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전력 <인사>

'부엉이 둥지에 올빼미 홀로'의 외전격입니다. 링크 :  http://posty.pe/1p1t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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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 우리 이거 먹어보자.”

“아카아시! 저 인형뽑기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아카아시! 생각해보니까 우리 같이 스티커사진 찍은 적 있었나? 찍어볼까?”

“아카아시!”


        네. 짧은 대답과 함께 보쿠토를 따라나서는 아카아시의 눈 밑으로 짙은 다크서클이 내렸다. 폴란드에 가기로 결정하고 이제 이주일, 보쿠토는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떠나있을 4년의 공백을 모두 채우고 가겠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일년에 몇 개월은 일본에 있게 되지 않겠냐며 이야기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오늘도 새벽같이 보쿠토의 손에 끌려 나와 도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함께 한 시간은 길지만, 얼굴도 알려지고 연습으로 바쁜 보쿠토로 인해 제대로 된 데이트가 드물긴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카아시는 이제 서있는 자세로 잠들 것 같았다.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집으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눕고싶네요.’라는 말은 보쿠토의 잔뜩 신난 표정에 미처 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러다간 밥 먹다가 숟가락 든 채로 잠들어버릴거야. 위기감을 느낀 아카아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쿠토 상.”

“응? 하고 싶은 거 생각났어?”

“저, 영화 보고 싶어요. 영화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영화 보죠.”


        그치만, 영화는 두시간 내내 앉아만 있어야 하잖아. 아카아시 얼굴도 못 보는걸! 보쿠토가 심통을 부렸지만 불행히도 이미 목표물을 발견한 아카아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쿠토를 붙잡고 척척 매표소 앞까지 거침없이 걸어간 아카아시가 “제가 보고 싶은 걸로 봐도 되죠?”하고 보쿠토에게 물었다.


“응. 표는 내가 끊을게. 뭐 보고 싶은데?”

“아니요. 보쿠토 상이 지금까지 다 해주셨잖아요. 영화는 제가 보여드리고 싶어요.”


        아니면 팝콘이라도 사고 계세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그럼 그렇게 하자며 "표 끊고 있어!" 라는 말과 함께 스낵코너로 사라졌다. 저멀리 메뉴 앞에서 고민하는 보쿠토를 보던 아카아시가 자기 차례가 되자 매표소 직원에게 다가가 비밀 결사라도 만들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하는 영화 중에서, 러닝타임이 제일 긴 영화가 뭐죠?”



        시간이 되어 들어간 상영관은 인기 없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꽤 많았다. 자리에 앉아 겉옷을 벗어 정리하고 있는 보쿠토의 어깨에 아카아시가 쓱 머리를 기댔다.


“아카아시?”


        당황한 보쿠토가 소리를 죽여 아카아시를 불렀지만, 아카아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에 더해 보쿠토에게 팔짱을 끼고, 손을 깍지껴 꽉 잡아 단단히 고정했다.


“뭐, 뭐해?”

“오랜만이잖아요.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아카아시도 참….”


        밖에서는 진한 스킨십을 꺼리는 아카아시가 평소와 달리 먼저 붙어오자 보쿠토가 감동한 목소리를 했다. 사실 조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보쿠토가 의기소침해질까 우려한 순간적인 책략이었지만,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등에 쪽쪽 뽀뽀까지 하며 잔뜩 신난티를 냈다.


“영화 보실 때는 조용히 하셔야 해요.”

“내가 애기도 아니고! 당연히 그 정도는 지킨다고.”

“어둡다고 막 키스하려고 하셔도 안 돼요. 뒤에서 다 봅니다.”

“안 보이지 않을까?”


        경고하듯 아카아시가 잡고 있는 손을 꽉 쥐자 보쿠토가 금세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 사이 영화가 시작한다는 안내가 나오기 시작해 둘은 입을 다물고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이 영화가 최대한, 최대한 지루해서 보쿠토 상도 함께 자면 좋을텐데…. 무언가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도입부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아카아시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결에 보쿠토가 슬쩍 팔을 아카아시의 어깨에 둘러 몸이 더 깊게 안겨지는게 느껴졌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ㄴ,네?”

“영화 끝났어. 나가야지.”

“아, 죄송해요. 영화가 좀 제 취향이 아니었나봐요. 잠들어 버렸네.”


        하지만 보쿠토는 묘하게 조용한 표정으로 하하, 웃을 뿐이었다. 불길한 느낌에 아카아시가 “우리 저녁먹으러 갈까요? 시간이 좀 늦긴 했는데, 영화 봤더니 배가 고프네요.”하고 말을 둘렀다.


“아니야. 아카아시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이만 집에 가자.”

“딱히, 그런 건….”


        아, 역시 들킨건가. 아카아시가 보쿠토가 짓는 표정만 봐도 무슨 상황인지 훤히 아는 것처럼 보쿠토도 마찬가지였다. 저번에 싸울 때도 꽤나 예민하게 아카아시의 상태를 눈치 채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보쿠토에게 대놓고 피곤하니 일찍 들어가겠다 말하지 않고 수를 쓴 것은 아카아시 역시 남은 시간이 아깝기는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이런거, 싫어. 아카아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보쿠토의 뒷통수가 시무룩해 보였다.


“그럼 오늘, 보쿠토 상 집에서 자고 가도 됩니까?”


        앞서 걸어나가는 보쿠토를 잡고 아카아시가 무엇이라도 상황을 좋게 만들기 위해 반쯤 충동적으로 건넨 말에, 보쿠토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고 간다’는 평범한 말은 연인에게는 일종의 유혹이나 마찬가지였다. “어, 그래…. 자고 갈래? 괜찮겠어?” 애초에 말을 뱉은 이상 그런 의도가 아예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괜찮겠냐는 물음은 집에 간 후의 상황을 확정하는 것과 같았다. 아카아시 역시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수줍어진 얼굴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은 아침부터 아무도 없었기 때문인지 꽤 한기가 돌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춥지? 난방을 틀어놓고 갈 걸 그랬나.” 보쿠토가 부산스럽게 집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보일러와 불을 켰다.


“아카아시. 먼저 씻을래?”

“그럴게요. 저번에 여기 두고 간 옷 어디있어요?”

“그거 아마 서랍에 있을텐데. 씻고 있으면 내가 갖다줄게.”

“네.”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벗은 아카아시가 틀어놓은 물이 따뜻해지자 목 부근부터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어지기 시작하는데 보쿠토가 똑똑, 하고 욕실문을 두드렸다.


“아카아시, 씻는 중이야?”

“네.”

“그럼 옷 문 앞에 두고갈게.”

“알겠어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보쿠토가 욕실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자 아카아시가 급하게 물을 껐다.


“뭐하는 거예요?”

“나 정말 가야해? 같이 씻으면 시간도 아끼고 좋을텐데.”

“먼저 씻으라고 한 건 보쿠토 상이잖아요.”

“같이 씻자고 하면 도망갈까봐.”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실실 웃으며 어느새 완전히 몸을 들이민 보쿠토가 훌렁훌렁 옷들을 벗어 욕실 밖으로 던졌다. 아카아시의 뒤에 선 보쿠토가 다시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두 사람 위로 쏟아졌다.


“욕실에서 하면 결국 코에도 귀에도 물 다 들어간단 말이에요.”

“난 아무것도 안할건데? 아카아시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거야.”

“거짓말 할거면 뒤에 닿는거나 치워줄래요?”


        이잉. 보쿠토가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아카아시를 안았다. 그치만, 아카아시가 먼저 우리집에 온다고 해 준 거 엄청 오랜만이란 말이야…. 괜히 얼굴도 빨개지고 불끈하더라니까.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가 아, 그래서 부끄러웠던건가? 하고 한박자 느린 생각을 했다. 물의 온도와 닿은 체온이 더해져 이제는 몸이 뜨거웠다. 풀어진 몸에 기분이 좋아지자 그래 뭐 한번쯤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카아시가 보쿠토와 마주 볼 수 있도록 몸을 돌렸다.


“그럼 불지른 쪽에서 책임질게요. 됐죠?”

“이번 거, 그 대사, 진짜 엄청났어.”


        웃음기가 지워진 얼굴로 보쿠토가 아카아시 쪽으로 얼굴을 내렸다. 아, 정말. 어떻게 널 두고 가지. 떠나는 것이 완전히 결정되고 나서는 말하지 못 했던 진심이 보쿠토에게서 튀어나왔다. 그러게요. 어떻게 당신을 보내죠. 진심이 맞붙은 연인에 의해, 욕실에서는 한참이나 물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욕실에서, 또 침실에서-둘이 동시에 잔뜩 지친 신음을 내뱉으며 드러누웠을 땐 창문을 통해 여명이 밝은 후였다.


“여러 의미로, 보쿠토 상 정말 대단해요…. 나만 힘든가봐.”


        아직 달뜬 숨이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의 아카아시가 앓으며 이야기하자 보쿠토가 “다 사랑이야, 사랑….”하며 아카아시에게로 데굴, 굴러왔다. 다리로는 아카아시의 하반신을, 팔로는 아카아시의 상반신을 끌어안은 보쿠토가 남은 힘을 잔뜩 끌어모아 다리와 팔에 힘을 줬다.


“켁, 하지마요. 숨 막힌단 말이에요.”

“아까 많이 피곤해보였는데, 못 쉬어서 어떡해?”

“지금 와서 그런말 해봤자 진심같지도 않거든요?”

“진심이야. 아까 아카아시 엄청 곤하게 잤는걸.”

“그 덕에 좀 괜찮아요. 그리고….”

“그리고?”

“시간이 아까운 건, 보쿠토 상 뿐만이 아니니까요.”


        보쿠토가 가만히 아카아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본격적으로 몰려오는 잠과 싸우며 아카아시가 하품을 하고는 반은 제정신, 반은 잠꼬대인 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가도 된다고 한 거지만, 역시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 아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 보고싶으면 비행기 타고 가면 그만이지만, 기차만 타도 되는거랑 비행기를 타야 되는 건 느낌이 많이 달라…. 시간도 달라지고…. 정말 멀다 싶어요.”

“시간마다 영상통화할게. 전화도 엄청 자주 하고.”

“보쿠토 상이 없어도 나는 일상을 살아야 하니까요.”

“아, 공항에서 아카아시를 두고 어떻게 가야 하지. 내가 할 수 있을까….”

“누가 공항 간데요? 나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아카아시!”

“하하.”


        아카아시가 삐죽 나온 보쿠토의 입을 통통 손으로 가볍게 치다가 쪽 소리가 나게 가벼운 키스를 했다. 몸에 닿는 조금 빠른 심장박동이 좋아 뺨을 들이대보았다. 쿵쿵, 소리가 귀를 통해 크게 울렸다. 곧 한참을 못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벌써 그리운 느낌이었다. 함께 있는데도 그립다니,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장난이고. 나도 고민이네요. 어떻게 당신 들어가는 걸 봐야 할지. 창피하게 눈물이라도 나면 어떡해.”

“무리한 부탁인 건 알지만, 웃으며 보내주면 좋겠어. 아카아시 울면 폴란드고 뭐고 공항에 짐 풀어버릴지도 몰라.”

“나도 오랫동안 못 보는데 마지막에 보여주는게 우는 얼굴인건 싫어요.”

“사실 아카아시보다 내가 더 걱정이지만.”

“보쿠토 상, 엄청 눈물 많으니까요.”

“아직 삼주나 남았는데 생각하니까 벌써 울 것 같아….”


        안겨오는 보쿠토를 달래며,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 꼭 웃으며 인사하기로 해요. 나도 있는 힘껏 힘 낼테니까, 서로 웃는 얼굴을 남겨 놓는게 좋잖아요. 나쁜 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좋은 기회로 가는건데….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 달램들을 늘어놓는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사실, 우리는 계속 인사하는 중이죠. 앞으로의 시간들을 잘 견디기 위한 벽을 쌓고 또 쌓아서, 혹시나 외로운 마음이 밖으로 비집고 나가지 못 하도록 그렇게 남은 시간 잘 지내요 우리. 채 말이 되지 못한 것들을 남기고 아카아시의 눈이 감겼다. 곤히 잠이 든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심장이 서로의 가슴에 꼭 닿아있었다. 조금의 사랑도 빠져나가지 말라는 듯,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루치의 인사를 마쳤다.



        4년 후


      아카아시는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항 입국장에 서있었다. 그날은 결국 웃으며 보내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 했지만,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았다. 보쿠토가 나올 시간이 될수록 점점 초조해져 아카아시가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루루 출국장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아카아시가 집중하며 익숙한 형체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쿠토를 발견하는 일은 쉬웠다. 그렇게 튀는 머리와 덩치는 흔하지 않으니까. 뒤이어 곧바로 아카아시를 발견한 보쿠토가 캐리어를 거의 들다시피 하고 이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저러다 또 넘어질라, 아카아시가 종종 걸음으로 보쿠토를 향해 걸었다. 둘의 거리가 손 하나 길이로 가까워졌다.


“아카아시! 나 왔어!”

“몸 건강히 잘 마친거, 축하해요.”

“이제 아카아시 옆에서 절대 안 떨어질거야. 절대!”


        보쿠토가 캐리어는 어디로 내팽개쳐두고 번쩍 아카아시를 안아 들었다. 사람들 봐요, 미쳤습니까? 본다니까요! 아카아시가 버둥거렸지만 보쿠토는 웃기만 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힘만 더 세져서 왔어. 아카아시가 힘의 차이를 깨닫고 보쿠토에게 안긴 자세로 얼굴을 가렸다.


“이제 약속대로 보쿠토 케이지 해줘. 아니다, 내가 아카아시 코타로할까?”

“됐고 이제 제발 놔줘요. 집에 안 갈 거예요?”

“’우리’집으로 말이지? 차 어디 대놨어? 거기까지 안고 가볼까!”

“제발 좀. 나이먹고 주책입니다.”

“결혼한다고 하면 놔줄게. 응? 보쿠토 케이지가 좋아, 아카아시 코타로가 좋아?”

“결혼하기도 전에 이혼당하고 싶습니까?”


아웅다웅하긴했지만 오늘의 인사는 전과 달리 웃음으로 가득했다. 4년 전에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 보쿠토와 이에 참던 눈물이 터진 아카아시가 부둥켜 안고 한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사전에 조용히 출국하고 싶다는 핑계로 모든 취재진을 거절한 것이 다행일 정도로 둘은 거하고 긴 인사를 나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부엉이가 자신의 둥지로 돌아가는 길, 자신과 결혼해달라 시끄러운 부엉이와 갓길에 차 세우는 수가 있다는 올빼미가 결국 행복을 참지 못하고 짧은 버드키스를 나눴다. 그러다 뒤에서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놀란 올빼미가 황급히 입을 떼고 엑셀을 밟았다. 부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부엉이 둥지에 혼자가 아닌 둘이 되는 날이었다.


HQ! Haiky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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