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안, 급체해서 오늘 조별모임에 못 갈 것 같아. 정말 미안해 ㅠㅠ

내 이럴 줄 알았다.

처음 조를 짤 때부터 예감이 안 좋았다. 전공필수과목이라 같은 과 사람들이 모여있는 수업이었는데도 한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의 선배였고, 한 명은 뺀질뺀질 빌붙어 학점 건사하며 놀러다닐 줄만 아는 동기였고, 또 한 명은-

"쿠니미. 계속 잘 거야?"

입학할 때부터 밥 먹고 배구할 때 빼고는 잠만 잔다고 악명이 높은 쿠니미였다. 나는 쿠니미와 같은 수업을 들을 때마다 쿠니미가 깨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런 조합으로 조가 되어버렸다.

조별과제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힘겹게 시간을 맞추어 주말에 모임을 잡았다. 답이 없는 이 조에서 떠밀리듯 조장이 된 나로서는 제발 모임에 다들 나와주기만 해다오 간절히 빌었다. 쿠니미가 자기 자취방에서 모이자고 제안한 게 반갑기 짝이 없었다. 적어도 쿠니미는 결석할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를 않나, 혹시나는 역시나, 아니나다를까 선배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동기에게서도 방금 이런 문자가 와 버렸다. 쿠니미는 아까 하품을 하며 문을 열어주더니 다 모이면 깨워달라며 낮잠 삼매경에 빠진 지 오래였다.

"쿠니미."

다시 한번 쿠니미를 불러보았다. 나를 등진 채 돌아누워 있는 쿠니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말 숙면을 취하는 듯 아기처럼 고른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올 뿐이었다.

부아가 치밀었다. 저 이불을 확 걷어내고 베개로 퍽퍽 때려버릴까보다. 

물론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런 일은 못했다. 차라리 혼자 리포트를 쓰고 말지. 어차피 주제선정이나 자료조사도 내가 혼자서 다 했으니까 차라리 끝까지 혼자 하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함께 무언가를 해내는 건 정말정말 어려워.

문득 옛 얼굴들이 뇌리를 스쳤다. 히나타. 야마구치. 카게야마. 츠키시마. 

잘 지내고 있니? 우리는 옛날에 많이많이 대단했던 것 같아. 지금보다 어렸는데도.

한숨을 한 번 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옛 친구들을 생각하니 용기가 났다. 노트북을 켰다. 테이블 위에 자료들을 보기 좋게 늘어놓았다. 조원들과 같이 먹으려고 사온 주전부리도 꺼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 혼자 다 먹을 참이었다. 

화면 위에 커서가 깜빡였다. 노트와 키보드를 오가며 목차를 썼다. 그리고 한 문장, 또 한 문장. 어쩐지 술술 글이 써진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조원들 때문에 망친 기분은 벌써 누그러진 지 오래였다. 아마도.

.

일어날 타이밍을 놓쳤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야치 혼자서 일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냥 지금 막 잠이 깬 척 일어나서 야치한테 말을 걸면 되는데, 어쩐지 그렇게 하면 어색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잠은 처음부터 안 잤다. 야치와 단둘이 있으려니 어색해 죽겠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었다. 그래도 진짜로 자려고 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등 뒤 어딘가에 있는 야치의 존재감이 나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매드아이 무디처럼 내 눈도 등 뒤까지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야치에게 들키지 않고.

"쿠니미. 계속 잘 거야?"

야치가 나를 불렀을 때 슬그머니 일어났어야 했다. 그게 제일 자연스럽고 문제없는 방법이었다.

"쿠니미."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괜히 그랬다. 괜히. 그냥 뜻모를 똥고집이었다.

야치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한동안 사각사각 연필로 무언가를 쓰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안절부절못했다. 늘 잠을 자던 자세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팔다리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꿀 수도 없었다.

얼마 전부터 제법 빠른 속도로 규칙적인 키보드 소리가 내내 들려왔다. 야치의 집중력이 제대로 궤도에 오른 모양이었다. 일어날 타이밍을 놓쳤다. 지금 일어나봤자 애매하게 방해꾼 노릇만 하게 될 터였다.

텄다, 텄어.

속으로 스스로에게 혀를 끌끌 찼다. 오늘부로 야치에게 나는 인생에 도움 안되는 놈으로 찍혔을 것이었다. 진실에서 크게 먼 이야기는 아니지만 속이 쓰렸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러려던 게 아니었던 인생은 잘도 이렇게 흘러간다.

갑자기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야치에게 귀기울이느라 예민해져 있던 청각이 예상치 못한 침묵에 오히려 더욱 소스라쳤다.

귀를 기울인다. 야치가 의자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온다.

.

야치는 세상 모르고 잠든 듯한 쿠니미에게서 난폭하게 이불을 걷어냈다. 쿠니미는 움찔 놀라며 눈을 떴다. 야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쿠니미의 머리밑에서 베개를 빼내어 쿠니미를 퍽퍽 때렸다. 쿠니미는 잠이 덜 깼는지 비몽사몽한 듯 얌전히 야치에게 맞았다.

그렇게 3분쯤 지났을까. 쿠니미를 백 대쯤 때린 야치가 제풀에 지쳐 침대 위에 나동그라졌다. 쿠니미가 주춤주춤 자리를 피했다.

"무슨 일이야?"

쿠니미의 어정쩡한 질문에 야치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무슨 일이냐고? 그게 할 소리야?"

"아니."

야치는 더 화낼 기운도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리포트 내가 초고 썼으니까 가서 검토하고 완성해줘."

"알았어."

"네가 잔 만큼 나도 잘 거야! 깨우지 마!"

"알았어."

쿠니미는 얌전히 노트북 앞에 앉아 리포트에 집중했다. 야치는 쿠니미가 제대로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자마자 등을 지고 돌아누웠다. 방안에는 종종 쿠니미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나서 쿠니미가 입을 열었다.

"야치. 자?"

야치는 대답이 없었다.

"야치."

쿠니미는 끈기 있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안 자."

야치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평상시와 같은 말투로 조곤조곤 대답했다.

"다 했어?"

"아직. 좀 걸릴 것 같아. 다 한 다음에 메일 보낼 테니까 먼저 가도 돼."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다 하는 거 보고 갈 거야."

야치가 부루퉁한 채로 웅얼거렸다.

"그러면 밥 먹고 할래?"

쿠니미가 물었다.

"내가 살게."

"네가? 왜?"

"미안해서."

야치는 대답이 없었다.

"어때?"

쿠니미가 끈기 있게 다시 물었다. 야치가 쿠니미 쪽으로 다시 돌아누웠다. 아직 부루퉁했지만 한결 풀어진 표정이었다.

"애초에 미안할 일을 만들지 마."

"응... 미안해."

야치는 그제서야 오늘 처음으로 미소다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사실 너는 그나마 제일 덜 미안할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나도 아까 때려서 미안해. 아팠지?"

"아니. 전혀."

"진짜? 그렇게 세게 때렸는데?"

"전혀."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팔이 아프지?"

자기 팔을 콩콩 두드리는 야치를 보며 쿠니미도 오늘 처음으로 미소다운 미소를 지었다. 야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소끼리 공중에서 마주쳤다.

"저녁 뭐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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