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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제일 좋지는 않아도 세 네 번째 정도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고3 안형섭은 학교에서 두 정거장 떨어져있는 시내의 한 상가 5층에 있는 영어 학원을 다녔다. 그리고 박지훈은 그 건물 4층의 수학학원에 다녔다. 학원을 다니는 모든 고등학생이 거의 똑같이 10시에 수업이 끝나지만 안형섭은 매번 너무 공부를 못해서 남고 박지훈은 왠지는 모르겠는데 좀 늦게 끝나는 건지 뭔지 둘 다 10시 10분쯤에야 학원을 나섰다. 형섭이 5층에서 타고 내려오면 지훈이 4층에서 타고 둘은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바닥만 바라보다가 1층에서 내려서 각자 갈 길을 가곤 했다. 열번을 타면 대여섯 번은 같이 타고 내려가다 보니 안형섭도 박지훈도 서로 얼굴 다 아는데 인사하긴 어색하고 해서 눈 마주치면 형섭만 눈을 내리깔고 그러기만 몇 번이 반복되었다.

 

어느 날은 평소와 똑같이 열린 문에 서있던 지훈이 갑자기 안녕-. 하고 인사를 건내서 형섭은 진짜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나? 나??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는데. 둘만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안형섭은 얼굴이 다 빨개져서 아 어 어 안녕.. 했고 박지훈은 그런 안형섭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나란히 1층에 같이 내려서 건물 밖으로 나오자 이번에는 형섭이 먼저 어색하게 인사했다. 잘.. 잘 가!. 응 너도.

 

그렇게 한번 말을 트고 난 둘은 간단하게 눈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색하게 있다가 헤어지곤 했다. 너도 나처럼 남아서 늦게 끝나는 거야? 궁금한데 차마 말은 못붙이겠는 안형섭은 그냥 박지훈의 얼굴만 몰래 훔쳐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제 형섭은 가끔씩 지훈과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내려서 집에 가는 길이면 서운할 지경이었다.

 

 

 

 

 

 

벚꽃이 피고 떨어질 즈음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 말은 곧 중간고사가 있다는 의미였다. 오늘도 나머지 문제들을 풀고 설명도 들어야하는 안형섭은 꼼짝없이 선생님께 붙들렸다. 다른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퇴실, 퇴근하고도 개인적으로 수업을 더 받은 형섭은 10시 30분에야 같이 퇴근하신 선생님과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인데 당연히 먼저 갔겠지 생각했던 형섭은 그러나 놀랍게도 지훈이 또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서 당황하고 말았다. 옆에 선생님께서는 계속 잔소리하느라고 형섭아 내일은 진짜 문제집 다 풀어와야해? 대충 풀지 말고? 하시는데 그냥 대충 아 네..네..ㅠ 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훈에게 안좋은 모습을 들킨 게 너무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혼자 거울에 머리박고 삽질하는데 지훈은 형섭이 그러는 걸 보는 둥 마는 둥 멀뚱멀뚱 서 있었다. 띵 -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서자 지하주차장으로 가시는 선생님께 인사하고 둘만 나오는데 박지훈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너 내일도 학원 나와?”

“어? 어어.. 보충하러..”

“나도 나오는데, 몇 시에?”

“어 나.. 3시에..”

“몇 시에 끝나는데?”

“어? 글쎄... 한.. 5시쯤..”

“알겠어. 잘 가~”

“으응-..”

 


왜인지 살짝 웃는 얼굴로 자기 할 말만 툭툭 하고 가버리는 뒷모습에 안형섭은 멍하니 서 있다가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서도 풀어야 할 문제집과 외워야할 단어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도 아까 헤어질 때 자신을 보고 웃던 지훈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결국 안형섭은 밤새 문제를 풀다가, 실실 웃었다가, 단어를 외우다가, 아니라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다가 책상에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한낮이 되어서야 깬 형섭은 토요일임에도 이른 출근을 하시는 어머니를 차마 원망하진 못하고 머리도 못감은 채 모자만 대충 눌러쓰고 허겁지겁 책과 자료들을 챙겨 학원으로 달려갔다. 당연히 문제는 다 풀지 못했고 단어도 외우지 못한 형섭은 애초에 끝날 거라 생각했던 5시보다 훨씬 늦은 7시에나 보충을 끝낼 수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매고 비틀거리며 강의실을 나오는 형섭을 본 데스크 선생님이 혀를 차며 비타민 통을 건내 주었다.

허얼.. 쌤 감사합니다.. 하며 꾸벅 인사를 하는 형섭에게 데스크 선생님은 자기가 아니라 웬 잘생긴 학생이 4시 반부터 한참 우리 학원 밖을 서성이길래 불렀더니 이거 안형섭한테 좀 전해달라고 하고 갔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아 헉 어떻게 해 하고 우는 소리를 하는 형섭에게 데스크 선생님은 친구냐고 물었고 걔랑 나랑이 친구인가..? 고민하던 형섭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지만 손안에 달랑거리는 노란색 비타민 통이 있어 오늘은 서운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안형섭이 박지훈을 다시 만난 건 중간고사가 끝나고 다시 정상수업이 시작되던 주의 화요일이었다. 시험도 끝났는데 공부가 되겠냐며 시험지 분석만 하고 수업이 끝난 덕에 형섭은 비교적 이른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좋지 않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탄 지훈을 마주쳤다. 어?! 안..안녕..!! 어 안녕. 반가운 마음이 가득 찬 형섭이 말까지 버벅거리며 인사를 건넸지만 지훈의 표정은 영 좋아지지 않았다.


“아 저..저기.. 그때 준 비타민 너무 고마워! 잘 먹었어.”

 

다시 어색하게 건넨 말에 지훈이 그제야 슬쩍 웃었다. 그날.. 한참 기다렸어? 응...조금? 만나서 주고 싶었는데.. 아 미안해.. 내가 그날 문제를 다 못 풀어가서.. 생각보다 더 늦게 끝났어.. 괜찮아. 그래도 잘 먹었다니 다행이네. 형섭과 지훈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모처럼 일찍 끝났는데.. 이대로 지훈과 헤어지기가 아쉬웠던 형섭이 건물을 나서기 전에 용기를 냈다.

 

“지후나.. ”

“응.”

“너.. 으음..”

 

약간 말꼬리를 늘이며 고민하던 형섭이 지훈이 가버릴까 셔츠를 살짝 잡고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밥 먹었어? 아니 나도 아직 못 먹었구.. 아직.. 늦은 시간도 아닌데..너 표정도 안 좋..아 아니 비타민도 줬구 해서.. 밥..사줄까?”

 

밥 먹었냐는 얘기에 고개를 젓던 지훈이 흔쾌히 형섭의 제안을 수락했다. 밥버거를 먹어도 괜찮다는 지훈에게 굳이 그래도 어떤 걸 좋아하냐고 물어본 형섭이 지훈을 데리고 학원 근처의 치킨집으로 향했다. 말은 괜찮다고 하면서도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가 다 보여서 형섭은 기분이 좋았다.

같이 치킨을 먹으면서 둘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지훈의 표정이 안 좋았던 건 오늘 학교에서 학생증을 분실하는 바람에 석식도 못 먹어서였다는 걸 알게 된 형섭이 살풋 웃었다. 아 난 또 너 무슨 심각한 일 있는 줄 알고.. 난 밥을 못 먹으면 기분이 나빠지더라고. 그럼 오늘 내가 밥 먹었냐고 물어보길 진짜 잘했다. 가슴에 손을 대면서 뿌듯해하는 형섭을 보고 지훈이 천천히 물었다.

 

“너네 학원.. 영어 잘 가르쳐?”

“어? 아.. 잘 가르쳐주시는데.. 내가 못해.. 난 진짜 배워도 배워도 영어는..”

“아.. 나도 이번에 영어 망쳐서.. 학원 다닐까 하고.”

“아 정말? 너도 우리학원 다니면 좋지.. 너네학교 애들도 몇명 있구..”

“너랑 같은 반에서 수업들을 수 있나?”

“으음.. 테스트는 봐야할걸.. 근데 나.. 워낙 못해서.. 헤헤.. 지후니 너는 더 높은 반에 들어갈 것 같아!”

 

쑥쓰럽게 웃으며 얘기하는 형섭을 보고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거의 다 먹었으니 자기가 계산하겠다는 지훈을 기어이 말리고 어머니가 주신 카드로 결제한 형섭이 연신 비타민 덕분에 힘낸 게 고마워서 라는 말을 했다. 그래도 내심 마음에 걸렸는지 이번엔 지훈이 결국 아이스크림을 사준다고 베스킨라빈스로 형섭을 데려갔고 둘은 한창 초코나무숲과 뉴욕치즈케이크를 퍼먹다가 베라가 문을 닫는 11시 반이 되어서야 귀가했다. 서로 연락처가 없어서 무작정 기다려야 했던 그때 같은 일은 없어야 한다며 번호도 저장했다. 집에 가서도 또 늦게까지 카톡을 하다가 새벽에 잠든 형섭은 아침에 지각한 벌로 운동장을 뛰어야 했지만 모든 게 기분 좋고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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