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블로썸에서 판매한 단편집 <12월>에 수록된 ‘동백꽃’을 모티브로 한 <윤, 영>이란 제목이었던 단편입니다.

당시 소장본 가격과 글자 수 대비, 추가 분량까지 고려하여 가격 책정했습니다.

上편은 인쇄본과 거의 같고 下편은 만자 가량 추가 분량 있으니, 혹 단편집 구매하신 분들 중 추가 분량을 보고 싶으시다면 下편만 구매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볕에는 이름이 없다






영은 무료했다. 청국에 온 뒤 한 일이라곤 하릴없이 궁궐을 거닐거나 오지 않을 황제를 위한 채비가 전부였다. 하지만 영은 매일 꽃을 띄운 물에 몸을 담근 후 향유를 발라 살결을 부드럽게 하고, 종일 머리를 빗질하는 그런 종류의 ‘부지런함’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터였다. 청국의 여인들이 덕목으로 삼는 베 짜기나 수놓기 또한 성미에 맞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매국에선 모두가 무기를 다룰 줄 알았다. 계집이라 하여 예외는 없었다. 매국 황가의 막내로 태어난 영은 수저를 쥐기도 전에 활을 쥐었고, 여덟의 나이에 나는 솔개를 잡았다. 열여섯 무렵, 물소 떼 사냥에서 작은 오라비를 제치고 가장 많은 여섯 마리를 죽여 황제에게 바친 이후 영은 언제나 매국 최고의 활잡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영은 활은 고사하고 좁은 선화궁 밖을 나서지도 못했다. 누굴 탓할 일은 못 되었다. 따지자면 스스로 이곳에 차출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굳이 탓을 한다면 그 끝은 결국 영 자신을 향할 뿐이었다.

영이 반년째 머무는 선화궁은 본디 공식적인 첩지를 받지 못한 황제의 여인들이 임시로 머무는 거처였다. 하지만 현 황제 우황에게 선화궁의 용도란 제 여인들을 유폐하는 냉궁이나 다름없었다. 현재 선화궁에 있는 여인의 수는 넷이나 되었다. 영을 제외한다면 하나는 녹상국에서 온 영과 같은 공녀였고, 둘은 귀족의 여식, 나머지 하나는 황제와 하룻밤을 보냈으나 신분이 낮은 나인이었다. 각자의 배경과 바쳐진 목적은 달랐으나 이곳에선 예외 없이 ‘이름 없는 이’란 뜻으로 무명이라 지칭되는 이들이었다.

영 또한 다르지 않았다. 청의 궁궐에서 이름이란 힘이었다. 이름을 수여 받지 못한 이들은 모두 하찮았고, 황제가 내린 이름을 가진 자는 더욱 권력에 가까웠다. 그리 생각한다면 이름조차 없는 영은 무엇인가. 시집오는 날조차 황제를 알현하지 못한 평야의 공주. 선화궁에 유예된 야만인의 장식품. 무명. 늘어놓으면 하찮기 짝이 없는 명칭뿐이었다.

처음 당도한 청국은 나비가 날고 꽃이 피던 하기였다.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샛노란 색 탱자가 영을 맞이했고, 청의 사람들은 매국에서 온 영을 두고 이런 고운 것은 처음 볼 거라 으스대었다.

하지만 탱자 따윈 좋은 빛깔이 고작일 뿐, 맛은 매국의 특산물인 무화과에는 발끝도 미치지 못했다. 밤말도 낮말도 모두가 나르는 황궁 안에서 그런 말을 내어둘 만큼 아둔하지 못한 영은, 쌓인 탱자 산을 볼 때마다 자신을 위해 매년 어매가 직접 담그는 무화과 절임 단지를 그려볼 뿐이었다. 둥그스름한 곡선의 단지는 생각만으로 가슴 어데가 두둑했다. 혀가 아플 만큼 달고 향기로운 것은 살아 다시 먹어볼 일 없을 많은 것 중 하나일 터였다.

사계절을 가진 매국과 달리 청은 하기와 동기 두 가지 절기만을 가진 나라였다. 일 년의 반은 극락과 다름없이 따뜻한 날을 유지했지만, 나머지 반은 춥고 메말랐다. 탱자나무 사이를 거닐며 입궁하던 날로부터 반년이 흘러 청국의 첫 동기를 겪고 있는 영은, 눈발과 불어 닥치는 칼바람으로 뒤덮인 이 풍경이야말로 청국의 본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디로 보아도 매국의 겨울과는 좀 달랐다.

열린 창 사이로 어른대는 눈발을 바라보던 영은 둔해질 만큼 껴입은 옷의 가장 바깥 겉옷을 벗었다. 마침 들어오던 나인 연홍이 쪼르르 달려와 소리를 높였다.

“공주님. 이러다 병나십니다. 청국의 바람은 골까지 파고든다 하는데, 창도 열어두시고.”

“답답증이 나려 한다. 좀 걸어야겠어.”

“이 날씨에 나가시는 건 안 될 일입니다. 대신 빗질을 해드릴까요?”

“나를 짐승 다루듯 하는구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어요.”

“네 말이 꼭 그거지 않니.”

시비의 뜻을 두고 묻는 말에 연홍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나 매국에서 청국까지 동행한 유일한 아이였다. 저를 지키겠다 따라온 연홍은 단순한 시종이 아닌 영의 동무이기도 했다.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자꾸만 성질을 곤두세우고 마는 건 마음속 불안을 갈무리하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홍은 최근 들어 곧잘인 영의 짜증을 별 것 아닌 양 넘겨버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는 찻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랐다.

“소인이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아십니까? 잘 보살펴 드리겠다 한비 마마께 약조하였는데 공주님은 점점 여위어 가시고, 자꾸 병 날 일만 도모하시잖아요.”

단번에 눈이 밝아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생기가 넘치고 쾌활했던 영은 청국에 오며 윤기를 잃었다. 녹이 슨 검처럼 가만히 낡아가는 영의 모습을 보는 것은 연홍에게도 벌과 다르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연홍은 가끔 영을 향해 허투루 맘을 먹고 죽어버리려 애쓰는 것 아닌가 하는 눈초리를 던지곤 했는데, 영으로선 진정 억울한 의심이 아닐 수 없었다. 영은 이곳에서 어지간하여 오래, 되도록 잘 살아남고 싶었다.

연홍이 데워온 차를 홀짝이던 영은 그새 식어버린 잔을 내려놓았다.

“어매는 아이를 낳으라 당부하였는데, 나는 지아비 얼굴도 모른단다. 병이 나는 건 그 때문이지. 내가 병나려 애쓰는 것이 아니구.”

작은 나라기는 하나 영 또한 황족이었다. 청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는 빤했다.

청의 궁궐에는 전장보다 더 많은 피가 흘렀다. 열일곱에 황좌에 오른 우황는 열두 형제를 모조리 죽인, 인두겁을 쓴 귀신이라는 소문으로 유명했다. 우황이 즉위한 뒤 청국은 신하국에게 도리와 약조를 더욱 강조했고, 그것을 명분으로 하여 청국에 바쳐지는 공물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백성들은 그의 잔인한 성미와 여지없는 법치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차별과 불합리를 없애고 국고를 넉넉히 한단 이유로 성군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매국에 있을 적부터 지금까지 우황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는 누구의 입을 통하느냐에 따라 영의 안에서 무수히 많은 모습으로 둔갑하곤 했다.

우황은 잔인했고, 원리 원칙을 중히 여겼고, 여색을 멀리했다. 정확히는 총애받는 여인의 외척을 경계 한다는 편이 맞을 터였다. 오죽하면 즉위한 지 오 년이 넘도록 황후조차 들이지 않겠는가. 나라 안의 권력을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피 마를 날이 없는 자리였다. 외국에서 팔려온 약소국의 공주 따위야 자신이 황제라 한들,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잊어버리는 것이 편하겠지.

그런 황제를 저에게 돌아 앉혀 마음을 두게 해야 한다니. 활을 쏘거나 잡은 짐승을 해체하는 것은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보지 못한 이를 매혹하는 법 따윈 배운 적도, 안다 한들 해낼 자신도 없는 영은 심란한 낯짝이 되어 밖을 보았다.

창 안으로 밀려드는 눈발이 거칠었다. 오래 활을 잡은 탓에 굳은살이 벤 엄지 마디께를 문질러보던 영은 눈을 감았다. 누구는 대단히 고운 미남이라 하고, 누구는 사내다운 모양새의 야인이라 하고, 또 어딘가에선 말할 길 없는 추남이라 하는 황제의 얼굴을 그려보는 것도 잠시였다.

영은 창밖으로 머리를 냈다. 연홍이 말릴 새도 없는 순식간이었다. 고개를 젖힌 영은 뒤에서 저를 당기는 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혀끝에 닿아 녹아내리는 눈이 짭짤했다.



* * *



선화궁 앞뜰은 추위에도 지지 않는 산새 나무로 빼곡했다. 궁을 관리하는 사람이 적으니, 손이 잘 가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꾸며진 조경이었다.

며칠 내내 내리던 눈이 드물게 그쳤다. 그 틈을 타 밖으로 나온 영은 연홍의 성화로 인해 뒤집어쓰고 있던 장막을 벗었다.

“눈이 그친 게지, 겨울이 간 게 아닙니다.”

뾰족한 모양의 잎을 만지작대자마자 순서처럼 뒤따르는 잔소리가 번거로웠다. 그에 식은 손을 연홍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뗀다. 앗 차거! 소리를 지르는 연홍을 보며 영은 크게 웃어젖혔다.

“공주님은 제가 괴로운 게 좋으시지요?”

“그럴 리가 있니.”

“아이참. 또 어딜 가시는데요. 금방 들어가신다고 하셔 놓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가로지르던 새가 별안간 울어댄다. 제 자유를 뽐내는 듯 우렁찬 새소리를 들은 영은 빈손을 들어 시위를 겨누는 모양을 했다. 하지만 새는 유유히 선화궁 하늘을 지나쳐 날아갈 뿐이다. 영은 시위를 겨누고도 놓쳐버린 첫 날짐승을 허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활을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제 짐에 숨겨 들이면 되었을 텐데.”

눈치를 보며 중얼거리는 연홍의 말뜻을 모르진 않았다. 영은 활을 만질 때야말로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말을 타며 시위를 당길 때, 영의 눈, 목소리, 미소에선 생이 흘러넘쳤다. 그런 맥락이라면, 연홍의 이야기가 맞았다. 활이 있었다면 확실히 이 생활을 버티는 것이 조금 나았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러다 들키면 사지가 찢겨 죽었을걸. 궁궐에 무기를 들이는 건 윤허가 필요한 일이니.”

사이가 좋지 못한 둘째 오라비는 활을 가져가겠다 떼쓰던 영의 눈앞에서 영의 활을 두 동강 냈었다. 저를 위한 건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다.

“그래도…”

영은 속이 상한 듯 뺨을 씰룩대는 연홍을 모른 체했다.

“두향의 처소에 가서 차를 마시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오련?”

나인의 신분으로 승은을 입고 선화궁에 들어온 두향은 무명 중 그나마 가장 영과 가까운 사이였다. 영은 낮은 신분으로 인해 취급받지 못하는 두향을 불러 상을 같이 받거나, 입지 않는 옷을 나누어 주곤 했다. 영은 조용하고 보드라운 성품의 두향이 싫지 않았다. 친우라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거리를 두고 말을 섞으면 걸리는 데 없이 편안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그 나름의 좋은 점이었다.

“공주님은 무엇하시구요?”

“얼른.”

째려보는 눈길에 연홍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대신 입술을 댓 발 내민 채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연홍의 등을 끈질기게 바라보던 영은 늘 돌던 산책길이 아닌 처소 옆으로 난 작은 샛길로 발을 옮겼다. 그 샛길을 따라 걸어가면 쓰지 않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자그만 각閣으로 연결되었다. 영은 종종 연홍의 눈길을 피해 이곳에 오곤 했다.


처음 이 장소를 발견한 건 석 달 전이었다. 자그마한 크기에 멋대로 울창하게 자라난 풀이며 나무가 북슬대었고, 대문에 쓰인 윤원각蝡猿閣이라는 글자 또한 머물던 이를 짐작하기엔 어려운 의미였다. 황궁 내에 이리 장소를 내줄 정도면서 저리 기괴한 뜻을 던질 존재가 무엇일까 궁금증도 돋았으나 기실, 영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저 한산하다 하여 이곳을 찾는 건 아니었다. 황궁 내에선 선화궁 만큼 사람이 드물고 스산한 곳을 찾기도 힘들었으므로. 처음 길을 잘못 들어 이곳에 왔을 때는 참 이상한 곳이다 하여 돌아서려 했지만, 호기심에 닫힌 전각 안에 들어가 보고는 이것이 청국에 와 처음 맞는 행운임을 알게 되었다. 손때가 탄 책으로 빼곡한 내부에, 영은 이곳에 처음 오던 날 반나절이나 앉아 서책을 읽었었다.

두향에게 전해 듣길, 청국에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은 대개 사내에게만 허용된 일이었다. 그러나 드러내고 서책을 구하거나, 학문을 탐구하기도 어려운 실정에 윤원각을 발견한 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활을 타고난 것만치는 못했지만 영은 학문에도 흥미가 있었다. 열흘씩 떠나는 사냥에선 무척이나 도움이 되는 천문학이나, 건축, 상법 등과 밀접한 수학과 같은 학문을 들여다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성인식을 치른 해에는 궁 내 실학자들과도 그럴듯한 논쟁을 벌일 수준까지 되었으니 단순히 배우길 좋아한다는, 그 이상의 소질이 있기도 하였다. 타고난 정치꾼인 큰 오라비는 정말의 나랏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실학자들과 몰려다니는 영을 나무라곤 했다. 형제 중 가장 머리가 좋은 아이가 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워두지 않냐고 혀를 차던 끝에, ‘그래, 정치 따윈 모르는 게 좋은 거지.’라는 말로 영을 용인해주곤 했지마는 말이다.

그게 겨우 재작년의 일이다. 매국에서의 일상은 전생과 같이 흐릿하다. 영은 우울한 생각을 그만두려 애썼다. 우울하다 하여 누구 하나 달래주는 이 없는 타국 아닌가. 괜히 허공으로 입김을 불어본 영은 바스락한 잎을 밟았다.

내각 건물 바로 앞, 색을 잃은 정원에서 유일하게 색을 띠고 있는 나무의 정체는 동백이었다. 매국에서도 북쪽 지방으로 올라가면 종종 볼 수 있는 동백은 청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나무 중 하나였다. 일 년의 반이 겨울인 곳에서, 추운 날에 꽃을 피우는 나무란 특별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새하얗게 바란 세계에 우뚝 선 붉게 맺힌 꽃을 보아하니, 과연 그러했다. 심은 지 얼마나 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나무의 몸통을 문질러본 영은 이내 내각 안으로 들어섰다.

하기夏期에는 그 자리에 앉아 해치우곤 했지만, 날이 추워지며 방을 덥히지 않는 이곳에서 서책을 읽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읽고 싶은 서책 서너 권을 챙겨와 감금 아닌 감금인 날 동안 처소에서 읽는 일은 요즘 영의 유일한 낙이었다. 다만 눈이 오는 기간이 점점 길어졌고, 영의 팔은 겨우 두 개라 가지고 갈 수 있는 서책의 양 또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일의 유일한 골치라면 골치였지. 영은 아직 읽지 못한 서책으로 빼곡한 책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번에 왔을 때 챙겨 가자 마음먹었던 높은 곳의 책을 꺼내기 위해 장복을 벗어둔 영은 소매를 걷고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순간, 부서져 틀만 있는 창을 통해 누군가 자신을 보는 기척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손 가득 서책을 쥔 탓에 자세를 쉬이 바꾸지 못하고 어, 어, 하는 소리를 내다 결국 뒤로 넘어진 영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우수수 쏟아진 서책에 맞은 손등이 아팠다. 신음을 내며 일어선 영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런 영의 허리를 단박에 잡아챈 것은 흰 손이다.

영은 저를 붙잡은 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을 바로 세운 여자는 비죽 웃었다. 말간 낯이 아름다웠다. 세상천지 영이 본 어떤 무엇보다도 그랬다.

저보다 한마디나 커 보이는 여자는 붙잡은 몸을 가까이 당겨 세운다. 그때. 허리께까지 내려온 여자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영의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궁인의 복장은 아니었지만,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옷의 질감과 땋거나 말아 올려 뽐내는 대신 자유롭게 풀어둔 머리칼은 그의 신분이 높지 않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영은 망설이다 말을 놓는 대신 정중한 어투로 입을 뗐다.

“도와주어 고맙습니다.”

“도리를 했습니다.”

“나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정체를 묻는 말에 영에게서 걸음을 물린 여자는 답을 고르는 듯 말이 없다, 중얼거렸다. “불리우는 이름은 많지마는.”

“윤원각 귀신이란 별칭이 제일 오래되었지요.”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뻑이는 영을 향해 여자는 다시금 빙그레 웃었다. 꽃다발을 문 것처럼 환한 미소. 멍하니 얼을 빼고 있던 영은 문득 저 이의 정체를 유추했다.

“혹, 무명 중 설가의 여식이오?”

저리 밝은 외모의 여인이 황궁 안에 있음은 대부분 그리 연결되곤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다른 이들의 낯은 지나가다 한두 번이라도 보았던 듯싶은데, 선화궁에 가장 오래 기거했다는 설가의 여식을 영은 아직 보지 못한 참이다.

물음을 내어두고 보니 설가의 여식이라면 저런 복장도 이해가 될 만했다. 몇 대 전 억울하게 모함당하여 반역에 얽힌 설가는 우황이 즉위에 힘을 보탠 대가로 주가와 함께 여식 하나를 황제에게 시집보내고 벼슬길이 뚫리게 된 변방 귀족 가문이었다. 주가의 여식은 그 입김 때문인지 선화궁에 들어온 지 석 달이 안 되어 우황의 하나뿐인 비가 되었으나, 매한가지로 독수공방을 면치 못하는 신세였다. 물론 그조차 없이 영과 같이 선화궁에 사는 설가의 여식은 그를 비웃을 처지도 못 됐지만.

아무튼가 청국에 와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로는, 누구를 붙잡고 설가에 관해 물으면, 백이면 백 청빈하고 검소한 귀족 가문이라 대답할 만큼 올바름의 대명사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입궁한 후 안 그래도 약한 몸을 마음의 병으로 물들여버린 설가의 여식은, 처소 밖으론 거의 나서지 않고 첩지를 받을 거란 기대도 버린 채 비구니가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공공연한 소문이 돌았다.

여자는 골똘하던 것도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영은 그제야 조금 느슨한 표정이 되어 웃는 듯 마는 듯하였다. 건너 듣던 그이의 소문이 싫지 않았던 데다, 직접 마주하니 누구를 해코지할 인물은 아닐 거란 짐작이 들어서다. 영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은 무명이고, 전엔 이영이라 불리었습니다.”

“매국의 공주시군요.”

“부질없지요.”

저도 모르게 쓸쓸한 말을 내어둔 영은 여자의 인상을 살피며 느지막이 덧붙였다. “여기는 청이 아닙니까.” 여자는 잠시 말이 없다 물었다.

“공주께선 서책을 보러 오셨습니까?”

쏟아진 서책에 맞아 부어오른 손등을 저도 모르게 등 뒤로 숨긴 영은 머뭇대며 말했다.

“청국에서는 여인이 학문에 관심을 두는 걸 꺼린단 얘기를 들어서…선화궁에 있는 여인에게 필요한 것을, 하물며 서책을 조달해줄 리도 없으니까요. 좋은 곳을 발견했다 생각하였습니다.”

그 말에 여자는 영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근 몇 년간 이곳에 발길을 하는 이는 저뿐입니다. 필요하다면 오셔도 괜찮습니다.”

여자는 영이 쥐고 있다 떨어트린 서책을 주워들며 말했다.

“이것보단 ‘술어’가 읽기에 나을 것입니다.”

영은 시선을 떨구었다. 굳은살이 배인 손은 보드라운 비단 치맛단을 자꾸만 쥐었다 놓았다. 거북한 마음은 아닌데도 바짝 힘이 들어가는 어깨를 어쩌지 못한다. 그런 영을 뒤로하고 나가려던 여자는, 황급히 입을 여는 목소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이름이 어찌 되오?”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이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어찌 그리 경계심이 없는지, 무명에게 이름을 묻는 것이 어떤 의미로 곡해될 줄 아는지, 그것을 묻고 싶은 듯. 하지만 대화를 잇는 대신, 쏟아지는 머리칼을 넘기며 문턱을 나서는 여자는 대답했다.

“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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