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SE! 의 3부입니다.

1~2부를 읽으셔야 이해가 용이합니다.






REPLAY

02


W. 롤라





BGM: Cat Sister’s Swing, Swing It









  김민석을 만난 건 런웨이 앞에서였다. 눈이 다 아플 정도로 터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 녀석을 찾은 건 행운이었다. 뭔 시장 바닥도 아니고 왜 이렇게 시끄러워. 들리는 노래 소리도 시끄럽고, 사람들 대화도 시끄럽고 그냥 모든 게 다 소음처럼 느껴졌다. 그건 어느 정도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편두통 때문이기도 했다. 한동안 안 아프다 했더니 요즘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단순 피로 때문이라고 했지만 요즘엔 촬영도 매일 안 하고 종종 쉬는데 피곤할 게 뭐가 있지. 차기작 준비하면서 몸 만드는 일밖에 안 하는데 말이야. 나는 나를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든 김민석에게로 다가갔다. 내 오른쪽에는 김민석이 앉고 왼쪽에는 오며가며 본 여자 아이돌이 앉았다. 요즘 TV만 틀면 안 나오는 곳이 없는 유명 아이돌이었다. 거의 손 한 뼘 만한 구두를 신고 있던 그 아이가 날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고, 바로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김민석에게는 이미 벌써 인사를 한 것 같았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받아주고 자리에 앉았다. 





  “어, 그래. 미안한데... 이름이 뭐라고?”

  “... 아요.”

  “어?”

  “솔아요. 김솔아입니다.”

  “아, 아, 그래. 미안. 여기가 너무 시끄러워서 잘 안 들리네. 지난번에도 봤던 것 같은데, 그치?”

  “네! 연기대상에서 인사 드렸어요.”

  “아, 그렇네. 기억 못 해서 미안. 알다시피 내가 후배가 좀 많아서.”





  내 말에 솔아가 알겠다는 듯 예쁘게 웃었다. 나는 솔아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김민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목소리가 너무 안 들려서 우리는 거의 다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쇼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나는 김민석의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속삭였다.





  “야, 진짜 고막 터지겠다. 이건 뭐 쇼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여기 디자인도 좀 봐. 누가 했냐, 진짜 감각 한 번 존나 구리다.”

  “그냥 좀만 보고 나가자.”

  “아, 안 돼. 나 선물은 주고 가야 돼. 안 그럼 종대한테 혼나.”

  “그러고 보니까 김종대는 어디 두고 왔냐?”

  “종대 바빠.”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플래시는 쉴 새 없이 터졌다. 기자들은 아예 우리와 마주보며 일렬종대로 앉아 있었고, 그렇게 우리의 모든 모습을 끊임없이 담아냈다. 나는 그 중에서 영상을 찍고 있는 ENG 카메라를 확인하고, 민석이에게 귓속말을 할 때에도 입가를 가리며 말을 했다. 





  “너 근데 진짜 종대랑 같이 살게?”

  “걔가 그래? 어젠 또 싫다더니.”

  “다시 생각해봐. 김종대 진짜 잘 때 졸라 시끄러워. 걔 한 86세쯤 되면 이 다 없어질 걸. 이갈이 엄청 심하게 하...”

  “너만 하겠냐?”





  피식 웃는 김민석을 보면서 나는 헛기침을 했다. 아니, 내가 시끄러우면 또 얼마나 시끄럽다고. 그냥 좀 굴러다니고 잠꼬대 하고 그러는 것뿐인데 말이야, 어? 그리고 내가 좀 그러면 어때서! 내가 또 자는 모습이 얼마나 천사 같고 귀엽고 예쁜데! 그런 얼굴로 그렇게 소리 좀 낼 수 있지! 나는 녀석을 얄밉게 째려보고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김민석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김종대 보고 좋게 말할 때 짐 싸서 들어오라고 해. 이번 주 내로 안 들어오면 다신 기회 안 줄 거니까 잘 생각하고.”

  “내가 무슨 갈매기야? 대신 전달하게?”

  “갈매기가 아니라 비둘기.”

  “갈매기나 비둘기나! 무섭게 생긴 건 똑같지!”





  김민석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뭐야! 변했어, 변했어! 예전에 내가 이렇게 헛소리하면 피식 웃기라도 했으면서! 이젠 웃지도 않고! 나는 왜 웃지도 않냐고 녀석을 닦달하다가 갑자기 노래가 끊겨서 고개를 들었다. 이제 쇼가 시작되려는 것 같았다. 여태와는 달리 조금은 잔잔하고 조용한 노래가 흘러나왔고, 밝던 조명도 꽤나 어두워졌다. 나는 첫 번째 워킹을 한 번 보고 다시 김민석에게 속삭였다.





  “종대가 왜 망설이는지 아냐. 종대 요즘 만나는 사람 생겨서 그래.”

  “그러니까 들어오라는 거야. 그 새끼 그 여자 왜 좋다고 쫓아다니는 건데? 그 기지배 알아주는 바람둥이야, 몰랐어?”

  “뭐?! 이 미친 새끼가!”

  “내가 달리 그런 말 했겠냐. 이 새끼 그냥 계속 밖에 뒀다간 진짜 이상한 여자한테 코 꿰여서 장가라도 간다고 지랄할 것 같아서 그런다. 네가 안 데리고 살면 내가 데리고 살 거야.”

  “하여튼 김종대 이 새끼, 어휴. 나는 또 얘가 간만에 좋다고, 너~무 좋다고 막 자랑도 하길래 좀 괜찮은가 했더니. 야, 진짜 꼭 데리고 살아라. 내가 짐 싸서 들여보낼게.”





  내 말에 김민석이 조용히 웃었다. 나는 쇼 내내 김민석과 떠들며 꽤 재미있게 보았다. 사실 무슨 컨셉인지, 어떤 옷이 나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아주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는 것만 선명하게 남을 뿐이었다.


  쇼가 끝나고 포토타임도 가지고, 내 할 일이었던 선물 전달까지 마치고 나서야 쇼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민석이와 함께 자주 가는 바에 들어섰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장이 안 쪽의 퍼스널 룸으로 안내했고, 우리의 전담 바텐더가 뒤이어 들어왔다. 바텐더와도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겨우 우리 둘만 방에 남게 되었고, 우리는 소파에 편하게 늘어져 칵테일을 마셨다.





  “요즘엔, 괜찮아?”

  “뭐가?”

  “세훈씨 결혼한 거.”





  누워 있다가 일어나 핑거 푸드를 하나 집어 먹었다. 입 안에 쏙 넣자마자 갑자기 듣게 된 세훈이 얘기에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그러다 아아- 하고 피식 웃었다.





  “괜찮아야지, 뭐. 어쩌겠어.”

  “사실 그거 세훈씨가 하자고 한 줄 알았는데.”





  처음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다들 똑같은 반응이었다. 다들 내 표정부터 살폈고, 내가 다른 말을 꺼내기 전까지 말을 이어나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다 내 선택이었다.


  가장 먼저 설득한 사람은 오세훈이었다. 그리고, 가장 어렵게 설득한 사람도 녀석이었다. 오세훈은 내가 그 말을 꺼내는 날부터 정확히 일주일 동안 나를 보지 않았다. 연락도 받지 않았고, 내가 회사에 찾아가면 만나주지도 않았다. 나는 지치지 않고 녀석을 찾아갔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녀석도 질렸는지 그제야 나를 만나주었다. 그리고 그런 내게, 오세훈은 정말 크게 화를 냈다. 내가 왜 자기를 결혼시키려고 하는지 일주일 동안 많이 고민해봤고, 그 시간동안 내가 생각을 바꾸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권유를 철회할 생각 따위 없었다. 애초에 그건 권유가 아니었다. 오세훈과 내가 앞으로도 함께 살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오세훈은 정말 똑똑한 녀석이었다. 자기가 가진 걸 최대한으로 이용할 줄 알았고, 설사 가진 게 없다 해도 어떻게든 쥐어 짜내 자기 자릴 만들 놈이었다. 하지만 그런 오세훈도 이길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건, 어머니였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아도 녀석은 어머니를 끔찍이 생각했다. 어머님은 어린 나이에 재벌가에 시집을 와 모진 시집살이와 등쌀에 시달린 분이었다. 그건 남편이자 그룹 총수인 회장님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연예인이라 무시당했고, 광대라 조롱당했다. 오세훈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녀석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명석하고 뛰어났던 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가 아들의 결혼을 바란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 해서 내가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왜? 돈 좀 던져주면 물러날 줄 알았어? 나도 그만큼 돈 많은데? 연예인 생활 못 하게 막기라도 할 건가? 내가 관둔다고 하면 슬퍼할 사람은 내가 아닐 걸? 나는 처음부터 오세훈을 놔줄 생각 따위 없었다. 나는 오세훈을 사랑하는 거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거래를 했다.


  결혼할 거예요. 제가 아니라, 다른 여자랑.


  내가 그 겨울에 어머님을 찾아가 내려놓은 말이었다. 어머님은 모진 분이 아니었다. 그런 분이니 여태 자기 스스로가 아닌 세훈이의 힘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선지 나에게 처음 결혼에 대해 운을 뗄 때에도 상당히 망설이시는 게 보였다. 그 선수를 내가 먼저 쳤고, 그렇게 주도권을 잡았다. 어머님은 세훈이가 결혼을 하지 않아 빼앗길 그룹 내의 모든 것을 우려하셨다. 지금은 최정상에 있지만 점차 그 지위를 빼앗길 것이고, 가족이라 불리는 한국식 울타리가 없다면 그건 조금 더 빠를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제안을 했고 어머니는 알겠다 하셨다. 나는 멍청한 딴따라가 아니었다. 이 바닥에서 구른 게 몇 년인데 어떻게 바보 같이 내 걸 빼앗기겠어. 어머님도 그걸 알아보신 것 같았고 그래서 거래는 더 쉬웠다. 


  조건은 단순했다. S그룹 회장의 셋째 손녀딸인 정연과 결혼할 것. 아이는 가지지 않을 것. 그리고,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을 것. 이게 다였다. 오세훈이 결혼만 한다면 내가 녀석의 옆에 지금처럼 이렇게 있는다 한들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오세훈과, 녀석의 어머니와, 또 형 그리고 누나들의 사랑을 받는다 해도, 아버님 한 분이 싫어하신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호기롭게 그룹 전체를 지휘하시는 분이었고 그래서 오세훈 역시 그 분의 말이라면 일단 듣고 보는 편이었다. 아버님은 녀석이 결혼을 한다 하니 그 외의 조건은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나는 나와 오세훈 주변의 모든 이들을 한 명씩 설득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녀석을 결혼시켰다.





  “정연씨는 요즘 뭐 하셔?”

  “그냥, 회사 일 하지.”

  “세훈씨랑 같이 사나?”

  “살겠냐?”





  내 말에 김민석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연이는, 나의 옛 여자 친구였다. 사실 여자 친구라 하기도 좀 뭐 할 정도였다. 내가 아이돌 활동을 할 때 한 달 정도 만난 녀석이었고, 그 때에는 그저 소녀팬의 소원 하나를 들어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때 녀석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었다. 아이돌이랑 한 번 사귀어 보는 게 소원이라 했고, 나는 그 소원을 들어준 것뿐이었다. 사귀는 동안 뭘 특별히 해본 것도 아니었다. 안아본 적도 없고 뽀뽀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손 한 번 잡아 달라고 해서 한 번 잡아준 게 다였다. 연이가 원한 건 내 얼굴이나 몸이 아니라 정말 ‘연예인 남자친구’였다. 철이 없었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재벌 영애들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걸 지도 몰랐다. 연이는, 그렇게 가끔은 아이처럼 순수하지만 또 때로는 오세훈보다 더 의중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다 오랜만에 연락을 하게 된 건 오세훈의 결혼 상대 후보에 녀석이 있어서였다. 나는 여러 리스트를 두고 어머님과 함께 오세훈의 신부를 물색하다 연이를 보았다. 맑게 웃고 있는 연이의 사진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생각을 굳혔고, 그 날 바로 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이 역시 이미 연락, 아니 통보를 받은 것 같았다. 나는 그 날 밤 연이를 만났고 처음으로 연이의 눈물을 보았다.


  그 자식이랑 결혼하기 싫어.


  나를 보자마자 연이가 처음 한 말이었다. 그렇게 내 품에 안겨서 우는 연이를 보며 나는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그 날 나의 계획을 어느 정도 말해주었다. 어느새 녀석은 울지 않았고, 내 말을 그저 듣기만 했다. 연이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걸 지도 몰랐다. 사실 이 정재계에도 파다한 소문은 아니었으니까.


  K가 오세훈이, 김준면을 만난대. 그래, 그 김준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비밀. 연이도 설마 설마 했겠지. 하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말을 듣고 나니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연이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녀석이 입을 열 때까지 작은 손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그러다 거의 삼십 분이 다 지나서야 연이가 입을 열었다.


  결혼할게, 그 사람이랑.


  그리고 내 손을 꽉 잡았다. 크고 맑은 눈에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고, 그 눈을 깜빡이던 녀석이 이내 내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나는 연이를 한참동안 보다 손을 뻗어 꽉 끌어안았다. 나의 애인과 결혼을 할, 새 신부였다.





  “정연씨랑 세훈씨 사이는 좋아?”

  “좋으면 결혼했겠냐.”

  “원래 보통 결혼은 서로 좋아서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둘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





  내 말에 김민석이 피식 웃었다. 나 역시 실실 웃고 한 모금 정도 남아 있던 칵테일을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서 너 계약은 언제 끝난다고?”

  “7월.”

  “그거 만료되면 우리 회사로 오는 거지?”

  “어. 근데 아직도 소속 연예인이 너밖에 없냐?”

  “날 위해 만든 회산데 당연히 나밖에 없지.”

  “이름은 좀 바꾸면 안 되냐? 쪽팔려.”

  “왜! 김브로가 뭐 어때서! 소속사 대표도 김씨! 소속 연예인도 김씨! 종대가 김원이고 내가 김투니까 너는 김쓰리 해라!”

  “... 쪽팔려, 진짜.”





  인상을 쓴 김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턱을 괴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녀석이 우리 회사에 들어오면 좋은 점을 줄줄 늘어놓았다. 근데 진짜 좋을 걸? 왜냐하면 소속사 대표도 너무 좋고 선배도 너무 너무 좋을 거거든. 이 회사가 그냥 회사야? 세훈이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기획사라구. 모든 일이 다 내 중심으로 돌아가고 모든 직원들이 다 날 위해 일하지. 그리고 우리 뒤에는 오세훈이 있고, 그 말은 즉 K가가 우릴 받쳐주고 있다는 거야. 진짜 최고 아니야? 나는 히히 웃으면서 우리 회사의 장점을 끝도 없이 읊었다.


  그러다 술자리가 파한 건 오세훈의 전화가 와서였다. 방송국 문제 때문에 이 시각까지 야근을 하던 오세훈이 날 데리러 왔고, 바에 도착해 내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나는 김민석과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며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 보닛에 살짝 걸터앉아 핸드폰을 보던 오세훈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우리를 보자마자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오세훈은 김민석에게 깍듯하게 목례를 하고 손을 뻗었다. 전혀 취하지 않은 민석이는 나를 무슨 짐짝 던지듯 세훈이에게 밀었다. 나는 비틀거리다 세훈이 품에 안겼다.





  “좀 많이 마셨어요. 말릴까 했는데 데리러 온다고 하셔서 그냥 뒀습니다.”

  “예, 괜찮습니다. 민석씨는 저 차 타시면 됩니다. 민석씨 차는 자택에 가져다두도록 하겠습니다.”





  오세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호원 한 명이 녀석을 다른 차로 안내했고, 다른 경호원이 두 손을 내밀었다. 김민석은 그 사람에게 자기 차키를 건넸다. 나는 오세훈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배시시 웃었다. 





  “밍~~ 쏙~~~!! 잘 가~! 내 꿈 꿔~!”





  김민석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녀석이 다른 차를 타고 사라질 때까지 헤실헤실 웃었다. 그리고 오세훈에게 부축 아닌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녀석은 내 앞에 안전벨트를 꼼꼼하게 매어주고, 안 쪽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대시보드에서 내 전용 빨대를 꺼내 꽂아 내밀었다. 나는 두 손으로 생수를 꼭 쥐고 물을 쪽쪽 빨아마셨다. 오세훈은 조수석 헤드를 잡은 채 그런 날 잠시 바라보았다.





  “얼마나 마신 거예요, 준면씨?”

  “몰라용~”

  “제 이름은 아시죠?”

  “세호닌가~?”





  분홍색 빨대를 입에 문 채 히- 하고 웃자 오세훈도 피식 웃어버렸다. 내가 물을 반 병 쯤 마셨을 때 녀석은 차를 출발시켰고, 나는 예쁜 밤하늘을 보면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렇게 별다른 일 없는 귀가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집까지 거의 반쯤 가고 있을 때, 나는 다 마신 생수병으로 오세훈의 팔을 내리쳤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녀석이 황당한 표정으로 날 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화가 났다. 나는 페트병이 구겨질 정도로 세게 다시 한 번 녀석의 팔을 때렸다. 하지만 이내 녀석이 그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씩씩거리면서 오세훈을 노려보았다.





  “그걸 왜 지금 말해?!”

  “급하게 정해진 거라니까. 말했잖아.”

  “급하면 다야? 그게 뭐 만능열쇠라도 되는 줄 알아?”

  “그럼 달리 뭘 어떻게 설명할까. 급하게 3주 동안 미국 출장 가야하고, 출국하기 전에 일부러 시간 내서 이렇게 너 보러 왔는데. 더 이상 어떻게 더 말해야 해?”

  “날 3주나 못 보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어떻게 논리가 그렇게 튀어.”





  한숨을 푹 내쉰 녀석이 바뀐 신호를 보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차 안에 아무렇게나 빈 페트병을 던지고 창문을 끝까지 다 열었다. 찬바람이 내 얼굴을 마구 때려댔지만 화가 나는 건 여전했다. 그냥 며칠 출장 가는 것도 아니고 3주나 가 있는데 그걸 지금 말한다고? 그것도 당장 몇 시간 후에 출국해야 하는데? 혼자 씩씩거리면서 찬바람을 맞는데 갑자기 다시 창문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 돌려 오세훈을 노려보고 버튼을 꾹 눌렀다. 하지만 운전석에서 올려 버리는 거라 내가 조수석에서 암만 다시 내린들 소용이 없었다. 창문은 다시 닫혔고, 나는 이제 아무런 냉기도 느껴지지 않는 창밖을 보다 시선을 옮겼다. 오세훈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었다.





  “감기 걸려.”

  “열어.”

  “오늘 미세 먼지도 심하댔어.”

  “열라고 했다.”

  “불만 있으면 투정 부리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





  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건 오세훈도 마찬가지였다. 내 쪽은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그저 평소처럼 특유의 그 무심한 표정으로 정면에만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지랄하는 것쯤이야 여태 오백 번도 더 봤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잔뜩 못마땅해져서 녀석을 보다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네가 안 가면 뭐 일이 안 돌아가기라도 한 대?”

  “아마.”

  “네가 뭐라고? 어? 별 것도 아닌...”

  “사장.”

  “.....”

  “총괄 사장인데 가지 말까? 김 비서 보고 대신 싸인하고 대신 얘기하라고 할까?”





  하여튼 존나게 재수 없는 새끼. 나는 인상을 쓰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나를 보며 오세훈이 조용히 웃는 게 느껴졌다. 아, 저런 태도가 싫다니까? 결국 나는 너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밖에 없단 말이야. 지금은 당연히 나 화내도 되는 상황 아닌가?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3주 동안 미국 출장을 간다고? 그것도 지금 당장? 그리고 그게 사실 확정도 아니라고? 3주가 될지 4주가 될지 잘 모르겠다고? 이 새끼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만약 3주에서 하루라도 넘어서면 내 생일을 같이 보내지 못 한다는 걸 알고는 있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내가 화 안 나고 배겨? 무슨 김 비서한테 스케쥴 알리듯이 나한테도 그따위로 통보하고 지랄이야.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오세훈을 용서해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화 풀렸어요, 여보?”





  개새끼. 저 새끼는 지 얼굴이 무기라는 거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나 보고 저렇게 뻑 가게 웃고 지랄이지. 어휴. 나는 더 말 않고 그저 창밖만 보았고, 오세훈은 이따금 내 다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말을 건넸다. 몰라, 씨발. 


  우리 집 주차장에 도착 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차에서 내렸다. 평소대로라면 오세훈이 조수석의 문을 열어줄 때까지 안에서 얌전히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차가 멈추자마자 바로 뛰어내렸고, 오세훈이 날 잡기도 전에 휘적휘적 걸어갔다. 아파트가 아닌 저택으로 이사 한 지 꽤 되었고, 그래서 이 주차장에도 우리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의 차를 모조리 여기에 가져다 놓았으니 주차된 차는 총 아홉 대가 있긴 했다. 하지만 모두 다 우리 둘만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집으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런 내 뒤로 오세훈의 구두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가도 후회 안 하겠어?”

  후회는 무슨.

  “이제 3주 동안 못 보는데.”





  좆 까라 그래. 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버튼을 누르고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의 오세훈과 눈이 마주쳤다. 깔끔한 군청색의 수트. 그리고 그 바지에 가볍게 손을 찔러 넣은 녀석은 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메롱- 하고 혀를 내민 후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문 사이로 보이는 오세훈의 모습은 여전히 얄밉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질 못 했다. 현관에 도착했고, 나를 기다리던 고용인들이 꾸벅 인사를 숙였지만 그저 가만히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결국 다시 지하 2층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다시 열렸고,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버렸다. 내리지도 못 했다. 왜냐하면, 오세훈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녀석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올라간 그 자리에 서서,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날 보자마자 생긋 웃었다.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그렇게 준비된 다정함을 건네면서.





  “거 봐.”

  “.....”

  “화낸 거 미안해서 다시 왔지?”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손이 내게로 뻗어졌다. 나는 그 손을 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그 손을 잡으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오세훈은 그런 나를 따스하게 끌어안았다. 내 손을 살짝 잡아당겨 제 품에 안은 녀석은 빈틈 하나 없이 내게 다가왔다.





  “갑자기 가버린다고 말해서 미안해. 너 화나는 거 당연해.”

  “... 화 다 풀렸어.”

  “풀렸어? 오늘은 생각보다 빨리 풀어주네. 우리 준면이 너무 착하다, 그치.”





  빨개진 눈가를 슥슥 비볐다. 그런 날 보던 오세훈이 이내 피식 웃으며 내 두 볼을 잡았다. 그리고 마구 비비던 내 손을 잡고 대신 제 큰 손으로 내 눈가를 살살 닦아주었다. 





  “생일 전엔 꼭 돌아올게. 매일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할게. 전화해서 오늘 준면이 뭐 했어요, 뭐 먹었어요- 이런 거 다 들어줄게. 자, 약속.”

  “이 말하려고 다시 왔어? 비행기 시간 늦는 거 아니야?”

  “좀 늦추면 되지. 어차피 전용기인데.”





  갑자기 또 재수 없어지네. 그리고 오세훈은 이런 내 마음을 또 읽었는지 피식 웃었다. 크고 따스한 손이 내 머리를 부스스 흩트렸고 나는 그런 녀석을 올려다보며 훌쩍거렸다.





  “내가 다시 올 줄은 어떻게 알았어?”

  “자기야.”

  “어.”

  “우리 사귄 지 6년이야.”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배시시 웃는 나를 보며 오세훈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내 이마에 꾹 입을 맞추었다.





  “나한테 그렇게 화내고 가버리면 너 또 혼자 속앓이 할 거잖아. 그렇게 모진 말하지 말 걸. 그냥 웃어줄 걸. 괜찮다고 할 걸, 이러면서. 네 잘못 아니어도 네 잘못이라 생각할 거고.”





  하여튼 오세훈 이거 진짜, 어휴. 나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아는 오세훈을 빤히 보다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그저 녀석의 품에 가득 안겼다. 





  “그렇게 날 잘 알면 그냥 가지 왜 피곤하게 왔어?”

  “너만 아쉬워? 나도 아쉬워, 나도. 이렇게라도 안 보고 가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서 왔지.”

  “힝, 그럼 내가 차까지 데려다줄게.”

  “정말? 영광이네요, 준면씨.”





  해사하게 웃은 오세훈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 역시 녀석의 허리를 끌어안고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녀석은 운전석에 타지 않았다. 뒷좌석에 오세훈이 타자 멀찌감치 서 있던 경호원들이 우르르 차에 올라탔고, 나는 살짝 허리를 숙여 오세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녀석의 손을 매만지다 손등에 꾹 키스도 했다.





  “5월에 봐요, 자기야.”

  “응. 얼른 들어가. 피곤하겠다.”

  “내 생일 전에 꼭 와야 돼. 알았지?”

  “그럼, 그럼. 갖고 싶은 거 생각해 놔.”

  “그건 이미 가졌어.”





  차 안으로 좀 더 몸을 숙였다. 그리고 말간 녀석의 볼을 어루만지며 가볍게 키스를 했다. 촉,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고 그러자마자 씨익 웃었다. 그건 오세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세훈을 태운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 벌써 보고 싶다. 


  오세훈이 한국을 떠난 뒤 나도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영화 크랭크인이 생각보다 조금 앞당겨졌고, 그래서 계획보다 더 빨리 움직이게 되었다. 내가 바빠진 덕에 김종대 역시 바빠졌고, 내 팀 전체가 하루 종일 나만 따라다니며 일을 하게 되었다. 새로 들어가는 영화에서 맡은 배역은 저승사자였다. 나처럼 깜찍하고 귀여운 저승사자가 또 있을까 싶지만 그래서 이전에 했던 배역과는 조금 달라 신선했다. 나는 이동하는 벤 안에서 대본을 읽다가 조수석에 앉은 김종대를 불렀다.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고 있던 김종대가 고개를 돌렸고, 나는 대본을 덮으며 헤드를 잡았다.





  “어제 어땠어?”

  “뭐가?”

  “어제 김민석 집으로 들어갔다며.”

  “근데?”

  “첫날밤 어땠냐구!”





  내 말에 김종대가 뭔 소리야- 하고 흘겨보았다. 나는 실실 웃으면서 아예 조수석 헤드를 끌어안았다.





  “민석이가 방 하나 줬어?”

  “그럼 당연하지. 형 집에 방이 몇 갠데. 아, 근데 진짜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민석이 형... 결벽증이야?”

  “그냥 깔끔한 걸 좋아하는 거지.”





  그런가- 하고 가볍게 중얼거린 김종대가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내렸다. 우리는 회사나 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촬영장에서 내렸다. 감독님과 스탭들, 그리고 동료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고 내 대기실로 들어오니 이제야 좀 조용한 것 같았다. 나는 의자에 드러 누우며 전화를 걸었다. 대본은 여전히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여태 수십 번도 넘게 봐서 벌써 손때가 탄 대본이었다. 한참동안 가던 신호가 끊기고 이내 도경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전화 좀 상냥하게 받아라.”

  [내가 너한테 상냥해서 뭐 해. 아무튼 왜. 나 바빠.]

  “아니~ 나 오늘 크랭크인이라구~”

  [알아. 나도 기사 정도는 본다.]

  “원작 작가면 이런 기념비적인 날에 촬영장에 좀 모습도 비추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엿.]





  나는 피식 웃고 발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이렇게 전화해서 물어보기만 하면 잘만 대답해주는 녀석이었다. 이렇게 같이 작업하는 게 처음도 아니니 더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나 대본 한 100번은 읽은 것 같아.”

  [422번 더 읽으면 되겠네.]

  “근데 나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너 수입 얼마나 들어 오냐? 억 단위지?”

  [매 주?]

  “... 주마다 그만큼 들어온다고? 너 뭐 하는 새끼냐? 와, 그러면서 맨날 나보고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난리였냐?!”

  [지는 더한 게. 할 말 다 했냐? 그럼 끊어.]

  “아까부터 왜 자꾸 끊으래. 뭐 하는데?”

  [요리.]

  “뭐 해?”

  [밀푀유 나베.]

  “대박 맛있겠다. 백현이랑?”

  [어.]

  “맨날 백현이한테만 맛있는 거 해주고!”

  [넌 이사님 있잖아.]





  도경수의 말끝에 약간의 미소가 어렸다. 아주 예전부터 나와 오세훈을 본 녀석이어서 그런지, 도경수는 아직도 오세훈을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가 않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이 그냥 그렇게 부르도록 놔두었다. 





  [이사님은 근데 왜 요즘 나한테도 전화를 하고 난리시래.]

  “너한테? 왜?”

  [너랑 좀 놀아달래.]

  “맞아! 나랑도 놀아줘! 놀아줘!”

  [야, 나보다 네가 더 바쁘거든? 네가 날 놀아줘야 할 판이야. 잠은 잘 자냐?]

  “어, 뭐 그냥.”

  [어, 뭐 그냥 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잘 못 자나 보네. 바빠서야,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야.]

  “바빠서 그렇지.”





  도경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대기실 문이 열리고 잠깐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종대가 들어왔다. 종대는 내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밀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뭐 어디 특별히 아픈 데는 없어.”

  [그래야지. 오늘 촬영 전에 잘 먹... 야!]





  움찔 놀라 귀를 뗐다가 다시 받았다. 하지만 경수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뭔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아니 떨어트리고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았다. 백현이에게 뭔가 훈계를 하는 듯한 소리가 멀리서 들렸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백현이가 요리에 뭔가 이상한 짓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베에, 왜 설탕을 넣어? 물론 설탕은 맛있지만! 거기에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고 있는데! 나는 핸드폰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결국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아, 나도 세훈이랑 이렇게 요리하면서 푹 쉬고 싶다.


  촬영 첫 날이기 때문에 내 분량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나는 내 분량 촬영을 마치고 메이크업을 지운 후 다시 벤에 올라탔다. 그리고 향한 곳은 아까 아침에 들렀던 샵이었다. 저녁에 연이 어머님의 생신 기념 파티가 있었고, 그 곳에 가려면 지금 바로 다시 메이크업을 받고 옷까지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샵까지는 꽤 멀기 때문에 한참을 낑낑거리고 갈아입었음에도 여전히 시간이 남았다. 나는 후- 하고 겨우 한숨을 돌린 후 다시 의자에 기대앉았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내 옷을 정리하던 스타일리스트들을 보았다.





  “회사 들어가?”

  “네. 정리 할 것 좀 하고 가려구요.”

  “피곤하겠다. 택시 타고 갈래?”

  “괜찮아요. 지하철 안 끊겼어요.”

  “아는데, 택시가 더 편하잖아. 데려다 주면 더 좋을 텐데 그럼 얘가 또 피곤하니까. 너도 일찍 들어가. 나 내일은 내 차 끌고 갈 거니까 데리러 안 와도 되고.”





  나는 지갑을 꺼내 스타일리스트들과 로드 매니저, 그리고 운전을 하는 매니저에게 다 넉넉하게 택시비를 챙겨주었다. 그런 나를 심드렁하게 보던 김종대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내가 택시비 다~ 챙겨주고 있거든요?”

  “야근하는 날에만 주잖아, 너.”

  “안 하는 날에도 주거든요?”

  “아,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내 스텝들한테 인센티브도 못 주냐?”

  “그럼 나도 줘!”





  빽빽 소리를 지른 김종대가 내게 두 손을 벌렸다. 얼씨구? 이게 목적이었구만? 나는 피식 웃고 다시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어느새 씨익 웃고 있는 김종대를 보며 오만 원짜리 지폐를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주었다.





  “자, 대표님은 클라스가 다르게 줘야지. 이 정도면 되십니까, 대표님?”

  “영광입니다~”





  귀여운 입꼬리를 올리며 생글생글 웃는 김종대를 보니 잠시나마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벤 안의 스텝들과 신나게 떠들다 샵에서 내렸고, 바로 또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으러 들어갔다.


  샵에서 나와 다시 파티장으로 가는 길에, 서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훈이의 조카들 중 나와 가장 친한 녀석이었다. 나는 내 손목을 가져다 커프스 버튼을 세심하게 달아주는 스타일리스트를 보며 전화를 받았다.





  “서현이~”

  [삼촌!]





  발랄한 목소리에 내 기분까지 좋아졌다. 나는 삼촌 소리에 기분이 좋아져서 히히 웃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학교 아니야?”

  [오늘 주말이거든요~ 삼촌은요?]

  “나는 파티. 누나들은 못 오신다더라.”

  [아, 요즘 좀 바쁘시다고 한 것 같아요. 저도 통화한지 꽤 됐거든요.]

  “아, 정말? 어쩐지. 근데 무슨 일 있어?”

  [아니요, 별 일은 없어요.]





  나는 핸드폰을 반대쪽 귀에 가져다대며 다른 쪽 손목도 내밀었다. 반짝거리는 예쁜 다이아몬드가 손목에서 빛나고 있었고, 그 위에는 나와 오세훈이 맞춘 커플 팔찌가 여전히 자리했다. 나는 그 팔찌를 빛에 기울여보다가 다시 들린 서현이 말에 생긋 웃었다.





  [다다음 주쯤에 학기 끝나고 한국 들어갈 것 같아서요. 그냥 그거 말씀드리려구 전화 드렸어요.]

  “아, 진짜? 방학이라 들어오는 거야?”

  [네~ 슬슬 대입 준비도 하구요.]

  “대학 진짜 한국에서 다니게?”





  서현이는 예전부터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단 의사를 내비쳤다. 세훈이도 그렇고 K가 사람들 모두가 다 외국에서 대학을 나왔기에 서현이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외국보다 한국에서 배울 게 더 많을 것 같다는 게 녀석의 의견이었고, 다들 이에 별 이견은 없는지 그렇게 결정내린 것 같았다.





  [네.]

  “서준이도?”





  서준이라는 말에 서현이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순간 통화가 끊긴 줄 알고 핸드폰을 다시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아, 죄송해요. 잠깐 뭐 좀 보느라구요. 걔는 저랑 같이 안 들어갈 것 같아요.]

  “같아요는 뭐야? 둘이 얘기 안 해봤어?”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해서요. 몰라요. 지가 알아서 하겠죠.]





  평소 서현이답지 않은 말투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서현이가 먼저 말을 해주지 않으니 그저 입을 다물었다. 일부러 먼저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양 쪽 다 예쁘게 자리한 다이아몬드 커프스 버튼을 보고 다시 의자에 편하게 앉았다.





  “알았어. 한국 들어오면 꼭 연락해. 삼촌이 촬영 있어도 꼭꼭 달려갈게. 아, 세훈이는 만났어?”

  [삼촌 아래층에 있어요. 바꿔 드릴까요?]

  “아냐. 이따 밤에 하지, 뭐. 근데 걔는 왜 너희 집에 가 있어?”

  [김서준이랑 얘기하고 있어요. 쟤가 진짜... 아, 아니에요.]





  역시 서현이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런 서현이의 대답을 기다리다 빙긋 웃었다.





  “알았어. 한국 들어오면 말해줘. 삼촌 이제 들어갈게. 전화하고 싶을 때 해~”

  [네~ 삼촌 술 좀만 드시구요.]

  “야, 나 술 많이 안 마셔!”

  [삼촌한테 들은 게 있는데요. 삼촌 출국하던 날.]

  “그건...! 야, 됐어. 아, 그 새낀 진짜 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내 대답에 서현이가 꽤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현이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바로 벤에서 내렸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바로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어렸을 때만 해도 이런 파티에 끌려오면 정말 모든 게 다 지루하단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이 조금 희미해졌다. 이런 곳에 와도 나와 마음이 맞는 친한 사람들을 꽤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만 해도 그런 사람이 경수와 민석이, 그리고 종대 정도밖에 없었는데 이젠 정말 많으니까. 지금만 해도 그렇고.





  “자, 오늘은 특별히 기회 줄게. 둘 다 내 손등에 키스해도 좋아.”

  “응, 지랄하지 말고 앉아, 김준면.”





  나는 히히- 하고 웃으면서 들었던 두 손을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 날 보는 박찬열과 화인이의 눈도 역시 웃고 있었다. 내가 앉자마자 찬열이는 샴페인 한 잔을 잡아 내 앞에 놓았고, 화인이는 살짝 삐뚤어진 내 타이를 다시 똑바로 해주었다. 





  “좀 늦었네?”

  “촬영하고 온 거라. 어머님은 뵙고 왔어?”

  “어. 안 그래도 네 얘기 하시더라. 이따가 연이랑 같이 가.”





  박찬열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연이를 찾는 것 같았다. 나와 오세훈, 그리고 박찬열 이 셋 중에서 연이와 가장 연관 깊은 사람을 찾으라면 아마 박찬열일 것이다. K가와 Y가도 물론 인척 관계긴 하지만 S 그룹 회장의 첫째 딸이 Y 그룹의 일원이기도 하고, 서로 함께 하는 사업도 꽤 많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이와 박찬열은 어렸을 때부터 꽤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물론 워낙 넉살 좋은 녀석이니 웬만한 재벌가 자제들과 두루두루 친하긴 하지만, 연이는 조금 달랐다. 나는 배가 고파 끼니가 될 만한 음식 하나를 부탁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너 첫공 언제랬지?”

  “6월 2일.”

  “와, 진짜 얼마 안 남았네. 네가 처음이야?”

  “아니, 아니. 진짜 첫공은 5월 24일이고 내 첫공이 6월 2일. 5월 마지막 주에 프레스콜은 할 것 같아.”





  화인이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박찬열을 보았다. 그도 그럴 게, 박찬열의 시선이 오로지 화인이만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화인이는 딱히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열은 입가에 미소를 단 채 녀석을 계속 바라보았다. 나는 그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피식 웃었다.





  “너희도 결혼 생각 없어?”





  결혼 얘기에 잠깐 다른 곳을 보던 화인이가 내게 시선을 돌렸고, 그건 박찬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이내 둘의 시선이 닿았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고민했는데 동시에 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박찬열이 손을 뻗어 화인이의 손을 잡았다. 큰 손이 화인이의 새하얀 손등을 쓸었고, 아까의 박찬열처럼 화인이도 빙긋 웃었다.





  “글쎄, 우리 찬열씨가 있으려나?”

  “없다고 하면 화낼 거야?”

  “없는 거야, 없다고 생각하려는 거야?”

  “어느 쪽이면 좋겠어?”

  “언제부터 네가 날 그렇게 생각했냐?”





  화인이의 가시 돋친 말에도 박찬열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익숙한 것 같았다. 화인이는 그런 박찬열을 얄밉게 보다가 뺨을 한 번 툭 치고 다시 날 보았다.





  “얘 맨날 이런다, 진짜. 아주 능글맞게 요리조리 피해가는 거 지겨워 죽겠어.”

  “하루 이틀인가. 그래서 결혼하고 싶다는 거야, 뭐야.”

  “몰라. 이젠 얘가 나한테 결혼해 달라 해도 내가 싫다, 내가 싫어.”

  “아니, 나 진짜 네가 결혼하자고 하면 할 수 있다니까? 오세훈도 했는데 나라고 왜 못 해?”

  “오세훈이 얘랑 결혼했냐?”





  화인이의 말에 피식 웃었다. 결혼에 대해서라면 나와 오세훈만큼이나 이 녀석들도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서로 얘기를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어쨌든 둘 다 결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근데 박찬열도 그렇고 화인이도 결혼을 종용하는 주변 사람들은 없으니까. 화인이 부모님도 녀석이 박찬열 만나는 거 알고 더 말씀 안 하시는 것 같고. 박찬열은 뭐 그냥 사랑 받는 막내아들이 컨셉이니 굳이 결혼을 안 해도 되는 것 같고. 그냥 이렇게 둘이 연애하면서 살아도 되는 거 아닐까.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또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다 조용히 웃었다. 그래, 연애하면서.


  파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나는 그제야 연이를 볼 수 있었다. 오늘은 연분홍색의 찰랑거리는 가벼운 드레스를 입은 녀석이었다. 어머님과 나란히 서서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고, 나는 잠시 화장실을 가려다 그 모습에 방향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그들이 인사를 하고 간 후 바로 내가 다가가 어머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세훈이와 연이를 결혼 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 내 입김이 들어갔다는 걸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래선지 나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고, 나는 그 호의를 그저 웃으며 받아들였다. 





  “어머, 준면씨네. 오랜만이에요.”

  “네, 잘 지내셨죠?”

  “그럼요. 연이가 준면씨 얘기 많이 했어요. 오늘부터 영화 촬영 들어간다고 한 것 같은데.”

  “네, 촬영 끝나고 바로 왔습니다.”

  “어머, 고맙기도 해라. 많이 피곤하겠어요.”





  아닙니다-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 슬쩍 연이를 보았다. 어머님의 옆에 서서 평소처럼 예쁘게 웃고 있었지만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연이를 힐끗 보고 다시 어머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그 대화 내내 연이에게서 신경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박찬열이 내 옆에 섰고, 나는 그제야 숨을 돌리고 연이를 보았다. 박찬열을 보면서도 특유의 그 온화한 표정을 짓던 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마자 연이가 빙긋 웃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자마자 더 웃음이 나질 않았다.





  “아, 저기 숙부님 오셨는데 인사 나누셨습니까?”

  “어머, 그러니? 어디.”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따 봐요, 준면씨.”





  찡긋 웃은 박찬열이 연이의 어머님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내가 연이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던 건가.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박찬열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연이는 여전히 예쁜 마네킹처럼 곧게 서 있었다. 그러다 잠시 옅은 한숨을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홀을 울렸고, 그렇게 몇 걸음 걷던 연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흑갈색의 머리칼을 살짝 매만지며 생긋 웃었다.





  “같이 갈래요, 준면씨?”





  그 한 마디만 내려놓은 연이가 다시 몸을 돌렸다. 나는 살랑거리는 연분홍색의 드레스 자락을 보다 걸음을 옮겼다.


  연이가 날 데려 온 곳은 2층에 자리한 조용한 방이었다. 무수히 많은 방들 중 하나였고, 이 곳을 찾을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문을 닫고 잠시 그 문에 기대섰다. 먼저 방 안에 들어선 연이가 창가 앞에 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빛에 연이의 피부가 더 새하얗게 빛나는 것 같았다. 어깨를 드러낸 디자인 덕분에 눈부실 정도로 반짝거렸고, 나는 꼭 그게 달 그 자체인 것 같단 생각을 하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달을 보고 있는 녀석의 뒤에 몇 걸음 떨어져 섰다.





  “피곤해?”





  내 말에 연이가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런 연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익숙했다. 아까 연이의 표정을 보고 단번에 녀석의 피로감을 눈치 챈 건, 그게 내가 아주 많이 본 얼굴이어서였다. 박찬열, 김화인, 김민석 그리고 나에게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특유의 묵직한 피로감이었다. 특히나 그건 오세훈이나 박찬열, 그리고 연이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했다. 나는 잔뜩 지친 표정을 숨기고 있던 아까의 연이를 떠올리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피곤하면 잠깐 여기에서 눈 붙여. 이따 깨워줄게.”





  이상했다. 한 걸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뭔가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이내 손을 뻗어 연이의 어깨를 잡았다. 연이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내 손 위에 자기의 손을 얹더니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렇게 마주한 얼굴을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두 팔을 벌렸다.





  “안아줄게, 꼬맹아.”





  연이는 내 손을 잡은 채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안기지 않고 그저 내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예전에는 정말 그런 생각했었어요.”

  “어떤 거?”

  “오빠가, 정말 날 안아주면 좋겠다는 생각.”

  “안아준다니까?”





  연이의 눈꼬리가 예쁘게 접혔다. 나는 연이가 말하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게 조금은 다르다는 걸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걸 티내고 싶진 않았다. 티를 내 버리면 그 땐 정말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지니까.





  “지겹다, 그쵸.”

  “.....”

  “매일이 똑같네.”





  연이의 작은 손이 내 옷깃을 어루만졌다. 잠깐 내 타이 끝에 가 있던 손이 이내 천천히 내려갔고, 어느새 녀석은 두 손으로 내 허리춤을 잡았다. 나는 그런 연이의 어깨에 두 팔을 얹고 가볍게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런 날 빤히 보던 연이의 표정은 정말 공허함 그 자체였다.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그렇겠지. 지금의 나는 녀석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조금만 덜 몰랐다면, 조금만 덜 공감했다면 좋았을 텐데.





  “매일이 똑같은 것도 어떻게 보면 좋은 거 아닐까. 나쁜 일이 없다는 거잖아.”

  “그렇게 현실에 자위해서 남는 건 없어요.”

  “그럼 나쁜 일 생겨도 좋으니 인생이 조금은 망가져도 좋다는 얘기야?”

  “가끔은요.”

  “정말 속 편한 소리한다, 너. 나는 그 말에 절대 공감 못 해주는 거 알지?”





  생긋 웃으며 말했지만 농담은 아니라는 걸 녀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이 어디까지 바닥으로 떨어졌는지 알고, 그걸 얼마나 힘들게 극복했는지도 아니까. 그래선지 연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안았다. 나는 내 품 안에 들어온 연이를 꼭 끌어안았다. 





  “오빠.”

  “응.”

  “내가 결혼한 이유, 알죠.”

  “.....”

  “대답해요.”

  “그래.”





  연이가 고개를 들었다. 내 가슴팍에 턱을 괸 채 빤히 바라보는 모습은 열일곱 살 때의 그 모습 같기도 했다. 하지만 10년 전과 지금 중 다른 게 있다면.





  “언젠가 나도 오빠한테 뭔가를 요구할 수도 있어요.”

  “그렇겠지.”

  “해줄 거예요?”

  “봐서.”

  “말이 다르네요. 결혼 전엔 뭐든 다 해줄 것처럼 말했으면서.”

  “다 알고 있는데 왜 물어봐? 너도 확신이 안 서니까 물어본 거 아냐?”

  “오빠가 날 불안하게 하잖아요.”

  “연아.”





  나는 조용히 웃으면서 녀석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연이의 표정은 여전히 그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10년 전과 지금이 다른 게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또 이거였다. 연이는, 도저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가 없어.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넌?





  “내가 널 불안하게 해?”

  “... 네.”

  “너랑 내가 뭐라고 그래.”

  “내 남편의 애인이면 이 정도 얘기는 할 수 있는 사이 아닌가요?”





  아, 지금은 알겠다. 너 화났구나. 조금 기분이 상한 거지? 내가 너의 자존심을 건드린 거지? 나는 피식 웃으면서 녀석의 드러난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안 해줄까봐 불안해?”

  “아니, 어차피 오빠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게 돼있어요.”

  “아, 진짜네.”

  “뭐가요?”

  “세훈이가 그랬거든.”





  세훈이라는 말에 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너 정말 약았구나.”





  내 말에 연이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나는 내 허리를 감싼 연이의 팔을 풀어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쭉 기지개를 켠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근데 어떡하지. 너보다 내가 더 약았는데.”

  “.....”

  “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해줄 것 같아? 세상에, 연아.”





  나는 씨익 웃으면서 다시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들어 연이의 턱을 살짝 그러쥐었다. 내 손길에 따라 올려진 고개는 어쩐지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연이의 붉은 입술을 물끄러미 보다가 생긋 웃었다.





  “나 김준면이야.”

  “.....”

  “우리 그냥 지금처럼, 딱 지금처럼 지내자. 응? 너는 가끔 이렇게 나한테 위로 받고, 나는 널 방패삼아 세훈이랑 행복하게 살고. 괜찮지 않아? 너도 잃을 거 하나 없는 사업인데.”

  “.....”

  “그치, 꼬맹아.”





  나는 살짝 고개 숙여 가볍게 키스했다. 10년 전과 비교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였다. 나는 그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약아졌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웠고, 배우려고 살아남았다. 그건 산 게 아니었다. 정말 살아, 남은 것이었다.


  2층의 그 방에서 나온 건 파티가 거의 끝나갈 때였다. 내가 다시 1층으로 내려온 후 한참 지나서야 연이가 모습을 드러냈고, 샹들리에 아래에 드러난 얼굴은 아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여전히 우아했다. 나는 그런 연이를 보다가 다시 웃으며 화인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아. 그러니까 잘 생각해. 너도 살아남고 싶다면 말이야.


  집에 돌아와 싹 씻고 자리에 누운 건 새벽 두 시였다. 당장 여섯 시에 일어나서 또 나가야 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오세훈이 자기 대신이라며 안겨 주고 간 큰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축 번호 1번을 꾹 눌렀다. 창밖의 달빛을 보며 상대방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참 좋았다. 새벽에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나만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그래서 나는 새벽에 거는 전화가 좋았다.





  [왜 안 자.]





  어김없이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인형을 끌어안으며 그대로 옆으로 풀썩 쓰러져 누웠다. 암막 커튼을 치지 않아 달빛이 방으로 그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을 곱게 물들인 달빛은 이 밤의 거울 같았다. 밤을 기울이면 이런 달빛이 찰랑거리는 거지. 그리고 그게 넘쳐서 내 방을 물들이고, 내 새벽을 채우고 그러는 걸 지도 몰라. 나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멍하니 달빛을 보았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일찍 나가야 하잖아. 안 피곤해?]

  “글쎄, 피곤한가.”





  오세훈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주위가 확 조용해졌다. 아마 다른 방으로 옮긴 것 같았다. 





  “오늘 달이 되게 밝다, 세훈아.”

  [보름달이니까.]

  “예전에 어떤 영화를 봤었거든. 뭔가를 훔친 도둑이 나왔는데, 그 도둑이 달밤에 도망치다 갑자기 멈춰서는 거야. 그래서 경찰한테 잡혔지. 그 때 물건을 도둑맞은 사람이 물었어. 왜 도망가지 않았나?”





  나는 토끼의 가슴팍에 좀 더 고개를 묻었다. 이게 너였으면 좋겠다. 이보다 더 따뜻하고 포근하고 푹신한 품이, 인형이 아니라 너였으면 좋겠어.





  “도둑이 대답했어. 달이 나를 불렀소. 달빛이 너무 밝았지. 그리고 영화가 끝났어. 허무하지?”

  [그러게.]

  “그 때는 잘 이해가 안 됐거든. 뭐야, 여기서 끝인가? 싶었어. 근데 요즘에는, 아니 오늘은 특히 그 영화가 생각이 나는 거야. 그 도둑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싶어서.”

  [.....]

  “세훈아.”

  [응.]

  “나 나쁜 사람이야?”





  내가 물어봤지만 내가 웃음 나는 질문이었다. 꼭, 애 같잖아. 애처럼 다른 사람의 평이 제일 궁금한 것 같고. 나는 달빛을 피해 인형에 고개를 묻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끄집어내듯, 오세훈은 별 고민 없이 답했다.





  [누구한테?]





  역시. 내가 원하는 답이었다. 너는 정말, 나를 너무 잘 알아. 너무 잘 알아서 가끔은 좀 이상하기도 해. 어떻게 너는 나를 이렇게 잘 알지?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잖아.





  “너한테.”

  [그럴 리가 없지.]

  “그래? 나 그럼 착한 사람이야?”

  [세상에서 제일.]

  “그렇구나. 그럼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내 말에 오세훈은 그저 웃었다. 침묵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고개 들어 달빛을 보았다. 





  “얘기하다 보니까 슬슬 졸리다. 나 이제 잘게.”

  [그래. 아침에 전화해줄까?]

  “아냐. 어차피 종대 오기로 했어. 잘 자. 아니지, 나만 잘 잘게. 세훈이는 일해야지?”

  [응, 일해야지.]

  “그래, 자러 갈게~”

  [준면아.]





  이제 정말 자려고 다시 이불을 덮는데 갑자기 세훈이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대다 말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응?”

  [달빛은 누구나 다 비출 수 있어. 도둑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

  [달빛에 도망을 포기한 도둑이 나쁠까, 그 도둑을 포기하게 만든 달빛이 나쁠까. 난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해.]

  “.....”

  [그래도 넌 내가 불러줄게. 언제 어디에 있어도 넌 나한테 가장 착한 사람이니까.]

  “... 응.”

  [잘 자고, 언제든 전화하고 싶을 때 해. 사랑해.]

  “응, 나도. 나도 사랑해.”





  그리고 잠깐의 텀을 둔 후 통화가 끊겼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흘러가지 않는 시간을 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피곤하기만 하지 잠이 안 왔는데 지금은 정말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행복한 마음을 가득 안고 이불을 끌어안았다.


  달이 밝다, 세훈아.


  네가, 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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