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나에게 새로운 분노였다.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너 때문에 나는 스물여덟이라는 이른 나이에 혈압이 오른다는 걸 몸소 느끼게 되었다. 너와 함께한지 100일이 넘어가면서 너는 밥을 안 먹는다거나 지금 당장 그를 보러 가겠다고 하는 등 하루에도 몇 번씩 쓸데없는 고집으로 나를 화나게 했다. 말이 안통하면 몸으로 해결하던 나였지만 말도 안통하고 몸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너는 역대 가장 힘든 상대였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네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너의 경호를 맡은 이상 내 눈앞에 네가 있는건 당연한 일인데. 너는 가끔 정말 순식간에 사라지고는 했다. 약 올리는 건지 한참을 미친 듯 찾아다니다 보면 몇 분 뒤 너는 내 앞에 네 발로 뿅- 하고 나타났다.



이유도 다양했다. 앞서가던 강아지를 따라갔다거나 처음 본 외제차를 봐서 이름을 확인하러 갔다거나. 그렇게 다시 눈앞에 나타나서 방금 자기가 본 것들에 대해 신나서 이야기하는 너를 보면 맥이 풀려 뭐라고 화를 낼 수 도 없었다. 너무나 환한 얼굴로 내 눈을 바라보며 말하는 너에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날은 조금 달랐다.


취향이 분명한 너는 물건을 살 때 한참을 고르는 편이였다. 내 눈엔 이거나 저거나 비슷한데 너는 똑같아 보이는 두개를 놓고 한 시간도 고민할 수 있었다. 결정 장애에 가까운 너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옆에 있는 나에게 물었다.



"찬열씨는 어느게 나아 보여요?"



그렇게 한참 고민을 하고도 나에게 묻는 네가 딱해 보이기까지 해서 나름 심각하게 고민을 한 뒤 성심성의껏 대답을 하면, 너는 반드시 내가 고른 반대쪽 것을 카트에 담았다. 나를 놀리려는 게 분명했다. 너는 내가 순간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는 것을 재밌어했다.



오랜만에 대형마트로 장을 보러갔던 그날도. 

분명 너는 내 옆에서 사무실에 놓을 화분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얘가 나아요, 쟤가 나아요?"



이번에도 내 눈에는 고만고만한 게 다를 게 없어 보이는 허브 화분 두개를 가지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 도움을 청하는 너였다. 어차피 내가 선택한 놈을 고르지 않으리란걸 알았지만 그가 물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나였다. 또 다시 주어진 어려운 문제에 화분 두개를 보며 어느 것이 나을까 따져보는 사이. 




너는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아서 서둘러 화분들을 내려놓고 네가 갈만한 곳들을 하나씩 가보았다. 대형마트에서 네가 좋아하는 곳들은 애견샵, 자전거코너, 생활용품코너 정도. 매번 너는 애견샵 유리창 앞에 쪼그려 앉은 채 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서 키울 수 없는 강아지들과 ‘너 진짜 귀엽다! 형아랑 집에 갈래?’ 등등 눈을 맞춰가며 대화하곤 했고, 최근에는 예전에 작은 접촉사고가 난 뒤 그가 직접 내다버렸다는 자전거에 다시 꽂혔는지 한참을 자전거 주위를 맴돌곤 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너를 찾아내고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돌아다니는데 나타날 때가 한참이 지나도 너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마트내 작은 실내놀이터 앞에.

너는 언제 가져간 건지 아까 샀던 모닝빵 하나를 입에 물고 앉아서 노는 아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런 김종대.. 속으로 화를 삭이면서 너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너는 나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네 곁에 도착할 때까지도. 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바로 오지 않고 뭔가 불만이 있는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려 계속 아이들만 보고 있었다.



그런 너를 보는 순간 뒷목이 당기고 머릿속에 핏줄 두어 개쯤이 터진 것 같았다. 너에게 다가가 너의 팔을 잡고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차까지 끌고 갔다. 내 행동에 놀란 네가 아프다느니 짐은 어떡하냐는 말은 모두 무시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차에 다다라서야 너의 팔을 놓아주고 차문을 여는데 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너는 주저앉아 말 그대로 엉엉 울면서 나에게 말했다.




"정말 너무하잖아. 하루에 몇 분도 안되는거래요?"




그제서야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매번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숨어버리는게 아니었다. 아무 대답 없이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더니 너는 금방 눈물을 그치고는 피곤하다며 먼저 차에 올라타 버렸다.



버려둔 짐을 찾아오겠다고 말하고 아까 너와 있던 플라워샵으로 걸어가는 동안 어떻게 된 건지 생각을 해봐도 처음 보는 너의 눈물만 떠올라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너네는 아니? 


이젠 친근하게까지 느껴지는 아까 그 화분 두개를 모두 결재해 카트에 담았다.



트렁크에 짐을 다 싣고 차에 올라탔다. 너는 피곤한 듯 시트에 파묻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도 아무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집에 도착했는데도 잠이 깊게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인 너의 속눈썹 끝에 매달린 눈물 방울이 여전했다. 그걸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네가 깰 때까지 한참을 달렸다.




-그날 너와 나는 조용한 공원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기분 좋았잖아요."




나중에야 알았다. 


너는 나를 감시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하루종일 작업하던 그 공간은 안전을 이유로 그가 너를 가둬두기 위한 곳이었다. 너는 절대로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너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그가 언제올지만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아까 마트에서 엄마들이 애들 맡겨놓는거랑 똑같아요.

 재밌게 노는 거 같지만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거잖아요."



조직의 보스.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곁에 있었지만

단 한순간도 평범할 수 없는 그의 존재로 너는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게  당부한건 너에 대한 보호 였다고. 

네가 그렇게 느끼는건 그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거라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면 방법을 찾아 보겠다고.

진심을 다해 너를 달랬다.




네가 불쌍해서라고 생각했다.



내가 네 옆에 있는것이 너에게 가장 힘든일이라는것을 알았을때. 왜 그렇게 내 마음이 죄여왔는지.



나는 그땐  미처 알지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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