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하는 일을 미룰 때 괜히 책상 정리를 하고, 옛날에 쓰던 일기장을 뒤져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당이 떨어져서 그런가 싶어서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달콤함이란 것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정말 오래된 맥주 한 캔과 편의점에서 사둔 아메리카노가 덜렁. 이미 늦은 밤, 지금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문을 닫는다. 

내 작업실 겸 거실 겸 식당에는 큰 책상 겸 식탁이 놓여있다. 그 뒤로는 이케아에서 산 이만 원 짜리 책장 두 개가 단단하게 서있다. 책상은 걷잡을 수 없이 엉망이라, 노트북 하나와 공책 두 권을 겨우 펼쳐놓을 만큼의 자리만 남았다. 책상 정리를 시작하면 두어 시간은 금방 날릴 것 같아서, 시선을 뒤로 돌린다. 다 읽은 책, 읽다 만 책, 읽지 않은 책,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책들. 그 사이로 한 군데 모여있는 다이어리 겸 일기장들. 커다란 먼슬리를 주로 쓰고, 무인양품 노트도 몇 번 썼었다. 처음엔 월간 계획표에 토요일 일요일 주말이 한데 묶여 오른쪽에 있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는데, 한번 쓰고 나니 깔끔하고 좋아서 몇 번 더 찾게 되었다. 지금은 다른 노트를 쓰고 있는데, 다시 무인양품 노트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 중이다. 예전에 쓴 것들을 보니 아주 깔끔하게 잘 썼더라. 요즘은 기록이 왜 이 모양인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다. 잊고 있었던, 혹은 잊어버려야지 다짐하고 다시 쳐다보지 않았던 그 나날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담겨있다. 세상에. 풋풋하기도 하고 미숙하기도 한 나의 모습. 어리기도 하고 철이 든 것 같기도 한 나의 모습. 그 와중에 예전부터 꾸준히 습관을 들여 하는 일들을 마주하면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참 열심히 살았었던 때를 만나면 나태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특히 운동. 운동은 시간이 나서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하는 거라고 그렇게 적고 다짐했는데, 요 며칠 바쁘다는 핑계로 몇 번 운동을 건너뛰었다. 사실 바쁜 게 아니고 그만큼 게을렀다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잘 알지. 오늘도 조금 게을렀다. 글을 이제야 적고 있는 걸 보면 그렇지 않은가.

지난날의 기록들은 앞 사정부터 구구절절 적혀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암호 해독하듯이 그때의 상황을 어림짐작할 수 밖에 없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뭘 이렇게 쓴 거지, 왜 이렇게 썼었지. 심지어 어느해 휴가로 부산을 다녀왔던 것까지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가 없었으면!) 어떤 날은 정말 힘들었나 보다. 웃으면서 항상 아니라고 해야 하는 나의 모습이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고 적었다. 근데 왜 아니라고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떤 날은 여전히 게을렀나 보다. '나는 매일 게으름을 피우는데, 이러다 게으름뱅이가 직업이 되어버리겠다.'고 적었다. 아직도 실천 중이다. 그만 끊어내야 하는데.

왜 할 일이 쌓여 있을 때 옛 일기장이 보고 싶을까. 책상 정리를 하고 싶고, 쓰레기를 버리러 다녀오고 싶을까. 새로운 게시글이 올라오지도 않는 인스타그램 피드를 계속 올려다보고, 그놈의 나무위키는 왜 이렇게 또 재미있는가. 그냥 해치워버리면 별거 아닌 일들을 나는 왜 계속 미루고 싶을까. 흑흑. 2017년 8월의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시간 낭비에 통달한 것 마냥 시간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는 것 같다. 그런 게 아니면 어찌 시간이 이리 빨리 가는지.'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았다. 해가 빨리 져서 멋진 노을을 일찍 볼 수 있었다. 곧 겨울이 올 테지. 연말 즈음엔 글쓰기 전에 괜히 옛 일기장을 뒤적이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된다면 좋겠다.

꾸준히 읽고 열심히 살고 싶은 게으름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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