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마피아AU (번견 바쿠고 X 후계자 토도로키)

_ R15






눅눅해진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끈적끈적한 것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물귀신이 아래로 잡아끄는 듯 섬뜩한 기분이 들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미 피를 많이 흘려버린 탓에 바로 눈앞에 있는 것조차 희미해져간다. 그럼에도 그는 움직였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을 향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향해.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 달빛을 머금어 더욱 빛나는 눈동자는 마치 짐승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한 곳을 향해 가던 걸음은 건물의 가장 꼭대기 층까지 와서야 멈추었다. 벌써 몇 층을 걸어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숨이 찰 법도 했지만 남자는 숨을 고르는 잠깐의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얼굴들, 지독한 혈향血香, 눅눅한 공기, 반짝이는 나이프, 투박한 총. 몇 번이나 봤던 장면이 이렇게나 낯선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으니까.

남자는 조용히 입을 벌려 그의 이름을 부른다. 무리의 중심에서 핏방울을 뚝뚝 흘리며 반쯤 감은 눈으로 자신과 마주하는 그의 이름을, 아주 작게 불렀다. 토도로키. 이름을 불린 그가 삐뚤어졌던 고개를 꺾어 빙그레 웃었다. 사과는 하지 않는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대신, 남자가 좋아할 만한 말을 위해 입을 벌린다. 죽여도 돼.

그것은 허락이었고, 또한 미학이었다.

 





 번견의 미학

Written by. 비에

 





누군가는 말했다. 마피아의 삶이란 아주 지독한 것이라고. 책을 덮은 토도로키는 그 말이 터무니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모순적인 두 개의 생각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린다. 지독하다는 말을 정의할 수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지독하기에.

피로 얼룩진 모서리와 책꽂이의 각도를 맞추어 책을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협상을 이유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협상을 하는 자리치고는 서재 분위기가 나는 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피를 낼 것이라면 가능한 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뿌리고 싶었다.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는 게 결말이고 운명이라면 과정이나마 조금쯤은 틀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토도로키가 웃으며 손바닥을 마주쳐 털었다. 탁, 탁. 손바닥끼리 부딪쳐 나는 소리가 빈 공간을 울린다. 섬뜩하게 퍼지는 소리에 죽은 자들의 향이 더해졌다. 이제는 익숙해져 위화감 하나 없는 향이 토도로키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가 사라진다. 책의 저자는 이런 걸 두고 지독하다고 했을지도 모르지. 지독한 냄새. 삶이 전부 빠져나간 그것은 살아있을 때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치가 없는 것에 일일이 시간을 기울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토도로키가 걸음을 옮겨 문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부터 완전히 죽지 않은 것의 소리가 났다. 형태를 알 수 없는 말은 죽음의 경계에 선 자만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말이 아닌 단순한 소리에 가까운 그것에 토도로키가 몸을 돌렸다. 그의 구두 소리가 다시 빈 공간을 채운다.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바쿠고가 없으니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어두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것은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내리치자 조금씩 존재를 끌어올렸다. 한 쪽 얼굴이 잘려져 나간 끔찍한 형상에도 토도로키는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제 얼굴 위로 익숙한 표정을 만들었다. 명백한 조소嘲笑.

 

“반대야.”

 

그들이 마지막으로 지었던 표정을 떠올린다. 대체로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거기에는 당혹감이 함께 있었다. 토도로키는 우스웠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것도, 그들이 지었던 표정도. 그를 지키는 개番犬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아주 약간의 가능성을 가진 것 자체가 조소의 이유가 되었다.

토도로키는 손을 뻗어 남자의 잘려나간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물컹한 감각이 기분 나쁘다. 그럼에도 그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 위로는 비스듬한 그림자가 졌다. 구름이 다시 달을 가리는 시간이었다. 야속하게도 달은 꼭 필요할 때 빛을 내어주지 않는다. 토도로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바쿠고가 있었어야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었을 거다.”

 

이제는 완전히 죽은 자가 되어 소리조차 뱉어내지 못하는 것이 마침내 토도로키의 눈앞에서 무너져 내린다. 죽지 못한 무언가는 삶의 향이 나는 곳으로 달렸다. 그 소리가 멀어지자 토도로키는 죽지 못한 것이 지나간 자리를 응시했다. 표정에 내려앉았던 조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지막 말이 제일 중요했는데 제대로 들었을까. 들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더니 땀이 났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자 끈적끈적한 기분이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기분 나쁘네.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던 토도로키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움직일수록 시끄러워서, 토도로키는 밖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밖은 어두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다시 구름이 걷히고 달이 빛을 내어주었으니 더 멀리 볼 수도 있게 되었다. 토도로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굳이 멀리까지 볼 필요도 없다. 자신과 제일 가까운 시체만 보더라도 상황은 눈에 빤히 들어왔으니까.

 

“바쿠고.”

 

토도로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그만하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바쿠고는 아마도 마지막일 남자의 머리를 날려버린 뒤 토도로키에게로 다가왔다. 그에게서 피 냄새가 났다. 게다가 깨끗했던 와이셔츠 군데군데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토도로키의 것이 아닌 핏자국에 바쿠고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난다.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으르렁거리는 것이 꼭 짐승 같았다. 그 모습은 날카로운 이빨도, 발톱도 없는 인간의 것이었지만 분명, 그것은 하나의 짐승이었다. 토도로키는 길게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 약간의 시간 사이로 그는 제 짐승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지금과 같이, 흉흉한 붉은 빛으로 토도로키를 똑바로 마주하던 아이의 모습을. 짐승도 새끼는 귀엽다던데 너는 새끼였을 때도 귀엽지 않았지. 그런 점이 귀여웠지만. 입 밖으로 내면 분명히 화를 낼 터인 말이라 토도로키는 입술만 오물거리며 웃었다.

토도로키의 손에 제 볼을 비비던 바쿠고가 돌연 그의 손을 잡아 입술로 끌어당겼다. 손바닥에 닿는 입술의 감촉이 거칠다. 간지러워 키득키득 웃었더니 바쿠고의 눈이 무언가를 담는다. 말 좀 들어.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토도로키가 작게 속삭였다.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네.

 

“도련님이 움직일 필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너한테 전부 맡길 정도도 아니었지.”

 

바쿠고를 지나친 몸에서 분명한 혈향이 감돌았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바쿠고가 빠르게 뒤따라갔다. 토도로키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와 발맞춰 걷는 것은 바쿠고의 오랜 버릇이었다. 토도로키에게 주워져 온 그 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가지고 있는 아주 오랜 버릇. 토도로키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바쿠고는 자신이 토도로키 쇼토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때는 늘 그의 뒤에서 걸었다.

토도로키는 바쿠고를 특별하다고 했다. 애초에 토도로키는 제 아버지와 달리 위아래 서열 관계에 엄격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그 중에서도 바쿠고는 특별했다. 아무것도 담지 않는 눈동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불길을 담은 눈동자를 봤을 때부터 토도로키에게 바쿠고 카츠키라는 남자는 특별했다.

 

 






태생이 가난하고 불행하다. 바쿠고는 일곱 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말하곤 했다. 어디선가 주워들어온 그럴싸한 말들로 포장한 자신의 인생은 말 따위로 포장한 보람도 없이 초라했다. 초라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울면 지는 거니까. 또 어디선가 들었던 멋있는 말을 중얼거리며 바쿠고는 굵은 쇳덩이를 휘둘렀다.

바쿠고가 가진 최초의 기억은 핏빛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실제 핏빛. 눈앞이 온통 붉게 물들어 다른 색깔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저 멀리로, 아주 희미하게 사람의 형체를 한 것들이 움찔거리다가 서서히 검게 사라졌을 뿐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부모였을 그것들에 대한 상실은 바쿠고를 오래 괴롭히지 않았다. 상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에 붙이는 단어는 아니었다.

바쿠고를 괴롭혔던 것은 기억조차 희미한 상실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혹은 갖게 되어버린 것들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거울 속 자신이 있었다. 최초의 기억에 사로잡혔다가 겨우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자신은 아마도, 이미 일곱 살이 되어있었다.

마피아의 영역이라며,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는 지역은 예상 외로 음산하고 무시무시하지만은 않았다. 부모들은 제 아이들에게 그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말라며 단단히 일러주곤 했지만 사실 그 곳은 도시에서 가장 화려하고 눈부시게 빛났다. 나라의 정치, 경제의 끈을 잡고 있는 인물들이 모이는 곳이 화려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모습을 잠깐이라도 본 아이들은 위험하다는 부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곧잘 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그곳의 이면을 보지 못한 채 관습처럼, 혹은 약속처럼 언젠가 태어날 그들의 아이들에게 제 부모와 같은 말을 하리라.

 

“아무리 배운 게 없어도 한 번쯤은 생각했을 거야. 왜 자신들은 보호받지 못하는가, 왜 이 나라는 자신들을 봐주지 않는가.”

 

양쪽 눈동자의 색을 달리 한 소년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언뜻 보면 그것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바쿠고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명백한 조소. 그래.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자신들보다 위에 있는 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짓는 비웃음. 바쿠고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친 조소의 주인은 제 키의 몇 배나 되는 남자들을 뒤로 물렸다. 바쿠고에게 있어서 그런 남자들은 전부, 뛰어넘을 수 없어 몸을 웅크리고 맞아야 했던 기억 그 자체였다. 그들을 손짓 몇 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소년의 정체에 대해, 바쿠고는 눈을 빛냈다.

토도로키가 텅 빈 눈동자 사이에서 흉흉한 붉음을 찾아낸다. 잿빛 사이에 있었기에 그 붉음은 더욱 선명하게 타오를 수 있었다.

 

“겉이 화려하다는 건 그만큼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는 거야.”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소년의 입에서는 어른의 대사가 터졌다. 달빛 아래 같은 그림자 위에 서 있어도 바쿠고와 토도로키의 위치는 확연하게 달랐다.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계단의 마지막을 내려온 토도로키는 아이들 중 가장 앞에 있는 바쿠고에게 다가갔다. 토도로키가 걸음을 앞으로 향할수록 아이들은 전부 뒤로 물러났지만 바쿠고만은 그 자리에서 꼼짝 하지 않았다.

 

“더러운 속살을 감추기 위해 사람은, 그리고 이 도시와 나라는 가장 화려한 껍데기를 뒤집어썼다.”

“… 네놈은…,”

“네 눈에 나는 어때 보이지? 이 나라처럼, 바깥의 저 사람들처럼 썩어 문드러졌을까?”

 

소년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본다. 더러운 속살을 감추기 위한 가장 화려한 껍데기, 화려한 만큼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속, 왜 화려하고 아름다운 바깥의 그것들은 숨어야만 했던 우리들을 봐주지 않는가. 답은 간단했다. 비참해질 것을 알기에 구태여 가지지 않았던 물음에 대한 답이 겨우 소년 하나에 의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빌어먹게 아름다운 나라는 이미 자신들을 알고 있다. 또한 보고 있다. 그래서 화려해진 것이다. 자신들을 감추기 위해.

태생이 가난하고 불행하다는 것은 바쿠고가 일곱 살 제 인생에게 내린 일종의 선고였다. 태생부터 그랬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선고, 그리고 저주와도 같은 말이었다. 이가 갈린다. 눈앞의 소년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속도에 맞춰 이가 뿌드득 갈린다. 네 눈에 나는 어때 보이지? 소년은 분명, 그렇게 물었을 터다.

 

“그거야, 네놈을 찢어 가죽을 벗겨놓으면 알 수 있겠지.”

 

구름이 달을 가린 순간, 소년 앞에 선 한 마리의 짐승이 포효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포효였다.

 


 


 



화려하다는 것은 그만큼 속이 썩어 문드러져 있다는 것. 투명한 유리잔에 비친 샹들리에가 와인이 흔들릴 때마다 일렁였다. 토도로키는 마시지도 않을 와인을 한 손에 든 채 시선을 아래로 비스듬하게 깔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자리는 거북하다고 몇 번이나 투정을 부렸건만 10년이 넘게 지나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답답하다. 바깥 바람이라도 쐬면 나아질까 싶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에게 하나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토도로키는 그림자의 실체를 따라 눈동자를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피식, 가벼운 웃음을 냈다.

 

“오랜만이군, 이이다.”

“아아. 바쁜 누구누구 씨 때문에 말이지.”

“… 그렇군.”

 

반 박자 느리게 대답한 토도로키가 밖으로 가려던 걸음을 돌려 벽에 몸을 기대었다. 이이다가 그 앞에 서 토도로키와 마주한다. 오랜만이라는 말에는 허물이 없었다. 기억도 안 나는 시절부터 줄곧 옆에 있던 상대에 대한 단순한, 아무것도 담지 않은 순수한 인사였다.

이이다는 토도로키와 처지가 비슷했다. 마피아 집안의, 그것도 보스의 자식이라는 점은 토도로키와 이이다 사이에 점점을 만들었다. 점점에서 비켜나간 것은 하나였다. 후계와는 거리가 먼 막내였기에 이이다는 형이 보스의 자리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토도로키는 자신이 가질 예정이었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이제 와서 불평을 하는 것은 쓸데없는 소모전을 초래할 뿐이기에 토도로키는 자신이 가져야 하는 것들에 얌전히 두 손을 벌렸다.

가지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가져야 하는 운명은 때때로 토도로키의 목을 조르는 목줄이 되곤 했다. 목줄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 느슨하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는 것으로.

 

“오늘도 너의 번견 군은 멀리 있네.”

 

토도로키가 이이다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평소보다 먼 곳에서 바쿠고의 성난 얼굴이 보였다. 토도로키 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화를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회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간부들뿐이었기에 그들을 지키는 무리는 바깥에서 경계를 서며 기다려야 했다. 토도로키의 열 살 무렵, 그는 룰을 무시하고 억지로 들어오려는 바쿠고를 힘으로 제압한 뒤 밖에 세워두었다. 말 들어, 카츠키. 그것은 바쿠고의 발을 묶는 넝쿨이었다. 그는 젠장, 젠장, 하고 이를 갈면서도 토도로키의 말대로 얌전히 밖에서 기다렸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바쿠고는 제 고집을 꺾은 것이었다.

 

“바쿠고가 곁에 있으면 숨을 못 쉬어서 말이야.”

“알 것 같군. 일단 나부터도 접근 못했겠어.”

 

이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토도로키의 말을 받아쳤다.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주변 인물 중 유독 이이다를 싫어했다.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서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언젠가 토도로키가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 이라는 대답이 나와 이이다가 입을 떡 벌리며 머리 위로 물음표를 몇 개 띄운 적이 있었다.

그 때의 바쿠고가 눈동자에 띄웠던 감정에 토도로키는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자석이 같은 극끼리 밀어내는 것과는 꼭 반대되는 이유에서였다. 심장은 지나치게 솔직한 면이 있어서 때때로 토도로키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그 때도 심장은 자신과 같은 감정의 이름을 가진 바쿠고의 눈동자에 미친 듯이 날뛰었다. 둔하다고 소문이 난 토도로키조차 모를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을 나는, 사랑이라 불러도 될까. 바쿠고. 지금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진득한 정사情事의 뒤는 언제나 나른하다. 그리고 나른해진 몸은 필연적으로 자극적인 것을 찾곤 했다. 언뜻 담백해 보이는 토도로키도 욕망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다 갈라진 목구멍 안으로 물을 몇 모금 털어 넣더니 손을 더듬어 담배를 찾는다. 그 손짓의 의미를 알아 챈 바쿠고가 토도로키의 코트를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손에 쥐어주니 빙그레 웃는 모양이 꼭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보채는 것 같았다.

 

“망할. 이제는 별 게 다 예뻐 보이네.”

“응?”

“구석자리 왕자님답게 오늘도 멋져 보인다고요. 도련님.”

 

구석자리 왕자님, 토도로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자신에게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었다. 사교회를 가장한 조직끼리의 눈치싸움 자리에서 가장 중앙에 있어야 할 토도로키가 늘 구석자리를 자처하는 모습을 두고 사람들은 그에게 구석자리 왕자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 별명 알고 있었어?”

“모를 거라고 생각했냐.”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바쿠고가 뻗은 팔이 토도로키의 볼에 닿는다. 마침 담배에 불을 붙인 토도로키가 잿빛 연기를 뱉어냈다. 후… 하고 길게 내뱉어진 연기가 숨과 섞여 바쿠고의 시야를 가렸다. 어두운 방 안과 희미한 시야 속에서도 바쿠고는 어렵지 않게 토도로키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벌써 몇 번이나 두 눈에 한가득 담았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부족하고 또 부족해서 원하는 자신이, 여기에 있다.

상실이나 결핍이라는 말은 바쿠고 자신과 거리가 먼 말이라고 생각했다. 존재했지만 인지하기도 전에 저물어간 부모, 어쩔 수 없이 정이 생겼으나 끝내는 버리는 결과밖에는 되지 않았던 아이들. 잠깐 사이 많은 얼굴들이 지나갔지만 그는 그들을 상실이나 결핍의 틀 안에 넣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떠오르는, 눈앞의 얼굴도 상실이라던가 결핍이라는 말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것은 단순한 욕망. 가지고 또 가져도, 부족하고 또 부족해서, 원하고 또 원하게 되는 욕망의 덩어리였다. 자신이 가진 가장 추악한 것들이 덩어리로 뭉쳐 욕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쿠고는 토도로키를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얼굴이나 몸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그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토도로키에게는 있었다. 그렇기에 바쿠고는 욕망했다. 지독하게, 토도로키 쇼토라는 남자를 욕망한다.

 

“토도로키.”

“… 응….”

 

바쿠고의 손이 움직이는 선을 따라 토도로키가 얼굴을 갸웃거린다. 비스듬히 기운 얼굴을 따라 자란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부서지는 웃음소리가 들리자 바쿠고가 허리를 숙여 그 입술에 제 입을 맞추었다. 쓴 맛이 났다. 고개의 각도를 달리 해가며 입을 벌린다. 힘으로 토도로키를 눌렀더니 반쯤 일어나 있었던 몸이 다시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부서지는 웃음소리가 들려 뭐가 그렇게도 웃기냐고 물었다. 그렇게 물어오는 바쿠고가 어쩐지 조금 토라진 것 같았다. 토도로키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제 팔을 뻗어 바쿠고의 목에 둘렀다. 자세를 고쳐 완전히 침대 위로 올라 선 바쿠고의 허리에는 다리를 감아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손가락 사이에 걸쳐 있던 담배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 했다. 토도로키는 고개를 꺾어 마지막 담배를 음미한다. 다시금 뿌연 연기가 바쿠고와 토도로키 사이를 갈라놓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연기까지 전부 뱉어낸 토도로키가 담배를 쥔 팔을 힘없이 내렸다. 그러자 바쿠고가 기다렸다는 듯 침대 옆에 놓인 협탁을 끌어당겼다. 그 위에 자리한 재떨이를 당기기 위함이었다. 토도로키가 재떨이 끝에 담배를 걸쳤고 바쿠고가 담배를 비벼 불씨를 완전히 꺼트리는 것은 바통을 넘겨받는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익숙한 일이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겹치고 몸을 겹쳤는지 셀 수가 없다. 언제부터였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나, 단 하나 기억하는 처음은 그저 원했던 것뿐이었다. 제 안에 피어난 욕망의 끝이 어느 새 토도로키의 안을 파고들고 싶어 미치기 딱 직전이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이렇게나 아름다운 너를 가져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텅 비었으니까.

 

“그렇게 예쁘게 웃지 마.”

 

여전히 바쿠고의 목에 둘러져 있는 토도로키의 팔에 힘이 실린다. 토도로키는 바쿠고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심장이 조여 왔다. 바쿠고가 자신에게 해주는 말은 전부 특별했다. 옅은 빛만이 들어올 수 있는 방 안에서, 짐승의 눈을 한 채 소유를 요구하면 토도로키는 거부할 수 없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잿빛 사이에서 불길이 타올랐던 그 때도, 바쿠고는 선택 받은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한 것이었다. 선택 받은 것은 토도로키였다.

짐승에게 선택받은 인간은 어디에도 도망갈 수 없었다. 토도로키는 도망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운명을 믿지는 않았지만 바쿠고 카츠키라는 남자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가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손을 내밀어 기꺼이 너의 소유가 되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너라면 괜찮을 것 같다. 나도 나의 속이 어떤 식으로 일그러졌는지 궁금하던 참이다. 너라면, 내 몸을 찢어 가죽을 벗겨서라도 내가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파헤쳐 주겠지. 그러면 나는 완전히 너의 소유가 된다. 약한 인간이 강한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결말은 아주 당연했다.

 

“카츠키.”

 

토도로키는 바쿠고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얕은 키스. 입술 끝을 물고 늘어지다가 이내 툭, 하고 놓아버리는 키스였다. 입술 사이로 흘려보낸 신음이 달았다. 욕망을 그대로 입 안에 집어넣고 맛본다면 꼭 이런 맛이 날 것도 같았다. 그대로 입맛을 다시자 이번에는 바쿠고가 부서지는 웃음을 입에 담았다가 터뜨렸다.

 

“도발하는 겁니까?”

“어떤 것 같아?”

 


 


 



새벽 사이에 비가 내린 물의 도시는 아침까지 그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차가 없어 일본보다 한가할 거라고 생각했던 바쿠고는 커튼을 치자마자 보이는 인파들에 얼굴을 구겼다. 이건 일본보다 더 하면 더 하다. 유명한 관광지라더니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사람이 많은 건 딱 질색이었다. 워낙에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싫어하기도 했지만 이래서는 토도로키를 지키기가 힘들다.

대체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하기 어렵다는 편견이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람들 사이에 숨는 게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지, 바쿠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아침, 몇 시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 주인이 자신보다 눈치가 빠르다는 점이었다. 그런 쪽에서만 요령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일곱 시입니다. 여덟 시에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응…. 일어나야지.”

 

토도로키가 아직도 잠에 취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키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비틀거리는 탓에 결국 바쿠고가 그를 안아들어야 했다. 갑자기 무게의 중심이 잡히지 않은 탓에 토도로키가 몸을 덜컹거렸다. 그마저도 바쿠고가 지탱해줬기 때문에 떨어지거나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익숙한 듯 바쿠고의 목에 제 팔을 감은 토도로키가 아래에서 보이는 바쿠고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만을 살짝 올렸다가 이내 눈을 휘어 웃는 것은 토도로키 특유의 애정 섞인 표정이었다. 바쿠고는 고개를 내려 토도로키의 입술에 제 입을 맞대었다. 가벼운 키스에 토도로키가 웃음소리를 부순다. 그저 맞닿기만 하는 키스가 입술을 벌려 혀를 섞는 키스로 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물을 잔뜩 머금은 종이 위로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몸이 겹쳤다가, 그대로 다시 떨어진다. 그것을 반복하기만 하는 단순한 행위였음에도 공기는 숨소리와 신음으로 가득 찼다.

 

“씻…, 읏, 씻어야 돼…. 바쿠고. 그만.”

 

바쿠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요하게 흔적을 남기려고 했다.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남기고 싶었다. 인간이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게 되는 생물 아니던가. 토도로키의 명령에 행동을 멈춘 바쿠고가 천천히 그에게 겹쳤던 몸을 떨어뜨렸다. 아쉬움이 벤 얼굴을 향해 토도로키의 손이 뻗어진다. 비에 쫄딱 맞아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심장을 아릿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잘 했어. 칭찬 하나를 담은 손길이 상냥하게 바쿠고를 쓰다듬었다.

 

“이제 진짜 씻어야지. 같이 들어갈래?”

“됐습니다. 유혹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럼 잠깐 기다려. 이이다에게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미리 말 좀 해놔.”

“네.”

 

토도로키는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손을 얹었다. 몸을 살짝 틀기만 해도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드러난다. 그 중 몇 개는 벌써 흐릿해지고 있었고 어제 남긴 것은 가장 선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했더니 더 하는 꼴이 마치 심술 난 강아지 같았다. 어차피 진심으로 한 명령도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하면 언젠가는 한 번 제대로 말을 해야겠다 싶어진다.

아무도 안 믿지만 토도로키는 바쿠고가 꽤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했다. 광견이라느니 흉견이라느니 하는 소리들이 있어도 토도로키는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속에서 토도로키가 ‘바쿠고는 충견忠犬이지.’ 하고 웃으면 사람들은 모두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하긴…. 이걸 보면 다들 말도 안 된다고 말할 만하겠네.”

 

이런 걸 두고 세간에서는 키스마크라고 하던가. 하지만 토도로키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런 애정 섞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흔적이자 자국이고, 욕망이자 집착이었다. 토도로키는 차라리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예쁜 말이라고 생각했다. 또,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욕망에 충실한 인간은 매력적인 법이 아니던가.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오른다.

미학美學, 그 가치를 알고 싶었다.

 

 



 



도시에서 가장 큰 광장은 아침부터 사람들로 넘쳐났다. 바쿠고는 평소보다 경계를 높이며 토도로키의 옆으로 붙었다. 아까부터 따라붙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에는 늘 있는 시선인 줄 알았다. 구석자리 왕자님이라는 별명에 맞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한 듯 어딘지 위태로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달라붙는 시선.

 

“여기서도 왕자님이시네요.”

“응?”

“도련님 별명 말입니다. 왕자님.”

“질투해?”

“누가요.”

 

바쿠고가 토도로키에게 붙였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질투하고 있구나.

 

“걱정하지 마. 너한테도 별명 있던걸.”

“… 그런 쪽 질투가 아니,”

“번견番犬.”

“뭐요?”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웃겨서 그럽니다.”

 

번견番犬. 그것을 토도로키 입에서 처음 들은 것은 아니다. 꽤 전부터 바쿠고는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의미를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지만. 의미를 알고 나서도 바쿠고는 딱히 이렇다 할 감정이 들지 않았다. 굳이 그런 거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쓸데없는 감정 소비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별명 같은 시시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누가 자신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토도로키 쇼토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를 온전히 자신 하나만 욕망할 수만 있다면.

 

“나는 꽤 마음에 들어. 너랑 닮았잖아.”

“어디가요.”

“개라는 점이? 너, 무는 거 좋아하잖아.”

 

아침에도 거울 보고 깜짝 놀랐어. 토도로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소리 죽여 말했다. 개라는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면 오늘 아침에는 왜 밀어냈는지. 애초에 무는 걸 좋아하는 건 바쿠고 혼자만이 아니었다. 바쿠고가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리자 토도로키가 다시 웃었다. 네가 보이는 곳에 남기려고 하니까 그렇지.

 

“대신 이번 일이 끝나면, 허락해줄게.”

“예?”

“어디든, 물게 해 준다고. 보이는 곳도 상관없어.”

 

토도로키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진다. 바쿠고는 그 순간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로 찍은 영상처럼 보였다. 전신을 휘감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하하, 작게 웃음을 터뜨린 바쿠고도 곧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냈다. 그 말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어수선한 주변부터 정리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일대를 터뜨리고 수상한 놈들은 전부 죽이고 싶다. 하지만 토도로키에게서 어떤 명령도 떨어지지 않는 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토도로키가 이렇게나 미숙하고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는데도 아무런 말 한 마디 없는 것이 이상했다. 분명 또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바쿠고는 얌전히 토도로키의 옆에서 지독하게 붙어오는 시선을 한 번 노려보았다.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은지 바쿠고와 잠깐, 그것도 어쩌다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떠는 모습이 보였다. 당황한 듯 그 뒤로는 따라붙는 시선과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바쿠고는 자신이 괜한 짓을 했나 싶다가도 평온한 토도로키의 얼굴을 보면 어떤 생각도 소용없어지는 것을 느낀다.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완벽하게 빛이 차단된 어둠 속에서는 아주 작은 빛도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그것이 설령 바늘구멍보다 작은 크기라도 할지라도 어둠 속에서는 크기에 상관없이 제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어려운 것은 잿빛 속이었다. 희미하고,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잿빛 속에서는 무언가를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 토도로키가 본 것은 잿빛 속 타오르는 불길. 새하얗지도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본 그 날, 토도로키는 멈출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알고 싶어서.

바쿠고를 특별하다고 말한 것은 그다지 대단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어느 것이 가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구분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투박한 무리들 속에서 바쿠고 카츠키라는 소년만이 홀로 우뚝 서 있었으니까. 미숙한 존재가 익숙한 척을 하며 불길을 머금은 모습이 토도로키의 눈에 들어왔으니까.

어둠 속 시선이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며 자신에게로 들러붙는다. 시선과 함께 옮겨 붙는 발걸음의 소리도 작아져 토도로키가 손을 흔들어 상대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는 거의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아마 직접 행차하신 거겠지. 기특하게도.

토도로키의 인사를 받은 이이다가 가방 안에서 서류 봉투 두 개를 꺼내었다. 서류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토도로키의 얼굴에 점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었다. 이이다는 그를 기다리면서 미리 주문해놓은 커피를 홀짝였다. 토도로키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오랜만이다. 몇 년을 알고 지냈지만 토도로키 쇼토라는 남자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혹시 바쿠고라면 그를 조금은 알 수 있을까 싶어 그에게로 짧게 시선을 던졌지만 바쿠고 역시 잔뜩 경계만 서 있을 뿐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많이 급한 거였어?”

“응? 아니. 별로.”

“그런데 뭐 하러 이탈리아까지 와서 받아?”

“그냥. 오랜만에 여행도 좀 하고 싶고. 다른 약속도 있고.”

“잠깐, 도련님. 저한테는 아무 말 없었잖습니까.”

 

바쿠고가 대화 속에 끼어들어 으르렁거렸다. 안 그래도 주변의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데 더 이상 지리도 잘 모르는 곳을 돌아다닐 수는 없다. 토도로키가 손을 뻗어 바쿠고의 뺨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입모양뿐이지만 분명 그렇게 말한다.

 

“그럼 난 이만 간다.”

“그래. 이거, 고마워.”

 

토도로키가 서류를 흔들며 인사를 했다. 그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힘겹게 떼어내며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바쿠고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완전히 다물고 손만 흔들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바쿠고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이이다조차 토도로키 본인의 입에서 제 개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환경이 비슷하다고 해서 전부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의 토도로키는 이미 그 나이답지 않은 감정을 제 안에 억지로 쑤셔 넣는 중이었다. 그런 남자가 바쿠고에게 만큼은 특별하다 말하며 자신을 내어주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이다의 모습이 곧 사람들 사이로 완전히 사라지자 바쿠고가 걸음을 옮겨 이이다가 앉았던, 토도로키의 맞은편에 앉는다. 토도로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바쿠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이러는지 알면서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약속 하나 더 있는 거 말 안 한 건 미안.”

“지금 낌새 이상한 거 알고 계시죠?”

“응.”

“명령해주세요.”

“그래. 이제 슬슬 나도 한계네.”

 

나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전부 네가 알아서 하고 와. 명령을 받은 번견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도로키는 톡톡, 서류에 적힌 글씨들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얼마나 걸릴까. 5분,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오래. 최소한 10분 정도는 걸려주었으면 좋겠다.

곧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하나 진다. 서류의 사진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토도로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토도로키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이름을 입 밖으로 뱉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분명 자신이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걸 깨닫고 돌발행동을 할 위험이 있다. 토도로키는 제 표정의 감정을 여전히 놀람으로 위장하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알고 있는 풍경이 보이기를. 자신이 예상했던 장면이 시작되기를.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토도로키에게도 생각이 있을 테니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애초에 그 명령이 함정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토도로키가 자신에게 함정을 건다?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함정이었다.

보기만 해도 열 받는 놈들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돌아왔을 때, 주변에 몰래 붙여놓았던 부하들까지 전부 살해되고 토도로키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을 때 확신했다. 이것은 함정이라고. 토도로키가 자신을 이용해서 판 함정. 토도로키가 남긴 것이라고는 이이다에게서 건네받은 서류 두 장 뿐이었다. 바쿠고는 그 자리에서 이이다를 쫓아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곧 이이다의 부하들이 바쿠고를 말리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이이다가 그들을 막았다.

 

“뭐야. 이거. 설명해.”

 

숨을 가다듬어 흥분을 진정시킨 바쿠고가 제 주위로 몰려드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이이다의 멱살을 놓았다. 순간적으로 막혀 들어간 숨을 고르기 위해 콜록거리는 사이를 못 참고, 바쿠고가 이이다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눈앞에 바로 들이밀어진 서류는 너무 가까이에 있어 글씨를 읽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이 건넨 서류였으니 굳이 글자를 읽지 않아도 내용이야 기억에 있다.

몇 년 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토도로키에게서 개인적인 연락이 걸려왔다. 처음 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는 이탈리아로 숨어 들어간 쥐새끼를 한 마리 키워달라는 부탁이었다. 토도로키는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부탁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거래였다. 그렇기에 이이다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렴풋이 그 쥐새끼의 조직이 토도로키의 손에 의해 완전히 부서졌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었지만 그 사실을 말해도 토도로키는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을 터였다.

이이다의 조직이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재단의 힘을 빌리면 토도로키와의 거래를 진행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문제는 바쿠고의 눈을 피해 몰래 몰래 토도로키에게 진행 상황을 알리는 것이었다. 바쿠고가 토도로키에게로 전달되는 모든 서류를 안다거나 조직 내부의 상황에 간섭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코가 좋았다. 번견이라는 별명답게 위험한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냈다. 그것도 토도로키 한정의 위험에만 유독 심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래서 이이다는 오늘 토도로키가 바쿠고를 데려온 것을 보자마자 위화감을 느꼈다. 몇 년 동안 준비하더니, 드디어 오늘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구나 생각했다.

 

“너도 들어본 적 있을 거야. 이 이름.”

“뭐?”

“이런 거 일일이 기억하리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그래도 이 이름은 기억하고 있을걸.”

“무슨…, 이 새끼가 누군데.”

“토도로키가 좋아했던 작가.”

 

작가? 바쿠고의 손에 의해 서류가 구겨진다. 울퉁불퉁해진 글자는 사진 속 남자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토도로키가 좋아하던 작가라던 그 이름을 바라보았지만 떠올려지는 기억은 없었다. 그 때 바쿠고의 머리 위로 하나의 장면이 스쳤다. 몇 년 전, 타 조직과의 협상을 끝낸 토도로키가 드물게 기분이 좋았던 날이었다.

 

「우리도 여기에 책 좀 채워 넣을까? 아니면 내 서재, 응접실로 쓸까?」

 

이번에는 또 어떤 엉뚱한 소리로 사람 피를 말려놓으려나 생각했다. 바쿠고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토도로키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날따라 말을 길게 하곤 했다. 그 때 말한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책,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

 

「지독하다고 했어.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해.」

 

그 때 토도로키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지. 웃고 있었던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표정이었던가. 바쿠고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잔뜩 구겨진 서류 종이가 팔랑거리며 떨어진다. 바쿠고는 제 신발 위로 떨어진 서류를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바쿠고가 사라지자 방 안에는 고요함이 찾아왔고 이이다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젠장, 토도로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주워온 거야.

이이다가 처음 바쿠고를 봤던 날 토도로키는 처음 보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때도 이이다는 제 친구를 향해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봤다. 토도로키는 똑바로 이이다를 마주 보며 재미있지 않으냐 되물었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 다만 토도로키는, 할 말을 찾고 있는 이이다를 위해 한 마디를 덧붙였을 뿐이었다.

 

“미학.”

“… 예?”

 

부하가 무어라 중얼거린 이이다를 향해 물었다. 그 때의 토도로키는 살고 싶다고 했다. 모든 인간에게 삶의 이유가 주어져서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면 자신에게도 그런 것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이다는 기억하고 있다. 형과 누나를 제치고 원치도 않은 왕관을 뒤집어써야 했던 친구의 언젠가를 기억하고 있다. 잊을 수가 없지. 그래서였나.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나타난 바쿠고 카츠키라는 소년에게 무언가 기대를 걸었던 것은.

살고 싶다는 말을 그리도 담담하고, 정말이지 담백하게 말하던 친구를 무슨 수를 써서든 도와주고 싶었던 것은.

 

“토도로키 말이야, 살고 싶다고 했거든.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를 알고 싶다고.”

 

 



 



처음에는 단순히 궁금했다. 형과 누나가 있는데도 자신이 왕관을 써야 하는 이유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며 공격하는 이유를. 그것들을 전부 알고 난 뒤에는 살아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모든 인간들은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살고 있을 터인데, 자신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그것이 지독하게도 외로웠다. 그랬는데 그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두 눈에 불길을 담은 소년에게 살아갈 이유 따위는 하나도 없어보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왜 그렇게까지 살아가고 싶어 하느냐고. 멋대로 기대를 걸어버렸다. 너라면 나를 파헤쳐서, 내가 왜 살아가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걸 계획하고 덫을 짠 건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설계도를 그린 것은 그 서재에 피를 뿌렸을 때와 딱 지금까지. 그 이전까지는 단순히 바쿠고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상상만 하는 정도였다. 우연을 기회로 만들었을 때 토도로키는 스스로를 기폭제로 삼았다. 이제 이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토도로키의 예상 밖이다.

남자는 토도로키가 눈을 뜨자 그에게로 다가왔다. 겨우 초점을 맞추자 눈앞의 풍경이 뇌까지 도달했다. 아직 시야는 조금 흐릿했지만 상황을 파악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약을 쓴 건지 머리까지 지끈거리며 아파온다. 인상을 찌푸리며 팔다리를 움직여봤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걸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온 몸에 감각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무엇인지는 몰라도 꽤 비싸고 귀한 약을 쓴 것 같다. 토도로키가 드디어 만족스럽게 웃었다. 팔과 다리 전부 움직일 수 없고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 그것도 아주 비참한 죽음뿐인데도 토도로키는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잘도, 여기까지 내 생각대로 움직여줬구나… 싶어서.”

“뭐?”

 

그 날은 눈앞의 남자가 이어받기로 한 조직과 협상을 하는 첫 날이었다. 바쿠고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약속대로 토도로키 혼자만 협상자리에 나갔다. 보통의 응접실과는 달리 주변에는 책이 잔뜩 꽂혀져 있었다. 토도로키는 제 서재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방금도 최근 빠져있는 작가의 책을 읽고 온 참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꽤 나이를 먹었다는 조직의 보스는 뒷세계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인자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토도로키는 이 남자의 손에 몇 백 명이 죽어나갔는지 잊지 않았다. 덧붙여 그가 자신의 얼굴과 분위기를 이용해서 이 협상의 주도권을 뒤집으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때 그의 눈에 하나의 책이 들어왔다. 이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 읽고 있었던 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 무언가에 홀리듯 꺼내 들었던 책이었다. 그리고 남자와의 시답잖은 이야기 속에서 그의 양아들이 그 책의 저자라는 것을 알았다. 남자는 요즘에는 뒤에서 활동해봤자 돈이 안 된다며 이런 저런 정보를 흘렸다. 하지만 토도로키는 한 가지 가능성만을 쫓고 있었다. 확신 하나 없는 단순한 가능성을.

 

“기억하고 있어?”

“무슨……,”

 

당황한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협상은 유흥의 하나였다. 애초에 토도로키에게는 조금이라도 빼내올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단물까지 빨아먹은 뒤에 처리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협상이라기보다 일종의 확인 절차였다. 빌어먹게 짜증나지만 감 하나는 좋은 아버지의 말대로 배 속 시커먼 영감에게서는 더 이상 빼내올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그 양아들에게는 이용 가치가 있었다. 충분히. 어차피 물어볼 것도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말했잖아. ‘바쿠고가 없으니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남자가 주춤거리다가 곧 비틀거렸다. 중심을 잡은 남자는 제 머릿속에 있던 기억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토도로키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토도로키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터진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이래서야 당분간 제대로 된 식사는 못하겠네. 그럼에도 토도로키는 고개를 올려 웃었다.

눈앞에 펼쳐진 핏빛 풍경. 지나치게 조용한 복도에 발을 들였을 때, 그제야 이상한 것을 눈치 챘다. 자신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알고 있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물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제 아버지를 도왔다. 같지도 않은 소설을 쓰고 에세이랍시고 책을 냈다. 전부 헛소리에 불과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아는 척 평가하는 꼴을 보며 비웃기도 했다. 그 길에 장애물 따위는 없어야 했다. 아니, 없는 줄 알았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가 제 눈앞까지 다가오기 전까지는.

토도로키 쇼토라는 남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멀리서만 지켜봤으니까. 그처럼 되고 싶다기보다는 그를 뛰어넘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굽힐 줄 모르는 허리를 굽히게 만들고 싶었다. 누군가는 헛된 꿈이라고 했지만 남자는 야망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꿈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토도로키가 제 사람들의 죽음을 밟아 섰을 때 남자는 숨을 멈춰야 했다. 절대 무섭지 않은데, 결코 두렵지 않은데 몸은 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토도로키가 제 양아버지의 잘려나간 얼굴을 끌어올려 속삭이고 있었다. 책을 내기 위해 온갖 판타지를 접했을 때 그런 묘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악마. 남자의 눈에 토도로키 쇼토라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남자는 다시 속삭였다. 반대라고.

 

“‘바쿠고가 있었어야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었을 거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지금 그 새끼가 없으니 또 그 때와 똑같을 거라고, 얘기하는 거냐.”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토도로키의 피투성이 얼굴과 마주한다. 애초에 남자의 계획은 토도로키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일부러 어리숙한 놈들을 고용해서 시선을 끌어 바쿠고와 토도로키를 떨어뜨려 놓은 다음 그를 납치한다는 계획은. 어쩌면 단순하고 진부한 계획이었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기 때문에 남자는 몇 년을 공들여 준비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토도로키의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토도로키가 일부러 걸려준 것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다행이네. 끝까지 들었구나.”

 

끝까지 듣기도 전에 도망가 버려서 제일 중요한 말을 못 들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입안에 머금고 있던 핏덩어리를 뱉었다. 말을 마저 끝내기 위해 뱉어냈더니 어쩐지 입안이 허전했다. 토도로키가 조소를 지으며 남자를 향해 다시 말한다. 다행이다, 라고.

그대로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포기하고 죽어 버릴까봐 토도로키는 빠르고 은밀하게 뒤에서부터 손을 써야 했다. 이이다에게 부탁해 남자의 신분을 세탁하고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살아가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음지로,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세계로 오도록 끌었다. 복수라는 이름으로 제게 다가올 수 있게끔. 토도로키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게끔. 토도로키, 정확하게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조직에 원한을 품은 무리들이야 많으니 남자의 곁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토도로키의 부탁을 받은 이이다가 알게 모르게 도와준 것도 있었으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남자 이외의 사람들이 토도로키를 노려보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웃기지 마. 그 새끼도 없고 네놈도 이렇게 무력하게 있는데 그 때와 똑같을 리 없어.”

“맞아. 후우…,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지….”

“네놈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나는…, 틀, 렸을지도 모른다고, 했지. 틀렸다고는 안 했는데.”

 

토도로키가 그렇게 말을 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토도로키가 멋대로 자신의 리미트로 설정해놓은 바쿠고가 있기 때문에 ‘적당한’ 곳에서 멈출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이유는 바쿠고가 자신 이상으로 날뛴다고 해도 ‘그만.’ 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분명 멈추기 때문에. 하지만 만약 바쿠고가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만약 그렇다면…, 바쿠고가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고 날뛸만한 상황이 뭐가 있을까.

밖에서부터 무언가 소음이 난다. 마침 한계였는데, 토도로키가 중얼거렸다. 당황한 사람들이 남자와 토도로키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공사를 하다 만 건물은 조금만 세게 건드려도 시멘트 조각과 흙덩이가 부서졌다. 천천히, 하지만 묵직하게 가까워지는 발걸음은 토도로키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마침내 마지막의, 마지막 문이 열린다. 그 경계를 넘은 바쿠고의 얼굴에는 평온이 내려앉아 있었다.

토도로키는 자꾸만 감기는 눈에 힘을 주었다. 드문 풍경이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아야지. 그리고 기억해야지. 반쯤 풀린 눈으로 핏방울을 흘리며 입만 뻥끗거렸더니 번견은 주저 않고 몸을 움직인다. 죽여도 돼. 마침내 떨어진 허락은 명령 받지 않고 행한 피의 무게를 전부 용서했다.

처음, 토도로키는 명령했다. 자신을 지켜줄 개 한 마리에게.

 

「내가 명령하지 않는 짓은 하지 마.」

 

그것은 완벽해 보이는, 사실은 미숙하기만 한 속박이었다. 아직 한 번도 온전한 제 것을 가져본 적 없는 소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흉내였다. 어른들을 흉내 내는 것은 아이만의 특권이지 않은가. 제 것에 목줄을 채워 소유를 확인한 소년은 모순적이게도, 자신의 개가 명령을 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겁쟁이인 자신은 분명 바쿠고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줘.’ 라고, 혹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려줘.’ 라고 명령하지 못할 게 뻔했다. 첫 만남에서 바쿠고는 토도로키를 찢어 발겨 속을 파헤쳐볼 것이라 말했지만 이제 토도로키는 안다. 바쿠고는 절대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토도로키의 몸이고 심장이고 전부 쥐고 흔들 수 있어도 토도로키의 속까지 끄집어 그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이기에 이렇게도 화려하게 살고 있는지 알려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바쿠고가 최초의 명령을 어길 수 있도록.

 

“그만. 바쿠고…, 그만.”

 

바쿠고 밑에 깔린 남자는 이미 정신을 잃다 못해 온기가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토도로키가 그의 양아버지나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남자의 꼴은 험했다. 아예 형체도 못 알아보게 만들 작정인지 단순히 화풀이가 끝나지 않은 것인지 바쿠고의 주먹은 몇 번이나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그대로 내리 꽂은 주먹에서 피가 흐른다. 이미 온 몸이 피투성이인데도 바쿠고는 멈추지 않았다. 토도로키의 명령에도 그는 계속 움직였다.

아아. 드디어 너는 나를 어겼다. 아직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감각과 흐릿한 시야 속에서 토도로키가 작게 웃었다.

곧 바쿠고가 남자에게서 몸을 떼었다. 고개를 들어 토도로키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밧줄을 푼다.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상냥한 모습에 토도로키가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금방 침착해질 리가 없는데. 토도로키가 바쿠고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기울인 순간, 바쿠고가 토도로키의 목덜미를 물었다.

 

“윽…, 바, 쿠고…! 앗, 으읏…, 싫…! 윽.”

 

몇 번이나 다른 곳에 겹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정말로 개에게 물려 뜯기는 기분이다. 드디어 자신은 찢어 발겨지는 구나. 얼마나 더러운 인간으로 살아왔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살고 싶다는 바람은 못 이루겠지만 적어도 이제까지 무슨 이유로 살아왔는지는 알 수 있게 된다.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아. 기대가 된다. 토도로키는 눈을 감고 목덜미부터 뜯겨져 죽어가는 감각을 느낀다.

하지만 바쿠고는 그대로 토도로키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멈춰진 행동에 토도로키가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바쿠고? 이름을 불린 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작게 떨리는 등은 마치 그가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울고 싶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이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어졌다.

 

“이번 일이 끝나면, 어디든 마음껏 물게 해 준다는 약속이었잖아요.”

“…… 카츠키.”

“날 버리지 마.”

“… 그런 게, 아니야….”

“번견이든, 광견이든… 뭐든 될 테니까.”

 

언젠가 아팠던 적이 있었다. 잠깐 아릿하고 말았던 그 때를, 토도로키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쿠고의 두 눈동자에 담긴 감정의 이름을 눈치 챘을 때였다. 그것을 과연, 그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심장 한 쪽이 아파왔다. 아픔은 토도로키가 모르는 사이에 전신으로 번져가곤 했다. 거부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가져서는 안 될 것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이 거부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토록이나 어렵고 아픈 것이라고.

울고 싶었다. 문득, 울고 싶어져 자신을 끌어안은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손바닥 위에 두고 주무르는 모양이 꼭 텅 빈 무언가를 채우는 느낌이다. 그래, 채워지는 느낌. 몇 번이나 갈망했던 온도의 감정이 지금 여기에 있다. 확실한 이름을 가진 채로 토도로키와 바쿠고 사이에서 으스러지고 있었다. 이제는 상관없었다. 부서지든 구겨지든 흩어지든, 이미 알아버렸다.

눈앞의 이 남자를 끊임없이 욕망하고 싶다. 눈앞의 이 남자가 나의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미학, 그 가치를 갖고 있는 남자의 곁에서 살고 그의 곁에서 죽고 싶다. 그저 그것 하나만을 바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약속을 한다. 이번에 내가 눈을 뜨면 내 앞에는 네가 있어야 해. 명령 따위가 아니야, 부탁도 아니야. 이건 그냥 약속이야.

 

“토도로키 쇼토,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새끼손가락도 걸지 않은 투명한 약속이지만, 토도로키는 만족스러운 듯 웃는다. 아아, 그래. 좀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는 너니까 분명 그 말 대로 하겠지. 사랑스러운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가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내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 왜 지금까지 그토록 화려하게 살아야만 했는지, 그런 건 전부 상관없게 되어버렸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이 욕망뿐이니, 함께 서로를 원해가며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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