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런 말 하기도 참 뭐한데.”


석진은 의자에 앉아 병문안용으로 사온 오렌지 주스에 빨대를 꽂아 요구르트처럼 쪽 들이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병실 침대에 누운 남자는 다리 한쪽에 깁스를 한 꼴로 겨우 몸을 기대앉아 있었다. 


“너 운 되게 좋은 거 맞는 거 같아.”

“어. 그래서 너 그러는 거 발견했잖아.”


두 모금 만에 주스를 다 마신 석진이 쓰레기통에 병을 툭 던진다. 남자는 일주일 전에 석진에게 바람피우던 것을 걸렸다. 오랜만에 휴가를 받아 여행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바다보고 회 먹고 밤에는 실컷 뒹굴어야지 다짐했는데. 운전하는 남자 대신 전화를 받다가 우연히 뜬 메시지를 본 형사의 촉이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수상한 느낌에 끈질기게 털자 결국 이실직고한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내지른 석진은 분을 못 이기고 바로 그 자리에서 내렸다. 휴가 첫날부터 재수도 오지게 없네. 선선히 떠나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며 그렇게 생각한 석진은 그 길로 술이나 사서 집에 처박혔다. 그러고 다음 날 일어나서 뉴스를 보며 받은 소식이.

 

“…그것도 그렇고. 나 진짜 이때까지 작은 접촉사고도 한 번 난 적 없어. 그런데 너랑 헤어지고 가는 길에 바로 그렇게 됐잖아.”

“야, 말은 똑바로 하자. 너 나랑 헤어진 거 아니고 나한테 차인 거고. 그리고 솔직히 인과응보 아니냐? 내가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석진의 말에 남자가 입을 다시 다문다. 석진이 그렇게 떠나보낸 차는 브레이크 고장으로 인한 사고로 걸레짝이 됐고 남자는 다리가 아작났다. 속으로 내심 꼬시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약 모르고 안 내렸더라면 석진도 아마 이 병실에 남자랑 나란히 누워 있거나 조수석이어서 더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가슴을 쓸어내렸던 거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한 석진이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 거 봤으니까 간다.”

“그래.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배웅은 못 나가, 다리가 이래서. 석진은 손을 내저었다. 이래저래 좀 마음에 걸려서 얼굴이나 보러 들른 거지 딱히 아쉽거나 미련이 남은 건 아니다. 연애가 그리 길진 않았지만 그래도 몸은 잘 맞았는데. 복합적인 심정에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자 그가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이제 우리… 다시 못 보겠지?”


살면서 이상하게 연애만큼은 잘 안 풀렸다. 끝이 좋았던 적도, 오래 간 적도 없다. 고개를 끄덕인 석진이 미련 없이 병실 문을 열고 나선다. 급하게 마신 주스 때문인지 입안이 텁텁하고 썼다.




미스터 미스터리




“어, 엄마. 별일 없지?”

-얘는 아침부터. 너야말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거울을 보고 머리칼을 다듬은 석진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하고 말을 흐린다. 유독 일찍 일어난 정신은 평소보다 맑았다.

 

-너 또 이상한 꿈 꿨니?

“아니, 그런 거 아냐.”


정확히 따지면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저 오늘 특별한 일이 있을 테니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가라는 충고가 또렷했을 뿐. 그래서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겠거니 했는데 그쪽은 아닌가 보다. 딱히 단정할 필요도 없는 직장이고 석진도 원래 옷차림이 요란한 편은 아니었지만, 경험상 들으면 나쁠 것이 없어 괜히 출근 전부터 좀 신경이 쓰였다. 방을 나서려고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석진의 시선에 뭔가 밟혔다.


-싱겁기는. 몸 잘 챙기고, 찬이랑 국거리 좀 해서 보낸 건 받았어?

“어어. 근데 뭐 이렇게 많이 보냈어요. 혼자 사는데.”


성실하게 대답하면서도 석진은 눈에 걸린 팔찌를 잠깐 손끝으로 매만졌다. 약간 신경이 쓰이는 걸 보니 이걸 두고 말한 건가.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디테일한 부분을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항상 뜻 모를 말만 넌지시 하고 사라질 뿐. 그마저도 반나절쯤 지나면 왠지 내용은 싹 잊어버리고 그저 아 분명 뭐라고 했었는데, 갸웃하고 마는 것이다. 


“아무튼, 별일 없음 됐어요. 나 이제 출근한다.”

-그래. 집에도 한 번 들르고 그래.

“아이. 바빠서 그렇지. 그래도 곧 갈게요.”


이어지는 통상적인 잔소리를 들으며 결국 마음에 걸리는 팔찌를 휙 낚아채 손목에 채운다. 액세서리를 사 모으는 편이 아니었으니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을 텐데 그것도 잘 기억은 안 나고,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차갑게 살갗에 닿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제야 겨우 발걸음을 뗀 석진이 현관을 나섰다. 유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간다. 


석진은 운이 좋았다. 그것도 아주. 화목하고 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빼어난 외모로 태어난 데다, 머리도 좋아 남들이 몇 수씩 한다는 경찰대에는 한 번에 합격했다. 졸업 후에는 실무 경험을 쌓겠다며 다시 맨 아래부터 시작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좋아 별 문제 없이 팀에 녹아들었고, 강력계에서 구르고 뛸 때조차 크게 다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앙심을 품은 범인이 칼을 들고 갑자기 덤벼들었을 때는 갑자기 칼날이 날아가는가 하면, 진압하던 조직원이 심장을 정확히 조준하고 쏜 총알에는 우연히 품에 넣어둔 핸드폰만 박살이 났다. 대로와 시가지를 오간 차량 추격전에서 벌어진 5중 추돌사고에서도 혼자 부상이 없었다. 

이러다 보니 내부에서도 기적의 사나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 서바이벌 편 등등으로 불리고 있는 지경이었다. 하다못해 아이스크림 내기에도 진 적이 없고 심심풀이로 몇 번 사본 로또도 본전치기 이상만큼은 전부 당첨됐으니 말은 다 했다. 지금도, 석진이 운전하는 차도는 족족 신호가 파란불로만 바뀌어 예상보다 훨씬 넉넉하게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아.”

“어, 석진이 왔냐.”


선배들에게 인사한 석진이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제 자리에 앉는다. 석진은 이 모든 제 운이 이따금 꿈에 나오는 노인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전 기억이 용이 저에게 찾아와 갑자기 웬 할아버지로 변하는 꿈이었다. 

그 이후 석진은 잔병치레 한 번 없이 부모님 속 안 썩이고 키도 쑥쑥 컸다. 대충 조상신이나 수호신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궁금한 건 아니어서 누구에게도 자세히 털어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쪽이니. 전에 한 번 길을 가다가 웬 점쟁이가 기가 아주 세다고, 이 정도면 찾아오려던 악재도 길 건너에서부터 도망갈 거라고까지 했다. 정확히는 저보다는 저에게 있는 할아버지 기가 센 거겠지만, 아무튼 석진에게는 적어도 손해 볼 일은 아니다. 오히려 감사하면 감사했지. 언제까지 이 할아버지가 저를 보살펴줄진 모르겠지만. 


“다들 왔냐? 1팀 회의실로 모여.”


막 들어온 팀장에게 인사하기도 전에 손을 내저은 그가 팀을 안으로 불러 모은다. 석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일으켰다. 

 

“뭔데요?”

“리키최 꼬리 잡았대.”


오. 석진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짧게 감탄했다. 전과가 있는 사기꾼으로, 출소하자마자 또 크게 사기를 치고 사라져 꽤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인물이었다. 인원들이 전부 모이자 화면을 켠 팀장이 말을 시작했다. 


“유 사장 투자금 가지고 튄 이 새끼 기억하지? 일주일 쯤 전에 신고 들어와서 보니까 리키최 같다고 제보가 들어왔다. 신고 항목도 사기, 몽타주 비교해보니 거의 맞아.”

“위치는요?”

“여기서 안 멀어. C대 대학가인데, 가보니까 이미 접고 튀었어. 그래도 연락했던 사람들이 좀 있어서 그 명단 위주로 조사해야 돼.”

“거기선 뭘로 사기쳤는데요?”


석진의 질문에 팀장이 잠깐 헛기침을 한다. 옆에서 파트너인 윤기도 말을 거들었다. 명단이 있을 정도면 피해자가 꽤 있는 거 아닙니까? 그때까지 안 잡혔대요? 팀장이 가볍게 턱을 돌리며 화면을 넘겼다. 


“이 새끼 점집 차렸다.”

“와, 대박.”

“사람 하나 붙여서 의뢰인 개인정보 온오프라인으로 싹 긁어모아서 그럴듯하게 속였더라. 다들 긴가민가해서 신고를 많이는 안 했어. 그래도 인터넷 상에서 입소문이 좀 났던 곳이라 뒤져보면 나올 거 같다.”


해진이, 명선이가 온라인 후기 찾아서 피해자들 연락 좀 해보고. 그러자 넵 하는 소리가 뒤에서 튀어나온다. 석진이 뺨을 슥슥 긁었다. 점집이라니, 순진한 대학생들 상대로 잘도 등쳐먹었네. 팔을 드는 바람에 손목에 걸쳐져 있던 팔찌가 조금 아래로 내려가며 차가운 이질감이 든다. 그러고 보니 이거 하고 왔었지. 강력계 형사가 하기에는 제법 거치장스러워 뺄까 잠깐 고민하던 차에 팀장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김석진, 민윤기는 리키최가 마지막으로 점 봐줬다는 대학생 두 명 있는데 만나서 조사하고 와. 나머지는 합동수사 쪽으로 옮기고. 해산!”


빡센 합동수사 쪽으로 빠지지 않은 석진이 몰래 가슴을 쓸어내린다. 옆에서 선배 하나가 윤기에게 부럽다는 식으로 농을 던졌다. 파트너 잘 만난 탓이죠 뭐. 운이 좋은 석진을 두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윤기의 뒷목을 아프지 않게 친 석진이 으아 몸을 길게 폈다. 


“아니 무슨 점집이야. 후환이 두렵지도 않나.”

“뭐야, 선배. 그런 거 믿어요?”


엄청 안 믿게 생겼는데. 윤기의 말에 기지개를 켜던 석진이 애매하게 웃는다. 안 믿기에는 덕을 본 게 좀 많긴 해서. 윤기가 막 받은 데이터를 출력해 눈으로 읊으며 입을 열었다. 


“그 대학생 둘은 따로 사기 당했다고 신고하지는 않았어요. 여기 이름. 박지민, 김태형. 근데 김태형은 연락이 안 되고요.”

“둘이 같이 왔었어?”

“네. 박지민한테 김태형 연락 되냐고 물어보니까 좀 말하기 껄끄러워하던데, 만나서 물어봐야죠.”

“내가 갈게. 너는 인터넷에 퍼진 리키최 전화번호 알아봐. 어차피 없는 번호로 뜨긴 할 건데 그래도 역으로 파면 뭐 나오는지 보고.”

“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석진이 손을 탈탈 털어 보였다. 대학생인데, 뭐. 그리고 나 못 믿냐. 자뻑에 가까운 자신감에 윤기가 픽 웃었다. 석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를 나왔다. 용 할아버지를 등에 업은 터라 운은 좋아도 감까지 좋지는 않아 앞으로 생길 일이 어떤 방향일지 예상할 수는 없었다. 




카페에서 만난 지민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제가 사기를 당했다고요? 오히려 그렇게 물어오더니, 그때 주고받은 질문이나 답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한 달도 넘은 일이기도 하고, 제가 그런 거 자주 보러 다녀서 여러 군데 다녀서요. 무용이 전공이라 점점 앞길이 걱정돼서 최근에 자주 점을 봤다고 했다. 석진은 제 몫의 커피를 마시며 사진을 내밀었다. 


“이 사람한테도 받으셨죠?”

“아, 네. 무슨 도령님이었는데… 이 사람이 사기꾼이에요? 저 무용인 것도 맞추고 얼마 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진 것도 맞췄는데.”

“지민 씨. 그저께 곱창 먹었죠.”


지민의 눈이 동그래진다. 헐. 형사님도 신기 있으세요? 반쯤 비운 컵을 옆으로 치운 석진이 제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지민 씨 인스타그램에서 봤습니다.”

“아, 대박.”

“기본적인 정보만 있으면 요즘 흉내 내는 건 어렵지 않아요. 워낙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많이 올리기도 하고. 이 사람은 그런 거에 도가 튼 사람이니까 능청스럽게 잘했겠죠.”

“와 진짜 충격이다…. 진짜 몰랐어요. 그런데 이런 거도 신고하면 제 복채 다시 돌려받을 수 있는 거예요?”


석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 지민 씨랑 같이 점 봤던 김태형 씨가 저희 범인 잡는 데 도움 주실 수 있는 건 압니다. 그 이름을 듣자 지민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눈썰미가 좋은 석진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김태형 씨가 연락이 전혀 안 돼서요. 같이 점 보셨다면서요.”

“네. 같은 예대라서 신입생 때부터 친구긴 한데….”


조금 머뭇거리며 머리칼을 넘기는 지민을 보며 좀 기다리던 석진이 마저 잔을 비우고 내려놓자 놀란 지민이 그를 보았다. 석진은 최대한 신뢰를 줄 수 있는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상황에 따라서 서로 오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최대한 피해 안 가게 할 거예요. 지금처럼 그전에 몇 가지 미리 여쭤보려고-”

“태형이 휴학 했어요. 학교도 안 나와요.”


석진이 그 대답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지민이 아 씨, 말해도 되나 모르겠네 하며 뒷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지금은 휴학 신청을 하기엔 늦어도 한참 늦은 학기 중간이다. 중도 휴학을 할 정도면 제법 큰 일이 있었을 것이다. 눈이 조금 가라앉은 석진을 보며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 사기당하고 뭐 그런 건 아니구요.”


마른세수를 한 지민이 다시 석진과 눈을 마주쳤다. 아까와 달리 걱정과 심란함, 그리고 묘한 죄책감이 함께 깃든 눈동자. 석진이 인상을 가느다랗게 쓰며 고개를 기울였다. 


“태형이가 좀… 아파요.”



* * *



석진은 김태형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아니, 태형이는 사실 그런 거 안 믿고 좋아하지도 않거든요. 근데 걔도 몇 번 오디션 떨어지고 그러니까 제가 가기 싫다는 애한테 한번 가보자고 꼬드겨가지고. 그래서 갔는데…’


조용한 동네에 평범한, 일반적인 가족이 살 법한 아파트였다. 집 주소를 알려주던 태형 모의 목소리에서 언뜻 느낀 피로감을 떠올리던 석진이 문에 붙여져 있는 부적 두 개를 보았다. 엑스자로 교차한 괴황지와 붉은색 글씨가 을씨년스럽다. 석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거기선 별일 없이 잘 집에 갔는데, 담날부터 김태형이 갑자기 꿈에 뭐가 나왔다고 하더니 막 시름시름 앓는 거예요. 온몸이 시리고 춥다면서. 학교에서도 가다가 갑자기 쓰러져가지고 구급차 들어오고 난리를 쳤는데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 없대요. 정상이라고. 근데 말이 안 되는 게, 애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진짜,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막 중얼거리는데 듣기만 해도 저는 소름이 돋아가지구…’

‘신병이요?’

‘저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태형이 그러고 결국 학교 못 나왔어요.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한대요. 어머니가 대신 휴학 신청하러 오셨는데 제가, 얼굴을 못 보겠는 거예요. 괜히 제가 그때 점집 가자 그래서 신 붙은 거 같고 막, 미안해서.’


끝에는 거의 울먹이는 지민을 달래느라 꽤 애를 먹었다. 아주 사기는 아니었던 건가, 고른 터에 있던 귀신이라도 붙은 건지. 궁금증이 일긴 했지만 조사가 먼저였다. 뒤늦게 연락이 온 윤기로부터 큰 수확이 없었기 때문에 더. 

지민을 구슬려 번호를 얻어낸 집으로 전화했을 땐 태형의 모가 연락을 받았다. 자초지종을 말하면서도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체념한 목소리로 그러세요, 하고 대답했다. 애가 하루 종일 누워있어서 누가 오면 차라리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희망이라곤 없는 투에 안쓰러움도 조금 일었다. 들고 온 과일바구니를 품에 안은 석진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금세 문이 열렸다. 


“아, 어머님. 안녕하세요.”

“김석진 형사님?”

“네.”


배지를 내보이자 들어오세요, 하고 문이 열린다. 석진은 집 안을 채운 독특한 향냄새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들어선 거실에는 십자가부터 부적에 의도를 알 수 없는 조그만 인형들까지 온갖 물건이 줄지어져 서 있었다. 석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해도 안 되네요. 눌림굿도 용하다는 무당들한테 두 번이나 받았는데 며칠뿐이지 소용도 없고.”

“아… 감사합니다.”


찻잔을 받은 석진이 고개를 숙였다. 애가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니라고 하셨죠? 네, 대답한 석진이 짧게 전화로 했던 설명을 되풀이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태형의 모는 아들 때문에 꽤 고생했는지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아까 잠깐 말해두긴 했는데, 아마 잘 모를 거예요. 아파서 거의 자는 둥 마는 둥 해서. 속상해 죽겠어요 정말. 그냥 내림굿 받으라고 해도 자긴 죽어도 박수는 되기 싫다고 고집 부리는데, 이러다 정말 죽기라도 할까봐 애걸을 해도 꿈쩍도 안 하고…”


눈가에 물이 비치는 걸 본 석진이 차를 마시다 말고 주섬주섬 손수건을 내민다. 고맙습니다, 하고 한숨과 함께 눈물을 털어낸 태형의 모가 석진의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어요. 자고 있을 텐데 그래도 가보시겠어요?”

“네, 괜찮은지 보고 이야기 좀 해볼게요.”


두 사람이 함께 일어난다. 태형의 모가 먼저 방문을 짧게 두드리고는 대답을 기다리기 전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태형아, 아까 말씀드린 손님 오셨어. 김석진 형사님. 쯧. 그녀를 따라 조금 거리를 두고 방문 안으로 들어가던 석진이 잠깐 멈칫했다. 누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돌아보던 석진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태형의 쪽으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여자가 뭐라고 몸을 숙여 속삭이고 있는 태형은, 솔직히 말해서 감탄이 나올 정도로 미남이었다. 땀으로 젖은 앞머리가 멋대로 삐쳐 드러난 이마와 허옇게 질려 누워있는데도. 괴로운 숨을 쌕쌕거리는 태형은 말마따나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못 일어나네요.”

“아, 잠깐 봐도…”


네. 태형의 모가 선뜻 뒤로 물러났다. 석진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태형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이 상황에서 들 생각은 아니지만, 더 잘생겼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코끝에 자리한 점이나 기다란 속눈썹과 다부진 턱도. 다만 오래 앓아서인지 입술이 다 트고 피부가 얼룩덜룩하게 반점이 올라 있었다. 입술 새로는 지민의 말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이거 조사는커녕 대화도 제대로 못 하겠는데. 그러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 석진이, 저도 모르게 태형에게 손을 가까이 댄 순간이었다. 

쯧. 다시 한 번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뭐야. 확 고개를 든 석진이 주변을 돌아본다. 그러나 방 밖을 나가고 있는 태형 모 외에는 아무도 없다. 뭐야, 좀 무서운데. 그때 손목이 덜컥 잡힌다. 


“으악!”

“…누구세요.”


눈을 번쩍 뜬 태형이 석진의 손목을 쥔 채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을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사람치고는 막 마주친 눈빛이 꽤 또렷하다. 손힘도 제법이고. 석진은 잠깐 태형의 손에 잡힌 제 손목과 거기 달린 팔찌를 보았다. 그 사이 뭔갈 생각하는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인 태형이 석진을 다시 본다. 아, 하고 팔을 떨쳐내려는데 오히려 힘을 준다. 당황한 석진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김태형 씨. 저 광진서 강력 1팀 김석진 경위입니다. 한 달 전에 점 보신 것 때문에 물어볼 게 있어서-”

“이상하다.”


제 말을 듣지도 않고 턱 끊더니 중얼거리는 태형을 본 석진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진다. 뭐야, 아직 정신 안 들었나. 그러기에 다른 손으로 제 몸 여기저기를 만지는 태형은 이제 완전히 괜찮아 보였다. 몸을 반쯤 일으킨 태형이 살짝 입을 벌린 채 다시 석진을 봤다. 그것보다 손 좀, 하고 석진이 겨우 태형을 떼어낸다. 악력이 왜 이렇게 세. 떨어지는 손에 조금 아쉬운 건지 아.. 소리를 내는 태형을 보며 살짝 이마를 긁은 석진이 입을 열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네. 완전. 이런 적 처음이에요. 지금 하나도 안 아파요.”


숨도 잘 쉬어지고, 이상한 소리도 안 들리고. 크게 공기를 들이켠 태형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확실히 눈을 뜨고 마주한 얼굴이 더 미남이다. 배우 해도 되겠네. 화려한 얼굴이나 형형한 눈빛이, 신병을 앓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생각보다 기가 약한가. 금세 빠르게 얼굴빛도 좋아지는 게 회복력도 좋다 싶었다. 


“그러면 조사 좀…”

“엄마!”


말 끊어먹으면 맛있니. 입술을 꽉 깨문 석진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박차고 방 밖으로 나가는 태형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래도 처음으로 괜찮아졌다니 얼마나 신이 나겠나 싶어 팔짱을 끼고 열린 방문 바깥을 보았다. 놀란 태형의 모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배고파아. 애교가 많았는지 살짝 끝을 늘이며 말하는 낮은 목소리가 제법 듣기 좋다. 어쩌다 신병을 얻었나. 그런데 왜 갑자기 나았지? 팔을 교차하자 피부에 닿은 팔찌가 느껴진 석진이 내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이유가 있나. 그때 밖에서 파열음이 울렸다. 


“태형아!”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애가 와르르 무너지는 걸 본 석진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달려갔다. 그새 방에서 멀찍이 떨어진 부엌 안쪽 냉장고 문을 부여잡고 쓰러진 태형이 발작하듯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어머, 얘가 방금까지 괜찮더니 왜 또…”

“어머님. 제가 안을게요.”


놀란 여자를 뒤로 물리고 태형에게 다가간 석진이 허리를 안아 받치고 올렸다. 축 늘어진 태형의 젖은 숨이 귓가와 목덜미에 덥석덥석 닿을 때마다 옅은 소름이 올라왔다. 갑자기 왜 이래. 무슨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눈이 감긴 태형의 피부로 아까처럼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다다닥 솟아난다. 신이 몹쓸 장난이라도 치나. 인상을 쓴 석진이 태형을 부축해 몸을 일으켰다. 


“태형 씨. 방 안으로 갈게요.”

“아니, 정말 차라리 신내림이라도 받으라니까…”


순식간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태형의 모가 울먹이며 석진의 뒤를 따랐다. 발이 질질 끌리는 태형을 어쩌지도 못하고 석진이 거실을 가로질렀다. 금세 체온이 차가워진 태형의 몸이 석진에게 꼭 달라붙었다. 석진이 순간 미간을 좁힌다. 달라붙었다고?


“추워….”

“태형, 김태형 씨.”


석진의 뺨에 이마를 붙인 태형이 몸을 바짝 가져다 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게가 실린 석진이 뒤로 나동그라진다. 악 소리가 나기도 전에 석진의 뒤통수에 손을 넣어 받친 태형이 다시 눈을 떴다. 

허. 다시 흰자위도 깨끗하고 피부를 덮은 열꽃이 싹 사라졌다. 그 사이에? 의구심이 들기도 전에, 정신을 차린 태형이 석진의 양 손목을 콱 쥔다. 어이가 없기도 하거니와 제 위에 올라탄 태형과 제 요상한 자세를 떠올린 석진이 눈을 크게 떴다. 가까이 오는 태형 모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니, 지금 뭐하는 거예요.”


순식간에 귀까지 빨개진 석진이 태형을 밀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밀려난 태형은 아프거나 민망한 구석도 없이 얼른 저도 몸을 일으키고는 석진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뭐야. 그리고는 석진의 손을 잡는다. 석진이 눈썹을 찡그리며 태형을 돌아보았다. 그 얼굴이 뭔가 깨달은 듯 절박했다. 뭐라고 할 틈도 없이 태형이 입을 열었다. 


“할게요.”

“예?”

“도와줄게요. 그, 조사요. 뭐 물어본다면서요.”

“학생, 이 손부터 좀 놓고-”


뭐 이런 애가 다 있냐. 그러나 태형은 꼭 쥐고 놓지 않았다. 그 순간 석진은 쨍 하고 울리는 것 같은 방울 소리를 들었다. 이건 또 뭐야. 금세 쓰러진 기색도, 아니 애초에 신병을 앓은 적도 없었던 사람처럼 말끔하게 돌아온 태형이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신 저랑 같이 있어요.”


뭐?


“나 지금 괜찮은 거, 그.. 성함이 뭐라구 하셨죠.”

“김석진이요.”

“네, 그, 김석진 형사님 때문인 거 같아요. 이거 봐요.”


손을 빼는 대신 깍지까지 끼고 들어올린다. 아니 보라고 해도 오늘 처음 본 그쪽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혈색이 보기 좋게 돌아온 태형이 입술을 벌리며 웃었다. 눈이 접히고 콧잔등이 찡그려진다. 아까 죽은 듯이 누워 앓던 환자는 어딜 가고, 시원하게 웃는 청량한 남자애가 서 있다. 석진은 못 박힌 것처럼 태형의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지금 완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머리도 안 아프구 윙윙 소리도 없구 열도 안 나구…. 다시 싹 나은 아들을 본 태형의 모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형사님이 옆에 오니까 괜찮아졌어요.”

“…나?”


석진을 돌아본 태형이 싱긋 웃었다. 형사님이 가까이 오니까 머리가 엄청 맑아지구. 저 계속 누르고 있던 뭐가 도망간 것 같은 느낌? 그 설명에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석진이 미간만 좁힌다. 


“저도 잘 몰라요. 근데 형사님이 저랑 멀어지니까 바로 다시 그게 확 돌아왔어요. 그니까 거리는 여기서 저기 정도?”

“아니, 저기요.”

“근데 지금은 또 괜찮구. 그러니까 같이 있으면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석진이 태형의 말을 끊으며 와락 반문한다. 어이도 없고 당황한 석진이 태형에게 팔을 내준 채 딱딱하게 물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어요. 더욱이 계속 같이 있어야 된다고요? 계속? 아니, 농담이 심하시잖아요. 점점 흥분해서 목소리가 높아진 석진을 태형이 잠깐 바라본다. 그리고는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신이 내린 거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하려던 석진의 입이 싹 다물린다. 태형은 여전히 석진의 손을 놓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 그런 거 믿지도 않고 저희 가족 중에서도 신내림 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어릴 때 몇 번 가위눌리긴 했어도.”


근데 저한테 신이 왔다잖아요. 난 싫은데. 태형의 눈이 느리게 가라앉았다. 석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태형을 보았다. 바로 기운이 돌아오긴 했지만, 그간 제대로 먹지도 못한 탓인지 얼굴에 살이 없고 피부와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가끔 신병을 오래 앓으면 너무 고통스러워 스스로 몸을 긁기도 한다던데 태형의 팔뚝도 손톱자국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하. 석진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앞머리와 이마를 가볍게 훑었다. 머리가 가볍게 지끈거린다. 아침에 꿨던 꿈이 이것 때문이었나. 태형이 다시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대신 저랑 같이 있어 주세요.”


아이고 두야. 석진이 태형을 보았다. 천진하게 눈이 깜빡인다. 문득 잡고 있는 손목에 감긴 팔찌가 시야에 들어왔다. 네? 형사님. 제발요. 애교가 녹아든 목소리로,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살짝 응석을 부리는 태형은 씩씩했고 신나 보였고 무엇보다도… 정말 미남이었다. 석진이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이건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면 조사에 응해주시는 겁니까?”

“말 편하게 하세요. 태형이라고 부르시고요.”


히. 삐죽 올라가는 입술에도 비스듬히 점이 있다. 이게 잘하는 건가. 석진은 마침 윤기의 전화가 울리는 액정을 잠깐 보았다가, 태형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대감에 반짝이는 얼굴. 석진은 시각적인 것에 약하다. 잘생기고 예쁜 것에는 당연했는데 이 남자애는 둘 다. 그리고 어쨌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고 구하기 위해 자신은 경찰이 됐으니, 꼭 사심이 아니어도…


“그런데 무슨 조산데요? 설문조사? 답 고르는 거?”


이거, 잘하는 거 맞는 걸까. 석진은 여전히 애교를 부리듯 해사하게 눈을 깜빡이는 태형을 보며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쯧, 용노인이 혀를 차는 소리가 어디선가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거면 왜 도와주신 건데요! 속으로 꽝꽝 발을 구르며 석진이 가슴을 친다. 



* * *



“다 챙겼어?”

“네!”


신이 나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나온 태형이 트렁크에 짐을 싣는다. 지켜보던 석진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태형의 모가 몇 번이나 사례를 하려 했지만 민중의 지팡이가 그런 걸 받기도 그랬고, 그저 함께 챙겨준 과일이나 조금 받아다 태형의 짐과 함께 넣었다.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됐지.

기약 없이 같이 지낼 수는 없어 일단 이번 사건을 해결할 때까지-태형은 그 말에 입술을 내밀고 구시렁댔지만 석진은 어이가 없었다-같이 있기로 했다. 크지 않은 짐을 싸는 내내 태형은 석진을 곁에 꼭 데리고 다녔고 그건 꽤 우스운 꼴이었다. 차라리 수갑이라도 채우던가 끈이라도 묶지 그러냐. 그 말에 오히려 반색을 하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문 건 덤이고.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서 있으니 짐을 다 넣은 태형이 쪼르르 석진의 앞으로 온다. 


“왜?”

“아니여. 이제 다 챙겼으니까 가면 돼요.”


그리고는 괜히 석진의 손을 꾹 잡았다가 놓는다. 기라도 받는 시늉이지만 짧은 시간 동안 오히려 질린 건 석진 쪽이라 별 반응을 하기도 지친다. 헤헤 웃는 태형의 손을 잠깐 보던 시선이 멈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챙겨 가라던 여러 부적이니 뭐니 하는 것들 중에서 태형이 질색하며 꺼내 간 건 붉은색 끈으로 된 팔찌 하나. 그나마 덜 무섭게 생겼죠? 매듭을 꼼꼼하게 지었지만 신병을 앓는 동안은 하나 마나였다고 했다. 그것 외에도 다른 것 전부 다. 그렇게 말하는 태형은 씻은 듯이 나은 얼굴이었지만 목소리에서는 짧은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가요, 형사님.”


그러니까 형사님이 저한텐 엄청난 행운 같은 건데. 석진은 멀어질세라 조수석 문을 열며 저에게 팔랑팔랑 손짓하는 태형의 옆얼굴을 잠깐 보다가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기분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네가 마지막이 아니었다고?”

“네. 저 점본 다음날 학교 갔을 때, 같이 교양 들었던 여자애가 자기도 보러 갈 거라고 했었어요.”


밀린 연락이 가득 쌓인 핸드폰을 열어본 태형이 답장을 할까 하다가 어떻게 될지 몰라 그냥 관둔다. 선선히 태형의 학교 쪽으로 차 방향을 돌리며 석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민이는 그런 얘기 안 하던데.”


핸드폰으로 여자애의 연락을 찾던 태형이 아, 하고 짧게 웃었다. 박지민은 그 교양 안 듣거든요. 그 목소리와 표정을 본 석진이 입술을 슬쩍 끌어내리며 눈썹을 삐딱하게 기울인다. 이내 돌아오는 메시지를 확인한 태형이 씩 미소 짓는다. 학교에서 보재요. 


“김태형!”


전공책을 끌어안은 여자애가 카페 입구에서부터 놀란 얼굴로 후다닥 달려온다. 제 스무디를 마셨다가 석진의 아메리카노를 맛봤다가 인상을 쓰고 다시 스무디로 바꾼 태형이 멋쩍게 뒤통수를 매만졌다. 안녕. 

 

“너 중도휴학했다며. 연락도 안 돼서 엄청 걱정했어!”

“어어. 좀 일이 있어서. 그, 여기는 김석진 형ㅅ… 억.”

“안녕하세요. 태형이 친한 형이에요. 김석진입니다.”


태형의 옆구리를 툭 쳐서 입을 막은 석진이 금세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여자애가 아직 경계를 다 풀지는 않고 아, 네에 하고 태형과 석진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 넓지도 않은 소파에 꼭 붙어서 나란히 앉은 성인 남자 둘. 옆에 빈자리 의자 끌고 와서 앉아도 될 텐데 굳이 불편하게 꼭 겹친 어깨가 부딪쳤다. 


“아무튼, 너 괜찮아? 아프다고 그러던데.”

“아… 으응.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나 혹시 몰라서 필기랑 과제도 다 챙겨놨는데, 너 필요할까봐. 근데 휴학했다고 해서 진짜 서운했어. 연락이라도 해주지. 톡이랑 전화도 하나도 안 받고.”


태형이 살짝 난처한 얼굴로 웃어 보인다. 석진은 흐음 하는 표정으로 두 남녀를 보았다. 태형이 아까 보인 묘한 반응이나 지금 태도로 보면 여자애에게 딱히 관심 없어 보였지만 상대는 제법 적극적이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지만 석진을 앞에 두고 태형만 보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귀엽기도 하고 왠지 장난을 치고 싶기도 한 마음으로 석진은 태형이 여자애의 질문 공세에 쩔쩔 매는 걸 잠깐 두고 보았다. 도움이라도 청할 기세로 태형이 석진을 바라본다.


“아이, 형. 형이 할 말 있어서 온 거잖아.”


어쭈. 반말도 하고. 손바닥에 땀이 찼는지 쓱쓱 허벅지에 닦은 태형이 저도 모르게 다시 석진의 손목을 잠깐 쥐었다 놓는다. 여자애의 눈길이 잠깐 석진에게 머문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석진의 어깨 뒤에 꼭 붙다시피 몸을 기댄 태형. 석진은 제 몫의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언제 봤다고 바싹 붙어서 커피는 맛이 없고 어쩌고 종알거리는 태형을 본 여자애의 시선이 좀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석진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뭘 하지도 않았는데 오해를 받는 건 좀. 


“맞아요. 제가 여기를 좀 가보고 싶어서.”


그러면서 미리 구해둔 명함을 꺼내서 여자애 앞에 내민다. 고개를 빼고 그 명함을 본 여자애가 아, 꽃도령이요? 아는 목소리를 냈다. 


“네. 여기서 점 봤었죠?”

“네, 태형이도 봤다고 해서 그때 연락처 받았었어요. 그런데 원래 이런 거 좋아하세요? 여기 대학생들이 많이 가는 덴데.”


여자애의 말에 석진이 잠깐 굳고는 하하, 웃었다. 제가 좀 어리게 잘 놀아서. 어금니를 약하게 깨물고 대답하는 석진을 보지 못한 여자애가 제 핸드폰을 꺼내선 전화번호부를 뒤진다. 


“저도 거의 막타였어요. 그때 이제 문 닫을 거라고, 핸드폰 없앨 거라고 해서 이쪽으로 연락 달라고 하더라고요.”


태형과 석진의 눈이 동시에 번쩍 뜨인다. 여자애가 내민 번호는 ‘꽃도령’이라고 저장된 이름이었지만 명함에 적힌 것, 그리고 석진이 팀 내부에서 들어온 것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조카라고 했나? 아무튼 대리로 예약해준다고 했었어요.”

“이 번호 좀 적을게요.”


눈을 빛내며 후다닥 고개를 박고 핸드폰에 번호를 입력하는 행동에 여자애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되게 궁금하셨나보네. 그 옆으로 고개를 빼고 석진의 어깨에 기대다시피 하는 걸 보는 태형. 여자애가 조금 미간을 좁히며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근데 너한테 이렇게 친한 오빠 있다는 건 처음 들었네.”

“아, 으응. 뭐….”


딱히 너랑 내가 뭘 가르쳐 줄 사이가 아니기도 한데. 그 말은 착하게 삼킨 태형이 순하게 웃었다. 옆에서 흥분한 건지 몸이 들썩이는 석진과 팔꿈치나 허벅지가 닿을 때마다 안심도 되고 묘하게 가라앉기도 했다. 번호를 옮긴 석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죄송한데 저 잠깐 화장실 좀.”


다급하게 일어나는 석진을 태형과 여자애가 동시에 올려보았다. 화장실 가고 싶은 게 아니네. 태형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다. 눈이 마주치자, 건수를 잡아 신난 석진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활짝 웃는 걸 처음 본 태형이 순간 멍하니 올려본다. 카페 통유리 창 너머로 든 빛에 석진의 까만 머리칼이 반짝거린다. 여자애가 문득 레모네이드를 마시다 물었다. 


“근데 무슨 점 보시게요?”


막 자리를 벗어나려던 석진이 잠깐 고민한다. 


“연애요.”

“형사, 아니 형 연애해?”


급하게 물어오는 태형에게 석진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 하도 못해서. 그럼 잠시 실례할게요.”


그리고는 태형을 휙 지나쳐 화장실로 간다. 태형이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흰 뒷목을 주무르며 핸드폰을 보느라 내리깐 눈. 여자애가 컵을 내려놓으며 은근슬쩍 입을 뗐다.


“근데 거기 연애운은 잘 못 맞추던데.”


내가 이번 학기 중에 잘 되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했거든. 뺨에 살짝 홍조가 든 여자애가 태형을 가만히 본다. 지금 보면 잘 맞추는 것 같기도 하고. 속삭이듯 말하는 여자애의 어프로치에도 가만히 석진이 들어간 화장실 쪽을 보고 있던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태형?”

“아, 나도 화장실 좀.”

“뭐? 화장실을 왜 같이 가?”


여자애가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며 묻는데도 태형이 입술을 살짝 물고는 웃기만 했다. 내가 좀, 형이랑 붙어 있는 걸 좋아해. 후다닥 꺾어 신고 있던 운동화에 발을 욱여넣은 태형이 걸음을 뗀다. 좀 많이! 빨간색 팔찌를 엄지로 슬쩍 문지른 태형이 화장실로 뛰다시피 가는 걸 본 여자애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좀 많이 이상한데. 


“어, 윤기야. 번호 하나 불러줄게. 여기 위치랑 통화내역 좀 뽑아봐. 아니. 조카 번호라고 준 거 있어. 제일 마지막으로 점 본… 으악!”


불쑥 어깨 위에 턱을 올리는 태형의 행동에 기겁한 석진이 저도 모르게 걷어찰 뻔한 몸을 뒤로 겨우 당겼다. 방금 합기도 유단자한테 날아갈 위기였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한 태형은 어딘가 불안한 얼굴로 석진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야. 내가 무슨 죽부인이야? 아니, 윤기야 너 말고. 어.”

“너무 멀리 갔잖아요. 나 쓰러지면 어떡해요.”

“아, 화장실이야 화장실! 손잡고 들어갈래?”


그러자 불쑥 손도 잡는 행동에 석진이 손등으로 이마를 짚는다. 그래도 카페 화장실은 머니까…. 우물거리며 변명한 태형이 거울 너머로 석진을 흘긋 본다. 놀라서 얼굴이 빨개진 석진이 이내 다시 윤기라고 부른 파트너와의 통화를 이어갔다. 


“어. 번호 적었어? 뽑을 수 있는 내역 다 뽑아서 좀 줘. 명의랑 정보도.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이쪽 연락처 넘겼을 거 같아.”


뭔가 촉이 나쁘지 않다. 윤기도 뭔가 희망적이라고 봤는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밝다. 뻐근한 목을 돌리던 석진이 아직 거울을 통해 저를 보고 있는 태형과 눈이 마주친다. 아직도 안기다시피 해서 한쪽 손을 잡힌 상태.


“그게 스킨십으로 낫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돼?”

“그래두 불안하단 말이에요.”


아랫입술을 비죽이는 태형의 얼굴이 살짝 시무룩하다. 그러자 또 금세 석진의 마음이 약해졌다. 진짜 끈이라도 묶어서 달고 다녀야 하나. 그러던 태형이 불쑥 고개를 들더니 묻는다. 


“근데 진짜 연애 못해요?”


저를 쳐다보는 눈이 동그랗고 크다. 자칫 화려한 생김새에 사나워 보일 수도 있는 눈매인데도 표정이 워낙 순한 편이다. 초롱초롱한 눈을 보니 뭐라 말할 기운도 사라진 석진이 태형을 어깨에 단 채 팔찌를 잠깐 손목에서 뺀 다음 손을 씻는다. 

 

 “못한다기보다는 그냥 좀 운이 없는 편.”

“형사님처럼 생겼는데 운이 없을 수가 있나.”


그 말에 석진은 자주 들었다는 듯 기쁜 내색도 없이 그러게, 하고 비누로 뽀득뽀득 손을 닦는다. 다른 건 좀 괜찮은데 연애가 유독 잘 안 풀려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아무도 없는 카페 화장실에 붙어 있으려니 아무 말이라도 할까 싶기도 했다. 글쿠나에 가까운 그렇구나, 하는 대답이 바로 곁에서 들렸다. 그런데 이거 예쁘다. 태형이 팔을 뻗어 석진의 팔찌를 들어본다. 


“액세서리 좋아해?”

“네. 귀 봐요, 여기. 병 때문에 누워 있느라고 다 빼긴 했는데.”


피어싱 자국으로 너덜너덜한 귓가. 잘 어울릴 것 같아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봐도 돼요? 그러더니 능숙하게 후크를 채우자 금세 자기 것처럼 잘 어울렸다. 손을 폈다 접으며 거울에 팔찌를 비춰보는 태형을 본 석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 가져.”

“에. 비싸 보이는데요.”

“그렇긴 한데 뭐…”


아마 지나갔던 전 애인 중 하나가 줬을 거라, 별로 아까운 것도 아니고. 석진은 괜찮아. 하고 돌려주려는 태형의 손을 밀어냈다. 그럼 거절 안 하고 잘 받을게요. 웃으면서 이리저리 대보더니 하고 있던 붉은 팔찌와 함께 매치시키자 꽤 어울렸다. 웃으니 뿌듯하게 뺨이 올라간다. 몸을 자주 쓰다 보니 액세서리는 거의 하지 않는 석진과는 달리, 태형은 제법 그런 데 취향이 있는 듯했다. 한창 좋아할 때인 것도 맞기도 하다. 놀러 다니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지내고, 좋아하고 취향인 것들을 쇼핑하면서. 그렇게 오한에 시달리면서 누워있을 게 아니고. 아까까지만 해도 반송장처럼 있던 걸 떠올린 석진이 저도 모르게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그때 불쑥 태형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상형이 뭐예요?”


생각에 잠겨 있다 고개를 든 석진이 조금 놀란다. 아까보다 거리가 훅 가까워져 있어서.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뒤로 좀 물러서는 석진을, 태형이 팔찌를 매만지며 보았다. 아까 입을 벌리고 어린애처럼 웃던 것과는 또 조금 다른 얼굴. 석진은 살짝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페이퍼 타올을 뽑아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잘생긴 사람?”


그리고는 가자, 하며 먼저 자리를 뜬다. 잠깐 생각하던 태형이 혼자 남겨져 고개를 갸웃했다. 금세 또 어리둥절한 표정. ‘잘생긴’ 사람? 거울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을 멍하니 보던 태형이, 또 석진에게서 멀어질까봐 후다닥 같이 가요! 하고 그를 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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