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바늘은 10에. 긴 바늘은 막 9를 지나가고 있었다. 미유키는 초조한 기분으로 시계를 힐끔거리다가 다시 눈앞의 사와무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시간이 늦었다는 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지 그는 다 식어빠진 고구마 라떼를 마저 홀짝이고 있었다. 미유키는 다 마신 커피컵 안을 빨대로 휘저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갈 실마리를 생각했다. 야구 이야기, 이미 했다. 학교 이야기, 그것도 이미 질리도록 했다. 그럼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까. 빨대로 컵 안쪽을 쿡쿡 쑤시면서 힘껏 궁구했지만 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미유키와 사와무라는 언제나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요즘 어떤 프로팀이 경기력이 좋은지, 학교 생활은 어떤지, 일상생활은 괜찮은지 등에 대해서. 답도 언제나 비슷했다.

사와무라의 집으로 가려면 늦어도 열한 시에는 카페를 나서야 했다. 그의 집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한 번 갈아타야 했는데, 사와무라는 버스 막차가 빨리 끊긴다고 투덜거리곤 했었다.

11시까지는 이제 20분도 남지 않았다. 두 명이 마주보고 있을 시간이 그 정도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저녁 강의가 있던 탓에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만난 건 여덟 시를 넘긴 때였다. 고작 세 시간밖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게 억울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훈련이 더 많아진 통에 자주 만날 수도 없었다. 지금에 비하면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치며 부대낄 수 있었던 고교 시절은 천국이었다. 미유키는 종종 왜 같은 학교로 진학하지 않았냐는 진심 섞인 원망을 하기도 했다.


 "사와무라. 시간 다 됐어."

 "벌써요?"


사와무라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시계를 보자 눈이 토끼처럼 동그라니 커졌다. 바닥에 조금 남은 라떼를 마저 마셔버리고 그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벌써 세 시간이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카페에 들어와 고작 대화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누군가가 시간을 중간에 잘라내어 훔친 것만 같았다.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막차가 끊기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거리는 사람들로 지천이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 아직 귀가하기엔 이른 시간일 터였다. 그런 이른 시간에 자신은 애인을 바래다주려고 역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미유키가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만 같아선 후배를 더 붙들고 싶었지만, 택시비를 감당하기엔 지갑이 너무 얇았다. 연애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할까. 그가 신경질적으로 발끝에 걸리는 작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룸메는 잔대?"

 "네. 조용히 들어오라고 아까 메일 왔슴다."


미유키는 대학 기숙사에서, 사와무라는 자취방에서 각각 룸메이트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자취라도 했으면 집에 데려가서 끌어안고 잠이라도 잘텐데, 그것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갑자기 자신의 삶이 너무 한심한 것 같았다. 밤까지 붙들어 놓고 택시비를 쥐어서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금요일 밤 모텔비를 댈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뭔지. 그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사와무라의 손을 붙잡았다. 따뜻한 손이다. 거친 손바닥끼리 서로 비벼지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역까지는 금방이었다. 역 앞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딱 열한 시였다. 이제 막 역에서 나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24시간 영업하는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밤을 새려는 심산일지도 몰랐다. 미유키는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들여다 보고, 또 짧게 숨을 뱉었다.


 "역 아래까지 바래다 줄까?"

 "오늘 사람 되게 많네요."


엉뚱한 대답 아닌 대답이 돌아왔다. 미유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금요일이니까. 내일이 주말이잖아."

 "내일 벌써 주말임까? 시간 빠름다."

 "날짜 좀 기억하고 살아."


핀잔을 주자 사와무라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손을 잡고 다정하게 계단을 올라오는 연인들도 왕왕 있었다. 그가 그 중 한 커플을 잠시 살피다가 미유키를 쳐다보았다.


 "우리도 조금 더 있다 갈까요?"

 "막차 끊기잖아."

 "걸어가면 돼죠."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미유키가 미간을 찌푸렸다. 좋은 동네에 살면서 그런 말을 하면 좀 좋아. 이봐, 후배님. 얼마 전에도 강도 사건 있었다며?


 "위험해서 안 돼. 더 늦기 전에 가."

 "그럼 선배가 같이 가주면 되잖아요."

 "내가 어떻게 니네 집에 들어가. 너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미유키의 말에 사와무라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요. 사람이 있구나. 룸메이트와 함께 산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미유키가 사와무라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툭 쳤다.


 "어쨌든, 빨리 가. 늦었어."

 "가기 싫어요."

 "가기 싫으면 어쩔 건데?"

 "다음에 또 언제 만나요? 선배 많이 바쁘다면서요. 합숙 훈련 있다고 했잖아요."


이번엔 미유키가 눈을 크게 뜰 차례였다. 사와무라가 이렇게 당돌하게 구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가 자주 만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만남에 대해서 가타부타 떠드는 일이 없었다. 언제 만날 수 있느냐고 칭얼거리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유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사와무라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선배랑 더 같이 있고 싶어요."

 "그……."

 "모텔 갈래요?"


순간적으로 사방이 적막해졌다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미유키의 얼굴에서 살짝 핏기가 가셨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은 미유키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잘못 들은건가? 그가 멍청한 얼굴로 후배를 쳐다보았다. 다시 말해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환호성을 질러야할지 어째야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라고?"


사와무라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저도 모르게 훅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꼭 섹스하자는 건 아니구요……."

 "아니, 그. 너……."

 "돈도 있슴다."


그가 지갑을 꺼내 안을 보여주었다. 돈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았지만 금요일 밤에 방을 잡을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아니지. 미유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방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가 문제가 아니라 사와무라의 돈을 쓴다는 게 문제였다. 데이트 비용은 자신이 내고 싶었다. 후배의 지갑에 기대는 건 어쩐지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유치하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는 자존심이었다.


 "됐어. 무슨 네 돈까지……."


미유키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손을 내젓자, 사와무라가 그의 앞까지 훅 치고들어왔다. 그가 다짜고짜 지갑에서 돈을 꺼내 미유키의 손에 쥐어주었다. 거절을 거부하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뭐 어떻슴까? 선배 돈만 돈인 것도 아니고."

 "아니, 난……."

 "저도 남자라구요!"


사와무라가 제 가슴팍을 탕탕 치며 활짝 웃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마운드에 올라온 그를 보며 이까짓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당당하게 웃던 그 얼굴이었다. 위기는 제가 만들어 놓고. 사람 가슴을 미친듯이 방망이질하게 해놓고선 저 혼자 웃어버리는 것이다. 전혀 변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뭔가 해주고 싶은 거, 당연하잖슴까?"


졌다. 미유키는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사와무라의 그 얼굴엔 이긴 적이 없었다. 그가 못 이기는 체 하며 받아든 돈을 지갑에 쑤셔넣었다. 사와무라는 퍽 뿌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삼진을 잡으면 종종 그런 얼굴을 했다.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에 젖은 사랑스런 얼굴이다.


 "가끔은 이 사와무라 에이준에게 기대도 좋슴다!"


미유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게 한 방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가 낄낄거리며 사와무라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오래 전부터 머리를 짓누르던 고민 하나를 치워버린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오늘은 사와무라 님한테 기대 볼까?"

 "맡겨만 주십쇼!"

 "모텔에서도?"


사와무라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시뻘게지고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유키가 다시 크게 웃으며 가볍게 얼굴을 부볐다.


 "농담이야, 바보야."


화려한 거리엔 널린 게 숙박시설이다. 미유키가 굳어 있던 사와무라를 붙들고 끌어당겼다. 더 늦기 전에 가자. 끌어당기는 손길에도 사와무라는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아무 말도 않던 그가 돌연 고개를 홱 쳐들더니 미유키에게로 달려들었다.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얼굴로 그가 속삭였다.


 "농담 아니어도 됨다, 바보 선배."


이번에는, 미유키가 석상처럼 굳어버릴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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