실체가 차가운 손으로 내 손을 슬쩍 붙잡는 기분이었다. 그 사이 안젤로는 문에 난 구멍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자비로운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나으리! 제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나는 그 두툼하고 거친 손가락을 붙잡아 가볍게 흔든 후에 물었다.

"이제 말해 다오. 시장이 왜 너에게서 고기를 사는 수고를 자처한 것이냐? 그런 일은 하인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게다가 내가 아는 존은 고기를 먹지 않으니 더욱 이상한 일이다. 안젤로가 처음으로 웃는 기색을 보였다.

"아, 그 고기는 시장님의 사랑스러운 개를 위한 것입니다. 어찌나 소중히 하시는지, 그 녀석과 종종 들러서 고기를 사곤 하시지요. 그날도 그 개를 위해서 고기를 사 가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엔 존의 따뜻한 손이 내 심장을 쓰다듬고 지나간 듯했다. 존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운 좋은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어서 만나고 싶군.

그사이에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 쥐죽은 듯 고요했다. 통행 금지 시간이라 만일 내가 혼자였다면 곤경에 처했을 것이라고 레스트라드는 말했다.

여관 주인인 허드슨 부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내가 아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 단지 풍성한 치마를 입었다는 것밖에 다른 점이 없었다. 허드슨 부인은 고기를 대는 백정이 그녀의 여관에 몰래 침입해 장화와 망토를 훔쳐 입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매우 놀랐다. 그리고 우리를 헛간으로 안내했다.

"일할 때 쓰는 거라서 그냥 여기에 두고 살아요. 착하고 정직한 줄만 알았지 그런 사람인 줄 꿈에도 몰랐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이 더러운 걸 탐내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요."

허드슨 부인에게서 초를 건네받아 불빛에 의존하여 장화를 살폈다. 늘어난 끈, 일그러진 형체, 밑창 주변을 따라 묻은 흙 등 단서가 충분했고 망토에는 말라붙은 피가 발견되었다. 안젤로가 착용할 때 그의 몸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진동하는 누린내가 레스트라드에게는 나지 않는지, 석연찮은 표정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나는 그를 떠보았다.

"내가 알기로는, 이 마을에 후퍼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레스트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의사 말이오?"

"장의사로군. 그자가 꽤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네. 그자에게 가져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걸세. 아, 그리고 자네에게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어."

내 말에 레스트라드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뭔가?"

내가 허드슨 부인을 보며 뜸을 들이자 그녀는 내 뜻을 알아듣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물론, 차를 만든다는 구실로. 헛간에 둘만 남았을 때 나는 레스트라드에게 나직이 물었다.

"존 왓슨과 무슨 사이인가? 그러니까, 시장님 말이야."

"무슨 사이냐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추위로 빨갛게 얼어붙은 코를 훌쩍이기나 했다. 그리고 답했다.

"주종관계일세. 하지만 종종 나를 그렉이라고 부르시지."

"그렉?"

"나 원 참, 그게 내 이름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그래, 그렇지……"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얼굴을 아무리 쳐다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아 다시 물었다. 이곳에서는 솔직하고 싶은 만큼 솔직해도 된다.

"시장님이 자네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나?"

"물론, 그렇길 바라네만. 대체 그건 왜 묻는 건가? 설마, 자네, 나를 의심하는 건가?"

되묻는 말투와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렉이 젊은 외양을 하고 존의 마인드 팰리스에 등장한 게 적어도 그렉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들어 본 질문 중에서 가장 쓸모 있고 현명한 질문인 참에, 나는 말문을 돌렸다.

"객관적 시각을 가진 자의 도움이 필요해서 나를 소환했으리라 믿네. 그렇지 않은가? 시장님을 마지막으로 본 때가 언제인지 말해주게."

"이 친구가……!"

그렉은 반걸음 뒤로 물러나며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의 건강만 아니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나를 의심하다니!"

"처지가 바뀐다면 자네의 이해심은 잊지 않고 보상받을 거라고 약속하지. 대답해 주게, 그렉."

그러자 머지않아 누그러진 표정으로 순순히 답하는 그였다.

"나흘 전이었어. 성벽 바깥에서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였네."

"그 ‘괴물’의 소행인가?"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렉이 경계 서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다.

"홈즈, 자네도 조심해.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건 금지되어 있어. 다 그 괴물 때문이라네."

"나는 그 괴물이 숲에 산다고 들었는데. 성벽 내에서까지 통금 시간을 정할 필요가 있는가?"

"바로 그것일세, 홈즈."

그렉은 내게 한 걸음 다가와 바짝 몸을 붙이고 속삭였다.

"이 세상에 괴물이 어딨나? 게다가 이번에 발자국이 발견되었네.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람의 신발이었어."

근심 가득한 두 눈이 도리어 내 흥분을 휘저었다. 염소를 먹어치우는 늑대처럼 사람을 먹어치우는 사람이 이 마을을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나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달콤한 향기다. 행방불명된 존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면 왜 이렇게 가는 길목마다 내 발목을 잡는지 알 수 없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네. 그 괴물에 대해 아는 게 뭔가?"

"오, 홈즈, 그 괴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존재일 걸세. 그것과 마주치고는 살아남은 자가 없다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시신뿐이야. 배가 파먹히고 목이 물어뜯긴 시신 말이야."

말하면서도 질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렉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계속했다.

"그 때문에 그 백정을 의심했었던 거야. 백정이 아니고서야 그런 비위가 어디 흔한가?"

"배가 파먹히고 목이 물어 뜯겼다면, 그렇게 날카로운 이빨이나 손발톱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고?"

"그럼. 시신을 보면 분명하지."

"어디서 볼 수 있나?"

"자네가 보려는가?"

되묻는 그렉의 눈에서 기대감이 엿보였다.

"그래 준다면 나야 고맙지만, 홈즈 자네의 심약한 상태가 나를 염려케 하는군. 나조차도 매일 밤 누군가가 성벽 바깥에서 고함을 지르는 것 같고, 매일 아침 창밖에서 피비린내가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는 것만 같아. 그 시신과 그 피바다를 보면 자네도 악몽을 꾸고 말 걸세."

"시신이 매일 발견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매일은 아니지만, 꽤 자주 발생하네. 오늘은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구먼. 어제도. 그러고 보니, 그제도 없었어. 시장님과 함께 보았던 시신이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그렉은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우연으로 치부할 것이었다.

"시장님은 어디서 만났나?"

"북문 바로 바깥에서 만났네. 먹은 점심이 도로 올라올 정도였으니 그 시간대였어. 그것이 북문 바깥에다 시체를 끌어다 놓은 거야. 보통은 숲에서 발견되는데 말이야. 그래서 발칵 뒤집혔었어."

"끌어다 놓았다고?"

"그렇네. 바닥에 남은 핏자국으로 보면 그러했어. 이 마을 사람은 아니라서 그나마 조용히 넘어갔지, 아니었으면 이렇게 평화롭지 않았네."

살인한 것뿐만 아니라 시신을 전시하기까지 하다니. 그것이 짐승이라면 지능도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했는지는 그 괴물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사람들을 겁먹게 했다는 정도의 결과만 알 뿐.

"시장님은? 무슨 반응을 보였나?"

그렉이 한숨을 푹 쉬며 하얀 입김을 길게 뿜어냈다.

"곤란해하셨지, 물론. 하지만 워낙 강인한 분이라 그 이상으로 동요한 모습을 본 적이 없네. 시신을 장의사에게 보내라고 지시하셨고 그 지시를 따랐어."

"그리고?"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셨네."

"아니, 그게 다인가? 괴물이 시신을 마을 가까이 끌고 왔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건가?"

"홈즈, 그 괴물은 이 마을의 일부이기 때문에 딱히 대응이랄 게 없네. 숲으로 순찰을 보내고 사냥을 보내도 마주치지조차 않으니 소용이 없어. 빗으로 바람을 빗는 것과 같네. 그러니 그저 내가 아니길 바라며 조심하는 수밖에 없지. 통금을 지키면서."

 

허드슨 부인의 안내를 따라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밟고 올라갈 때마다 밑으로 꺼지며 미세하게 끽끽 대는 나무계단과, 손끝을 얼얼하게 자극하며 미끄러지는 벽지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을 되찾아 온 것 같은 아득함을 따라 머릿속을 더듬어 보아도 막다른 길이 나를 가로막았다. 내가 묵을 방 안에는 두 개의 안락의자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하나는 앉고 싶게 생겼고 하나는 앞에 두고 쳐다보고 싶게 생긴 모양새였다. 그 옆에서 따뜻하게 타오르는 벽난로만으로도 매력적인 초대였다.

"어떤가요? 셜록 홈즈 씨."

허드슨 부인이 치마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필요하시다면 위층에도 방 하나가 더 있어요."

"필요 없어요. 혼자인걸요."

"물론 그러시겠죠."

벽에 걸린 두개골 그림에 흥미가 붙들려 다가갔다가 벽지에 그려진 낙서를 숨기기 위한 배치임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보니 노란색으로 그려진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허드슨 부인이 말했다.

"여기 묵었던 어떤 꼬마 녀석의 짓이에요."

"흠."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 했는데. 어휴."

의자, 책상, 침대, 길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 한두 달은 심심하지 않게 달래 줄 책들, 여기저기 놓인 초까지, 잘 갖춰진 아늑한 공간. 휘휘 돌아볼수록, 근거를 짚을 수 없는 허전함이 느껴졌다. 무언가 빠진 게 분명한데. 뭐지?

"차 한 잔 드릴까요?"

"그렇지! 그것이었군. 고맙습니다."

허드슨 부인은 계단을 내려갔고 나는 안락의자 중 하나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부츠를 벗은 후 두 발끝을 불 앞으로 모으고 타닥타닥 터지는 장작 소리를 들었다.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건조한 열기를 느끼고 있다가 문득 사람의 형체가 시야에 들어와 고개가 돌아갔다. 빈 의자일 뿐이었다.

잠시 후, 허드슨 부인이 차를 들고 올라와 내가 앉은 안락의자 옆 탁자에 달그락, 하고 찻잔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홈즈 씨, 내 망토와 장화는 언제 돌려받을 수 있지요?"

나는 냉큼 찻잔을 들어 품으며 대답했다.

"돌려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게 나아요."

"뭐라구요?"

허드슨 부인이 빈 의자 끝에 걸터앉아 따졌다.

"왜죠? 내 것인데!"

"범죄에 쓰인 증거물이니까요. 검사가 필요하지요. 제 눈엔 명백했지만, 레스트라드는 조금 밝은 곳에서 오래 살펴봐야 이해할 겁니다."

"검사라뇨? 상태가 말이 아니었는데! 아주 엉망진창이었단 말이에요! 말해두는데, 그 장화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 건 말똥 때문이랍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덕에 무고하게 갇힌 한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요."

"무고하게 갇히다니, 누굴 말하는 건가요?"

"백정 안젤로요."

"정말요?"

허드슨 부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백정이 시장님을 죽였다고 들었는데. 무고하다니요? 그가 아니라면 누가 그랬대요? 내 장화와 망토는 왜 훔쳐 입었던 거죠?"

"뭐요?"

나는 찻잔을 도로 내려놓아야 했다. 갑자기 물밀듯 닥치는 기억 때문이었다. 시장님이 존이라는 사실과, 그가 현재 실종상태라는 것, 그래서 내 곁에 없는 그를 찾아내는 게 이곳에서의 임무다. 어떻게 그토록 중요한 일을 까맣게 잊고 차나 마시고 있었는지? 심지어 내가 앉은 의자는 존의 것이고 허드슨 부인이 내 의자에 앉아있지 않은가.

나는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시장님이 죽었다니,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백정이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던 걸요."

"백정이 피를 뒤집어쓴 게 이상합니까? 백정인데. 안젤로는 시장님을 죽이거나 납치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에 부인의 장화를 신고 이 근처 집을 침입해 도둑질하고 있었고, 허드슨 부인의 망토와 장화에 남은 증거를 보면 그의 말이 사실입니다. 도둑질로 처벌받겠지만 적어도 시장님을 해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고하니 교수형에 처하진 않을 거고요. 제 설명으로 궁금증이 풀렸다면 이제 제 질문에 답해주세요. 시장님이 죽었다는 구체적인 상태를 뒷받침할 증거가 발견된 적 있습니까? 예를 들어, 시신이라든지?"

"아니요."

그럴 리 없다고 미리 답을 정했음에도 허드슨 부인의 대답이 나를 대단히 안심시켰다. 나는 또 물었다.

"그럼 누군가가 그를 해치는 장면이 목격된 적 있나요? 그 정도면 누가 보아도 죽었다고 판단해도 될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혔든지 말입니다."

"아니요."

그러자 완전히 안심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더 안심되었다.

"그렇다면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인드 팰리스의 주인이 죽었을 리 없잖아. 허드슨 부인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뭐, 여긴 여관인걸요. 누구도 홈즈 씨처럼 따지고 들지 않았어요."

나는 한숨지었다.

"그렇게 소문이 시작되었겠지요."

15세기 잉글랜드 어느 마을의 악명 높은 교살자를 추적해 체포하는 것이 내 일생의 업으로 느껴지다니. 이미 존의 마인드 팰리스에서 길을 잃은 적 있는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를 위해 꾸며진 이 미로 속에 갇혀 버리고 말 것이다. 정말 멍청한 계획이었는지도 몰라. 괴물이 아니라 존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저도 소문을 좋아합니다, 허드슨 부인. 마을에서 가장 의심 많은 사람이 방금 도착한 저라는 점으로 이 마을 구성원들의 평균 지능 또한 알 수 있는 것처럼, 또한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아 마땅한 시장이 으스스하고 끔찍하며 원초적인 범죄 피해자로서 이야깃거리로 소모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수 있는 그에 대한 평판과 사람들의 인성 등, 소문이 알리고자 하는 내용보다 그 기저에 깔린 은밀한 내용이 더 흥미롭고 진실하고 따라서 쓸모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게도 시장님을 구하는 사명을 잠시 잊었던 저를 위해 허드슨 부인의 무한한 지혜를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시장 존 왓슨에 대해서나, 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요."

"뭐라고요?"

허드슨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자네가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만 않았어도 기쁜 마음으로 그랬을 걸세, 젊은이. 귀족이면 예의라도 있고, 천민이면 겸손하기라도 하지, 자네같이 천박한 귀족과 할 이야기 없네. 오늘 밤은 묵게 해 줄 테지만 내일은 떠나게. 좋은 밤 되라지!"

그리고는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이럴 수가! 내가 아는 허드슨 부인은 나에게 눈을 흘기기만 했을 터라, 그녀와 내가 방금 만났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내 곁에 존이 없다는 사실을 잊은 것만큼이나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나 자신에 대한 설명은, 역시 이 마인드 팰리스가 존의 소유라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멍청해질 리 없어.

허드슨 부인에게 남긴 형편없는 첫인상 때문에 나는 비극적인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다. 나는 통금 시간을 거역할 셈이었다. 내가 까마귀처럼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우연을 필연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운이 좋다면 수상한 사람과 마주칠 것이고 운이 나빠 보았자 경비병들에게 붙잡히고 신분이 증명될 때까지 감옥에 갇힐 테니 모두가 잠든 시간에 여관을 빠져나가 탐험할 생각이었는데, 나를 내일 이곳에서 쫓아내겠다는 허드슨 부인의 말을 들으니 그러기가 망설여졌다. 떠나는 순간이 이 아늑한 방에 있었던 마지막 순간으로 되어버릴까 봐 그랬다.

나는 내 의자에 앉아서 두 다리를 감싸 안았다. 나를 쫓아내겠다니! 그러도록 내버려 둘 없지. 허드슨 부인을 설득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곧 지루해진 몸에는 추위가 찾아들어 뻣뻣해져 갔다. 존이 그러듯 왼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니 은근한 저림이 잠시는 잊혔다. 옷을 벗고 살펴보니 나의 왼쪽 어깨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는데, 총상일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작은 칼에 찔린 것 같은 이상한 모양을 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덜 아문 상처인데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쪽이 더 놀라운 일인지 모르겠다.

존의 부재를 상기한 건 다행이지만 허전함을 감내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무릎에 닿은 햇빛에서도 존의 숨결이 느껴지고 찬바람에서도 존의 목소리가 들리던 낮과는 달리, 밤은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밤을 향해 섭섭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섬세하다고 할 것인가, 미쳤다고 할 것인가? 가만히 따지면 동의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해가 뜨길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허드슨 부인이 식사를 가져왔을 때 나는 계획을 실행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허드슨 부인. 따뜻하고 편안한 밤 보내셨기를 바랍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시다니 고마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너무 큰 수고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화려한 아침 인사가 반어법으로 들리지 않길 바랐으며 혹시 반어법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의 뜻을 오해한 그녀의 편견을 책잡아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허드슨 부인은 나를 쳐다보며 앞치마에 두 손을 싹싹 문지르더니 입꼬리를 양쪽으로 늘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홈즈 씨. 저는 모자랄 것 없이 편안한 잠을 잔 지라 이 추운 아침이 아주 개운하게 느껴지는군요, 고마워요. 홈즈 씨는 편히 쉬셨나요?"

침대가 편안하긴 했지만, 전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러나 미소지었다.

"물론이죠. 침대가 아주 편안하더군요. 여독을 푸는 데 따뜻하고 편안한 숙면보다 좋은 약은 없지요. 그래서 부인께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식기 전에 드세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종을 울리시고요."

그리고는 바쁘다는 듯 돌아서는 허드슨 부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맙소사,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힐 필요 없잖아, 존! 속으로 외쳤으나 닿을 리 없겠지. 숙연히 테이블 앞에 앉으니 계단까지 갔었던 허드슨 부인이 갑자기 멈췄다.

"참, 그렇지."

방 안으로 돌아온 허드슨 부인이 테이블 곁에 섰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레스트라드가 찾아왔었어요. 백정 안젤로가 어제 석방되었다고. 직접 만나고 싶어 했었지만, 홈즈 씨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니 돌아갔어요."

나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석방이라고 했습니까?"

"네. 장의사 후퍼 씨도 당신의 주장에 동의했다더군요."

"안젤로가 감사를 전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저겠지만, 석방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군요. 도둑질에 대한 죄가 있으니까요. 시장님을 납치한 범죄자보다는 조금 나은 대우를 받으리라는 게 제가 예상했던 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른 덧붙였다.

"물론, 그 어리숙한 백정이 추운 감옥에서 밤을 보낼 필요 없었다니 다행이고요."

"제 장화와 망토를 훔치고 집을 침입해 도둑질한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처벌받을 테지만, 감옥에서 받진 않을 거예요. 대신 훔친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저에게도 보상하고, 그 후엔 일평생 열심히 일함으로써 지은 죄를 갚아야 하지요."

자비로운 마을이로군. 다시 생각해보면, 노동을 할 바에야 쥐가 들끓는 감옥이 나을지도.

"늦잠을 자버리는 바람에 칭송받을 기회를 놓쳤다니 아쉽네요. 허드슨 부인의 따뜻한 환대와 완벽한 쉼터와 더불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 편안했던 침대 탓이겠지요."

중얼거리며 눈치를 보는 나를 허드슨 부인은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테이블 한 면에서 의자를 빼 앉았다. 명백한 기회가 찾아왔으나 눈치채지 못한 척 자세를 곧게 하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홈즈 씨라면 저의 보잘것없는 여관이 아니더라도 따뜻하게 맞이해 주실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믿어요."

"하지만……"

"그런데,"

허드슨 부인이 단호하게 내 말을 막기에 입을 닫았다.

"이곳의 주인으로서, 손님들께서 제 여관을 흡족해하시고 되찾아 주시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답니다. 특히 훌륭한 성품과 따뜻한 인정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받는 진심 어린 칭찬보다 귀한 것은 없지요. 고작 하룻밤 묵고 떠나야만 하는 홈즈 씨의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홈즈 씨를 잘 알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보내드리는 게 어찌나 유감스러운지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또한!"

얼른 두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는 계속했다.

"고작 백정의 일에 관심을 두고 친히 나서는 일은 지체 높은 귀족분들에게서는 찾아보기 드문 미덕이고, 도둑질에 대한 책임을 져야 마땅한 백정의 죄를 잊지 않은 정의로운 사리분별력 또한 귀한 가치이니, 제가 다소 방어적으로 받아들였던 홈즈 씨의 무례한 어법만큼 뒤틀린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바, 홈즈 씨와 저의 이른 작별이 갓 움튼 우리의 인연에게 찬 서리를 내리는 것만큼이나 가혹하게 느껴지는군요. 자비와 정의를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 마을의 여관 주인으로서, 자연스레, 홈즈 씨에게 저의 진솔한 속내를 털어놓아 과거의 오해를 바로잡을 기회로 삼고 싶군요. 홈즈 씨, 개운한 아침이라고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곧 떠날 손님의 기분을 고려한 인사치레였을 뿐이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시간을 고결한 진실로만 채운다면, 백정의 처지 만큼이나 깜깜한 절망 속에 놓인 저에게 이 추운 아침은 야속한 하루의 시작이랍니다."

내 말을 정말 반어법으로 받아들였던 것일까. 허례허식과 조롱의 안개 너머에서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갈 문이 드러났다. 나는 문을 두드려 보기로 했다.

"받을 자격 없는 과찬으로 저를 또 한 번 몸 둘 바를 모르게 하시는군요. 부인이 깜깜한 절망 속에 있다는 말을 들은 이상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요. 제 관심이 부담스럽지 않으시다면, 그리고 허드슨 부인을 그토록 괴롭히는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부인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저는 기꺼이 부인의 짐을 덜어드릴 것입니다."

"매우 친절하시군요, 홈즈 씨. 감사드려요."

허드슨 부인은 내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나도 비슷한 것으로 응했다. 적절한 길이의 침묵을 끊고 그녀가 말했다.

"말씀드리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실은, 제 남편도 감옥에 갇혀 있답니다. 지은 죄가 크나큰 나머지, 교수형과 사면이라는 극적인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지요!"

과연, 내 앞에 나타난 문은 이 소중한 공간에 몸을 붙일 수 있는 방도였다. 그 순간 인내심이 닳아버린 나는 허드슨 부인에게 물었다.

"빼내 드릴까요?"

그러자 허드슨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죽여주게."

여관을 나섰을 때 구름이 걷히고 해가 모습을 드러내 온화한 하루를 약속했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자 내 까만 정수리에 존이 더운 손바닥을 올린 듯 외롭지 않았다. 안녕, 존. 좋은 아침이야.

 

간밤에 결심한 대로, 모든 일을 제쳐두고 존의 집부터 향했다. 실종상태인 그가 집에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 소풍을 가는 듯 내내 설레었다. 존의 집은 집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큰 저택이었는데, 우거진 담쟁이 넝쿨 너머로 간신히 보이는 하얀 벽돌과 파란 창문과 파란 지붕이 어찌나 깨끗하고 단정한지, 너른 잔디밭을 가로질러 문을 쾅쾅 두드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안달하게 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문을 열어주는 건 존이 아닐 터라서 점잖게 문 앞에 당도했고, 시종이 문을 열어주었다. 주근깨와 좁은 코를 얼굴에 단 시종이 나를 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내 코 윗부분의 얼굴만 찌푸리게 하는 괴상한 호칭이었다. 존의 집에서 그러한 호칭으로 불리는 건 어쩌면 그럴듯한 현상이지만, 오늘 아침 축축한 부엌에서 빵을 만든 시종에게서 들어야 할 소리는 아니다.

"아버지라니? 나를 왜 아버지로 부르는 것인가? 나는 자네는 물론 누구의 아버지도 아닐세."

그러자 시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합니다. 검은 옷을 입고 있으시기에, 방문하신다던 신부님인 줄로 착각했어요. 그러잖아도 어제 오셨어야 했는데, 오지 않으셨거든요. 신부님께서 날짜를 헷갈리셨거나 멀리서 오시느라 늦으셨겠거니 생각했답니다. 어리석었던 건 저였군요!"

재잘재잘 혼자 웃으며 손을 저은 시종이 이어서 물었다.

"그렇다면 손님께서는 누구시며, 무슨 볼일로 오신 건가요? 오늘은 맞이할 손님이 없는 날인데.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왓슨 주인님께 벌어진 일 때문에 정신이 없답니다."

말미에 가서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듯 목소리를 죽이긴 했지만, 그녀가 밟고 선 값진 부동산과 그녀 자체를 포함한 동산들의 주인이 실종된 상태라는 점을 크게 개의치 않는 쾌활한 태도였다. 나는 답했다.

"왓슨이 무척 그립고 그와 한시라도 빨리 재회하길 손꼽아 고대하지만, 여기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네. 내 이름은 셜록 홈즈일세."

그러자 하늘이 갈라지더니 어린 천사들이 나팔을 불며 내려와 나의 귀환을 찬양하므로 내 앞을 가로막은 문지기 또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결례를 사죄한 후 융숭한 대접으로 나를 안으로 모셔야 함이 마땅했으나, 내 이름은 내가 기대한 만큼의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시종은 대꾸했다. 그리고 잠시 조용했다. 나를 쳐다보는 시종은 다만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듯 두 눈을 깜빡이며 내가 말할 차례임을 알릴 뿐이었다. 그래서 덧붙였다.

"자네 주인의 절친한 벗이지. 분명히 내 이름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겠지?"

그러자 시종은 두 눈을 위로 향하며 생각을 더듬더니 말했다.

"음, 아니요."

"그럴 리가!"

존의 집에서 일하는 시종이 내 이름을 모를 리가! 내 이름이 지긋지긋한 나머지 나를 만나지 않고도 나라는 사람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는 게 아닐까?

"그렇대도 듣긴 들었겠지?"

시종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요. 전혀요."

"전혀라니!"

처음 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괴상한 사람이라면 기억력도 의심의 도마 위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분명히 한두 번 듣긴 들었을 것이야. 자네가 잊어버린 게 분명하군."

"귀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시종은 미안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내 자존심을 긁었다. 존! 정말 이러기야? 나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셜록 홈즈일세."

"셜록 홈즈, 셜록, 홈즈라……"

"그래. 셜록 홈즈. 셜록. 윌리엄…… 스콧? 홈즈. 인데……"

주변을 흘끗거렸으나 이 수치에서 나를 구해 줄 이는 보이지 않았다. 시종은 생각하는 동안 양 볼을 풍선처럼 부풀리더니, 결국 고개를 저으며 요란하게 바람을 뺐다. 두 손바닥도 펼쳐 보였다.

"푸, 몰라요. 들어본 적 없어요. 죄송해요. 제 잘못은 아니지만."

"괜찮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덧붙였다.

"혹은, ‘그 남자’?"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닐세."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왓슨에게 내 이름 전부를 알려 주지 않았어."

그렇다 하더라도 내 이름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존을 믿을 수 없어 급기야 의심했다. 이 시종이 지금 나를 놀리는 게 아닐까? 어디인지 익숙한 이 얼굴에게서 복수를 살 만한 짓을 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지나치게 쾌활한 태도가 빈정거리며 얻는 은밀한 즐거움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시종이 두 손바닥을 경쾌하게 붙잡으며 어색한 상황을 대충 무마했다.

"뭐, 어쨌거나, 왓슨 주인님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고 했네. 왓슨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집을 둘러보고자 하네."

"그건, 아무래도 주인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라……"

"물론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니, 자네 재량으로 이 집을 구경시켜 주었으면 하네."

그러자 시종의 답이 또 한 번 나를 당황하게 했다.

"불가능하긴요? 주인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계십시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얼굴이 구겨졌다. 영문을 모르고 싶어도 알아 버린 답 때문이었다. 존이 실종상태를 벗어나 나와 재회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나는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떨어진 입술에서 말보다 한숨이 먼저 튀어 나갔다.

"메리가 여기에 있나?"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결혼이라니! 여기서까지! 나는 약이 올랐다. 그 사실에 또 약이 올랐는데, 화를 내고 참을성 없이 안달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존이 보는 셜록 홈즈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존 왓슨!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야! 라고 버럭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또 약이 올라 죽을 것만 같으니 이곳이 지능화된 지옥이라고 해도 믿겠다.

내 기준으로 영원 같은 기다림 끝에, 나를 맞이했었던 시종이 돌아왔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시종이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와, 왓슨 부인님께서……"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힌 나는 시종이 말을 끝내길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했다.

"무슨 일인가!? 괜찮으신가? 심각한 상태인가? 목숨이 경각에 달렸나? 아니면 이미? 어서 말하지 못해, 어서!"

"사라지셨습니다!"

"아."

나는 실망감을 털어냈다.

"괜찮네. 메리에게 볼일이 있다기보다는 이 집을 둘러 보려고 온 것이니 괘념하지 말게."

"하지만 두 주인님께서 계시지 않는데……"

"거참!"

나는 문 안으로 발을 들였고 역시나 시종은 나를 몸으로 막지 않았다. 시종이 내 뒤를 쫓으며 따졌다.

"죄송합니다만, 두 주인님께서 자리하시지 않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여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천한 제가 감히 나리께 초대받지 않은 집을 멋대로 둘러보시겠느냐고 물어야겠습니까?"

"존의 집에서 일하는 시종답게 용감하구나. 오, 그런데 이것 좀 보렴!"

나는 주머니에 넣고는 줄곧 잊었던 모자를 꺼내어 잘 각을 잡은 후 머리에 썼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종 앞에서 보란 듯이 두 팔을 벌렸다.

"그들이 기다리던 신부가 바로 내가 아니겠느냐?"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자가 내게 주어진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머리의 열을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작았고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면 머리에서 떨어져 버리는 쓸모없는 천 조각은 옛 인간에게도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권력의 시각적 상징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고로 이 마을에서 나의 사회적 역할을 한발 늦게 깨달은 것도 내 잘못이 아니라 신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시종은 한쪽 눈썹만 찌그러트리며 단조로운 목소리를 냈다.

"진짜요."

"이 마을에서 이렇게 검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신을 모시는 신부 말고 더 있느냐?"

"신부님이 정말 신부님이라면, 왜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지 않으신 건가요?"

"잃어버렸어."

그러자 시종이 나머지 눈썹도 찌푸렸다.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존의 집을 지키는 문지기가 의심이 많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것도 놀랍지 않다. 호기심이 풀릴 때까지 집요하기 짝이 없는 것도.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증명할 수 있는가?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가릴 수 있는 사람은 네 주인뿐인데 공교롭게도 둘 다 자리하지 않는 현 상태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지우려는가? 자네는 이 집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있으며, 그 자격을 나에게 어떻게 증명하려는가? 자네는 왓슨 부부의 절친한 친구를 문전박대한 결례를 책임질 수 있는가? 나아가,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왓슨 부부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을 방해하고, 신의 법을 따르는 신부의 말을 믿지 못해 그리하였다고 모두 앞에서 진실을 말하고 신의 심판을 받겠느냐? 그렇다면 돌아가겠다."

내 과한 경고를 들은 시종은 노골적으로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마침내, 내 앞에서 무릎을 굽히며 복종을 표했다. 나와 엮여 보았자 불필요한 소란만이 일어나리라고 내다본 게 분명했다.

"저를 용서하십시오, 신부님."

"나도 용서하려무나, 아이야. 내가 사는 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아서 헷갈린 것뿐이란다. 자, 그럼 자초지종을 말해 다오."

"그 전에, 신부님, 저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겠습니까? 처음엔 왓슨 주인님께서 사라지시더니, 이제는 부인께서조차 보이지 않으시니 너무나 혼란하고 무섭습니다. 고작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방에 계셨었는데……."

나는 오직 나의 신만이 들을 수 있게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존! 정말 지긋지긋하군! 어리석은 미신을 행하도록 강요하는 어리석은 신을 모시는 게 내 역할이라니! 내가 신의 몸종이라면 누구보다도 게으르고 불만 많은 몸종이 될 자신이 있었으며 누군가가 그런 나를 그릇되었다고 비난한다면 그렇게 게으른 몸종을 고용한 신의 잘못이라고 나 자신을 변호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저 빨리 집을 둘러 보고 싶은 마음에, 잠자코 시종에게 손을 내밂으로써 나를 이렇게 인내심 없는 인간으로 만드신 신의 뜻을 소소하게 거역한다는 억지스러운 의미라도 두었다. 시종이 말하는 축복이란 신부의 손에 입을 맞추는 행위이고, 그리하도록 허하는 것이 신부의 의무라고 언제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억이 있었다. 고집 센 문지기에게 내 손을 내주고 나서야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왓슨 부인을 마지막으로 본 자가 누구지?"

내 손에 엄숙하게 입술을 댔다가 뗀 시종이 답했다.

"접니다."

"잘 되었군. 뭘 하고 계셨지?"

"아침 식사요. 추우시다고, 침대에서 식사하길 원하시기에 가져다드렸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나?"

"아니요. 잠시 후에 방으로 가보니 깨끗이 비우셨기에 치워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더 주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신부님."

"부인께서 자주 침대에서 식사하시고 또다시 잠을 청하시는가?"

"아니요, 신부님. 보통 날은 그렇게 게으르시지 않습니다."

말한 시종이 내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제 말은, 왓슨 주인님이 사라진 지 사흘째이니 상심이 크지 않겠습니까?"

상심이 큰 사람보다는 식욕이 왕성한 게으름뱅이로 들리는데. 집주인이 자리하고 하지 않고와는 관계없이, 내 목적을 이루어야만 하는 나는 시종을 설득했다.

"그렇겠구나. 사뭇 심각한 상황이로군. 레스트라드에게 전갈을 보내 부인께서도 사라졌다고 알리려무나. 그리고 나를 왓슨 부부의 침실로 안내해다오. 때마침 안주인까지 사라졌으니, 내가 늦은 것도 신의 뜻이었구나."

시종은 고분고분하게 내 말을 따랐다. 시장의 저택답게 잘 꾸며진 왓슨 부부의 집안은 다만 갑작스레 사라진 주인들을 찾느라 들쑤셔진 벌집처럼 소란했다.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어지는 복도와 문들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러나 그곳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곳도, 내게 허락된 곳도 아니었고, 거역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진 금기였기에, 찝찝한 마음으로 시종의 뒤를 따르며 지나치는 수밖에 없었다.

침실에 도착한 나는 벽에 걸린 왓슨 부부의 그림 앞에 자연스레 발이 멈췄다. 잎이 무성하고 짙은 나무 앞에 화려한 복식을 입은 두 사람은 어찌나 비슷한 체형과 생김새인지 남매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치에 개 한 마리가 앉아있었는데,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듯 윤기 나도록 검은 털과 길고 날렵한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 부부는 이 자비로운 마을의 지도자들답게 불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검은 개에 대한 편견을 무시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존의 얼굴이 매끈하다는 사실이었다. 수염이 없다니, 천운이로다.

창문은 닫혀있었는데 커튼이 틈에 끼워진 채였으니 가능한 설명은 게으르거나 꼼꼼하지 못한 시종의 탓이거나 누군가가 창문을 바깥에서 닫느라 밖으로 휘날린 커튼을 정리할 수 없었음이다. 부주의하더라도 크게 다치지 않을 이 층 높이. 침대로 다가가 캐노피를 들춰보니 정돈되지 않은 침대 위에 쪽지가 놓여있었다.

-돌상처럼 기다리기 지쳐 떠나네. 아주 늦을 것이니 기다리지 말게나. 가엾게도 길잃은 영혼에게 신의 자비가 있기를.-

유일한 용의자였던 안젤로가 석방되었다는 소식이 닿은 것일까. 메리 또한 존을 찾아 나서기로 한 모양이었다. 빨리 찾아내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 없었는데, 나보다 먼저 존을 찾아낼까 봐 마음속에서 고개 드는 조바심을 잘 다져 눌렀다. 경쟁자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더 날카로운 눈을 하고 다녔을 터인데. 근거를 들 수 없지만 나를 반기지 않는 듯한 기운이 감도는 메리의 쪽지를 보면 긴장하고 싶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진 기분이 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쪽지를 읽은 시종이 소리쳤다.

"세상에! 어딜 가신 걸까요?"

"아직은 모르지만, 나를 도와준다면 알아낼 수 있단다. 왓슨이 사라진 날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다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수사관님께 말씀드린 게 다인걸요."

그림 속 왓슨 부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나는 인내심을 짜냈다.

"그 별다른 일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 않니?"

그러자 시종이 답했다.

"늘 그렇듯이, 주인 내외께서는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셨어요. 아침 식사를 하시고, 옷을 갈아입으시고, 왓슨 주인님께서는 여덟 시 사십 분에 집을 떠나셨습니다."

"어디로 갔는데?"

"당연히, 의회로요."

"일하는 곳인가?"

시종은 나의 무관심을 직업적 특성으로 이해하기로 한 듯이 설명했다.

"의무를 다하는 곳이지요."

"왓슨 부인은?"

"여기 계셨지요. 정원을 산책하시고, 돌아와서 차를 한 잔 청하셔서 마시시고, 응접실에서 책을 읽으셨어요. 그리고 점심을 드셨죠. 두 시 경에, 갑자기 왓슨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보통 해가 질 무렵에 들어오시기에 이상한 일이었고, 수사관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렸었어요."

"자세히 이야기해주게나."

"창밖으로 보니 마차가 들어오기에, 부인님께서도 놀라셨어요. 좋지 않은 소식일까 봐 내심 걱정하시는 것 같았지요. 알고 보니 왓슨 주인님께서는 서재에 무언가를 놓고 가셨다고 했고, 그래서 마차를 돌려보내지 않고 서재로 가셨습니다. 서재에서 나오신 후 곧장 마차를 타고 떠나셨고요. 무엇을 가져가셨는지는 모릅니다."

오로지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을 떠나 서재로 가보았더니 내 눈을 붙잡는 존의 흔적이 많이 보였다. 책상과 의자, 필기도구들은 작은 손과 체구에 걸맞게 배치된 한편, 의학과 약학, 도시와 정치, 종교와 법에 관한 책으로 빼곡한 책장은 영리하게 발달한 뇌의 유연한 수용력을 짐작하게 했다. 밤늦게까지 머무는 일이 많은 듯 구석구석에 놓인 거대한 촛대는 천년 묵은 고성에나 어울릴법한 모양새여서 웃음이 났다. 움푹 파이고 전면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서재의 가장 안쪽이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이었는데, 그곳의 주인은 메리인 듯했다. 테이블 위에 작업 중인 자수틀이 있었고 실과 바늘도 함께였다. 숲속에서 사냥개와 함께 사냥하는 아름답고 정교한 풍경이 미완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시종에게 물었다.

"개는 어디에 있지?"

"개요?"

"그래. 왓슨 부부가 기르는 개가 한 마리 있다고 들었는데. 그림 속의 검은 개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사라졌습니다. 왓슨 주인님이 사라졌을 때부터 보이지 않았어요."

"같이 사라졌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것 보렴. 아무도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단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탓이지."

진동하는 행복의 냄새를 부정하느라 비밀을 탐지하려고 열심히 코를 킁킁댄 것이 사실이다. 나는 먼지에 집중하며 존이 이곳에서 보낸 과거의 시간을 추적했다. 눈에 보이는 시간인 먼지는 나를 책장 앞으로 이끌어 유독 깨끗하게 닦인 한구석을 보여주었고, 그곳에 꽂힌 명백히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 제목들이 내 눈을 붙잡았다. 개를 훈련하는 방법. 잉글랜드의 왕들. 충직한 존. 잠깐, 이런 이상한 책을 은근슬쩍 심어놓다니, 나를 과소평가하는군. 이렇게 얕은수로는 나를 속일 수 없어. 잉글랜드에는 왕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거의 반 뼘 정도 되는 무거운 책을 꺼내고 빈 공간에 손을 집어넣어 더듬어 보았다. 그러자 손에 레버가 닿았다.

나는 시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 주인이 비밀을 숨겨 놓았구나."

머리를 조아리고 나가 달라는 말이었는데, 내 말을 들은 시종은 도리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기대감을 숨기고 내 옆으로 걸어와 은근슬쩍 섰다. 누가 존의 시종 아니랄까 봐. 레버를 당겼더니 책장이 옆으로 스르르 미끄러지며 내 앞에 닫힌 문을 보여주었다. 차가운 쇠붙이로 된 문고리를 잡고 열자 아래로 이어지는 좁은 나선계단이 어두컴컴한 모습을 드러났다.

"대단해요!"

시종의 말에 고개가 돌아갔다. 비밀을 감추기 위해 이렇게 극적이고 멋진 장치를 심어놓은 건 존인데 왜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 시선을 무어라고 해석했는지, 시종은 변명했다.

"아니, 제 말은, 혹시 왓슨 주인 내외께서 여기에 갇혀 계신 건 아닐까요?"

나는 왼손을 쥐었다 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법하지 않구나. 왓슨은 춥고 습한 곳을 싫어하지.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이 아래에 갇힌 것이라면, 도무지 참을 수 없어서 납치범을 때려눕히고 뛰쳐나왔을 것이야."

나는 또 말했다.

"음침한 기운이 느껴지니 나 혼자 들어가는 게 좋겠다."

"하지만, 신부님! 이렇게 어두운 구석을 신부님 혼자 보시게 둘 수는 없는데요! 사려 깊은 제 주인님께서 저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눈을 반짝이는 시종의 조잡한 핑계에 내 두 눈이 절로 요란하게 굴러갔다.

"초를 가져오렴."

시종이 초에 불을 붙여 들고 왔다. 그리고는 나를 앞서 조심스럽게 계단 위로 첫발을 디뎠다. 벽에 걸린 촛대에 불을 옮겨 붙이고, 몇 단을 더 내려가서 다음 촛대에도 불을 밝혔다. 점점 영역을 넓히는 빛을 따라 나도 아래로 내려갔다. 습하고 냉한 공기 때문에 손끝이 저려 연신 주먹을 쥐어야 했다. 퀴퀴한 냄새에서 존의 존재가 느껴졌으나 과거의 흔적일 뿐, 생기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래로, 아래로, 끝나지 않는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차갑게 저벅거리는 메아리와 나선 기둥을 기웃거리는 그림자가 나를 어지럽게 했다. 드디어 바닥이 꺼지길 멈췄을 때 또 다른 문이 나타났고, 이번엔 내가 시종을 앞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벽을 따라 촛대 여러 개에 불을 밝히고서야 드러난 존의 비밀 아지트는 제법 충격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쪽 벽에는 다양한 용도의 칼과 머스킷이라 불리는 장총으로 채워졌고, 구석에 세워진 마네킹은 존의 체구에 맞는 사냥용 장비를 입은 채였다. 덫과 올가미에는 털가죽을 입은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피가 굳었으며 최근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 목적이 살생인지 구생인지 모를 물건들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한가지는, 존의 체취였다.

"오, 신이시여."

들어오지 못하고 입구에 멈춰선 시종이 가슴에 성호를 긋고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 또한 존을 부르고 싶었다. 초식인간의 비밀 아지트가 어째서 사냥꾼의 오두막처럼 보이느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시종을 안심시켰지만, 머릿속에 의심은 싹튼 후였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출몰하는 마을이라는 특이한 사실을 문득 잊을 수는 없지 않은가?

"두려워 말아라, 존은 의사니까. 의사와 백정은 손바닥의 안과 밖처럼 가까운 사이란다."

그렇고말고. 시종을 안심시킨 후 조사를 계속했다. 인간과 동물의 해부학 서적들이 꽂힌 책장과 그에 쓰이는 도구들이 담긴 상자 등 흥미로운 물건 중에서도 가장 내 시선을 끌어서 마지막으로 살펴보기로 한 것은, 단순하게도, 지하실의 가장 가운데에 놓인 크고 육중한 테이블이었다. 원래는 식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자그마한 물체 하나도 올리지 않았으며 깨끗하게 닦이고 마른 상태였는데, 실험대 혹은 작업대로 쓰면서 큰 물체를 자주 올리고 내리기에 쉽도록 관리된 듯했다. 테이블과 바닥에 부정할 수 없이 분명한 핏자국이 발견되었으니, 나뭇결 틈에서 사슴의 털 또한 찾아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래 안심하는 나를 시종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사냥에 관심이 있으신지 전혀 몰랐는걸요."

"그래서 비밀인 거지."

온종일 곁에 머무는 시종조차 까맣게 몰랐다면 비밀을 비밀로 지키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여야 했을 텐데. 한 마을의 시장에, 의사에, 남편에, 사냥꾼이라. 그렇게 바쁜 탓에 나에게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여주지 않는 거야? 나는 손끝을 비벼 사슴의 털을 털어냈다. 시종이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비밀을 간직하실 수가 있나요? 사냥하신다면, 사냥감이 있을 텐데요. 가죽이나 고기는 한 번도 가져오신 적이 없는걸요."

고개를 돌리니 시종은 벽에 등을 바짝 기대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둑한 그림자가 내려앉은 작은 얼굴이 더욱 낯익어 보였다.

"좋은 지적이구나, 아이야. 네 이름이 뭐니?"

"소이어요. 세라 소이어."

"소이어."

내가 너를 알지 않니? 물었다가 혼란과 오해를 살까 봐 그만두었다.

"왓슨 부부의 비밀을 안다면 말해 다오. 이 발견과 더불어 네 주인 내외의 행방을 알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요? 신부님은…… 신부님이시잖아요?"

"게다가 너도 모르는 이 집의 비밀을 한눈에 찾아냈지. 신께서 내게 살쾡이처럼 날카로운 눈을 선물하시고, 함선의 닻 같은 무거운 입을 달아주셨으니, 내 귀를 텅 빈 우물이라고 생각하렴."

그런데도 소이어는 의심이 서린 눈이 물끄러미 나를 보며 고민했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으로만 보면 별로 소득이 없어 보여서, 마침내 들린 대답도 의외였다.

"주인님이 사라지신 이후 저희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제 동료 중 한 명이 특히나 심란해하고 있는데,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왜 그런지도 말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더니, 신부님이 오시길 기다리겠다고 했었어요. 저에겐 말할 수 없어도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해서 마음의 짐을 덜려나 보다, 했지요."

나는 흔쾌히 답했다.

"마음의 짐 때문에 괴로워하는 신도를 모른척할 수 없지. 당장 내게 데려오너라."

존의 아지트는 연약한 마음의 소유자에게 겁만 줄 터라, 소이어는 나를 기도실로 안내했다. 솔직하여지자면 신부라는 직업은 전혀 나의 업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만일 그랬더라면 이 불량한 태도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은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실에 도착해 커다란 십자가가 놓인 제단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고, 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의 마음은 평온하기만 했다. 첫째로 내가 신부가 아니거나, 둘째로 신이 존재하기라도 한다면 그 증거로 땅이 갈라지고 용암이 흘러나와 가짜 신부를 집어삼키는 등의 장대한 신의 처벌이 떨어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혀. 아무. 일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 순간, 나는 덜컥 겁에 질렸다. 영겁 같은 기다림을 깨달은 때였다. 숨이 막히는 지루함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게 나를 위한 가장 지능적이고 극렬하고 가혹한 처벌이며, 그러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는 강력한 존재가 나의 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때였다. 권태의 무게에 짓눌리며, 나는 죽기를 소망했다. 죽음만이 살길이다. 왜냐고? 나의 신은 내가 죽기를 원하지는 않으니까! 나의 변태 같은 신은 내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야만 고문하기를 멈출 것이었다.

마침내, 죽음은, 이번엔, 달칵, 하고 기도실의 문이 열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소리로 나를 찾아왔다. 짙은 피부색의 젊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지 소이어가 시종이라고 언급한 것과는 달리 귀족으로 보였다. 값진 옷으로 보면 그랬다.

"죄인이 신부님께 축복을 구합니다."

"아아! 참으로 태평한 소리로군!"

고문이 그치자 행복해진 나는 두 팔을 벌려 신도를 맞이했다.

"소이어의 동료라기에 마찬가지로 하인을 예상하였었는데,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지만 상관없네. 어서 와서 내 발치에 앉아 고백하게."

그러자 신도가 다가와 내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내게 단정하게 나뉜 짙은 밤색 정수리를 보인 채 말했다.

"소이어는 딱하게도 돌연한 고열이 발생해 병상에 누웠고 이 자리에 오기로 한 시종이 그녀를 보살피며 의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운과 도리에 어긋남에도 가슴 속에 지니기만 해왔던 죄가 너무나 무거워져 신의 자비를 구하여 속죄하고 해방되고자 하오니 이렇게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난 점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또한 시장님에 관한 일로 괴로워하며 신부님을 찾아뵙길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무척 건강해 보였는데, 고열이라? 입가에 모은 두 손과 엄숙하게 내리깐 두 눈과 기도실을 채운 침묵이 내 차례를 암시했다. 나는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고백하거라, 아이야."

그러자 신도가 말했다.

"부끄럽게도 저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존함은 존 해미쉬 왓슨 경이며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었던 그 당시 시장님은 미혼이셨습니다."

흘끗, 나를 올려다보는 신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단 수식어와는 달리 목소리에서도 눈빛에서도 부끄러움보다는 강렬한 목표의식이 엿보였다. 그렇게 도전적인 눈빛을 전에도 받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꿈이었나? 존과 함께였나? 결국, 내가 이겼던가? 그래서 적대감이 들지 않는 건가? 조용히 눈을 내리까는 신도를 보며 나도 내 본분을 되새겼다.

"계속하거라, 방황과 고난의 길에 놓인 시장님을 위해, 속히."

"비록 저는 결혼한 몸이었고 법적으로, 영적으로 온전히 인정받은 배우자가 있었으나, 시장님의 도덕적으로 결함 없는 인성, 냉철한 판단력과 단호한 통솔력과 소탈하고도 영리한 재치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저처럼 시장님을 흠모하는 여성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꾸가 입 밖을 흘러나왔다.

"자연스레."

"게다가 참으로 귀여우셨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하여, 자격이 없으며 그릇된 행동인 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누구의 방해도 없이 시장님께 제 마음을 전하려고 뒤를 밟은 적이 있습니다. 미행은 숲으로까지 이어졌으나, 시장님에 대한 감정이 너무나 큰 나머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고 위험천만하게도 몰래 뒤를 쫓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시장님께서는 게이이십니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가슴에 척척척척 성호를 긋는 그녀와는 달리 나는 침착할 수 없었다. 시장님의 성 정체성과 나의 관련성을 따지거나 증언의 신빙성을 낱낱이 따지기도 전에 무작정 가슴을 채우고 보는 희망이 있었다. 근거 없는 주장은 귓등으로도 듣고 싶지 않은 나라는 사람이 줏대 없게도 귀가 붙들리고 보는 주제였다. 마치 일평생을 바쳐 추격해오던 신화 속 동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는 증언처럼 들리니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입술이 어색하게 떨어졌다.

"그가……."

"확실합니다."

"정말……."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죽었다가 깨나도 게이십니다. 오, 신이시여, 부디 저를 용서하소서, 충격적인 발견으로 인해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오나 그에 복수하는 등 악의적인 목적으로 시장님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옵고 다만 시장님의 행방을 하루빨리 알아내어 혼란스러운 시민들의 품으로 모시고자 하오니 이런 뜻을 헤아리시어 주십사 신부님께 신의 자비와 용서를 구합니다. 시장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숲에서 그 남자와 재회하였던 것입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내 두 다리를 이성이 간신히 붙들었다. 꼴사나운 광경은 면할 수 있었으나, 가슴에 차올랐던 봄 샘물 같은 설렘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남자!

"제가 본 바를 똑똑히 기억합니다. 보통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하오나 시장님께서는 그 남자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터놓지 않았으며 저 또한 진실한, 다만 빛바랜 애정에 대한 존중으로 오늘날까지 그분의 비밀을 철저히 지켜드리고 있었기에 시장님의 실종을 수사하는 데 있어 그 남자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도는 말했으나 그녀의 말은 내 머릿속에 거의 들어오지 못하고 귓가를 맴돌기만 했다. 머릿속을 채운 메아리 때문이었다. 다른 남자라니? 얼어붙은 심장에서 배신감이라는 음산한 덩굴이 뚫고 나와 온몸으로 뻗어 나가는 듯했다. 내 심장에 그러한 사악한 씨앗이 심겨 있었다는 사실을 나의 신이 알면 나를 꾸짖을 테다. 하지만 나는 고이 잠자고 있던 씨앗을 발아시킨 불청객의 탓을 하겠다.

다른 남자라니!

"그 남자가 누구인가?"

내 목소리에서 무언가가 묻어났는지, 나를 흘끗 보는 신도의 눈빛에 불안이 서렸다.

"이름은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는 대로 말해 다오!"

나도 모르게 높아진 언성에 내가 더 놀랐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를 안심시킬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시장님에게 씻을 수 없는 혐의만을 씌울 뿐이니."

협박으로 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도가 어쨌든 입을 열었으니 효과가 있었다.

"시장님보다 키가 훨씬 컸고, 더 어려 보였고, 햇살같이 다정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남자와 경쟁하여 시장님의 마음을 쟁취하지 않고 포기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신도가 망설이는 동안 나는, 빨리 털어놓지 못할까! 버럭 외치는 상상을 하며 겹친 열 손가락을 조급하게 스쳤다. 나보다 착한가? 나보다 다정한가? 정의로운가? 예의가 바른가? 힘이 센가? 부자인가? 존이 가치 있게 여기지만 나로서는 경쟁하기 힘든 요소들을 따져보느라 짜증이 나 죽을 것 같은 내게, 신도는 마침내 말했다.

"그 남자는 신부님이었습니다."

마주친 신도의 눈이 곧은 진실을 주장했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신부? 나와 같은 신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직접 성당으로 가서 고해하지 못하고 다른 신부님께서 이곳으로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종교 개혁의 바람에 관해 이야기만 들었지, 이 마을까지 개신교의 검은 손이 뻗어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신도는 약간의 경멸조로 말하며 또 한 번 성호를 그었다. 종교 개혁이며 개신교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하나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간에 신도의 고백이 사실이며 저주받을 내용이라 신의 용서를 구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신의 법 따위에 관심을 둔 적이 없는 나도 마땅히 분노했다. 그럴 이유가 충분하다. 누구보다도 신에게 진실하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신부가 감히 시장님을 유혹하다니!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고리타분하고 무감각하게 느껴지던 신부라는 업이 비로소 운명임을 알았다. 정직하고 열성적인 신부로서 그릇된 행실을 일삼는 신부를 찾아내어 신의 심판과 처벌을 받도록 함으로써 그를 구원하고 나아가 이 마을에서 쫓아내는 것이 신이 나에게 부여한 위대한 사명처럼 느껴졌다.

"시장님께서 그를 만난 장소를 기억하느냐?"

"네. 동쪽 시장에서 교각을 건너 개천이 흐르는 방향으로 십 분 정도를 따라갔습니다. 큰 버드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나는 조급해졌다. 메리가 나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존을 추적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조급해졌다. 그러나 존과 비밀스러운 정을 나눈 남자가 이 마을 어딘가에 존재함을 안 이상 그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을 넘어서 직접 보기 전에는 잊지 못할 것을 알았다.

"외간남자라니!"

신도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 왔다. 나는 입을 다물고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덜떨어진 내가 존이 보는 나라는 말인가. 맙소사.

"우리에게 신의 자비가 있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리고선, 코에 자극적인 냄새가 걸리고 나서야 신도가 말한 시장터를 알아보았을 때, 천천히 달리는 마차 안에 들어앉은 내 몸도 알았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싱그러운 신내, 뭉근한 단내의 출처를 찾아 고개가 절로 돌아갔고, 과일, 채소들을 담은 수레들을 쳐다보며 무언가를 놓친 듯한 기분 나쁜 공백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는데, 강력한 생선 비린내의 습격을 마지막으로 의문은 머릿속 뒤편으로 달아나버렸다. 배가 고팠다. 쏟아지는 다채로운 향기 중에서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딱 하나 있었는데, 이렇다 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답답하도록 희멀건 물체들을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별안간, 마부에게 버럭 소리쳤다.

"멈추시오!"

마차가 멈추길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닳아버린 나는 아직 움직이는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돌로 다져진 땅을 디디며 신발 너머에서 전해지는 단단한 촉감도 익숙했고, 내 앞에 홀연히 나타난 안젤로의 고깃간도 기억보다 조금 작아 보인다고 생각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삐걱거리는 판자를 밟고 고깃간으로 들어가면서 설명할 수 없는 흥분이 내 손끝을 저리게 했다. 내 눈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데, 내 눈에 들어오는 피에 절은 도마, 거대한 칼,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소시지와 육포, 선반을 채운 절인 고기, 달걀 따위가 내게 아무런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바람이 내가 찾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그것 또한 참을 수 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안젤로!"

나는 빈 고깃간 안에서 소리쳤다.

"안젤로! 당장 나오게! 안젤로!"

마침내 뒷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피로 얼룩진 흰 앞치마를 입은 안젤로가 뒷문을 꽉 채우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보고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홈즈 나리!"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내 발등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어 호소하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나리 덕분에 시장님을 해친 혐의를 벗고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만 일어나고, 부탁이 있어서 왔으니 내 말을 들어주게."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내 눈이 짜증스럽게 느껴져 꾹 감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러자 더욱 예민해진 후각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내 뇌로 올려보냈다. 선반의 뒤틀린 나뭇결 사이사이를 채운 절인 고기의 톡 쏘는 구린내와 공중에 매달린 소시지의 퀴퀴한 단내가 주의를 분산시키는 가운데, 안젤로의 땀 냄새 속에서 가축의 신선한 피비린내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자네, 돼지를 잡았는가?"

"그렇습니다. 필요하십니까?"

"그래, 그래. 부탁하네."

고개를 주억거리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

"아니! 고기는 필요 없지! 내가 필요한 건 자네의 도움이네."

안젤로는 기쁜 내색을 했다.

"빚을 갚을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까? 영광입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고기 씨, 아니, 허드슨 씨의 재판이 내일 열릴 예정이네."

그제야 안젤로는 혼란스럽다는 듯 두 눈을 좁혔다. 나 또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허드슨 씨요? 금지된 약물을 소지하고 사람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갇인 분 말씀입니까?"

안젤로의 앞치마에 묻은 피는 적어도 한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라고 쓸데없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대충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가, 재판이 열리네."

"내일 말입니까?"

"내일? 그게 내일인가?"

"나리께서 방금 내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뱃속을 습격하는 부자연스러운 허기가 나를 재촉해 짜증이 났다. 왜! 무엇을 하라고! 안젤로의 표정에서 내 상태가 훤히 보였기에 침을 꿀꺽 삼키고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나서야 허드슨 부인이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내일 아침 열 시, 재판장으로 가게. 가서 죄인 허드슨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말하게. 금지된 약물을 산 값 말이네. 자네가 저지른 절도가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갚지 않으면 악당 허드슨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하게. 자네가 그렇게 해 준다면, 무슨 거짓 증언을 하여서라도 죄인 허드슨이 사형에 처하게 할 수만 있다면, 내게 진 빚은 깨끗이 갚은 셈 치겠네. 허드슨 부인도 자네에게 고마워할 거야. 할 수 있겠나?"

물었지만 그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 인내심을 짜내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안젤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어 다행입니다. 이미 죄인인데 무엇이 겁나겠습니까?"

"좋아, 좋아."

만족한 나는 서둘러 고깃간을 벗어나려다가 덧붙였다.

"참. 아마 약물을 구한 죄로 재수감되겠지만 이미 익숙할 테니 너무 염려하지는 않겠네. 그럼!"

고깃간을 나와서는 내 두 다리가 오른쪽으로 난 길을 향해 제멋대로 걸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길이었으나, 무엇을 지나면 무엇이 있고 무엇이 나오는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했으니 대단히 이상한 현상이었다. 큰 마차가 위협적인 바퀴를 굴리며 지나다니는 딱딱한 대로가 나오면 그다음엔 끝없이 하늘로 솟은 성벽이 나오고 그 밖으로 나가면 문지기가 지키고 선 나무 교각이 개천 위를 굽어 있었다. 그 개천은 아침이면 시리고 투명하게 반짝였고, 늦은 오후면 금빛 혹은 붉은빛으로 물들었으며, 밤이면 검은 거울로 변한 물에 부서진 달빛이 떠내려가는 듯했다. 개천을 따라서 놓인 아름다운 산책로를 걸어 내려가면 머지않아서 무성한 가지를 늘어뜨린 거대한 버드나무와 만날 수 있었다. 이 마을의 누구도 그 버드나무의 나이를 모른다는 사실까지도, 내가 아는 것이 사실인지 망상인지 눈으로 보아 가릴 필요도 없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왜?

사실임을 알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기에 따라간 개천 중간에, 과연 거대한 버드나무가 서 있었다. 잎사귀를 모두 잃고 마른 가지만 남은 쓸쓸한 모습이었다. 봄이 오면 연두색 잎사귀들이 작고 하찮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섭섭한 기분마저 들었다.

무슨 흔적이든 찾길 기대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넝마로 만든 인형이었다. 나무 밑동 근처에 누운 그것을 집어 들었더니 벌어진 넝마 사이로 낙엽과 흙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래로 쳐진 실 가닥과 그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바늘로 보면 누군가가 인형을 만들다가 중단했다는 뜻이었다. 양지바른 기둥 맡에 남은 엉덩이 자국은 아주 작은 체구의 인간이 거기에 방금까지 머물렀음을 말했다. 왜 만들던 인형을 버리고 떠난 것일까? 낙엽 틈에 녹아든 흰 눈을 살피며 발자국을 추적해 보니, 손바닥만 한 작은 발자국 외에 성인의 발자국이 눈에 띄었다. 불길하고 큰 발자국이 작은 발자국을 이끌고 개천을 떠나 숲이 있는 방향으로 향한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발자국을 좇아 뛰었다. 어린아이가 하던 일을 팽개치고 어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는 가정이 존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가, 관목 사이를 헤치면서 문득 깨닫기를 여전히 내가 존의 마인드 팰리스 안에 있으니 이곳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도 존과 관련이 없다고 여기면 안 될 것이었다. 더욱 초조해진 나는 귀에 걸리는 남자 목소리에 행동을 뚝 멈추고 들었다.

"이 우물 안에 있단다."

가시처럼 찔러대는 마른 관목 사이에서 네 다리로 납작 엎드려 교활한 목소리로 뻔한 술수를 부리는 남자의 목소리를 더 열심히 들었다.

"내 소중한 인형이 이 우물 아래로 떨어져 버렸단다! 애석하게도 나는 너무 무겁고 둔해서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어. 하지만 어린 너는 작고 가벼우니까, 내려가서 내 인형을 꺼내와 주지 않으련? 그러면 내가 줄을 단단히 잡고 있다가 끌어올려 줄게."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내다보니, 작은 공터에 우물이 하나 있었고, 그 우물을 사이에 둔 남자와 아이가 보였다. 남자에게는 배 높이까지밖에 올라오지 않는 작은 우물이었으나 아이에게는 턱이 걸리는 높이였다. 형편없이 늙은 얼굴과 볼품없는 체형, 희끗희끗하게 센 머리와 손에 잡히는 대로 걸친 두툼한 옷, 내가 아는 얼굴이던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혹시, 무서운 거니?"

남자가 다시 입을 뗐다.

"하긴, 용감한 아이를 만나기가 쉽지는 않지."

"무서운 거 아니야!"

대꾸한 아이가 결심을 내비쳤다. 정곡이 찔린 모양이었다.

"나를 내려줘. 인형을 구해올게."

안 돼! 멍청하기는! 남자의 도움을 받아 우물 위로 올라가는 아이를 보자 내 몸이 저절로 움직여 남자에게 달려갔다. 두 손을 써서 그 무거운 몸을 우물 안으로 냅다 밀어버릴 때까지 내 행동에 대한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경고라도 하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찰나의 생각은 남자의 형형한 눈을 대하자마자 사라졌다. 예상 밖으로, 용케 우물 벽을 두 손으로 붙잡고 매달린 그 몹쓸 자는 나를 이 마을로 데려다준 미천한 마부였다! 나를 본 그가 사악한 얼굴과 광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하! 다시 만날 줄 알았지! 여기서 썩어 문드러져라!"

우물 벽을 두 손으로 잡고 버티던 생의 마지막 찰나를 저주의 말을 외치느라 써버리자마자 그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아래로 추락했고, 첨벙 하고 묵직한 물소리만을 냈다. 어두컴컴한 우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잠해졌다.

"우와."

우물 위에 선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옅은 금발과 또랑또랑한 파란 눈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 앞에 서면 한없이 초라하고 꾀죄죄한 내가 낱낱이 노출되는 기분이라 부끄럽기 짝이 없어졌으니까. 나의 작은 존.

"밀어버렸어!"

나를 알아보기는커녕 눈앞의 추한 남자가 미래에 저에게 입힐 해악은 전혀 모르는 채 내가 저지른 범죄에 감탄하는 것이었다. 작은 존을 이곳에서 만난 게 전혀 반갑지 않았다. 재회의 순간이 절명의 위기였던 현상도 더더욱. 나는 변명했다.

"몹시 나쁜 사람이었어."

작은 존은 우물을 내려다보며 동의했다.

"맞아, 그렇게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녀석은 머리보다 몸이 덜 성장한 나이라 중심을 잃고 고꾸라질까 봐 등에서 피가 식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작은 존은 아직 세상의 근심이 하나도 묻지 않은 듯한 뽀얀 얼굴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제 소중한 인형이랑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네."

"그럼. 그럼."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만 내려올래? 위험하단다."

추락한 남자가 우물 벽을 기어 올라와 녀석의 가냘픈 발목을 잡아채는 상상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나를 작은 존은 몰라주었다.

"위험하지 않은데? 나 중심 잘 잡아."

그래서 나도 손을 거두고 작전을 달리했다.

"그래? 그럼 네 힘으로,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어?"

"물론이지! 잘 봐."

녀석이 낭창한 발걸음으로 우물 위를 과시하듯 걸을 동안 가만히 지켜보는 게 이 마을에 도착한 이래 겪은 일 중 가장 힘들었다. 한참이나 균형감각을 자랑하고는 마침내 내 곁으로 가벼운 몸을 던졌다. 발밑으로 전해지는 폭신한 무게에 크게 안도해 한숨이 나왔다.

"멋진 몸놀림이군. 하지만 이 우물은 뚜껑을 닫아버리는 게 좋겠어. 모두가 너처럼 날렵한 건 아니니까."

작은 존이 물었다.

"그럼 저 사람은?"

"분명히 죽었을 거야. 전혀 신경 쓰지 말렴. 자의든 타의든 우물 안에 들어가는 건 전혀 성숙한 짓이 아니야. 이제 여기는 얼씬도 말자."

썩어 문드러지는 건 그자가 될 것이다. 기대어 세워진 우물 뚜껑을 끌어 올려 위를 막으며, 마부의 정체를 뒤늦게 기억해낸 소름 끼치는 아둔함도 함께 봉했다. 이토록 작고 힘없는 존재를 사악한 복수의 희생양으로 삼다니, 규칙적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보다도 위험하고 기분 나쁜 존재다. 이 저주받은 마을의 시장을 마침내 만나면 왜 그런 악당이 이 마을에 버젓이 돌아다니게 두는 거냐고 따져 마땅하다. 눈앞에서 놓칠뻔한 작은 존이 자꾸만 간담을 서늘하게 해 꽉 안아서 물리적 실체를 확신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녀석의 몸이 너무나 작았다. 그래서 나는 주머니에서 한층 너덜너덜하고 볼품없어진 인형을 꺼냈다.

"이거 네 거 맞지?"

녀석이 내 손의 인형을 발견하고는 얼른 쫓아와 가져갔다. 마치 내가 억지로 빼앗아 가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해져 또 변명했다.

"버드나무 아래에 있길래. 인형을 만드는 솜씨가 좋구나."

"고마워."

그렇게 말한 작은 존의 눈빛에는 나를 판단하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그러나 결국 그 나이대의 인간답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야 말았다.

"나는 의사가 될 거야. 그러려면 손을 잘 써야 하지. 그래서 바느질로 연습하는 거야."

나는 내 표정에서 근심이나 슬픔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물어온다면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네 이름이 뭐야?"

"이름? 이름 없는데."

"이름이 없다고? 부모님이 지어주지 않았어?"

그러자 녀석이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부모님도 없으니까."

설명 가능한 어떤 이론도 떠오르지 않은 채, 영문 모르고도 옅은 슬픔이 마음을 채우기만 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아이의 파란 눈에 내가 익히 아는 의심이 엿보여 더 그랬다. 이번엔 녀석이 내게 물었다.

"네 이름은 뭔데?"

"셜록."

그러자 작은 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셜록이라고? 멋진 이름이다! 너 친구 많지? 누구든 그런 멋진 이름을 자주 말하고 싶어 할 테니까. 셜록! 이라고!"

작은 존의 말을 듣고는, 굳어있던 내 얼굴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입술에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느슨한 웃음이 터졌고 눈에서는 정황 모를 눈물이 고였다. 웃으면서 울어 버린 것이다. 내 눈물이 어찌나 퉁명스럽게 툭 떨어졌는지 그 광경을 본 녀석도 곧바로 지적하지 않을 정도였다. 입으론 웃고 눈으로는 우는 게 내 의지의 결과가 아닐뿐더러 작은 존을 만났을 때부터 기분 나쁘게 꿈틀대는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눈에서 눈물을 흘리는 과정이 기계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게 내가 한 행동이었다. 내 이름이 마치 존에게 불리기 위해 지어진 것만 같았고, 더는 기억나지 않거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슬픔마저도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듯했다. 그 작은 고유명사가 이렇게 강력한 영향을 미쳐도 되는 걸까.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친구가 없어서 몰랐는지도.

"그럼 네 이름 너 줄게."

의심 많은 녀석은 기쁜 얼굴을 짓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이야?"

"그럼."

"그럼…… 왜 우는 거야?"

"이거? 신경 쓰지 마. 나이가 들면 찬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나."

그러자 안심한 작은 존, 아니 작은 셜록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고마워! 셜록!"

그리고는 말릴 새도 없이, 뚜껑을 덮은 우물 위로 훌쩍 올라가서 한 번 발을 구르고는, 다시 생각해보니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무언가가 더 남았는지, 뚝 멈추고 또다시 물었다.

"그런데 계속 셜록이라고 불러도 돼? 그러면 우리 이름을 더 자주 들을 수 있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주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고 뿌듯해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답했다.

"그럼."

대답을 들은 작은 셜록은, 다시 뚜껑 위에서 두 발로 쿵쿵대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다가, 또 뚝 멈추고는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셜록! 나랑 놀래?"

기분 나쁜 마부가 썩어가는 우물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했다. 존을 빼닮은 작은 셜록이 뛰어다니는 걸 마음껏 쳐다보고, 묻는 말에 대꾸하고, 갑작스레 덜컥덜컥 마음을 졸였다가, 한숨 쉬고 웃고, 생기로 가득 찬 에너지에 감탄하는 게 내가 참여한 놀이의 전부였다. 지치는 기색 없이 내 주변을 팔랑팔랑 맴도는 금빛 정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문득,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새삼스럽게.

 

*

 

허드슨 부인의 망토와 장화를 후퍼라는 이름의 장의사가 검사했다는 점과, 시장 존이 보았던 마지막 시신 또한 후퍼에게 보내졌다는 이유로 만날 이유는 충분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은 후퍼는 누운 시신 한 구를 앞에 두고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는데, 나를 향해 스치듯 눈길을 한번 주고는 바삐 끄적이길 계속했다. 조수가 후퍼에게 다가가서 방문객이 찾아왔다고 알리고 그 방문객이 허드슨 부인의 망토와 장화를 보냈던 사람이라고 설명하고서야 후퍼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허공을 가로질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부터 보냈다.

"장화에 남은 흔적을 조사하여 백정의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한 게 당신이란 말이오?"

"그렇소."

그제야 후퍼는 펜을 놓았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걸어왔다.

"이방인이로군. 여기 머무는 동안 일자리가 필요하다면 내가 내어줄 수 있네만, 생각 있는가? 내 무능한 조수보다는 쓸모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걸레질을 하는 무능한 조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제안을 사양하며 겸손함이라는 것을 맛볼 적절한 기회로 보여 그리해 보았다.

"그럴 시간 없소. 나는 신을 섬기는 몸으로 한시바삐 시장님을 찾아내야 하는 숙명에 처해있소. 시장님이 사라지기 전, 이 마을에서 발견된 시신을 보셨다고 들었고, 또 그 시신이 이곳으로 왔다고도 들었소. 그 시신을 보러 왔소."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춘 후퍼가 팔짱을 끼웠다.

"신부라면 왜 십자가를 걸지 않고 있는 것이오?"

나는 둘러댔다.

"잃어버렸소."

후퍼의 표정으로 보면 내 수작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십자가도 그저 물건이라 잃어버리고 도둑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들먹여봤자 소용없어 보였다.

"십자가를 잃어버린 신부라면 말 다 했군. 자네가 형편없는 신부라 하더라도, 이곳은 신의 권능이 미치지 않는 곳일세. 이 시신들이 부활하는 기적을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얕은 수작 부리지 말고 답하게. 시장님을 찾는 것과 그 시신이 무슨 상관이기에 보여달라는 건가?"

그래서 나는 정직하게 답했다.

"그 시신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였기 때문이오. 그리고 가장 극적인 반응을 보인 게 시장님이기 때문이오. 사라지셨잖소."

후퍼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으니 옳은 답이라는 뜻이었다.

"하여 화장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네. 따라오게."

가장 마지막으로 일이 발생한 때가 나흘 전이라서 괴물에게 당한 시신을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부패가 진행 중인 상태라는 게 자명했다. 걸어갈수록 짙어지는 죽음의 냄새를 따라 우리는 흰 천으로 덮인 시신 한 구 앞에 다다랐고, 후퍼가 그 천을 걷자 시신의 끔찍한 악취가 나를 거의 공격하듯 덮쳤다. 하늘을 향해 바라기를 차라리 내 후각 기능을 잃을 수만 있다면 시장의 시종이 그랬던 것처럼 내 손등에 여러 번 입을 맞추겠다고 속으로 약속했으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코가 예민한 양반이로군. 겨울이라 그나마 나은 거요."

시신을 보느라고 후퍼에게 대꾸하지 못했다. 교활한 마부가 말했던 대로 늑대에게 잡아먹힌 염소의 꼴을 한 시신은, 사람의 몸을 식육으로 여기는 게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흙과 풀을 묻힌 채 드러난 늑골 외에도 목과 왼쪽 손목이 부러져 있었는데 손목에 남은 자국이 그곳에 가해졌던 꾸준한 압력을 말했다. 그것은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컸고, 짐승의 것이라면 거대한 침팬지 정도를 생각해 낼 수 있는 크기였다. 날카로운 무기뿐만 아니라 성인의 몸을 가볍게 끌고 다닐 힘의 소유자가 피해자를 해친 뒤, 마을 앞에 음식물 쓰레기 내다 버리듯 던져놓은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흥미롭군. 여기서 일한다면 심심하진 않겠소, 후퍼."

후퍼가 맞장구쳤다.

"심심하긴커녕 이 괴물이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오."

"붙잡히면 면회라도 가서 고맙다고 하셔야겠군."

"그럴 일 없소. 나는 잡아먹히기 싫으니."

"잡아먹혔다?"

"부정할 수 없이 많은 흔적이 이 사람이 식사용이었다고 말하고 있소."

나는 허리를 펴고 시신에서 몇 걸음 떨어졌다.

"후퍼, 당신이 토끼라고 생각해 보시오. 숲속에 살면서, 여러 개의 굴을 파놓고, 가장 안락한 곳에 당신의 짝과 새끼들과 체온을 나누며 사는 토끼 말이오. 그리고 당신의 이웃으로 붉은 여우가 있소. 늑대도 있지. 그들의 일상은 이러하오. 당신의 굴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당신의 짝 혹은 당신의 새끼를 사냥해 잡아먹고, 그들의 꼬물거리는 새끼에게 돌아가 아직 소화가 덜된 당신의 가족의 일부를 위에서 게워내어 먹인다오. 끔찍하게 들리지만 후퍼 당신도 알듯, 그것이 그들의 삶이지. 그런데 만일 내가 당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무서운 이웃 붉은 여우가 당신의 새끼를 잡아먹은 후에 수고스럽게도 그 뼈를 당신의 굴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면, 믿겠소?"

"그렇지 않지."

후퍼가 답했다.

"그런 습성을 가진 짐승은 들어본 적이 없소.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장담하지도 않겠소."

"하지만 대체 뭐하러 그렇게 비생산적인 짓을 하겠소? 이미 겁에 질린 토끼에게 더 겁을 주어보았자 더 극도로 조심하거나 집을 버리고 달아나기밖에 더하겠냔 말이오."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같은 종이 하는 말도 못 알아듣는 인간이 동물의 행동을 정확히 이해할 리 없잖소?"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으니 알아달라는 식의 느린 대답이었다. 삐딱하게 올려다보는 후퍼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꼬집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처럼 느껴져 나는 또 물었다.

"현장에서 사람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사실이 아니오?"

내 물음에 후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명백히 사실이오. 하지만 성벽으로 접근하는 방향의 발자국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소. 숲으로 돌아가는 발자국만 찾을 수 있었소. 시신을 끌고 왔고, 그래서 발자국을 쓸어 버린 것으로 보오."

"그 크기는 어떻소?"

"성인의 것이라고만 들었소. 홈즈, 그것이 괴물이든 짐승이든 인간이든, 행위자가 지능적이지 않다고 말한 적 없소. 당신이 말한 대로, 이 시신은 누군가를 향한 메시지요."

내가 내 이름을 말했던가? 후퍼가 계속했다.

"그것도 건방지고 오만한 메시지지. 바로 그래서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거요. 괴물에게 당한 시신을 많이 보아왔지만, 날카로운 이빨 이외의 단서가 남긴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더럽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장화에 남은 구겨짐도 발견하신 양반이 놓친 부분을 내가 직접 보여주지."

후퍼가 시신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시신의 왼쪽 손목을 덥석 잡아 들었다.

"이 상처가 보이시오? 이 괴물은 거대한 손이 있고, 사람처럼 다섯 개의 손가락이 있으며, 그 손가락 끝에는 적어도 삼 센티미터의 날카로운 발톱이 있소! 그런 손으로 이 손목을 잡고 숲에서 마을까지 끌고 왔단 말이오, 이게 어떻게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소?"

후퍼의 말에 분통이 터졌다. 미신은 나를 화나게 하는 구석이 있다. 미신을 믿는 사람은 더더욱.

"후퍼! 그것이 사람의 창조물일 가능성보다 숲속에 거대하고 지능적이고 사악한 괴물이 살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요?"

후퍼가 시신의 팔을 내팽개치며 단호하게 답했다.

"그렇소."

"말도 안 되는 소리!"

"홈즈,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이토록 정교한 손과 발톱을 가공해서 쓸 수 있는 사람이 고작 짐승의 발자국을 꾸며내지 못해서 제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었단 말이오?"

"그러한 이유가 있을 테니 신화에 나오는 괴물 타령을 할 시간에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하지 않소!"

그러자 후퍼가 버럭 외쳤다.

"꿈 깨시오, 셜록 홈즈! 말이 안 되는 건 바로 이 저주받은 마을이잖소!"

그리고는 시신을 빙 둘러 내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나를 멍청한 사람 취급하는 그녀의 두 눈 때문에 정말 멍청해진 기분이 들었다. 내 가까이에 멈춰선 후퍼는 친절하게도 내 기분이 착각이 아님을 확신시켜 주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소?"

나는 다소 어안이 벙벙했다.

"공시소에 있소."

후퍼가 느리게 눈을 감으며 고개를 한번 저었다.

"오답이오, 홈즈.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시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소?"

그때 깨달았다.

"존의 마인드 팰리스."

"그렇지. 그리고 존은,"

"정자 없이 태어나고 죽었다가 부활한 남자가 실존했다고 믿고,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확실할 때마다 ‘투명인간인 쌍둥이의 소행’이라고 중얼거리는 상상력이 풍부한 글쟁이요. 아!"

나는 머리를 털었다. 벌써 두 번째! 하루가 22시간이 아니라 20시간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믿어야 할 상황이라니! 지금도 또 어느 구석에서 당연스레 눈을 감고 있으며 언제 문득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르는 일. 후퍼가 아니었다면, 내 눈앞의 시신에 남은 괴물의 명백한 흔적을 보고도 다른 설명을 찾는 데에 몰두하느라 일생을 허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또한 까마득해졌다. 그런 내게 후퍼는 두 눈썹을 일자로 굳히며 단단히 경고했다.

"내 말 잘 들으시오, 홈즈. 성벽 밖 숲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고, 내가 본 시신들을 보면 그것이 설령 겉으로는 사람이더라도 그 속은 끔찍한 괴물이나 다름없소.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당신이 내장이 파먹힌 채로 여기에 누운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다행히 내 편이군. 나도 말했다.

"그런 꼴은 보이고 싶지 않으니 도와주시오. 이 마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요? 시장님이 어디 계신지 아시오? 아니, 존! 존 왓슨 말이오."

"나도 모르오, 홈즈."

고개를 젓는 후퍼의 표정에도 답답함이 묻어났다. 진심이 느껴져 나 또한 크게 실망스러웠다.

"다만 우리 마을은 거짓말쟁이를 반기지 않으니 괜한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참으로 불리하군. 나는 또 물었다.

"이 마을에 모리아티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소?"

내 말을 들은 후퍼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나를 질책했다.

"멍청이 같으니. 없었더라도 방금 생겼을 거요."

하루가 20시간이 맞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 마을에선 특이하게도 밤이 찾아오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북적거리던 길은 밤 인사로 채워지고, 곧 약속한 것처럼 문들을 닫고 걸어 잠그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그리고는 어둠이 길거리에 내려앉음과 동시에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 아침 해가 뜨면 깨질 정적이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영원히 지속할 것만 같은 엄격한 무게감이었다. 허드슨 부인의 여관에서 길거리를 내려다보는 나로선 수상하기 짝이 없이 보였다. 집집마다 바깥 창문까지 단단히 닫아 놓아 모든 건물이 어두컴컴하기만 했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을 법하지 않았다. 순찰하는 경비병들조차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미끄러지듯 거리를 걸어 다녔으니, 유령들이 사는 마을의 밤도 이보다는 생기로울 터였다. 사람의 기척을 찾으려고 구석구석을 눈으로 좇아도, 길에 우뚝 서서 나를 쳐다보는 경비병을 발견할 뿐이었다. 밝은 창문 곁에 선 나는 어두운 길에 선 경비병에게 지나치게 노출된 느낌이 들어 커튼을 치고 창문에서 멀어졌다.

금지된 밤을 무대 삼아 누비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방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용납할 수 없는 특혜를 누리는 자가 시장님과 무슨 관계이기에 그렇게 은밀하고 잔혹한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 알아내고야 말겠다. 여관 안의 사람들이 잠들 때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벽난로 앞에 앉아서 손에 잡히는 책을 펼쳐 보았다. 목차 중에서 나의 눈을 잡아끄는 소제목이 있었다. 충직한 존. 어디서 봤더라. 페이지를 넘기고 첫 줄부터 읽어내려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피로감이 지나쳐진 나는 머지않아서 시계를 찾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 틈에 시곗바늘이 반대쪽으로 넘어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억울해도 방도가 없어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밤의 존재에 안도할 찰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뻥 뚫려 시커먼 공허로 차 있긴 했어도, 달빛에 빛난 게 피부가 아니라 백골이어도, 검은 망토로 몸을 두른 채 가만히 서서 나를 쳐다보던 그것은, 이내 길쭉한 부리를 돌려 어두운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넋을 놓고 있던 나는 그제야, 공포인지 흥분인지 모를 짜릿함에 정신이 들어 계단으로 내달렸다. 모두가 잠들어 쥐죽은 듯 고요한 허드슨 부인의 여관을 빠져나올 때, 갑자기 날카롭고 뾰족한 창 두 개가 내 눈앞에서 날카롭게 부딪치며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경비병들이었다. 나는 이를 갈았다. 새의 두개골을 쓴 수수께끼의 인물이 유유히 나를 멀어져가고 있는 동안 나를 막아 세운 게 같은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타인에게 무력을 쓸 특혜가 주어진 인간들이라는 사실에 특히 더 짜증이 치민 게 사실이다.

"공무일세. 자네들에게 주어진 의무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지. 나는 시장님의 행방을 조사하고 무사히 구조하는 사명이 있으니 자네들이 속한 조직보다 상위 조직의 명을 듣는 몸일뿐더러 그런 나를 막는다면 자네들은 시장님의 안녕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걸세. 당장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반대하더라도 일단 창을 거두고 나를 보내준다면 참작할 테니 내 앞에서 썩 물러나게!"

중세는 야만적인 시대였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배와 얼굴을 얻어맞으며 마이크로프트의 이름을 부르짖었으나, 그리고 만약 마이크로프트가 나타나 거만하고 뾰족한 코를 치켜들며 여태까지 잊고 있었던 제 존재를 상기한 기막힌 타이밍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면 들려줄 우애 깊은 변명도 준비했으나, 나를 구원한 건 마이크로프트도 존도 아닌 허드슨 부인이었다. 결국, 방으로 돌아온 나를 의자에 앉히고 내 얼굴에 무언가를 발라주면서 혀를 찼다.

"아무튼 밤에는 나갈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말하니? 경비병들이나 너나 꽉 막히기는 마찬가지네."

"죽은 새 대가리를 한 인간도 돌아다니는데 왜 저는 안된다는 말인가요!"

"또 그 이야기야? 잘못 본 것일 거야.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나 뭐 그런 거겠지."

"허드슨 부인! 이 세상에 유령은 없다고요!"

그러자 손을 거두어 간 허드슨 부인이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하니?"

환장하겠군. 새대가리를 한 유령이든 지극히 선택적으로 엄격한 정부든 두렵긴커녕 짜증스럽기만 했다. 나는 내가 잘하는 짓을 해보기로 했다.

"허드슨 부인, 허드슨 부인의 창문을 통해 제가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신다면 채터지 씨가 수요일 밤마다 무엇을 하는지 알려드릴게요."

허드슨 부인은 하, 하고 웃었다.

"젊은이 기억력이 영 형편없구먼. 네 녀석 때문에 내 창문 밖에도 경비병이 보초 서는 거 몰라?"

"뭐라고요? 언제부터요? 그리고 그게 왜 제 탓이죠?"

허드슨 부인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혀를 쯧쯧 찼다.

"그 약은 이제 정말 끊는 게 좋겠다. 취미든 천연성분이든 골로 가는 거 많이 봤어. 너도 멀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정신 차리렴."

"저 중독자 아니거든요!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허드슨 씨도 잘 죽게 했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살게 해 주잖니? 그리고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인데?"

"언제냐고요? 어제인가? 오늘인가?"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걸 알고도 허드슨 부인은 측은한 눈빛을 보내며 혀만 차댈 뿐이었다. 나는 약이 올랐다.

"부인 남편의 기일을 제가 왜 기억하고 있어야 하나요? 그게 아니면, 채터지 씨의 크기라도……."

측은한 눈빛이 이제는 나를 업신여기는 듯했다. 어떻게 인지는 몰라도 시효가 지난 제안이라는 사실만 알았다.

허드슨 부인이 떠나자 혼자 남은 나는 벽난로 옆 의자에 앉아서 타오르는 불이나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꾸만 타인의 존재가 느껴져 고개를 들면, 내 앞에 놓인 의자는 여전히 비어 있었고, 벽에는 내 그림자만 일렁이는 불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해가 뜨길 기다리니 피로가 몰려왔다. 잠이 들 수는 없었다. 마부를 우물로 밀어버렸을 때 귓가에 들린 첨벙, 소리에 돌연 두 눈이 부릅떠지는 일 따위 때문이었다.

 

나를 만난 뒤 돌연한 고열이 발생해 자리에 누웠다던 시종 소이어의 부고에 이어, 내게 고해성사를 했던 신도가 같은 증세를 보이며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끔찍한 전염병이 도는 건지, 시간이 내가 아는 것보다 빠르게 흐르고 있는 건지,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건지 구별하는 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내 친구 작은 셜록과 재회한 후로 그랬다. 녀석은 내 시간으로 고작 하루 만에 훌쩍 자라서 동그란 얼굴에도 제법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고 햇살에 눈 부셔 찌그러진 눈썹으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는데 그 깊어진 눈이 내가 익히 아는 존이라서 나를 무조건 제 발 저리게 하고 보았다. 지은 죄도 없이 습관적인 변명을 구상할 찰나, 보는 사람의 키 높이까지 반영하여 치밀하게 계산된 각도로 씩 늘어나는 입꼬리가 주책없는 내 마음을 들었다 놓아 슬그머니 억울해지는 것도, 틀림없이 존이 내게 하는 짓들이었다. 장담컨대 존은 내 마음을 빼앗으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웃음을 흘리고 그런 표정을 지었다. 유전자에 새겨지고 환경에 의해 발현된 행동이라 파생되는 결과에 장본인만 무감각할 뿐. 내게 불리하게도 나뭇가지나 개울가의 돌멩이를 거쳐 타인이라는 새롭고 고차원적인 장난감을 발견할 시기인 녀석은 다짜고짜 나를 시험했다.

"안녕, 셜록. 너 나쁜 사람이야?"

당황하지 말아야 하고 그렇더라도 티를 내면 안 된다. 나는 차근차근, 녀석이 내 이름을 좋아해서 나누어 받기까지 했다는 사실부터 떠올리고 대답했다.

"안녕, 셜록."

내가 기대한 만큼 기뻐하지 않는 녀석을 보며 앞으로의 기대감 또한 조절했다. 기습공격처럼 주어진 시험을 훌륭한 성적으로 통과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들였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서 무의미했다. 볼과 코끝에 발갛게 혈색을 몰고 빤히 쳐다보는 말간 얼굴에 어떤 개수작도 부릴 수 없어서 머뭇거리는 내가 나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이 아닌지, 나도 모른다.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우리 이름이 불길한 이름이래. 나쁜 사람이 쓸 법한 이름이래.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일이래."

작은 셜록의 대답에 무심코 인상을 구겨버렸다.

"누가 그래?"

"그건 왜?"

소신이 대쪽같은 그자를 찾아내어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라고 둘러대자니 정말로 그런 의도로 물어본 것만 같았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증명하기엔 이미 틀린 수처럼 보여 나를 낙담시키는 동시에 소신 있는 고발자를 보호하는 것까지, 존의 능수능란한 처세술 앞에 내 언어 능력은 일찌감치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나는 그저 중얼거렸다.

"……나 나쁜 사람 아니야."

"믿어. 네가 날 구해줬잖아. 나쁜 사람은 그런 일 안 할걸."

들었다 놓은 적 없다는 듯 산뜻하게 대답하며 위로하기가 무섭게, 역시나 녀석은 나를 긴장시켰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는 건 증명해야 해."

"어떻게?"

또 무심코 미간을 좁히는 어리석고 비협조적인 나에게, 친구는 관대했다.

"글쎄. 생각해보자. 일단 나를 도와줘."

작은 셜록은 덫을 만들고 있었다. 땅에 그물을 놓아서 숲 짐승, 대개는 토끼지만 그보다 더 드물고 멋진 결과라면 여우나 너구리를 잡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완성된 덫을 숲속에 설치해 놓고 그 근처, 마르고 찬 바닥에 나란히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어떤 얼간이가 나타나 덫에 걸리기를 기다렸다.

나는 내 이름을 불길하게 여긴 사람이 누구인지, 작은 셜록은 어디에서 누구와 살고 있는지 등이 궁금했다. 왜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는 건지 묻고, 나에게서 받은 좋은 인상이나 그를 구했던 일 등에 대한 감사, 칭찬 비슷한 것들을 들으며 귀가 간지럽고 싶었다. 그러나 녀석은 사냥감이 도망간다며 쉿, 하고 너무도 간단히 내 입을 막고는 벙끗도 하지 못하게 했다. 타인을 상대로 매정하다는 생각이 든 건 난생처음. 그런데, 희미하게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보이지 않는 새들의 시끄러운 수다를 들으며 옴짝달싹 않고 가만히 있는 게 그렇게 재밌을 줄이야? 마침내 덫에 걸려든 멍청한 회색 토끼가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한 불청객처럼 여겨졌을 정도였다.

작은 셜록은 토끼를 먹으려고 잡은 게 아니라 관찰하려고 잡은 것이었다. 실컷 들여다본 후에 내 두 손에도 그 부드러운 것을 넘겨주었다. 흔한 토끼가 아니라 얼간이를 관찰한다고 생각하니 과연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팔딱팔딱 심장을 뛰어대는 뜨끈한 털 뭉치에선 잔뜩 겁에 질린 냄새가 났다. 좋은 사람. 좋은 사람.

내 친구 작은 셜록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숲을 헤집고 다녔어도 괴물 따위는 만난 적이 없고, 녀석에게 숲은 언제나 신나는 놀이터라고 했다. 그런 숲속에서도 피하는 곳이 딱 한군데 있는데, 바로 절벽에 세워진 경비탑이라고 했다. 유령이 산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는다며, 제 가장 친한 친구가 간곡히 부탁해도 같이 가 주지 않을 테니 제발 부탁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부탁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아마 그게 작은 셜록을 찾아온 이유였던 것 같다. 괴물을 찾아내 사냥하려고? 그래, 그렇지. 녀석과 괴물을 찾아다니며 위험한 숲을 누비면 그보다 멋진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계획과는 달리 괴물이 아니라 토끼를 사냥했지만, 우리 둘 다 즐거웠고, 친구라고 지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주민들이 꺼리는 기피시설에 대해 캐묻는 지루한 일을 할 대상은 녀석이 아니더라도 많이 있다. 그렉도 있고, 멍청하고 무능하긴 하지만 레스트라드라는 이름을 가진 보안관도 있지. 기억력은 멀쩡해서 다행이군.

볼일이 끝나자 작은 셜록은 토끼를 놓아주며 외쳤다.

"우릴 용서해 줘!"

토끼는 파르르 떨리는 마른 나뭇가지만 뒤에 남기며 재빨리 사라졌다. 나는 말했다.

"신경 쓰지 마. 곧 잊어버리겠지."

"아냐. 토끼가 얼마나 똑똑한데. 너보다 똑똑할걸, 셜록."

돌아본 작은 셜록은 웃고 있었다. 나를 놀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송보송한 얼굴로 타인을 괴롭혀도 되는 건가? 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놓고선! 따질 틈은 있었던가, 갑작스레 암전된 시야와 동시에 등이 떠밀려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는데, 나를 이토록 험하게 다룰 이는 이 세상에 딱 한 사람밖에 없어서 이런 패악을 부리는 인간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머리를 굴리는 재미마저도 앗아가니 참으로 고약하기 짝이 없는 종자가 아닐 수 없었다. 머리를 덮은 주머니가 벗겨지고 눈이 부셔 찡그리기 바쁜 내게, 지독히 권위적인 목소리가 안부를 물었다.

"찾았어?"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한참이나 고개를 쳐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마이크로프트의 시선에서 내가 부여한 적 없는 권한을 최대한으로 만끽하는 즐거움이 드러났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작은 셜록이나 숲이나 온데간데없이, 나는 지나치게 거대한 법정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몸을 일으키며 발밑이 푹푹 꺼지는 듯해 비틀거렸다.

"어딨어?"

"뭐가?"

재깍 되묻는 어조가 느긋한 걸 보니 내가 무얼 찾는지 훤히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앙증맞은 치아 하나하나도 잊지 않겠다고 별렀지?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도 그 짓궂고도 해맑은 얼굴뿐이다.

"그, 애. 남자애. 걔."

"걔?"

"그래, 걔! 어딨어? 어디로 데려갔어? 날 납치한 거야?"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쳐들며 요란하게 한숨을 쉬었다.

"정신을 제대로 놨군. 애완견이랑 노닥거리는 게 그렇게 즐거운가?"

기회가 된다면 꼭 부러트리고 싶은 코가 유독 도드라졌으나 닿기에는 너무나 멀었다. 나는 내 친구가 가르쳐준 인내라는 미덕을 뽐내 보기로 했다.

"어딨냐니까!"

마이크로프트는 내가 모를 수 없게 확실히 비웃었다.

"어디에 있다고 말하면,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임무가 무엇인지도 기억 못 하잖아. 아니면, 임무가 있었다는 것조차 잊었나?"

화가 난다. 느긋한 조롱 때문이다. 열 받지만 해당한다는 뜻이다. 임무라니? 내 임무가 뭐더라? 임무가 정말 있긴 있었나? 아니면 나를 놀리는 건가? 내 기억력이 멀쩡하다고 안도했던 기억은 있다. 내 머리가 몸에 붙어 있긴 한 건지 손으로 더듬어 봐야 할 지경이지만, 답하고 보자.

"잊기는? 잊지 않았어. 잊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야. 그게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나와 유전자가 흡사한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 테니까."

"말해 봐, 그럼. 네 임무가 뭔데?"

뭐더라. 뭐였지. 생각해내, 이 얼빠진 머리 같으니! 너, 내 거 아니지? 내 머리가 이렇게 멍청할 리 없으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순간, 해야 할 일을 극적으로 상기했다.

"시장!"

빌어먹을, 신이시여! 이런 짐스러운 구조물이 내 머리라니! 만나기만 해봐라. 손등에 입을 맞추는 척하다 꽉 물어버리리.

"나이 먹고 가출한 건지, 제 관할구역에서 길 잃은 건지 모를 멍청한 공무원 찾기. 남 일에 참견 말고 본인 할 일이나 잘하지 그래? 내가 맞고 있을 때 구경한 거 다 알아."

너무 멀리 떨어진 탓에 내가 비아냥대는 꼴을 놓치지 않길 바라며 열심히 질색하는 내게 마이크로프트가 읊조렸다.

"네가 멍청해서 자초하는 곤란으로부터 너를 구해주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란다, 아우야. 다음번엔 조금 덜 일방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더 재밌긴 하겠다만."

역한 대화에도 순기능이 있었다. 경비병에게 두들겨 맞을 때, 마이크로프트가 나타나면 묻고자 했었던 내용이 머릿속으로 되돌아왔다.

"이름 내놔."

마이크로프트는 시침을 뗐다.

"무슨 이름?"

"그 부정하고 타락해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신부 이름 말이야."

"몇 년 밖에 안 걸리겠네."

"시장하고 몰래 노닥거렸다는 인간, 누군지 알잖아!"

"음, 어디 보자. 짙은 머리 색깔의 남자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손이 큰 남자를 말하는 건가……"

"마이크로프트!"

악당은 소리 없이 웃으며 코를 뾰족하게 늘여 보였다. 좋은 사람이 되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 내가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내 친구가 옆에 없어서 이런 나를 모르는 걸 다행으로 여기기로. 더 신경질 나는 건, 신도가 진술한 신부의 외모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뭐라고 말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튼 재수 없게 생긴 남자라는 사실밖에 떠오르는 바가 없고 그 적은 정보로도 이미 괴롭다. 새롭게 등장한 짙은 머리 색깔의 남자와 손이 큰 남자의 이름까지 알아내야 하는가 싶어 화가 치미는 내게 악당은 정도를 몰랐고 느긋하기까지 했다.

"그 신부가 뭘 어쨌길래?"

"나야 모르지, 그러니까 알아내려는 거 아니야?"

"알아내면, 어쩌게?"

"할 일을 해야지."

"그게 뭔데?"

"인사."

내가 듣기에도 형편없는 농담에 마이크로프트는 기꺼워했다. 나쁜 사람.

"인생은 아름답지, 그렇지? 계속 재밌게 놀렴. 엉뚱한 나무에 대고 짖어대는 것도 네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게 재미있어서 그런 거라고 믿어 줄게."

"질투하는 거야? 아니면 시간 낭비하려고 납치한 거야?"

마이크로프트는 허리를 뒤로 꺾으며 웃는 시늉을 했다. 그저 시늉일 뿐이다. 저 작자는 사실 웃는 법을 모른다.

"질투! 질투에 관해서 이야기해 볼까?"

"시간 낭비로군."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너지, 너도 그 이름을 이미 알잖니, 셜록아."

"몰라."

"거짓말쟁이. 그 사람을 네가 잊었을 리 없지.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네 입으로 말하기 싫은 것뿐이잖아. 그러니까 이건 엄청난 시간 낭비 맞아. 이렇게 멍청하고 기만적인 널 내가 왜 도와줘야 하지?"

"글쎄? 아! 그렇지, 나를 걱정하니까? 그러니까 나를 납치하고 밤만 되면 죄수처럼 가두고 두들겨 패는 거 아냐?"

"걱정이라. 네가 열심히 헤집고 다닌 덕에 이 저주받은 마을을 재난구역으로 지정했으니 걱정이라는 단어도 맞기는 맞을 듯해, 단지 대상이 네가 아닐 뿐이지. 누군가는 통제해야 하지 않겠어? 괴물에, 역병에, 이제는 살인자까지 설치려 하니까 말이야."

보는 눈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군. 지금쯤 얼마나 성장했을지 모르는 내 친구의 부재를 틈타 나는 마음껏 이를 갈았다.

"이름. 내놔."

마이크로프트는 느리고 분명하게 한숨지었다.

"여기 오면 안 됐어."

"나를 납치한 게 누군데!"

이젠 조롱보다 측은함이 우세한 마이크로프트의 눈빛이 나를 더욱 화나게 했다. 이름을 말해주지도, 밤에 돌아다닐 수 있도록 구속을 풀어주지도 않을 거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인간이지? 손이 닿는 거리에 있었더라면 맹세컨대 코를 부러뜨려 놓았을 거다. 그 오랜 숙제를 끝장내고 싶은 드문 기분 상태인 데다, 좋은 기회처럼 보였다. 어차피 잊어버릴 테니까.

"애완견에 너무 정신 팔지 말렴, 셜록. 존 왓슨을 찾아. 그 아이 말고."

 

*

 

나는 허드슨 부인의 여관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해가 질 때까지 추운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있기로 했다. 작은 셜록 대신 내 그림자가 내 옆에 앉아 곁을 지켰다. 불규칙한 불꽃을 쏘아 올리며 시선을 사로잡는 벽난로와 따뜻한 김을 올리는 허드슨 부인의 달콤한 차를 사양할 만큼 중대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차가운 겨울 달이 뜰 때까지 시커멓기만 한 그림자와 나란히 앉아 보내는 어색한 시간을 감수하는 이유 말이다. 어쨌든 기억나지 않으니 중요하지도 않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은 그림자가 말을 할 줄 몰라서, 흘러내려 가는 개천을 아무런 방해 없이 쳐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해가 넘어가며 점점 검어진 물은 곧 모습을 감춰 소리로만 존재를 알렸고 곧 잠자고 있던 악어가 눈을 뜨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달빛을 번득였다. 내 옆에 앉아 있던 그림자가 나를 떠난 건지 아니면 나와 한 몸이 된 건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을 때, 허드슨 부인의 여관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 이유도 깨달았다. 밤에 돌아다닐 수 없게 통제하는 마이크로프트 때문이었지. 애초에 밖에 있다면 가둘 수도 없으리란 계산이었다. 그 악당이 내게서 무언가를 숨기고자 한다면 반드시 알 가치가 있다. 영 식욕을 모르는 나도 마이크로프트가 숨겨 놓은 파이는 꼭 훔쳐먹었다. 맛있더라고. 종종 독이 들어있긴 하지만.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났다. 킁킁. 후각 수용기에 들러붙는 이 매혹적인 냄새. 이 밤중에 누가 돼지를 잡는 건가? 갈수록 짙어지는 냄새는 물에서 나는 것이었다. 마을을 통과해 흘러나오는 물이라 그런 건가? 물가로 가까이 갔다가, 무언가 뭉클한 것이 발끝에 걸려 질척한 땅 위에서 멈춰서야 했다. 어둠을 뚫고 자세히 보니, 하얀 앞치마를 허리에 둘러맨 거구의 남자가 물에 처박혀 있었다. 백정이라 맛있는 냄새가 묻어있는 듯했다. 하필이면 죽은 건가, 발로 밀어보았다. 내 도움을 받은 묵직한 몸은 물 깊은 곳으로 둥실 밀려나고 곧 물살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그제야 다른 이들의 윤곽도 구별했다. 마을이 잠든 틈에 쓸모없어진 인간들을 줄지어 떠내려 보내는 것이었다. 하긴, 이런 곳에서 악어 떼가 나타날 리 없지. 아는 얼굴을 발견할까 싶어 물가에 서서 구경했으나 죄다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당연히. 아니, 당연? 당연한가? 하긴, 더는 기억할 이유가 없으니. 상류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내려오는 시신들은 끝이 없었다. 대부분은 조용했지만, 누군가는 창백하게 질린 입술로 폴리글리세롤 폴리리시놀레이트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기도 했다. 내일 해가 뜨면 마을이 텅 빌지도.

개천을 거슬러 걷던 나는 교각에 다다라서 반가운 얼굴과 재회했다. 허드슨 부인의 여관으로 찾아와 나를 쳐다보던, 새대가리 유령이었다. 괴상하지만 제 기능을 하기는 하는 뻥 뚫린 안구로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으니, 그토록 매력적인 초대를 거절하는 건 좋은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얼른 뒤쫓는 나를 부추기듯, 유령은 검은 망토로 내 시야를 어지럽게 흔들며 마을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무래도 나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발바닥을 딱딱하게 밀어내는 얼어붙은 돌길에 마음이 선득해지고 언 물웅덩이가 위태롭게 흔들어 짜증스럽게도 뒤처진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어느 순간 온데간데없이 증발해버렸다. 제기랄! 정적만이 지배한 골목길이 내게 통금 시간이라고 소리치고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 보통은 내 두 번째 몸이 활약할 차례가 아니던가. 그러나 나는 혼자다.

아니, 잠깐. 누군가 있다. 어두운 바람결이 내 코에 인간의 체취를 실어다 주어 눈이 번뜩 뜨였다. 사이먼 밀포드.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다고 인정하기 싫어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이름. 그런데도 나타난 현상을, 보지도 않고 냄새로 인지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를 발견한 사이먼은 이마와 가슴에 성호부터 그었다. 나는 분노했다. 얼마나 오래 묵은 분노인지, 내 그림자의 등줄기까지 예민하게 곤두서면서도 눈앞에 떨어진 남자가 선물 같아서 웃는 꼴을 목격하고는 내가 그렇게 끔찍한 인간이노라고 소문을 퍼뜨릴 눈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햇살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을 줄 안다는 소문을 확인하거나 질 나쁜 농담처럼 인사를 건넬 틈 없이, 그는 영악하게도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오랜만이군요. 저는 준비 되었습니다. 할 일을 하십시오."

그 또한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되물었다.

"할 일?"

그러자 그가 대꾸했다.

"저를 죽이는 일이요. 복수하려고 온 거잖습니까?"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받을 처벌마저 멋대로 정해버리다니. 여전히 기분 나쁜 자였다. 나는 단지 지나치게 침착한 그가 동요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말했다.

"나는 살인자가 아닌데."

"당신의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본데요."

"우리가 만난 게 신의 뜻이라는 말인가? 미안. 내게 신이란 고상한 욕설일 뿐이야."

"그래서 절 죽이지 않으시겠다고요?"

"내 손 더럽히는 거 싫어. 게다가 너는 어차피 죽을 텐데, 뭐. 네 등 뒤로 죽음의 그림자가 보이는군. 아주 가까워."

"그럼 저를 구해주실 건가요?"

"내가 왜? 나는 그런 짓 안 해."

"그러시다면야."

재미없게도 남자는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배알이 뒤틀린다. 나는 또 단지 그의 심기를 긁어대고 싶어서 말했다.

"상당히 침착하신데, 무슨 일이야? 내 기억에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악마를 속일 정도의 언변과 연기력은 어디에 팔아치웠느냔 말이야."

"당신한테서 배운 거죠. 그쪽 죽음이 참 우아하고 멋지더라고요? 그 불이며…… 게다가 저의 신이 저를 맞이해 주실 테니까요. 당신과는 달리."

씁쓸한 듯 웃는 낯짝 때문에 뒷덜미가 뻣뻣해진다. 나를 죽였던 건 정의였지만 내가 죽이는 건 구원받지 못할 악행이라고 웃으며 침을 뱉는 것이다. 이자를 만난 게 정말 신의 뜻인가? 그래서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 지켜보고 있다면, 과연 제정신인 신인가? 지금 이걸 시험이라고 하는 건가? 우리를 배신했었던 인간을 용서하라고? 용서했다가 배신당하고 불타 죽는 잔혹사를 반복하더라도? 그게 이 세상에서의 내가 구원받을 길이라고?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 신이 내게 하사한 학습능력에 따라 나는, 다시는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을 거라고.

남자는 엄숙하게 눈을 감더니 마지막 말이랍시고 남겼다.

"신이 당신을 용서하길."

진저리가 나서 고개를 털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만나기만 해 봐라. 가혹행위에 책임을 물으며 멱살이나 잡을 테다.

후에 개천 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다시 만난 작은 셜록은 침울하게 말했다.

"사이먼이 죽었어."

나는 되물었다.

"사이먼이 누군데?"

"나랑 같이 살던 친구. 전염병 때문이래."

존경받는 신부였던 그조차도 병마의 손아귀를 피해가진 못한 것이다. 저렇게 침울해하다니, 안타까운 사건이로군.

"사이먼은 어른이어서 뭐든지 할 수 있었어. 물론 이 버드나무보다는 어렸겠지만. 이 버드나무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무도 진짜 나이를 모른대."

나는 녀석을 위로할 현실적인 조언을 구상해냈다.

"신부라면 그토록 사랑하는 신과 다시 만나서 행복해하고 있을 테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 분명히 나보다 행복한 상태야."

작은 셜록은 물었다.

"이제부터 너랑 같이 살아도 돼? 그런데 사실 말할 게 있어. 사람들이 나도 곧 죽을 거래. 전염병에 옮았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랑 아무도 안 있으려고 해. 늦게 말해서 미안해. 너도 나랑 있기 싫으면 저쪽으로 가도 돼. 멀리 떨어져서 이야기하는 건 괜찮대. 맹세해."

보기 드물게 정직한 성품이로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너는 병에 걸리지 않았고 나도 병에 걸릴 일 없으니 멀리 떨어져 있을 필요 없어. 이곳의 전염병은 쓸모없는 사람만 걸리는 병이야."

작은 셜록은 내 말을 의심했다.

"그건 어떻게 알아?"

"그야 나는 똑똑하고 쓸모 있으니까."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그럼."

"어디에?"

"괴물을 잡는 데에. 나는 조수가 필요해. 너는 이미 좋은 사냥꾼이고 앞으로 훌륭한 의사가 될 테니 분명 쓸모 있을 거야."

작은 셜록은 내 말에 기뻐했다.

"좋아. 나도 너와 같이 다니면 더 똑똑해지겠지."

다행히 녀석은 허드슨 부인의 여관을 마음에 들어 했다. 이제부터 제 구역이라고 벽에 웃는 얼굴까지 그려놓아 액자로 가려야 했다. 허드슨 부인이 발견하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전염병 때문에 마을은 생기를 잃었다. 그리고 낮이건 밤이건 내가 아는 유령처럼 부리가 뾰족한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뜨였다. 허드슨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의사였다. 역병이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까닭에 그런 가면을 쓰는 거라고 했다. 그간 그들이 나를 도망 다녔던 이유를 알 듯했다.

안타깝게도 역병은 내가 아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 원체 적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히 더 안타까운 일이다. 이미 장례 행렬을 따라가 버려서 누군지 알 수 없는 시신은 내게 책 한 권을 남겼다. 충직한 존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계속 나를 따라다닌다는 건 착각인가? 다리도 없는 주제에. 가죽으로 만들어진 표지를 들춰 두껍고 습한 종이를 손끝으로 비빌 때, 누군가 내 코에 상큼한 향이 모락모락 피는 찻잔을 내밀었다. 킁킁. 레몬?

"받아. 꿀도 넣었어."

"아, 좋아. 내 옆에 놔 줘."

예의상 눈을 맞춰 주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너무나 놀랐다. 나를 내려다보는 건 더는 작은 셜록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이었고 그 얼굴이 꿀보다도 달콤해서 고개를 들지 않았더라면 눈에 담지도 못했을 터라 발생하지 않은 후회에도 까마득해졌기 때문이다. 둥그스름한 뺨은 늘 그렇다 치고, 얇게 늘어난 입술도, 다정하고 한층 깊은 눈빛도 더는 어린아이라고 볼 수 없는 탓에, 난데없고도 갑작스레 반려인으로서의 나를 객관화하고 부끄러워진 탓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가도, 의구심을 표하며 살짝 모이는 숱 많은 속눈썹이 그 안의 푸른 눈동자를 신비롭게 가리며 내 말문을 막지 않는가. 존은 입술을 떨어뜨리더니 잠시 후에 그 사이로 또 달콤한 목소리를 냈다.

"셜록, 너 괜찮아?"

"너……"

내가 느린 사고를 거쳐 말을 뱉을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며, 아치형으로 들리는 옅은 눈썹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모습인 것만 같다.

"나이 들어 보여."

존의 눈썹이 요동치더니 얼굴 전체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뭐?!"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성숙해 보인다고."

"……성숙하지, 그럼."

빠르게 깜빡이며 추궁하는 속눈썹을 쳐다보느라 주의가 팔린 내 곁에 찻잔이 달칵, 내려앉는 소리만 들었다. 존은 내게서 멀어지며 중얼거렸다.

"장가 못 가고 있다고 놀리는 거야 뭐야?"

"아니! 아니, 아니. 절대. 그럴 리가."

미혼, 미혼. 미혼이다. 미혼이라고? 미혼이로군. 울렁대는 심장을 간신히 잠재우는 동안 미혼남 존은 내 맞은편에 놓인 의자로 가서 몸을 폭 묻었다. 나는 질문해야 했다. 오해의 소지가 커서 경솔한 움직임이지만 확실히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러면 아직 결혼을……"

곧바로 댕그랗게 짙어져 불만을 표하는 존의 두 눈을 보고 나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좋아. 그렇군. 좋아. 훌륭해. 나는……"

"너는 뭐?"

"아무것도 아냐."

갑작스레 열심히 일하는 심장과 씹을 것도 없는데 입안에 고이는 침을 어떻게 설명할지, 예전에는 알았었던 것 같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어 하는 손바닥이 허전해 찻잔이나 붙들고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존의 시선이 꾸준하게 내 얼굴에 와닿아 마시는 내용물의 반 이상이 헛숨이었지만. 의자에 파묻힌 존은 소매가 풍성한 갈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목을 여미는 끈이 반밖에 얽혀있지 않아 빗장뼈가 보일 지경이었다. 왜 저렇게 괴상한 옷을 입고 있는 거지? 존이 그러한 옷을 입고 있는 게 내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해지면서도 그게 왜 내 탓인지 모르겠고 나를 쳐다보는 존의 시선이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든 간에 견디기 힘들어 급기야 얼굴에 피가 몰리려 할 때, 존은 나를 구했다.

"아무튼…… 그 책."

무거운 목소리. 아무래도 내가 그를 놀렸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인 듯하다. 기억력이 형편없어서 그렇다고 실토한다면 첫째로 믿지 않을뿐더러 둘째로 나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지도 않을 존이다. 그러나 미혼이라는 드문 신분과 공교로운 옷차림을 포함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차마 모른척할 수 없어 도박하고 만다.

"기혼자라는 타이틀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면 반드시 식을 올려야만 부부라고 할 수는……"

"셜록, 그만 좀 할래? 그렉이 죽었고, 너한테 유품을 남겼다고. 좀 진지할 수 없어?"

존의 짧은 손가락이 나와 내 무릎의 책을 또박또박 가리켰다. 젠장. 또 틀렸다니! 죽어도 늘질 않는군. 긁어 부스럼. 이런 사람은 인생의 동반자로 적합하다고 보지 않겠지.

"물론. 할 수 있어. 어렵지 않아."

부드럽고 묵직한 책을 두 손으로 감싸고 만지작거리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괜찮아. 아직 시간이 있다. 그런데……

"그렉?"

존은 내가 분명히 알아볼 수 있게 황당한 표정을 짓고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럴 거야?"

"그렉, 레스트라드? 그렉 레스트라드가 죽었다고?"

확답을 원하는 내게 존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몸을 숙였다. 얼굴에 와닿는 작고 따뜻한 손이 다부진 볼일을 보도록 허락하느라 아찔해진 것도, 그 와중에 존의 가슴을 눈에 담은 것도 결코 의도한 게 아니었노라고 맹세한다. 내 눈꺼풀을 여는 손동작에서 너무나 확실한 의료적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보송한 솜털에 묻은 체취를 맡게 해 주려는 건가 오해하고도 남았다. 그럴 리 없으니 꿈 깨자. 너무 가까이서 그 부드러운 입술이 벌어지는 바람에 헷갈리지만.

"그래, 그렉이 죽었어……. 너도 이제 정말 끊도록 해. 전염병이든 살인사건이든 약물 오남용이든, 이제 부고라면 지긋지긋하다구."

제 목소리가 옅고 부드러운 것은 그게 흘러나오는 입술도 부드럽기 때문이라고 자랑하고 있진 않은지. 내 입술은 딱딱거리기만 해서 볼품없겠지.

"나는 안 죽어."

존의 입술이 부드러운지 안 부드러운지 나는 어떻게 알더라. 그저 그래 보여서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가만히 쳐다만 보는 눈빛에 두 손이 달려서 내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닌데 숨 막히듯이. 우리가 무슨 얘기 중이었지?

"끊을게. 끊고말고."

존이 나를 두고 떠나며 사무치는 아쉬움을 속수무책으로 느끼기만 했다. 이 책이 유품이든 뭐든 간에 왜 하필 내 손에 떨어져서는 미혼인 데다가 나를 싫어하지도 않는 존을 코앞에 두고도 축배를 들 수 없게 방해하는 건가. 죽어서도 이렇게 짐스러운 고인이라면 살아서는 대단했겠군. 구시렁거리지 않은 건 그나마 존이 멀리 가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다시 나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이 책을. 무슨 대단한 책이든 나보다 흥미로울 리 없는데. 그렇다면 화려한 깃털을 흔들어 미혼남 존의 관심을 끌어 보자. 나는 두 손으로 책을 반 바퀴 빙글 돌렸다.

"소가죽이로군. 최고급은 아니지만, 종이는 고가의 물품이지. 정갈한 글씨체와 병적으로 균일한 여백, 보급용 잉크, 퀴퀴한 냄새, 전체적으로 습하고, 잉글랜드의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데다 충성심에 대한 교훈이 주 내용인 독일 구전 동화를 현지화한 책."

역시나 존은 초롱초롱한 눈을 내게로 돌렸다.

"수도원? 그건 어떻게 알아?"

"맨 마지막 장에 쓰인 작가의 노고를 보면 유추할 수 있지. 드디어 다 썼다. 신에게 빌건대 제발, 물 좀 주시오. ……보기 드문 근무환경이니까. 학술 책이 아니라 동화책이고 여러 사람이 거쳐 간 흔적도 없으니 이런 사치품을 소장할 재력이면 귀족일 텐데, 그렉이 애착을 가질 만한 물건은 아니니까 이건 유품이라기보단…… 증거로군?"

"증거?"

"그래, 보안관이었던 그렉이 내게 주는 물건이라곤 증거와 자료뿐이잖아. 죽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내 사랑에게, RM. 앞장에 쓰여 있는데, 이 글씨가 새겨진 시점은 책이 만들어진 시점보다 훨씬 나중이야. RM이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한 중고 책이고, 그렉 레스트라드가 어느 쪽에라도 해당한다면 불륜인데, 그렇다면 내게 남기기보다는 증거를 인멸하려 했겠지? 보통 그러지 않아? 바람피우는 사람들이 하는 짓."

"뭐, 그렇겠지……."

존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렉의 책이 아니라 네 책인 줄 알았어."

"이게? 내 책이라고?"

"그래. 네 책인데 그렉에게 빌려주었었다든지 해서 되돌아온 줄 알았지."

존의 표정은 진지했으나 나는 코웃음이 났다.

"RM이라는 이름이? 아니면 내 사랑이라는 단어가?"

"뭐,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내가 다 아는 건 아니니까."

"그건 또 무슨 뜻이야?"

따지는 내게 존은 어깨와 두 손을 써가며 완곡한 태도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네 사생활에 대해 지레짐작하지 않은 것뿐이야. 사랑이라는 단어랑 너를 연결하지 않을 이유는 또 뭐야? 그렇게 방어적으로 굴 필요 없어."

"방어적이라니? 방어적이지 않아, 어처구니가 없는 거지. 내가 타인과 사랑이라고 적힌 책을 주고받을 인간으로 보여? 게다가 내가 그런 짓을 하면 걸 네가 모를 것 같아? 장담하는데 나보다도 네가 먼저 알아챌걸."

"알겠어. 알겠다고."

그제야 고개를 가볍게 주억대는 존이었다. 지금 나를 달래는 건가? 내 말을 이해는 한 건가? 내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넓은 범위를 포용한다고 알려준 장본인이 바로 저 자신 아니었던가? 혼란한 머리로 의심하는 내 표정을 아는지, 존은 말했다.

"증거라 이거지. 무슨 사건인데?"

그게 문제다. 존에게 하기 싫은 말을 해야 하는 것도. 나는 어깨를 삐쭉 올렸다.

"모르겠어. 미해결사건이겠지. 전혀 짐작 가는 게 없으니 명백히 재미없고 지루한, 어떤, 오래된…… 사건."

존은 내 무릎 근처를 보며 곰곰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알지 못하는 내 과거라도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 존이 내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길 때가 좋다. 일과 사생활의 분리가 철저한 존은 나에게도 사생활이 있겠거니 짐작하면서 내 사생활에서 본인을 분리했다. 전문 소시오패스가 보기에도 매정하기 짝이 없는 짓. 나에게는 존 왓슨이 일이자 사생활인데…….

"그림자 살인마?"

갑자기 마주친 존의 눈빛에 뜨끔 놀랐다.

"뭐?"

"있잖아, 그, 사람 죽이고 다니는 그림자 말이야. 목격자가 죄다 범인의 그림자만 보고 범인은 보지 못해서 그렇게 이름 지었잖아."

"오, 그렇지, 참."

다행히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방금까지 이 멍청한 책이 내 손에 떨어진 이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존도 그 주제를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잊었으니. 나는 벽난로로 시선을 얼버무렸다.

"그건 그냥 평범한 그림자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죽은 사람이 벌써 몇인데? 왜 그 사건에만 유독 냉담한 거야?"

"몰라, 알 게 뭐야. 다른 사건이야. 어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사람들이 죽었으면 뭐 얼마나 죽었다고, 방금까지 내 머릿속에서 부풀기 시작했던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건지 짜증스럽다.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았는데. 멍청한 동화책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그 괴물?"

환장하겠네.

"괴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 표정이 어땠는지, 존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너, 옛날에 무슨 괴물 찾고 있지 않았어? 나한테 아는 거 없냐고 물어봤었잖아. 아아아주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그래서 잊은 거 아냐?"

나는 웃었다.

"괴물이라니. 이 세상에 괴물이 어딨어? 그거야말로 사랑스럽지조차 않은 생각이로군."

"오, 그렇지.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평범한 그림자는 있어도 괴물은 없는 거지?"

돌아버리겠네. 나는 소리쳤다.

"명백히 그 그림자가 붙어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는 거 아니겠어, 특히나 제 목 위에 머리가 붙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들이 말이야!"

무언가가 벽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눈이 돌아갔다. 그러나 벽에 그려진 노란 얼굴과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존도 아무 기척 느끼지 못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하긴, 우리가 어리긴 했지."

"또 틀렸어. 너만 어렸지, 나는 어리지 않았어.

존은 나를 노려보았다. 왜 저렇게 불만스러운 눈을 하는 거지? 사실인데. 그 바람에 텅 비어버린 머리. 짜증이 나서 머리카락을 털었다.

"으으! 잘 되었군! 머릿속에 남아 있던 실마리마저 사라져버렸으니. 이제 내 머릿속에 남은 생각이라곤 이딴 쓸모없는 동화책이 하필이면 고인의 유품이라는 점 때문에 네 눈치를 보면서 손에서 털어버리지 못하고 오랜만에 찾아온 이 기회를 낭비하고 있다는 조바심뿐이라니."

"도대체 오늘 왜 이래? 무슨 말을 늘어놓는 건지 모르겠네. 무슨 기회?"

미혼남 존 왓슨의 표정이 황당했다. 나도 황당한 건 마찬가지다. 훤히 목덜미가 계속 추워 보여서 내 손으로라도 감싸주고 싶은데 사실 그러하기엔 내 손이 너무 차가울 테고, 그렇다면 차라리 그 핑계로 내 손이나 녹이고 싶다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소리칠 수 없어서 입술이나 깨물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그랬다가 후회한 적도 있는 것 같다. 언제였지. 기억은 안 나고. 미치겠네.

주의를 분산시킬 무언가를 찾다가 존이 내게 만들어 주었던 차를 발견하고 마셨다. 뭐야, 왜 이렇게 시고 달아? 형편없는 조합이로군. 찻잔 위로 코를 킁킁댔다. 레몬인가. 짖는 개한테 레몬즙을 뿌리면 잠잠해진다는 팁을 어떤 책에서 본 것 같은데. 존이 말했다.

"뭐, 내가 아는 미해결사건은 그게 다인데. 네가 나 빼놓고 일하는 것까지는 모르겠고."

나는 정색했다.

"안 그래. 그럴 리 없잖아. 똑똑하고 자상하고 충성스럽고 용맹한 동료 몰래 일하다니."

그러자 존은 아주 희미하게 웃으며 단조롭게 중얼거렸다.

"아하. 정말."

눈썹을 살포시 찌그러트리며 의심하고 보는 건, 반가움을 감추고 싶다는 뜻인가. 세세하고 아리송하며 다채로운 감정 수용력을 자랑하는 매끈한 얼굴이 보기 좋아서 입술이 마른 건 난데 제가 혀로 적시면서. 나는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전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로. 너 없이 일하다니, 자살행위와 다름없지. 내 목숨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그러시구나. 잘됐네."

대답한 존은 목을 가다듬고는 얼굴을 돌렸다. 귓바퀴가 원래 저렇게 발갛던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이해는 안 가지만.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을 거지만. 안달하는 나를 외면한 채, 존의 시선은 다시 내 손안의 책으로 떨어졌고 곧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이깟 동화책이 뭐라고! 마주 앉은 내게 다시 와서 눈꺼풀이라도 까뒤집고 들여다보게 만들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하는 내게 존은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제 무릎을 탁 눌렀다.

"뭐, 무슨 내용인지 읽어보는 건 어때? 메시지일 수도 있잖아."

그리고는 의자를 떠나기에 얼른 말로라도 붙잡았다.

"어디가? 못 가, 아직 일 안 끝났어."

"늦었잖아. 잘 거야. 게다가 갑자기 추워지는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

목을 슬슬 문지르며 돌아서는 존의 등 뒤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가 나도록 두 손을 맞잡았다.

"그래, 그래! 메시지! 틀림없이 확실히 메시지야! 읽어줘!"

존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불온한 목적으로 함께 있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라, 내가 헤매고 있을 때 네가 나를 답으로 이끄는 건 자주 있는 일이고 네 의견에 동의하며 이 책이 메시지가 아니라면 내게 남겨질 이유가 없다고 반박을 준비하는 내게, 존은 상상치도 못한 구석을 지목했다.

"네가 읽으면 되지, 왜 나보고 읽어달래?"

존은 영리하다. 늘 예상 밖이라 허를 찔리고 만다. 나의 뻔뻔함을 상대할 만하다.

"그야 사랑 이야기니까."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서? 집요하게 묻는 존의 얼굴에 대고 냉큼 얼버무렸다.

"로맨스 소설 따위 눈으로 읽고 싶지 않아. 귀로 들으면 금방 잊어버리겠지."

마치 천 년 동안 해온 말처럼 자연스럽군. 뿌듯해할 때, 존이 답했다.

"알았어, 들고 와. 침대에서 읽어줄게."

그리고는 태연히 내 방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들어가 그 김에 벌떡 일어났다.

"우, 우리가 침대를 같이 쓰던가?"

내 말에 잠깐 발길이 붙들린 존은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말 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늘 그래왔던 것처럼.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내 방으로 따라 들어가 보니 존은 정말 내 침대 한쪽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게 침입이 아니라는 건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베개가 증명했다. 이불은 배까지 포근하게 덮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존이 나를 잠깐 멀뚱히 올려다봤다. 턱짓으로 내 손에 들린 책을 가리켰다.

"읽어줘, 말아?"

꼬리가 없어서 다행이군.

 

 

충직한 존

 

늙고 병든 왕이 죽음에 다다르자 말했다. ‘충직한 존을 데려오거라.’ 충직한 존이라 하면 왕이 가장 아끼는 신하였는데 언제나 진실한 마음으로 왕을 섬겼기에 그렇게 불리었다. 침대로 온 충직한 존에게 왕은 말했다. ‘나의 충직한 존이여, 죽음이 가까운 게 느껴지네. 나는 친구가 없으니 내가 떠나면 아직 어린 내 아들을 맡길 이는 그대뿐이야. 그대가 내 아들의 양아버지가 되어 가르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편히 눈 감을 수 없을 걸세.’ 존은 답했다. ‘제 목숨을 버린다고 하더라도 왕자님 옆을 떠나지 않고 충실히 섬기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이제 편히 눈 감을 수 있네. 내가 죽은 후에 내 아들에게 이 성 구석구석을 보여주게. 모든 방과 금고들, 그 안에 있는 보물들 죄다 말일세. 단, 그 방, 황금 지붕 공주의 초상화가 걸린 그 방만은 조심하게나. 만일 내 아들이 그 초상화를 본다면 공주에게 홀딱 반하고 말 텐데, 그러면 공주는 크나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네. 부디 내 아들의 불운을 막아주게나.’ 충직한 존이 늙은 왕에게 다시 한번 맹세하자, 왕은 배게 위에 머리를 뉘고 눈 감았다.

늙은 왕의 시신이 무덤으로 옮겨지자 충직한 존은 어린 왕에게 임종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전하며 말했다. ‘제 맹세를 지키며 옛 주인님께 그랬던 것처럼 신실히 섬기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어린 왕은 슬피 울며 말했다. ‘나 또한 그대의 충심을 잊지 않겠소.’

애도의 나날이 지난 후, 충직한 존은 그의 주인에게 말했다. ‘이제 유산을 보셔야 합니다. 전하의 궁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어린 왕을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며 모든 부와 값비싼 방들을 보여주었는데 다만 초상화가 있는 그 방의 문은 열지 않았다. 그 방의 문을 열기만 하면 눈에 뜨이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초상화가 걸려있었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아름답게 그려져 초상화를 본 누구라도 이 세상에 공주보다 사랑스러운 존재가 없노라 생각할법했다. 충직한 존이 늘 그 방문을 지나치는 것을 알아챈 어린 왕은 물었다. ‘왜 이 방문은 열지 않느냐?’ 존이 답했다. ‘이 안에 무언가가 있는데, 보기 끔찍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말했다. ‘이 궁전의 모든 구석을 다 보려면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아야겠다.’ 그러더니 문 앞으로 가서 억지로 열려고 했다. 충직한 존은 왕을 말리며, ‘임종을 지킬 때, 이 방문 너머에 있는 것은 전하와 저에게 큰 재앙을 초래하니 조심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왕이 말했다. ‘가장 큰 재앙은 이 방을 보지 않는 것일 테다. 이 방을 보기 전까진 밤이고 낮이고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

무슨 말과 행동으로도 어린 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자 충직한 존은 무거운 마음으로 불길한 한숨을 연신 내쉬며 큰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를 찾아내 방문을 열고는 먼저 들어가며 초상화를 몸으로 가리고 왕이 볼 수 없기를 꾀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린 왕은 까치발을 들어 존이 어깨너머를 내다보았고 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공주를 보자마자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하여 충직한 존은 어린 왕을 팔로 일으켜 안고 침대로 옮겨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며 생각했다. ‘일이 벌어지고 말았구나. 오 하늘이여! 무슨 재앙이 닥치려는가?’

 

다행히 의식을 차린 왕은 눈을 뜨자마자 물었다. ‘그 아름다운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황금 지붕 성에 사는 왕의 딸입니다.’ 충직한 존이 답하니 왕이 또 말했다.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은 나무의 잎사귀들이 죄다 나무의 혀라고 하여도 다 이루 말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 그녀를 가질 수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거리라. 그대는 나의 충성스러운 벗이니 반드시 나를 도와주어야만 해.’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오랫동안 생각한 존은 마침내 왕에게 말했다. ‘공주의 물건들은 전부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탁자, 의자, 컵, 접시, 성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금이며, 늘 새로운 보물을 찾고 있습니다. 전하의 금고에도 금이 많으니 그것으로 온갖 종류의 식기며 새며 금수며 멋진 짐승을 만들어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봅시다.’ 하여 왕은 금장이들을 죄다 불러모아 밤낮으로 환상적인 금붙이들을 만들게 했고, 충직한 존은 그것들을 배에 적재한 후 왕과 함께 상인 차림새를 하여 정체를 숨기기로 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그들은 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 황금 지붕 왕이 군림하는 영토의 해변에 도착하였다. 충직한 존이 어린 왕에게 배 안에 남아서 기다리라고 당부하길, ‘혹시 공주님을 모시고 올 수 있을지도 모르니, 금붙이들을 순서대로 잘 두되 식기들과 장신구를 제일 처음에 진열하시어 공주님이 배 전체를 둘러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는 금붙이 몇 개를 골라 바구니에 넣고 해변으로 내려가 황금 지붕 성으로 향했다. 존이 성의 정원에 다다르니 아름다운 시종이 우물 옆에서 금으로 만들어진 물동이 두 개로 물을 긷고 있었는데 그녀가 긷는 물 또한 금으로 반짝였다. 시종은 돌아서다가 낯선 이를 발견하고 정체를 물었다. ‘저는 상인입니다.’ 곁으로 다가간 존이 바구니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게 하자 시종이 외쳤다. ‘와! 정말 아름답군요.’ 물동이를 내려놓고 금붙이 하나하나를 살펴본 시종은 말했다. ‘공주님이 꼭 보셔야겠어요. 이런 물건들을 좋아하시니 모조리 사들이실 거예요.’ 공주의 시종이었던 그녀는 존을 이끌어 성으로 안내했다.

금붙이들을 본 공주는 ‘이토록 아름답다니 모두 사야겠다.’라며 매우 기뻐했다. 충직한 존은 말했다. ‘저는 부유한 상인의 몸종일 뿐입니다. 이것들은 제 주인님이 배에 싣고 오신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진 귀하고 값비싼 물건들이지요.’ 공주는 그것들을 육지로 들여오길 바랐으나, 존은 말했다. ‘물건이 너무 많아서 그러려면 며칠이 족히 걸릴 것이며, 공주님의 성은 너무 작으니 이보다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답니다.’ 이에 공주는 자신을 배로 유인하려는 금붙이 상인의 계략을 알아보고 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서 취하는 수밖에 없구나.’ 그리고 병사에게 명해 존을 포박하고 말했다. ‘그대는 그대의 어리석은 주인의 몸종일 뿐이니 자비를 베풀겠으나, 내 영토에 정박한 값비싼 배와 멍청이의 머리는 기꺼이 거두어주마.’ 어린 왕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절망한 존은 공주에게 빌고 또 빌며, 자신이 모든 계략을 꾸몄음을 고백하고 제 목숨을 거두되 어린 왕은 해치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다. 지극한 충심에 감복한 공주는 충직한 존이 그 어떤 금붙이보다도 값짐을 알아보고 마음을 바꾸어 묻기를, ‘내가 네 왕의 목숨을 살려준다면, 그를 버리고 여기에 남아 나를 섬기겠느냐?’ 어린 왕을 배신할 수 없는 존은 슬피 울며 그럴 수는 없노라고 거절했다. 존의 충심이 더욱 탐난 공주는 결심했다. ‘그렇다면 네 왕과 결혼하겠다. 하지만 그대의 어리석은 왕이 그대의 충심을 누릴 가치가 없다고 판명된다면, 그때는 오직 나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해다오.’ 충직한 존은 어린 왕을 살리기 위해, 또한, 어린 왕이 자신을 배신할 날이 오지 않으리라 믿었기에 그리하겠다고 공주와 비밀을 약속하였다.

 

존은 공주를 배로 안내하였다. 공주를 본 어린 왕은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침착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였다. 공주가 배에 오르고 왕이 선실로 안내하는 동안, 충실한 존은 뱃사공과 함께 뒤에 남아서는 항해를 지시했다. ‘돛을 펼쳐라! 새처럼 파도 위를 날아가자.’

한편 왕은 공주에게 금으로 만든 접시, 컵, 그릇, 멋진 야생동물들을 몇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하나하나 보여주었고, 공주는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금붙이들을 구경하느라 배가 떠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척했다. 마지막 물건을 눈에 담은 후 상인에게 감사를 표하며 성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야, 갑판으로 오른 후에 배가 육지를 떠난 지 오래이며 먼바다를 전속력으로 가로지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아니!’ 공주가 소리쳤다. ‘속아 넘어갔다니! 상인의 손에 납치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릴 테다!’ 그러자 왕이 공주 앞에 무릎 꿇고 말하길, ‘저는 상인이 아닙니다. 저는 왕으로서 공주님처럼 모자랄 것 없는 신분입니다. 이처럼 교묘히 공주님을 속인 것은 그대를 사랑하는 제 마음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공주님의 초상화를 처음 본 순간 저는 기절해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황금 지붕 공주는 계획대로 어린 왕을 용서하고 여왕이 되겠노라고 답했고, 뛸 듯이 기뻐하는 어린 왕을 보며 충직한 존은 그의 행복이 변치 않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리하여 깊은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충직한 존은 배의 앞머리에 앉아 만돌린을 연주하며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세 마리의 까마귀가 배 근처에서 날고 있는 게 아닌가. 이에 존은 연주를 멈추고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었다. 첫 번째 까마귀가 꽥꽥댔다. ‘오, 저기 왕이 황금 지붕 공주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구나. ’ 그러자 두 번째 까마귀가 답했다. ‘그렇군. 하지만 아직 공주를 얻었다고 볼 순 없어.’ 세 번째 까마귀가 말했다. ‘얻은 거 맞지, 공주가 왕 옆에 앉아 있는걸.’ 그러자 첫 번째 까마귀가 다시 꽥꽥댔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들이 육지에 도착하면 거대한 밤색 말이 왕자를 맞이하러 올 거고, 왕자는 그 말 위에 오르고 싶어 할 텐데, 그러면 그 말은 왕자를 태운 채 바람처럼 하늘을 내달려 달아날 거고, 왕자는 두 번 다시 공주와 재회하지 못할 거야.’ 두 번째 까마귀가 말했다. ‘막을 방도는 없는 거야?’ ‘오, 있지. 왕자 아닌 누군가가 그 말 위에 재빨리 올라타서 안장에 있는 총을 꺼낸 다음 말의 머리를 쏘아버리면, 어린 왕은 무사할 거야. 하지만 누가 이 사실을 알겠어? 게다가 누가 알더라도, 이 사실을 왕자에게 말한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돌로 변해버릴 텐데.’

두 번째 까마귀가 또 말했다. ‘나는 그것보다 더 잘 알지. 설령 말이 죽더라도, 어린 왕은 여전히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지 못할 거야. 그들이 궁전에 도착하면, 금과 은으로 짜인 듯 아름다운 결혼 예복이 나타날 텐데, 알고 보면 유황과 역청일 뿐이라 왕자가 그 예복을 입는 순간 골수까지 불타고 말 테니까.’ 세 번째 까마귀가 물었다. ‘피할 방법은 없는 거야?’ ‘물론, 있지.’ 두 번째 까마귀가 말했다. ‘누군가 장갑을 끼고 그 예복을 낚아채 불 속에 넣어 태워버린다면, 어린 왕은 무사할 거야. 하지만 누가 그런 짓을 하겠어? 이 사실을 알고 왕자에게 말한다면, 그의 발부터 심장까지 몸의 절반은 돌덩이로 굳어버릴 텐데.’

이번엔 세 번째 까마귀가 말했다. ‘나도 아는 거 있어. 예복을 불태우더라도, 어린 왕은 여전히 신부를 얻지 못할 거야. 결혼식이 끝나고 무도회가 벌어지면 어린 여왕도 춤을 출 거고, 갑자기 창백하게 질려서 시체처럼 바닥에 쓰러질 텐데, 누군가가 그녀를 일으켜 오른쪽 가슴에서 피 세 방울을 빨아 뱉어내지 않으면 죽고 말거든.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누군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한다면, 발바닥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돌로 변하고 말지.’ 세 까마귀는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며 날아가 버렸고, 모든 것을 이해한 충직한 존은 슬픔에 휩싸여 말을 잃었는데, 들은 바를 왕에게 숨기고 모른척한다면 왕이 불행해질 것이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알린다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존은 마침내 결심하였다. ‘내가 파멸하더라도 주인님을 섬기리라.’

 

그리하여 육지에 다다른 그들에게 까마귀가 예언한 대로 일이 벌어지며 장대한 밤색 말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좋아.’ 왕은 말했다. ‘이 말이 나를 궁전으로 데려다주겠군.’ 하며 말에 오르려 할 때, 충직한 존이 왕을 앞질러 재빨리 올라타고는 안장에서 총을 꺼내 말의 머리를 쏘았다. 그러자 주변에 서 있던, 평소 충직한 존을 시샘하던 시종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이토록 아름다운 동물을, 게다가 왕을 궁전으로 모실 말을 죽이다니!’ 그러나 왕은 말했다. ‘진정하고 내버려 두라, 나의 가장 충직한 존이니. 이로 인해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나!’

그들이 궁전에 다다랐을 때 복도에는 진열대가 놓여있었는데 그 안에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것만 같은 아름다운 결혼 예복이 들어있었다. 이에 어린 왕은 그 앞으로 다가가 예복을 꺼내려 했으나, 충직한 존은 왕을 밀치고 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낚아채 불로 가져가 태워버렸다. 다른 시종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보아라, 이제 왕의 결혼 예복까지 불태웠다!’ 그러나 어린 왕은 말했다. ‘알고 보면 좋은 일을 했는지도 모르잖는가, 내버려 두어라. 나의 가장 충직한 존이다.’

결혼식이 엄숙하게 거행되고 무도회가 열리자 신부 또한 참여하였다. 충직한 존은 경계하며 여왕의 얼굴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창백하게 질리며 죽은 듯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존은 그녀에게 달려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방으로 데려갔고, 여왕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쪽 가슴에서 피 세 방울을 빨아내 뱉었다. 즉시 여왕은 숨을 내쉬고 정신을 차렸으나, 이를 뒤늦게 목격한 어린 왕은 충직한 존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몰라 새파랗게 질투하며 명했다. ‘존을 당장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다음날 사형을 선고받은 충직한 존은 교수대로 끌려갔다. 주인의 가혹한 처사마저도 충직히 받아들인 존은 교수대에 묵묵히 설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왕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명했다. ‘사형당하는 죄인이라 하더라도 죽기 전에는 마지막 말을 남기곤 하니, 너도 그리하라.’ 그러자 충직한 존이 답했다. ‘저는 결백하며 전하께 진실하지 않은 적이 결코 없습니다.’ 굽힘 없는 존의 태도에 왕은 분노했고, 그런 왕을 보며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존이 슬픈 마음으로 체념했을 때, 조용히 지켜보던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충직한 존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전하와 저를 구하기 위해 그 같은 일들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존이 바다에서 까마귀들의 대화를 들은 내용과 주인을 구하기 위해 했어야만 했던 일들을 설명하였다. 이를 들은 왕은 소리쳤다. ‘오, 나의 가장 충직한 존,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구나. 어서 존을 풀어주거라!’ 그러나 여왕의 운명을 짐작한 존은 기뻐할 수 없었다. 여왕은 존에게 말했다. ‘그대의 충심에 감사하네, 나의 심복이여.’ 마지막 말을 남긴 여왕은 돌로 변하여 생기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왕은 극심한 충격과 비통에 휩싸였다. ‘아아! 나는 이토록 훌륭한 충심에 형편없이 보답하고 말았구나!’ 그리고 존을 위로하려 했으나, 크나큰 배신과 상실로 슬픔에 젖은 존의 마음을 돌리기엔 너무 늦은 일이었다. 존은 여왕의 석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흐느끼며 말했다. ‘약속대로 전하를 새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너무 늦었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여왕만을 유일한 주인으로 섬기기 위해 어린 왕을 떠나려 하자, 어린 왕은 절망하여 용서를 구했다. ‘사랑하는 나의 존이여,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 주게. 나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아도 좋으니, 이 궁전에만 남아 있어 주게. 그리해준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네.’ 하여 존은 여왕의 석상을 침실로 옮기도록 청하고 석상을 볼 때마다 한숨지었다. ‘제 맹세를 지키며 옛 주인님께 그랬던 것처럼 신실히 섬기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한편 충직한 존을 잃은 왕은 비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국정에 소홀해질 뿐만 아니라 점점 파괴적으로 변했고 아름답던 궁전은 마왕의 지옥처럼 타락과 공포로 물들었다. 어느 밤, 존은 폭력적인 왕이 잠든 사이에 석상을 쳐다보며 흐느꼈다. ‘전하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이 고통이 절 죽이더라도 말입니다.’ 그때, 석상이 입을 움직여 말하였다.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한다면 나를 되살릴 수 있다.’ 존은 울었다. ‘전하를 위해서라면 제가 가진 무엇이든 내놓겠습니다.’ 그러자 석상이 답했다. ‘왕의 머리를 직접 자르고 그 피를 내게 뿌린다면, 나는 생을 되찾을 것이다.’

존은 한때 마음을 다해 모셨던 왕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듣고 공포에 휩싸였으나, 여왕의 희생을 떠올리고 떨리는 손으로 칼을 찾아 쥐었다. 그리고 왕이 잠든 침대로 다가갔다.

 

 

 

 

나는 눈을 떴다. 극심한 비통으로 흥분한 심장이 두근덕대기 바빴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침대. 익숙한 이불. 내 방이다. 끔찍한 동화 속이 아니라 현실의.

"셜록? 괜찮아?"

반은 앉고 반은 누운 채 묻는, 존!

"오, 신이시여!"

꿈을 꾸는 것인가? 꿈이래도 놓치지 않으리! 존의 몸을 와락 덮쳤다.

"아야!"

"미안, 내가 아프게 했나? 아파?"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존의 얼굴이 황당하기만 해서 안도했다. 아, 내가 머리로 제 얼굴을 받아버린 점에 대한 항의였을 뿐. 긴장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안도감이 밀려들어 부드러운 존의 몸 위로 쓰러졌다. 차갑게 떨리는 손을 따뜻한 피부에 문대는 건 거의 생존본능이었다.

"신이시여. 고마워. 고마워."

"자꾸 무슨 신 타령이야? 도대체 왜 이래?"

"미안, 미안해, 맙소사, 내가 너를, 미안, 미안……."

"그러니까 뭐가?!"

따뜻한 체온에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둥그스름한 흉통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존은 힘겨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내 귀를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그뿐이었다. 어떤 경멸도 증오도 따라오지 않아 왈칵 눈물이 날 지경. 적대적이지 않은 존이 몸서리치게 고맙고 반가워서 얼굴에 닿는 걸 깨물어버렸더니 머리 위에서 꽥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야 임마!!"

나는 무언가로 등을 두들겨 맞았다. 처음엔 넓은 면이었는데 갈수록 뾰족한 모서리로 변했고 점점 짜증스럽게 아파서 나도 소리쳤다.

"하지 마!"

"그럼 저리 가, 이 자식아!"

존이 손에 든 흉기는 다름 아닌 그 끔찍한 동화책이었다! 까무러칠 듯 놀란 나는 그것을 빼앗아 방구석 저 멀리 패대기쳤다. 내가 다시는, 다시는 동화책 따위를 읽어달라고 청하나 보자. 계속해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노력은 존의 성실한 거부로 지연되었다. 그런데 잠깐, 뭔가 이상하군. 나는 존의 손아귀에 얼굴과 팔이 밀린 상태로 휴전을 청했다.

"알았어. 잠깐. 뭔가 이상한데."

존은 과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하다고? 날 깨물었잖아, 이 자식아! 대체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냐니? 그게 저 끔찍한 악몽 속에서 돌아온 나한테 할 소리야? 하지만 이제 안 깨물게. 네가 싫어하니까. 네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해."

"그런 짓은 아무도 안 좋아하거든? 너 꿈꿨지? 언제 잠이 든 거야? 졸리면 말을 했어야지,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읽고 있었네."

"맞아. 멍청한 짓이었어. 그렇게 잔인한 동화책이 다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아아! 그 악몽이 현실이 아니라서 너무, 너무, 다행이지 뭐야, 고마워.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알았다니까, 셜록! 진정 좀 할래?"

혼란스러운 나만큼이나 존도 영문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물음표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까다로운 와중에 고맙게도 내 입이 알아서 움직였다.

"네가 왜 내 침대에 있는 거지, 존?"

당연히 침실이 두 개여야 하지 않느냐고 허드슨 부인에게 정색했었던 그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나 존은 또 대답하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정말 이상한 것을 보는 듯 입술만 벌어질 뿐이었다. 나야말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 터였다. 여전히 휑한 목이 너무 부드럽고 말랑해서 춥지 않을 리 없는데 그런 옷을 입고 내 옆에서 자겠다는 존의 의도가 무언지 몰라서. 못 본 척하고 싶은 내게, 존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존? 나를 존이라고 부른 거야?"

"왜? 그게 네 이름이잖아?"

그러자 입술에만 있었던 황당함이 얼굴 전체로 번졌다.

"그게 내 이름이라고? 언제부터?"

헛소리를 진지하게 하는군. 하지만 존의 얼굴이 심각한 까닭에 반응을 보류했다. 그도 나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꼬맹이였는데. 언제 이렇게 훌쩍 커버려서 나를 놀리기 시작했담? 나는 실소했다.

"이건 반칙이야, 존. 장난에도 정도가 있지! 네가 날 저 악몽에서 깨워주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망할 동화책, 당장 태워버려야지."

그러나 존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지기만 했다. 나는 질색했다.

"오, 괜히 그딴 표정 짓지 마, 안 통해. 자꾸 이러면 또 깨물어."

그때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존에게서 묘한 냄새가 났다. 겁에 질린 토끼에게서나 나던 냄새였다. 왜 이러는 거지? 나는 좋은 사람인데.

온몸을 엄습하고 사라지는 낯선 기분에 침대에서 거의 굴러떨어지다시피 벗어났다. 내 방, 내 침대, 내 옷장, 내 장식장, 손으로 눈을 꾹꾹 비볐다. 모든 게 그대로다. 나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는 존의 눈빛까지. 아니, 작은 셜록. 아, 아니, 작았던 셜록이지. 지금은 너무 커졌으니까. 하지만…… 존이랑 너무 똑같이 생겼는데, 왜 같은 이름을 쓰더라? 혼란스럽던 머릿속에 갑작스러운 환희가 차올랐다.

"아! 그랬지! 네가 이름이 없어서 내 이름을 나눠주었었지. 미안, 셜록. 내가, 아니 우리가 잠시 착각했었군. 휴!"

그러나 내가 아껴마지않는 존의 눈에 서린 염려와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내게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묻기나 했다.

"존은 누군데?"

누군가가 뒤통수를 세게 친 것만 같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멍청한 기분이 들 리 없어. 존. 그러게. 존이 누구더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내 머릿속에 이토록 강렬하게 각인된 거야? 이 난리를 피워놓고 존이 누구라고 대답하지 못하면 존이 나를 정말 미친 사람으로 여길 텐데. 아니, 존이 아니라 존과 똑같이 생긴 셜록이지. 무슨 짓을 해야 정상적인 나다워 보이려나, 머리를 굴려보자.

그런데 나는 누구지?

손으로 얼굴을 더듬는 것으로 성치 않아 장식장으로 달려가 어두운 유리에 얼굴을 비추었다. 음영으로만 드러나는 검은 얼굴. 내가 이렇게 생겼던가? 내가 지금 웃고 있나? 지금 웃을 때야? 나도 모르게 나간 주먹에 유리가 와장창 깨지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한 현자가 내게 선물한 것이었다! 무슨, 이름이, 요람, 요람이던가? 망할! 장난감 이름 따위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이렇게 슬플 일인가? 추 하나를 들고 공중에서 떨어뜨렸다. 틱. 반대쪽 추가 튀어 오른다. 틱. 틱. 틱. 틱. 그래, 이래야 나답지. 일정하고 오차 없는 움직임. 이게 나다.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워질 때를 대비해서, 나를 불쌍히 여긴 그 현자가 그의 생일날 내게 선물한 것이었다. 아니, 내 생일이었던가? 생일인 사람이 왜 나한테 선물을 주겠어?

"셜록."

존이 아니라는 남자의 눈에서는 이제 걱정과 공포가 아니라 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것마저 너무나 익숙하다.

"네 손."

하면서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장식장을 부순 왼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프지 않은데. 전혀. 왜 안 아프지? 하긴, 지금 아플 때인가? 오른손은 멀쩡하니 괜찮잖아. 어차피 난 오른손잡이인데. 그럼 왜 왼손을 써? 손마디를 꽉 깨물었다.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잇자국이 선명하다. 다시 깨물어보자. 하나도 안 아파. 무언가 잘못되었다. 지나치게 선명한 송곳니 자국이? 아니,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 위협을 경고할 장치가 없다니? 이런 몸으로는 오래 생존하지 못하리라는 것쯤은 금붕어도 알겠어.

틱. 틱. 틱. 틱. 일정한 움직임이 귓가를 심심하지 않게 채우는 가운데, 나는 불안해졌다. 존이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더욱.

"존, 옆구리 좀 보여 줘."

존은 낮게 화를 냈다.

"장난 그만 쳐. 재미없어. 기분 나쁘다고. 우리 이름은 셜록이고, 그걸로 충분해."

"아, 참. 미안……. 셜록."

멍청이 같으니. 나는 두 손을 모아 입술을 꾹 누르며 진정했다. 무릎을 꿇고 부탁하는 쪽과 존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기는 쪽 중 어느 쪽이 효과적일지 따지는 것도 짜증이 난다. 하지만 신중해야지. 나를 쳐다보는 존의 눈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으니. 아니, 존이 아니라니까! 이를 꽉 깨물고 머리를 털었다. 나아지는 게 없었다. 존이 아니라면 신중해야 할 이유가 뭔데?

"너, 옆구리에 흉터 있지?"

존은 불안한 눈길로 나를 훑어보았다. 존 맞는데. 저 의심이 존이 아닐 리 없는데, 라는 의심만이 내 사회성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건 왜."

"보여 줘."

그러자 존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가 늘어놓을 피곤한 잔소리에도 지겹도록 익숙한 내가 선수 쳤다.

"제발! 제발."

틱. 틱. 틱. 틱. 여전히 일정한 움직임. 전혀 변함이 없다. 안 좋은 소식. 깜빡대는 존의 눈은, 환자를 쳐다보고 있다. 제발. 봐야만 한다고. 지금, 이 순간이 네 옆구리의 흉터를 봐야만 하는, 개기일식만큼 희귀한 기회라고 설명을 반복해 협조를 구하자면 까마득하다. 지겹도록 오래 반복한 일처럼, 생각만 해도 구토가 난다고. 나는 두 손을 깍지꼈다.

"부탁해."

그러자 존이 말했다.

"약 끊을 거라고 약속해."

이가 꽉 다물렸다. 짜증 나. 짜증 난 티를 내기 싫은 것도 짜증이 나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내게, 존은 말했다.

"그럼 보여줄게."

저게 존이 아닐 리 없는데. 노려보는 눈이며, 꾹 다물린 입술이며, 나를 한정으로 한 저 인내심이며. 가슴에 있는 한껏 숨을 담았다.

"약속해."

옷자락을 들고 옆구리를 내게 보였을 때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내가 아는 흉터가 거기에 있었다. 흉터마저도 존이 맞으니, 기뻐하면 안 될까? 나의 존이, 나의 존이 아니라니. 나의 존이 맞을 텐데. 맞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안심하고 침대로 뛰어들어 말랑한 몸을 꽉꽉 깨물 수 있는데. 진자의 추 두 개는 멈추지 않았다. 가운데에 모인 추들은 바윗돌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틱. 틱. 틱. 틱. 대답은 하나뿐이다. 틱. 틱. 틱. 틱. 이건 현실이 아니야.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셜록."

존이 나를 불렀다.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거지? 언제나 내 길잡이였는데. 그러니까 존이 아니라잖아! 그건 어떻게 알고? 존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집중해. 집중!

"내 생각에, 너 어디 아픈 것 같아."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어떻게 쳐다봤길래, 존은 흠칫 놀란 기색이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며, 나는 감당할 기력이 없는 잔소리를 예상했다. 불안하게 쳐다보는 존의 얼굴 앞에 미리 검지를 올리니 효과가 있었다.

"……뭐, 왜……."

올려다보는 존의 눈이 이미 불신으로 가득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놀라지 말라는 배려인데, 목 근처의 옷을 건드리자 예상대로 반응했다.

"셜록."

쉿. 입으로 모양을 냈으나 역시 존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너 자꾸 이럴……."

나는 손끝으로 존의 입을 덮어버렸다. 그러니 고맙게도 조용해졌다. 친절을 베풀수록 성가신 반응을 보이는 것까지, 내가 아는 존인데. 부드러운 목에 숨은 울대와 빗장뼈까지, 내가 아는 존의 것들인데. 왼쪽 어깨를 드러내느라 끈을 헤쳐야 했을 뿐, 제발 오해하지 말고 유난 떨지도 말아 주었으면. 예상 밖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낮은 경사가 숨을 담으며 오르내렸다. 맨가슴을 본 적이 있던가? 언제? 집중. 집중해, 이 멍청아. 목덜미 부분의 옷을 늘려 존의 왼쪽 어깨를 드러냈다. 둥글게 떨어지는 존의 어깨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뭐라도 보고 싶다고, 작은 점이라도 좋으니 나타나 달라고, 눈 근육을 쥐어짜듯 꾹 감았다가 떠도, 매끈하다. 설명은 하나뿐이다.

이건 꿈이고, 내 의지도 배제되었다고.

"이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존이 고개를 틀며 말했다.

"왜 이러는 거야? 제발 설명 좀 할래? 이건 내 몸이거든?"

"네 몸 아니야."

자신의 왼쪽 어깨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존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웃음이 나질 않았다. 존의 무지도 내 탓이니까. 방금 악몽에서 깼는데, 아직도 악몽 속이라니.

"길을 잃었어."

이해하지 못하는 존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좋아. 길을 잃었다. 거기서부터 설명하면 되겠네. 들어줄게."

존이 아니래도 낙담시키기 싫어서 차라리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길 염원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닫고는, 동요한 적 없다는 듯, 인내심을 발휘하는 티를 내며 쳐다보는 것이었다. 상기된 존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그와 지내며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사정도 보였다.

그렇다면 도망쳐야지. 방을 걸어 나오는 내 뒤를 역시나, 존이 쫓아왔다.

"어디가?"

"밖."

"그러니까 어디? 추워 죽겠는데."

"밖!"

계단을 내려가는 내 팔이 붙들렸다. 존의 손길을 질색하듯 털어낸 게 미안해져서 두 손을 들어 항복했다.

"금방 돌아올 거야."

잠깐. 이 순간에 이 말을, 전에도 한 적이 있는데. 언제지?

"아닐걸."

당연스럽게 대꾸한 존의 얼굴이 서글퍼 보였다.

"뭔가, 왜인지 몰라도, 너를 이대로 보내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도. 내가 찾는 건 여기에 없으니까. 원망을 담은 존의 눈에 책임감이 들어 망설이는 나를 보면, 그래서 더욱 떠나야만 할 뿐. 나는 왜 존에게 미안한 짓만 하게 되는 건가. 실수가 아니길 바라는 건, 늘 진심이다.

"다행이네. 날 기다리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자, 말했다. 굳어버린 존의 얼굴 때문에 가슴이 선득해지긴 했지만. 명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짓는 존이 내가 찾는 존이 아니라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바깥세상은 기묘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시신을 감자포대처럼 켜켜이 쌓은 수레가 길 한 가운데에 세워져 있고 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신에는 쥐와 새 떼가 잔치를 벌였다. 창문 안을 들여다보면 목맨 시신에 파리가 들끓었고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은 그림자에 쫓기고 있어서 때가 머지않아 보였다. 피로 물든 밭에선 전쟁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모순적이게도 역병과 연쇄살인마가 열심히 일한 덕에 이 세상에서 존을 찾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이 세상이 종말로 치닫고 있다면 존은 분명히 가장 마지막에 벌어지는 위험한 일에 연루되기 위해서 끝까지 살아남을 테니까. 나는 허드슨 부인의 여관을 나오자마자 존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존!"

딱 한 번 외치고서 비생산적이라는 결과가 도출되어 입이 다물린 내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림자였다. 아주 오래전에 나에게서 분리된 탓에 고수머리를 포함해 나와 외양이 같은 새카만 그것은 내게 인사하며 심지어 말을 했다.

"안녕, 셜록."

맙소사, 신이시여, 적당히 좀 하시길. 아무리 마인드 팰리스 안에서 길을 잃었기로서니 그림자 따위와 대화를 나누진 않을 거라고. 내 불평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 그림자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나타낼 수 없는 표정을 대신하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좋을 대로 해. 아주 잘 들리니까."

환상적이군. 나는 물었다.

"제거 과정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지금까지 얼마나 진전이 있었지?"

"주변을 둘러봐. 이 정도면 훈장감이지."

"분명히 놓친 구석이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아직도 숨어있는 거 아냐."

"참아, 셜록. 서두르고 싶지 않거든? 하루하루가 크리스마스인데 서두를 필요 없지. 그럼, 그럼. 전혀, 전혀. 나는 즐길 거야."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단 말이야. 그림자는 내 가까이 고개를 기울이고 비밀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차가운 성질 탓에 조금 서늘했다.

"기왕 우리가 이 길을 택했으니 말하는 건데, 숲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많아. 그 귀염둥이도 숲으로 도망쳤을지도 모르지."

나는 얼굴을 찌푸림으로써 나의 감정 표현력을 자랑해 보였다. 그림자는 할 수 없는 행동이라 조금은 더 열심히.

"그럴 리는 없어. 존은 도망치는 일 따위 안 해. 존이 정말 숲으로 갔다면 숲에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그걸 추적하기 위해서야."

"글쎄. 두고 보자고, 셜록. 네가 존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지. 뻔한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만, 존은 날 찾아오지 않았어. 사실 아주 꼭꼭 잘 숨어있다고 말할 수 있지. 제법이야……."

그림자는 먼 곳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마주치길 벼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몰라도 그 기분 나쁜 웃음을 알아본 나는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무엇을 걱정했는지 알아차릴 사이 없이, 마치 모자를 벗는 듯 경쾌하게 팔을 놀리고 지나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는 그림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또 봐, 셜록."

이 이상한 세상에서 나 또한 생존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었다. 저 싸늘한 존재와 존을 단둘이 남길 수는 없지.

자연스레 나는 숲으로 향했다. 썩은 냄새가 나는 고깃간을 지나고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는 교각을 넘어 밤에는 시신이 흐르는 개천을 따라 어린 셜록과 놀던 버드나무도 들렀다가 마부가 갇혀 있는 뚜껑 덮인 우물을 지나던 중 맛있는 냄새가 나서 걸어간 곳에는 웬 얼간이 하나가 덫에 걸린 채 겁에 질린 냄새를 내뿜으며 이미 도망친 지 오래인 제 동료들에게 포식자의 존재를 경고하고 있었다. 냠냠. 그렇다. 나는 이제 대놓고 개가 되었다. 존의 흔적을 찾으려고 지나치게 코를 벌름거리고 다닌 탓이거나 존이 정말로 나를 개로 생각한 탓이겠지. 왜 개가 되었는지나 언제부터 개였는지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아 보여서 포기했다. 덕분에 내가 꿈을 헤매고 있으며 존을 찾기 전까지는 깨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는 있었다.

겨울 숲을 배회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림자의 말대로 재앙이 부지런을 떠는 마을에서 도망친 인간들이 더러 있었다. 누군가 숲을 요란하게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가만히 몸을 낮추고 그것의 냄새가 내게 먼저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것이 존인 경우라면 펄쩍 뛰어올라 놀라게 할 생각으로 지레 흥분했으나 그럴 기회는 좀체 오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매번 반복되는 실망이 짜증스러운 데다가 쉬운 먹잇감이란 먹잇감은 죄다 축내는 인간들에게 나는 나름의 쓸모를 부여했다. 냠냠. 그러니 조금은 덜 성가셔졌고, 시간이 갈수록 반가워졌다.

인간들은 내가 시체로 만들기도 전에 이미 시체가 되어있기도 했다. 이 숲에는 거대한 늑대가 살고 있었는데,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부정할 수 없이 명백한 강자의 체취에 꼬리가 말릴 정도라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그 구역을 슬슬 피해 다녀야 했다. 나 같은 떠돌이 들개에게 먹잇감을 빼앗기는 게 억울한지 적대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돌아가.

끝나지 않는 겨울 숲을 헤매던 어느 날, 드디어 찾아 헤매던 냄새가 코에 걸렸다. 앞다투어 떠오르는 그리운 기억에 반가워하기도 전에, 존은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과격한 인사를 건넸다. 나를 석궁으로 쏜 것이다. 깽, 하고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볼품없이 쓰러져 차가운 눈에 주둥이를 처박은 내 눈앞에, 사냥꾼의 신발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존이다.

존.

답답하게 느려터지긴 했지만, 존이다! 존! 나야! 드디어 나를 찾았군! 그렇지! 이리와! 더 가까이 오라고! 그렇게 쳐다만 보지 말고 당장 더 가까이 오지 못해! 죽더라도 존의 몸에 코 한 번은 박고 죽어야겠는 나를, 존은 실망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뭐야. 그냥 개잖아. 게다가 검은 개라니, 이게 무슨 불운이람."

섭섭하군. 나는 반대하고 싶었다. 나는 그냥 개가 아니야. 똑똑한 개라고. 잘 봐. 하며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비장의 무기를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역시나 효과가 있었다. 존은 꼬리로 눈을 퍼덕퍼덕 때려대는 나를 곤란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마침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알았어, 이 녀석아. 가자."

신난다! 훅 끼치는 존의 체취에 아찔해져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이 순간에 꿈에서 깨어버린다면 억울해 죽을 것이다. 그보다 오줌을 지리지나 말았으면. 그렇다면 나를 거두지 않을 테니까. 봤지? 나는 똑똑하다고. 비록 개라도 말이야. 제기랄…….

존은 내 어깨에서 화살을 빼내고 치료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기운이 없어서 혀를 축 늘어뜨린 채 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죽는다면 사인은 과다출혈 따위가 아니라 사무적인 얼굴을 한 존이 내 몸 위에서 손을 놀리며 집중하고 있다가 가끔 흘끗, 눈만 굴려서 나를 쳐다봐주는 순간이 너무 쾌락적인 나머지 극도로 흥분한 교감신경이 심장마비를 유발했다는 설명뿐이다.

"알았으니까 꼬리 좀 그만 흔들래? 움직이잖아."

그래서 멈췄더니 존의 눈빛이 더 진득하니 달라붙었다. 좋아. 좋은 현상이로군. 나를 봐. 나를 봐.

"옳지……. 고마워. 개 치고 똑똑하네?"

별말씀을. 존은 슬쩍 물었다.

"주인은 있는 거야?"

주인이라. 아니. 별로. 관심 없어.

"……그래. 외톨이라 이거지. 나처럼."

존은 흐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잘됐네."

행복하다. 이게 꿈이든 뭐든, 존과 함께 있으니 행복하다. 이 대단한 기분을 존에게 표현하는 길이라곤 꼬리를 흔드는 짓밖에 없지만, 꼬리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알아듣거나 말거나, 나는 행복하니까.

"그만 좀 흔들라니까!"

오, 그렇지. 미안. 망할 것을 잘라 버리고 싶군. 별로 생산적인 짓은 아닌 데다가 혼자 힘으론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쳐다보니까 괜히 흔들어서 관심을 끌고만 싶다. 나를 내려다보는 네 눈빛 때문에 할딱이는 심장이 드러나도록 황홀한 걸 어쩌란 말이야. 나는 그저 개일 뿐인데. 존은 눈썹을 살그머니 찌푸렸다. 보기 좋아.

"내 말을 알아듣는 거야?"

물론. 방금 네가 미쳐버린 건 아닌가 의심했던 속내까지 알아들었지. 외딴 숲속에서 은둔형 외톨이 삶을 너무 오래 지속한 탓에. 적어도 두 해는. 여기에 들렀던 다른 인간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으니. 무언가를 찾고 있군. 그것도 굉장히 열렬히. 뭐지? 사냥꾼의 오두막인데 사냥감만이 부재하는 이 이상한 공간에서 홀로 머무는 이유.

존은 나를 두고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안 돼, 어디 가는 거야? 나는 움직일 수 없는데! 돌아와! 돌아오라고! 당장 돌아오지 못해! 하지만 다행히 곧 무언가를 들고 내게 돌아왔다. 오, 그렇지. 좋아. 좋은 인간이로군. 여기 있어. 멀리 가지 말아. 짜증 나니까.

"어이, 개야. 이거 냄새 좀 맡아 볼래?"

라며 내 주둥이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킁. 그게 무엇인지 몰라도 무서운 냄새가 나서 꼬리가 말렸다. 음. 저리 치워. 나 이거 싫어.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모른척하자.

"뭔지 아는 거지, 그렇지?"

알고말고. 그것은 내가 열심히 피해 다녔던 늑대의 체취였다.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이 잡아먹혔어. 그 못된 괴물 찾아내서 죽일 거야.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 줄 수 있어?"

전혀. 절대로. 머리가 제 기능을 한다면 저지를 짓이 아니니까. 비록 개지만 내 머리는 제 기능을 한다고. 그 포악한 늑대는 네가 눈치채기도 전에 너를 덮쳐서 냠냠 맛있게 먹어 버릴 거라고. 그런 걸 알고도 너를 늑대에게로 데려갈 것 같아? 천만에. 물론 재미는 있겠지만 말이야. 너와 나, 단둘이서, 차가운 겨울 숲에 배를 깔고 얼간이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때처럼, 수다스러운 새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유추하며 낄낄대던 때처럼,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도로 차가운 네 개의 손을 한데 모아 비비던 때처럼, 함께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지. 하지만 그 괴물은 얼간이가 아니란 말이야. 덫에 걸리는 건 그 늑대가 아니라 우리가 될 거란 말이야. 게다가 살인혐의의 반은 사실 내가 저지른 일이라는 걸 아는 늑대가 특히나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늑대가 나를 먼저 해치우는 바람에 내 뱃속에 있는 누군가의 손가락을 네가 목격하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어리석은 도박이로군.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를 청산하고 너의 좋은 개로서 살아갈 생각이니 늑대 사냥 같은 허황한 꿈은 당장 깨도록 해.

존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기대하는 눈치였다. 맙소사. 그렇게 웃지 마. 늑대에게로 데려다주지 않을 거니까 꿈도 꾸지 말란 말이야. 안 해. 안 한다고. 나는 멍청이가 아니야! 비록 내 엉덩이에 달린 다섯 번째 다리를 조절할 수도 없지만 말이야!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너와 이 구질구질한 오두막에서 평생을 함께 살다가 평화롭게 늙어 죽을 거라니까? 꿈 깨시지, 존. 오, 그렇게 쓰다듬는다고 내가 마음을 바꿀 것 같아? 정말 지긋지긋하군! 하지만, 조금만 더 밑에! 그래, 그렇지. 거기. 그래, 거기가 좋은 거라고. 계속, 계속…… 멈추지 마! 계속해! 계속하란 말이야. 물어버리기 전에…….

나는 존을 데리고 늑대의 구역으로 향했다. 그 초롱초롱한 눈을 어떻게 외면한단 말인가? 우리가 함께 나눈 새근덕거리는 설렘과 짜릿한 흥분을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존은 훌륭한 궁수였다. 내가 알아채기도 전에 내 마음, 아니, 내 왼쪽 어깨에 화살을 박아넣었던 훌륭한 실력을 믿었다. 오로지 달빛에 의존하며 흉포하고 영리한 늑대의 구역을 누비면서도,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어서 늑대가 나타나서 존의 멋진 몸놀림을 목격하길 기대했다.

늑대는 식사 중이었다. 까드득 까드득 맛있게 씹는 그것이 제 몸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침착할 수 있는 인간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변태적이게도 하필이면, 존은 그 소수의 인간에 속했다. 흥분한 숨은커녕, 마치 물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고 조용히 석궁을 장전하는 모습을 보며, 나, 개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남자와 짝짓기를 하겠다고.

가슴에 석궁을 맞고 잠시 움찔 몸을 떨었을 뿐, 우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슥 돌리는 늑대를 본 순간, 존도 사랑에 빠졌음이 분명하다. 다만 그 상대가 나는 아니었을 뿐.

그게 나, 개가 불행해진 순간이었다. 개로서의 불행은 내가 알던 것과는 달랐다. 불행이란 웅덩이에 빠진 채, 내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안다. 끊임없이. 그리고 나를 구원해 줄 유일한 존재가 내게 등을 돌린 채 서 있다. 내가 불행의 웅덩이에 빠져 그의 도움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 고상한 폭력을 우리 둘만 안다. 그러므로 발생해도 괜찮은 것이다. 나는 폭로할 수 없으니까. 그저 존이 나를 볼 때마다 꼬리를 흔드는 수밖에 없어서.

존은 늑대와 결혼했다. 그리고 늑대를 메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개일 뿐인데. 그리고 존은 인간사회에서 무언가 중책을 맡은 것 같다. 사람을 잡아먹는 두 괴물을 홀려 바른길로 인도한 영리한 인간에게 같은 인간을 홀리는 건 일도 아닌 듯했다.

잔잔한 호숫가에 서면 수면에 비친 나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개가 아니라 고수머리를 한 남자가 보였다. 나라를 잃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우울해 보이긴 하지만, 나 또한 메리처럼 사람으로 변해서 존에게 구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했다. 그러나 우울한 남자를 수면 밖으로 꺼내는 방법을 몰라 쳐다만 보고 있던 어느 외로운 날, 내 옛친구였던 그림자가 날 찾아와 노골적으로 놀렸다.

"개? 진짜로?"

나는 대꾸하지 않았으나 그림자는 개의치 않았다.

"고작 개가 되려고 나를 떠났단 말이야?"

여전히 새카만 그림자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수면에 제 모습을 비추었다. 이제 그는 내가 모르는 얼굴을 달고 있었는데,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미친놈처럼 보였다. 너도 변한 건 마찬가지네.

"마음에 들어?"

별로. 그림자는 수면 위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보고 싶었어. 셜록."

셜록. 그래, 그게 내 이름이었지. 오랜만에 듣는군. 그렇게 싸늘한 기분을 주는 이름이었던가. 훨씬 듣기 좋은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찾아와서 춥게 만드는 거지. 할 일 없나.

"왜라니? 섭섭하다. 내 도움이 필요하대서 단숨에 달려왔건만. 이렇게 축축한 땅은 딱 질색이란 말이야."

도움이라니? 너 부른 적 없어. 네 도움 따위 필요하지 않아. 설령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너한테는 청하지 않을 거라고.

"존이 숲으로 갔다고 귀띔했던 게 누구였는지 잊은 거야? 뇌가 텅텅 비었구만. 뭐, 잘됐네. 오는 길에 마이크로프트를 죽였는데 마음이 영 찜찜했거든. 털어놓게 되어서 다행이군. 유감이야, 셜록. 부디 그의 영혼이 어딘가…… 어디로든 가서 방황하거나 하길."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누구람. 덩달아 찜찜해지는 머리 때문에 고개를 털었다. 잡담할 마음 없으니 그만 꺼지지 그래? 내 속내를 알아챈 그림자는 오히려 내게 더 바싹 다가왔다.

"셜록. 고상한 척하지 말고 그냥 죽여버려. 어차피 마지막엔 너랑 나뿐이잖아. 가는데 순서 없다."

고상한 척하는 거 아니야. 존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못 하는 것뿐. 그림자는 차가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아무도 모르게 하면 되잖아, 멍청아."

어떻게? 나 혼자서 늑대를 어떻게 죽이란 말이야. 힘도 셀뿐더러 빌어먹게 똑똑한데. 존이 나를 버리고 메리를 택한 이유가 있다고. 늑대에게 덤비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나는 멍청이가 아니야.

"너 진짜 네가 누군지 잊었구나. 이러니 착한 사람들이랑 놀지 말라는 거야. 완전히 버려놨어."

그림자가 소스라치게 차가운 손으로 내 앞발을 덮었다. 그러자 내 앞발은 사람의 손보다 훨씬 크게 불어나고 손가락 끝에선 늑대의 것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났다. 그림자가 내 의견을 구했다.

"어때? 괜찮지?"

글쎄. 별로. 너무 괴물 같잖아. 존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뭐, 나는 좋아."

그림자가 내 몸을 완전히 덮었다. 수면에는 개도 인간도 아닌 끔찍한 괴물만이 서 있었다. 모든 빛이 나를 떠난 것처럼 나를 구성한 모든 세포가 얼어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파졌다.

그림자는 나쁜 짓에 소질이 탁월했다. 사람을 훔쳐먹고 음식물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려서 단숨에 공포의 대상이자 가장 불량한 이웃으로 등극했다. 한밤중에 외출하고 슬그머니 돌아오는 나를 눈치챈 건 메리뿐이었다. 내 겨드랑이를 붙잡고 들어 올려 주둥이 근처에서 코를 킁킁댈 때는 오금이 저렸다. 안 하던 짓을 하느냐고 추궁하는 눈보다도, 나를 보며 입맛을 쩝 다시는 게 더 무서웠다. 존과 결혼한 이후로 사슴 따위로 연명하느라 굶주린 게 분명했다. 메리는 내게 물었다.

"왜 이러는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다. 편집증적인 망상이 아니라고 단언컨대 메리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존과 그녀가 쓰는 침대에 올라가도록 허락받은 적 없으니까. 왜 나를 살려두는 거야? 내 머리를 간단히 부숴버릴 수 있으면서 왜 복부의 정확한 부분을 긁어대서 내 의지에 반해서 몸을 뒤집게 하는 변태적인 방법을 택한 거냐고.

"불쌍한 것.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그리고는 나를 놔주었다. 그게 다였다. 나를 경계하면서 나와 싸우고 싶어 하지도 않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녀를 슬슬 피하다가 붙잡히면 배를 발랑 까뒤집거나 꽁지를 말고 존에게로 도망갔다.

희생자가 늘어감에 따라 시장으로서의 존은 근심했고, 사냥꾼으로서의 존은 내심 기뻐했다. 서재에 마련한 아지트를 들락거리며 사냥 도구들을 닦아댔다. 시신이 마을 근처에서 보란 듯이 전시된 날, 존은 급히 집으로 돌아와 사냥 도구를 챙겼다. 목줄을 찾아 쥐는 존을 보고 기쁜 나머지 온몸에 털이 바짝 설 정도였다. 존은 나를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졌던 곳으로 데려갔다. 내게 시신이 있었던 자리를 보여주고 무릎을 꿇고 앉아 물었다.

"자, 누구 짓이야? 데려다줘."

누구의 소행인지 알고 싶지 않을걸. 배신감을 극복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쳐다봐도 소용없어. 나는 말을 할 수 없잖아.

"메리일 리 없어. 발자국 크기는 같지만 말이야. 새로운 선수가 등장한 것 같지? 빨리 만나고 싶군."

나야! 내가 그랬어. 존! 그 짓을 한 괴물이 바로 네 앞에서 혀를 빼내고 헐떡거리는 네 개라고. 내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인간이 얼마나 맛이 없었는지 알면 나를 측은히 여길 텐데. 너의 마음을 사로잡은 새로운 선수가 나라는 걸 알면 네가 나와도 사랑에 빠질까? 내 심장에 부드러운 화살을 박아 넣었던 것처럼 내가 너에게도 똑같은 짓을 할 수 있을까? 존, 나는 아마 좋은 개가 아닐 거야. 하지만 똑똑하지. 네 앞에 다짜고짜 내 본모습을 드러내서 너를 놀라게 하는 도박을 하지도, 모처럼 너와 단둘이 모험할 기회를 걷어차지도 않을 거야. 괴물이 사는 숲으로 너를 아주 멀리멀리 데려갈 거야.

그리고 존을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 존과 나, 단둘이서, 차가운 겨울 숲에 배를 깔고 얼간이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때처럼, 수다스러운 새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유추하며 낄낄대던 때처럼,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도로 차가운 네 개의 손을 한데 모아 비비던 때처럼, 영영 봄이 오지 않는 겨울 숲을 누볐다. 아침 해에 녹은 눈이 톡톡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깨고, 밤에는 따뜻한 존의 품에서 얼굴과 부드러운 턱밑을 날름대다가 잠이 들었다.

이렇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는 나를 그림자는 비웃었다. 우리는 굶주리기 시작했다. 나와 그림자를 그런 단어로 부르는 게 께름칙하긴 하지만. 존의 얼굴을 날름대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향에 주둥이를 박고 있는 것으로도 부족했다. 존의 부드러운 살갗을 보고 있으면 이와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졌다. 급기야 그림자가 속삭였다. 한 입만. 한 입만 먹어 보자. 다리가 두 개니 하나만 있어도 되잖아. 닥쳐, 존을 먹지는 않을 거야. 나의 소중한 존이라고. 게다가 다리보다는 허벅지에 살이 더 많지. 쓸데없이 절뚝거리게 할 필요는 없잖아. 불편할 거라고. 그럼, 그럼.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엉덩이가 가장 부드럽겠지. 무슨 맛이 나는가 깨물어나 보자. 안 돼, 그럼 존이 아파하잖아. 그러면, 핥아나 보자. 안 돼. 절대 안 된다고. 나는 좋은 개. 좋은 개. 나와 그림자는 다퉈댔다. 메리를 처음 만났던 곳에 도착할 때까지.

"안 돼……."

존은 내가 열심히 모아둔 시신을 보고 슬퍼했다. 메리의 소행이라고 확신하는 것이었다. 메리에 대한 평판은 전적으로 존의 머릿속에서 일어났으니 그 믿음이 어떻게 의심으로 변질하였는지 또한 내 책임이 아니겠지. 나는 존을 위로할 뿐이었다. 위로를 전할 수만 있다면 꼬리가 두 개라도 좋을 정도로 열심히 흔들었다.

"이러지 않기로 약속했었는데."

나는 존의 눈물을 핥았다. 나랑 살자. 네 충심을 누릴 자격 없는 포악한 늑대는 버리고 나랑 살자. 외딴 숲속 오두막에서 평생을 함께하는 얼간이와 나쁜 개라니, 그보다 낭만적인 삶이 어딨단 말이야? 나는 널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맹세해. 밤마다 사냥 도구를 만지작거리며 심심해할 일 없게 해 줄 거라고. 잊을 만하면 시체가 나타나 너를 흥분시킬 거라고. 그 대가로 그저 네 개를 쳐다보면서 쓰다듬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이만큼 남는 장사가 어딨단 말이야? 그리고 산처럼 쌓이는 시신을 막지 못한 네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곤란해질 때쯤, 나는 네 앞에 멋지게 내 정체를 드러내고 너에게 고백할 거야. 그때부턴 정말 네가 사주는 돼지고기만 먹고 산다고 약속해. 오! 나의 귀여운 인간! 평생 널 괴롭히며 살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다가 도로 훔칠 나를 아는지!

구애가 한창일 때 불청객이 나타났다. 우리 뒤를 조용히 추적해온 메리였다. 불리한 입장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도 메리는 태연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하는 것 같았다.

"메리! 설명해주시오. 사람은 먹지 않기로 나와 약속 했잖아요!"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에게 코가 꿰였군요, 남편이여. 범인은 내가 아니라 당신의 개라오. 당신을 독점하기 위해 이렇게 수고로운 일을 벌였지."

존이 나를 내려다보아 가슴이 뜨끔했다. 황당한 표정을 지은 존은 다행히 현실을 부정했다.

"개가 한 짓이라니요? 이건 그저 개일 뿐인데."

"그냥 개가 아니오. 갱생의 가능성이 없는 아주 처절히 못돼먹은 개라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그 괴물로부터 도망치길 바라오, 사랑하는 존. 장담컨대 저 괴물은 당신을 세상 끝까지 쫓아갈 거요. 당신을 독점할 수 있다면 당신이 사랑하는 무엇이든 파괴할 비뚤어진 인간말종에게 코가 꿰인 당신이 불쌍할 지경이라오. 그러나 존, 부디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 기억해주오. 나는 그거면 되오."

나는 나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다. 나를 배신하는 그림자만 아니었더라면, 순진무구한 눈으로 존을 올려다보고 결백을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줄곧 나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교활한 그림자가 나와의 약속을 저버렸다. 놀라 자빠진 존 위로 끔찍한 괴물의 그림자가 덮었다. 나였다. 토끼 눈을 하고 굳어버린 나의 존에게서는 겁에 질린 냄새가 났다. 여전히 섭섭하게 하는군. 나는 좋은 개야. 좋은 개라고! 어제오늘, 네 허벅지와 엉덩이를 보고 군침을 흘리고 있긴 했지만, 내 눈높이가 그런 걸 어쩌란 말이야. 그런데 메리에게는 한눈에 반했으면서 왜 나를 보고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건데? 정말 서럽군. 공정치 못하잖아, 나의 어리석은 존.

나는 그림자와 타협하여 존과 메리 중 한 사람만을 선택해야 했다. 누구겠어? 메리의 죽음을 본 존이 와장창 깨지듯 무너져내리더라도, 내가 존의 죽음을 보고 와장창 깨지듯 무너져내리는 편보다는 낫잖아. 남의 일로 지켜보기만 하는 게 내 정신건강에 훨씬 이로우니까. 메리를 안고 우는 존처럼 내가 존을 안고 울어야만 한다면, 하는 가정이 내 머릿속에 존재했던 순간조차 가능하다면 손으로 박박 긁어내고 싶다고. 존은 강하니까 괜찮아. 그리고 나는 존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언젠가는 화를 풀고 돌아올 테니까. 나의 충직한 존.

마침내 존은 내게 말했다. 눈물로 엉망인 얼굴에 넋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내게 말을 걸어주는 게 기뻤다.

"그렇게 나를 가지고 싶으면, 그냥 가져."

그리고 피스톨을 꺼내더니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겼다. 끈이 잘린 인형처럼 바닥에 털썩 눕는 몸을 본 순간, 그림자가 내 몸을 빠져나오며 말했다.

"드디어! 이제 너랑 나 둘 뿐이네."

나는 존이 쓰러진 자리를 털고 일어나길 기다렸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와장창 깨진 탓에 잠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건 아닐까. 존에게 기어가면서 몸이 세포 단위로 버석거리긴 했다. 나를 봐. 기껏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한 번만 봐 줘. 네가 나를 알아볼지도 모르잖아? 너를 떠난 적 없었다는 걸 알면 나를 용서해 줄지도 모르잖아? 나는 존의 몸을 안아 들고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장소를 떠났다.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 남아 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얼어붙은 나무들을 지나가는 동안 존의 몸에서 체온이 달아나는 걸 막지 못하는 내가 너무 무능해서 미안했다. 생존에 필요한 운동을 멈춘 존의 신체가 걸음마다 신선한 죽음을 상기하는 게 견딜 수 없어서 차라리 빨리 몸이 굳어버렸으면 소원했다. 존이 알면 괘씸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걷고 또 걷는 나를 절벽이 가로막았다. 그 끝에 하얀 탑 한 채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버려진 경비 탑이었다. 누군가 아주 싫어하던 곳이었는데. 존이었나. 나였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였나. 존이었기를. 그렇다면 죽어서까지 싫어할 짓을 하는 셈이니까. 존을 안은 채 탑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화가 난 그가 눈을 뜨고 나를 나무라길 바랐으나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밟고 올라갈 때마다 밑으로 꺼지며 끽끽 대는 나무계단과, 손끝으로 쓸며 걸으면 얼얼하게 자극할 벽지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살던 집을 되찾아 온 것 같은 익숙함을 따라 머릿속을 더듬어 보아도 기억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불 꺼진 벽난로 앞에 두 개의 안락의자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의자 하나에는 누군가의 유골이 자리를 점한 상태여서 빈 의자에 존을 조심스레 앉혔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바싹 마른 유골의 두 손 위에는 책 한 권이 놓여있었다. 충직한 존. 나도 읽었던 책인가? 내가 너를 알던가? 그럼 우리는 무슨 사이였지? 두개골을 손으로 감싸자 그 밑의 것들은 발치로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뻥 뚫린 두 눈을 들여다보아도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벽난로 위가 적합할 것 같아 올려두는데 정확히 같은 크기의 두개골들이 이미 진열되어 있기에 그 끝에 하나를 더했다.

틱. 틱. 틱. 틱. 어디선가 규칙적인 소리가 울렸다. 멀리서, 빼꼼 열린 문틈으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었다. 들어가지 말자. 여기 앉은 나의 존과 같이 있어야 한다. 혼자 남으면 외로우니까. 내가 자길 버리고 가버렸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아주 잠시라도. 그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있었던 생각이면 안 되지. 그런 오해는 실수로라도 사고 싶지 않은 나는 존 앞에 마주 앉았다. 이 두개골들처럼 혼자 남겨두진 않을 거야. 그들이 아는 외로움을 굳이 존에게도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 빼꼼 열린 문 너머에서 무언가가 나를 불렀다. 틱. 틱. 틱. 틱.

꿈이로군. 하긴.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이 현실일 리 없지. 존이 죽다니. 죽고 죽어 백골이 되었거나 되어가는 중이라니. 꿈이어야만 하지. 두 눈도 감고 있잖아. 여전히 총도 들고 있고. 부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죽기 직전까지 끔찍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원인을 제공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서 분노한 탓이 아니라면, 사망 후에도 저렇게 근육이 긴장할 리 없다. 저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당장 나가야겠군. 이런 악몽 속에 일 초라도 있을 이유가 없지. 애초에 왜 이런 악몽 속으로 들어온 거지? 무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이렇게 소모적인 짓을 할 이유가 없는데. 그게 무엇이기에 죽은 존 앞에 앉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죽은 모리아티가 왜 여기서 날뛰는 거지?

알 게 뭐야. 나가자.

"내보내 줘."

존은 대답하지 않았다.

"존, 내보내 줘."

존의 의자로 가서 발치에 무릎을 댔다. 그러나 존은 이미 거기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내 의자에 앉아있었다. 무릎을 잡으려고 다시 손을 뻗었으나 이미 거기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원래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무리 닿으려고 해도 허탕이다. 아무리 닿으려고 해도 빈 의자뿐이다. 왜 나를 피하는 거야? 나가야 하는데.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존, 이러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나를 여기서 내보내 줘. 바닥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렸다. 이건 꿈이야.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눈을 꽉 감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존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죽은 채로. 축 늘어진 팔에 총은 단단히 쥔 채로.

"그렇지! 고마워. 고마워."

나는 존에게로 기어갔다. 총을 쥔 존의 팔을 들어 올려 내 이마를 총구에 대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방아쇠가 움직이지 않는다. 방아쇠를 감은 존의 딱딱한 손가락을 움직이기에는 내 힘이 역부족이다. 나는 중얼거렸다. 죽여줘. 방아쇠를 당겨줘. 나한테 화가 난 거 알아. 그래서 이렇게 긴장 상태로 죽은 거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복수해. 여기, 내 쓸모없는 머리가 있으니.

"존, 나를 죽여. 죽여줘."

"싫어."

"그냥 방아쇠만 당겨줘."

"싫어."

"내보내 줘, 존. 내보내 줘."

죽은 존의 시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뭔가, 왜인지 몰라도, 너를 이대로 보내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자. 비는 수밖에.

"나 어디 가는 거 아니야. 여기 있을 거야. 너랑. 영원히."

"거짓말쟁이."

"거짓말 아니야. 돌아올게. 제발, 제발! 다시 돌아온다고."

"거짓말쟁이."

안간힘을 써도 방아쇠는 작동하지 않았다. 벽난로가 불타고 있으면 몸이라도 던질 텐데.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떨리는 손을 꽉 깨물었다.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다. 깨문 채로 소리쳤다.

"존! 제발!"

존은 대답하지 않았다. 뒤통수가 터져 죽어있을 뿐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 정도로 흥분하면 꿈에서 깨야 정상인데.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셜록 홈즈. 틱. 틱. 틱. 틱. 계속 열려있는 방. 그 안에서 무언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

가야 해. 존을 혼자 남겨두는 게 아니야. 가야 하니까 가는 거지. 나는 걸었다. 캄캄한 터널처럼 길어지는 통로 끝을 향해서. 뒤돌아보지 않는 게 좋겠다. 누가 따라오고 있으니까. 아니야,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어. 내 등 뒤에 아무도 없다고. 다 죽었으니까. 우리가 다 죽였잖아. 이제 너랑 나뿐이야. 너무 멀어. 뒤돌아보지 마. 아무도 없어.

"가지 마."

가야 해. 가야 한다고. 보내 줘. 내보내 줘.

반쯤 열린 문틈으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손끝으로 방문을 밀었다. 안락한 내 방이 눈앞에 나타났다. 다행. 휴. 다행이로군. 익숙한 풍경에 마음이 놓인다. 방을 가득 채운 건조한 온기가 얼어붙은 내 뺨을 간질간질 녹여 썩 기분 좋은 느낌. 나를 끔찍이 챙기는 누군가가 라디에이터를 잘 켜 둔 덕이었다. 내 침대에서 잠든, 존 왓슨.

이 순간이 언제 있었던 일인지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나와 플랫을 공유하는 이 남자는 자기 방에 있는 라디에이터는 건드리지도 않으면서 내 방에 있는 라디에이터는 어찌나 자주 만져대는지, 방의 주인인 나는 그것에 자동 온도 조절 기능이 있노라고 오해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작고 뻔뻔한 의사가 내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짚고 넘어가자면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바로 몇 시간 전에도 그는 펍에서 만취한 상태로 처음 만난 남자에게 번호를 주는 만행을 저질렀고, 치밀하고 계산적이게도 내가 그 광경을 똑똑히 목격하도록 했다. 애초에 내가 걱정해서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아무에게도 개인정보를 흘리지 않고 돌아왔을 그였지만, 아둔하고 어리석은 소시오패스가 그토록 증오하는 감정에 눈이 멀어 어울리지 않은 짓을 한 덕에 완벽한 무대가 만들어지자, 내 복장을 뒤집고도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밀 절호의 기회를 차마 거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내가 비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꼬집어대면서 그러한 행동을 하는 기저를 들추어내려고 알짱대기까지 했지.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들과 부대끼면서도 살리고 살아남는 법을 배운 군의관은 한낱 소시오패스를 상대로 그렇게나 가혹했다. 나는 도망쳤었다. 나는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요인을 책임감 없이 내버려 두며 감정적으로 고장 나는 인간이 아니므로 문제를 해결할 약물의 도움을 구했다. 이 행위에 대해, 의사인 이유로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그가 알면 경멸을 담아 호통칠 그 순간조차, 나는 존 왓슨에게 패배했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패배한 순간은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존 왓슨이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바로 저렇게.

이 잔혹한 인간이 잠든 상태라는 특정한 태세가 내게 특히나 치명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이겼고 내가 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리감에 취해 웃거나 우월감을 만끽하지도, 난생처음 패배라는 것을 맛보고 선 나를 위로하거나 배려하지도 않은 채, 단발성이어야 정상인 순간을 영원처럼 이어가면서도, 동시에 자기가 무엇을 누리거나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완벽한 낭비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일백 번을 고쳐 죽으며 새롭게 패배한다고 해도 능가하지 못할 완벽한 패배의 블랙홀에 영원히 갇힌 기분이었고, 또 그 덕분에 두 사람이 기억해야 할 시각적 정보를 혼자서도 충분히 소화했다. 협탁에 켜진 스탠드 불빛에 개의치 않는 듯 평화로운 얼굴도, 샤워 후에 입고 돌아다니는 얇은 가운 틈으로 민둥한 목이 드러나도 춥지 않다는 듯 느슨한 자세도, 심지어 포근히 이불에 덮인 다리 사이에 까만 고양이가 수문장처럼 당당히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것도 기억한다. 그 노란 눈이 나를 감시했다. 장갑을 벗어 코트 주머니에 넣고 냉기가 서린 코트를 벗어 문에 걸었는데 그러느라고 문을 닫은 것이지 다른 뜻은 없노라고 변명하게 했다. 왜 존을 깨워서 내보내지 않고 멀뚱히 서서 쳐다보느냐고 추궁하자 나는 그것이 차라리 내 방을 나가길 원했는데 그것은 존의 다리 사이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고 도리어 왜 본인만 나가길 요구하느냐고 내게 따지는 듯했다. 내 공간을 침입한 사실은 인정하더라도 선택적인 처우에는 불복하겠다는 그것을 강제로 퇴출하지 않은 건 순전히 고양이란 동물이 말을 못 하기 때문이었다. 존이 내 침대에 누워있는 꼴이 환각은 아닐까 싶어 만져보는 대신 검지 손마디를 깨물고 있었다고. 어느 부위를 건드려 깨워야 할지 모르겠다는 핑계로 선명하게 이빨 자국이 난 손을 뻗기만 한 채 수상한 시간을 보냈다고. 그리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는 것도. 한숨을 쉬고 또 침을 꼴깍 삼키면서 화를 참고 있더라고 고자질하는 바람에 존이 듣고는 저 때문에 내가 불쾌해했었다고 오해할 일 없을 테니까. 물론 화가 난 건 맞다. 기껏해야 알록달록한 카드를 보여주며 지극히 일반화한 지레짐작을 늘어놓는 사람을 상대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는커녕 몸 어디가 어떻게 왜 불편한지도 모르는 근시안을 상대로 질투한 나를 인정하기 싫어서, 혹시 그 남자의 진저 헤어 때문인가, 그런 멍청한 이유로 머리 색깔을 바꾸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던 스스로에 소름 끼쳤다가, 혹시 간호사라서 그런 거라면…… 그건 반칙이라고. 의사라면 간호사가 아니라 환자인 나를 돌보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억지를 부릴 참이었기에, 존이 아니라 나에게 불쾌했을 뿐이다. 또한 존이 알면 어처구니없어하겠지만, 패배한 순간부터 복수를 마음먹은 나였다. 애초에 ‘패배자 ’따위 되고 싶은 생각 없었던 내게 ‘점잖은 패배자’란 타이틀이 매력적으로 보일 리 없는 데다가, 자기가 이겼는지도 모르는 얄미운 승자를 상대로 부정행위를 범하는 게 뭐 그리 중죄란 말인가. 물론 들키기 전까지는. 그래서 손바닥으로 존의 따뜻한 숨을 느꼈다. 그가 갑자기 눈을 뜨고 따진대도 내가 숨을 만지는 게 아니라 네 숨이 내 손바닥을 건드리는 거고, 단지 죽었나 싶어서 확인해 본 거라고 잡아뗄 생각으로. 깊은 들숨. 깊은 날숨. 내 손이 얼굴의 반을 가리는군. 노곤하게 열린 미간이 보기 드물군. 코끝이 도톰하군. 그리고 입술이 있군. 하면서 시커먼 인간이 제 입술을 말아 물더라고, 고양이는 증언할 수 없겠지. 확실히.

"존."

나는 속삭였다.

"존."

나름의 배려였다. 그러나, 응, 하기만 하면 되는 쉬운 답조차 존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서니.

"내 침대인데."

천사를 본 적이 없으니 존의 잠든 얼굴이 천사 같다고 표한다면 부적절하다. 굳이 따지자면 존은 한층 멍청해 보였다. ‘이해가 안 가’라고 말할 때의 얼굴보다도 훨씬 더. 어떻게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가까이 들여다보며 탐구하거나 술 냄새를 맡고 투덜대겠다는 핑계로 허리를 굽혔다. 노란빛을 받은 존의 피부가 너무나 따뜻해 보였다. 내 손은 차가울 텐데. 깨면 차라리 다행이지 않나. 아니면 모른척하려나. 추파를 던지고 모른 척하는 그 낚시에 한두 번 낚였던 나인가. 고심 끝에 이마 끝을 덮은 머리카락에 손을 스쳤는데, 가녀리도록 얇은 머리카락이었다. 무감각한 손에 잔상처럼 남은 간지러움. 나는 더 원했다. 잠든 몸을 몰래 만지작거리는 부정직하고 비겁한 짓보다 훨씬 더.

맙소사, 적당히 좀 해. 이만하면 됐어. 갈 시간이야.

갈 시간이야.

협탁의 등을 꺼주려고 침대를 돌아갔다. 나른하게 녹은 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스위치를 껐다. 캄캄한 칠흑. 시력이 어둠에 적응하도록 잠깐 서 있었다.

그때였다. 부스럭, 뒤척이는 소리. 입을 닫은 채 내쉬는, 딱 한 번의 긴 숨소리. 날숨이 끝날 무렵의 속삭임.

"셜……"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내 이름은 셜록이지. 셜이 아니라. 그러나 정말로 나를 부른 것이었다. 펑, 하고 이불 위에 팔을 내려놓는 소리. 슥슥, 하고 더듬는 소리. 나를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적. 다시 이어지는 새근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잠든, 평화로운 고요함. 잠꼬대로도 내 이름을 부르고, 잠결에도 나를 찾노라고 알려주고는, 내 앞에서 눈을 감고 신체를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짜증이 났었다. 만약 내가 존이라면 그런 인간을 상대로 느낀 복합적인 감정들과 당위성을 명료하게 설명해내겠지만, 솜사탕처럼 어물어물 뭉치는 감정 중에서 내가 집어낼 것이라곤 분통 따위가 다였다. 짜증난 셜록 홈즈는 다소 소란스러운 발걸음으로 침대를 돌아가 방을 나왔고, 혹시 존이 새벽에 나를 찾다가 제 방에서 나를 발견하면 벌어질 소란도 미리 짜증스러워서 안에서 문을 열 수 없도록 방문과 욕실 문을 고정했었다.

짜증난 셜록 홈즈와 태평한 존을 방문한 셜록 홈즈는 충동적이었다. 침대에 손을 짚었다. 어둠을 더듬어 이불을 들어 올리고 몸을 눕히면서부터 심장이 뛰었다. 진정해. 이건 꿈일 뿐이야. 아마. 죄책감에 괴로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아도 된다고. 존의 팔 안으로 들어가 부드러운 몸을 끌어안았다. 따스해. 너무 생생해서 이상하지만, 꿈이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이 최대한 만끽하면 된다니까. 잠을 방해받은 존이 내 귓가에 노곤한 목소리를 냈다.

"메리……?"

그것도 내 이름이 아닌데. 명치가 칼에 찔렸나. 더듬어 보았지만 멀쩡했다. 이렇게 아파도 깨지 않는군. 꿈이 아닌가? 내 현실이 이렇게 건조하긴 했던 것 같다. 눈먼 보복심에 존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목덜미가 닫히기 전에 얼굴을 묻으며 자백했다. 이게 현실이라면 존을 기만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 메리 아니야, 존."

밀어낼 줄 알았는데, 포근한 손이 내 뒤통수를 덮었다. 그뿐이었다. 가는 대로 받아주는 존의 품이 따스하다. 울고 싶군. 존의 가슴에 이마를 비볐다. 보고 싶었어. 나를 메리로 생각해도 상관없어. 이대로 잠들어 영영 길을 잃어도 상관없어.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존이 말했다.

"괜찮아. 나도 존 아니야."

존의 몸이 차갑게 식고 딱딱하게 굳는 과정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내가 안고 있는 몸이 무엇인지는 불을 켜서 볼 필요도 없었다. 나를 감싸던 따뜻한 팔이 차디찬 뼈마디가 되어 나를 옭았다. 어둠 속에서 들러붙는 얼굴을 밀어내다가 뻥 뚫린 눈에 손가락을 넣고 말았다. 제발. 존. 나 좀 그만 놀려. 침대에서 굴러떨어져서는 방을 튀어나와 문을 닫았다. 그 무언가가 나를 쫓아올까 봐 밀대로 막아놓고 정신없이 도망쳤다.

위로. 위로. 계단을 타고 높은 곳으로. 떨어져 죽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바츠, 바츠가 좋겠다. 그 끔찍한 옥상에서 다시 한번 죽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눈앞에 나타난 문을 손으로 밀며 염원했다.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존, 다시 한 번만 죽게 해 줘. 그럼 잘할게. 약속해. 약속해.

눈부신 하늘. 빛이다!

맙소사,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콘크리트 바닥. 높은 곳. 바츠 옥상이로군. 떨어지기 좋은. 좋아, 아주 좋아. 떨어지면 되겠군. 나갈 수 있어. 나갈 수 있어. 나는 바닥과 허공의 경계에 두 발을 내디뎠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이 죽음으로 물들어 있었다. 존의 전쟁과 나란 역병과 모리아티의 광기가 이룩한 종말. 안 돼. 지루하잖아. 한 발을 허공으로 내밀었다. 이 정도 흥분으로는 못 깬다고.

"다 죽었어, 셜록. 허드슨 부인. 레스트라드. 몰리 후퍼."

집요하게 나를 따라온 그림자가 태평하게 말을 걸었다. 극도의 분노가 흥분을 유발해 잠에서 깰 수 있다면 대꾸할 가치가 있었다. 모리아티. 죽어서도 내 마인드 팰리스에서 기생하는 저주 같으니. 나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모습을 한 그는 배알이 뒤틀리도록 완전해 보였다.

"그래도 안 나타나네, 네 귀여운 신. 우리가 모르고 죽여버렸나?"

"닥쳐. 나는 나가."

모리아티는 씩 웃었다.

"역시, 셜록. 너라면 방법을 찾아낼 줄 알았지. 그래서 그 기막힌 방법이 뭔데? 여길 어떻게 나갈 거야? 아냐, 아냐! 말하지 마! 내가 알아맞힐게. 너라면 분명히 아무도 생각지 못한 영리한 계획이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지, 셜록? 여기서 뛰어내린다는 지루하고 케케묵은 발상보다 세련되고 기발한 계획일 거 아냐. 그렇지?"

나와 게임을 하는 것이군. 뛰어내리지 못하게 하려고. 이곳에 속박되어 존에게서 버려진 나로서 영원히 살아가도록. 나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해줄 리 없으니.

"확실해?"

그럴 리가. 내 옆에 존이 없는데 어떻게 확신 같은 것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게 오답이라 하더라도, 무능하기 짝이 없는 머리와 몸 따위 가지고 있어서 무얼 한단 말인가. 불안해지고 말았다. 신경 안 써. 나는 눈을 감았다. 그저 깨면 그만일 꿈일 뿐이야. 옆에 서서 휘파람을 불던 모리아티가 계속 중얼거렸다.

"내 말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 아냐. 네가 멍청한 건 알지만 설마 그 정도로 답이 없겠어? 여기서 추락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거라고."

문제. 그 문제. 풀었는데. 또 나타난 그 문제. 지긋지긋하도록 나를 따라와 내가 딛고 선 난간에 걸터앉은 저주. 그의 말이 옳다. 정답을 찾을 때까지 이 삶을 반복하고 있는 거다. 적어도 여덟 번째 존의 두개골을 벽난로에 올려놓는 우울한 삶을 끝낼 방법으로 모리아티의 환송을 받으며 추락하는 나. 정말 우울하군.

"뭐, 어쩌겠어, 너도 결국 인간일 뿐인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평범한 인간."

"실수가 아니야."

인정하기 괴로워 입술을 물어야 했다.

"패배를 반복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좀 나아?"

"물론."

패배가 있으면 승리도 있으니까. 이 세상에 0이 있다면 어딘가에 1도 있다. 벽난로가 비어 있었던 순간, 저주가 시작된 찰나에는 이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하고 있었다는 명제가 거짓이었을 테니까. 다만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는 뫼비우스의 띠를 걷고 있는 거라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따지는 일도 무의미하다. 지금 당장 내딛는 걸음을 첫걸음으로 여기는 게 경제적이고 지금 당장 새로 시작하는 게 효율적이다. 어차피 포기하지 않을 거라면. 존을 두고? 그러자 쓴웃음이 났다. 그럴 순 없지.

"말했잖아, 셜록. 이 세상에 새로운 건 없다고. 거기에 서 있는 너도, 여기 앉아있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 너도,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이미 일어났었던 일이라고. 똑같이. 변함없이. 끊임없이. 오직 패배만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너는 그걸 다 기억하고?"

"그럼. 나를 봐."

눈을 감은 모리아티는 두 팔을 펼치며 뒤로 추락할 듯 고개를 젖혔다.

"네가 찾던 신이 바로 나야."

"희소식이로군. 이 끔찍한 세상을 반복해서 지켜봐야 하는 존재가 존이 아니라면 다행이야."

"나면 괜찮고?"

"오, 나는 너를 잘 아니까. 지루해질 테지. 지루해서 미쳐버리고 말걸. 그래서라도 바꿀 거잖아. 아주 작은 토씨여도. 네가 방금 내 유일한 희망을 확증시켜주었어."

"미안. 셜록. 내가 정말 신이라면, 나는 아무것도 안 바꿀래. 너와 여기 있는 게 좋아. 이게 수천, 수만 번의 패배여도 말이야. 진심이야."

죽은 물고기의 것 같은 모리아티의 두 눈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모리아티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그래. 좋아."

모리아티는 내 손을 난생처음 보는 괴생명체를 보는 듯 쳐다보더니, 제 차가운 손을 포갰다. 그 손을 단단히 끌며 말했다.

"너를 위한 지옥으로 만들어 줄게."

나는 모리아티를 안고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심장부터 떨어지는 추락. 그리고 추락. 계속 추락. 이렇게 심심한 짓이 아니었는데. 너무 많이 죽은 탓이다. 아니면, 땅에 닿는 순간을 기대해보자. 너무 아파서라도 깨고 말 거야. 뼈가 으스러지고 머리가 깨지면 고통스러울 테니. 그래야만 해. 반드시 그럴 거야. 추락. 추락. 이만큼이나 떨어졌는데, 더 떨어져야 한다니. 떨어진 만큼 올라갈 자신이 없을 때 추락은 비로소 끔찍해졌다.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제발. 제발. 깨워 줘, 존, 나를 깨워 줘!

"셜록. 어차피 기억 못 할 테니까 말하는데, 나는 너를 배신하진 않았어. 내가 나쁜 놈 같지? 사실은 네가 나보다 더 나빠. 그러니까 여길 못 나가는 거라고."

닥쳐! 여기서 나가고 말 거야. 내 신이 나를 구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나를 구해서 신을 찾아내 손등에 입술을 대는 척 물어버리고 멱살을 잡은 후에 왜 이 저주받은 세상에 나를 떨구어 놓았는지 따지고 복수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만나고 말리라. 그러기 위해서라도 보고 싶어. 보고 싶은 존, 나의 1.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너를 떠났지? 나를 용서해 줘!

"존, 내가 잘못했어!"

나는 우당탕 굴렀다. 내 몸이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판자와 가죽이 보이니 나에게 눈이 있다는 뜻이며, 네 다리 짐승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오니 나에게 귀가 있다는 뜻이다. 한순간, 나는 내가 말인가 싶었다. 다각다각이 아니라 찰박찰박 질척이는 발소리와 시리고 습한 공기로 겨울임을 아는 건 말의 지능으로도 가능한 일이니까. 분명히 누구와 함께였는데. 누구긴, 존이겠지. 어딨는 거지? 두리번거리며 존을 찾는 동안 혼란스러운 머리가 진정되었다. 존 왓슨이라는 이름은 그런 마법을 부리곤 한다. 누군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

 

나는 눈을 떴다. 코를 간지럽히는 단단하고 둥그스름한 물체는 대충 보아도 존의 뒤통수였다. 잠들었을 뿐, 손상된 구석 없이 건강히 살아있는 존임을 확인하는 과정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소매를 걷어 드러난 팔뚝과 협탁에 놓은 트레이를 발견하고도 긴장으로 숨을 몰아쉬다가, 존의 멍청한 얼굴에서 두 눈이 힘없이 뜨이고 나서야 맥이 풀렸다. 1이다. 그 끔찍한 쳇바퀴로부터 해방된 나를 반기는 게 하찮도록 힘 빠진 존의 눈이라니. 반쯤 깜빡거리는 눈꺼풀 아래서 눈동자가 나를 찾아 담았다. 존이다! 얇은 입술을 떼고 애정 어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발음할, 나를 좋아하는 존!

"이 썩어 빠진 개자식아."

참. 내가 존에게 한 짓이 있었지.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샜다. 웃을 때인가. 내게서 도망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릴 바에야 내 얼굴에 대놓고 욕하고 주먹을 날리는 존이 나으니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존을 끌어안았다가 피로감이 몸을 짓누른다는 핑계로 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존의 목소리가 우스꽝스럽게 갈라졌다.

"뭐야? 왜 이래?"

"나야. 돌아왔어."

"으악!"

간지럽나. 바짝 굳는 몸과 어깨를 밀어내는 힘이 단호해서 억지를 부리기가 미안해진다. 행복한 와중에도 짜증은 나는군. 꿈에서조차 검열할 필요는 없는데. 몸에 닿는 따뜻하고 묵직한 촉감이 나를 약하게 했다.

"셜록. 너 우는 거야?"

"아니."

그러나 훌쩍대는 바람에 탄로 났다. 존의 어깨에 마구 얼굴을 비비고 고개를 들었다. 존은 내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내 잘못은 아니겠지.

"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네가 나를 버릴 거라곤 예상 못 했으니까. 굳이 그렇게 복수해야 했어? 그런 끔찍한 세상에 나를 떨구고 미로를 헤매는 실험쥐처럼 지켜봐야 했느냔 말이야? 너는 소시오패스 기준으로도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야. 어쨌든 시험에 통과했으니 멍청하다는 핀잔은 안 받겠어. 네가 얼마나 악질인지도 알았으니 일단, 지금은 그냥……."

존의 얼굴이 황당하거나 말거나. 나는 바쁘다. 입에 닿는 것을 깨물며 복수했다. 원래 이렇게 부드러운가, 사람이? 원래 이렇게 따뜻한가, 아무리 산 사람이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왼쪽 어깨는 흉터 없이 밋밋하면서 어떻게 이런 온기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건지. 무거워지는 숨소리가 내 것인지 네 것인지. 깨버리고 말 거야. 그전에 조금만 더. 더워.

"벌써 가려고?"

허덕거리는 나를 달래는 존의 손길이 다정하기만 했다. 꿈에서 깨려는 수작임을 알면서도, 또 나를 보내주려고. 가야 해. 가기 싫어도 가야 해.

"셜록. 그래서 답이 뭔데? 뭘 찾았어? 말이나 해주고 가. 궁금하잖아."

있는 힘껏 존을 끌어안으며 내 무게라도 남겼다. 내 기억일 뿐인 존에게 이렇게 감상적일 필요 없는데. 그래도 말은 못 하겠어. 나는 그저 속삭였다.

"미안. 미안."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가구. 더운 몸에 찬물을 끼얹는, 지루한 방. 유독 참을 수 없이 허전한 이유는 내 옆에 존이 없기 때문이다. 내 침대가 원래 이렇게 넓었나. 나 외에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조차 없다. 내 침대엔 올 일도, 올 생각도 없는 존이니까. 새 플랫메이트를 배려한답시고 준비했었던 베개 두 개는 그냥 그렇게 침대의 일부로 굳어졌다.

브리스톨. 결혼식 장소를 보기 위해 떠난 게 어제였나, 그저께였나?

담배가 어디 갔지.

현실이로군.

담배를 찾느라고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다 떨어진 걸 확인하니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꼼짝할 수 없었다. 이따금 차가 지나가며 내는 엔진소리를 들었다. 버스. 택시. 등속조인트가 불량한 승용차. 엔진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는 새소리가 공백을 채웠다. 참새. 찌르레기. 허드슨 부인이 복도를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길 바랐다.

현실이로군.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존의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내게 보낸 메시지를 찾아 읽었다. 얌전히 있어. 진심이야. 지겨워. 너무 많이 읽어서. 예전 같았으면 일부러라도 소란을 꾸며내고 존이 돌아와서 무엇을 놓쳤나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을 구경했을 나다. 지금이라도 그럴까, 하고 예의처럼 고려해보았을 뿐. 뭐하러?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는 김새는 소리를 들으려고? 메리에 관한 쓸데없는 정보를 들으려고? 내 옆으로 돌아오는 게 아무래도 낫겠다고 마음을 바꾸는 희망은 버리는 게 생산적이다. 이제는 확실히 안다. 존은 메리와 결혼할 것이고, 나는 그 바윗덩이를 웃으며 삼켜야 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분명히 현실이다. 찜찜하고 씁쓸하다는 걸 잠시 잊었을 뿐인 나의 현실. 돌아온 걸 환영해, 라고 말해줄 존이 곁에 없으니 텁텁해지는 목을 물리적으로라도 달래고자 냉장고로 터덜터덜 향하는 현실.

"잘 잤어?"

존이다. 부스럭, 신문 넘기는 소리가 방해스럽지만, 존의 목소리다. 꿈인가? 거실로 달음 하는 동안 굼뜬 슬리퍼로 제자리걸음 하느라 나를 찾아온 존을 영영 눈에 담지 못하는 건 아닌가?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짤막한 다리를 꼬고 작은 두 손으로는 신문을 펼쳐 상반신을 죄다 가리느라 금회색 동그란 정수리만 빼꼼히 내놓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찰나에 발밑이 무너지는 바람에 추락하여 끔찍한 살인 마차로 나동그라지는 건 아닌가? 안 돼, 그러면 안 돼. 이게 꿈이라면, 긴장한 의식으로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촉발할지 두려워 영원 같은 시간을 차라리 견디는 내게, 신문을 아래로 휙 내린 존이 얼굴을 드러냈다. 존이다!

"……괜찮아?"

앞머리를 잘라서 더욱 밤톨 같은, 언젠가 본 적 있는 빨간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은, 무슨 일이냐고 깜빡거리며 묻는 눈이 오롯하고 분명히 나를 담은, 존. 가서 손을 잡아도 되나? 아니. 그러면 안 되지. 안는 건? 더더욱 안 되지. 그럼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보기만 해야지. 하지만 이게 꿈이면 어떡해? 현실이라고 쓰게 되새김질한 게 조금 전이지만, 존이 나타나 버렸으니. 게다가 나더러 괜찮냐고 묻잖아. 날 걱정하는 것처럼.

존은 턱을 내려 저를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며 신문을 접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알았어. 준비됐어."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물었다. 목소리가 나올까 싶었던 걱정에 비하면 자연스럽기 그지없이.

"뭐가?"

"이거."

존의 다부진 검지가 자신의 빨간 스웨터를 가리켰다.

"너 이 스웨터 혐오하잖아. 거기 서서 나를 놀릴 백 가지 조롱을 머릿속에 떠올린 걸 내가 모를……"

"좋아."

마음에 든다는 말인데. 너무 퉁명스러웠나. 존은 말문을 닫았다. 나를 보는 눈빛에 의심을 담고. 부연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처음 보았을 때 멋진 조화에 시선을 빼앗기고 정신이 팔린 게 짜증이 나서 괜히 질색한 것뿐이었지,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고. 지금도 물론.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안 어울리는 게 없는 데다가 끔찍한 악몽을 헤매느라 잠을 자기 전보다 더 피곤한 지금, 스웨터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지만. 네가 여기 있어서 그저 감사한걸. 그렇게 설명하면 맘에 없는 악평을 했었던 과거의 나를 용서할지는 몰라도 저 의심의 눈빛은 거둘 텐데. 불안하게 넘실대는 가슴을 달래기에 급급해 간신히 말했다.

"좋다고."

내가 고장 난 건가, 네가 고장 난 건가. 둘 다 고장 나면 안 되지. 나라도 냉철한 이성을 내세워서 멋있어 보이도록 하자. 나는 셜록 홈즈니까.

"커피 마실래?"

내가 고장 난 거군. 존의 표정도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디 아프냐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건 거의 예의처럼 느껴졌다. 존은 심지어 꼬았던 다리도 풀어 내려놓고 따졌다.

"커피? 네가? 나한테?"

미확인 비행물체에 관한 다큐를 시청할 때도 저런 표정을 짓진 않던 존이었다. 이상해 보이겠지. 커피를 권하는 셜록 홈즈라니. 마시고 싶지 않겠지. 독이 들었다고 생각할 테니. 존의 머릿속에 있는 셜록 홈즈는 그렇게나 괴팍하고 지독한 인간이니까. 전과가 있어서 따지지도 못하겠군. 억울하기 짝이 없어.

나는 실험실로 몸을 돌렸다. 커피포트를 찾아 연 후에 커피가 바싹 마른 필터를 꺼내 버리고 새 필터를 넣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아. 그다음엔, 새 커피를 넣어야겠지, 당연히. 여기 어딘가에…….

"이리 줘, 내가 할게."

내 팔에 폭, 닿고 사라진 존의 손이 무독하고 가볍다. 신기하다. 꿈인가? 언제 내 옆으로 온 거야? 수납장을 열어 한 번에 커피를 찾아내는, 확신에 찬 몸짓도. 나직한 비음이 디폴트인 중얼거림도.

"물론 네가 독을 탈까 봐 그런 건 아니야."

단조로운 목소리만으로 내 허파에서 공기를 빼내는 마술도. 무언가 녹는 것 같다. 무언가가 얼어있었던 것처럼. 신비롭군. 존은 실험대를 턱짓했다.

"앉아 있어."

나는 얌전히 실험대의 의자를 빼서 앉았다. 앉고 나서 생각했다. 참으로 자연스러운 명령이었다. 나도 모르게 복종해버렸잖아. 이왕 막이 열린 김에 가만히 앉아서 존이 어떤 재주를 펼칠지 감상하도록 하자. 이게 꿈이래도 나쁘지 않다. 꿈이 아닐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해서, 존에게로 걸어가 등을 끌어안을 수는 없는 게 안타깝지만. 그랬다간 수습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

둥그런 어깨를 움직이며 향기로운 커피를 한 스푼, 두 스푼, 세 스푼, 탁탁, 반듯하게 봉하고, 두 팔을 들어 수납장에 도로 집어넣느라 드러나는 벨트. 둥그스름한 허리. 잘 먹고 있군. 오늘은 면바지…….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해?"

얼른 눈을 올렸다. 한 박자 늦게 존이 나를 돌아보았다. 큰일 날뻔했군.

"피곤해 보이고. 또 악몽 꿨어?"

오, 그럼. 꾸었던 꿈 중 가장 지독한 꿈이었지. 수십 번도 넘게 너를 실망하게 하고, 배신하고, 처절한 슬픔을 알려주고, 수십 번도 넘게 너를 따라 죽는 꿈이었어. 우리가 함께 있을 방법을 알아냈을 때, 끝없는 악몽의 굴레에서 벗어나 꿈에서도 깰 수 있었지. 사실은 지금도 내 방에 들어가서 뉴턴의 진자를 작동한 후에 멈추는지 안 멈추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다고. 나는 답했다.

"잠을 못 잤을 뿐이야."

거짓말쟁이. 입술을 씹으며 시간을 벌었다. 거짓말하지 말라니까. 솔직해지는 연습이라도 해 봐. 그래서 덧붙였다.

"이상한 꿈도 꾸고."

"그래?"

"응."

더 묻지 말아줘. 염원하는 속내가 들렸는지, 존은 유리 포트를 꺼내 물에 씻었고, 대화를 이어가기 힘든 물소리가 침묵의 자리를 심심치 않게 채웠다. 그러잖아도 둥그스름한 등이 캐시미어 때문에 참 부드러워 보이는군. 만져보고 싶은데. 그럼 안 되지. 꿈이 아니니까. 조심해야 해. 물을 잠그고 조용해지고 나서야 존은 개수대에 주륵, 물을 따라 버리면서 말했다.

"이상하네. 나도 이상한 꿈 꿨는데."

"그래?"

"응."

내 꿈은 묻지 말되 네 꿈은 말해 줘. 염원하는 속내를 들었나 보다. 마른행주로 포트 겉을 닦고, 몇 걸음 걸어가서 포트를 제자리에 맞춘 존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뗀 존은, 잠깐 그대로 나를 쳐다보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는데, 일부 드러난 자그맣고 고른 치아를 충분히 쳐다볼 만큼의 뜸을 들였다. 완벽한 위치에 자리 잡은 제 눈코입귀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보고 감탄하라는 건가. 그렇다면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봐. 조금만 더. 비슷한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마침내 존이 말했다.

"내가 여기 있었는데,"

그리고 또 어렵사리 말을 고르고는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그래, 내가 여기 이 플랫에 있었는데, 너를 찾고 있었어."

동시에 자연스레 한쪽 팔을 밑에 놓인 수납장으로 뻗더니 마법처럼 생수 한 병을 꺼냈다. 물이 거기에 있었군. 빨리 말해. 궁금하잖아.

"거실 쪽에서 네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나는 여기서 저쪽으로 걸어갔어."

그러면서 검지로 냉장고 옆을 가리켰다가 내가 앉은 실험대를 지나 거실 쪽을 가리켰다. 존은 허공에서 검지를 멈췄다.

"저기, 주방이랑 거실 경계에 도착하니까 네가 보이더라고. 네가 거실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더라."

그리고 손으로 따드득, 생수 뚜껑을 돌렸다. 나는 참견했다.

"무릎을 꿇고? 내가?"

"그렇다니까. 그, 기사 작위라도 받는 것처럼."

끄덕끄덕, 한 손으로 생수병을 들고 나를 떠난 존은 커피포트 어딘가에 대담하도록 콸콸 물을 부어 넣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로군.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겠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리스마스의 고령 노동자처럼 빨간 스웨터를 입고 내 앞에서 묘기를 부리는 존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 나는 말했다.

"왕이라도 접견했나? 쓸데없고 불공정한 법 같으니. 무릎을 꿇리다니."

존은 올라가는 입꼬리의 반만 내게 보여주었다. 뚜껑을 탁, 버튼을 틱, 끝. 경쾌한 손놀림과는 달리 커피포트는 폭발이라도 준비 중인 듯 고요한데 그게 정상인 듯했다. 조용한 존의 웃음도 수상쩍어서 물었다.

"뭐야?"

"뭐, 네가 그 여자를 폐하라고 부르긴 했어."

"여자라고?"

"여왕이니까."

존은 조리대에 엉덩이를 기대고 팔짱을 꼈다. 한쪽 다리까지 꼬는 걸 보니 기다리기만 하면 커피가 완성되는 것이다. 지긋한 시선을 의식한 나는 내 외관을 생각했다. 존이 이렇게 일찍 올 줄 알았더라면. 중얼거리기나 했다.

"설마 예지몽이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존. 최근 네가 무의식중에 습득한 정보를 정리하다가 발생한 활동일 뿐이야.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어. 여왕이 나를 왜 찾아와? 내게 볼일이 있으면 궁전으로 부르겠지."

"그래."

존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폐하라고 부른 여자가 반드시 실제 여왕이어야 하는 법은 없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그저 농일 수도 있다는 소견입니다, 폐하."

라며 존은 고상하고 경제적인 방법으로 나를 이해시켰다. 나의 현명한 존. 정말 꿈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틱, 틱,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는 건 아닌가? 타이밍 좋게 커피포트가 칫, 하는 소리를 내며 나의 주의를 끌었다. 토독 토독. 커피가 내려오는군. 다행이야. 언젠가 존이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머릿속에 저장해 놓았던 건 아닌지. 이게 꿈이래도 나쁘지 않다. 현실이래도 나쁘지 않고. 이게 현실이라면, 좋은 순간인가? 나는 행복한가? 고작 존이 내게 커피를 만들어 주는 순간 따위에 행복감을 느끼는가? 존 몰래 나 혼자 진행해야 하는 더러운 일 외에는 사건도 살인자도 없는 지루한 현실이 행복하다고?

네. 그러하다. 행복하다. 어이없게도. 무어라고 답해야 존과의 유려한 대화를 이어갈지 고민하는 순간 따위에 감사하고 행복하다니.

"그 또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야. 농담과 장난의 목적에 미치지 못하는 재미라면 할 가치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여왕님이지. 네가 재미없어하는 걸 신경 안 쓰거든."

"지독하게 이기적인 양반이로군. 도대체 누구야?"

"몰라. 누군지는 못 봤어. 너만 봤어."

좋아. 좋은 현상이야. 나만 보도록 해. 아니면 물어버릴 테니. 입 밖으로 말한 건 아니겠지. 넌덜머리가 나는군. 정말 꿈인가? 존이 내게 준 끔찍한 뉴턴의 요람을 작동시켜서라도 확인해야 하나? 이게 꿈이라면 존을 쳐다보며 커피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거라고. 이렇게 한가한 짓을 할 시간이 없는데. 존을 걸고 도박할 수도 없잖아. 나는 말했다.

"그렇게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면 분명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겠군."

내 말에 존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들고 잠깐 회상했다.

"음. 아니. 오히려 행복해 보이던걸."

"뭐?"

이렇게 또, 존의 머릿속에 있는 셜록 홈즈에 대한 괴상한 정보를 알게 된다. 고문당하며 즐거워하는 변태라니. 이제 존의 마인드 팰리스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그 악몽을 되풀이하진 않겠지. 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행복해 보였어. 좋은 꿈이었지……."

존의 얼굴에 미소가 계속 머물렀다. 진심이다. 누군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폐하라고 부르는 나라니. 그게 악몽이 아니라면 다행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보기 좋게 늘어난 입술이 중요한 거지. 밑에서 보니 얼굴이 더 동그랗게 보인다. 늘 두 손으로 감싸고 싶은 충동이 드는 밤톨. 손에 들어오는 감촉이 만족스러울 텐데. 그다음에는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채 존의 시선을 견디는 게 문제.

커피포트에 한 컵 분량이 모이자마자 존은 포트를 꺼내 커피를 머그에 따랐다. 설탕통에서 각설탕을 하나 골라 바스락거리며 봉지를 벗긴 후 커피에 떨어뜨렸다. 스푼으로 따각따각. 제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척척 해내는 작은 손이 머그 손잡이를 잡고 내게 건넸다. 김을 올리는 검은 액체를 쳐다보는 사이에 존은 또 농담했다.

"걱정하지 마. 약 안 탔어."

"이미 약이잖아. 카페인."

"약이긴 하지만, 약은 아니야."

머그 아래를 손으로 받쳐서 건네받았다. 고마워. 따뜻해.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하던 존이 이번엔 내 건너편 의자 등받이에 두 손을 대고 기댔다.

"아, 우리 브리스톨에서 결혼식 올리기로 했어."

우리라는 건 역시나 자기 자신과 메리를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 결혼 선물로 사전을 쥐여주지 않는다면 이 짜증스러운 순간도 반복할 것이다. 나는 커피로 입을 막으며 눈썹으로만 대꾸했다. 그러냐고. 존의 나긋한 목소리.

"아름다운 곳이야. 너도 좋아할 거야."

그리고 확신을 담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나도 좋아할 거다. 저렇게 확신하는 존을 위해서라도. 무어라고 해야 대화를 이어가기 적절한 대답일지 잠깐 고민했다.

"진전이 있어서 다행이네. 올해 안에 끝나긴 하는 거지?"

"그럼. 아직도 갈 길이 머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

따뜻하고 달곰한 커피를 목으로 넘기자마자 작은 탄식이 터졌다. 한숨처럼 들렸대도 부정할 순 없는 소리였다. 등받이에 올린 손가락들을 소리 없이 두드리며 존은 나직이 중얼댔다.

"결혼식, 피로연, 숙소, 음식, 옷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운동이랑 피부관리부터 하라고 하지, 사진사, 꽃, 음악……."

그리고 내 것보다 더 큰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하……. 춤은 정말 싫은데."

"춤? 아, 그렇지."

쫑긋 섰던 귀를 얼른 내렸다. 들키진 않았을 거야. 존은 말했다.

"협상에 실패했어. 신랑이 허우적대는 꼴을 만인에게 자랑하고 싶으시대."

"그렇다면 지루하기만 한 날은 아니겠군. 네 수치심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꼭 참석해서 지켜보도록 할게."

"오, 고마워. 나에게 날아오는 날달걀이나 양상추 따위만 막아주면 돼."

덤덤하게 읊조리는 존의 목소리가 나를 너무나 쉽게 웃게 했다. 얼마 만에 내는 소리지? 꿈이 아닌 게 확실하다. 이런 농담은 내 뇌로는 만들어내지 못할 테니까. 농담하는 얼굴에 장난기가 없어서 더 흔들린다. 저렇게 뻔뻔한 얼굴로 타인을 즐겁게 만들어도 되는 건가. 그런 나를 보고 존은 핀잔했다.

"꿈도 꾸지 마. 입장할 때 소지품 검사를 할 테니까. 너부터."

나는 늘어난 입을 머그로 가렸다. 조그마한 신랑 신부가 춤추는 광경이라니, 볼만하겠군. 아무리 형편없는 실력이더라도 존이라면 귀여운, 아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테니까. 그저 괴상하고 피곤한 하루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존의 결혼이란 단어도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여전히 지구 종말과 같은 일이다. 점점 다가오는 그것의 모습에 익숙해질 뿐. 문득 중얼거리는 존의 목소리가 또 내 귀를 쫑긋 들어 올렸다.

"일일 강습이라도 등록하든가 해야지."

"내가 할게."

또 퉁명스럽군. 급한 마음에. 존도 내가 뭘 하겠다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뭘 해?"

이미 엎어진 물. 침착하게.

"춤. 강습.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데."

존의 얼굴에서 시간이 멈췄다. 꽤 오래. 그리고 또박또박 물었다.

"네가, 셜록. 나한테? 춤을?"

나도 핀잔했다.

"왜?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니, 아니……."

내 추궁에 존은 허리를 펴며 뒤늦게 정색했지만, 얼굴에 남은 황당함은 지우지 않은 채였다.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내려다보는 두 눈이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굴렸다.

"뭐? 소시오패스에게서 춤을 배우는 게 그렇게 께름칙하다면 좋을 대로 해, 존. 네 결혼식인데."

"아냐, 아냐, 아냐. 가르쳐 줘.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지만 안다면……."

"당연히 알지. 나를 춤도 못 추는 얼간이로 보는 거야?"

"아냐. 아냐. 그럴 수도 있지. 흐흠."

뭐라는 거야? 춤도 못 추는 얼간이 주제에. 말을 끝낸 김에 입술을 적시고 들어가는 작은 혀. 물끄러미 나를 마주하는 두 눈. 의심하는 존에게 나는 아무 말 않기로 했다. 마주한 눈을 한 번 깜빡, 하며 조여드는 심장을 느꼈다. 그렇게 뜸을 들이면 내가 안달할 줄 알고. 정확하다. 빨리 말해. 승낙하거나 거절하거나 무엇이든. 하지만 승낙한다면 내가 기쁠 테니까 승낙해.

"그럼 부탁해도……?"

"물론."

"그래."

산뜻하게 대답한 존은 고개를 들어 일단락했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설마 부끄러운가. 낯가리는 건가. 그저 춤일 뿐이잖아. 존에게 춤을 가르쳐준다니. 신랑 신부가 추는 춤. 정말 꿈은 아니겠지.

"뭐, 그럼 나는 언제든지 좋아, 셜록. 지금 당장이라도?"

너무 빠르잖아. 침착해.

"의욕은 알겠지만 지금 가르쳐 줘도 소용없어. 잊어버릴 테니까. 날짜가 가까워지면 가르쳐줄게. 네 몸뚱이가 완전히 쓸모없는 장식품은 아니라는 전제하에."

"하…… 네가 날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라면 좋으련만."

"괜찮아. 날달걀과 양상추를 맞는다고 죽진 않으니까."

그제야 존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 웃는 얼굴이다. 고작 입술 사이로 바람을 빼는 소리 따위로 나를 위로하다니. 힘든 줄도 몰랐었던 나를 어루만져대며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굳이 알려주다니. 내 얼굴에 얼빠진 웃음을 전염시키다니. 나쁜 사람. 이렇게 나쁜 사람을 상대로 지기만 하는 게 내 현실이라고? 나는 전혀 목적 없이 마시고 있던 커피를 입술에서 떼었다.

"물론 대가는 있어,"

내 말에 존은 놀랍지 않다는 듯 눈썹을 들었다.

"물론 그러시겠지. 뭐야?"

이번엔 내가 뜸을 들였다. 궁금해서 나를 보고 안달하라고. 인내하는 존의 시선을 받으면서 불필요하게 긴장하긴 했다. 생각해보니, 너무 사적인 부분을 공개하길 요구하는 건 아닌지 싶어서 정말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야만 할 일.

"네 왼쪽 어깨에 난 총상을 봐야겠어."

내 말을 듣고도 존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좋지 않은 징조. 내 생각보다 더 사적인 부분이었나. 이미 엎어진 물. 괜찮아, ‘나는 소시오패스’라는 든든한 보험이 있으니. 존은 되물었다.

"봐야겠다고? ‘보여 줘’도 아니고, 봐야겠다고?"

"응.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라도. 그렇지만 너만 상관없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당장 보는 걸 선호해."

"왜?"

"‘왜’는 거래 항목에 없어."

마인드 팰리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에 대한 조금의 단서도. 존이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너무 똑똑한 탓이다. 위험 감수 안 해. 이제는 존을 상대로 게임하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

내가 뜸을 들였었던 것만큼이나 느긋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는 존은 먼 곳에 눈을 둔 채로 흐릿하게 반쯤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 운을 떼었다.

"거래라……. 이건 어때? 존이 마음을 바꾸는 거지. 존은 셜록에게서 춤을 배우지 않기로 하고, 그래서 셜록도 존의 총상을 보지 못한다."

역시. 영리하잖아. 나에겐 불리하지만 말이지. 맞수를 놓을 차례야, 이 멍청아. 생각해. 생각해내. 뭐라도. 그 악몽 속에서 뭐라도 배웠을 것 아니야.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할 거야? 다시 들어가고 싶어? 아니. 절대 싫어. 그럼 말해!

"존은 셜록에게서 춤을 배우는 대가로, 어깨의 총상을 보여준다. 왜인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존은 셜록을 믿기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몰랐다. 장담컨대 귀로 듣고 나서야 이해했다. 여전히 변치 않는 존의 표정을 보고 명치가 쓰라려 혼났으니까.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감정을 소화하는 존이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 두 눈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크나큰 배신을 당한 존은 더 이상 셜록을 믿지 않게 되었다.’

존의 침묵을 나는 견뎌야 했다. 감정을 무기처럼 다루는 성숙한 사람이 일개 소시오패스를 상대로 이렇게 가혹할 일인가. 이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면 정말로 다시 그 끔찍한 악몽으로 다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아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운명의 쳇바퀴를 굴려대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존은 승낙한다. 아, 맙소사. 이건 게임이 아니야. 단두대지. 틀린 답인가? 나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인가? 내가 그에게 저질렀던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믿지 않느냐며 뻔뻔하게 목을 내민 나에게 엄지를 내려도 할 말이 없다. 나도 알아. 천 번을 고쳐 죽일 놈이라는 걸. 빨리 대답해. 간단한 질문이잖아. 나는 죽일 놈이지. 그래서 정말 죽일 거야?

심판이 내려지는 순간까지 볼품없이 갈팡질팡하는 내게, 마침내 천근 같은 입이 열렸다.

"오늘 말고."

그리곤 꾹 쥔 주먹을 실험대에 콩, 두드리니, 얼어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는 기적이 일어났다. 정말 신기한 재주로군. 나는 감사했다. 아무래도 나를 봐준 것 같은 생각이. 여태까지의 실망과 배신을 만회할 기회일까. 정말 꿈일지도 몰라. 존은 가볍게 덧붙였다.

"춤을 얼마나 잘 가르쳐 주는지 보겠어."

존이 돌아가자마자 노트북을 열고 검색창에 자판을 두들겼다.

결혼 춤추는 법.

현실이로군.

 

 


<끝>


개를 위한 존 왓슨 편에서 나왔던 죽음 타로카드
마인드 팰리스 속 셜록이 이런 옷 입고 있었다는 설정..(사진은 튜더스의 크롬웰)


203 그림형제 동화책에 실린 충직한 존

피아노곡들+후반부에 미친느낌의 음악들입니다 리처드 치즈의 peaple equals shit은 꼭 들어보세요 셜록+모리아티한테 너무 어울림니다ㅋㅋ이편 쓰면서 플레이리스트 만든게 거의 네다섯시간짜리가 되었는데 고르고 골랐습니다. 아래는 역시 후기. 이번편부터 백원짜리 후기를 오백원으로 올렸고 2부의 글들의 후기도 오백원으로 올렸습니다. 마카롱1부의 글들도 후기를 오백원으로 올릴 예정이니 별 내용은 없지만 신경쓰이시면 미리 뚫어놓으십시요.! 제가 달다구리로 당을 채우는데 씁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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