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들이 들이닥쳤을 때, 나는 탄 냄비에 물을 담고 알약을 쏟아붓고 가스밸브를 열고 있는 중이었다. 나를 낚아챘던 깡패의 팔이 거미의 여러 개인 다리처럼 보이는 환각에 휩싸였을 때 …… 거미줄에 걸린 흰나비가 나타났다. 

 구체성을 응고시킨 알약은 나를 쉽게 편집증적 환상으로 보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장날 즈음에 깨달은 건, 응고시킨 알약이 아니라 물에 서서히 녹고 있을 그 알약이 나를 환상으로 도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거미들의 여러 개 달린 팔을 뿌리치고 가스레인지의 불을 켰어야 했다. 나는 내 죽음이 녹는 과정을 적요 속에 지켜보았어야 했다.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아 뼈아프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내겐 뼛가루뿐이야.


 나는 이렇게 단념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 그을린 벽지를 응시하면서, 라면을 끓인 적도 있었다. 불어터진 라면 발을 보고 있노라면, 헛구역질이 나왔다. 아버지의 뇌를 이해해보려고 애썼지만 아버지의 생각에 대한 나의 시선의 각도는, 징글맞다. 이뿐이었다. 터무니없는 액수를 태우고 아버지는 어떻게 뼛가루로 남겨지기를 원했던 것일까? 차라리 그는 바닷속에 잠겨 물고기의 밥이 되는 것이 이로웠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끝났을 때 나는 피를 짜는 느낌이었다. 내게 남겨진 건 악의의 안간힘일 뿐이야.


 기적을 바라기도 했었다. 이 봄볕의 따스한 바람 줄기 같은, 그런 어미의 숨결인 기적을. 그 어미의 숨이 빚더미를 지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페이드아웃시켜주길. 그래서 내가 이 텅 빈 방을 위에서 지켜보게 되기를. 낙서처럼 아무도 보지 못할 유서를 끄적였다. 다음 날 잠에서깨면 방은 연주가 끝난 콘서트홀처럼 적막했다. 홀로 죽음을 감당하는 나를 따스한 시선으로 지켜주기를 바라던 것이 내가 바라던 기적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지난 밤 이 방의 음악은 내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그의 울음소리였다.


  내가 끌려온 곳은 공사를 채 마치지 못한 폐건물이었다. 힘을 잃었는데 거미들은 나를 점점 더 옭아맨다. 층계참에 올라서면 뻥 뚫린 벽 너머로 무성한 잡초가 보였다. 그때, 흙먼지와 파편이 가득한 폐건물의 바닥에 수놓아진 이 볕이 애처로웠다. 나는 넘보지 못할 기적에 여전히 붙들려 있는 것일까? 딛어야 할 울퉁불퉁한 계단이 낯설어진다. 나는 기어이 죽음이 끔찍해진다.

 사내들이 아무도 없는 공간 쪽으로 나를 민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빠오르는 숨을 가누기 위해 애쓰는 나를 둔 채 그들의 의미없는 욕지거리가 들려온다. 저놈은, 감옥에 출소한 새끼마냥 굴어. 삶이 감옥이 아니면 무엇이냐? 개소리 지껄이네. 이 새끼?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는데, 멀쩡히 살아있을 그들은 삶을 쉽게, 말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나와 같이 침묵한 채 내게로 걸어오는 사람은  
 오세훈이었다.

 너구나. 

 결국엔 너야.

 내 앞에 멈춰 담배를 튕겨낸 오세훈은, 퍼지는 담배연기처럼 나를 내려다본다.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다. 그래서 시선을 비낀 채, 서로의 등 너머를 본다. 기어이 나의 시선은 그의 검은 와이셔츠의 부근에 머문다. 눈동자가 쉽게 움직이지 않을 목젖으로 옮겨진다. 나는 기다린다. 변심한 너의 마지막 말을, 어서 지껄여줘. 

 나를 안식시켜줘.

 벨소리가 울리는 안주머니로 그의 긴 흰 손이 사라졌을 때 줄곧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네"


 쥔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가 칼을 쥔다. 그래, 그렇게 목을 그어줘. 내 각막은 싱싱할 거야. 마지막엔 꼭 눈을 감을게. 너라는 볕에 눈이 멀지 않도록.

 "경수야."
 "……"
 "어느 겨울 초저녁 가로등에 불이 켜질 때, 그 빛이 네 모습을 내게 보여줬어. 사위를 분간할 수 있는 어둠이었는데, 무얼 더 밝히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경수, 네가 있는거 있지."

"……"

 "상처 투성이 인채로 한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있는 네가 고개를 숙이고 내게로 오고 있었어. 네가 나를 스칠 찰나에 우리는 시선이 마주쳤고 그러자 넌 더 빨리 내게서 멀어졌지."

"……" 

 "그때 현기증을 느꼈던 건 가로등 불빛 아래 운명적으로 나타난 너로 인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네가 스치자 알아차렸던, 누구든지 잡고 싶었던 절박했던 나의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2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너 감당 못 해."
"…… 괜찮아. 이렇게 돌아왔잖아 너."

 

 나는 칼을 쥐고 환히 웃으며 빈 손을 내게 내미는 그의 모습에 섬뜩해졌다.  ……네가 한 짓이었어? 이명이 울리는 가운데에 음악이 퍼진다. 내 파탄의 흐느낌이. 그래, 차라리 내 아비는 바닷속에 잠겨 물고기의 밥이 되는 것이 이로웠을거야. 이렇게 말이 끝났을 때에는 나는, 피를 짜는 느낌이었고, 정말 내게 남겨진 건 악의의 안간힘일 뿐이었어. 나는 내게 내민 그의 빈 손을 쳐내고 칼을 낚아챘다. 이젠 나는 그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어야만 해.

"나는 너를 속이지 않았어."

"……"

 "내 손목에 잡힌 너는 그 초저녁 골목길에서 누가 엿들을새라 반쯤 무너진 담벼락에 숨어 내게 속삭였어.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쉽게 지을 수 있는 죄라고 말해달라고."

"순전히, 그냥 말이었어. 그렇다고 진짜 사람을 죽여?"

"네 아버지는 그 빚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 뿐이야."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든 사람이 왜 하필 너였어?"

"……"  

 "악마같은 새끼. 그때 너는 이렇게 대답했지. 쉽게 지을 수 있는 죄라고. 그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날 밤 꿈까지 꿨어. 등잔불에서 쉬는 꿈을 말이야."

 

그가 쉽게도 칼을 든 내 손을 쉽게 낚아챘다.


"더 숨막히게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탓하는 게 아니라는거야."

"너는 나를 속이지 않았어. 나처럼. 단 한순간도."

 

 나는 그의 어깨를 치고 달려나갔다. 저 볕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그러나 풀썩이는 익숙한 체취. 뼈마디에 힘이 들어가 부러질 것 같은 내 몸을 안은 오세훈. 그의 숨으로 목덜미는 타들어 간다. …… 기어이, 목덜미가 젖는다. 재를 탄 물을 들이킨다. 나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그의 가슴을 친다. 비명처럼 고개가 꺾였을 때, 흩날리는 나비의 가루가 내려앉는다. 뜬 눈으로, 나는 뼛가루를 담았다.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것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이다.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제 공격을 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프란츠의 사랑이란 언제 공격이 올지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됴른을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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