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나 먼저 올라간다.”

 

차에 올라탄 뒤부터 계속 이어지던 정적이 드디어 깨졌다. 출근시간이 한 시간만 더 남았어도 이 차를 타고 오는 일은 없었을 거다. 무려 짝사랑 중단 결심을 하고 정재현과 같이 있기가 죽기보다 싫었지만, 당장 출근을 해야 하니 그냥 참았다. 그 대신 묵언수행을 시작했다. 정재현 집에서 나와 차를 타고 여기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무시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재현을 밀어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목을 감싸고 있는 니트가 갑갑했다.

 

“야. 김도영.”

“이거 놔.”

 

시동을 끈 정재현이 나를 붙잡았다. 손목을 감싸는 손이 따뜻했다. 신경질적으로 쳐냈지만 바로 내릴 수가 없었다. 슬금슬금 본능이 튀어나오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이성의 끈을 붙잡고 꼿꼿이 앞만 봤다. 제발 얼굴만은 보지 말자. 0.1초 만에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너지기 딱 좋은 얼굴을 가진 정재현이었다.

 

“너 아까부터 왜 그러는데.”

“내가 뭘.”

“키스마크때메 그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내가 지금 고작 그런 걸로 화내는 쪼잔한 놈으로 보인다는 건가. 순간 욱해서 고개를 돌렸다가 빛나는 용안에 급하게 시야를 차단했다. 저 새끼는 왜 이 상황에서도 잘생기고 지랄이야. 꾹 감은 눈은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나서야 뜰 수 있었다.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놓고 그 이유를 나한테 묻는다니. 그대로 차문을 열고 다리를 뻗었다. 지하주차장의 더운 공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갑갑함에 목에 달라붙은 옷을 늘어뜨렸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차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여전히 차 안에 앉아있을 정재현이 벌써부터 보고 싶었다.

 


/

 


아무 맛도 안 나는 우동을 질겅질겅 씹었다. 음식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루 종일 정재현 얼굴을 못 봤더니 상사병이 걸린 사람 마냥 힘이 쭉 빠졌다. 너무 필사적으로 정재현을 피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매장을 누비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처량한 스토리다.

 

“형. 그거 간장이에요.”

 

이해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렸다. 검은 액체가 찰랑이는 통을 들고 컵에 들이 붓고 있었다. 급하게 간장을 내려놓았다. 씨발 뭐 되는 게 없어.

 

“뭔데요.”

“뭐가.”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넋이 나갔냐고.”

 

다시 정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아침에는 개 같은 짝사랑 관둘 거라고 굳게 다짐했는데 말이지. 어떻게 이 다짐이 반나절도 안 갈 수가 있냔 말이다. 보고 싶은 얼굴에 목이 막혔다. 아무 생각 없이 앞에 놓인 컵을 집어 들었다. 나를 한심하게 보던 이해찬이 손에 들린 컵을 가로챘다. 이거 간장이라니까. 적당히 좀 하라는 듯 삐딱한 목소리가 나를 다그쳤다. 한참이나 어린놈한테 이런 취급이나 당하고. 인생 참 씨발스럽다.

 

“말 안 할 거예요?”

 

멍하니 기름만 둥둥 떠 있는 우동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우리 밥시간 삼십분밖에 안 남았어요. 팔짱을 낀 이해찬이 나를 보챘다. 저 얼굴을 보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새싹한테 기대고 싶어지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해찬아. 잘 들어봐. 이거 내 얘기는 아니고 내 친구 얘긴데.”

 

아주 뻔한 레파토리였다. 믿는 건지 마는 건지, 아무튼 내 얘기를 듣는 이해찬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술술 다 불어버렸다. 말을 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 싶은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인스타도 아무도 친구 안 먹었는데 글쎄 나…. 가 아니라 내 친구만 받아줬대.”

“오. 그래요.”

 

얘기를 하면 할수록 이해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툭 건드리면 곧 웃음이 터질 것처럼 콧구멍도 벌렁거렸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지만 내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몇 입 먹지도 못한 우동이 퉁퉁 불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상대방 태도가 애매해서 속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

“어어. 그렇지.”

“좋아하냐고 물으니까 대답 없이 그냥 뽀뽀만 했고.”

“어. 그거 완전 범죄 아니냐?”

 

혼자만 앓고 있던 걸 털어 놓자 속이 다 시원했다. 얘기를 할수록 열불이 나서 언성이 자꾸만 높아졌다. 얼굴에 열까지 오르는 것 같아서 옷을 잡고 펄럭였다. 망할 목폴라. 더워 죽을 것만 같다. 부산스러운 나의 행동을 이해찬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표정이 심히 진지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알겠어요. 한참 뒤에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뭐야. 꼴랑 알겠어요? 나름 고민 상담이랍시고 입을 털었는데 반응이 아주 똥이었다. 아무리 내가 똥해찬이라고 욕을 했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대단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싱거울 수가 있냐고. 어느새 내게서 관심을 싹 거둔 이해찬이 폰을 만지작거렸다.

 

“야. 그게 다야?”

 

이해찬이 뭘 어쩔 수 있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미련이 남았다. 집요하게 시선을 보냈다. 상대가 간이라도 보고 있나보죠, 뭐. 이해찬이 여전히 폰에 시선을 둔 채 성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또 욱했다. 이 상황에 나를 가지고 간을 본다고? 라고 말했다간 좆될 걸 알아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내 친구가 무슨 국이냐? 간을 왜 봐.”

“그거야 나도 모르죠.”

 

방금까지 간을 보니 마니 개소리를 해놓고 나 몰라라 하는 태도가 아주 재수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무성의함에 언성이 높아졌다.

 

“뒤질래? 이럴 거면 왜 얘기하라고 보챘어.”

“앞으로의 내 커피를 위한 투자?”

“뭔 개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대답이 없는 이해찬은 실실 쪼개기만 했다. 딱 봐도 그냥 나를 놀리는 거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났다. 내가 저 어린놈한테 뭘 기대한 거야. 거하게 현타가 오려고 했다. 여전히 들뜬 얼굴을 한 이해찬이 다리를 세웠다.

 

“뭐 암튼 둘이 잘 될 것 같네.”

“……그래?”

 

희망찬 대답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겉으론 덤덤한 척을 했지만 솔직한 반응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이해찬 말대로 된다는 법도 없는데도 그랬다. 그만큼 나는 정재현이 절실하다. 생각해보니 존나 비참한 것 같기도 하네. 다시 웃음이 쏙 들어갔다. 지금의 나는 감정소비를 하다가 말라비틀어져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사인은 뭐…. 정재현 세 글자면 충분했다.

 



29

 



주말의 백화점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 매장도 예외는 아니다. 정신없이 창고에서 옷을 빼냈고 매장에 채워 넣었다. 바쁜 날에는 짜여있는 스케줄대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창고를 뒤적거리다가도 매장으로 뛰쳐나가고 레이아웃을 바꾸다가도 밀려있는 계산을 하러 갔다. 바빠서 좋은 점은 딱 하나다. 정재현 생각을 덜하게 된다는 거. 어김없이 장바구니를 든 손님들로 가득 찬 계산대로 뛰어갔다. 이민형이 거의 울면서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이거 안 입어. 환불해줘.”

 

난데없이 날아오는 반말에 욱했다. 그럼에도 인상 한 번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좆같은 서비스직을 맡은 일개미니까. 얼굴이 빨갛게 익어있는 아저씨의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얼마 안 가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끔 이렇게 술 취한 인간이 매장에 올 때가 있는데 조용히 넘어 간 적이 없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결제하셨던 카드랑 영수증 좀 주시겠어요?”

“그딴 거 없어. 빨리 환불이나 해.”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씨발. 익숙한 참을 인을 되뇌었다. 도를 닦는 선비처럼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자 작게 심호흡을 했다. 억지로 웃으려니 얼굴에 경련이 올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영수증이랑 카드가 없으시면 환불이 안 되거든요.”

“뭐? 그딴 게 어딨어?”

“게다가 이 옷은 택도 떨어져서….”

“이런 씨발. 그냥 하라면 할 것이지 말이 많아! 여기 사장 어딨어? 직원 교육이 아주 개 같네.”

 

정말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내가 안 그래도 요즘 힘들어 죽겠는데 아저씨한테 욕까지 먹어야겠어요? 정신줄을 놓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현실이 너무 서러웠다. 옆에서 계산을 하던 손님들도 우리 쪽을 힐끔거렸다. 입을 꾹 닫고 있자 더욱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질을 하며 사장 불러오라는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늘 있는 진상이지만 늘 기분이 더러웠다. 그럴 때마다 똥 밟았다, 생각하고 말았는데 오늘은 그게 안 됐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이상하게 눈물이 고였다. 김도영 진짜 요즘 힘들긴 힘들구나. 눈앞이 흐릿했다.

 

“들어가 있어.”

 

그때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 나만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였다. 딱히 특별한 말이 아님에도 나를 위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팔을 붙잡은 손이 나를 뒤로 끌었다. 그렇게 나는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정재현이 원래 이렇게 듬직했던가. 시야를 가득 채우는 너른 등판에 또 울컥했다.

 

“저한테 말씀하세요.”

 

방금 전 나에게 속삭이던 목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차가운 목소리였다. 정재현이 내 편을 들어준다. 그 사실이 너무 좋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급하게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나이 처먹고 눈물 흘리는 걸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개 같은 진상이 아닌 정재현 때문이라는 건 정말 들키기가 싫었다. 짝사랑 접는다는 거 취소. 아무래도 정재현 안 좋아하는 법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는 듯 했다.

 



30

 



길고 긴 하루가 끝났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알바생들이 순식간에 매장을 빠져나갔다. 내게 오늘 고생했다며 위로를 하던 이씨 형제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주변이 금세 조용해졌다. 힘이 빠져 몸이 축 쳐졌다. 명찰을 사물함에 넣는 일조차도 버겁게 느껴졌다. 하기야 어제는 미친 듯이 떡치고, 오늘은 미친 진상 놈 때문에 울기나 하고. 어떻게 보면 영혼이 빨려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진짜 집에 일찍 가서 자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종례 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정재현이 신경 쓰였다. 아까 그 일이 있고 난 후로도 계속 바빠서 아직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발걸음을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가서 딱히 할 말도 없고 괜히 기분 안 좋은 일만 생길까봐 덜컥 겁이 났다. 오늘같이 하루 일진이 거지같은 날에 정재현에게 차이기까지 하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존나 우울해서 머리가 아파왔다. 그냥 집에 가자. 고개를 푹 숙이고 발을 내딛었다.

 

“어디 가.”

 

뒤로 정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리에 우뚝 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만 꼴딱 삼켰다. 지금 나한테 한 말인가?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나 다 끝나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나 왜 숨 참고 있었지. 방금 전에 정재현이 한 말 때문에 머리가 어질했다. 이거 집에 같이 가자는 말이잖아.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복잡한 머리를 굴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이내 사무실 안에 불이 꺼지고 정재현이 나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일어나. 바래다줄게.”

 

정재현이 먼저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쟤는 저런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곧 터질 것처럼 뛰어대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았다. 나 이러다가 심장마비로 곧 죽는 건 아닐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휴게실을 나섰다. 저 멀리 엘리베이터 앞에 정재현이 서있었다.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 쭈뼛대며 정재현 옆으로 섰다. 엘리베이터 역시 느린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괜찮아? 아까.”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자꾸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어어. 괜찮지 그럼.”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굳어버려서 삐걱거리는 소리도 날 기세였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는 차례대로 몸을 실었다. 정재현이 아침에 주차해둔 지하 2층 버튼을 눌렀다. 짧은 정적 뒤에 문이 닫힌다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려가는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눈알 굴리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덥지. 애꿎은 목폴라를 잡아 당겼다. 분명 오늘 아침만 해도 나는 정재현에게 화가 나있었는데. 반나절 만에 바뀐 감정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나를 붙잡고 태워다주겠다는 소리를 지껄이니 내가 어떻게 제정신이겠냐고요. 나에 비해 정재현은 덤덤해보였다. 속이 답답했다.

 

“그러고 보니 나 형 집 어딘지도 모르네.”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다는 말이 저거다. 형은 얼어 죽을.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설렜다. 가오 안 살지만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하라고. 정재현에 관련된 일이면 웃음장벽이 존나 낮아지다 못해 없어졌다. 방금도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차갑게 나가야 한다. 차갑게. 그래야 내가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다. 짝사랑만 하면 자기 방어가 만렙이 되었다.

 

“니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당연하다고? 고개를 돌리자 정재현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면서. 어두운 차안에서도 빛나는 잘난 얼굴이었다. 도대체 정재현이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여유로워 보이는 상대와 달리 나 혼자 심각했다. 미간을 한껏 구기고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데. 아까도 갑자기 나 도와주고. 어? 지금은 또 갑자기 집에 데려다 준다지를 않나. 사람 가지고 놀아?”

 

말이 속사포로 나왔다. 애써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정재현 하나 때문에 하루 종일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코스가 아주 좆같아서 아무도 안 탈 거 같은 롤러코스터. 눈앞의 형체가 흐릿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고였나보다. 내가 원래 이렇게 눈물 많은 찌질이었나.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숨기려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속이 시원하긴 한데 앞으로 일어날 일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땅으로 꺼졌으면 좋겠다.

 

“울지 마.”

“나 안 울거든? 웃겨 진짜.”

 

그러면서 코를 훌쩍였다. 김도영. 언제 들어도 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차분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못이기는 척 고개를 돌렸다. 정재현은 여전히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애매하게 굴어서 모르겠다며.”

“……뭐?”

“그래서 확실히 하려고 이러는 건데.”

 

어째 대화가 갈수록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정재현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언제 애매하게 굴었다는 얘기를…….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대화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나는 너 간 본 적 없다고. 간은 지금 니가 보고 있잖아.”

 

입이 벌어졌다. 너무 놀라서 다물 생각도 못했다. 낮에 이해찬이랑 나눈 얘기가 어떻게 정재현 귀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것보다 정재현이 지금 하는 얘기를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더 중요했으니까.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가가 어느새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는 탓에 시선이 흔들렸다.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심장이 좀 많이 아픈데…. 본능이 상황을 가리지 않고 주접을 떨어댔다.

 

“김도영 눈치 없는 건 여전하네.”

“…….”

“넌 매번 내가 먼저 말해야 직성이 풀리지.”

 

내게 고백하던 스무 살의 정재현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너무 잘 안다. 그게 내가 정재현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나는 너 첫 출근했을 때부터 너랑 다시 만나고 싶었어.”

 

하나도 안 믿겼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4년이나 기다렸는데 설마 더 기다려야 돼?”

 

4년이나 기다렸단다. 정재현이 김도영을. 헤어지고 나서 나만 힘들고 나만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대. 정재현 입을 통해서 들은 말인데도 믿기가 힘들었다. 멍하니 눈앞의 잘생긴 얼굴만 바라봤다. 혹시 나 지금 꿈꾸나? 천천히 손을 들어 정재현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볼을 잡아 당겼다. 정재현이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볼을 감쌌다. 꿈은 아니네.

 

“너 돌았냐? 갑자기 왜 꼬집어.”

“그냥. 꿈인가 싶어서.”

“보통 그럴 땐 자기 몸 꼬집는 게 정상이거든.”

 

그런가.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꿈이 아닌 걸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존나 아프다며 앓는 소리를 내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정재현이 김도영을 좋아한다.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줄 알았는데 상대방도 그랬단다. 아무리 웃음을 참으려 해도 그게 안 됐다. 너무 좋아서 고개를 파묻고 실실 웃었다. 그런 내가 어이가 없는지 정재현이 나를 따라 실소를 터트렸다.

 

“재현아.”

 

재회 이후 처음으로 정재현을 다정하게 불렀다. 이름을 부르면서도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입이 닳도록 부른 이름이었는데. 별 다른 대답 없이 정재현이 나와 눈을 맞췄다. 우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흘렀다. 속이 간질거렸다.

 

“나랑 약속해. 다시는 나 안 버린다고.”

 

정재현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아주 짧았던 좋은 분위기가 금세 어긋났다.

 

“너 말이 좀 이상하다.”

“뭐가.”

“내가 언제 너를 버렸는데. 헤어지자고 잠수 탄 건 너잖아.”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누가 헤어지자는 한 마디에 진짜 헤어져? 그건 그냥 내가 그만큼 화가 났으니까 알아달라는 신호였다. 그러니까 정재현은 나를 붙잡았어야 하는 게 맞는 거다. 화살을 나한테 돌리고 있는 꼴을 보자니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나는 것 같았는데 다시 기분이 더러워졌다. 씨발 롤러코스터도 이것보단 낫겠다.

 

“너 그 뒤로 연락 한 번 없었잖아. 그게 버린 거지.”

“번호 바로 바꾼 게 누군데.”

“내 자취방은 그대로였거든.”

“집도 옮겼을지 누가 알아.”

 

오천 퍼센트 비꼬는 말에 뚜껑이 열릴 것 같았다. 그냥 알겠다, 미안하다. 이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시작도 전에 삐걱거리는 게 우리 사이였다. 내 최대 약점인 잘생긴 얼굴이 단번에 재수 없는 낯짝으로 변했다. 뻔뻔한 태도에 주먹이 절로 부들거렸다. 저 개새끼.

 

“됐고 주소나 불러.”

 

고개를 돌린 정재현이 시동을 걸었다. 주소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걸 타고 가느니 그냥 집에 안 가고 만다. 정재현을 흘겨보다가 몸을 돌렸다. 차에서 내리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욱하려는 걸 겨우 참고 잠금 장치를 풀었다. 물론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잠기는 탓에 결국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야씨! 죽을래?”

“성질 그만 부리고 똑바로 앉아.”

 

정재현이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진 거리에 얼른 몸을 뒤로했다. 훅 끼치는 정재현 향에 또 심장이 빨리 뛰었다. 손수 내 안전벨트까지 매준 정재현이 기어를 바꿨다. 후진하는 모습도 잘생겼네. 어느새 화를 가라앉히고 잘난 얼굴을 감상 중인 나였다. 내가 생각해도 훅훅 바뀌는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분명 누가 본다면 또라이라며 손가락을 빙빙 돌릴 게 뻔했다.

 

“빨리 주소 불러.”

“참나. 남의 집 주소에 되게 집착하네.”

 

그러면서도 네비에 주소를 친히 찍어줬다. 차가 빠르게 주차장을 벗어났다.

 

“우리 집에서 가깝네.”

“그래서 뭐 불만이야?”

 

마음은 안 그러면서 자꾸 말이 삐뚤게 나왔다. 물론 내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정재현도 알 거다. 사귈 때도 늘 이랬으니까. 우리가 떨어져있었던 4년이라는 시간이 긴 만큼, 우리가 만났던 4년이라는 시간도 길었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거의 없을 정도니까.

 

“자주 볼 수 있어서 좋다고.”

“…….”

“아예 같은 동네가 아니어서 아쉽기도 하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무슨 저런 얘길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당황한 걸 들키기 싫어서 고개를 아예 반대쪽으로 돌렸다. 저번 주만 해도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던 벚꽃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차 안은 정적이 이어졌고,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익숙한 길을 지나고 얼마 안 가 자취방 앞에 멈춰 섰다. 무슨 말을 하면서 내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아까는 욱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건 너무 오글거렸다. 툭하면 다퉜던 기억은 많지만 사과를 했던 기억은 글쎄…. 솔직히 없다. 굳이 미안하다는 말없이도 잘만 물고 빨았으니까.

 

“여기야?”

 

시동을 끈 정재현이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근데 시동은 왜 끄는 건데. 나만 내리면 금방 다시 출발해야할 차였다.

 

“너 근데 시동은 왜 꺼.”

“들어가려고.”

 

너무 당당해서 누가 보면 정재현 집인 줄 알았을 거다. 물론 그것보다 문제인 건 개판 오 분 전…. 아니 그냥 개판인 내 자취방이었다. 귀신도 놀라서 도망갈 것 같은 내 방을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방금 다시 사귀기 시작한 인간한테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정재현은 오히려 덤덤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싫었다. 그래도 꼴에 오랜만에 하는 연애라고 부끄러움을 느끼나보다, 나도.

 

“안 돼. 오늘은 그냥 가.”

“왜 안 되는데.”

“몰라. 암튼 안 돼.”

“세컨이라도 숨겨놨나 봐.”

 

그 말에 냅다 소리를 질렀다. 무슨 개소리를 해도 이딴 끔찍한 소리를 해. 씩씩거리며 정재현을 흘겼다. 좀 좋게 집에 보내주면 어디 덧나는 것도 아니면서 꼭 사람 신경을 긁는다. 더 있어봤자 또 싸우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작게 한숨을 쉬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나 간다. 짧은 인사를 하곤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철컥. 아까와 같이 문이 다시 잠겼다. 이 새끼가 진짜. 또 욱했다.

 

“너 진짜 죽을….”

 

몸을 돌리자마자 입술에 닿는 감촉에 눈을 크게 떴다. 차분히 감겨있는 정재현의 눈꺼풀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키스라고 하기엔 짧은 입맞춤이었다. ‘촉’하는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여전히 우리의 거리는 한 뼘으로 아슬아슬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정재현의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패였다. 이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세컨이면 뒤진다.”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대딩 때 못 썼던 혼인 신고서를 지금이라도 써야하나 싶은, 그런 실없는 생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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