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스물 셋. 사랑일까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아니, 돌아본 여자의 표정에서 그것을 느낀 수현은 잠깐의 심호흡을 해야했다. 무슨 말이든 해줬으면 좋겠어...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잘 알잖아..내가 얼마나 널 원하는지도 알잖아. 날 구해준 건 너였어. 그 이후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 내 마음, 내 감정..누구보다 넌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잖아. 

넌 너무 솔직해서 때론 니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더라. 망설이고 고민하고 있는 표정까지도 너무 잘 보여서 아플 정도로..수현의 말이 끝났지만 수현을 돌아보던 은채의 표정은 섬세했다. 파르르 떨리던 눈썹,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맑고 아릿한 눈동자...강아지를 닮은 듯한 동그란 얼굴. 그리고 품에 쏙 들어오는 작고 여린 어깨..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환한 미소, 개구쟁이 같은 웃음소리. 통통 튀는 발걸음 소리까지. 꼭 널 만지면 물내음새가 번져올 것 같은 그 미묘한 떨림까지도. 그 모든 떨림과 설레임, 그리고 그리움까지도 어떻게 너를 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픔이 점점 무뎌진 지금도 너만 생각하면 온통 내 가슴은 폐허인 것 같아. 

또, 진정한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니가 처음부터 이유였어. 다른 사람들은 다 겉모습을 사랑하기 바빴는데 정말로 속을 들여다 봐줄 수 있었던 사람, 용기를 내어 내 진정한 참모습까지 다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니가 전부였어. 그래서 내 마음을...오로지 다 줄 수 밖에 없었어. 수현의 말에 은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지 않아.

.....

그렇지 않아. 수현아. 니 옆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틀려. 모든 사람들은 다 널 좋아해. 

누구. 정민이? 제하? 아니면 니 기숙사 멤버들?

.....


정민과 제하의 이야기가 나오자 수현은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는 듯한 자조적인 미소가 흘렀다.


" 맞아, 니 말이 맞아. 제하를 사랑해. 정민이를 사랑해. 하지만 걔들이랑 연애할 순 없는 거 아니니? "


수현답지 않은 농담에 은채는 그제서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저 봄 햇살처럼 투명한 웃음소리. 늘 어둡고 추운 그늘속에 있어도 그 웃음소리가 너무 좋았어. 처음부터 괄괄한 목소리로 하얗고 동그란 손을 내미는데 네가 너무 예뻐서, 온통 양지에 있는 네 모든 게 다 너무 따뜻해 보여서 잡으면 니가 곧 얼음으로 변할 것 같고, 니가 음지로 올 것만 같고..그러는 사이에 또 네가 음지에만 있어서 제하에게도 들키지 않고 나만 봤으면 좋겠고, 제하를 향한 마음이 더 깊을수록, 그애가 내 평생의 진정한 우정이라는 걸 알고 때닫고 느끼고 피부로 다가올수록 널 잃고 싶지도 뺏기고 싶지도 않았어. 

제하는 사랑도 우정도 다 포용하는데 난 둘다 가지고 싶은 이기적인 놈인거야. 나도 내가 이렇게 옹졸한 놈인 줄 몰랐어. 난 제하보다도 못한 놈이야. 걘 내가 가질 수 없는 거, 할 수 없는 걸 다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는데 난 그 어떤 것도 뺏기고 싶지 않은 파렴치하고 치사하고 졸렬한 놈이야. 그래서 걔가 없는 사이에 선점해 보려고 너한테 도둑 고백이나 하고 있고. 수현은 은채를 쳐다보았지만 은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의 말 같은 거 찾지 마..그게 날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알고 있어..? 날 원한다고 말해 주면 안돼..? 그럼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은 기분일 텐데. 그럼 누구보다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놈이 될 텐데. 


그런데 은채야. 니가 자꾸 멀어지는 게 느껴져. 난 자꾸 조급한 놈이 되고, 제하는, 아..제하야..수현의 흔들리는 눈빛 앞에 은채는 더없이 아팠다. 이건 네가 아니야. 넌 불안하고 초조해하고 있어. 지금의 넌 날 순수하게 좋아해서가 아니라 제하한테 뺏길까봐 그냥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이야. 그냥 장난감을 뺏기기 싫은 어린아이의 투정을 부리고 있는거야. 마치 다른 여자를 택한 아버지처럼, 그리고 술로 세월을 보내며 널 멀리했던 엄마처럼, 혹은 엄마의 이기심에 가려 널 두고 떠났던 제하처럼 그냥 그 변화가 두려워서 조급해진 것 뿐이야. 널 좋아해. 널 좋아하기 때문에 그 변화마저도 나한테 피부로 다가오는 걸 느껴. 


나중에. 지금은 축제 기간이니까 나중에.

나중에 언제? 시낭송 끝나고? 제하 음악회 끝나고? 축제 끝나고?

....니가 편안해지고 나면.

....!

애들이 찾아. 기숙사로 갈래?


수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또다시 은채와 수현 사이에는 한 겹의 벽이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편안해지고 나면 솔직해질 수 있냐고 수현은 다시 재차 반문해야 했다. 은채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돌아서는 은채를 향해 달려온 수현은 망설이지 않고 은채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따뜻한 품...은채에게선 달콤한 체리 향기의 비누 냄새가 났다. 수현의 품에 꼬옥 들어온 은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넌 아직도 상처입고 다친 그대로야. 네 상처가 그대로 느껴져. 피를 흘린 자국이 아직도 있어. 넌 아직도..아직도 제자리인 거야. 난 그런 너한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잖아. 다친 너한테 다시 비수를 꽂을 수도 없잖아. 내가 아직 흔들리고 방황 중이라는 사실을 나도 인정할 수가 없는데. 






희망고문이라는 말을 생각해 낸 지민이 떠올랐고 흔들리고 방황할수록 두 사람을 더욱 상처입게 만든다던 정민의 뼈아픈 충고가 피부로 와닿았지만 역시나 지금도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제하는 멀어지고 있었고 수현은 여전히 상처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수현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가족이 다시 제자리를 찾으면,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시간이 좀 더 날 기다려 주면 안될까. 눈을 동그랗게 뜬 은채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두 사람 다 상처입게 되길 바라고 있지 않아. 오늘따라 자신을 껴안은 그의 힘이 더욱 옹골차게 느껴졌다. 마치 떼를 쓰는 듯한 어린아이의 심정이었다. 수현에게 껴안겨 있던 은채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 널 사랑하는 가족은 따로 있어. 내가 아니야 수현아. "

" ......알아. "

" 그리고 우린 모두 널 사랑해. 어디 가지 않고, 널 버리거나 떠나는 일 같은 건 안할거야. "

" ......... "

" 니가 뭘 겁내고 있는지도 알아. 널 이해해. 널 알아. 니가 상처받는 일 따위는 안 만들거야. 약속해, 하지만.. "


숨을 죽인 수현의 피부 사이로 은채의 머리카락이 간지럽혀졌다. 눈에 힘을 주었지만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시간이 필요해. 나중에. 지금보다 더 많이 나중에.

......

그때가 되면 확실히 얘기할 수 있을거야. 지금은 아니야. 니가 편해지고 나면, 그때 다시.

......은채야. 

날 좋아한다는 말 믿어. 그리고 나도 널 좋아해. 제하도 정민이도 모두. 

.......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였을까. 수현은 그제서야 은채를 놓아주었다. 붉게 충혈된 은채의 눈가가 보였다. 내가 널 힘들게 하고 있지? 어린애 같았지? 수현의 말에 은채는 고개를 저었더랬다. 그랬다 하더라도 이해했을 거고, 수백가지 단점이 있다 하더라도 널 아끼는 마음엔 변함없을 거야. 그게 너니까. 실수없는 인간은 없댔어. 결점이 없는 완벽한 인간은 없다고 했어. 더군다나 형편없는 상황 속에서도 맑게 자라온 네가 너무 예뻐서 다 인정하고 이해했을 거야. 널 너무 많이 이해해. 그러니까 잘못이라거나 용서해 달라는 말은 옳지 않아. 

넌 너 자체로도 세상에서 제일 근사해 보일거야. 그리고 니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너 자체를 아끼고 사랑해. 네가 혼자라는 생각은 이제 하지 말아 줘. 수현의 품에서 빠져나온 은채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진지하게 대답했다. 은채의 품안에서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기숙사 멤버들인 모양이었다. 가 보라며 은채의 손을 끝으로 놓아준 수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시선이었던 방금 전과는 달리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도 돼?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흩어놓았다. 망설인 듯한 수현의 물음에 은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시낭송에서 만나. 기대할게. 은채의 미소에 수현도 웃음으로 화답했더랬다. 은채가 바삐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수현은 조용히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불안하게 자신을 떠났던 소중한 사람들.

비록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상처가 다 치유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걸 예리하게 잡아낸 은채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많은 것을 되살리게 해주었던 사람이었고, 그 감정을 되짚어낸 사람이었다. 사랑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그보다 더한 소중한 사람. 은채의 모습이 점이 되어 멀어질 때까지도 나무처럼 그 자리를 버티고 서 있던 수현의 눈에서 점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눈은 24시간 그리고도 2억 4천년동안 너만을 보게 고정되었다.... 

그것이 네가 내게 내린 지상의 명령.....

내 생각은 25시간 그리고도 의식이 없을 때까지 그리게 고정되었다....

그것이 내가 지니고 가야 할 외로운 의무...




.


둘째날의 축제는 더욱 열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무엇보다 둘째날 축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연극부의 공연이 첫 막을 올리는 중요한 날이었고, 첫째날에 화려한 스포라이트를 받았던 지민과 마루의 대대적인 성공에 이어 진솔의 연극이 열리는 날이라 모두들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진솔은 마루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그 무대에서 펄펄 뛰던 애가 청심환을 세 알이나 먹을 정도로 예민해졌더랬다. 물론 한두번 공연해 본 게 아니라 초등학교 시절부터 연극에 몸을 담은 진솔이었으나 이번 공연은 스케일부터가 달랐고, 조연도 엑스트라도 아닌 무려 주인공을 맡은 진솔이었기 때문에 공연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다. 또한 간밤의 파티에서는 진솔과 마루의 연애를 축하하는 조촐한 자리도 마련되었더랬다. 진솔과 마루는 밤새 지민의 놀림에 시달려야 했고, 

마루를 놀리는 지민과 맞서 싸운 진솔의 모습은 귀엽기 짝이 없었다. 모두들 연극이 상연되는 대극장으로 향했는데 정민은 아직도 시낭송에 심취되어 외운 걸 또 까먹게 되었다며 동동거렸다. 아예 손바닥에 적어 컨닝을 감수해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들떠 있었다. 준혁과 지민은 커플룩으로 맞춰 입고 턱시도와 미니 드레스 차림으로 나섰는데 그도 그럴것이 이번 연극제에는 다들 하림예고가 특수 제작한 대극장에서 상연되기 때문에 시상식을 컨셉으로 잡아 학생들은 다같이 턱시도 정장과 드레스 차림이 필수였다. 








지민은 준혁의 조언에 따라 드레스는 커녕 대여할 형편도 되지 않을 뿐더러 미용실 갈 돈도 없는 은채를 위해 미용실과 드레스 자체를 빌려주기로 했었는데 이미 미용실 예약이 되어있는데다가 은채가 입고 갈 드레스를 제하가 마련해 놓고 있어 더욱 의구심을 자아냈다. 그것도 지금 가장 유행중인 모 외국 브랜드의 인기 초절정 화이트 미니 드레스라 모두들 입을 쩍 벌렸더랬다. 뿐만 아니라 정말 시상식처럼 다들 리무진을 대절해서 가는데 은채를 위해 수현이 일부러 개인 리무진을 대령해 놓은 데다가 수현은 아직 시낭송 준비가 끝마쳐지지 않은데다가 내일로 지정된 시낭송에 맞추어 엄마의 물리치료날이 오늘이었기 때문에 일찍 시낭송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한다고 은채에게 문자로 들어왔더랬다. 나 없이도 연극 관람 잘 하라는 응원의 메시지였고, 

리무진과 VIP석을 일찍 예약한 수현의 센스가 돋보였다. 지민은 우스갯소리처럼 수현이와 제하가 저렇게 온갖 힘을 다해 은채를 위해 서포트해준다며 놀렸다가 정민으로부터 눈총을 받아야 했다. 안 그래도 수현이 제하 때문에 머리 터져나갈 듯한 애한테 무슨 망발이냐며. 지민을 힐난했다가 준혁은 그런 지민을 위해 변명했으나 아예 지민과 준혁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 정민은 눈을 부릅뜨며 오늘도 키스 비슷한 거 했다가 나한테 개죽음 당할 줄 알라며 펄펄 뛰었다. 이 인간은 언제부터 박지민 순결보호기사였다고 오늘따라 이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릴까. 정민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기가 차서 지민은 그 통통한 손으로 정민의 팔뚝을 세게 눌렀더랬다. 


" 악! 꽃돼지 너!!!!! 너 니 발레 끝났다고 너무 막 먹는다? 그리고 연극 보는데 누가 팝콘을 하프갤론으로 사오냐! 너 지금 콜라도 다섯 잔째인거 아나 몰라! "

" 스트레스 받아서. "

" ...방금 니가 미니 부페에서 막 먹는 거 본 사람 여기 있는데. 그러고도 스트레스가 안 풀린다고? "

" 왜 시비야! 이 좋은 날에. 너 진짜 한번만 더 준혁이한테 개겼다가 축 사망일 줄 알아. 어제부터 은근히 거슬리는데 우리 키스하는거 한두번 봐? 조선시대야? 애인끼리 뽀뽀도 못해? "

" 못해! 안돼! 죽어도 안돼. 하려거든 나 임자 생기면 그때 해. 솔로 앞에서 이 무슨 닭털 날리는 시츄에이션? 오늘 누구든 내 앞에서 키스 비슷한 거라도 해봐. 내 가만 둘 줄 알고? "

" ...어우, 저걸 그냥. 넌 니 주둥아리만 조심하면 여자들 물밀듯이 밀려올거다. 니 외모에 찬양하다가도 그 아줌마 수다 때문에 다들 식겁하는 거 몰라 박증자! "

" 시꺼! "


도대체 지민에게 무슨 원수가 졌는지 한바탕 난리를 부리는 정민을 애써 떼어놓은 준혁은 콜라를 사오겠다며 애인을 만류하고는 정민을 데리고 극장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더랬다. 도대체 어제부터 왜 그러냐. 

기분 좋은 날 좋게 풀라며, 축제 끝나고 내가 어떻게 섭외해보겠다고. 안그래도 지민이 발레 끝나고 선배들한테 좀 찍힌 거 같은데 니가 봐주면 안되냐고 상냥하고 나긋나긋하게 말하는데 누구 설득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는덴 서준혁 따라올 사람이 없다. 이런 완벽한 놈이 내 사촌매제라니. 혀를 찰 노릇이었다. 그러나 정민은 처음으로 그런 준혁의 성격이 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았더랬다. 이 묘한 사촌지간인 박지민과 박정민은 평소엔 수다의 핵폭풍을 가져올 아줌마 수다단들이었지만 특히 연애사에 있어서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놀랄만큼의 평론을 내리기로 유명했다. 은채에 대해서, 또 은채를 둘러싼 제하와 수현에 대해 이 두 사람이 내린 평가는 정확했으니까. 콜라를 사러 매점으로 향하던 도중에 정민은 준혁에게 돌아섰더랬다.


너 조심해. 

조심하라니?


콜라를 사려고 지갑을 꺼내던 준혁은 난데없이 심각하고 진지해진 정민의 태도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정민은 확실히 육감으로 깨닫고 있었다. 불안해. 은채나 수현이, 제하에 대해서 내린 평가는 정확해. 연애에 대한 내 감이나 지민이의 감 역시도 그래. 어제 발레 공연할 때 그 하예린인가 뭔가 하는 선배가 널 보는 눈이 이상했어. 정민의 마치 셜록 탐정같은 추리에 준혁은 피식 웃었더랬다.


" 너 아주 소설을 써라. 무슨. "

" 내 감은 때론 여자의 육감보다 강하다니까. 너 두고 봐. 수현이 제하에 대한 감도 내가 제일 먼저 깨우쳤어. 그 선배 분명히 너한테 흑심이 있어. "

"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

" ...너같은 꽃미남이 발레부 퀸이 아닌 지민이한테 들이대서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해졌을지 몰라. 넌 과학부에 틀어박혀 실험이나 하고 연구나 하고 개구리 해부나 과학대백과사전 같은 거만 읽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어서 여자들에 대해선 몰라. 그래. 섬세하고 예민한 동물이라는 건 알지. 지민이에 대해선 도사지만 넌 여자의 육감에 대해서 너무 불신해. "

" 그러는 박증자씬 이제 거의 여성화되셨군요. 너 아주 여성 호르몬이 차고 넘친다. 은채랑 좀 가까이 다니는 거 자제해라. 너야말로 은채랑 같이 다녀서 제하한테 미움받고 있는거야. 은채랑 조금만 더 가까웠다간 제하가 너 아주 간밤에 죽이겠더라. "


제하 얘기만 나오면 식겁하는 정민이었으나 다시 매점으로 향하려는 준혁을 돌려세운 정민의 양미간에 주름 세 개가 활짝 폈더랬다. 


내 사촌이야. 모를 거 같애? 너 두고 봐. 

설령 그 선밴가 뭔가 하는 여자애가 나한테 흑심 있는들 어쩔거야. 내 마음은 only, 언제나, 영원히 한 곳. 몰라? 내가 지민이 두고 한눈 팔 놈으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 박정민?

당연히. 나라면 모를까, 근데 문제는 니가 아니라 지민이야. 

지민이라니?

지민이가 어디 소속인지 잊었어? 과학부나 문예부와는 달리 예술 쪽은 서열이 확실하기로 유명한 곳이야. 예전에 진솔이 창고에 갇혔던 거 생각나지? 

..아아, 그 에어콘 나오는 방에 선배들 농간으로 갇혀서 마루가 구출했잖아. 

발레부와 연극부는 선배 말이면 죽는 시늉도 해야하는 곳이야. 서열이 너무 확실하지. 지민이가 그런 얘기까지는 안할거야. 들은 얘기가 있어. 하예린인가 하는 그 여자 별명이 블랙 로즈(Black Rose)라더라. 블랙 로즈, 왜 그런 별명이 붙었게? 빨간 장미도 아니고. 왜 검은 장미라는 별명이 붙었겠냐고. 악당의 냄새가 확 나지 않냐? 


준혁의 시선이 점차 떨리는 것을 확인한 정민은 심호흡을 했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 니가 문제가 아니라 지민이라는 거야. 그 선배가 널 미끼로 지민이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래. 위험한 여자야. 소문이 파다해. 한번 낚은 남자는 절대 안놔주는 여자야. 아름다운 만큼 그만큼 소유욕도 강해서 한번 걸린 남자를 절대로 포기 않는다는 악명 높은 여자라고. 애인 있는 남자는 물론 임자 있는 사람도 뺏어오는 여자야. 하물며 지민이같은 맹탕 순둥이라면 더 쉽겠지. 대선배이고 직속 선배인데다 발레부 수장이라 지민이가 그 앞에서 찍소리나 할 것 같아? 왠만한 교수진들도 그 선배 앞에서는 아주 기 못편다던데. "

" ....... "

" 너 조심해. 벌써 소문 돌고 있는 거 주시해. 벌써부터 발레부 하예린이 서준혁 찍었다는 소문 내 귀에까지 들려오고 있거든? "

" ..증자야. "

" 키스 사건으로 난동부린 건 농담이지만 니 친구이기 이전에 나 지민이 사촌이다. 엄밀히 말해 내가 석 달 빠르니까 사촌 오빠지. 다른 예고에 넣을 수도 있었고 일반고로 갈 수도 있었지만 외할머니께서 우릴 같은 예고에 넣은 건 서로 도와주고 지켜주라는 의미인 것도 있어. 지민이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아무리 천하의 서준혁이라도 나 용서 못해. 걔 한번도 안 우는 애야. 왠만하면 안 우는 애고, 박지민 생활 신조 알지? "

" ....좌절 금지. "

" 잘 아네. 울리면 너라도 내 손에 가만 안 놔둬. 그 선배한테 넘어가도 넌 내손에 끝나. 알어? " 


정민의 말에 준혁은 위기감을 느낌과 동시에 정민이 처음으로 듬직하게 느껴졌더랬다. 안심되겠다. 우리 꽃지민. 너 아무래도 나랑 지민이 결혼할 때 젤 앞자리에서 질질 짜고 있을 것 같은데? 매점으로 가는 것과 동시에 정민의 어깨를 끌어당긴 준혁 때문에 웃음보가 터지면서도 그런 준혁을 밉지 않게 흘기는 정민이었다. 

불안해 하면서도 준혁의 듬직함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워낙 예린의 소문이 압도적이라서 걱정되었더랬다. 지민이 같은 순둥이가 과연 산전수전 다 겪은 하예린 앞에 무사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자신도 지켜주겠지만 같은 부서 안에 있는 지민이만 할까. 준혁도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이지만 끼리끼리 닮는다고 순수하고 남의 말을 잘 믿는다는 결점이 있었다. 이 둘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지. 사람이 너무 착해서 남을 의심하지 않고 다 믿고 신뢰한다는 거. 이를 어쩌나. 정민의 예리한 촉은 벌써부터 불안을 감지했지만 이만큼 경고했으니 준혁도 절대 넘어가지 않겠지. 준혁이 넘어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니 하예린이 어떻게 나올지 더욱 걱정이었다. 한숨을 쉬던 정민은 준혁의 얼어붙은 기를 풀어주기 위해서 혀를 끌끌 차면서 눈을 흘겼다.


결혼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 우리 꽃돼지랑 딴따라 식 올리기 전까지 내 극기훈련 다 통과해야 돼. 인간아. 




하지만 시련은 준혁과 지민에게만 닥친 게 아니었다. 무대 시작 전이었지만 살포시 무대 아래로 내려온 진솔은 마루를 위시한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지금 다른 팀 리허설 중이라 시간이 났다고, 연애 못해서 안달난 두 사람은 친구들 앞에서 마구마구 닭털을 날렸다. 지민은 준혁과 워낙 잉꼬커플이라 그런 진솔을 병아리 보듯 흐뭇한 어미새의 심정이었으나 콜라를 가지고 무사 귀환한 준혁 옆에서 정민은 진솔과 마루를 노려볼 수 밖에 없었다. 제하만큼이나 무서운 게 진솔의 독설이라 감히 반항하지 못할 뿐이었다. 수현은 연극부 공연관람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더랬지만 제하는 오늘 아침부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은채의 드레스며 헤어샾 예약까지 마칠 정도로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모습은 볼 수가 없고. 속이 타는 건 은채였더랬다. 

전화도 문자도 모두 불통 아니던가. 안면이 있는 음악부 친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그저 레슨실에서 하루종일 산다는 말 밖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정민은 불안해하는 은채에게 바로 공연이 내일이라 저 완벽주의자도 애가 타는 거겠지. 그렇게 은채를 위로해도 소용이 없었다. 점차 움직이는 마음의 나침반은 은채도 모르는 사이에 옮겨지고 있었다. 냉정해진데다 퉁명스러워졌고 점점 멀어지는 제하의 마음 덕분에, 서늘한 눈빛 아래에서 은채는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네가 이러면 난 어떡해? 난 니가 싸늘하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미치겠는데. 왜 이렇게 답답하고 미치는 건지도 모르겠어. 니가 하루종일 안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니가 하루 이틀 이런 것도 아닌데, 예전부터 니 성격은 그저 이랬는데 왜. 왜 이렇게 심장이 멎을 것처럼 아프지? 니가 다시 멀어진다고 생각하면 왜 이렇게 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 제하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니가 나에 대한 마음이 식어버렸으면 어쩌지..? 내 기다림에 지쳐서, 기다려주겠다고 말했지만 알아. 수현이랑 너 사이에서 흔들리고 갈팡질팡하는 내가 너무 짜증나서 니가 관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생각만 하면 난 정말 돌 것 같아. 내가 나쁜 년이라는 것도 알겠어. 착한 아이라고는 할 수 없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그것도 알겠어..네가 싸늘하게 돌아서는 걸 볼 때마다 이렇게 아플 줄 몰랐어..하루종일 네 생각밖엔 할 수가 없어. 레슨실로 돌아갔다고는 하지만 내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없고 그런 와중에도 왜 내 미용실을 챙기고 내 드레스를 챙기고..도대체 네 본심은 뭐니? 어디까지니. 오히려 혼란스럽고 돌기 일보 직전인 건 바로 나야. 정작 울고 싶은 건 나라고..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네 그 다정한 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건 바로 송은채 나란 말이야. 


" 공진솔! "


은채가 애태우고 있는 사이에 친구들의 눈을 모두 붙들어 버린 건 한떼의 함성과 함께 나타난 라이언이었다. 한동안 해외 로케 촬영 때문에 학교를 비웠다더니, 그 해외 촬영이 깃든 미니시리즈가 해외에서 호평을 받고 상도 연거푸 몇 개나 거머쥐는 바람에 이번 축제에서 빠져도 가산점을 얻을 정도로 하이틴 스타의 위력은 뛰어났더랬다. 또한 CF 촬영과 인터뷰 스케줄을 모두 스킵하면서까지 축제에 참가하여 많은 캐스팅 디렉터들과 감독들의 눈을 붙들어둬서 교장선생님이 매우 라이언을 극찬하고 예뻐했다는 후문을 뒤로 하고 장미꽃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라이언은 제일 보고 싶어했던 사람에게 장미꽃 꽃다발을 안겨 많은 가십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쩌면 좋아. 만났어, 붙었어. 라이언 VS 강마루다! 강마루랑 공진솔 사귀잖아. 근데 상대가 또 라이언이잖아. 어머..저 복터진 계집애. 전생에 무슨 공을 쌓으면 공진솔처럼 착한 복을 얻게 되니? 강마루에 라이언에..

돌겠다 진짜. 거기다 공부도 열라 잘하고 연기도 잘하고 한번 듣거나 보면 다 외우는 저 천재적인 암기력..얼굴도 예뻐 날씬해, 요정 같애. 부모도 잘 만나 집안도 부자야. 야, 근데 성깔은 드럽잖아. 그걸로 위안 삼자고. 






가십걸들은 벌써 핸드폰의 셔터를 눌러대며 마루와 라이언의 극적인 상봉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확하고 면밀히 말해 첫번째 부딪힘은 아니었다. 한 세번째쯤 되나. 첫번째는 진솔에게 대시해도 되냐고 묻던 라이언이었고, 두번째는 부산 여행에서 묘하게 라이벌 구도를 생성하던 두 사람이었다면 세번째는 첫번째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스코어가 많이 뒤쳐져 있는 라이언이었다. 거기다 진솔이 마루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진솔의 표정을 보나, 더 당당해진 마루의 차분한 페이스를 보나 눈치빠른 라이언이 몰라볼 리 없었다. 한방 먹었군. 

잠깐 홈 그라운드를 비운 사이에 그새 공략할 줄이야. 비웃음으로 일관하려던 라이언은 조소를 거두었다. 불편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마루 덕분이었다. 진솔을 구하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는 소문은 라이언도 들은 바 있었다. 동정심을 유발할 작전은 아니었다지만 역시 진솔의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굳이 마루의 부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에겐 불리한 싸움이었다. 강마루는, 공진솔의 러브레터 상대이기도 했다. 그런 마루가 마음을 돌려먹었다면 라이언에겐 상당히 불리한 패였으니까. 


" 이젠 어쩌나. 골대가 생겨버렸네? "


이 상황을 놓칠 리가 없는 정민은 비아냥거렸으나 라이언은 진솔과 마루 앞으로 다가왔더랬다. 오늘의 프리마돈나를 위해. 무대 기대할게. 난 언제나 그랬듯이 니 옆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아. 니 옆에 누가 있었어도 뺏어왔을 테니까. 정말 오만한 자만심이었다. 하지만 진솔은 휠체어에 앉은 마루의 목을 살며시 끌어안았고, 

그 대담한 스킨쉽 앞에선 꽃다발을 내밀던 라이언의 얼굴도 천천히 굳었더랬다. 마루는 한술 더 떠서 끌어안은 진솔의 뺨에 조용히 입술을 맞췄다. 열심히 해. 지켜볼게. 부드럽기로 치자면 아이스크림보다도 더 상큼한 그의 목소리에 진솔은 과감한 스킨쉽마저도 수용하며 마루의 바로 눈앞에서 눈을 맞춰오면서 활짝 웃어주었다. 






물론이지. 니가 지켜보고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 완벽한 무대를 선사할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진솔은 눈을 윙크하면서 온갖 닭살을 다 떨었다. 내 아무리 저 라이언을 떨궈내기 위한 거라지만 언제까지 참고 있어야 돼? 야, 대패 가져와. 지켜보던 정민은 오들오들 떨면서 궁시렁거렸고, 마루의 목을 끌어안은 그대로 진솔은 라이언을 똑바로 주시했다. 


미안해요. 선배는 제 타입이 아니신데요. 그리고 골대가 있어도 들어간다고 했지만 그 상대가 마루라는 게 다르죠. 우린, 이미 게임 끝났거든요.

내가 너무 늦었나?

아뇨. 그 반대라 할지라도 선배는 마루한테 게임이 안 됐을 거예요. 

......! 


마침 무대 스탭중 하나가 진솔을 찾았더랬고, 완벽한 무대를 위해 진솔은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무대 뒤로 향했더랬다. 끝까지 마루를 향해 손을 흔드는 진솔의 환한 웃음에 모두들 기분이 좋아졌더랬다. 제하의 일로 침울해 있던 은채마저도 진솔을 향해 손뼉을 쳤고, 준혁과 지민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좌석에 앉았으나 정민만이 준혁의 곁에 앉아 궁시렁거렸더랬다. 나 빨리 애인 만들어 줘. 소개팅이라도 해 줘. 아니면 니들 기숙사에 나 끌어들이지 마. 날 그냥 솔로로 내비두든가. 저러다 은채까지 애인 만들면 나 진짜 확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버리든가 해야지 다 커플 만들어서 내 소름 다 돋게 하려고 작정했어? 그리고 서준혁 얘기해두겠는데 내 앞에서 닭살 떨지마. 한강 앞바다에 던져버린다 진짜. 정민과 준혁, 지민은 라이언이 눈앞에 있어도 투닥거리기만 했고 마루와 라이언이 이야기하도록 은채는 잠깐 좌석표를 내려다보는 연기를 해야 했다. 


" 부상 때문에 동정심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둔한 녀석인 줄은 몰랐는데. "

" 이봐요! "


마루의 아킬레스건이며 진솔의 죄책감의 이유랄 수 있는 부상 문제를 걸고 넘어지자 은채는 단박에 화를 냈지만 그런 은채를 막아세운 마루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들어 라이언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후회하고 있죠. 

먼저 진솔이한테 손을 못 내민 걸. 그래서 그 후회한 시간만큼 되갚아 줄 작정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걸로. 마루의 말에 정민이네 좌석 쪽에서 휘파람과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화이팅 강마루! 잘한다 우리 루루!




난리가 났다. 은채마저도 턱을 괴고 마루의 능수능란한 말빨에 혀를 내둘렀더랬다. 이러다간 실시간으로 둘이 첫키스한 현장까지 저 수려한 말빨로 공개되게 생겼는데?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딱딱하게 굳은 라이언은 기가 막힌지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마루는 여전히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우리 진솔이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

이젠 신경 꺼주세요. 제 여자거든요.

......!!!!

그 꽃다발은 받은 셈 치죠. 그럼 전 이만 실례. 

.....

아 참, 우리 진솔이 러브레터 대신 받아주셨다면서요? 지금 갖고 계시면 나중에 제 락커룸에 좀 꽂아주실래요?

.....!!!!

버리셨대도 할 수 없지만. 그럼 실례 많았습니다. 라이언 선배님.

....

아무리 선배님이라 할지라도 임자 있는 사람 넘보는 파렴치한 예의범절은 사양하겠습니다. 


끝까지 매너있는 신사도를 발휘한 마루는 벙쪄있는 라이언을 놔두고 은채에게 윙크를 했고, 은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루의 휠체어를 끌고 준혁의 옆자리로 향했더랬다. 꽃다발을 든 라이언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한 방 먹은 듯 어이없는 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


<리어왕>이라는 연극에서 주인공 리어왕과 막내딸 코델리아를 1인 2역으로 소화한 진솔은 그야말로 극장 전체를 흥분과 충격의 도가니로 관객들을 몰아넣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리어왕을 표출할 때면 이 아이가 정말 열일곱의 연극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고, 그 리어왕에 몰입할 때 쯤이면 비련의 여주인공인 코델리아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 한 떨기 꽃과 같은 코델리아가 나올 때면 남자 관객들로부터 함성과 환호성이 끊이질 않았다. 연극의 호흡에 있어서 중도에 박수소리가 나오는 것은 앵콜이나 커튼 콜 때나 되어서야 가능한 것인데 이렇게 중간 중간 배우가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함성과 환호성이 끊이지 않은 적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점점 극이 진행될수록 오랜 셰익스피어의 고전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완전히 이 천재적인 1인 2역의 공진솔에게 감정이입되어 눈물을 흘렸더랬고, 앵콜 공연이 끝나고 커튼 콜이 내려질 때까지도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공진솔! 공진솔!!!!


연극은 대성공이었다. 확실히 첫 스타트를 만족스럽게 끊은 지민의 영향 덕분인지 아이들은 펄펄 날아올랐다. 처음에 그렇게 청심환을 챙겨먹으면서까지 긴장했지만 그 긴장은 그저 긴장일 뿐이라는 속설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꽁이야.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어. 진솔이 넘겨 준 대본을 뒤적이면서 오점을 확인하려던 지민은 혀를 내두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고 준혁도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공연이 끝나기가 무섭게 멤버들에게 오겠다던 진솔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더랬다. 공연이 끝마치자 마자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객석으로 향하려던 진솔은 카메라 세례와 기자들, 영화감독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였고 칭찬 일색인 이사장단들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에게 휩싸여 떠나지도 못한 채 관객들에게 싸인을 해달라며 요청이 쇄도하는지라 몸을 빠져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진솔 양, 여기 좀 봐주세요. 사진 좀 예쁘게 박읍시다. 진솔 양, <문화창간>입니다. <컬쳐스토리> 입니다, 진솔 양, 곧 유명 영화에 캐스팅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던데 사실입니까? 

하이틴 스타 라이언과의 염문설도 진짜입니까? 라이언에 이어 브라운관에 진출할 거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진솔은 친구들에게 가기 위해 이리저리 피해보았지만 아예 이번 연극을 연출했던 선생님들이 급 기자회견처럼 되어버린 진솔을 앞에 두고 긍정적인 답변을 하고 계셨다. 멀리서 은채가 휠체어를 밀고 있고 마루는 멀리서나마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멀리서...

나의 프리마돈나. 

멀리서라도..멀리 있어도 더욱 아름다운 나의 여신. 나의 여배우.


" 힘들어? 슬퍼? 속이 상해? "


확실히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마루를 알아채는 것은 눈치 빠른 송은채 뿐이었다. 엄청난 연극의 열기에 휩쓸린 지민과 준혁은 리어왕의 연기에 대해 토론하면서 서로 이야기 나누기 바빴고, 정민은 마침 또 건진 새로운 예쁜 여학생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다. 라이언은 그렇게 마루에게 패배한 이후 연극도 보지않고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아, 들켰나. 힘들고 슬프고 속이 상한 걸 들켜버렸나. 점점 페이스 조절이 되지 않아 힘든 마루는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좀 이상해졌나봐. 물러터졌어. 예전의 강마루가 아닌가봐. 옛날엔 이렇지 않았는데 표정 하나하나 송은채한테 다 들키고 있네. 어쩌면 좋지? 마루는 푸념섞인 말을 하면서도 빙긋 웃었고, 

그런 마루를 돌려서 휠체어에 앉은 마루 앞에 무릎을 반쯤 꿇은 은채는 한쪽 눈을 윙크했더랬다. 걱정하지 마. 그런 루루가 훨씬 더 마음에 들어. 이젠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기로 했잖아. 마음은 표현하라고 있는 거지. 





누구누구보다 훨씬 낫다. 뭐. 속상한 것도 알겠어. 당장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속이 상하고, 3시간 내내 눈 부릅뜨고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니까 체력적으로 딸려서 힘들고, 이제 유명해지는 진솔이가 멀어지니까 그래서 슬픈거지? 


" 역시 쏭. 내 맘속에 들어갔다 나왔니? " 

"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에 빠진 상대를 알아보는 법이거든. 나 머리 똑똑한 거 이제 알았나? "


은채의 따뜻한 눈과 마주친 마루는 웃어버렸다. 섭섭하고 서운하지만 지켜보는 게 좋아. 내가 건강했다면 당장 달려가서 축하해 줬을 텐데. 나 너무 바보같지? 마루의 맑은 눈빛 아래로 은채는 가슴이 쓰렸다. 누구보다 건강해지고 싶은 건 너일 텐데..또 진솔이가 걱정하고 힘들어할까봐 아무 말도 못하는 마루는 강마루이기 때문에 은채의 슬픔을 배가시켰다. 때마침 제하 걱정 때문에 아파하고 있던 은채라서 마루의 슬픔이 피부로 전해져 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만 있다면 참 좋을텐데. 이젠 바라보는 마음이 생겨도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슬프고 아프다는 게 참 기가 막혀. 누구보다 꽁이는 네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거야. 거울 같은 게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런 발명품은 안 만들어질까? 반쯤 허리를 숙인 은채는 마루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고, 평소에도 은채의 멘토였던 마루는 은채의 따뜻한 체온을 느낀 채로 입을 열었다.


투명한 거울이 생긴다면 보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있어?

응.

제하구나.

역시 루루다. 내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왔지?


재치있게 마루의 답변을 그대로 옮겨온 은채 말에 마루는 그제서야 웃음보가 터졌더랬다. 다들 기숙사에 파티가 마련되어 있으니 돌아가자며 정민의 목소리가 울렸고 은채는 일어나서 마루의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니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거 같애. 은채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루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런데도 망설이는 이유도 좀 알 거 같다. 우리 쏭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보살피지 못한 것을 자책하면서 마루는 정민, 그리고 지민과 준혁을 따라 극장을 나서면서도 여전히 카메라 세례와 기자단, 





인터뷰 요청들과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팬들 사이에서 빼도 박도 못한 채 갇혀버린 진솔은 정말 오늘의 여신이었다. 다들 라이언의 뒤를 이어 최고의 하이틴 스타가 될 것이라는 상상의 나래를 폈고, 마루는 그 말에 동감했다. 진솔이라면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배우가 될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운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지금. 하필이면 지금 내가 공진솔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데려가실 게 뭐람. 하느님을 향한 읊조림이었지만 마루는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답례라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 내 마음은 꽁이가 몰랐으면 좋겠어. 그동안 송은채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지 믿어도 되겠지? "

" Of Course! "

" ...."

" 하지만 걱정하지 마.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꽁이는 강해. 결국 니 옆자리로 돌아오게 될 거야. 그리고 난 기적을 믿으니까 조만간 건강하게 걸어다니는 강마루를 만나게 될 거라고 확신해. "

" ....응. " 


기자회견이 열렸지만 진솔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분명 연극이 끝나면 기숙사에서 다들 파티하기로 했는데 다 기숙사로 돌아갔을 것이다. 거기다 오늘 늦은 저녁엔 준혁이 소속된 과학부의 과학박람회를 구경하러 가기로 했는데 자꾸 시간을 끌 순 없는 노릇이었다. 미치겠네 정말. 하지만 일어나려던 진솔은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다가 다시 앉아버렸다. 라이언의 뒤를 이어 브라운관이나 충무로로 진출할 계획이 없냐던 어느 기자의 물음에 선생님이 긍정적으로 답변한 이후였다. 연극부에서 지금 TV 스타로 진출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진솔이일 거라고. 좋은 작품이 있으면 드라마든 영화든 가리지 않고 추천할 생각이라고 했고, 유명한 모 영화감독과 캐스팅 디렉터와의 조율도 끝난 상태라 라이언이 소속된 소속사와도 얘기가 오가고 있다는 언질까지 건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도 모르는 계약이 판치고 있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기함을 할 일이었다. 제하만큼 유명한 재벌 그룹은 아니지만 엄격한 육군 투스타 장군인 아버지는 사업가로 진솔을 키울 생각이었다. 

그런 진솔이 연극인이 된다고 했을 때의 반대를 뚫은지 불과 몇 년이었다. 거기다 TV에 모습을 드러내는 연예인이 된다고 하면 또 반대가 사무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를 어쩐담. TV 출연은 아직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데. TV 출연보다는 생생한 연극 무대가 더 좋단 말이야. 입만 뻥긋거리는 TV 바보상자 속 인형이 되려고 연극을 시작한 게 아닌데. 한숨을 내쉬던 진솔은 진솔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며 마이크가 돌아오자 잠깐 망설여졌다. 진솔의 꿈은 늘 한결같았다. 생생한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건.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오직 연극무대만이 진솔의 오랜 꿈이자 희망이었다. 스폰서라든가 유명 영화감독이 러브콜을 보내오든 아니든 그건 진솔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한텐 내 길이 있어. 연극만이 내 길이야. 선생님들이 다들 진솔을 희망에 찬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진솔은 결심히 선 얼굴이었다. 죄송하지만 제 길은 따로 있어요. TV속의 인형이 되려고 연예인이 되려고 연극부에 들어온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제 지원군이 절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애한테 제일 먼저 칭찬받고 싶어요. 


" TV 출연은 하지 않습니다. 연예계 데뷔 또한 사실무근입니다. "

" !!!!! "


갑작스러운 진솔의 말에 다들 웅성거렸고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선생님들이었다. 화려한 스타성, 부유한 집안 배경, 무엇보다도 외모나 스타일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도 그렇지만 전설적인 여배우가 될 수 있는 조건인 엄청난 연기력...저 아이는 천의 얼굴을 가졌으니까요. 처음에 진솔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선생님들이 했던 말이었다. 진솔같은 천의 연기력이라면 더 말할 필요 없이 하림예고의 이름을 드높여줄 것이었고 연극부의 전설 아닌 전설로 남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진솔이 반대하고 나서니 모두들 웅성거릴 수 밖에 없었다. 

연예인이 될 조건을 모두 갖췄는데 스타가 될 길을 거부하고 나선 진솔은 기자들에게나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화젯거리였다. 도대체 이 똘망똘망하고 야무져 보이는 소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진솔은 선생님들의 당황함에도 굴하지 않고 똑바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더랬다. 마루 때문이 아니었다. 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와 꿈 앞에 당당히 서기 위함이었다. 열 일곱살의 연기 천재는 무엇보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배우로서의 메리트를 확실히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사실을 부정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학교 졸업 이후 연극영화과에 지망해서 저는 쭉 연극 무대에만 설 작정입니다. 대학 졸업 이전까지는 그 어떤 매체와도 손 잡을 생각이 없으며 대학 졸업이 있기 전까지는 학교 내에서 실시하는 크고 작은 연극 공연을 제외하고는 다른 공연은 없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학업을 우선시하는 학생이 될 겁니다. 

.....! 

그 어떤 추측성 기사도 내지 말아주세요. TV출연은 물론 연예인으로서의 데뷔도 사실 무근입니다. 설령 대학 졸업 이후에 연극인으로서 길을 닦는다 해도 브라운관의 배우는 제 길이 아닙니다. 무대에서의 연극인이 제 길이죠. 

!!!!!

앞으로는 그 어떤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도 사절입니다. 


벙찐 사람들을 두고 유유히 무대를 내려온 진솔은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여배우에서 평범한 한 소년의 여자친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제치고 극장을 나선 진솔은 기숙사로 향했다. 

다들 파티 준비에 여념이 없는데다가 기숙사는 축제 내내 열리는 파티로 분위기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친구들 사이를 지나쳐 진솔과 마주치는 기숙사 사람들이 전부 연극의 대성공을 축하해 주었고, 기숙사의 A동을 찾던 진솔은 내내 뛰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내 자리는 이곳. 진솔의 자리가 다가올 때마다 진솔은 더욱 더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영리하고 눈치가 빠르고 총명한 은채, 두말하면 입이 아픈 귀엽고 사랑스럽고 깜찍한 지민이, 비록 자신과 독설 배틀을 달렸지만 요즘 들어 은채 덕분에 많이 착해진 제하, 그리고..그리고 그 남자. 내가 사랑하는. 내가 선택한. 내 오랜 심장의 주인. 마음의 평화..


" !!!! "


1호실이 보이는 복도를 돌아선 진솔은 멈추어 섰다. 다름아닌 진솔을 맞이한 것은 휠체어에 앉은 남자였다. 휴게실로 통하는 문 앞의 복도를 점거한 채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러브 액츄얼리를 따라하기로 한 거냐고. 여자가 농담삼아 물어왔지만 남자는 대답 대신에 휘갈겨 쓴 듯한 스케치북을 들어보였다. 러브 액츄얼리 맞네. 환하게 웃음 짓던 여자의 말에 마루는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틀렸네. 


" 영화 '편지' 야. 하루종일 일에 지친 최진실을 위해 박신양이 정성껏 쓴 응원의 플랫카드를 준비하지. "

" 어떤 플랫카드를 준비했는데? "


여자가 빙긋 웃자 남자는 스케치북의 플랫카드를 조용히 펼쳐 보였다.


' 내 사랑하는 여배우님은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코델리아 공주님께. '


코델리아..리어왕에서 오늘 진솔이 맡았던 배역이었다. 아마 그 어떤 배우가 연기한다고 해도 더 이상의 완벽한 사람은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야. 기자회견 하는 것 같던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다 니가 카메라며 인터뷰 한다고 늦을 거래서 다들 옷 갈아입고 다과회도 준비 못 했는데. 아무튼 서프라이즈는 알아줘야 돼. 

마루의 수다스럽지 않은 말은 조용조용하니 퍼져 나갔지만 진솔은 말을 잊은 채 플랫카드를 치켜들고 있는 남자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연예인 같은 건 안할거야. 너도 내 꿈이 생생한 무대에서 숨쉬는 연극 배우라는 것 쯤은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니 옆을 떠난다거나 멀어진다거나 그런 건 내가 더 싫어. 강마루가 싫으면 나도 싫어. 





니가 서운하고 섭섭하면 난 더 몇배로 서운하고 섭섭할거야. 그러니까 아무말도 하지 마. 넌 어쩜..절망이라는 것도 모르니? 플랫카드를 움켜쥔 채 흑흑 흐느껴 우는 진솔을 조용히 끌어안은 마루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정말 예쁘더라. 정말..반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라. 그래서 널 카메라에 뺏겨도 괜찮다고 생각했지.

뭐어? 다시 말해봐, 진짜야? 

한 3.1초쯤. 그 이후로는 너무 예뻐서 안 뺏겨야겠다고 다시 한번 약속했어.

.....

그치만 이런 훌륭한 배우를 나 혼자만 독점하는 건 슬프잖아.

...괜찮아. 죽을 때까지 너. 배우라 하더라도, 배우인 채로 영원히 살아도 오로지 강마루 너.

......

고마워.


플랫카드가 구겨지는데도 진솔은 휠체어에 앉은 마루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그래..맞아.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오로지 강마루 너...



...


니네 기숙사에 잔치 열렸던데 안 가냐? 

....괜찮아.

연극부 공연도 안 보러 가고..너 연습 그만하면 진짜 충분해. 무대 위에서 얼마나 레전드를 보여주려고...제하야? 제하야! 이제하!!!!!!!!! 얘 왜 이래...선생님!!!!! 제하 쓰러졌어요!! 제하야!!!!


내일로 다가온 음악부 공연 때문에 레슨실엔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솔리스트를 맡은 제하만큼은 아니었다. 분명히 동료들 가운데서도 가장 우월한 실력을 자랑하는데다 그가 준비한 공연에는 반전이 있었다. 

대부분 제하를 아는 동료들은 그 '반전' 이 누굴 위해 기획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완벽한, 실수없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공연을 위해 제하는 매일 밤 구슬땀을 흘리면서 연습에 또 연습을 하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거기다 연습에 임할 때도 별로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다. 땀을 계속 흘리는데다 심호흡도 고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어디 아픈 사람인 것처럼 안색도 좋지 못했고 이유없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오랜 시간을 제하와 함께해온 음악부 동료들은 제하가 좋지 않은 컨디션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도 흐트러짐 없는 연주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유수의 수많은 경연대회가 있고 바이올린 독주회가 있었지만 이번만큼 제하가 집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연습이 끝나자마자 쓰러진 제하의 이마를 짚어내린 친구 한명이 비명과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몸이 불덩이야! 안되겠어 누가 앰뷸런스 좀 불러봐!!! 친구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 누군가가 119에 전화하는 소리, 달려오는 선생님들..희미한 기억, 그리고 점점 멀어져가는 의식 사이로 제하는 말라붙은 입술로 숨소리가 미약해져갔다. 아아..나의 사랑. 나의 영혼. 나의 심장. 그리고..


내 봄의 에델바이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준혁의 초대로 친구들이 과학박람회에 초대받았고 갑작스럽게 배탈이 난 정민을 대신해 참석한 수현은 시음회에서 얻어 온 체리 주스를 은채에게 내밀었더랬다. 마셔. 수현에게 음료를 받아들고 난 뒤에도 은채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루종일 제하와 연락을 하지 못한 은채는 수현에게서 받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쁜 놈이야. 내 연락도 하루종일 씹고 있어. 아버지가 제하 얘길 들려주셨었어. 제하가, 우리 집안을 화목하게 만들어 줬어. 은채의 옆자리에 앉은 수현은 제하가 부모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제하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은채의 표정은 자유자재로 바뀌었다. 자랑스러운 표정이 되었다가, 행복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가, 안쓰럽게 바라보기도 했다가, 이야기가 끝나자 은채는 수현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주었더랬다. 


" 가끔 생각해. 널 못 만났으면 제하를 더 오랫동안 잃어야 했을 거라고. "

" ...... "

" 송은채는 정말 나한테 구원의 존재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돼. 요즘 특히 더 자주.."

" 아니야. 아닐거야, 수현아. 내가 아니었더라도..제하는, 너라면 충분히 제하를 다시 되찾았을 거야. 운좋게 내가 걸려든 거지. 너희 둘은...기막히도록, 믿기지 않겠지만 심할 정도로 쌍둥이처럼 닮아 있어서 언젠간 반드시 다시 만났을 거야. 그건 내 덕분이 아니라 온전히 네 행운인 거였지. " 


수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은채의 미소는 그렇게 길게 가지 못했다. 수현도 은채가 하루종일 뭘 기다리는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말했던 이유도 알고 있었다. 뭘 기다리는지, 은채가 도대체 어디서 흔들리고 방황하는지. 차가운 체리 주스가 담긴 음료를 들고서도 은채는 내내 한숨을 쉬었더랬다. 

복도에서 뛰어다니는 친구들을 바라보던 은채와 수현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야 했다. 제하야! 제하라는 한마디에 수현도 은채도 고개를 들었지만 은채가 더 빨랐다. 아예 은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 바람에 체리 주스가 담긴 종이컵이 쏟아졌으나 은채의 눈에 보인 것은 동명이인을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일 뿐이었다. 






제하라는 이름이 아주 희귀한 것은 아니니까. 충분히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지. 그런데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벌떡 일어날 건 뭐람. 그러나 실망감 탓인지, 아니면 힘이 빠져서인지 은채는 쉽사리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핸드폰의 플립을 열었지만 걸지는 못하고 핸드폰의 새파란 액정을 들여다보고만 있던 은채의 눈에 금방 눈물이 고였다. 은채야....지켜보던 수현은 일어섰지만 은채는 금세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렸다. 괜찮아. 





원래 이런 애였잖아. 차갑고 이기적이고, 남의 일에 신경도 안 쓰고 독한 말도 잘 하고..우리가 알던 이제하 원래 이런 놈 맞잖아. 내가 잠깐 착각했었던 것 뿐이야. 은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서려 했지만 수현은 짠한 눈으로 은채의 어깨를 짚었다. 


맞지? 처음부터 나쁜 놈이잖아. 처음부터 오혜린가 뭔가 하는 그 여자애 떨궈내려고 날 이용부터 했었던 애였어. 그러니까 처음부터 싹수가 노란 놈이었다고.

...그래.

그리고 감히 이 송은채 친구 조수현한테 독한 말 아무렇게나 뱉어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놈이었어. 싸가지였다고. 

.....

정말 나쁜 놈이었어. 사탄의 치질 같은 놈이었다고. 그놈은 하루종일 연락을 안 해도 상관없겠지? 문자를 십여통 보내고, 하루종일 전화를 해도 전화 안 받아도 떵떵거리며 제 할일 하러 돌아다니는 그런 놈인 거겠지? 그리고 쉽게 질리고 쉽게 싫증내고, 쉽게 버릴 수도 있는 그런 놈인 거겠지? 그렇지 수현아?

...그래. 니 말이 다 맞아.

.....흑...

은채야.

흐윽.....

송은채. 

...어떻게..이렇게...

.....

이렇게..보고 싶을 수가 있어...하루 못 본 거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나만...나만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이렇게 될 수가 있어..? 단지 하루동안 못 봤을 뿐인데..왜 이렇게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도 난 다 들키지? 왜 그런건지 너 알고 있어..? 그냥 동명이인의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주체할 수도 없는데..?

.....

니가 그 인간 좀 만나면 뺨이라도 한대 갈겨 줘.

.....그래.


다가오는 수현의 품 안에서 섧게 울던 은채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너한테 이런 얘길 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기다려 달라고 말했었고, 그런 말들이 너한테 상처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상처가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한테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는 게 난데..이런 말도 상처가 되는 거겠지, 수현아..? 

니 앞에서 제하를 걱정하는 말을 하는 게 얼마나 아픈지 잘 아는데. 그걸 이때까지 지켜본 그 애도 그럴까? 아니, 그래서 이젠 정말 지쳤던 걸까? 내가 수현이랑 걔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에 지쳐서. 그래서 이젠 나 같은 건 싹 잊어버렸나.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서로 멀어지려고 했던 거였을까? 그렇게 되면 어쩌지. 







그렇게 된다한들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는데. 아무 힘도 없는데. 그렇게 당해도 싼 송은채인데.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치겠어. 제하가, 이제하가..나한테서 멀어진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정말..미쳐버리겠어. 

그걸 상상도 할 수가 없어. 너무 다정하고, 상냥하고, 부드러운 걔를 다시 잃는다고 생각하니까 왜 이렇게 눈물만 나는 건지 모르겠어. 언제부터였을까..에델바이스를 들은 후부터였나. 어떡해. 난 정말 제하가 좋은가봐..흐느끼는 은채를 꽈악 안은 수현의 시선도 심란한 호흡으로 무너져 내렸다. 하느님. 더 이상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게 도와주세요..부탁이예요...





" 어머, 이봐요 학생!! 지금 일어나면 안 돼요!!! " 


정신을 차려보니 링겔을 꽂고 있었고 병원이었다. 곧 주사를 맞아야 하고 의사 선생님도 오실 거라며 간호사 누나가 얼굴을 붉힌 채 제하 옆으로 달려왔지만 제하는 아픔을 참으면서 링겔 바늘을 빼냈더랬다. 

한 웅큼의 피가 팔 위로 치솟았지만 개의치 않고 침대에서 내려온 제하는 갑자기 의사 선생님이 다가오자 비틀거리면서도 입술을 앙다물었다.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질 정도면 상태가 더 심각해진 건가. 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의사 선생님은 비틀거리면서 교복 자켓을 찾는 제하의 앞을 막아서야 했다.


폐렴입니다.

......!!!

지금 움직이면 위험해. 안 그래도 몸이 많이 약해져 있어 당장 입원부터 하고, 

....나중에요.

이봐요, 학생! 학생 지금 몸 상태가,

폐렴이라고 해서 당장 죽지는 않잖아요. 그렇죠?

......!!

나중에요.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어요. 


더 말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건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애써 병원을 나선 제하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 급성폐렴. 그것도 호흡이 가쁘고 심호흡을 제대로 못할 정도의 중증. 입술은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고 하늘을 한번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눈앞이 핑핑 돌고 어지러웠다. 그래 알아. 임마. 나도 한계라는 걸 안다고. 피식 웃던 제하는 어느새 빗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제 하루만 참으면..하루만 견디면 링겔이든 약이든 주사든 다 맞을 테니까 하루만 더 버텨주라. 

알겠지??? 기숙사로 가지 않고 도로 레슨실로 돌아온 제하는 선생님의 반대에 부딪혀야만 했다. 니 솔리스트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테니까 무리하지 마. 폐렴이라면서? 죽고 싶어 환장했어? 이번 공연 대성한 거나 다름없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무리하지 마. 성적 때문이면 더더욱 하지 마. 니 건강이 우선이야. 부모님한테 연락했어. 그러니까 제하야, 선생님의 말을 가로막은 제하는 안 그래도 장대비를 맞고 와서 완연한 병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도 모른다. 이 공연이 나한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한숨을 쉰 제하는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 페이스가 흐트러질까봐 감기약도 안 사먹고 병원도 안 간 사람이 저예요. "

" ...... "

" 내일까지요. 내일만 지나면 평생 병원에 있으래도 있을 테니까 하루만 봐주세요. 반나절이 지나면 곧 공연이예요. 이 공연은 제게 그 어떤 때보다도 특별하고 중요하니까 선생님께서 저한테 좀 져주세요. "

" 제하야! 네 몸 상태가, "

"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 공연은 제게 있어 너무도 중요해요. 명성, 명예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라..."


다시 기침을 콜록콜록 하던 제하의 숨소리가 미약해졌다.


" 봐 주세요. 들려줄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을 위해서 오직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

" .......! "

" 그 사람이 내 연주를 듣고 얼마나 행복해할지, 얼마나 웃고 기뻐할지를요. "

" ....... "

" 그걸 생각하고 아파도 아픈 게 아니었고 기다림도 기다림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져 주세요. "

" .......!!! "


어쩔 줄 모르는 선생님을 뒤로 하고 레슨실로 돌아온 제하는 문을 잠궜다. 오늘 여기에서 밤을 샐 생각이었다. 어짜피 이 몰골로 기숙사에 돌아간들 난리가 날 터였다. 특히 은채는. 아, 은채..은채가 알면 더 난리가 나겠지.

수현이는 또 어떻고. 친구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생각이 났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심호흡이 힘들 정도로 중증이라는 걸 제하도 알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욱 그랬다. 조금만 더 버티자. 조그만 더 기다리자. 비에 젖은 몰골로 창밖으로 바이올린을 잡은 소년의 모습이 비춰졌다. 에델바이스의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비는 더 억수같이 쏟아졌지만 제하와 마찬가지로 비를 쫄딱 맞은 다른 소년은 창밖에 붙어 선 채로 눈을 감아내렸다. 에델바이스...그리고 다시 바하의 칸타타...들려줄 사람이 있다고 했던가. 아, 누군지. 누구에게 들려줄 건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사랑은 원래 열병 같은 거라면서? 늦가을의 장대비라서 벽에 붙어 선 수현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새어나왔다. 


오늘은 내가 지켜줘야 될 것 같다. 

걱정하지 마. 

누구보다 뜨겁게 널 지켜줄 수 있으니까..

기대할게. 너의 칸타타를. 

너의, 에델..바이스를. 


눈을 내려감은 수현은 제하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멈춘 듯 서 있어야만 했다. 아...말로 하지 않아도 느낌만으로도 감동이 전해져왔다. 네 칸타타는 이런 것이었어. 이랬었어..듣는 순간 사람을 사랑에 빠져버리게 만드는 그 능력..눈을 감은 수현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은 내가 지켜줄게 제하야...







....


서준혁..서준혁! 준혁아!!! 서준혁!

..어, 나 불렀어?

누가 찾아왔어, 밖에.

손님? 

..완전 멋쟁이던데? 예쁘더라. A-Yo! 재주 좋다 꽃미남?

.....?


지민이다! 지민이일거야. 친구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박람회장에 모인 방명록을 정리하던 준혁은 장갑을 벗고 과학부실 입구로 나왔더랬다. 친구들과 함께 한차례 휩쓸고 간 지민이었지만 같이 정리하고 가려고 온 게 분명해. 환한 미소로 지민을 맞이하러 나온 준혁은 화사한 야회복을 입은 여자 앞에서 표정이 싹 굳어졌다.


" 안녕? 우리 구면이지? "


순간 친구의 정확한 예언 같은 조언이 떠올랐다. 사촌 지간 아니랄까봐, 연애사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놀랍도록 정확했다. 그리고 정민의 조언은 준혁의 온 몸을 마치 실처럼 휘감았더랬다. 바로 준혁의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발레부 퀸 하예린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도 돌아보게 만들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래서 발레부 퀸이라고 했던가. 메이퀸이며 F4 중 하나인 진솔과 우열을 다툴 정도의 미모였으며 진솔에게 메이퀸 자리를 내주기는 했지만 인기로 보나 명예로 보나 진솔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들었더랬다. 더 정확히 말해 진솔과 라이벌 자리를 겨루고 있는 미모와 지성을 갖춘 선배라고 소문이 자자했다던데. 정말 가까이서 보니 그 미모가 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혁의 굳은 시선을 즐기던 예린은 조용히 웃었다. 남자들 중에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제정신인 사람이 어디 있었던가. 멀뚱하고 어리벙벙한 표정의 준혁은 더욱 더 예린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어디 가서 얘기나 좀, " 

" 절 찾아오셨다고 들었는데요. 무슨 용건이신지? "


준혁의 표정에서 불쾌감과 지루함을 읽은 예린은 당혹스럽고 충격적이었다. 그 누구도 내게 이런 대접을 한 사람은 없는데...하지만 그런 준혁에게서 더욱 매력을 느꼈다. 눈썹을 치켜올린 예린은 준혁에게 다가섰고, 주춤거리는 준혁을 향해 예린은 말문을 열었다.


" 우리 연애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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