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드  인 .

W.수미




잔속에서 녹아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 어쩔 줄 모르는 눈을 굴리며 음료를 휘적이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맙소사 도대체 저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붉게 달아오른 귀가 열에 달뜬 뺨이 시선에 사로잡혀 헛숨을 들이키게 만들었다. 잠시간 흐르는 침묵을 깨고 백현의 하얗게 뻗은 손이 경수에게 향했다.


“잡아 주세요.”


좀 떨려서.

말하며 두 눈을 곱게 접은 백현이 맑게 웃었다. 멍하니 제 손을 보던 경수가 손을 내밀어 맞잡으면 꼬옥, 작은 힘이 실렸다. 홀린 듯 지나간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여태 나누었던 평소의 대화와는 확실히 달랐다. 계절을 함께 하자는 말, 봄이 왔다는 그 말. 마음의 한 켠을 상대에게 내어주겠다는 건, 이 시간부터 좀 전과는 다른 사이가 되었다는 의미겠지. 새삼 화들짝 놀란 경수가 손에서 힘을 빼는 찰나 훅 잠아 당긴 백현과 숨이 닿을 만큼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하나 얘기해두고 싶은 게 있어요.”

“..좀 가까운 것 같..”

“도망가지 말아요. 부담주지 않을게요. 평소와 같아도 됩니다. 그저 일상을 보내다 아주 가끔 자그마한 틈에 제 생각 해주는 거. 그거면 돼요.”


깜박이는 경수의 눈동자가 물었다. 겨우 그거면 되겠냐고. 조금 느리게 깜박인 백현의 나른한 눈동자가 답했다. 더 바라면 도망 안 갈 자신 있냐고. 어쩐지 진득하게 얽혀버린 시선이 낯설어 고개를 저어낸 경수가 좀 전의 당김으로 인해 어정쩡히 떠버린 자세를 바로 했다. 가볍게 잡고 있던 손은 어느 틈에 얼기설기 깍지가 끼워진 채 테이블 위로 놓였다. 간지럽네. 간지럽다. 그렇게 막 생각했을 때였다.


“어디가 간지러워요?”

“...네?”

“경수씨, 방금 간지럽다고..”

“제가 입 밖으로 소리 냈나요.”



하아.

달디 단 이 공기가 익숙하지 않은 듯 자유로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경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중증인가. 나, 병에 걸린 걸 수도 있어. 속으로 무수한 생각을 쏟아내는 경수를 내내 바라보는 백현의 시선이 다정했다. 이상하지, 달라진 건 없는데 왜 이렇게 달지. 백현은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조급하고 염려스러웠던 좀 전의 마음 따윈 버려버린 지 오래였다. 제 시간 속에 함께하자 청하고 나면 잔뜩 욕심을 내며 급하게 굴 것만 같았는데 그보다 만족감이 먼저 백현을 감쌌다. 그저 이대로도 좋다고. 사실, 더 다가가고 싶지만 코끝이 닿은 것만으로도 헛숨을 들이키며 동그랗게 뜬 놀란 눈이, 급했다간 도망가고야 말겠구나. 백현의 머릿속에 경보를 울렸다.



“참, 백현씨 독립영화 하나 발견하셨다고 하셨죠.”

“네, 경수씨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감독이 ‘데인’ 이에요.”

“데인? 생소하네요. 아 설마..”

“역시. 바로 느끼실 줄 알았어요. ‘데보르 제인’ 그 사람 영화에요.”

“영화도 제작했을 줄은 몰랐는데. 보물 같은 영화였겠네요. 어떻게 발견했어요? 아니 그런 타이밍은 어떻게 늘 백현씨가 갖는 겁니까?”

“그거야, 사랑의 힘이랄까.”

“....예?”

“농담입니다. DVD 구해놨는데, 제가 갈까요, 모실까요?”

“그냥 빌려준다 는 보기에 없는 겁니까.”

“네. 없어요.”



상큼하게 대답한 백현이 크게 웃었다.

공통의 관심사가 주는 즐거움이란 이런 것인지. 물 흐르듯 대화의 주제를 바꾸면서도 너무 궁금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코끝을 찡그리는 경수나 그런 경수의 취향을 아주 정확하게 적중하며 보석 같은 영화를 발견해 낸 백현이나. 남들이 보기에 연분이 따로 없다.



*



-야. 너 제대로 안 봤지.]

“..들켰어?”

-언론 시사회 말고 하나 구해 줘? 어쨌든 개봉 전에 실려야 하니까.]

“집중이 안 돼.”

-뭐? 그럴 정도로 엉망이었어? ]


말이 그렇다는거지.

집중을 못했다는 경수의 말 한마디가 어찌나 폭풍을 불러 온 건지. 영화가 쓰레기였냐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 찬열의 흥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경수의 귓가를 채워왔다. 이 사단이 난 만큼 절대 죽어도 연애하게 된 애인 생각하느라 집중 못했었다고는 찬열에게 들킬 수 없었다. 경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입술을 허벅지를 잔뜩 꼬집어가며 참았다. 아아, 당분간은 단내 폴폴 나는 영화가 보고 싶다. 다정하게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뭐라는 거야.”

-어? 나? 뭐!]

“아냐. 찬열아 수정해서 다시 보낼게. 이후에 잡힌 일정 메일로 좀 넣어주라.”

-개봉작 좀 쏟아 질 거야. 줄거리 안 섞이게 집중하고 알지? ]



습관적으로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를 종료한 경수의 입으로 끄아. 하는 영문모를 의성어들이 쏟아졌다. 영화를 생각했을 뿐인데 어째서 생각의 흐름이 그리로 가는 거야. 홧홧해진 볼을 누군가 볼 새라 책상 위로 엎드리면서도 나쁘지 않은 감각에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약속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착실히 지키고 있어요.”



‘그저 일상을 보내다 아주 가끔 자그마한 틈에 제 생각 해주는 거. 그거면 돼요.’


자그마한 틈.

그 자그마한 틈이 시도 때도 없이 퐁퐁 튀어나와 더욱 커질 것만 같다. 요즘 경수의 일상은 온통 봄꽃이 내려앉는다. 상대에게 내어 준 마음 한 켠, 꽃비가 한창이다.



*



“휴가 가고 싶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냥 쉬고 싶다고. 3일만.”

“언론 인터뷰들 이제 막 마무리했다 임마.”


소파에 앉아 대본을 뒤적거리며 메이크업을 받는 백현이 던진 말에 매니저가 경악하며 대꾸했다. 흥행하고 있는 영화 덕분에 줄줄이 이어진 광고촬영은 어쩌고 물 들어올 때 노 저을 생각을 안 하는지. 그럼에도 휴가를 줘 말아 고민하는 기색이 그간 백현의 숨 쉴 틈 없는 스케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또한 폭풍 같은 일정에 늘 함께였으니.


“드라마 들어가기 전까진 뜬 시간 좀 있잖아. 그거 만들어 낼 능력 없는 것도 아니면서.”

“많이 힘드냐.”

“응. 나 방전이야. 충전해야 해.”

“네가 뭐 기계야? 사람이지.”

“어, 나 사람인 줄 안 잊어버렸네? 하도 스케줄 잡길래 잊은 줄 알았지.”

“....하루.”

“3일.”

“하루.”

“5일.”

“야!”

“일주일.”

“하루 반.”

“오케이 콜.”


함께 한 시간이 시간인 만큼 제 배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제 매니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도가 튼 두 사람이었다. 둘 다 처음부터 하루 반을 염두에 둔 것은 끝까지 모른 채 협상에서 이겼다고 생각 할 테지.



“내가 가야지.”

“어딜.”

“응? 아냐.”


대본을 내려놓은 백현이 푸스스 웃는다. 제 일상이 도통 경수가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다는 게 여상스럽기도 해서 습관처럼 손질된 머리를 매만지다 스타일리스트에게 한 소리 듣곤 겨우 손을 내렸다. 언제 어디서 경수를 만나게 되더라도 이번엔 꼭 제가 가겠노라 다짐하며 그 날 이후 한 몸처럼 챙겨 다니는 DVD가 담긴 가방으로 시선을 준 백현이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스텝의 마중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잘 살고 있네요. 맞죠?’



경수를 위로하려 시작한 대화였으나 의도와 다르게 제 깊은 생각이 기울인 술김에 터져 나왔던 순간. ‘운 좋은’ 변백현을 이겨낸 순간. 그 날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담백하게 들려온 경수의 한 마디가 큰 울림을 주었다는 걸 본인은 알까. 잔잔한 영화, 흐르는 음악. 나른하게 올라온 취기에 까무룩 잠이 들었을까, 뻐근한 고개에 눈을 뜨니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숨을 훅 들이키며 눈동자만 들어 시선을 옮기니 제가 기대고 있어 그대로 잠이 든 것인지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든 그 멀끔한 얼굴이 눈에 들어와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바라만보고 있었던 것도 같다. 깨어있으니 그 뻐근함의 정도가 더욱 짙어진 듯 해 이러다 경수 또한 불편하게 밤을 보낼까 싶어 조심스레 제 몸을 일으키곤 깨지 않게 안아 올렸다.



제 방 침대에 뉘어주며 이불로 폭 감싸니 도통 제 나이처럼 보이지 않는 게 나이는 제가 다 가져갔겠노라고 잠이 든 얼굴을 보며 곱씹었더랬지. 한 번 깨어버린 잠이 이후론 말짱해진 정신 덕에 다시 찾아오지 않아서 이른 새벽 매니저 핑계를 대고 운동을 떠났었다. 그때는 마냥 욕심 같던 생각이 어느 덧 손에 쥐게 된 행복이 될 줄, 자꾸만 솟아나오게 된 일상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심장이 동그래진다. 경수가 입 밖으로 뱉어내던 간지럽다는 말이 이런 느낌인가보다. 백현이 가슴에 손을 가져다대며 속삭인다. 간지럽다고.



“표정이 조금만 더 나른했으면 좋겠어요 백현씨. 여유로운 나른함이랄까, 만족감이랄까, 그런 거, 참 말로 설명하기 힘드네.”


새하얀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엎드린 채 반쯤 감은 눈으로 계속해 미소 짓던 백현이 이어지는 감독의 설명을 듣고 살풋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표정을 다시금 가다듬었다. 여유로운 나른함, 만족감. 절로 떠오르는 이가 있지. 깊게 지어지는 웃음에 장내 모든 스텝들이 숨을 삼켰다. 셔터 소리가 들리지 않자 고개를 갸웃인 백현이 미소를 거두니 그제야 퍼뜩 정신차린 감독이 촬영을 재개했다. 


방금 건 나른한 게 아니라 좀 위험했지.

백현의 회사 스텝들을 제외한 모든 스텝들이 속으로 감추어낸 생각이었다. 촬영현장을 유심히 지켜보던 백현의 스타일리스트가 매니저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아는 거 없어요?”

“뭘요.”

“아니 연애 하는 거 같아서요.”

“백현이가요? 누구 만날 시간도 없어요. 우리가 제일 잘 알잖아.”

“하긴. 뭐.”



하지만 안 그래도 잘난 얼굴이 요즘 더 물 오른 게 딱 봐도 연애하는 얼굴인데.

가장 가까이 지키고 선 매니저도 아니라고 하니 스타일리스트는 금세 피어오른 생각을 차곡차곡 지워냈다.



*



[날이 점점 더워집니다. 후덥지근하고 꿉꿉한 하루, 조금은 뻥 뚫린 시원한 해방감이라도 느끼실 수 있게 다음 주 개봉을 앞둔 사이다 같은 영화 한 편 소개합니다. 영화의 주제는 다루기 힘든 무거움이 있어 약간의 걱정을 안고 관람했으나 도리어 가볍게 풀어낸 것이 신의 한수였던 것 같군요. 비슷한 주제의 영화는 주류 비주류 가릴 것 없이 쏟아져 나오는 추세지만 의미가 퇴색되지 않게 중심을 잘 잡아가며 끝까지 이끌어가는 것은 드물었죠. 아주 잘,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개인적인 평이지만 흐름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모두 상쇄시키는 아주 강한 한 방이 존재합니다. 지친 하루 복잡한 세상 오늘 하루 수고했다는 의미로 한 번 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줄거리를 동반한 상세한 리뷰는 다소 스포일러가 될 것 같네요. 자세한 리뷰는 씨네와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그럼, 오늘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백현이 길게 늘어선 광고촬영으로 바쁠 때, 경수 또한 쏟아지는 개봉작들로 인해 시사회에 참여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전엔 이렇게까지 어지럽다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조금 무리하듯 움직인 것이 있긴 한 건지 간혹 일주일에 두어번 벅차네. 라고 내뱉던 것이 근래엔 이틀에 세네번 힘들다- 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기대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였는데, 힘든 일상에 속 시원한 사이다 한 잔 마시게 해주는 영화라고 하니 개봉하면 꼭 한 번 봐야겠습니다. 다루기 어렵다는 주제를 가벼이 매끄럽게 풀어간 방식이 궁금하네요. 개봉 후 의견 나누어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저녁 보내시길.]



강박이랄까, 의무적이랄까.

지칠 땐 그런 생각도 뭉게뭉게 피어나긴 해서 한참을 키보드에 손가락만 올려놓고 꼬물꼬물 거리며 등록을 눌러 말아 고민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제 글이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록된 답변을 바라보며 경수가 소리 없이 웃었다. 갓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이 우습게도 이후 가벼운 만남도 갖지 못했다. 바빴다는 것이 그 이유의 8할을 차지했다. 백현은 조금 유동적인 스케줄이라고 말했으나 경수는 정해진 시간이 있는 스케줄을 가지고 있었고 유독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새벽녘에 간간히 나누던 통화, 틈날 때 주고받는 메시지. 그리고 여전히 잊지 않고 이어지는 리뷰와 의견들.



“진짜 강력한 한방이네.”



녹진하게 빠져버린 기운이 급속도로 충전되는 느낌이라고 경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허둥허둥 고개를 저었다. 



‘너 요즘 리뷰 보면 날 선 느낌이 좀 가셨어.’

‘그리고 좀 로맨스 영화 비중이 늘었어.’



뻘하게 찬열의 메시지가 떠오를 건 또 뭔가.

나, 연애를 시작하면 그렇게 티나는 성격인가. 끄응. 말없이 귀여운 경수의 고민이 백현 몰래 시작되었다. 그렇게 조금 꼼질거리며 말갛던 그 얼굴 잠시 머릿속에 그려보았을까.



[Drr-]

엊그제 본가에서 보냈다는 택배가 이제야 오는지 조용하던 집의 정적을 깬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슬리퍼를 지익 끌며 문을 열던 경수가 일순 얼어버린 것은 찰나였다.



“영화, 같이 볼 수 있어요? 지금.”



네모난 DVD 곽을 얼굴 옆에 흔들며 선 백현이 그림처럼 미소 지었다.

불과 1~2분 전까지 제 머릿속을 채운 남자가. 근 일-이주 만에 보는 듯한 현실성 없는 얼굴이 경수의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정말 찰나였다. ‘헉’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혀 버린 것은.



“경수씨?”



경수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으나 본능적이었다.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 그러니까 택배나 받자고 할 때엔 대수롭지 않은 ‘ㅁㅇ동 반상회’ 글씨가 큼지막히 박힌 티셔츠가. 앙증맞은 펭귄이 열 댓 마리 그려진 편한 바지가.


“어떡하지.”


도르륵 눈을 굴리는데 현관문 너머 똑똑 작은 노크소리와 웃음기 가득 머금은 백현의 말이 들려온다.


“펭귄 귀여운데. 반상회 못 본 척 해줄게요. 저 세워 둘 거에요?”


저 몹쓸 관찰력을 어쩌면 좋지.

경수는 백현이 꽤나 재빠른 눈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폭 쉬 채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한 번 안아 줄래요?”

“....백현씨 정말 직설적인 것 같네요.”

“경수씨도 그런 편 아니었던가요?”

“좀 다른 문제죠 이건.”

“음. 그럼 제가 안죠 뭐.”



두 팔을 벌린 채 백현이 성큼 경수 앞으로 훅 다가왔다. 가볍게 안아오는 품에 기대어 선 경수가 제 팔을 들어 백현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좀 뻔뻔해지지 뭐. 못 본 척 해준다잖아.



“오늘도 일 하느라 고생했어요. 어떻게 시간 낸 거에요? 바쁘다고 했잖아요.”

“휴가 받으려고 몰아서 열심히 일했죠. 그래서 저 오늘 신세 좀 질게요.”

“....네?”

“이번엔 제가 온다고 했잖아요. 아, 그 티 하나 더 있어요? 편한 옷이 없네.”

“........약속이 다릅니다만.”

“못 본 척 한다고 했지 놀리지 않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어쩐지 감겨들어간 느낌에 백현을 잠시 흘긴 경수가 신발장에서 거실 화를 꺼내 놓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며칠 전 백현에게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더니 이렇게 써먹는구나. 경수는 흐음- 소리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네요.”

“제가요?”

“아뇨. 백현씨 손에 들린 영화가.”

“빈말이라도.”

“그리고 가져 온 당신이.”



시선을 마주하고 웃더니 후다닥 제가 편히 갈아입을 옷을 챙겨주겠다며 방으로 들어 가버린 뒷모습을 본 백현이 제 이마를 짚었다. 저 사람은 정말 모른다. 저렇게 웃는 게 얼마나 아찔한 건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경수 평론가의 이미지는 다 거짓말이다. 가시뿐인 철벽? 아니 모든 철벽도 뚫어버릴 아찔한 귀여움이랄까.



“콩깍지 제대로 씌어버렸네. 어떡하지 변백현.”



혹자는 네 눈에만 그렇다고 할 것이며 혹자는 미쳤다고 하겠지만-

백현의 반짝이는 두 눈에 동그란 마음이 내려앉았으니. 또 다시 가슴께를 만지작거린다.


“진짜, 간지러워 정말.”


이 간질거림이 곧 마음의 전부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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