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이지가 저네요..... 부끄러워 죽고싶고.. 

아름다운 다른 합작은 바로 여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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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좋은 봄입니다.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제 저녁, 돌아오던 길에 보았던 봄냄새 가득하던 푸른 밤을 보았는지요. 그 밤은, 가장 빛나던 샛별이 고동치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밤이었지요. 드물게 별이 깨끗한 하늘에 많이 떠있었기에 부끄럽지만, 그 밤에 당신과 담소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낭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당신이 예전에 들려주었던 별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 밤도 당신은 당연히 가장 하늘 가까이에서 보았을 것 같은데, 그럼 우리는 같은 한 하늘 아래서 같은 별을 본 것이려나요. 운명. 당신은 그 말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별을 바라보면 늘 달군 쇠못을 가슴에 쑤셔넣는 고통을 느끼곤 합니다. 별을 바라보는 것은 당신을 떠올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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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종이에 점을 콕콕 찍으며 잠시 멈췄던 마른 손가락은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계속 숙이고 있던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평소처럼 종이를 구겨 뜯어내려다가 내려놓았다. 하아. 써놓은 문장을 다시 읽어보니 손발이 도저히 펴지지 않았다. 괜히 썼어.

 마스크를 코끝까지 올리고 구부정한 허리를 완전히 의자에 푸욱 기댔다. 끼이익, 시끄럽게 삐걱이고 딱딱하고, 니스를 잔뜩 칠해 번들거리는 걸상은 2년 내내 질펀하게 앉아 번들번들 엉덩이가 다 닳아버린 교복바지와 아주 궁합이 좋았다. 그러니까, 미끄럼 타기에.

 주르르륵, 미끄러져 흘러내린 엉덩이는 의자 끄트머리에 겨우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사실, 떨어지지 않으려 등걸에 걸친 날개죽지가 서서히 아파왔지만 새삼 자세를 바꾸기도 귀찮았다. 고통이 남기고 간 것을 맛보라. 고난도 지나고 나면 감미롭다. 괴테의 말,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은 아니겠지만. 반쯤 뜬 눈을 데굴 굴리다가 꾸욱 감았다.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다. 이것도 고난이라면 고난이겠지.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끝은 절대 감미롭지는 못하겠지만. 코가 매섭게 간지러웠다.

 봄. 겨우내 고독과 냉혹한 계절을 버텨낸 생명이 고통스럽게 태동하며 움트는 시간. 눈을 감으면 기억 저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매일 보는 같은 얼굴인데도 자신과 전혀 다른 온기를 품고 있는 웃음이 말한다.

  '브라더, 내가 도와주겠다!'

 원하지 않았다. 그저 땅 속에 깊이, 영원히 깨어날 일 없이 꽁꽁 얼어붙어 있기를 바랬건만. 유혹은 찾아왔고, 그것을 자신은 어리석게도 덥썩 잡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절호의 기회였다.

 멍하니 생각하며 돌아본 창밖은 온통 파란 하늘 아래 분홍 벚꽃잎이 화려하게 휘날리며 지고 있었다. 너무나도 밝은 세상에 눈이 부셨고.

  "헤ㅅ-,취!!!!"
 
 훌쩍, 찡한 고통과 함께 눈물이 났다. 고등학교 3학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꽃가루 알러지와 함께 이치마츠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


 아직 한겨울, 시업식의 기억.  
 고교 1학년 초, 얼떨결에 붙잡혀 끌려가 소심한 성격상 거절도 못하고 강제로 가입했던 문학예술부. 줄여서 문예부. 억지로 가입하긴 했지만, 문예부에서의 활동은 그렇게 하기 싫을 정도로 나쁜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놀던 다른 학생들에 비해선 이치마츠 스스로 생각하기엔 꽤나 열심히 활동했던 편이기도 했고.

 매일, 조금씩. 그동안 쌓아왔던 축축하고 답답하고, 끈적거릴 정도로 더러운 기분을 해소하는데 펜을 끄적이는 것은 꽤나 괜찮은 해소 방법이었다. 잘 포장된 음침하고 시꺼먼 문장들을 한 장, 한 장 쌓아가며 이치마츠는 스스로 자조하곤 했었다. 쓰레기를 만드는 구제불능쓰레기. 그렇게 낙인찍고 나면 자신이 얼마나 역겹고 구질구질한지 체감할 수 있어서, 아이러니하게도 기분은 훨씬 나아졌다.  
 
 다시 돌아온 시업식, 고교 3학년의 기억.


 수험 때문에 동아리 활동은 잠정적으로 졸업이었다. 놀고먹을 기회가 사라지고 압박에 시달릴수록 사람은 쓸데없는 일에 열을 올리곤 한다. 그동안 썼던 우리의 글을 문집으로 만들어보자! 누가 그 얘기를 먼저 꺼냈던가. 자신은 분명 고개를 저었을텐데(남들이 보기엔 미세하게 고개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자신의 쓰레기 같은 글은 하나의 쓰레기 같은 문집으로 엮어져서 자신에게 전달되었다. 쓸데없이 추진력이 참 좋다.

 그렇게 3학년 새 학기, 아직은 겨울인 봄. 마주한 조잡하고 속이 시꺼먼 자신의 문장들에 더없이 귀가 달아올랐다. 이런 것을 글이랍시고 내놨던거냐. 누가 눈치 채면 어떡하지. 죽어버리자. 자살해.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이것을 어찌 처리해야할지가 더 고민이었다. 버릴까? 아니 기껏 만들었는데. 그렇다고 소중히 여길 마음은 없었고, 학교에서 버렸다가 들켜버리면 정말 최악의 쓰레기로 낙인찍혀서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해버릴거다. 그렇다고 집안 구석에 두면 언젠가 누군가에게 발굴되어버려서.. 아아, 끔찍했다. 문장 하나하나 또박또박 읽어줄 악마 같은 제 형제들 앞에서 목을 매달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방과 후, 홀로 교실에 남아 한참이나 책상 위의 저 책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노려보며 고민하다 추위로 쪼그라든 방광의 호소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등줄기가 오싹하니 저려왔다. 책은 뭐, 정해져 있던 장면이라는 듯 당연하게도 펼쳐져 있었다. 정확히, 자신의 페이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손과 발은 온기 한 점 없는 교실 바닥의 냉기로 찡하니 얼어붙어 있었는데도 왈칵, 땀이 차올랐다.

  "아주 훌륭한 글이었다. 아, 아직 조금 덜 읽었지만."
 
 제일,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키고 말았다. 문집을 보던 고개를 태연하게 올리고 완전히 굳어버린 나를 향해 활짝 웃던 입이 느릿하게 열리는 게 보였다. 말하지마. 그냥, 다물어. 제발.  

  "특히, 이 부분의 감정은, ..브라더? 자, 잠깐! 폭력은 나쁘, 꾸엑!!"

 반격도 못하고 얻어맞는 등짝을 실컷, 식은땀이 진짜 땀으로 떨어질 때까지 때린 후에야 그제야 책을 뺏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아직도 펼쳐져있는 책을 잡아채고 후다닥 물러났다. 한참 뒤에야 웅크렸던 등이 굼벵이처럼 굼실굼실 곧게 펴졌다. 으윽, 강해졌구나. 이치마츠. 부릅뜬 눈으로 힘껏 째려보니 영문도 모르는 얼굴은 울상을 짓고 당연하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뱉어냈다. 뭐가 미안한건지도 모르면서.

...짜증나. 툭 뱉어낸 말에 조금 붉어진 눈가를 무시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격한 운동 때문이야.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무시했다.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모를 책은 그렇게 자신의 가방 구석 깊이 밀어 넣어졌다.

 돌아가는 길, 뒤에서 중얼거리며 터벅터벅 쫓아오는 발소리가 거슬린다. 브라더, 미안하다.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다. 브라더. 자꾸 부르지마. 시끄러워. 미안.

  "저, 브라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가?"
 
 이어진 목소리에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들켰나. 들켰을리가. 저 멍청이한테? 떨리는 손끝을 코트주머니 속에 더 꾸욱 집어넣고 고개를 돌리니 카라마츠는 곧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

 째리는 눈초리가 매서웠는지 카라마츠는 시선을 슬쩍 내렸다. 파란 목도리 때문인지 하얀 얼굴에 조금 발갛게 돼버린 귀 끝과 코끝이 선명히 눈에 박혀버려서 잠시 눈을 감고 싶었다. 시답잖게 기억을 늘리고 싶지 않았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 한심했다.

  "너의 글은,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확신하고 있으면서. 정적에 숨이 막혔다. 가로등 하나둘 켜져 주황빛으로 어둑해지는 저녁의 골목은 하얗게 퍼지는 엷은 호흡마저도 거친 소리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도저히 뱉어지지 않는 숨을 가만히 고르다가, 겨우 메마른 혀를 적셔 입을 뗄 수 있었다.

  "...그래서?"

 아, 망했다. 평소처럼 헛소리라고 무시해버릴 걸. 오늘따라 유난히 머리가 뱅뱅 돈다. 손으로 입을 가리려다, 지금껏 배워온 문장으로도 만들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카라마츠를 보고 말았다. 저건 기뻐하는 걸까, 화를 내는 걸까, 슬퍼하는 걸까. 그러나 곧, 카라마츠는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버렸다.

 종종, 생각하곤 한다. 내가 보는 카라마츠는 진짜 카라마츠인건가? 아니면.
 깊이 빠지려는 생각을 끌어올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고백은 했을까?"
  "...나 같은 게 그럴 리가 없잖아."
 
 카라마츠는 조금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리곤 세 걸음만큼 떨어진 우리 사이를 성큼성큼 좁히더니 어깨동무를 걸어온다.
 감각을 휩쓸어버리는 감각. 스며들 듯 침범해오는 온기, 향기, 무게. 이게, 몇 년 만? 기억과의 괴리가 너무나도 커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도와주겠다!"
  "....뭐, 뭘?"

 고백을! 뭐? 당황해 꺼낼 말을 찾지 못한 사이, 카라마츠는 혼자서 저 멀리 이야기를 가지고 달려나가고 있었다. 지금 카라마츠를 멈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에서 저는 꺼낼 말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너는 쑥쓰러우면 도망가니까. 그래, 러-브레터를 쓰는 것이 좋겠군! 사랑의 큐피드 카라마츠가 고통스런 사랑에 빠지고만 브-라더의 러브레터를 돕겠단거다, 어때?

  "이치마츠."
 
 당장 대답하라는 듯, 기억과 전혀 다른 귀 속에 들러붙는 낮은 목소리에 튀어나와버린 것은.


*


 중학 시절의 우리가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어깨동무를 하고 마주 보고 웃던 사이. 우리는 형제들 중 비련의 여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책을 좋아했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었다. 유일하게 둘만 좋아하던 취미여서 늘 어울리던 쥬시마츠도, 토도마츠도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았고, 형들이 소녀냐!! 못 들어주겠네! 토도마츠는 간혹 그렇게 화를 내곤 했지만 저희끼리는 재밌었으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게 훨씬 더 좋았다. 어라, 왜? 라는 생각은 카라마츠의 웃는 얼굴에 어디론가 던지기일 수였다.

 그렇게 잠들기 전까지 다리를 얽어가며 이불 속에서 속닥이던 이야기는 꿈에서 마저 너를 그려냈다. 내 꿈의 조연이자 주연으로. 때로는 죄수였던 나를 감싸주는 정원사로, 때로는 악마인 나를 감화시키는 신부로, 때로는 왕자였던 나를 보좌하는 작은 신하로, 때로는.... 화장실에서 시뻘개진 얼굴로 속옷을 빨았던 나는 그때부터 너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나서길 좋아하던 너는 결국 여주인공과 함께 무대 위에서 나를 봤고, 나는 무대 위의 너를 올려다봤었다. 그리고 눈부심과 함께 계속 생각했었던 내 안의 위화감을 깨달아버렸고, 죽어라 피해다녔고, 도망쳤다. 그렇게 내가 바꿔버린 지금의 우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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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좋은 여름입니다.
여전히 무덥고, 찌는 듯한 날씨가 계속 되네요. 봄은 정말 벚꽃과 함께 사라지고, 소란스러운 매미가 여름을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아직 괜찮으신가요? 더위를 잘 타던 당신이 기억나는 군요.
여름. 여름은 좋아합니다. 덥지만 새파란 하늘과 검푸른 바다가 맞닿은 곳, 그 눈부신 풍경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바다를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언제부터였을까요. 바다를 사랑하게 된 건.  
언젠가 함께 친구들의 피서지에 가고 싶다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들은 여름에 시원한 곳을 잘 알거든요. 그러면 서로 바짝 붙어 곁에 앉아있어도 그렇게 덥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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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기 찬 지독한 열기의 여름. 얇은 하복과 맞닿는 통풍이 전혀 안 되는 의자는 허벅지에 옷감이 들러붙게 해 끈적거리는 불쾌한 기분을 만들어냈다. 벽에 매달려 탈탈거리는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지만 중앙 끝에 앉아있는 자신에게는 전혀 바람이 닿지 않았고 하얀 커튼 쳐진 창가에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여름을 좋아하긴 개뿔. 더워 죽을 것 같다. 졸린 수학 선생의 목소리가 살살 졸음을 불러왔다.

 개학 이후, 봄부터 종종 편지를 써서 카라마츠의 사물함에 넣어두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너무 진심이 담기지 않게 대충 노트를 잘라 어색하게 고백이라는 느낌으로 쓴 편지를 넣어두면 특유의 느끼하고 이상한 러브레터의 정석이라는 단어로 채워 카라마츠가 제 사물함에 다시 반짝이는 하트 스티커를 잔뜩 붙인 편지를 넣어놓곤 하는 그런 구조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 괴상하게 번쩍거리던 편지를 손대는 것조차 괴음을 흘리며 죽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나중엔 태연하게 봉투를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는 자신에게 조금 질린 참이었다.

 우리 사이는 여전히 똑같았다. 아니, 조금 달라진 것이 있었지. 자신의 서랍구석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카라마츠의 웃기는 러브레터가 쌓여갔고, 그때의 어깨동무 이후로 평범한 터치도 하지 않았지만 평범한 형 동생처럼 이야기를 하고, 러브레터 연습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안부를 묻는 글 조각을 서로 공유하는 그런 이상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지난 시간, 어설프게 긍정을 대답해버린 게 원통하고 분하고, 나중엔 이게 뭔 짓거리를 하는 거냐며 창피해 죽고 싶었지만, 지금은 잘됐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계속 묻어뒀던 썩어버린 마음을 모른 척 전달하고 버리는 것에 조금씩 자신은 안정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조금씩 이 마음을 접어 버려서 다시 과거처럼 사이좋던 형제로 돌아갈 수 있다면야.

 홀로 정했던 기한은 졸업식까지. 마지막 학생 생활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은 이 금기 같은 마음을 미련 없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후는, 멀리 진학하는 것도 생각은 해봤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그냥, 그냥.

  'Man lebt nur einmal in der Welt! 좀 더 용기를 가져! 너는 괜찮은 사람이고, 자랑스런 브라더다!'  

 그건 너만 그렇게 보는 거니까. 편지의 끄트머리에 날렵하게 적힌 독일어 명언을 쓰다듬다가 고이 접었다. 사람은 한번 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 당연히 알고 있거든. 파우스트. 분명 폼 내려고 들고 다니던 책에서 베꼈을 테지만, 그렇게 모른 척하고 지냈는데도 또다시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너는 괴테가 낭만적인 작가라 생각하겠지만, 또한 보수적이고 질서와 경계를 중요시하던 사람이란 거 알고 있을까.

 왜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걸까, 카라마츠. 정말로 너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운명이라 여길 정도로.

 고개를 팔에 파묻었다. 머리가 핑하니 돌았다. 너무 졸려워서 그런거야. 잠깐만, 정말 잠깐만이니까. 더운 여름 아지랑이 속에서 네가 웃는 모습이 보였다. 하얗게, 파랗게,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뻗는.

 눈을 감고 팔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무시했다. 우습게도 꽃가루 알러지가 나으니, 지독한 여름 감기에 걸려버렸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이야기의 결말을 어렴풋이 그려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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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가을입니다.
여름은 언제나 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 발끝에 스며드는 계절이 왔네요.
낭만을 좋아하는 당신은 참으로 가을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예쁜 낙엽을 주웠다며 몰래 도서관의 책에 끼워 넣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끔, 당신이 좋아하던 책에서 당신이 주워 넣었을 고운 색의 낙엽 책갈피를 발견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웃고는 합니다.  
당신은 알고 계실까요? 당신의 낭만이 제게 질투를 불러온다는 것을요. 가끔 당신의 낙엽을 발견했다며 자랑하는 타인의 목소리에 얼마나,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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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무렵, 도서관은 우리의 공간이었다. 길어진 오후, 조용한 해질 무렵, 아무도 찾지 않는 방과 후의 도서관. 공부에 그렇게 목매다는 녀석들은 죄다 학원이나 집으로 빠져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먼지 스민 종이내 나는 낡은 도서관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한가했다. 그리고 석양으로 물든 그 한구석을 차지한 우리.

 오렌지 빛에 물들어 떠도는 먼지조차 네가 있는 풍경 속에선 허공에 흩날리는 금싸라기처럼 아름다운 하나의 장면이었다. 반짝이는 차분한 머리카락과 속눈썹, 살랑, 간간히 책장을 넘기는 조금 뼈대 있는 손. 같지만 달랐다. 깨끗한 너와 더러운 나.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을 바라봤다가 다시 너를 바라보았다. 그 무대에서 도망치고 나서 서로 마주 앉을 이런 날이 올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나의, 주인공. 나는 아직도 네가 주인공인 글을 쓰고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하는 이야기를.

 주욱, 어느새 저도 모르게 넋을 놨었는지, 순간 둥근 눈동자가 바라보는 게 느껴져 눈을 황급히 돌렸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귀가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어깨를 더 작게 움츠리고는 괜스레 빈 노트를 펜으로 두드리는 것에 온 신경을 쏟았다. 툭, 툭, 툭, 하얀 종이에 쓸모없는 검은 점들이 점점이 늘어났다.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설마, 얼굴에 뭐라도 묻었던 건 아니겠지.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브라더, 러브레터는 보내봤어?"

 너는 그렇게 물었고. 다행히도 긴장하고 있던 나는 태연하게 답장할 수 있었다. ....어. ..에? 당황하며 언제 보냈냐고 되묻는 물음에 어지간히도 남의 일에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했다가, 순간 이 자식은 내가 저를 좋아하는 줄을 꿈에도 모르고 그저 어릴 적 우리가 나눴던 연애에 관한 환상에 빠져있는 거겠지, 하고 좀 울컥했다.
 
  "...말해줄 이유는 없잖아."

 그러자 시무룩한 얼굴에, 속으로 조금 눈물을 흘렸다. 그래, 수십 번, 수백 번이나 주고받았지. 너랑.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다시 곱씹고 다시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녀석은 언제나 엉뚱한 방식으로 저의 뒤통수를 치곤했다는 것을.

  "그렇다면 고백은 아직이겠군!"
  "어..?"

 카라마츠는 눈 한쪽을 찡긋하며 나에게 손가락을 겨눴다.

  "자, 브라더. 이제는 고백연습을 해볼까!"

 멍청하게도, 나는 또 똑같은 수법에 당하고 말았다. 풍덩, 휘말려서 허우적, 허우적. 바보 같은 이치마츠 같으니.

숨통이 턱, 막혔고.

 -꼬르르륵. 깊이,

저 어두침침한 심해로 가라앉는다.


 나는, 바다에서 죽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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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겨울입니다.
당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예전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어릴 적 우리는 파트라슈와 행복한 왕자와 성냥팔이 소녀의 연극을 보고 울며 겨울은 나쁜 계절이라고 말하던 기억이 있군요. 이제 당신은 겨울을 낭만적인 계절이라고 부르고, 저는 겨울을 비참한 계절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때는 참 많이 즐거웠었는데, 우리는 어느새 이렇게 다르게 커버린 걸까요.
곧, 이별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수록, 포기할 마음이 사라져서 결국 당신에게 전하지 않을 이 편지들은 저와 함께 깊은 바다 속에 묻힐 참이지만, 당신이 저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평생, 조금 성질 나쁘지만 좋은 동생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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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 아하,합니... 좀 더 크게. 좋..아합니다. 더 크게! 젠장, 좋아-아합니다아아악!! 빈 교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을 바로 앞에서 들어 먹먹한 귀를 잠깐 만지던 카라마츠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영 이 느낌이 아닌데, 라는 표정이다.

"오우.. 브라더. 지금 그 발성은 연극부에 들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시끄러워..."
"하긴, 처음에는 입도 못 뗐었지. 장족의 발전이다!"
"크...,"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도 그렇게 하면 도망가 버릴 거라고? 태연하게 지껄이는 소리에 조금 울컥하고 말았지만, 애써 속을 가라앉히며 참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하는 고백연습이라며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너무 힘겨웠다. 속마음이 들키지 않았을까. 말에 이상한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을까. 표정은 제대로 가려지고 있었을까.

  너와 하는 고백연습이 진심처럼 들리진 않았을까.

 아아, 한마디 말하는 것이 이렇게 두렵고 괴로울 줄 알았더라면 더 많이, 더 가득 편지에 이 마음을 적어서 버릴걸 그랬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 채 기뻐하며 이 더러운 마음을 흘려버렸을 거고, 그랬더라면 이 가쁜 호흡도, 이 고동 소리도 들릴까봐 무서워하지 않았을 텐데. 언제나 너의 동생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함께해버렸어.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고개를 숙이고 가쁜 호흡을 가다듬는 척 하다가 말을 꺼냈다.

  "카라마츠 형, 집에 안가? 벌써 컴컴하고, 힘들고, 배가 고파."  
  "아, 아아. 벌써 시간이...."

 카라마츠는 잠시 흠칫하며 해가 거의 다 저문 바깥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용한 정적에 어색해져서 시선을 슬쩍 피하려 했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그것을 방해했다.

  "좋아. 마지막 가르침이다. 브라더."
  "뭘?"
  "전前 연극부 에이스의 고백의 정석을 보여주겠다!"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멀거니 쳐다본 얼굴이 창가로 들어온 거의 보랏빛이 된 하늘의 색에 겹쳐지고, 너는 웃었다.

 꿈에서 보았던 얼굴이라,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순간 구분하지 못해서 머릿속이 멍해졌다.

  "...좋아합니다."

 ...이치마츠. 뒤늦게 이어져 낮게 불린 이름에 오싹해져버려서, 참을 수 없어져서, 결국 나는.
 
 
*


 얼굴이 온통 뜨거웠고, 몸은 두둥실 떠올라있었다. 기대있는 몸과 흔들거리는 다리가 기분 좋았다. 두근, 두근. 낮은 박동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들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편안했다. 덜 깬 귓가로 낮은 목소리들이 두런두런 멀리 들려왔다. 휴우~ 뜨겁네! 아침까지도 멀쩡했지 않음? 잘 모르겠지만, 무리했나보더군. 약국에 다녀오는 길이다. 에에, 너네 공부했어?! 그런 건 아니지만. ...흐응, 동생 너무 괴롭히지마, 카라마츄~ 무슨 말인가? 너는 그런 점이 참 나쁘다니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나쁘군. 지금 아픈 브라더 때문에 안 맞는 걸 고맙게 여겨라, 오소마츠. 폭력배차남 같으니. 불량배장남이 할 소리는 아니지.  

 너도 참 고생이다. 엉뚱한 생각은 안했으면 좋겠지만. 형아가 동생들 걱정이 많아요~ 그렇게 머리를 굴려봤자인데~ 쫑알거리며 머리를 토닥이는 손길에 다시 꼬르륵,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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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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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이후로, 우리는 편지 교환도 고백 연습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솔직히 이젠 포기상태였다. 주변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저 새하얗게 재가 되어버려서 마지막 시험도 대충 치러버리고 나는 편지뭉치와 작은 노트와 지갑을 챙겼다. 유서는 사물함에 남겼다. 죽었으니 언젠가 열어봐주겠지. 시험성적 비관으로 고교생 자살. 타이밍도 참 좋았다. 단지 가족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남들이 보기엔 정상적으로 보인다면야 상관없었다. 적어도 근친상간으로 자살이라며 가족들이 욕먹지는 않겠지.

 천천히 지난 편지뭉치를 읽다가 전철에 몸을 싣고서 보라색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몸을 흔든다. 가라앉자. 모두 가라앉혀버리자. 보라색 털뭉치는 죽죽, 눈물덩이들을 잘만 흡수했다.

 진작 올걸 그랬다. 서늘한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바다는 생각보다 훨씬 삭막했고, 그것이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광경. 딱, 바라던 풍경이었다. 이대로 자신도 사라지면 되는 일이었다. 돌이라도 하나 들고 들어가야 하나 싶었지만 이 무거운 마음과 몸뚱이라면 잘만 가라앉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철썩.

 순식간에 종아리를 적시는 차가운 물은 생각보다 많이 차가워서 조금 두려워졌다. 겁먹지마. 이젠 돌아갈 수도 없어. 손에서 벗어난 종이뭉치들은 한들한들 파도에 실려 저 멀리 떠내려간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어 한걸음 더 떼어 두 발 모두 바다에 적시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눈물이 다시 방울방울 솟아났다. 이대로 심해에 가면 따뜻할까?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적막 속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어.

 성큼, 걸어갈수록 푹푹, 발아래로 쓸려나가는 모래가 느껴졌다. 얌전히 찰랑이던 파도는 점점 거칠어져서,

  "이치마츠!!!!!!!!!"

 누군가의 성난 목소리로 들려 굳어져버렸다가, 그대로 푸욱, 꺼지는 모래에 파묻혀 물속으로 잠겨버렸다. 아, 결국, 말하지 못 했어. 환청에게라도 대답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좋아, 했습니다.

 아니.

좋아해, 카라마츠.


*


 눈을 뜨면, 하얀 풍경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정말로 하얀 풍경. 순간 나 같은 게 이렇게 깨끗한 곳에 있어도 되나하며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결국 몸을 숨길 곳도 구석도 없어서 작게 쭈그려서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이렇게 있었을까. 어느새 누군가가 내 앞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얼굴과 몸은 보이지 않는 하얀 형체였지만 목소리는 무척이나 익숙해서 안심이 됐다. 근데, 누구 목소리더라.

 '후회는 없어?'
 "응."
 '정말로?'
 "정말."

하얀 형체는 그대로 내 가슴을 쿡 찔렀다. 아파. 그렇게 찔린 가슴에서는 시뻘건 피가 푹하고 쏟아지더니 작은 내가 뿅, 튀어나와 하얀 형체의 손바닥에 올라탔다. 호러틱하고 어이가 없는 장면이였지만 죽었으니 그러려니 하고 쳐다보고 있었는데.

 "카라마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고 외치는 것을 모기잡듯 내려쳐 잡아버렸다. 그렇지만 끈질기게도 손바닥 사이로 비집어 나온 자신이 다시 그 말을 외쳐대는 것에 순식간에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래도 후회가 없단 말이야?'

목소리가 빙글빙글 웃고 있어서 울컥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이야!!!" 하고, 반격을 했더니.

 '그럼, 다시 시작해보던가.'

 그리곤 내 이마에 딱!! 거센 딱밤을 먹였다. 아프다고 외치기도 전에 새까만 바닥으로 훅 떨어지는 감각이 몸을 휘감아서 겁에 질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자니 저 멀리서 히힉, 하고 음침하게 웃는 목소리 들려왔다. 저거, 어쩐지 익숙한데. 꼭 나 같은,

  '또 오면 카라마츠는 내꺼야.'

 누가 줄까보냐! 양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바짝 세워서 흔들면 웃는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리고,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힘겹게 눈을 뜨면, 흐린 시야로 회색빛깔 하늘이 보였다. 더럽게 칙칙하다고 생각했다가 순식간에 검게 덮이는 하늘에 물음표를 띄운 순간, 입술에 비벼지는 뜨거운 것에 눈을 홉떴다.

 숨이 억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컥, 역류하는 것에 고개를 비틀어 쿨럭이며 물덩이를 울컥 토해냈다. 켁켁, 한참을 토하다 숨을 들이쉰 순간, 뺨이 거세게 돌아갔다. 정신이 없었다. 몸은 추운데 얼굴하고 머리는 화끈거리고, 휙 돌아간 뺨은 아프고.

 대체 뭐, 뭐야. 오들오들 떨면서 몸을 반쯤 일으켜 고개를 돌리면,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는 얼굴이 보였다. 눈이 다시 커졌다. 아, 나 바다에서, 근데 왜, 너가 여기에.

 망막에 물에 빠진 고양이 같은 모습의 카라마츠가 온 얼굴을 못나게 구겨놓고 흐엉엉 어린애처럼 울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우느라 헐떡이느라 정신없는 목소리는 힘겹게 나를 붙잡고 흔들며 욕하고 있었다. 바보, 멍청이, 겁쟁이, 서생-!!!!! 아, 마지막도 욕인거야? 이렇게까지 엉엉 우는 카라마츠는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똑같이 당황해 축축해진 손을 마주 잡고, 아까부터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던 단어를 무심코 뱉어냈다.

  "사랑해. 카라마츠."  


*


-
안녕, 오랜만이네요.
이 이야기의 뒤가 궁금하실테죠? 그렇지만 제 이야기의 뒤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끝냈던 이야기의 아픈 결말이 당신에 의해 다시 써져 결말은 바뀌었고, 엔딩은 아직도 나지 않았군요. 그래요, 이 이야기는 다음이 있죠. 있지만, 그것을 이야기 하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군요. 아직, 이 사랑스러운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지 전 고민 중입니다.

그저, 당신에게 전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근계, 앞으로도 평생, 잘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카라마츠.

다시 봄이네요. 꽃이 피었습니다. 이번엔, 같이 별을 보러갈까요.

이치마츠가. 

총총

PS. 당신의 연기력은 정말, 나쁩니다. 그러니까 제 심장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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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면 왜 더 글쓰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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