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을 앓아누워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아무래도 처음 열이 올랐을 때 침대에 누워 계속 잠만 자서인지, 이제는 정말 침대 밖으로 몸을 움직일 기운조차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러나 될 대로 되라..라는 자포자기한 생각으로 자다가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더라도 다시 억지로 잠을 자려고 했다.


무엇이든.. 그 어떤 것이든 생각하기가 싫었고 그저 무조건 잠들고만 싶었다.


그렇게 되니 나중에는 억지로 잠들려고 하지 않아도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렸다.



나중에는 목이 너무 말라 입속조차도 건조해지고 입술 까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계속 자려고 노력하기만 했다.



그렇게 기절하듯 잠이 들면 언제나 많은 꿈을 꾸곤 했는데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악몽을 꾸기도 했고 계속해서 같은 꿈을 반복하면서 꾸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꿈 끝에는 크리스가 있었다.


깜빡이는 눈 사이로 드러나는 짙은 청색의 눈동자...


그 눈동자 색깔과도 같은 봄베이 사파이어가 연상이 되었고 뛰어들고 싶은 수영장의 깊은 물속의 색처럼 채도가 짙어진 것 처럼 보였다. 크리스의 바람이 흩날리는 금발 머리나 혀를 핥는 버릇까지 모두 내 머릿속에 입력된 듯 꿈속에서조차 선명하게.. 아니 더 또렷하게 보였다.



몇 번이나 크리스를 꾸고 난 뒤 나중에는 나의 삶들을 거슬러 올라가 다양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던 크리스를 만났다..




화려한 사교계의 여왕답게 아름다운 용모를 돋보기에 하는 화려한 자주색 드레스 입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머리를 풍성하게 부풀리고 화려한 꽃이 달린 모자를 쓴 채 남편의 팔짱을 끼고 내 앞을 스쳐 지나가던 순간.. 그 자신감에 차있고 아름다웠던 미소...


크리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았지만, 내 눈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떨어질 수 없었다.




그 전 생에서는 크리스는 나보다 몇 십 년이나 어렸고, 그를 보게 되거나 만나게 되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로써 나를 만나러 와 주었었다.


내 자글자글한 주름 가득 한 손에서도 느껴지던.. 생명력이 넘치던 보드랍던 피부와 우유냄새가 나던 숨결...


내 품안에서.. 내 손안에서 그의 생명력으로 인해 나는 그를 만나 기쁜 것 보다, 그와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던 시간으로 인해서, 슬픔이 더 크게 날 울리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크리스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분이나 나와 나이가 많이 차이가 나더라도. 크리스를 만나면 또다시 그에게 빠지고 사랑했으며 또 사랑했다. 그러나 난 계속 속절없이 그와 헤어져야 했다.


그런 크리스는 언제나 나에게 눈부신 빛과 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크리스와는 반대로 어둠 속에 묻혀 비참했다. 그를 사랑하고 동경하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의 존재가 어떨 때는 증오스럽기도 했다.




평소라면 막연하게 크리스에게 느끼던 내 감정들이 꿈속에서는 너무나 생생하게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그 격한 감정들에게 휘씁려 괴로웠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지만 깰 수 없었다. 현실이 고통스러워 잠으로 도피했지만 그곳에서조차도 나는 크리스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크리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인해 나는 아팠다. 지독할 정도로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입을 크게 벌리더라도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점차 숨 쉬는 것조차 발작이 일어날 것처럼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겨우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조차 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으며 눈가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가까스로 그 꿈의 여운에서 벗어나자 이제는 계속 시끄럽게 울려대는 벨소리가 머리를 울리고 있었다.


“날 내버려 둬..”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반쯤 눈을 뜨고 침실 밖을 쳐다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계속 자고 싶었다. 그러나 꿈꾸기는 싫었다. 그러나 기진맥진 한 나는 다시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쾅쾅쾅 -


문을 두들겨대는 큰 소리가 아파트 안을 울렸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나는 움찔하며 시트를 뒤집어썼다.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던 소리에서 내 이름이 들렸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내 몸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가까스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온 세상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가까스로 문을 열고 보이는 것은.... 어둠이었다.


.

.

.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해야 했지만 머리 전체를 찌르는 듯한 무거운 두통으로 머리 회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뻑뻑한 눈을 돌려 침대 옆을 보았지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머리 전체를 꿰뚫는 것 같은 두통이 너무 심했고, 목이 너무 아팠다.


물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몸을 일으킬 힘도 하나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래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워워~! 너 뭐하는 거야?”


조가 종이컵을 들고 병실로 들어오다가 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달려와 나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갈라져 거칠게 나왔다.


“너 탈진 상태야. 세상에 아무리 아프더라도 4일내내 아무것도 안하고 잠만 자는 놈이 어딨어?”

“4일?!”

“그래.”

“shit...! 회사에 연락을 해줘야 해..”


내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조는 다시 날 침대에 눕히면서 말했다.


“이미 회사에서 나한테 연락이 왔었어. 네 친구... 조나단이라고 하던데?”

“오...”


조는 인상을 찡그리며 거칠게 말했다.


“도대체... 몸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연락 한 통 없었던 거야?”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 때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창고에서 뛰쳐나온 이후 어떻게 아파트로 오게 되었는지, 계속 잠만 자게 되었는지 어떤 기억도 제대로 나질 않았다.


한참 아무 말도 없던 조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월터에게 갔었지?”

“뭐?”

“헬스키친 찰리에게도 갔었고? 빌어먹을..! 너 제 정신이야?!”

“.....어떻게 알았어?”

“패트릭이 얘기 하더라.”

“..패트릭과 아직도 연락하는 줄은 몰랐네.”


조는 나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이제 나도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런데 왜 자꾸 네가 내 엉덩이를 봐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 그런 거 아니야. 조.”

“...그럼 뭔데?”


나는 말하기가 망설여졌지만 내가 이 지경인 것을 조가 봤으니,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내 주변을 정리하고 싶었어.”

“뭐?”

“... 그냥 정리하고 싶었다고.”


조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날 한참 쳐다보다가 인상이 펴지며 경악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지금!”

“....진정해. 그런거 아니니까...”


나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내 얘기를 더 하기 전에 일단 이 빌어먹을 곳 좀 나가자.”

“안 돼! 너 지금 계속 열이 있는 상태야. 열이 내릴 때까지 입원해 있어야 한데.”

“집에서 비타민 워터 많이 마시고 해열제 먹을게. 나가자.”


나는 이불을 들쳐 내고 땅에 발을 내려놨다.


눈이 빙글빙글 돌았지만 최대한 티를 안내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뒤가 완전히 오픈되어 있는 드레스 같은 환자복만 걸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심지어 속옷조차 입고 있질 않았다.


나는 쾌활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와우.. 조! 네가 날 갈아입힌 건 아니지?”

“엿 먹어. 그랬다간 내 눈을 찔러 버렸을 거다.”

“하 하.”


나는 환자복을 추스르며 일어나서 옷장에서 잘 개어진 옷을 꺼내 화장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문에 무너지듯 기대며 어지러움을 좀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목이 뜨겁고 코로 내쉬는 숨도 뜨거웠다. 아직 완전하게 열이 내리지 않은 것이 느껴졌지만 더 이상 병원에 있기 싫었다.


나는 힘들지만 쉽게 환자복을 벗고, 청바지에 다리를 껴 넣었다.


.

.

.


조는 자신의 아파트로 날 데려가거나 내 아파트에서 조가 지내겠다는 걸 겨우 설득해 조를 돌려보낼 수 있었다.


조는 지금 무척 바쁜 상태였다. 뉴욕 뿐 아니라 다른 주에서 조의 전시회가 계약 되었다. 그리고 조는 그 전시회에서 쓸 사진을 다양한 사진을 찍기 위해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대 괜히 나 때문에 조의 시간을 빼앗을 수 없었다.


조가 돌아간 후 나는 카우치에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머리가 너무 무겁고 두통은 가라앉질 않았다. 다시 자고 싶었지만 또 다시 크리스에 대한 꿈을 꿀까봐 두려웠다.



열에 들떠 건조해져서 뻑뻑해진 눈으로 멍하니 거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약하고 빠르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온몸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나 육체적인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나약한 육체보다도 천 년을 넘게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제대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나약한 스스로의 정신력을 욕했다.


잠들면 안 돼..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은 텅 비어있는 것을 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싱크대로 걸어가 컵에다 물을 받아 마셨다.


찬물을 넘길 때마다 몸이 차가워져 떨리고, 부운 목도 지독하게 아파왔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물을 다 넘겼다. 그냥 침대로 가서 누워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찬장에서 아스프린을 꺼내 몇 알 입으로 털어 넣었고 다시 물을 받아 마셨다.


잠을 안 자려는 고집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기에 나는 평상시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지만 몸은 여전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난 네게 적어도 한 시간 이상 욕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어.”

“알아. 내가 없는 사이 네가 일을 다 했어야 하는 거 미안해.”

“내가 빌어먹을 야근까지 했다니까!”

“알았어. 미안해. 네게 빚졌어.”


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조나단을 보면서 말했다.


조나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다시 나를 힐끗 쳐다본 후 다시 자신의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너 아직도 얼굴이 좀비 같은데?”

“...난 괜찮아.”


나도 다시 내 모니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바지에다 땀에 젖은 손을 닦았다. 조나단은 생각났다는 듯 나를 휙 돌아보며 말했다.


“아 맞다, 너 아직 왜 핸드폰 안 켜져 있는 거야?”

“핸드폰?”

“그래 아직도 전원이 꺼져 있던데?”

“shit..! 잊고 있었어.”


나는 마침내 핸드폰을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곧바로 상의 주머니나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 봤지만 핸드폰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얼른 찾아 켜놔. 그래야 또 이런 일이 생길 때 911이라도 부를 거 아냐?”

“알았어, 고마워.”


나는 날 염려하는 조나단에게 고마움을 담아 웃어 보인 후 다시 모니터를 봤다.


열로 인해 목은 여전히 아팠다. 머리 회전은 둔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니 괜찮아져야 했다.


이를 악물자 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퇴근 후 집으로 터덜거리고 돌아와 핸드폰을 찾기 시작한 후 30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전화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할 수 있었다.


갤러리에서 무작정 돌아와 벗어서 던져놓은 쟈켓 주머니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쟈켓을 집어 들고 안주머니를 뒤적거리자 핸드폰은 거기 있었고, 배터리가 다되어 전원은 꺼져 있었다.



충전을 시킨 후 물을 꺼내 마시는데 목이 아파서 인상을 찡그렸다. 요 며칠 열에 시달리면서 편도선이 계속 부은 상태인지 목도 아픈 상태였다.


또다시 아스피린을 몇 알 손에 털어내 삼킨 후 카우치에 털썩 주저앉아 전원을 연결해 둔 채 핸드폰 전원을 켰다.


핸드폰이 켜지자마자 메시지가 오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댔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핸드폰을 봤다.


핸드폰에는 보이스 메시지와 텍스트 메시지가 연달아 와 있었고 그것은 조나단과 피터 그리고 조와 이보네. ‘크리스’도 있었다.



나는 크리스의 이름을 확인하자 딱딱하게 굳어졌다.


크리스의 이름을 보자마자 너무 놀라서였는지 발작적인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 된 기침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기침이 점점 더 심해지자 목이 너무 아프고, 연속적으로 계속되는 기침에 머리가 울려댔다.


나는 결국 핸드폰을 놓치듯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기침을 멈추지 못한 채 힘겹게 주방으로 걸어가 몸을 구부려 싱크볼 안에 토했다.


요즘 제대로 먹은 식사가 별로 없어서 인지 아까 삼킨 물과 미처 다 녹지 못한 아스피린 몇 알이 싱크볼 안으로 토해졌다.


나는 싱크대 볼 위로 토한 상태 그대로 몸을 엎드린 상태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물을 틀어 입을 행구며 한참을 싱크대에 머리를 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크리스는 나에게 너무 큰 고통이었다.



글쟁이가 꿈인 몽상가가 레인이라는 예명으로 적은 소설이 있는 곳입니다. 2차 창작인 팬픽을 많이 썼지만, 창작소설도 업데이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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