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그 글 봤어요?”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의 질문이던가. 단과대학 입구에서 전공 강의실이 있는 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반복되던 물음이었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휘틀로다이우스는 응, 아주 탈탈 털렸던데? 하는 대답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이러다 전화번호까지 돌겠어요. 이자르 선배도 조심하라고 해요.”



그가 예상한 화제가 맞았는지 후배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받아쳤다.

 


“다들 조심하겠지.”

“그럼 다행이지만요.”

“난 먼저 가볼게.”

“네. 나중에 봐요!”

 


휘틀로다이우스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이상 소란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이었기에 그는 잽싸게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아직 강의 시작 전이라 못 들어올 것은 없었겠으나 굳이 선배들의 전공수업 전에 강의실을 찾아와 관련 없는 화제를 묻는 후배는 없었다.



동기 몇이 휘틀로다이우스를 보며 눈으로 아는 체를 했지만 그게 다였다. 후배들과 달리 쓸데없이 따라붙는 질문은 없었다. 입학부터 화제를 몰고 다니던 이에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화제의 주인공은 볕이 잘 들어오는 창가 근처에 앉아 캠퍼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을 땐 주변 환경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습관인 친구였기에 휘틀로다이우스는 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옆자리의 의자를 빼 앉았다. 기척이 느껴지자 돌아오는 시선에 휘틀로다이우스가 웃었다.



“좀 시달렸겠는데.”

“이 학교 음대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니까.”



성가시다는 듯 하품과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두 사람이 속한 음대는 관련 계통에서는 저명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지만, 이미 재학 중인 대학 자체가 국제적으로 손에 꼽히는 명문이었기에 타과의 학생들은 음대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같은 음대여도 과만 다르면 모르고 지내는 일이(작곡과인 그들과 바이올린과의 하데스 같은 예도 있지만) 당연했다.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고, 음대 근처에 현수막이 깃발처럼 깔리고, 심지어 뉴스에서 호들갑을 떨었을 때도 잠잠하던 학내 커뮤니티는 얼마 전 올라온 축제 공연 영상 하나로 들썩이고 있었다.



익명으로 올라온 영상은 꽤 먼 거리에서 찍었으나 구도나 화질의 상태로 보아 일반적인 핸드폰 카메라가 아닌, 전문 장비로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 물어보면 찾을 수 있을 테지만 중요한 것은 찍은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촬영할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공연 영상은 중간부터 찍혀있었다.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밴드 멤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화려하게 이어지는 기타 솔로와 조금 얼빠진 표정으로 기타리스트를 바라보는 멤버들의 구도가 화제였다. 아마추어라기엔 지나치게 뛰어난 솔로 후, 눈을 내리깔며 웃는 얼굴에 환호가 더욱 크게 번지는 부분은 이미 짧게 편집되어 손쓸 수 없을 만큼 커뮤니티 밖으로 퍼져있었다.



해당 영상에 남겨진 댓글은 반반이었다. 기타리스트의 연주에 감탄하며 기술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반, 나머지는 그의 이름이며 학교, 학과 등 신상을 캐묻는 것이었다.



“기숙사에서는 괜찮았어?”

“방 밖으로 안 나갔지.”

“역시 현명해.”

 


두 사람이 시답잖은 잡담을 주고받고 있자 강의 시간이 다 되었는지 교수와 조교가 강의실로 들어섰다. 익숙한 듯 랩탑과 음향기기를 세팅한 조교가 나가자 교수는 가벼운 인사 후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을 정리해둔 폴더를 열었다. 편곡 과제물이었다. 제출한 순서로 저장한 모양인지 이름이며 곡이 정리되지 않은 채 엉망진창이었다.



자연스레 가장 위로 시선이 향했다. 마제파. 리스트의 곡이다. 리스트라니. 생각나는 바가 있던 휘틀로다이우스가 흘긋 옆을 쳐다보자 역시 이쪽을 보려고 한 이자르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이 숨죽여 웃었다.



*

 


고등학생이 되는 첫날이었음에도 휘틀로다이우스는 별 감흥이 없는 얼굴로 강당에 앉아있었다. 못 보던 얼굴 몇몇이 생겨났을 뿐, 주변은 대부분 아는 얼굴들이었다. 초등학교, 더 빠르게는 유치원 시절부터 단순히 재능을 가졌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넘치는 아이들이 모인 학교였다. 비슷한 기준으로 진학하는 와중에 구성원이 극적으로 변한다면 이상한 일이다. 그는 선생님들이 빠져나가고 학생들만 남은 강당을 둘러보다가 옆에 있던 하데스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처음으로 수석을 놓친 소감은?”

“별거 없는데.”

 


하데스 또한 휘틀로다이우스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주변에 있던 아는 얼굴들이 두 사람을 흘끔거렸다. 괴팍한 천재 녀석이 히스테리라도 부리지 않을까 기대하는 듯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꼿꼿하게 앉아 앞을 응시하는 하데스를 보며 휘틀로다이우스가 팔짱을 꼈다.



“이상한 신고식에 휘말리지 않았으니 다행일지도 몰라.”

“신고식은 무슨. 꼴사나운 짓이지.”

 


하데스가 신랄하게 대꾸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손에 쥔 채로 의자 사이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성큼성큼 강당의 무대에 오른 그는 여유만만한 얼굴로 신입생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목에 맨 넥타이의 색으로 보아 3학년이었는데 그는 아무런 소개도, 설명도 없이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냈다. 시작이군. 휘틀로다이우스가 다리를 꼬고 앉아 그 위에 팔을 세우고는 턱을 걸쳤다. 삐딱한 자세에 하데스가 미간을 찡그렸지만 연주가 이어지자 지적하는 일은 없었다.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라 캄파넬라였다. 나름대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연주에 금세 놀라워하는 다른 신입생들과 달리 하데스는 코웃음을 쳤다.



신입생들의 기를 죽이겠답시고 파가니니를 고른 것은 알겠는데 연습이 부족했던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재능이 부족한 것인지(하데스는 분명 후자라고 생각했다.) 소리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미스는 기본이고 제대로 멜로디를 낸다고 해도 뭉개져 소음이나 다름없었다. 웅장한 척 숨기고 있지만, 하데스나 휘틀로다이우스 정도의 ‘귀’가 아니더라도 선배 중 몇몇은 저 어설픈 연주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연주를 마친 3학년에게 신입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저렇게 엉망인 사람이 3학년 수석은 아닐거야, 그치? 손뼉을 치며 신랄하게 웃는 휘틀로다이우스 옆에서 하데스 또한 마지못해 손뼉을 쳤다.



“1학년들의 답례가 듣고 싶은데.”

 


기다렸다는 듯 뒷자리에 앉은 선배들에게서 야유 섞인 함성이 터졌다. 신입생들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는 이들이 지목할 사람은 뻔했다. 그는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는 이를 바이올린 활로 가리켰다.

 


“거기 너. 신입생 수석.”

 


선배의 부름에 가만히 일어난 수석은 망설이거나 우물거리는 기색 없이 무대로 향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움직임을 쫓고 있음에도 붉은 머리칼 아래의 눈은 무덤덤했고 입술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여유와 함께 느껴지는 묘한 위압감에 올라오던 후배를 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선배들만큼이나, 같은 신입생들 또한 흥미로운 눈으로 수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얼굴을 익히고 지내는 것이 당연한 이들 사이에 뚝 떨어진 이방인. 괴팍한 천재, 하데스를 꺾고 수석을 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인물. 선배들이야 모르겠지만 함께 입학시험을 치른 이들은 그와 함께 온 ‘스승’을 보았더랬다.



흠잡을 데 없는 우아한 자세로 인사를 한 그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가볍게 손가락을 쥐었다 편 후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



첫 음의 타건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의아한 소리와 함께 웃음이 터졌다. 연주를 관람하는 매너가 아니었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라 캄파넬라. 리스트의 것이다. 대담하다면 대담한 선곡이었다.



그 배짱에 태평하게 웃고 있는 이들과 달리, 하데스와 휘틀로다이우스는 첫 음을 듣자마자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잦아든 웃음소리 사이로 섬세한 멜로디가 흐른다. 캄파넬라, 종소리였다. 이전의 연주자와 비교할 수 없는 서정적이고 우아한 음색에 어느샌가 모두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손가락이 건반을 스치듯 움직이고 있음에도 낭랑한 소리가 나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끝을 향하자, 속삭이듯 이어지던 연주는 강렬해졌다. 묵직한 화음이 공간을 채웠다. 같은 연주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극적인 변화에 모두가 홀린 듯 빠져들어 있었다.



마지막 음과 함께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석이 인사를 하자, 그제야 진심을 담은 박수갈채와 함께 정적이 깨졌다.



박수 소리 사이로 무대를 내려오는 수석을 보며 굳은 듯 가만히 앉아있던 하데스가 물었다.



“쟤 이름이 뭐였지?”

“나도 몰라.”

 


들어본 적 없던 연주에 휘틀로다이우스가 취한 사람처럼 웃었다.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이 강당을 빠져나가던 이자르를 붙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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