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How do I love thee ?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냐구요?

한번 세어 보도록 해요...







벌써 여름이 문턱까지 찾아온 나날.
어느덧 고3이 되어버린 진우는 그 날도 학교에서 남아 자습하고 있었다.


- 톡톡


학교에 마련되어 있는 정독실 복도쪽 맨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진우는 누군가가 창문을 두르리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거나,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고3이 공부하고 있는 정독실 창문을 누군가가 일부러 두드릴 이유가 없으니까.

진우는 오늘따라 북적거리는 듯한 복도 소음에 들고 있던 이어폰을 꺼내 귀에 꼽고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잔잔하게 들리는 노랫소리가 공부를 집중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 반짝


진우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책 속으로 빠져든지 얼마 되지 않았을때 그의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무음으로 해 놓아서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메세지가 온걸 바로 눈치챘다. 자꾸만 오늘따라 집중이 잘 안되어 신경이 날카로워 진 상태였던 진우는 메세지를 확인했다.


-마이노 : 진우야 밖으로 나와봐

민호에게서 온 톡이었다. 진우는 아까의 소음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았다.

정독실 창문은 다른 교실보다 꽤 높이 달려있어 왠만큼 키가 크지 않는 이상 안을 들여다보기 힘든 구조였다. 하지만 키가 큰 민호는 얼굴을 쏙 내민채 빙긋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머리 꼭대기 부분만 보였겠지만, 민호의 얼굴은 너무나도 잘 보인다.

진우는 이내 민호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다시 폰을 두드렸다.


- 바보 : 왜


간결한 진우의 문자.
 민호는 피식 웃었다. 자신이 아무리 옆에서 신호를 보내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눈치 채지 못하는 건지 반응이 없는 진우가 야속해 얼마전에 바꿔놓은 이름 때문이었다.

너무 잘 어울린다. 내 마음을 그렇게 내어 보여도 모르는 척 하는 그 녀석에게 정말로 잘 어울린다.

당연히 진우가 문자 하나에 쉽게 걸어 나올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안그래도 요즘 공부하느라 신경이 곤두서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민호는 어깨를 들썩하더니 다시 문자를 보낸다.


- 마이노 : 아이고오~ 천재님, 모르는게 있어서 여쭐려고요.


톡을 확인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봐버린 진우는 무시하는 척 다시 책상속으로 고개를 파 묻었지만 이미 공부가 안되기 시작했다.
진우는 속상한 눈을 하고는 다시 복도쪽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자신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민호가 웃으면서 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은 A4용지 하나를 창문에 밀착 시키며  ‘이걸 모르겠어!’ 라는 표정으로 종이를 가리켜댔다. 얼핏 보니 영어 문제인 듯도 싶다.


“ 하아.. 송민호 이 녀석..”


진우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근들어 더욱, 하루 하루 민호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여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고3이 되니 이제 비행청소년 놀이는 그만 두기로 했는지 학교를 빠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자신의 근처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공부에 방해된다고 으르렁 거려보아도 민호는 웃으면서

- 왜? 내가 너무 잘생겨서 집중이 안돼?

라는 넋나간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해맑게 웃으면서.


집중이 안되는건 공부뿐만이 아니었다. 생활도 그랬다.
2층 복도를 사이에두고 진우의 방과 민호의 방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늘 계단에서 우당탕탕 급히 뛰어들어오는 소리가 나면 3초를 세기도 전에 진우의 방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


-우리 진우 집에 있었네. 나 안보고 싶었어?


그런 생활이 반복되니 옷을 갈아입다가도, 씻고 나오다가도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만 들리면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발걸음 소리 끝에 자신의 방 문이 열리지 않으면 이상하게 긴장이 탁 풀리면서 서운한건 무엇때문인지.

그렇게도 학교에 같이 가는것을 싫어했는데 아침마다 실실거리는 녀석이 옆에서서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줄줄 하며 함께 걸어주는 길이 싫지 않았다. 야간 자습을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아침에 분명 관심없었던 그의 실없는 이야기들이 왜 걸음걸음마다 생각이 나는지.

진우는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그런 생각을 지우려고 했다.
곧 수능이다.
그렇게 바랐던 집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
그런 생각으로 애써 모든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 뭔데? 영어?"


진우는 정독실 문을 조심히 닫으며 이렇다 저렇다 인사도 없이 대뜸 말했다.
민호의 바보같은 문자를 보고서 이제 좀 공부 하려나 싶어 도와줘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웃기다.


민호는 이런 미끼라도 없으면 공부하는 진우를 불러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며칠때 복도에 서서 공부하는 그의 모습만 바라보는 건 그만큼이나 힘들었다.

조그만한 머리를 공부하는 내내 한번 들지도 않았다. 혹시나 얼굴이라도 보려나 싶어서 십분 이십분 기다려도 보이는 건 그의 오똑한 콧날과 펜을 곱게 쥔 손 뿐이었다.

집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도 보고 싶었다. 그가 공부하는 모습 그 모든 모습도 다 눈에 담고 싶었다.

민호는 자신이 미리 준비한 미끼가 진우를 낚은 것에 대해 흐뭇해했다. 자신을 보며 싱글 싱글 웃는 민호를 진우는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봤다.


"뭐야, 별거 아니면 나 들어간다"
"아, 아냐~~ 진짜 중요한 거야. 일단 여기 앉아서 이거 먹어."

민호는 주머니에서 피로회복 음료를 꺼내서 진우에게 내밀었다. 진우가 거절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받아들며 복도에 있던 테이블에 앉았다. 민호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아서 자신도 음료를 마신다.

꿀꺽꿀꺽
그가 한모금씩 마실때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젓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온다. 진우는 그의 그런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 아, 덥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너스레를 떠는 민호.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교복 단추도 불량하게 두 개나 풀어놓아서 그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목선이 다 드러나 있었다. 덥다며 덥다며 옷을 펄럭일 때마다 살짝 살짝 보이는 그의 쇄골이 눈에 들어온다. 진우는 자신이 보기에도 남자다운 매력적인 그의 모습에 잠시 눈길을 빼앗겼다.

 
“ 진우야.”
“ 어, 응.”

민호는 진우의 눈앞으로 손가락 하나를 흔들어 대며 그의 불렀다. 넋나간 사람처럼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진우의 시선이 의아했다. 한번도 그런식으로 자신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진우는 당황하며 눈앞으로 왔다갔다 하던 민호의 손가락을 툭 쳤다. 민호는 진한 눈썹을 실룩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는다.

“ 너 나보고 있었구나? ”
" 뭐래. 내 눈앞에 커다란 너가 있는거 뿐이거든."
“ 아닌거 같은데? 얼굴이 빨개졌는데?"
" 더워서. 쓸데없는 말 할거면 진짜 갈거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우. 민호는 웃으며 그의 손목을 잡고는 다시 끌어다 앉혔다.


“ 아님 말고. 공부 한다고 그리 갇혀 있으면 정신 건강에 나빠.”
“ 수능이 얼마 안남았는데 너처럼 공부 안하는 것도 그닥 좋진 않거든.”
“ 난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진우는 강아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능청 스럽게 말하는 민호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성적이 좋은 진우가 공부를 가르쳐 줄거니 괜찮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뜻인지는 물어 보지 않기로 했다. 늘, 캐묻기 시작하면 페이스에 말려 버리니까.

얼마전에도.. 주말에 공부한다고 방에 있던 진우의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는 앉아서 그가 공부하는 걸 턱을 괴고 있던 민호였다. 그런 그가 너무너무 신경쓰이던 진우는 날카롭게 말했다.

" 야, 넌 주말인데 데이트 안해? 공부해야돼 꺼져."
" 데이트 하는 중이야."
" 어디서?"
" 지금. 니 옆에서. 네가 내 애인인거 몰랐어?"
" 미친놈."
" 미친놈 말고, 허니 말고, 자기 아니면 달링 이라고 불러봐."
" 이 새끼가 진짜.."


늘 그렇게 진우의 험악한 말로 끝나는 나날이었지만, 그런말들이 반복 될 수록 세뇌당하는 것처럼 자꾸만 그러려니 하게 된다.



진우는 시계를 문득 보았다. 10시.. 벌써 시간이 늦었다. 진우는 휴대전화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 빨리 안 물어 볼거면 나 들어갈거야. 시간 넘 늦다. 마무리하고 가야돼.”
“ 아아, 안돼 안돼. 이거 꼭 봐 줘.”

민호는 다급히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종이를 진우에게 내밀었다. 미끼인줄만 알았는데 뭔가 영어가 잔뜩 씌여져 있었다.
 
진우는 미간에 얕은 주름을 만들면서 유심히 그 것을 보았다.


“ How Do I Love Thee... 음.. 난 처음 보는 건데?  ”


제목을 낮은 소리로 읊어보는 진우는 생소하다는 표정으로 민호에게 물었다. 민호는 그저 아무말없이 싱글 거리며 자신을 본다.


“ 쓸데 없는 노래 가사 같은 거면 그냥 들어갈거야.”
“ 노래 가사 아냐! 중요한 거야!”


진우가 종이를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자, 민호는 극구 손을 내저으며 그에게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의 태도에 진우는 하는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종이를 들고서 읽어본다.


“ 그래? 그럼.. 제목은 얼마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냐구요? 라는 뜻이네. 영문학 지문 할때 본적 있어. Thee 가 you라는 뜻이야."
“ 오오~ 역시, 우리 진우 멋져."

진우는 테이블 밑으로 발을 뻗어 민호의 정강이를 한번 걷어 찼다.
우리는 무슨.. 진우는 민호를 흘겨 보았다. 걷어 차인 정강이가 아플텐데도 그저 싱글 싱글. 진우는 다시 종이를 보고는 천천히 해석을 해 주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노래 가사 같은 느낌인데 분명히 쓸데없는 자료인것 같은데 민호가 아니라고 하니 잠자코 해석해 보는 수 밖에.


How do I love thee?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냐구요?
Let me count the ways.
 한번 세어 보도록 할게요.

I love thee to the depth and breadth and height
My soul can reach, when feeling out of sight
For the ends of Being and ideal Grace.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이상적인 고결함의 끝에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까지.


I love thee to the level of every day's
Most quiet need, by sun and candlelight.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햇살과 촛불 옆에서 하루하루의 가장 고요함이 필요한 것 만큼.

I love thee freely, as men strive for Right;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자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처럼.

I love thee purely, as they turn from Praise.
칭찬을 받을 때의 마음처럼 순수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I love with a passion put to use
In my old griefs, and with my childhood's faith.
나의 오래된 슬픔에 쏟았던 열정과 어린 시절의 신앙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I love thee with a love I seemed to lose
With my lost saints,
잊혀진 성인들과 함께 잊혀 졌다고 생각되었던 나의 그 사랑으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I love thee with the breath, Smiles, tears, of all my life! ---
내 모든 삶에서의 숨결, 웃음, 눈물로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 눈물로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기까지 읽어주던 진우는 더 이상 읽지 못하고 가만히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한줄이 남았지만 차마 읽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민호를 바라볼 자신도 없다. 노래 가사냐고 면박을 줄 마음도 없었다.
그저 이 글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길 바랄 뿐.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민호는 부드럽게 진우는 재촉한다.

“ 뭐해, 한줄 남았잖아~ 읽어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평소의 장난기가 가득 담긴 그런 목소리가 아니라, 진지하고 부드러운. 갓 볶아낸 커피향처럼 감미로운 그런 진우의 목소리.
진우는 대답대신 민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이거 뭐야.”
“ 시야. 내가 좋아하는.”

시라니. 민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민호는 씨익 웃으면서 진우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가져간다.

“ 네가 안 읽으면 내가 읽지 뭐.”

그런 민호를 아무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and, if God choose, I shall but love thee better after death.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면, 나는 죽은 후에도 당신을 사랑 하겠습니다."


이 시의 구절들과 민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의 생각이 무너져가는게 느껴진다. 그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이 담긴 시를 자신에게 읊어주는 민호의 모습에 심장이 제 멋대로 뛰기 시작한다.
아까 그의 몸을 보고 호흡이 힘들었던 것 처럼.

시를 마저 읽어주고는 그윽한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민호의 시선을 본 진우는 빨개진 얼굴을 애써 부채질 하며 말했다.

“ 뭐, 뭐야. 손발이 오그라 드는 것 같아.”
“ 너한테 주는 내 마음 이야. 나 간다.”


민호는 환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종이를 곱게 접어 진우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멋지게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민호.
그의 뒷모습. 키가 저렇게나 컸나? 어깨가 저렇게나 넓었나?
새삼 스럽게 그의 모습이 눈에 각인되듯 들어온다.


- 내 마음이야.

민호의 말들이 자신에게 다시 메아리쳐 들린다.


- 너랑 나랑은 남이니까. 이제 고민 같은 건 안해.

- 너에게 다가 갈 거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 너를 위해 착한 아이가 될게.

- 좋아한다고 했잖아. 다른 눈으로 널 본다고.


이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민호의 말들이, 그저 실없는 농담 쯤으로 받아들였었던 그의 지난 모든 말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한다.


-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냐구요?...


사랑..
사랑..


진우는 머릿속이 멍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약간의 두통이 머리를 두드린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지러운 두통이 사라지길,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그의 목소리가 사라지길 기다리며..

손에 놓여진 그의 쪽지는 그대로 쥔채로.







“ 엄마, 진우 왔어요?”
“ 아, 아까. 평소보다 일찍 왔는데 안색이 안 좋던데... 아픈가.”
“ 아프다구요?”


현관으로 들어서 신발을 벗으며 제일 먼저 진우의 귀가여부를 묻는 민호에게 어머니는 대답했다. 안색이 안 좋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듯 되묻는 민호.

요즘 눈에 띌 정도로 부쩍 진우를 챙겨대는 민호의 행동이 그녀의 마음에 조금 걸린다. 그녀가 채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민호는 쿵쾅 거리며 2층으로 급히 뛰어간다.


“ 김진우!”


문을 벌컥 열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단 하나 뿐이다. 이 집안에서. 자신이 마음을 주지 않은 아버지, 어머니가 진우의 방 출입을 하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단 하나 뿐이다. 송민호.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또 머리가 지끈 거리기 시작한다. 몸이 으슬 으슬 춥다. 진우는 못들은 체 하며 이불을 끌어 얼굴을 덮었다.
묵직한 무언가가 침대에 걸터 앉는게 느껴진다. 손이 쑥 하고 이불을 뚫고 들어와 자신의 이마위에 얹혀졌다. 서늘한 그 감촉에 몸의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한다.


“ 열나네....”
“ 신경쓰지말고 가.”
“ 에어컨 바람 너무 쐬서 그런가... 흠.. 약은 먹었어?”
“ 가라고.”


자신의 말에 이마를 짚었던 민호의 온기가 멀어졌다. 다시 몸에 오한이 밀려든다. 민호가 침대 옆에서 일어서는 것도 느껴진다. 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제발 가라고.. 송민호.
내 머릿속을 흔들어 놓지 말란 말이야.


“ 이따가 다시 올게. 좀 쉬고 있어.”


왠지 힘이 없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민호는 방문을 살짝 닫고 나왔다.
닫기 직전 문틈으로 확인한 진우는 내내 돌아 누워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
왜 아픈걸까.
그저 감기 일 뿐일텐데도 진우의 이마에서 나는 열기가 자신의 손을 타고 몸 안으로 흡수 되었을 때 그로 인해 심장이 타 버리는 것 같다.


“아프지마라, 진우야."

민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아래층을 향해 내려갔다.


“  진우 녀석은 아픈 거냐?”
“ 아, 그런가봐요. 감긴가.. 열도 좀 나고.”


거실에서 과일을 먹고 있던 아버지께서 민호의 힘없는 표정을 보며 물었다. 아버지는 별 다른 말이 더 하지 않고 보던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거실에 놓여진 서랍에서 약을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제가 갈게요.”
“ 민호 너는 이제 왔잖아. 그냥 씻고 쉬어.”
“ 진우 한테는 제가 간다고요.”
“ 민호야. 형한테 진우가 뭐니?”
“ 아, 어쨌든 진우 한테는 제가 갈테니 걱정 마세요.”


어머니께 약을 뺏다시피 해서 돌아서는 민호의 뒷모습을 보는 어머니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렷을 때는 형이라고 부르더니 언젠가 부터는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저 동생이 형을 챙기는 거라고 생각해도 좋지만, 그것 보다는 뭔가 다른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어머니는 애써 드는 기분을 지우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주방에서 뭔가 퉁탕 거리더니 조그만 그릇에 찬물을 담고, 수건까지 챙겨 2층으로 올라가는 민호를 보니 또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 여보, 요즘 민호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 뭐가”
“ 부쩍 진우를 챙겨요.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 아프니까 그렇겠지. 뭐 걱정말아요. 형제끼리 이제 좀 잘 지내려 하나 보니.”

남편의 말에 그녀는 불안함을 지우려고 했다.
그녀의 눈은 아들의 뒷 모습을 쫓았다.



-  형, 민호는 형이 좋아.


나는 너 싫어, 저리가.
내가 어린 민호를 밀어 버렸다.
때문에 바닥에 넘어진 그가 일어나지 않는다. 놀란 마음에 민호를 흔들어 깨웠다. 갑자기 어느덧 키가 훌쩍 커버린 지금의 민호가 자신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 진우야, 너 왜 자꾸 나를 밀어내려고 해.

그런거 아니야.

- 너무 힘들어. 이제는..


그렇게 말하며 민호는 자신의 눈앞에서 돌아섰다.

축쳐진 어깨가 슬프다.

그를 잡으려고 손을 뻗으려 했지만 마비 된 손은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 하지만 목소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호는 자꾸만 멀어져 간다.


" 하아.. 하아.. "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진우는 감았던 눈을 떴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다. 눈물이라도 흘린걸까.

바보 같은 꿈이다.
그런데 바보 같게도 심장이 조여온다.


-툭


못난 눈물을 닦으려고 손을 얼굴로 가져갈 때 툭 하고 머리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하얀색의 수건이었다.
올려놓은지 조금 되었는지 물기가 조금 말라있었다.
몸이 으슬 으슬 추운 걸 보니 아팠던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누군가가 아픈 자신을 위해 차가운 물 수건을 이마에 올려주었던 것 같다.

진우는 옆을 살펴보았다. 침대 앞에 앉아 엎드려 있는 사람. 불을 켜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 송민호."

그의 이름을 나지막히 불러보지만 그는 잠이 깊게 들었는지 미동을 하지 않는다. 키도 큰 녀석이 그리 높지 않은 침대에 엎드려 있는 게 불편해 보인다.

민호를 깨우려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려보았다. 꿈에서 보였던 그 축쳐졌던 슬픈 어깨를.


“ 으응..”


민호는 얕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민호의 옆모습이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춰 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다.

고른 숨소리를 내는 민호. 꿈에서와는 달리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감고 있지만 늘 환하게 웃어주는 그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똑한 코, 예쁜 입술. 진우야라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유일한 입술.


그제서야 진우는 민호가 여전히 교복차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수건을 얼마나 적셔댔는지 옷 여기저기에 물이 튀어간 자국들이 남아있다. 아픈 자신을 간호하겠다고 설쳐대다 잠이 든 것 같다.


아까의 꿈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게 모질게 대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민호가 힘들다며 떠나갔다. 그러나 자신은 잡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진짜로 떠나갈 것이다. 언젠가는 둘 다 성인이 될 것이고, 우리를 형제로 묶어줄 끈이 사라지고 나면 한 공간에 함께 매여있는 이유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가슴이 아프다.
문득, 정말로 민호가 꿈 속의 그 장면처럼 뒤돌아서 떠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숨이 멎어 버릴 것 같다. 그렇게도 바라던 일이었는데, 늘 입버릇 처럼 민호가 사라져버렸으면, 내 삶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이런일이 없었을 거라고 속으로 으르렁 거렸는데. 지금은 그가 떠난다는 생각에 몸이 떨려온다.

낮의 일이 생각 난다. 유치하지만 시를 적어 자신에게 건네주던 민호.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밤 새도록 자신의 옆에 있었던 건가.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민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짧게 깍은 아랫머리와 달리 윗머리는 길어서 손으로 넘기니 부드럽게 자신의 손가락에 휘감겨온다.

달빛에 비치는 그의 옆 얼굴을 손으로 살짝 만져보았다. 손끝이 찌릿찌릿 전기가 오는 것 처럼 감각이 곤두선다.


이 녀석이 늘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
이 집을 떠나도, 나와 이 녀석이 아무 관계 없는 사이가 되어도.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우는 마음속으로 드는 그 감정을 뭐가 설명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 민..민호야..”


처음으로 불러보는 그의 이름. 항상 그에게는 아무 감정 없다는 듯 오히려 싫어한다는 듯 송민호라고 성까지 붙여 불렀었으니까.
이름으로 불러보라고 한참을 칭얼거리던 민호도 이제는 포기 했는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었다.


“ 민호야..”


한번 부르기 시작하니 무언가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게 느껴진다.
민호라는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가슴이 저려온다. 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닫혀진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감정의 홍수 상태가 되는 것이 느껴진다.


“ 민호야..”


진우는 그의 이름이 마치 마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되뇌었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잠을 자고 있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 민호가 어디갔지..”


민호의 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어머니는 이상하다는 듯 말하며 문을 살며시 닫았다. 밤중에 어딘가로 나가는 일도 종종 있었기에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때 나갔을 수도 있는데..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그녀는 다시 방향을 바꾸어 진우의 방으로 향했다. 어렷을 때부터 자신의 방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기에 한번도 그의 방엔 가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진우의 방문앞에 서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고작 아들의 방문을 여는 것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떨린다.


-달칵
최대한 조용히, 살며시 문을 열었다.

“ 아.”

그녀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입을 막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침대 맡에 엎드려 잠들어있는 그녀의 아들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 몸을 숙이고 있는 진우가 눈에 보였다. 그저 민호를 살피는 거라고 하기엔 얼굴과 얼굴이 너무 가깝다. 진우가 눈을 살며시 감고 민호의 이마에 입맞추고 있는 장면이 너무나 잘 보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살며시 문을 닫았다.


“ 진우가.. 우리 아들에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진우의 방에서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는 아래층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로 내려갔다.


“ 믿을 수 없어... 아니야.. 잘못 본거야..”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본문에 삽입된 시는 Elizabeth Barret Browning의 "How do I love thee"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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