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의 출입구는 여섯 군데다. 31개 조라서 다섯 번에 걸쳐 들어가고도 하나 남았다. 나와 지수는 그 마지막 조였다.


들어가는 차례는 기록 순위와 반대로 정해졌다. 덕분에 나는 계속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신기록을 세워버리는 바람에 기다리는 내내 다른 애들의 시선과 교관들이 주는 은근한 압력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결과가 나올 줄은 나도 몰랐지만. 나는 한사코 우연일 뿐이라고 둘러댄 다음 입을 다물었다. 별 말을 하지 않자 우리를 향한 흥미도 차츰 잦아들었다.


침묵 속에서 기다리자 어쩔 수 없이 초조해졌다. 먼저 들어간 애들이 초토화 되어 나오는 걸 보자 더 걱정이 됐다. 뼈가 나가버리거나 피가 철철 나거나 정신이 빠진 애들은 없었지만 제 짝에게 업혀 나오거나 아이처럼 울면서 나오는 애들이 꽤 됐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들어갔던 애들이 저럴까. 나는 들고 있던 전자카드를 꽉 쥐었다.


미로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전자카드에 각 구역의 스탬프 네 개를 찍어오면 된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훈련을 꽤 오랫동안 받아 어지간한 일에는 면역이 됐을 텐데. 심각하게 카드를 들여다보는 사이 지수가 옆에서 내 팔을 살짝 잡고서 흔들었다.


“우리 들어갈 차례야.”

“벌써?”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이 상태로 들어가도 되나? 하기야 세상일이라는 게 준비가 되고 벌어지는 경우가 없다. 열일곱 해나 살아보니 그렇다. 곧 열여덟 살이 되니까 신빙성도 그만큼 더 늘어날 것이다. 입구를 향하자니 지수가 소곤거려 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 생명이 위험해지면 나도 좀 빨라지지 않을까?”


기록 이야기다. 지수는 합동반에서도 하위권에 속했고 그 때문에 난 혹시라도 지수가 다치는 상황이 생길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죽어라 뛸 일이 없는 게 가장 좋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그것을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번에도 온갖 장애물들을 세팅해두었을 게 빤하니까. 그래도 난 지수가 혼자서 내 발목을 잡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 졸이지 않으면 좋겠다.


언제쯤 이 복잡한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고, 우리를 지켜보는 눈은 너무 많다. 손조차 잡아주지 못하고 미로의 문 앞으로 가자 교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윤정한, 홍지수 페어. 위치로.”


우리는 닫힌 입구 앞에 나란히 섰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라 긴장이 된다. 지수와 단 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고 싶었던 건데 벌써부터 이래서야 미로 안에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열린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미로에 들어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색에 사로잡혔다. 영롱한 푸른색.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미로 안이 온통 그 색으로 흥건했다.


“샤르트르 블루….”


곁에서 지수가 중얼거렸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묻자 조곤조곤 답해준다.


“색 이름이야.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쓰인 푸른색에 붙여진 이름.”

“파란색이면 파란색이지, 복잡하네.”

“너무 예뻐서 그냥 파란색이라고 하기는 아쉬웠나봐.”


착하게도 말한다. 나는 부드러운 옆얼굴을 바라보며 또 물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뭐야?”

“색 유리창.”


저렇게 생긴 창문이야, 하고 지수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니 세 개의 긴 홀로그램이 미로 벽에 방사되어 있었다. 지수의 말대로 유리창 모양이었다. 꼭 살아 움직이는 듯한 광채가 일렁여 신비롭고도 초월적인 느낌이 났다.


“홀리는 것 같네. 성당은 뭐하는 덴데 저런 게 다 있어?”

“신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야.”

“모여서 뭘 하는데?”

“기도를 하고 세례도 받아.”

“흠.”


종교적인 공간인 모양이다. 셸터에도 그 비슷한 장소가 있었다. 교회라고 불렸는데 나는 가본 적이 없다. 이 세계에서 기도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나를 가만히 보던 지수가 말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여.”

“신을 안 믿거든. 그래서 그런지 예쁜 걸로 속이는 느낌이라. 넌 믿어?”

“응, 믿어.”


신기했다. 대재앙 이후의 삶에서도 신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행성충돌 이후 인류는 천 명 중에 한 명도 채 살아남지 못했고 그마저도 평생에 다시 햇빛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만일에 하나 신이 있다고 해도 난 그가 우리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응답하지 않는 이에게 매달릴 시간에 다른 일을 찾아서 하는 게 낫다. 하지만 지수는 아닌 모양이다. 그 믿음을 무너뜨리고 싶진 않다. 내가 믿지 않을 뿐이고 지수는 믿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화제를 돌렸다.


“샤르트르는 영어 이름이야?”

“아니, 프랑스어. 그 성당은 프랑스에 있어.”


프랑스가 뭐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지수가 말했다.


“서쪽으로 멀리멀리 가면 있는 나라야.”


그런 곳에도 가봤느냐고 물으니 화집에서 봤다고 한다. 화집. 또 모르는 말이다. 셸터에선 모르는 게 없었던 나인데 지수 앞에서는 모르는 것 투성이다. 지수는 상냥하게 일러줬다. 그림이 나오는 책이란다. 동화책 같은 건가 물었더니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화집에는 보통 글자는 없이 그림만 나온다고 했다. 언어가 없는 이야기, 라는 지수의 표현을 나는 되뇐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책인데 왜 그림만 나와? 글자가 나와야지.”


내 말이 웃겼는지 지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지는 모르지만 웃는 얼굴을 보니 좋아서 나도 그냥 웃었다. 지수는 곧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가야 해, 정한아.”


지수의 말이 맞았다. 제한시간은 한 시간인데 전자밴드로 확인해보니 7분이나 지났다. 심지어 애초에 나누려던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사실 지수와 대화를 나눌 때면 늘 그랬다. 이야기하는 시간 자체가 통째로 쌓여서 친밀감을 이루는 느낌이었다. 지수도 그런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활동복 포켓에 전자카드를 끼워 넣고 앞장서다가 돌아봤다. 뒤따라오던 지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리둥절 해하는 얼굴을 보자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워낙 놀라게 하는 걸 좋아한다. 장난치는 건 더 좋아하고. 무엇보다….


“손 잡고 가자.”


곤란하게 만드는 걸 제일 좋아한다. 홍지수에 한해선 확실히 그런 것 같다.


학내 다른 시설들과 같이 미로에도 CCTV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지금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것만도 여덟 개. 카메라를 의식하고 쭈뼛거리는 지수의 손을 잡으면서 나는 말했다.


“짝이잖아. 잃어버릴까봐 그래.”


당연히 핑계다. 순진한 지수는 내 말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는지 웃었지만.


지수의 손이 차가워서 나는 마음이 안 좋았다. 왜 이렇게 차갑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내가 손이 따뜻한 편인 것처럼 지수도 차가운 편인 거다. 우리는 각자 그렇게 타고났다.


“네 손 따뜻해.”


중얼거리듯 말하는 지수의 뺨이 발그스름 했다. 그래, 어쨌든 내 손이라도 따뜻하니까 됐다. 지수는 내가 따뜻하게 해주면 되니까.


입구 오른편은 스테인드 글라스 홀로그램이 방사된 벽이라 막혀 있다. 맞은편도 마찬가지라 왼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는데 자세히 보니 맞은편 벽에 현판이 걸려 있었다. 우린 가까이 가서 뭐라고 적혀 있는지 봤다.


가장 먼 길로 통과할 것.

 

“무슨 말이지?”

“그러게…. 다른 말도 없구.”


지수도 미로는 처음 들어와 본다고 했었다. 역시 내가 잘해야 해. 우리가 의지할 거라곤 전자카드 뿐이라 그걸 다시 꺼내봤다.


네 개의 스탬프 자리. 동그라미 안에 아라비아 숫자가 인쇄되어 있다. 미로 안에 있는 네 구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1       2

4       3

 

보통 읽는 순서대로 따라가면 1243이다. 하지만 방금 본 문장이 걸린다. 가장 먼 길로 가야한다고 했지.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하자면 답이 너무 많아지고, 단순하게 숫자를 역순으로 하라는 거라면 4321. 여기에서 1구역이나 4구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 한참 생각하고 있으려니 지수가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어 왔다.


“확실하진 않은데 생각나는 거 하나 있어.”

“일단 말해봐.”


가려내는 건 다음 일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수는 이렇게 말했다.


“3214.”


생각지도 못한 순서다. 어떻게 갑자기 생각이 났느냐고 물으니 지수가 왼쪽을 가리켰다.


“저기에도 홀로그램이 있는 것 같아.”


확실히 코너에서 흐릿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쪽으로 걸어가 길을 꺾자 지수의 말대로 스테인드 글라스 홀로그램이 있었다. 입구의 오른편에 있던 것과 도안이 달랐다.


처음에 보았던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천사, 독수리, 사자, 황소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기를 안은 여자가 떠 있다. 지수는 그들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라고 알려주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스테인드 글라스의 모양과 배치가 샤르트르 대성당과 일치한다고도 했다.


“대성당에도 미로가 있어. 순례자의 길. 그걸 본뜨지 않았나 싶어.”


홀로그램이 그 힌트인 것 같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그런 걸 화집 보는 게 취미인 홍지수가 아니면 어떻게 아냐고. 미술이나 건축은 수업 때 배우지도 않는다. 먼저 들어간 애들이 감을 영 잡지 못한 이유가 있다. 안 그래도 불만이 가득 차 있던 마음이 삐딱해지기 시작했다.


“순례자의 길은 원래 무릎으로 기어서 가야 해.”

“미친 거 아냐? 한 시간 만에 어떻게, 아니 우리 지금 50분도 안 남았다고.”

“화내지 마, 정한아. 중세시대 때 그랬단 말이야.”


똑똑한 지수가 말하기를 천년도 더 전의 일이란다. 정말이지 팔자가 늘어졌다. 언제 또 몇 명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천년이 다 뭐냐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판국에 이딴 미로나 만들어. 갑자기 성질이 나서 미로를 폭파시키고 싶었다. 내 마음만큼은 꼭 그랬다. 그런데 꼭 이런 때는 폭주도 안 된다. 더 짜증나게. 벽을 걷어차려는 순간 지수가 설명을 이었다.


“순례자의 길은 가장 멀리 돌아가게끔 만들어져 있어.”


그렇다면 현판에 적힌 문장과도 들어맞는다. 지수가 하도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가 내 화도 점점 누그러졌다. 나는 보다 귀 기울여 지수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이 미로가 순례자의 길을 그리고 있다면 3구역으로 들어온 우리는 자연스럽게 3구역, 2구역, 1구역, 4구역 순으로 통과하며 역시계 방향을 그리게 된다. 다시 말해, 굳이 어디로 가려고 애쓸 것 없이 길이 나있는 대로 쭉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멍청하게 서 있다가 지수에게 물었다.


“문제를 풀지 말라는 거야?”

“우린 미로에서 뭔가 배우고 나가야 해. 내 생각에 여기서는….”


조용한 목소리가 푸른 바닥 위로 떨어졌다.


“‘순종’을 배우라는 거야.”


그리고 그때, 코너에서 무언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지수를 내 뒤로 확 잡아당기며 홀더에 끼워놓았던 나이프를 뽑았다. 이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경악했다.


으르렁대는 소리는 분명 야수의 그것인데 형체는 엉망진창 이어붙인 쇳덩어리였다. 놈이 주둥이를 쫙 벌리자 날카로운 톱니가 보였다. 애들이 왜 그렇게 팔이며 다리가 물어 뜯겼나 했더니 저놈 때문인 것 같았다. 지수의 말대로 미로는 한 방향으로만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놈을 쓰러트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다. 설상가상 등 뒤로 무거운 것이 쾅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수가 내 팔을 꽉 잡으며 속삭여왔다.


“뒷길이 막혔어.”


치사하게 도망칠 구석 하나를 안 준다. 나는 이를 악물며 앞만 쏘아보았다.


어떡하지?


눈앞에 있는 놈을 먼저 해치워야 할 것만 같았지만, 순간 머릿속으로 지수가 했던 말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정해진 길을 쭉 나아감으로써. 그리고 힌트가 이미 주어진 바 있다. 나는 지수에게 빠르게 물었다.


“지수야, 혹시 벽에 붙어있는 현판 없어?”


내가 로봇괴물에게 눈길을 붙박고 있는 동안 지수가 주위를 확인했다.


“있어. 한 쪽 벽에 하나씩.”


지수는 침착하게 둘 다 읽어주었다.


훈련된 개는 명령을 잘 따른다.

Dog Whistle.

 

“두 번째는 영어네. 무슨 뜻이야?”

“호루라기. 개를 훈련시킬 때 쓰는 호루라기 말하는 것 같아.”


학교에선 군견을 몇 마리 키우고 있다. 보통 교관들이 관리하지만 생도들도 전지훈련 때 산 속에서 모의수색을 하면서 데리고 다닌 적이 있다. 교관이 개에게 명령을 내릴 때 썼던 신호의 음역도 따라 익혔다. 당장 호루라기가 없기는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다.


나는 휘파람을 불 줄 알았다.


높은 바람소리에 로봇괴물이 움찔 뒤로 물러섰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휘파람에 멜로디를 붙이며 나이프를 홀더에 꽂아 넣었다. 번뜩거리는 쇠붙이는 자칫하면 놈을 자극할 수 있었다. 한 손으론 지수의 손을 고쳐 잡은 채, 다른 한 손을 들어 총 모양을 만들어보였다. 놈의 눈길이 내 손끝에 따라붙었다. 다음 신호는 좀 더 복잡하고 길었다. 하지만 틀릴 리 없다. 나는 한 번 기억한 건 절대로 잊지 않는다.


마지막 소리 끝에 손으로 지휘하자 로봇괴물이 착 엎드렸다. 개의 습성에 맞춰 프로그래밍 한 게 틀림없었으나 언제까지 먹힐 지는 알 수 없었다. 거대한 로봇괴물은 얌전해졌을 뿐 여전히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홍지수, 뛰어!”


로봇괴물의 머리를 도움닫기 삼아 뛰어올라 척추와 등뼈─로 추정되는 것들─을 밟았다. 길을 튼 뒤에는 돌아보지 않고 탁 트인 앞을 달렸다. 내 뒤를 지수가 겨우 따라왔다.

코너를 막 돌았을 무렵 등 뒤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는데, 천만다행으로 다시 한 번 무언가 쾅 내려가는 소리가 이어서 났다. 돌아보자 천정에서 내려온 벽이 보였다. 안심하고 지나치려던 찰나 무언가가 붙어 있는 게 보여서 나는 멈췄다.


“저거 아까 내려온 벽에도 있었어?”


숨을 가다듬던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이어 내 손을 살며시 놓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이상하게 섭섭해서 괜히 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뒤따라갔다.


벽에는 네모난 홈이 나있었고 그 안에 문양이 새겨졌다.


SFA의 교표였다.


생각나는 게 있어서 목에 걸고 있던 전자카드를 뺀 다음 그 위에 대봤다. 그러자 잠금이 해제되며 작은 쇠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벽 안에는 붉은 레이저 광선이 방사되고 있었다. 나는 직관적으로 이곳에서 스탬프를 찍어야 한다는 걸 눈치 채고 투덜댔다.


“모르고 갔으면 어쩔 뻔했어. 고생만 죽어라 했겠네.”


전자카드를 문 안쪽으로 넣자 3구역 섹션에 스탬프 모양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윤정한, 홍지수 페어 3구역 통과.]

 

시간은 35분이 남아있었다. 겨우 한 구역을 통과했으니 약간 빠듯한 데다 이어지는 2구역과 1구역에서도 정신이 없어서 대화라는 걸 나눌 틈이 없었다. 미로를 반드시 통과해서 점수를 잘 받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하필 장애물들이 죄다 전투로봇이었다. 지수를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2구역에서는 천정이 열리면서 날개 달린 로봇이 내려왔고, 1구역에서는 닫혀 있던 벽이 올라가며 머리에 뿔이 솟아있는 로봇이 달려들었다. 지수가 그때그때 현판 내용을 파악하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번역해줬고 내가 놈들을 처리했다. 3구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개체특성에 따른 훈련과 관계가 있었다. 요령을 한 번 파악하니 딱히 어려울 게 없었다.


마침내 4구역으로 접어들었을 때, 우리에겐 9분이 남아 있었다. 직전 구역에서 로봇을 유인하느라 활동복 상의를 버리고 와서 나는 반팔 차림이었다. 4구역은 왜인지 유독 냉기가 돌아 추웠다. 차라리 움직이면 나을 텐데 마지막이라 그런지 내도록 싸우고 뛰어야 했던 전 구역과 달리 너무 조용했다.


그래도 덕분에 잠시나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홍지수, 나 물어볼 거 있어.”


다짜고짜 말문을 트자 곁에서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봤다.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있었다. 내가 4구역으로 와서는 춥다, 춥다 엄살을 떨자 지수가 잡아준 거였다. 지금은 네가 더 차갑네, 하고.


부드럽고 미지근한 목소리. 지수가 말하는 걸 들을 때면 나는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벌써 긴장이 풀리는 건지 약간 몽롱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아직 끝까지 간 게 아니니까, 나는 정신을 다잡으며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너 세븐틴 프로젝트 알지?”


지수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마주봤다. 그러자 지수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어제 장박사님께서 특별강연 하셨다고 들었어.”

“뭐야, 다 아네?”


장난스럽게 떠보자 지수가 살짝 흘겨보았다.


“나도 발표된 내용 정도 밖에는 몰라.”


손을 놓으려고 하기에 꽉 쥐었고, 당황하며 멈춰선 지수에게 더 바짝 다가섰다.


“더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면….”

“장박사가 그랬는데.”

“장박사님.”

“그래, 장박사님이 우리가 놈들이랑 형질이 같대.”

“놈들?”


되묻는 얼굴이 순했다. 나는 지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뮤턴트들.”


아, 하고 지수가 한숨처럼 목 안을 울렸다. 나는 약간 안달이 난 채로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정말로 궁금했다. 마치 기본값처럼 프로젝트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지수는 놈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그러니까, 윤정한과 홍지수에 대해서.


“정한아.”


나를 부르던 지수가 곧 되물었다.


“네가 뮤턴트와 같다고 생각해?”

“한 끗 차이지.”


괴물이 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내 안의 힘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그에 잡아먹히거나. 그러다 미쳐버리기라도 하면 내가 인간이란 사실도 잊고 인간일 때 사랑한 모든 것들을 부숴버릴 것이다.


“알잖아, 넌.”


지수는 그 말을 정확히 읽어냈다.


“너 무섭구나.”

“아냐.”


단박에 부정했다가 좀 후회하면서 설명했다. 무섭지 않은 건 아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이쪽 아니면 저쪽, 그런 식으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싶은 건 아니다. 지수에게 그 답을 대신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저.


“그냥…, 믿음 같은 게 없는 것 같아.”

“너 자신한테?”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가 내 손 안에서 잠시 꼼지락거리며 망설였다. 나는 팔딱거리는 심장과 함께 다음에 이어질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지수는 꽤 오랫동안 커다란 두 눈을 깜빡거리다간 거의 꿈결에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다시 만나야 해.”


더 이상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말에 나는 막막해졌다. 어떻게 다시 보지. 언제, 어디에서?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지수가 나를 달래듯 내 손을 살살 흔들며 말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여기에는 없어. 그리고 우리…, 제한시간 5분 밖에 안 남았어.”


지수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미로를 거의 다 통과했다. 대화를 더 이어나가긴 어려울 것 같으니 남은 스탬프나 마저 받자. 다음에 만나는 일은 어떻게든 될 것이다. 지금 이렇게 함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나온 세 구역 모두 코너를 아홉 번씩 돌았다. 4구역에서도 여덟 번 지났으니 이제 하나만 더 돌면 된다. 그런데 갑자기 코너 쪽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화재경보기가 울리지 않는 걸 보면 설마하니 불이 난 건 아니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애당초 화재경보기를 달아놓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원체 의심이 많았고 교관들은 더더욱 못 믿는다.


“빨리 가자. 조심하고.”


서두르다 무엇을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 교육은 끝나지 않았다.


잔뜩 경계한 채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온 길목에 낮게 깔린 연기가 발목을 차갑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속에 어떤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우리 쪽으로 돌아보는 얼굴. 너무나 아름다웠고 동시에 눈에 익었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답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돌아왔다. 내 옆에서 지수가 외쳤다.


“엄마!”


지수는 내 손을 확 놓았다. 다시 잡을 틈도 없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거의 반사적으로 기억했다.


미로에 들어와서 본 두 개의 스테인드 글라스.


괜히 설치된 장식품 같은 게 아니었다. 각 구역에서 맞닥뜨린 로봇괴물들은 그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형상이었다.


개처럼 길들인 사자, 비둘기처럼 길들인 독수리, 양처럼 길들인 황소.


우리는 첫 번째 스테인드 글라스에 있던 것들을 딱 하나만 빼고 다 만난 셈이었다.


천사.


“그런데 지수야, 이 천사는 좀 이상하다.”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스테인드 글라스를 가리켰었다.


“머리가 없네.”


그때 지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달렸다.


눈앞에서 커다란 날개가 펼쳐졌다. 손끝에 지수의 목덜미가 스쳤고─.


콰과광!


심장을 터트릴 듯한 굉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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