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고, 스팍과 얘기를 나눴던 그 치료 차원의 휴가는 사고로부터 95일째가 되어서야 겨우 받아낼 수 있었다. 의사 소견서는 당연히 CMO인 맥코이가 작성했고 휴가 요청서에는 부함장인 스팍의 이름까지 올라가 있어서 요청서를 받은 제임스 커크는 아주 잠깐 의외라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지만, 결국에는 다른 말없이 승인했다. 승선과 동일하게 하선 역시 함장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함장의 동의만 있다면 하선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기도 했다. 맥코이는 짐을 싸면서 일주일 정도의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계획을 세웠다. 느긋하게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논문을 읽다가 석양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서 저녁을 먹는 날, 일찍 일어나서 어울리지도 않게 조깅을 하고 커피를 마신 뒤에 점심은 거르고 자리에 엎드려 누운 채로 쓰고 있던 논문을 고치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뒤에 21세기 고전 영화를 보는 날,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서 창밖의 샌프란시스코를 구경하다가 근처의 카페로 나가서 시간을 보내곤 점심인지 저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식사를 한 뒤에 오랜만에 만나는 누군가와 반갑게 안부를 묻고 돌아와서 논문은 한 글자도 보지 않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이른 잠자리에 드는 날, 등등.

그 자잘한 계획 속에 하루쯤은 스팍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특별히 약속을 잡지는 않았지만, 마주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자꾸만 맥코이의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스타플릿 근처에서 사람을 만나고, 밖에서 혼자만의 느긋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맥코이는 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피며 스팍이 보이지 않는지를 확인했다. 그의 새카만 검은 머리와 반듯하게 솟아오른 두 귀는 보지 않으려고 해도 모를 수 없겠으나, 이상할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기약 없는 만남을 기다리는 일은 딱 나흘째에서 관뒀다. 만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또 잘된 일이 아니겠는가. 굳이 서로의 곁을 계속 맴도는 것도 퍽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기껏 휴가를 받아 놓고서 동료를 만나길 기대하다니. 맥코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서관 주변을 맴돌았다. 오랜만의 휴가는 방에 늘어져서 하릴없이 누워있기 가장 좋은 시간이었지만, 맥코이는 느긋하게 침대에 붙어있질 못했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다리가 들썩거렸고, 그 들썩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서면 결국엔 또 옷을 찾아 입게 되는 식이었다. 오랜만의 휴가였지만, 몸은 자꾸만 움직이길 종용했고.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또 어느새 한적한 자리를 찾아 멈춰서는 혼자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지구를 여행하는 이방인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낯설어 견디기 힘들 때면 맥코이는 커피를 사서 손에 들었다. 손에 쥐어지는 따뜻한 온기와 적당히 고소한 냄새에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가 이 거리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저 혼자뿐이라는 것을 자각해버리곤 했다. 그런데도 맥코이는 계속 밖으로 향했다.

조난된 후로 찾아온 한 가지 깨달음은, 레너드 맥코이가 이 행성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가에 관해서였다. 만약 죽기 직전에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주저 없이 지구를 입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던 그리움은 가장 위급한 순간에 깨어났다. 맥코이는 커피를 마시면서 도서관 옆의 다리 밑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별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저 이 행성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눈에 담아냈다. 뛰듯이 걷는 사람과 패드를 들고 걸어가다가 행인들과 부딪히는 수많은 사람은 의미 없이 시선 속에서 흘러가고 또 튀어나오기를 반복했다. 이 사소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 우주를 달리고 달려 돌아온 사람치고는 참으로 태평한 모습으로 맥코이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귀 끝을 발갛게 물들여 놓을 시간 동안 맥코이는 조금 식어버린 커피를 입에 담았고, 곧바로 삼키지 않은 채 잠깐 입에 물고 있다가 목구멍으로 넘겼다. 다 식어버린 커피에서는 약간 신맛이 났다.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지만,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그리워했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떠들 수 없었다. 맥코이는 컵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마음을 쓰고 아끼는 것은 저 우주를 유영하는 함선에 다 두고 와버렸기 때문에, 맥코이의 그리움이란 언제나 이렇게 실체가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태양이 지평선 가까이 떨어져 버린 하늘은 이제 붉다기보다는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다리 밑을 지나는 사람들의 걸음은 더 이상 느긋하질 않았다. 해가 떨어지고 나서 추위를 걱정하며 종종걸음치는 사람들 틈에서도 맥코이는 여전히 다리의 난간에 기댄 채로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맥코이는 지구를 그리는 마음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경 쓰는 두 마음 사이에 언제나 깊은 골이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이 행성에서의 느긋한 날도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맥코이는 괜히 코를 훌쩍였다. 찬바람을 오래 맞았더니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으니 별로 의미는 두지 않았으나, 그 뒤에 이어지는 목소리는 분명히 특별했다.


“그렇게 서 계시면 감기에 걸릴 겁니다.”


맥코이는 다시 코를 훌쩍였고, 의미 없이 샌프란시스코의 찬바람을 한껏 들이마신 채로 뒤를 돌았다. 어떤 날처럼 폐가 시릴 정도의 추위는 아니었지만, 목구멍이 까끌까끌하게 변할 정도의 찬 공기가 스며든 몸이 완전히 돌아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새카만 머리, 뾰족한 두 귀가 창백하게 얼어 있는 것부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맥코이는 눈에 익숙한 그의 얼굴을 눈짓으로 더듬어가면서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 정도로는 끄떡없을걸.”


스팍은 대꾸가 없었으나, 맥코이는 난간에 등을 기대선 채로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벌써 춥고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왔으니, 이 정도 추위쯤은 사실 별것도 아니잖아.”


호기롭게 하는 소리에도 스팍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부터가 썩 이상하고 특이한 전조였다. 그러나 그 뒤로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겠느냐고 묻는 스팍의 행동이 더 이상했으므로, 그것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못하고 맥코이는 썩 반기면서 스팍을 끌고 근처의 술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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