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우 선생은, 상국대병원 응급실에 주로 거한다. 물론 원래는 거기 살면 안 되는데, 모두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다. 주당 100시간, 이틀 연속 근무를 한다던 가는 평범한 일이었다. 몇 년을 그 아수라에 갇혀 살다 보니 이제 그 주위 사람 얼굴(매일 변하는 환자 얼굴 빼고) 중 모르는 얼굴은 없다고 자신했다. 아니, 자신까지는 아니고 그런 생각이 있었다. 

"아, 잠시만요!"

그는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열림 버튼을 꾹 눌렀다. 철문이 다시 열리고, 목소리의 주인인 듯싶은 여자 하나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서류뭉치를 품 안에 안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벼운 미소와 인사가 오간다.

"감사합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곧 엘리베이터는 올라간다. 조용하지만 타인이기에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흐르고, 그가 먼저 소아청소년과가 있는 층에서 도착했다. 친절한 안내아가씨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내렸다. 노을이 지금 있을까. 점심 안 먹었으면 같이 먹으러 갈 텐데. 바쁘려나? 그는 그녀의 진찰실까지 걸어가다가, 문득 방금 그 여자를 병원 안에서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병원 사람인가?"

그는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안녕하세요..."

"왔습니까? 여기 이것 좀 감사실에 보내세요."

"아, 네."

아침. 해가 겨우 뜬 아침. 그녀는 출근한 지 30초 만에 오늘 첫 업무를 할당받았다. 조용히 그가 건네는 서류를 품 안에 받아들고 감사실로 서두르면, 충분히 몸이 풀어진다. 일 할 준비, 라니 얼마나 비참한가. 

그녀는 상국대 병원에서 일한다. 하지만 의사는 아니다. 간호사도 아니었고, 환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비서였다. 병원에 웬 비서냐고? 사장도 있는 판에 비서도 있어야지 그럼. 

그녀의 상사는 일 중독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면 다 알 수 있었다. 일 중독. 물론 그게 그를 이 젊은 나이에 대학병원 사장이라는지위에 올려놓았으니, 저 본인이 좋아서 하는 거겠지. 그것 때문에 죽어나가는 건 아랫사람들뿐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의 다른 계열사 사장으로서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암암리에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 강경하기로 소문난 화물 노조를 박살을 낸 사람이라고 한다. 선대 회장의 눈에 들어서 악착같이 기어온 능구렁이라고도 한다. 그냥, 이러든 저러든 개새끼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에게 그는 까칠하고, 화 잘 내고, 다루기 어려우면서도 규칙적인데 어딘가 따라가기 힘든, 일 하나만큼은 잘해서 차마 속으로 욕할 수도 없는 상사였다. 

"성과율 확인했습니까?"

"아, 방금 자료 받아왔..."

"그거 전번 수치랑 비교해서 올리세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휙 몸을 돌린다. 그녀는 이미 익숙해져서, 마음에 작은 생채기만 날 뿐 조용히 찌그러들었다. 불쌍한 게나인가, 우리 사장님이시지. 잘나신 상사분은 하루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실 만큼 많은 일을 처리하시는데, 알고 보면 열 개는 무슨 하나뿐이라니 그게 더 불쌍하다. 그녀의 몸은 쓸모도 없는 게 기증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하게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는, 마음속 몰래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잘생겼고, 일도 잘하고, 분명 돈도 많고, 하여튼 괜찮은 사람이었다. 항상 까칠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 쌍욕을 먹는 거야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오히려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 담력에 박수를 보내야 하는 일이었다. 자, 이쯤에서 박수. 

"사장님, 점심..."

"먹으러 가세요. 난 됐습니다."

혼자 먹는 점심이 싫은 건 아니다. 부끄러운 것도, 남들이 볼까 봐 어색한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저 얼굴을 앞에 두고 밥을 먹는 게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연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밥 먹자고 권유하다가 거절당하면 슬픈 게 당연하잖나. 그녀는 오늘도 침울하게 사장실을 나섰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오늘 구내식당 메뉴가 돼지고기 볶음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맛있었다. 그녀에게 돼지고기 볶음이란 인생에서 떼놓을 수 없는 스테디셀러 중 하나에 속했다. 쌀밥에 맛있는 고기, 와, 미역국이다. 누가 훔쳐갈세라 열심히 숟가락을 놀리고 있을 때, 그녀의 앞에 등장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인사에 의례적으로 대답했지만, 그녀는 잠시 숟가락의 속도를 늦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본 사람이다. 하얀 피부의 남자. 의사. 왜 여기에 앉는 걸까, 자리가 없나 생각해보면 주위는 텅텅 비어있는데. 혹시 나한테 관심이 있나? 생각해봤지만 이 남자는 나 같은 거에 눈길 주지 않아도 따라올 여자가 많을 텐데. 

"사장실에서 근무하시나 봐요.”

아 이런 거구나. 나랑 같이 사장님 욕하려고 온 건가? 물론 그녀가 그를 좋아하기는 했다만, 상사로서도 욕할 거리는 충분했다. 아니, 차고 넘쳤지. 그래도 그녀는 먼저 입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상사고,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녀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비서예요. 거의 신입이지만."

"힘드시겠어요."

뒤에 구승효 사장 같은 사람이랑 일하려면, 이라는 말이 빠진 것 같았지만, 그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조금 동의하기도 했고. 그래서 이번 말도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가끔 벅찰 때도 있죠."

그래도 그 사람이라도 보니까 다행이죠, 그녀는 그 말도 뺐다. 아마 남자는 유추해낼 수 없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비밀이었다.

"여기서 뵌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의 눈빛 사이에 그런 것치고는 구내식당에서 혼밥을 굉장히 익숙하게 하시네요, 라는 말도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지뢰 찾기도아니고, 여기 숨겨진 의미가 하나 있습니다! 깃발 꽝. 참고로 말하자면, 그녀는 지뢰 찾기에서 10개 찾는 데 27초 걸린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온 지 얼마 안 돼서 밥은 항상 사무실에서 혼자 먹다시피 했거든요."

앞에 앉은 남자는 아, 하고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참 슬픈, 월급이라도 많지 않았다면,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더 슬플 직장이었다. 통장에 찍힌 0의 개수를 세는 게 기쁜 그녀로서는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 혹시..."

띠링-

"죄송해요, 잠시만요."

그녀는 맑게 울린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올라오세요.] 망했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는 게 보였던지, 앞에 앉은 남자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혹시 무슨..."

"죄송합니다,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혹시 늦었나 싶어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시간은 아직 이십 분 이상 남아있었다. 이럴 때면, 그녀는 확신했다. 지주 오지 않지만,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그날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길이 조용했다. 그녀는, 곧 다가오는 상황에서 자신이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마조마한 가슴을 막을 길이 없었다. 1층에 도착해 밖에 그를 기다리는 차를 보면서도, 그의 굳은 얼굴은 펴질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조수석에 탑승했다. 

"화정그룹 본사."

"예, 사장님."

그녀는 빠르게 달리는 길거리의 풍경보다 그녀의 뒤에 앉아있는 상사가 더 걱정됐다. 이렇게 급하게 불려 갈 때는, 그가 좋은 얼굴로 가는 날이, 또 좋은 얼굴로 돌아오는 날이 없었다. 항상 오랜 시간을 끌다가 내려온 그는 기가 쭉 빠진 얼굴이어서 말을 걸기조차 어려웠으니까. 그녀는 오늘도 그럴까 봐 걱정이 됐다. 그가 걱정됐다. 

"도착했습니다."

철컥-

그가 한발 빠르게 문을 열고 내렸고, 그녀도 급히 뒤따라 차를 벗어났다. 그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손짓했다. 차에 남아있으란 뜻이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지만, 눈은 아직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밑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다녀오세요, 사장님."

사실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힘없는 비서일 뿐이었고, 자신의 마음조차 전하지 못한 사람이었으니 그럴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똑똑-

그녀는 운전석 창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서 밖을 보자, 그의 얼굴이 바로 있었다. 그녀는 놀라 바로 문을 열고, 조금은 올라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사장님!"

두어 발짝 물러난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는 눈빛이었다. 그건 그녀가 해야 할 말이다, 왜 여기 계시는지. 지하 주차장, 차가 많이 없는 구석이었다. 설마 어디에 있는지 몰라 여기까지 혼자 걸어오신 건가요, 상상만으로 그녀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짐짓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락 주셨으면 1층에서 대기했을 텐데..."

"왜 거기 앉아있어요? 기사님은 어디 가셨나?"

"집안에 일이 생기셔서 먼저 가셨대요. 부인분 출산 때문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런 말이 있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볼 때까지, 그녀는 지금 시각을계산하고 있었다.

"왜 남아있습니까?"

"네?"

"왜 퇴근 안 했어요?"

사장님 여기 계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제가. 그녀가 어정쩡하게 웃자,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또 무언가 실언을 했나 싶어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가 다시 말했다. 조금은 다그치는 어조였다. 

“몇 시간 동안 기다리기만 했습니까?”

넷플릭스 봤는데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삼킨 대사가 목 안에 걸렸다. 양심이 조금 찔렸다. 물론 절대, 그가 생각한 것처럼 가만히 시간을 버린 건 아니었다. 밀린 업무도 보고, 감사실에다 보고도 하고, 자료정리도 좀 하다가, 넷플릭스도 보고 뭐 그런 거지. 게다가 그녀는 지루함 정도는 잘 참는 사람이었다. 살면서 점점 바빠질 텐데 그때쯤이면 지루함이 그리워질걸. 이러나저러나, 그녀는 정말로 괜찮았건만, 외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쪼인트 까이다 온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러니 그녀의 양심이 더욱 찔렸다. 사장님, 그러지 마세요. 제가 슬퍼져요. 가끔은 그녀 자신도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그를 좋아했다. 꽤 많이. 그래서 그가 울적한 날이면 그녀도 울적해지고는 했다. 

“...퇴근하세요, 시간도 늦었는데.”

“네, 사장님.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주차장을 벗어나려 몸을 돌렸다. 그렇게 집에 가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인생이 그리 녹록지는 않았나 보다.

“어디 가요?”

“네?”

그녀는 놀라 뒤를 돌아봤고, 눈을 말똥거리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집에 가는...데요.”

그의 얼굴이 팍 찡그려졌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쪽 맞습니까?”

“네. 앞에서 좌회전이요.”

그녀는 잠시 손짓해 신호등을 가리켰다가, 다시 얌전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놨다.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그는 그녀가 그 자리에서 퇴근하려는 것을 막고, 집에 갈 거면 차를 타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가 운전하려고 운전석 문 손잡이에 손잡이를 올렸을 때, 그가 또 무어라고 하려는 듯 얼굴을 찡그렸고, 그 결과 그녀는 지금 조수석에 조신이 앉아 가고 있었다. 

조수석에야 항상 앉지만, 보통 운전을 하는 건 기사님이니까 이렇게 긴장이 된 적은 없었다. 아, 가시방석도 이런 고문이 없지, 상사가 운전하는 차를 얌전히 타고 가야 한다니. 

지금까지 운전하는 것을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는 것에 비하면, 그는 운전을 잘했다. 생각하고 보니, 기사님에 의하면 그가 주말에 불러내는 일은 없다고 하니 그때야 당연히 자가용을 끌고 다지지 않겠는가. 



아, 좋다.



그녀는 뒤늦게, 그가 익숙한 골목의 가까이에 주차할 때에야 알아차렸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둘이서 있는 시간이 이렇게 어색하면서도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모순적인 감상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눈을 꼭 감았다 뜨는 것으로 대신해야만 했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들어가요, 그럼."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안녕히 가세요, 승효 씨. 

부르지 못할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그녀는 작게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구승효 사장은 화정의 천둥벌거숭이 손오공 같은 역할을 맡고 있어서, 저 혼자 빨빨대며 돌아다니고 찌르고 뛰쳐 다니다가 손에 무시무시하고 신기한 무언가를 들고 돌아오기가 일쑤라고 했다. 그가 돌아가면서 곤란하게 한 CEO들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다 보면 그런 별명도 무리가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그가 그리된 것은 전대 회장이 죽고 난 후에, 비서로 일하던 것을 그만두고 사장이 된 후라고 했는데, 화정의 현재 황제, 조남형 회장은 구승효만큼이나 젊었지만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는 독특한 방향으로 엇나가고 맞물리고는 했다. 

그녀는 구승효 사장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대학 때 보건경제학을 전공한 탓에 반쯤 강제적으로 차출된 지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름 만족했다. 그녀의 상사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월급도 빵빵하고, 뭐 그거면 된 거지. 

그 와중에서도 그녀가 두려워하는 날은, 구승효 사장이 본사로 불려 가는 날이었다. 본사에서 연락이 오면 구승효 사장은 뭐 씹은 표정으로 그녀와 본사로 날아가고는 했고, 그러면 한참 후에야 또 뭐 씹은 표정으로 나왔다. 그녀는 대부분을 차에서 대기하며 기사님과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군것질하거나, 밀린 업무를 보고는 했다. 구 사장의 걱정을 하는 날도 다수였다. 화정에 불려 간다는 것은 부르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그건 분명 조남형 사장일 테고, 디데이마다 상사가 오만상 다 찌푸리고 들락날락 해야 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성격도 더러운가보지- 그게 그녀의 '조남형 인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직접 대면한 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내용이 어찌 편파적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상황에 비추어보면 절대 틀린 내용은 아니었다.

"구 사장 비서?"

"예, 회장님."

꾸벅 숙인 고개가 아파질 정도까지 숙이고서야 그녀는 허리를 폈다. 이 오만한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릇이 없다고 꼬투리를 잡을 것만 같았으니까- 다행히 그게 만족스러웠는지, 아니면 오늘 기분이 좋은 것인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입가에 미소만 띨 뿐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잠시 훑어보다가 손짓했다. 따라와요. 그녀는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이 올라가면서도 남자는 그녀에게 물었다. 

"구 사장은?"

"병원에서 미팅이 있으셔서 조금 늦으실 것 같습니다."

"아, 그래?"

땡- 맑은소리와 다르게 그녀의 마음은 무거웠다. 텅 비어버린 복도를 지나면서, 그녀는 앞에 위풍당당이 걸어가는 남자가 화정이라는 대기업의 정점에 서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다. 느지막한 늙은이도 아니고, 외려 덜 다듬질 된 돌덩이처럼 아우라가 흘러나오는 남자였다. 아우라... 어떤 아우라? 복도를 걸어가면서 그가 물었다.

"그러면 그쪽은 왜 먼저 왔지?"

"여기, 정기결산 보고서에 대해서 설명을..."

"설명?"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는가 싶더니, 이내 아아, 구 사장 비서니까... 라는 말을 하며 끄덕거렸다. 

"보건...무슨 학 전공이라고 했던가?"

"보건경제학을 했었습니다."

"유학을 갔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독일에서 2년, 스웨덴에서 2년 있었습니다."

어느새 일행은 그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뒤따라오던 경호원인지 모를 남자가 재빠르게 문을 열고, 조 회장은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조금 주저하자 그는 고갯짓하며 그녀를 불러들였다. 솔직히 말해서 원하지 않던 전개였다. 

푹신해보이는 가죽 소파에 앉아, 테이블을 마주 두고- 그녀는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그녀가 건넨, 깔끔한 서류철에 담긴 [정기결산 보고서]. 팔랑거리는 종잇장에 별로 흥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도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페이지 페이지를 샅샅이 살폈다. 

"구 사장 비서 노릇은 어때?"

"괜찮습니다. 잘 대해주십니다."

"걔 예전에는 내 비서였거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뭐 하나 할 때마다 울 아버지한테 쪼르륵 달려가서 일러바치곤 했는데."

말꼬리가 늘어진다. 숨이 막혀왔다. 남자는 전혀 큼직한 풍채가 아니었는데도 위압감이 있었다. 평생을 위에서 내려다본 자의 여유일까. 아, 싫다. 이 공간이 참 답답했다. 

"내 비서 하던 구 실장이 이제는 사장이 돼서 비서도 다 거느리고-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몰라요,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 말을 꺼낼 만큼 배짱이 있지는 않았다. 침묵이 거슬렸는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대답이 없네?"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어도 뭐라 하지 않더니, 왜 이번 질문은 걸고넘어지는 걸까. 낭패였다. 사장님이 올 때까지만 잘 넘기려고 했는데. 달리 생각해보면 매번 이 날카로운 질문을 받아내야 했을 승효가 더 불쌍했다. 

덜컹-

"...회장님."

"어, 구 사장."

그는 진정 구세주인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등장한 남자를 그녀는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급하게 올라온 듯, 그는 약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와 그녀 옆, 회장의 책상 바로 앞에 섰다. 고매하신 회장님은 무엇이 재미있는지, 입가에 미소를 띤 체 물었다. 

"급히 왔나 봐?"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아냐, 구 사장 바쁜 거 다 아는데."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그만 나가 봐요."

그녀를 마주한 채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답지 않게 그는 조급해 보였고, 긴장되어 보였고, 힘들어 보였다. 문득,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대신,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이고 나가는 것을 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이제 운전석에 안 앉아 있네."

잘했어요,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평소보다 긴, 유별나게 힘들었을 시간이었다. 저녁도 이런 늦은 저녁이 없지. 그 성격 더러운-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그런 게 아닌 정말 더러운- 회장님 덕이다. 더욱 기분이 나쁜 것은, 오늘 오래 걸린 이유가 그녀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다. 적어도 어떠한 영향은 있었겠지. 그녀 때문에 그가 또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런 마음이 아팠다.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사실. 

차는 부드럽게 달려나가고, 정적만이 흘렀다. 역시 그는 운전을 잘했다. 

"...죄송해요."

결국 담아내지 못한 말은 튀어 나간다. 

"...초밥 좋아해요?"

그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입안에 찬 음식을 조심스럽게 씹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는 정말 뭐하지만, 맛이 참 좋았다.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혼자였다. 시간이 늦었다면서 그는 차마 잡아둘 수는 없고, 집에 가서 먹으라며 초밥을 한 세트 사서 건넸다. 그녀는 멀뚱히 있다가 뒤늦게 그것을 받아들고 그가 데려다 준 집으로 들어왔다. 사실 시간이 늦어도 저는 괜찮은데요, 그 말을 할 용기야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안 괜찮았겠지. 

그녀가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정말로 맛이 있었다. 다음 주말에 먹으러 가야지. 









"안녕하십니까."

"왔습니까? 감사실에 이 서류 다시 검사하라고 보내세요."

그녀는 군말 없이 외투도 벗지 않고 그가 건넨 파일을 받아들었다. 어제저녁에는 그를 떠올리다가 잠을 설쳐서 늦게 일어났다. 좋아하는 사람을 매일, 그것도 직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다. 그것도 매일 따라다니는 일이라면. 초밥이 맛있었다고, 감사하다고, 다음번에는 제가 사겠다고 말을 해야...잠깐, 감사실이 서류를 빠트린 건가? 왜 기록이 비어있지. 아니, 이건 그냥 빈 기록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일선 의사들이...그녀의 손가락이 종이를 팔락이며 넘어갔다. 그녀도 그를 따라다니며 어지간한 일 중독이 되어버린 탓에, 머릿속을 흐르던 생각들을 휘리릭 넘기며 종이와 함께 사라졌다.

"다녀오겠습니다."

결국, 당장에라도 감사실에 조사하라고 일러야지! 라는 생각에 가득 찬 그녀는 자기 뒤를 쫓는 누군가의 마뜩잖은 눈빛을 보지 못했다.









그가 저녁에 시간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야죠, 그런 마음으로 그녀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 여기에 있다. 

"송아지 푸테입니다."

웨이터가 접시 둘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사라졌다. 요즘 사람들은 송아지도 먹는가 보지.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팔을 움직여 고기를 한 점 집었다. 입안에 넣으니, 정말로 맛이 있기는 있었다. 턱이 굳어서 씹는 게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기가 좋기는 좋은지 몇 번 씹지 않아도 녹아서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최대한 앞에 앉은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맛은 있습니까?"

"네? 아, 네! 네. 맛있어요."

물론 그 노력은 갑자기 들인 목소리에 놀란 그녀가 고개를 휙 쳐들면서 증발해버렸지만. 정말 맛있어요, 그 말에 얼마만큼의 진실성이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하도 굳은 표정이었으니. 진짜로 맛은 있었는데. 

"일은 할만해요?"

"네."

이거 혹시 탐문조사 같은 건가요? 그녀가 단발성 대답으로 끝을 내자, 그가 한숨을 내쉬고 (그녀에게 다 들렸다.) 손에 든 나이프를 탁 내려놨다(역시 그녀에게 들렸다.). 그녀는 눈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화나셨을까. 나라도 화가 나기는 했겠다, 하지만 직속 부하직원한테 물으면서 대체 무슨 답을 기대하시는 겁니까, 사장님.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어렵사리 (혹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럼 하세요,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의 입이 다시 한번 닫혔다. 

"중요한 말입니다."

중요한 말? 중요한 말... 혹시 날 해고하시려고 하는 건가? 일 처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첫 질문이 이거였나? 상상이 나래를 펼치며 날아갔고, 그는 그게 뻔히 보이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이상한 말 하려는 거 아닙니다."

"아, 네..."

그럼 하셔도 돼요, 해고만 아니면. 그녀는 다시 생각을 제자리로 복귀시키고 얌전히 기다렸다. 

"그..."

그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좋지 않은 쪽으로 흐르는 의식을 겨우겨우 막아내야 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실까.

"...내가 왜 오늘 불렀는지 아십니까?"

"...일 시키시려고...?"

그의 미간에 파인 주름이 눈에 띄게 깊어졌다. 그녀는 답이 틀렸다는 것을 직감하며, 쿵 떨어진 심장으로 꾹 입을 닫았다. 매일 받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 그건 줄 알았죠.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상한 말 아니라면서요. 

"싫으면 바로 싫다고 말씀하세요. 억지로 싫다는 사람한테 그... 큼, 하여튼. 그러기는 싫으니까."

"네."

대체 무슨 폭탄이 터지려고 이렇게 도화선이 길까. 그녀는 가만히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저 검고 깊고 힘에 가득 찬 눈. 동경하는 눈이었다. 아주 잠시,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 빠졌고, 그래서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니다."

"네, 저도요."

정적이 흘렀다. 얼결에 대답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뭐랄까, 처음 보는 감정이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무슨 질문이었지? 내가 무슨 대답을 했더라? 대체 뭘 잘못 말했기에 저이의 얼굴에 저런 표정이 생겨났을까? 대답해라 과거의 나! 귀, 머리 양쪽에 달려서는 쓸모도 없는 자식! 그녀의 머릿속이 시시각각 굽어졌다 소용돌이쳤다. 

"...가벼운 감정이 아니라, 큼, 진짜로요."

"네...?"

"좋아합니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귀를 탓하는 것을 그만뒀다. 귀로 들어온 것을 머릿속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순전히 머리의 탓이었다. 그가 그녀의 반응이 없자 한마디를 더 얹었다. 

"괜찮다면, 사귀고 싶은데."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그제야 막아뒀던 모든 게 쏟아져나오는 것 같았다. 막아뒀던 것은, 그녀가 매일 그를 마주하면서 괜찮을 수 있었던 이유였고, 그와 단둘이 있을 때 아주 조금 감상에 젖게 하는 감정들이었다. 

알고 계세요? 사실 제가 더 많이 좋아해요. 아마도 더 일찍 좋아했고, 더 사귀고 싶고, 더 아팠을 거예요. 

"...싫습니까?"

그가 늦게 물었다. 그녀는 그 한마디에 웃음과 울음이 함께 터져 나오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린 동시에 눈가를 문지르며 그에게 말했다.

"제가 더 많이 좋아해요, 승효 씨."

그는 놀란 눈치였다. 이것도 비밀인데, 아마 제가 더 놀랐을 거예요. 그가 뒤늦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녀는 그제야 저 표정을 알아차렸다. 마주한 적 없던 표정. 마주한 적 없던 눈동자. 마주한 적 없던 그.

사랑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말없이 서류를 노려봤다. 영 진도가 나가지를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조 회장이 그를 불러낼 것만 같은 날이었다. 그는 힐끗 저 너머에 앉아있는 그녀를 쳐다봤다. 시계를 살피는 게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 것 같았다. 

"사장님, 점심..."

"먹으러 가세요. 난 됐습니다."

그가 단칼에 거절하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나섰다. 그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살폈을 때, 그녀는 침울하게 사무실을 나가는 중이었다. 

...혹시 화났나.

물론 같이 밥을 먹기가 힘든 건 사실이었다. 이 서류가 급했고, 밥을 먹어도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뭣보다 제자리에서 조 회장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녀까지 자리에 잡아두고 싶지는 않아서 혼자 보낸 건데, 저렇게 가라앉은 모습을 보니 그것도 조금 후회가 됐다. 

마냥 그렇다고 해도 그는 같이 밥을 먹으러 내려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병원 전체의 미움을 한몸에 받는 그가 하얀 가운들 사이에 둘러싸여 밥을 먹고 있으면 어떻게 보이겠나. 지나가는 사람한테 비아냥이라도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 

게다가, 그 자신이 너무 떨려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좋아했으니까. 







조남형 회장의 호출은 오늘 유난히 길었다. 그가 회사 로비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보통의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후였다. 차가 계속 건물 앞에 대기할 수는 없으니 지하주차장에 있을 테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자, 특유의 텁텁한 공기와 함께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주위를 휙 둘러보니 그의 차는 저 안쪽에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운전석에 앉아있는 그녀가 보였다. 왜 운전석이지? 그는 의아하게 여기며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녀가 놀라서 고개를 퍼뜩 들어 그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가 내릴 수 있게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연락 주셨으면 1층에서 대기했을 텐데..."

"왜 거기 앉아있어요? 기사님은 어디 가셨나?"

"집안에 일이 생기셔서 먼저 가셨대요. 부인분 출산 때문에."

그러고보면 그런 말이 있기는 했다, 곧 출산예정일이라고.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줄 알았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동그란 눈이 그를 바라본다. 그는 저 눈을 좋아했다. 저 눈뿐만이 아니라 저 눈의 주인을 좋아했다. 그것도 꽤 많이. 

"왜 남아있습니까?"

"네?"

"왜 퇴근 안 했어요?"

그녀가 어색하게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속이 조금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벌써 시간이 몇 신데 이러고 있었던 걸까. 그는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몇 시간 동안 기다리기만 했습니까?”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진실이겠지. 비서면 항상 붙어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융통성이라고는 찾기 힘들게 착실했다. 일하지 않고 월급 떼어먹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세상에 월급 루팡짓을 하지 않는다고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더니, 전설로만 듣던 그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가끔 조금은 못된 눈치가 있었으면 하는데-

그는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뒤늦게 말했다. 

“...퇴근하세요, 시간도 늦었는데.”

“네, 사장님.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주차장을 벗어나려 몸을 돌렸다. 그가 그녀를 빠르게 불러세웠다. 지금 어디 가려는 거지?

“어디 가요?”

“네?”

그녀가 놀라 뒤를 돌아봤고, 눈을 말똥거리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집에 가는...데요.”

집? 어떻게. 혼자 가겠다고? 시간이 몇 신데 여자 혼자서, 로 시작하는 황당함이 그의 속으로 들이쳤다. 정말로 '저 좀 집에 태워다주세요' 할 만큼의 마음도 없는 건가? 아니면 그러고 싶지 않을 만큼 그가 싫은 건가? 그는 다시 한번, 그 못된 눈치를 어떻게든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타요."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흔들림이 혹시 그녀에게 불편할까 봐서였다. 주말에는 항상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그였기에 운전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힘을 주고 운전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는 것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이쪽 맞습니까?”

“네. 앞에서 좌회전이요.”

길을 가리켰던 손이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눈에 봐도 긴장한 듯한 몸짓이었다. 혹시 상사랑 차를 타서 어색한 건가, 아니면 그의 운전실력이 영 별로여서 사고의 위험성을 걱정하는 걸까. 긴장은 그가 더 했을텐데. 좋아하는 여자를 태우고 운전하는 건 처음이었다. 자칫하면 사고가 날 것 같은 건, 아무리 그가 조심스레 운전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녀 못지않게 긴장한 그도 느낀 기분이었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들어가요, 그럼."

사장님, 언제쯤 저 입술에서 그 단어 말고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을까. 들을 수 있기는 할까? 그는 핸들을 꺾으면서 일견 멍청하게 들리는 상념에 잠겼다.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사무실을 나갔다. 

뭐가 잘못된 거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팽개치듯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악물어 짓뭉개진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아무 말이 없지? 그 집 초밥은 꽤 맛이 좋을 텐데, 아니, 꽤가 아니라 정말 맛이 좋다는 것을 그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 집에 몇 번이나 갔는데. 단골인데. 먹깨비도 맛있다고 했는데. 먹깨비가 맛있다면 정말 맛있는 건데! 아니, 그는 아무거나 다 맛있다고 했던가. 혹시 그 집 사장이 요즘 쉬엄쉬엄 하나? 그는 괜히 괘씸한 마음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나름 미식가 입맛과 소중히 모셔놨던 기대가 쌍으로 타격을 입은 기분이었다. 손수 만든... 것은 아니지만, 손수 사다가 건넨 초밥이, 오늘 감사하다는 인사로라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에는 제가 살게요, 이런 논평을 감히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먹었던 초밥 중에 제일이었어요, 이런 맛집을 알고 계시다니 사장님 정말 최고예요, 이 정도 논평은 바라도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그녀는 아무 말이 없는가. 침묵. 왜? 

초밥 좋아한다며! 좋아한다며!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지만, 낼 수 있었다면 냈었을 거다. 









긴장된다. 그 자신이 도저히 믿음이 가지를 않아서 레스토랑에 예약 확인을 세 번이나 하고 나서야 진정이 좀 됐다. 아마 '잘 해주세요. 중요한 일입니다'라는 말은 다섯 번도 넘게 했을 것이다. 서울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 중 다섯, 아니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레스토랑을 겨우겨우 예약했다. 논평을 몇 번 연습했다. 남은 일이 없게 일주일 동안 야근을 했다. 다른 것에 너무 신경을 쓰는 바람에 시간 있느냐는 질문을 오늘이 돼서야 했지만(만일 선약이라도 있었으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을 거다) 다행히 시간은 있다고 한다. 

젠장, 긴장돼서 미치겠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이번 레스토랑은 맛있다는 말이 나오겠지. 



혹시 이번에도 대답을 들을 수 없다면, 젊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레스토랑을 물어봤을 때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도 이 집을 추천해 준 먹깨비를 족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길다... 길어요. 길게 썼습니다. 리퀘스트 감사합니다. 쓰면서 재미있었어요. 크흙 승효 갭모에. 잠수 오래 탄 것은 이제 뻔뻔해지기로 했습니다. 흥. 뻔뻔해질거야. 

你吃饭了吗는 중국어로 너 밥 뭇니? 이런 뜻입니다. 읽기는 니/취r/fㅏㄴ/ㄹ러/마? 일케 읽습니다. 여러분 저를 따라서 외국어를 배워부세요. 글 올라오는 주기가 너무 길어서 가능할진 모르겠습니다만. 참고로 다음 글 제목은 스페인어임. 

바이바이!

글러지만 글러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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