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사양 : A5, 71P

가격 : 7000원

연령 : 전연령가

줄거리 : 대상의 마음을 투영하는 인어를 기르며 츠루마루 쿠니나가에 대한 오랜 연심을 다시 자각하게 되는 오오쿠리카라의 고난 (해피엔딩)

주요 등장인물 : 오오쿠리카라, 츠루마루 쿠니나가, 헤시키리 하세베

주인 및 혼마루에 대한 오리지널 설정이 있습니다. 쿠리츠루 외의 검검 요소는 없음

이하는 샘플입니다.



순정의 피막

 

창가에는 아직도 빈 새장이 있었다. 문조를 위한 새장이었다.

주인이 공들여 기르던 문조가 죽은 것은 열흘 전의 일이었다. 작은 몸집이 검은 깃털로 수북했고 누구의 손에도 잘 올라타 시도 때도 없이 지저귀던 녀석이었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온기를 잃은 사체를 직접 매장하며 주인이 눈물을 흘렸다는 소식을 오오쿠리카라는 남의 입으로 전해 들었다. 대개 근시도 자청하지 않는 그는 직접 새를 볼 기회도 적었다.

기억에 남은 것이라고는 주인이 직접 주최했던 공모전에서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몇 날을 고심하여 붙였던 이름뿐이었다. 쿠로링. 마지막 발음에서 혀가 작게 말리는 짧은 음절의 단어가 듣기 좋은 것 같으냐고 몇 번이나 되물어보았던 목소리가 빈 새장을 마주하니 다시금 메아리치는 듯 했다.

주인의 목소리는 그 사이로 들렸다. 생각해보면 그 목소리를 들은 것도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제 손으로 아끼던 생명을 묻은 이후, 주인은 간단한 조회도 근시에게 미루며 꼬박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직무를 방기한다는 지적은 감히 튀어나오지 못했다. 이별의 슬픔에 공감해주는 쪽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 새로운 애를 키우려고.”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헤시키리 하세베의 손에 이끌려 주인과 독대하게 된 오오쿠리카라는 눈을 깜빡였다. 영 터무니없게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동물을 기르는 것은, 여러 명의 신들과 함께 이곳에 갇히다시피 한 주인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래서?”

그런데 그 사실을 왜 굳이 자신을 불러 유별난 통보를 하는가. 오오쿠리카라는 거기에서 은근한 불안을 느꼈고 등골을 휘감던 감정은 곧 현실이 되었다.

“그 애를 좀 보살펴 줘.”

“거절한다.”

형태만 달랐지 명령에 가까웠던 말을 오오쿠리카라는 단칼에 거절했다. 숙고할 가치도 없었다. 오오쿠리카라는 개인적인 이유로 동물을 돌본 경험도 없었고 그럴 필요성에 대해서도 느끼지 못했다. 당번제로 돌아가는 마구간 관리는, 말이 전장에 필요했기 때문에 잠자코 일손을 거드는 것뿐이었다.

“왜?”

천연덕스럽게 돌아오는 반문이 얄밉게 신경을 긁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닐 텐데,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에게. 오오쿠리카라는 주인의 저의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 혼마루에는 자신과 같은 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칼도 수두룩했다. 자신을 데려온 이후로 줄곧 문간에 서 있는 헤시키리 하세베가 대표적이었다. 이런 시답잖은 명령에도 득달같이 고개를 숙이며 충심으로 따를만한 녀석은 내버려두고

대체 왜, 자신인가.

오오쿠리카라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칼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럼 칼이 할 일이라는게 대체 뭔데?”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구체적인 사례를 생각하려니 사고가 조금 복잡하게 흘러갔다. 오오쿠리카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적을 물리치는 일.”

“그래? 그럼 이 일도 그거랑 마찬가지니까. 해.”

“무슨 소리지. 네 동물을 돌보는 것과 전장에 나가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응. 네가 이 일을 맡아주지 않으면, 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제대로 된 부대편성을 하지 못할 것 같아. 그럼 네가 전장에 나가게 되는 기회도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뭐?”

아닌 척 말을 꾸미긴 했지만 틀림없는 협박이었다. 오오쿠리카라의 언성이 무심코 높아졌다. 방석 위에 앉아 있었던 몸도 가볍게 들썩거렸는데 주인은 그 몸짓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분한 태도를 잃지 않은 채였다. 말투가 얄미울 정도로 태연했다.

“어차피 네가 칼이라면 너는 물건이고, 주인은 나야. 주인이 물건을 필요에 맞게 사용한다는데, 문제 있어?”

반박하지 않았다. 적막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오오쿠리카라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으며 짙은 눈썹의 각을 세웠다. 그러나 노골적인 표정을 마주하면서도 주인은 끝까지 한 번 내린 명령을 물리지 않았다. 대신 반항이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표정을 달래려는 듯 한 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오래 맡기진 않을 거니까. 응? 부탁해.”

 

*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정말로 그럴 생각이 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정확한 기간을 말해주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명령 직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안내하는 헤시키리 하세베도 그런 정보를 전달해 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두 발짝 앞에서 걷고 있는 잿빛 머리통은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리며 해괴한 말만 지껄여댔다.

“너에겐 과분한 임무로군.”

“…그럼 네놈이 하지 그래. 나는 어울릴 생각은 없다.”

울컥 대답이 튀어나왔다. 오오쿠리카라는 걸음을 멈추고 하세베를 노려보았다. 하세베도 마찬가지였다. 매서운 시선이 몇 발자국 사이의 허공에서 마주쳤다. 먹구름이 낀 하늘 탓에 날씨가 흐렸다. 빛이 없는 어두운 복도 위에서 이쪽을 돌아보는 하세베의 낯빛은 평소보다 조금 우울한 것처럼 보였다.

“흥. 내가 그런 걸 말해보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나.”

주인의 제일가는 신하로서 그런 것쯤은 진작 부탁해보았다는 소리였다. 맹신, 혹은 과신과도 비슷한 저 충성심을 잠시 과소평가했다. 오오쿠리카라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와의 말싸움은 피곤하기만 하고 얻을 것도 없었다. 힘이 들어갔던 미간이 다시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오오쿠리카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승낙할 때까지 계속 부탁해보시지. 이쪽은 언제든 양보할 준비를 할 테니.”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뭐?”

“그 생물은, 주변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하더군. 돌봐주는 사람이 자주 바뀌면 좋지 않을 거라고 주인께서 말씀하셨다.”

오오쿠리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세베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른 사람과의 교대 없이 오오쿠리카라 혼자서만 동물을 돌보아야 한다는 소리가 되었다. 끝이 언제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모호한 시간 내내.

그런 것은 정말 질색이었다. 무심코 감정을 드러낸 얼굴을 하세베가 빤히 바라보고는 혀를 찼다.

“너란 놈은 정말로 협조성이 부족하군.”

“시끄러워.”

이쯤 되면 이제는 될 대로 되란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발걸음을 돌려 주인의 방으로 뛰어 들어갈까. 오오쿠리카라는 문득 그런 생각까지 했다.

“어쨌든 서둘러라. 이미 준비는 끝냈으니.”

하세베는 오오쿠리카라를 재촉했다. 그를 따라 움직이며 오오쿠리카라는 생각을 거듭했다. 어차피 자신에게도 주인에게 대응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명령을 거절할 수 있을만한 근거가. 그렇다면 일단은 일의 자세한 내용을 알아야 했다. 일단 거기까지만 참아보자고, 오오쿠리카라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이쪽이다.”

오오쿠리카라가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사이, 하세베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하세베가 안내한 곳은, 혼마루의 뒤편으로 통하는 외문이었다. 주인의 방이 위치한 내실에서부터 이어진 복도를 오래 걸어야 나타나는 문은 오오쿠리카라에게 제법 생소했다. 이제는 많은 인원이 머물게 된 혼마루는 증축을 거듭하며 원래보다 더욱 규모가 커졌다. 그에 따라 복잡해진 구조에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공간도 생겼는데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장소가 그랬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 겨우 도착한 문을 빠져나가 밖으로 나가면 주위가 휑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았기에 무성히 자라난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 그리고 하늘을 둘러싼 먹구름까지. 빛이 들지 않아 어둠이 겹겹이 자리한 곳에는 인적이 드문 창고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오오쿠리카라의 기억대로라면 거기엔 칼이 채 스무 자루가 넘지 않았을 무렵의 혼마루 시절, 종종 사용했던 잡동사니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제는 돈도 자원도 충분하여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물건을 언젠가 정리하겠다며 벼르고 있었던 것은 알았지만, 어느새 정리를 끝마친 건지 오오쿠리카라는 금시초문이었다.

하세베는 장갑을 낀 손으로 창고를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라. 네가 보살펴야 하는 놈은 여기에 있다.”

오오쿠리카라는 창고를 바라보았다. 정면으로는 밖으로 걸쇠가 달린 출입문과, 창살이 달린 작은 창이 눈에 띄었다. 원래도 빛이 잘 들지 않는 창고는 한낮에도 어두웠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저 창문에 원래 창살이 달려 있었던가? 그렇게 사소한 점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오오쿠리카라는 창살 사이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신경을 집중했지만 거기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야생이 아닌 곳에서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짐승이라면, 작은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여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도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안에는 뭐가 있지?”

오오쿠리카라는 하세베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낌새가 수상했다. 그러고 보면, 아까부터 주인이나 이놈이나 자신에게 이런저런 일을 부탁하긴 했지만 정작 중요한 정보에 대해서는 말을 회피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것은 대체 어떤 동물인지.

어쨌거나 창고 하나를 비워서까지 우리를 만들어야 할 정도라면 범상치 않은 놈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세베는 오오쿠리카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짧은 말이 나직하게 주변을 울렸다.

“인어다.”

“뭐?”

오오쿠리카라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하세베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태도로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인어라고 했다.”

그건 갓파와 비슷하게 구전설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생물이 아니었던가. 칼로 지냈을 당시, 바다도 본 적이 없었던 오오쿠리카라는 당시 다테 저택에서 함께 지냈던 츠쿠모가미에게 그 존재에 대한 전설을 어렴풋이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오오쿠리카라에겐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세베는 그 의문을 잠재우려는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너도 몇 백 년을 살았으니 인어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겠지. 이 안에 있는 건 그 인어가 맞다.”

하세베의 말에 따르면, 주인은 거듭된 이별에 상심하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정해진 이별로 인해 슬퍼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오래도록 사는 생물을 기르자.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인맥과 자본을 총동원하여 겨우 귀한 인어 한 마리를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를 오오쿠리카라는 반쯤 멍한 정신으로 듣고 있었다.

종류가 어찌되었든 무언가에 몰두하는 인간의 집요함은 츠쿠모가미의 이해를 뛰어넘은 곳까지 도달하곤 했다. 이에 대해 경험이 없지는 않은 오오쿠리카라였지만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마주하게 되면 적응에 시간이 걸리는 문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자, 안으로 들어가라.”

등을 떠미는 듯한 하세베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오오쿠리카라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너는?”

“나는 그것에게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안에 들어가는 건, 주인의 명령을 받은 너 혼자여야 한다.”

어째서, 하고 물어볼 정신도 없었다. 오오쿠리카라는 하세베를 지나쳐 창고로 다가갔다. 잠겨 있던 걸쇠가 서늘했다. 마치 오랫동안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던 것 같은 온도였다. 오오쿠리카라는 조용히 잠금을 풀었다. 쇠가 맞물리며 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가끔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나 들을 수 있었던 적막 속에서 유별나게 들리는 금속음이었다.

오오쿠리카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녹슨 경첩이 삐걱거렸다. 창고 안은 예상대로 어두웠다. 외부의 빛이 실내까지 온전히 닿지도 못했다.

“출입문 옆에, 전등의 전원이 있을 거다.”

오오쿠리카라는 벽을 더듬었다. 하세베가 말한 대로 작은 스위치가 만져졌다. 혼마루의 방에도 이런 시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외진 곳까지, 어떻게 전기를 끌어올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뒤로 한 채 오오쿠리카라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여전히 어둠에는 소리가 없었다. 그곳을 얼마간 응시하다 오오쿠리카라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끝에 힘을 주었다.

천장에서 뻗은 희미한 빛이 주위를 밝혔다. 마치 지표에 깔린 안개처럼 넘실거리는 창백한 막 사이로 오오쿠리카라는 숨을 삼켰다. 한때 잡동사니로 가득하던 창고에는 처음 보는 욕조가 놓여 있었다. 인어는 그 안에 있었다. 콧등을 경계로 얼굴의 절반만 수면 위로 드러낸 채, 어떤 움직임도 없이 얌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에 젖어도 새하얀 정수리 아래로 오오쿠리카라를 비춘 인어의 두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오오쿠리카라는 그 모양을 알고 있었다. 꿈에서라도 착각할 리 없는 형태였다. 황금을 깎아 만든 방울처럼 샛노란 눈동자. 그리고 그것의 주위를 둘러싼 갈대 잎을 닮은 길다란 눈썹.

그것은 같은 동료 중 하나인 츠루마루 쿠니나가의 눈이었다.

 

*

 

“놀랐나?”

기겁하여 그 자리에서 창고를 뛰쳐나온 오오쿠리카라는 태평한 소리를 지껄이는 하세베를 홱 돌아보았다. 이쪽의 심정은 아랑곳 않고, 말끔한 얼굴에 피어난 의기양양한 웃음을 보게 되자 더욱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오오쿠리카라는 험악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저절로 거칠어졌다.

“저게 뭐냐.”

“인어다. 그렇게 말했을 텐데.”

“웃기지 마! 그렇다면, 왜……!”

츠루마루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 오오쿠리카라가 그 말을 하기 전에, 하세베의 설명이 한 발짝 빨리 끼어들었다.

“왜 다른 녀석의 모습을 하고 있느냐, 라는 거지?”

“…….”

“그 모습은, 인어의 특성이다. 인어는 자신을 바라보는 대상이 마음에 둔 상대의 모습으로 자신을 보이게끔 할 수 있다더군.”

“…그게 무슨.”

마음에 둔 상대? 오오쿠리카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세베는 거기에 못을 박듯 일격을 날렸다.

“나 참. 이해가 안 되나? 오오쿠리카라, 네놈이 좋아하는 상대의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다는 거다. 저 인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는데 손바닥에 스민 식은땀은 현실이었다. 오오쿠리카라는 눈을 깜빡였다. 수백 년간 외면한 감정을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마주보게 될 줄은 예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럴 리 없어.”

오오쿠리카라는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여전히 전등이 켜진 채로 희끄무레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 사이로 오오쿠리카라는 다시 한 번 인어의 모습을 살폈다. 수면 위로 드러난 형태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자신을 관찰하는 노란색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오오쿠리카라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힘껏 감정을 억누른 말이 그 사이로 새어나왔다.

“너, 어서 장난이라고 말해. 지금이라면 용서해주지.”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장난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자신이 꾸민 장난에 걸린 상대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한다는 게 맞았다. 츠루마루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오오쿠리카라는 그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 인어가 어쩌고 했던 말보다는 츠루마루가 하세베와 주인과 함께 작당을 하고 자신을 놀리려 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욱 받아들이기 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오오쿠리카라의 말에도 낯익은 얼굴 위로는 한결같은 표정만 떠올라 있었다. 웃지도 울지도 않고, 어떤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채 그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친숙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아주 먼 타인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어떤 접점도 인연도 없는.

그 표정을 마주하자 이상하게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오오쿠리카라는 다시 한 번 말을 뱉고야 말았다.

“제길, 뭐라도 말하라고.”

짧은 욕설과 함께 흘러나온 언성이 아까보다 높았다. 습기 찬 창고에 울린 소리의 진동은 그대로 메아리가 되었다. 인어는 그제야 오오쿠리카라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인어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더니,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그대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창고의 절반을 차지한 목재 수조의 높이는 오오쿠리카라의 배꼽보다 높았다. 어쩔수 없이 장소가 좁긴 했지만 잠수가 불가능할 정도의 수심은 아니었다. 오오쿠리카라는 하얀 머리가 가라앉았던 수면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조명은 그 표면만 살짝 더듬을 뿐이었다. 인어가 가라앉아 있을 바닥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물속에서는 호흡도 필요 없는지, 수면에는 기포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곳을 응시하다 오오쿠리카라는 창고를 나섰다. 고작 두 번 정도를 들락거렸을 뿐이었는데 격렬하게 대련을 한 것처럼 피로했다. 하지만 그것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헤시키리 하세베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거나, 주명을 받들지 않겠다는 선택지는 없다.”

거기에서는 어떤 고뇌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오쿠리카라는 바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것이 주인을 하늘처럼 받드는 충복의 멱살을 붙잡아 창고 안으로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행동이었다.

 

*

 

거절은 불허되었다. 이유를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마음에 담아둔 상대가 있는데 그 상대가 눈에 보이니 껄끄럽다…같은 말은 하늘이 두 쪽 나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결국 일을 떠맡은 셈이 된 오오쿠리카라에게 하세베는 닛카리 아오에를 찾아가라 일렀다. 그에게서 빌려야 할 물건이 있다는 것이었다.

닛카리는 이시키리마루와 함께 작은 신당을 꾸리며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주로 거기에 머물렀다. 신에게 기도를 올리거나 다른 사람의 비밀스러운 상담을 들어주거나 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곳이었는데 일부러 기척이 드문 곳에 자리를 낸 곳은 인어가 머무는 창고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오쿠리카라가 거기까지 찾아갔을 때, 이시키리마루는 자리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닛카리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색이 다른 눈동자를 살짝 기울인 채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 어쩐 일이야?”

“……책을 한 권 빌리러 왔는데.”

“뜻밖이네. 나에게 책을? 뭐, 좋아. 잠깐 앉아서 차라도 마실래?”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이었지만 오오쿠리카라는 문간에 서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유롭게 차를 홀짝거릴 만한 속이 아니었다.

“아니, 오늘은 책만 받아가지.”

“그래? 조금 피곤해보이네. 금방 가져다 줄 테니 잠깐만 기다려. 그런데, 무슨 책이야?”

오오쿠리카라는 순간 고민했다. 책을 빌리러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닛카리 아오에가 이유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헤시키리는 주인이 인어를 기른다는 사실은 아직 비밀이니 이와 관련된 모든 사항에 대해 함구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오쿠리카라는 이곳까지 오는 와중에도 끝까지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일에 필요한 책이면 진작 준비해 놓을 것이지, 애꿎은 심부름까지 시키는 헤시키리 하세베를 향해 속으로 욕을 하며 오오쿠리카라는 입을 움직였다. 짧은 대답이 긴장과 불만으로 무심코 퉁명스러워졌다.

“요괴전서.”

“……정말 뜻밖이네.”

젠장. 오오쿠리카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닛카리는 직접 이유를 묻기보다, 자신의 짐작을 넌지시 얘기하는 것에 그쳤다.

“츠루마루가 시켰니?”

오오쿠리카라는 어째서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오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녀석은 관계없다.”

“그래? 나는 드디어 츠루마루가 백물어를 시작하려나 싶었지.”

닛카리의 말로는, 츠루마루가 예전에 자신을 붙잡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갑작스러운 계획을 줄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거짓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오쿠리카라는 츠루마루에게 한 번도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지만 심심한 것을 싫어하고 한 번 기세가 오르면 사소한 것에도 안달복달하는 성격을 가진 녀석은 느닷없이 그와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벌이곤 했다.

다행히 닛카리는 더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 아니겠냐며 담담하게 말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날렵하게 뻗은 신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오오쿠리카라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의 닛카리는 양 손으로 책을 들고 있었다.

“자, 여기.”

기껏해야 좀 분량이 되는 소설책, 정도의 부피를 생각하고 있었던 오오쿠리카라는 두꺼운 백과사전처럼 보이는 책의 모습에 당황했고, 엉겁결에 받아든 무게에 또 놀랐다. 누군가를 때리면 꽤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묵직했다. 단색의 표지를 응시한 채 입을 다물어버린 오오쿠리카라를 향해 닛카리 아오에가 겸연쩍은 듯 말했다.

“그래서 내가 뜻밖이라고 한 거야. 쉽게 빌릴 만한 물건은 아니니까.”

“…그렇군.”

“당장 쓸 일은 없으니까, 천천히 돌려줘도 돼.”

“알았다.”

하지만 자신 역시 오래 가지고 있을 일은 없었으면 한다는 말은 속으로만 삼킨 채 오오쿠리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다 문득 물었다.

“너는 이 책을 다 읽었나?”

“응. 아, 그리고 보다보면 알겠지만 내 마음대로 가필한 부분도 있어.”

책을 사랑하는 카센 카네사다가 들었다면 경기를 일으켰을 말이었다. 그러나 오오쿠리카라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책에는 인어에 대해서도 서술되어 있는 건가?”

“인어?”

닛카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있었어. 기본적으로는 하반신은 비늘 달린 물고기의 몸에,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과 닮은 요괴 말하는 거지?”

“…기본적으로는?”

“그래. 원형이 그렇다는 거지, 보통은 우리 눈에는 다른 모습으로 보이니까. 무슨 모습이었더라….”

오오쿠리카라는 닛카리가 기억 속의 책장을 넘기는 것을 잠자코 기다렸다. 정적 속에서 허공을 더듬는 것처럼 비스듬히 뻗었던 안구가 몇 번의 깜빡임 끝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오오쿠리카라는 미세할 정도로 기울어진 모양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래, 대상이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의 모습으로 둔갑한다고 했어. 번식이 힘들어 개체가 드문 종족인데 옛날부터 많은 위협을 받았는지 본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적혀 있더라고.”

“…이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인건가?”

오오쿠리카라는 자신의 목소리가 낙담한 것처럼 들리지 않게끔 애써 담담한 척 물었다. 다행히 닛카리는 그 차이를 지적하는 일 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의 말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의문스럽게 들리는 구석이 있었다. 언제나 예상보다 대화를 길게 만들어버리는 닛카리의 화법을 오오쿠리카라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무슨 소리냐고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 책은,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종합하여 정리한 거라서.”

“그렇군.”

그렇다면 명확한 사실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고 여길 수 없었다. 일단 빌렸으니 책을 한 번 읽기야 하겠지만, 결정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바로 신뢰하는 일 없이 유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오오쿠리카라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닛카리의 중얼거림이 조금 더 빨랐다.

“이렇게 얘기하니 생각난 건데, 만일 인어가 진짜로 있다면 좀 궁금하네. 나도 보고 싶어.”

“…….”

오오쿠리카라는 어째서냐고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잘못 말을 꺼냈다가는 이상한 곳에서 대화가 꼬여 함구해야 할 비밀을 털어놓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닛카리는 오오쿠리카라의 침묵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로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니, 불쌍하지 않아?”

불쌍하다. 듣기에 기이한 말이었다. 닛카리를 바라보던 오오쿠리카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부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외면이 아니었다면 조금 낮은 곳에 위치한 얼굴을 향해 작게 혀를 찼을지도 몰랐다.

오오쿠리카라는 먹구름 외엔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놈이고 저놈이고, 인간으로 너무 오랜 세월을 지냈다. 그렇기 때문에 본분을 잊은 말이 잘도 나오는 것이다. 오오쿠리카라의 이해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끝에 매달린 대답이 짧고 담담하고 나직했다.

“알 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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