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Sonata
by. 임루시



18.



"저번에 라일라 녀석이 아카데미까지 찾아와서......"

"아하하하. 그녀석 꼭 가고 싶다고 떼를 쓰더니, 그토록 지민이가 좋은가 보구나."

"아버지, 이게 웃으실 일이 아니라니까요!"


태형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뾰로통하게 말하였지만, 세르아토 백작은 그런 자신의 아들을 여전히 어린아이 보듯 귀엽다는 얼굴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이좋은 부자의 모습에 지켜보고 있던 지민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지민을 향해 정국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참 이상한 녀석이란 말이지."

"응?"


지민이 고개를 돌려 정국을 보았지만, 이내 정국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아니야.'라고 답하였다. 지민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한번 갸웃하였으나, 다시 세르아토 부자의 대화에 집중을 하였다. 그런 그를 정국은 신기한 동물을 보듯, 계속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이렇게 보면 누가봐도 온실속의 화초 샌님 왕자님인데, 어떨 때는 소드마스터보다 강해보였다. 물론 무력으로 보면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는 힘이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요즘들어 자신의 행동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적이 단 한번도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녀석의 궁으로 가는 길목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정국이 심각한 표정으로 깊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태형과 이야기를 하던 세르아토 백작이 지민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지민이 몸은 괜찮고?"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오기 전에 태형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드디어 본론을 꺼내는 듯 전과는 다르게 세르아토 백작의 눈에는 진중함이 흘렀다. 그가 길게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무엇을 물어보는지는 알 수 있었다. 지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자,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지민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마음 같아서는 품 안에 두고 싶지만, 위험하다고 숨어있을 녀석이 아니지."

"......"

"너는 누구보다 그 녀석을 쏙 빼닮았으니까."

"......"


'그 녀석'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얘기하지 않아도 바로 알았다. '제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라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민은 이번에도 차마 물어보지 못하였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세르아토 백작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위험한 일이 일어나거든 바로 알리거라."

"......삼촌."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가마."

"......"


세르아토 백작의 마지막 말에 지민이 고개를 툭 떨구었다. 아버지와 친형에게도 받아본 적이 없는 따뜻한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가에 눈물이 핑돌았다. 분위기를 바꿔보려는듯 태형이 지민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장난스럽게 대신 대답했다.


"제가 있으니 괜찮아요! 앞으론 털끝 하나 다칠일 없을거예요!"

"무슨! 네 몸도 못지키는 녀석이. 말 잘했다. 넌 오늘부터 특훈이야!"

"아, 아버지!"


어느새 티격태격하는 태형과 세르아토 백작을 보며, 지민은 눈가에 눈물을 단 채 풋하고 웃어버렸다.



-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두운 밤이 되자, 화려한 왕성도 고요해졌다. 혹 감기라도 걸릴까 몰리가 말렸지만, 지민은 대신 두꺼운 외투를 걸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정원 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염료를 뿌려놓은 듯한 밤하늘에 보석을 박은 듯 수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아......"


입으로 숨을 내뱉자, 뿌연 입김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추운데 여기서 뭐해?"

"!"


아직 돌아가지 않았는지, 정국이 지민의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눈이 똥그래진채 지민이 자신을 쳐다보자, 정국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솜털이 잔뜩 들어있는 커다란 외투를 입은 지민의 모습은 지민이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옷이 지민을 입은 것 같았다. 어찌보면 자신보다 훨씬 어려보였다. 지민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옷에 머무르자, 민망한지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너야 말로 여기서 뭐해?"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

"뭐......나도."


둘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나란히 앉아 아무말 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지만,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게 어색함이 감돌지는 않았다. 계속될 것 같았던 정적을 지민이 먼저 깼다.


"제국에서도 이렇게 별이 많이 보여?"

"같은 하늘인듯."


하늘을 바라보던 정국이 고개를 돌려 지민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다른 하늘이지."


지민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국은 쭉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네가 직접 확인해."

"......"


내가? 과연 내가 제국에 갈 수 있을까? 전생에서도 이번생에서도 제국에 가본 적이 없었다. 제일 멀리 간 것이 국경에 있는 세르아토 영지와 아카데미였다. 어린시절 자유로운 여행자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하였지만, 철이 들고 나서부터 왕국을 떠나 다른 곳에 간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제국에 간다라는 생각을 한 것 만으로도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책으로 읽은 것보다 재밌는 것이 많을거야."

"!!!"

"내가 보장하지. 지민 엘레노어 클로이트"


정국이 근사하게 웃으며 말한 마지막 말에 지민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



어느덧 신년회와 국왕의 탄생연회가 끝나자, 귀족들과 각 국에서 온 사절단들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도서관을 가는 길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자, 지민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건냈다.


"형! 여기서 자면 입돌아갑니다."

"안 자, 임마."


벤치에 앉아 있던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작별인사를 못하고가나 했는데, 다행히 작별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손을 불쑥 내밀며 그가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서 보자."


지민이 그손을 마주 잡으며 '그 말하려고 여기에서 계속 기다린거 아니죠?'라고 말하자, 윤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꼬맹아."


웃긴 녀석이었다. 인간관계는 지겹고, 새로운 인연은 더더욱 귀찮았는데, 이 녀석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랄 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손이 많이 가는 애완동물 따위도 질색이었는데, 강아지처럼 쫄쫄쫄 따라다니는 녀석의 모습은 딱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이녀석이 검술 훈련하는 공터에 보이지 않으면 뭔가 허전할 것 같았다.


언제 이렇게 익숙해진것일까.


늦었다. 윤기는 뒤돌아 걸어가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다르게 그의 입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미소가 걸려있었다.


"귀찮은거 딱 질색인데.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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