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역과 개인 감상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잠은 좀 잤어요?”


태형이 석진의 차 조수석에 타며 말했다. 태형은 눈도 못 마주치고 끄덕이는 석진이 귀여워 살짝 미소 지었다. 따스한 첫눈을 같이 맞은 날의 아침, 목도리를 돌려주려는 석진을 보고 감기 걸린다며 한마디 했을 뿐인데 오늘은 까만 터틀넥을 착실히 입고 나왔다. 전에는 셔츠 안에 베이지색 터틀넥, 그전엔 초록색의 터틀넥 니트.



“왜 웃어요?”

“잠 못 잔 거 티 나서.”


붉은 눈가를 쓸어주려는 태형의 큰 손이 석진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 태형의 손끝이 눈가에 닿을 것 같자 석진이 살짝 상체를 뒤로 뺀다. 태형은 손을 거두고 제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뭐, 얼굴이 이렇게 작아…. 



“얼굴 진짜 작다. 손 대봐도 돼요?”

“묻기도 전에 방금 한 건 뭔데요?”


눈가가 또 붉길래 식혀주려고…. 석진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고 태형이 멋쩍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피식 웃었다. 이틀 전 그날 이후로 훨씬 유연한 사이가 되었다. 아마 메신저로 대화했던 많은 밤들이 제 역할을 상당히 해낸듯했다.




그날 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태형은 말없이 그의 침묵을 들어 주었다. 먼저 고백을 한 건 석진이었다. 무서웠다고. 일방적으로 자신을 알고 있는 시선들이 주는 압박감과 그 앞에서 투명할 수 없는 자신이 충돌하며 만든 공황상태에 대해, 거진 체념 조로 고백했더랬다. 그제야 태형은 그날 본 석진의 이상 증후들과 그동안 거의 칩거하듯 산 그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

태형은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고생했다는 말만을 전할 뿐이었다. 그의 결과나 가십을 두고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 중 아무도 그의 시간들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 말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피로한데 추운 곳에서 진을 너무 뺐는지 석진이 두 눈을 꾹 감고 현기증을 견뎠다. 그 모습을 본 태형이 석진의 머리를 살짝 끌어 당겼다. 눈앞이 한참을 핑 도는 현상을 견디느냐 인상을 쓰면서 별도리 없이 석진이 그대로 태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만 자요. 어렵겠지만.’


어깨에 기댄 남자는 별말이 없었다. 둘은 한동안 눈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소복소복, 쌓이는 소리를 듣는 둘의 앞에 물에 잠겼던 목소리가 띄워졌다. ‘아무 말이나…. 해줄래요.’ 그 말에 태형이 짧게 고민을 하더니 창밖을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그는 가만가만 석진의 생일 선물로 보냈던 시를 읊기 시작했다. 그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에 석진이 가장 아래에 놓여있었던 평안을 조금씩 끌어올리기 시작하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오늘 어디 다녀왔어요? 복장이 다른데."

"인터뷰 보고 왔어요. 보내준 건 다 읽었어요?"

"인터뷰? 그거 다 읽은 지가 언젠데…."

"한국에서 잡 서칭하느냐고……. 그거 읽느냐고 안 잤구나."


저, 하나씩 말하면 안 될까요.


두 개의 주제로 말하다 석진이 작게 항의를 해옴에 태형이 웃었다. 며칠간을 매일 만났다. 메신저를 하다가 시답잖은 이유였다. 오늘 만난 이유도 그랬다. 한국 스타벅스에 크리스마스 시즌 메뉴가 궁금하다고. 음료가 든 캐리어를 들고 나오는 건 태형, 랑데부는 대부분 석진의 차 안이었다. 초콜릿 음료를 홀짝이던 태형이 미간을 세우며 말했다.



“나중에, 로잔에 같이 가요. 이것보다 만 배는 맛있는 핫 초콜릿이 있어요.”

“…만 배나 달아요?”

“아, 그런 뜻이 아니고. 엄청 진해요.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하거든요.”


석진이 자신의 테이크아웃 컵을 내려다보며 끄덕였다. 입술 끝에 남은 달콤함을 느끼다가 음료를 쭉 들이키고 있는 태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로잔에서 무슨 일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아, 그럼요. 웨어러블 시스템 연구했었어요. EPFL에서.”

“와. 박사님이라니, 엄청 어울리네요.”

“진짜요?”


태형이 핫초코를 마저 마시다 눈을 굴려 석진을 쳐다보았다. 이에 석진이 시선을 피하며 새초롬하게 컵에 입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뿔테 안경이랑요.”

“푸흡!”


음료를 들이키다 뱉는 태형의 행동에 석진이 작게 웃었다. 석진이 다시 질문을 했다. "EPFL이 뭐예요?" "로잔 공대인데, 스위스에 연방 공대 두 군데 중 한 군데예요. 취리히랑, 로잔." 석진이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그래서 불어에 능통한 거구나. 불어에 능통하다고 해도 문학 작품을 읽는 눈이 설명이 안됐다. 석진은 태형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 눈빛을 읽은 태형이 눈을 크게 떠 보이며 반문했다.



“왜요?”

“공학 박사님치고는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거 같아서요.”

“...의심하는 거 아니죠? 메이저와 흥미는 별개라구요….”


태형이 억울한지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투명한 행동에 석진이 웃으며 눈을 돌렸다. 지갑을 다시 바지 뒷주머니에 넣으며 이번엔 태형이 질문해왔다. “근데 왜 하필 프랑스 문학이에요?” 그 말에 석진이 눈동자를 위로 들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왜 하필 프랑스 문학이었을까? 따지고 보면 가려 읽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내재적으로 영향을 준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석진은 바로 알았다. 이상록 감독.



“…좋아하는 분이 누벨바그Nouvelle Vague에 심취한 분이어서.”

“…좋아하는…분이요…?”


이 말에 태형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맥락상 날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가 기계과 아니랄까 봐 ‘0’아니면 ‘1’이어야 하는 태형이 또다시 억울해 보이는 얼굴을 보였다. 석진이 난감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붙인다. “오해하지 마세요. 좋아하는 영화감독님이요. 이상록 감독님.” 그 말에 태형이 누군지 안다는 듯 단박에 느낌표를 띄웠다. 그 표정에 이번엔 석진이 기분 상한 듯 물었다.


“근데 날 몰라요?”

 





그린

Be my spring in winter days

auteur BINE.







차에서 실없는 소리를 하며 투닥이다 태형이 창 밖을 보았다. 눈이 내리느냐고 흐렸던 하늘이 오래간만에 개고 있었다. 해가 구름 사이에서 얼굴을 내민다. 태형이 눈부신 햇살을 눈으로 받으며 말했다.


“내려서 좀 걸을까요?”


그 말에 석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고 다시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닫는다. 태형은 석진이 밖에 나가길 어려워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태형이 석진 쪽으로 몸을 틀며 조심스레 석진에게 다시 물었다. 무의식중에 긴장한 석진이 몸을 한 뼘 정도 뒤로 뺐다.



“사람들 눈이 무서워요?”

“그게…. 좀….”

“나 있는데.”


석진이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저 말이 무슨 뜻일까…. 머뭇거리는 석진의 코트 깃을 태형이 살짝 잡아끌었다. “어서, 나랑 저 앞에 아파트 단지만 같이 걷다가 와줄래요? 햇빛은 바로 쬐는 게 좋아요.” 석진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게 부탁이야, 종용이야? 약간은 상냥한 미소를 걸친 듯한 안경 너머의 맑은 눈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석진이 끄덕이자 태형이 잘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책 이야기해요.”



평일 오후의 아파트 단지는 인적이 드물었다. 차에서 미적미적 걸어 나오는 석진의 손목을 태형이 감싸 쥐고 해가 드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석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모자도 없는데…. 눈길이 닿는 곳에 쌓인 눈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그때, 강렬하게 내리쬐던 햇볕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받는 햇살이었다.



“손 시려우니까 소매 손까지 내리고.”

“……애는 아니거든요?”    


그래도 꼼꼼히 손가락까지 가려주며 태형이 웃었다. 챙겨주고 싶은 걸 어떡해. 말없이 터벅터벅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걷다가 종종 인기척이 느껴지면 석진은 혼자 화들짝 놀라 바로 시선을 돌렸다. 안쓰럽기도 하면서 귀여워 태형이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아파트 단지 안쪽으로 들어오자 놀이터가 보였다. 굉장히 오랜만에 와보는 장소였다. 둘은 나란히 그네에 앉았다. 석진은 이 상황이 황당해 웃음이 났다.



“아니…. 내가 이 시간에 여기 나와서 그네를 탈 줄은….”

“왜요. 재미있잖아.”


태형이 발로 땅을 밀며 앞뒤로 움직였다. 구름이 흐르며 빛을 더 널리 드러냈다. 태형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석진을 곁눈질했다. 말없이 땅만 응시하고 있다가 돌연 태형을 바라봄에 태형이 눈에 띄게 화들짝 놀랬다.



“책 이야기하자고 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나머지 번역 분 여태 읽은 국내 번역들과 많이 다르더라구요.”

“…아, 표현하고 싶은 단어들을 살리느라….” 

“좋다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음…. 어때요, 원문으로 읽는 기분은.”


의외의 질문이었다. 태형이 뭔가를 떠올려보려는 듯 인상을 썼다. 입술 한 쪽 끝을 잘근잘근 깨무는 모습에 석진이 몰래 코웃음을 쳤다.



“글쎄. 나도 완벽히 카뮈가 아니라서.”

“말해줘요. 어떻게 느껴서 그렇게 써줬는지.”


재촉하는 말에 태형이 어쩐지 오만한 웃음을 띠며 석진을 바라봤다. 옅은 바람이 불어 석진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혹여나 앞머리가 눈을 찌를까 태형이 손을 뻗어 흩어진 앞머리를 정리한다.



“내 감상이…. 옮아도 괜찮겠어요?”

“얼마든지.”

“진짜?”

“…이미 옮았는걸, 뭐.” 


오후의 햇살이 태형과 석진이 앉아있는 그네로 조명을 비췄다. 태형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석진의 눈빛처럼. 앞머리가 다 정리되었어도 태형은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햇살을 받고 있는 석진의 오른쪽 얼굴을 천천히 훑으며 내려왔다.



“미안하네, 온전한 감상을 방해한 셈이 되니까.”

“이미 여러 번 읽은 책이라…. 알고 싶어요. 태형 씨 생각.”

“흠…. 「이방인」에 대한 감상을 달라는 말인 거죠?”


사실 번역하는 내내 당신만 생각했지만. 태형은 이 생각을 꾹 삼켰다. 본인이 질문해놓고 너무 모호하다 싶었는지 석진이 다시 질문했다. “원문은 국내 번역본과 뭐가 제일 달랐어요?” “아 정말 어렵다.” 태형이 그제야 손을 거두며 말했다. 입술 앞에 검지를 올리고 길게 고민을 한다.



“‘태양’. ‘태양’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해가 드는 부분을 그렇게나 묘사했구나.”

“어? 알고 있었어요?”

“엄청 감상적으로 묘사한 걸 읽고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부분이 특히 다른데.”


못 말린다는 듯한 석진의 표정에 태형이 활짝 웃었다. 번역 의도를 알아준다는 게 또 새로운 기분이었다. 태형이 석진을 눈부시다는 듯 옅은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했다.



“대부분 책에서는 ‘태양’때문에 그랬다고 말하는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써놨던 걸로 기억해요. 근데 저는 분명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카뮈가 이 부분을 강조한 건 아니에요. 단지, 내가 읽으면서 느끼기에…. 그렇다는 거예요. 작품 전반적으로 더위와 빛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와요. 너무 만연한 현상이라 강조할 일이 없는 거라 이 대목도 그렇게 서술했다고 보는데….”

“태형 씨는 그걸 뫼르소의 말로써 나타냈잖아요. ‘태양 때문입니다.’ 하고.”

“그 ‘태양’이 무얼 의미하냐는 거죠.”


태형의 말에 석진이 읽었던 구절 구절들을 떠올려본다. 표현들이 상투적이지 않아서 기억에 남는 표현이 많았기에 해당 구절의 대목들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았다. 석진이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눈치챘어요? 챘으면 좋겠는데.”

“태양이 곧…. 그렇구나, 사회적 윤리와 시선….”


태형이 하이파이브를 하자는 듯 손바닥을 내보였다. 석진은 저도 모르게 태형의 손바닥에 제 손바닥을 텁, 하고 가져다 붙였다. 그대로 태형이 석진의 손을 감싸 쥐고 아래로 내렸다.



“책 내내 그런 부분들이 나와요. 총을 쏘았을 때의 햇살이 뜨거웠을지언정, 정말 태양이 뜨거웠을 때의 무엇이 신념을 갉아먹고 있었는지. 엄마의 장례식이 끝날 때, 취조를 당할 때, 다시 감방으로 돌아가며 혹은 법정에서, 태양에 대한 언급이 계속 나와요. 그때마다 뫼르소에게 사회적 윤리라는 올가미를 씌우거나, 씌우길 암시하고, 개인의 인생을 체념하게 해요. 여기. 분위기만 봐도.”



“그건 태양 때문입니다.” 나는 조롱을 듣는 걸 알면서도 급하게 횡설수설 말했다.

J'ai dit rapidement, en mêlant un peu les mots et en me rendant compte de mon ridicule, que c'était à cause du soleil.



“원문을 보면, 거의 구원을 손놓고 대답하는 뉘앙스로 보여요. 이게 사회의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뫼르소가 살고 있는 방식과는 다른 시선들을 따가운 빛들에 비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거든요. 그때마다 카뮈는 자주 더위를 언급해요. 숨이 막히는 거죠. ‘태양 때문에’ 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는 체념적인 말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법정에 서기까지 시달렸던 사회적 시선들에 대한 반항을 나타낸 의미라고 봐요. 너희들이 성가시게 하니까. 같은 의미라고 해야 하나.”


태형이 석진에게 핸드폰을 들어 해당 구문을 다시 보였다. 액정을 빠르게 눈으로 훑은 석진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소당한 명목을 본인이 고했네요. 결국 방식대로 살던 신념을 포기하게 되고….”

“마침내 세계가 나와 형제 같다고 느끼죠.” De l'éprouver si pareil à moi.

“와, 말도 안돼. 그것조차 의미가 둘인데. 그런 암시를 계속 줬다고요?”

“나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느낀 거예요. 덕분에.”


태형이 눈짓했다. 석진은 연거푸 감탄했다. 단지 언어를 안다고 해서 이런 감상이 나올 것 같지 않은데. 석진은 자신이 번역가를 고른 눈이 탁월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러웠다. 언어 공부에 몰두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새 햇살을 머금은 석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대화에 빠져들면서 주변을 경계하며 했던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태형이 그런 석진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렇지만 힘들더라도, 우린 햇빛을 마주 봐야 해요.”

“왜?”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시키니까.”


태형의 진지한 말에 석진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태형도 따라 웃었다. 여전히 그네 사이로 손을 잡고 있는 채였다.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태형이 차에서 내리기 직전 말했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네요.”

“그러게요. 보내준 크리스마스 마켓 사진 좋았는데. 올해도 아무것도 못 보겠네.”

“못 보다니?”

“...뭐 크리스마스 트리나 장식 같은 거요.”


그 말에 태형이 얼얼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12월에 반짝임을 느낄 일이 없었다는 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반짝이는 시즌인데. 혼자 집에만 있었다는 말이잖아. 아무 대꾸 않던 태형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석진을 보며 말했다.



“내일 뭐 해요?”

“…글쎄요. 아무 것도….”

“내일도 봐요. 내가 데리러 올게요.”


석진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형은 그 표정이 썩 사랑스러웠다. 순진한 눈이 정말 사슴 같았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석진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끝에 닿는 볼의 촉감이 보드랍다.



“…갈게요. 잘 자고.”

……? 방금…. 

“잠 안 오면, 꼭 연락하구요.”


태형의 무게가 밖으로 덜어짐에 가벼워진 차체가 잠깐 흔들렸다. 창밖으로 손을 흔들고 등을 돌리는 태형을 보면서 석진이 얼떨떨하게 손을 흔들었다. 좀 전에, 태형의 얼굴이 다가오려고 머뭇거렸던 건 착각이었을까.










“여의도에 사는 줄 알았으면 계속 내가 올 걸. 왜 말 안 했어요?”

“…나더러 나오라면서요?”


오후에 만나자마자 석진이 툴툴댔다. 차에서 만나는 게 아니다 보니 석진이 제대로 자신을 감출 요량인 듯했다. 커다란 패딩과, 검은 볼캡에 마스크까지. 태형이 석진의 귀에서 마스크를 떼어내며 말했다. “이게 더 튀어요.” 떨어져 나가는 마스크를 잡아채려고 했지만 태형의 주머니에 먼저 들어가 버리고 만다. 석진이 볼캡을 더 푹 눌러썼다. 아직 어딜 가는 게 긴장되는데, 태형이 함께 있으니 어디든 가볼 만하겠다 싶은 기분이 역설스러웠다.



“얼굴 작아서 모자 쓰니까 하나 보이지가 않네.”

“놀리지 좀.”

“진짠데. 갈까요? 전철 타고 갈 거예요.”


그 말에 석진이 화들짝 놀라 태형을 올려다보았다. 저, 전철? 토요일에,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전철? 말은 없어도 눈으로 당혹스러움을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게 또 여간 사랑스러운 게 아니었다.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역으로 들어섰을 땐 아니나 다를까 토요일의 여의도인데도 인파가 제법이었다. 태형이 석진의 앞에 제 손을 내밀었다.



“손.”

“……? 여기서 손잡자고요?”

“네. 나 놓치면 안 돼. 유심 없어서 연락이 안 돼요. 그러니까 손 꽉 잡아요. 알겠어요?”


달래는 듯하면서도 거진 별다른 방도가 없는 요구에 석진이 머뭇머뭇 손가락을 올리자 태형이 손을 고쳐잡았다. 5년간의 공백이 무색하게 태형은 석진을 데리고 척척 길을 찾아 나섰다. 환승역인 여의도역은 개찰구 안쪽이 더더욱 인파로 붐볐다. 석진은 저도 모르게 태형의 손을 꽉 쥐었다. 땅만 보고 걸으니 의지할 데가 딱 그 손 하나였다.


열차가 들어오자 많은 인파가 쏟아져 내렸다. 앞을 보지 않아 하마터면 쓸려갈 뻔한 석진의 팔을 태형의 큰 손이 단단히 잡아 제 앞으로 끌었다. 석진은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많은 인파와 마주친 것도 그렇지만, 혹여나 공황 발작이 갑자기 올까 봐 잔뜩 긴장한 채였다. 태형도 석진의 그 긴장을 느꼈다. 승객들이 대부분 내리자마자 태형이 석진을 문 바로 옆의 공간에 몰아세우고 그 앞에 섰다. 양 팔로 손잡이를 단단히 붙들고.


“…….”


이거 어째 자세가…. 공공연한 장소에서 태형의 품 안에 안긴 것 같은 기분에 석진의 귀가 빨개졌다. 태형이 등으로 마저 승차하는 사람들의 마찰을 받아내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승객을 꽉 채우고 나서야 지하철의 문이 둔탁하게 닫혔다. 다른 이들과 필시 섞일 수밖에 없는 조건에도 석진만은 예외였다.


“더워요? 귀 빨개.”


귀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석진이 고개를 더 숙였다. 너무 부끄러워서 입으로 감탄사가 튀어나올까 봐 한 손으로는 입을 꼭 막았다. 지하철은 운행을 계속했다. 정말 오랜만에 타보는 지하철인데, 혼자 차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따스하고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아…. 나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결국 석진이 태형의 품 안에서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말없이 그걸 내려다보던 태형이 웃으며 턱으로 석진의 머리를 살짝 찍어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게 귀여웠다.



이번 역은 고속 터미널, 고속 터미널 역입니다.


급행 지하철을 타고 도착해 내린 역에서 석진은 도무지 오늘 외출의 목적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인파가 엄청났다. 별안간 석진이 태형의 손을 먼저 꽉 붙들어왔다. 거진 여의도역에서 마주친 인파의 세 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당황한 건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어…. 여기 엄청 변했네.”


5년의 공백이 드디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석진은 태형 곁에 붙어 그저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저마다 바쁘게 약속 장소로 나가는 사람들, 쇼핑 인파들과, 부산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상점 마다 각각 다르게 흐르는 음악들과, 작게 꾸며져있는 크리스마스 전구들. 지금 잔뜩 긴장하고 있는 석진에겐 근 몇 년간 가까이에서 보지 못한 풍경들.



“나, 좀 헤맬지도 모르는데…. 손 잘 잡아야 해요.”

“우,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인파에 정신이 홀린 듯한 고사리 손 같은 목소리가 태형을 꽉 붙들어왔다. “가보면 알아요.” 태형이 인파를 헤치며 걸었다. 석진은 두려웠다. 이 인파가 몰리면 정말, 정말 무서울 것 같았다. 나를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 백화점 쪽으로 갈리는 길에 더욱 몰리는 인파에 굳어가는 손을 태형이 꽉 쥐어잡았다. 석진은 귓가에 내려앉는 낮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걱정 마. 나 있어.”


태형이 석진의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태형은 몇 번 더 길을 헤맸다. 석진도 거진 모르는 장소라고 봐도 무방한 곳이라 속수무책이었다. 의외로 헤매는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석진은 곧 깨달았다. 경계가 조금 사그라듦에 땀이 찬 손이 신경이 쓰였다.


“박사님.”

그놈의 박사님 소리. 이름을 부르다가 태형을 알고 난 뒤로 호칭이 간혹 튄다. 태형이 석진을 흘깃 쳐다보며 읊조렸다.


“태형아.”

이름을 부르라는 의미 같아 석진도 태형을 흘깃대며 대꾸했다.


“태형 씨.”

“태형아.”

“김태형 씨.”

“태형아.”


태형이 주머니 속의 석진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래, 이 손 좀 빼자고 하고 싶은데. 이제 제법 유연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을 피하며 석진이 말했다.


“태형아.”

“응 석진아.”

태형도 자연스럽게 마주 오는 행인을 피하며 말한다.



“…내가 더 형인데.”

“로잔에서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석진아.”

“여긴 한국이잖아요.”

“그래도, 석진아.”


장난 가득한 얼굴로 태형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좀, 욱해도 될 것 같은 무례함인데 석진도 결국 따라 웃는다. 크리스마스 주말 인파를 피하고 나오니 조금은 한적한 낡은 건물 내부가 나왔다. 태형이 이제 좀 안심된다는 듯 드디어 주머니에서 땀으로 축축한 손을 빼냈다. 화려하고 붐볐던 센트럴 시티와는 다르게 한적하고 조용한 경부 터미널이었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예요? 버스 타고 어디 가요?”

“다 왔어요. 아, 시간이 아쉽다.”


태형이 에스컬레이터로 석진을 끌다가 잡았던 손을 놓았다. 덥기까지 했던 손이 떨어져 나가니 일순간 한기가 들었다. 석진은 작게 작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탄 층에서 두어 층을 더 올라가니, 상가 전체가 컴컴하게 불이 꺼진 층이 나왔다. 태형이 망설임 없이 문을 열며 석진이 오길 기다렸다.


“와, 꽃 향기….”

석진을 먼저 들여보내고 유리문을 닫고 들어온 태형이 눈을 감고 꽃향기를 들이 마시고 있는 석진에게 말했다.


“꽃 시장은 일찍 닫아요. 이제 곧 문 닫는 시간이라…. 여기로.”


태형이 석진을 앞서 어디론가 걸었다. 사람이 없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니, 이 이전에 이미 편해졌던가…. 태형의 등만 보고 따라가고 있는 중에 불현 태형이 멈춰 섰다. 그대로 뒤돌아 석진에게 앞을 보라는 듯 씨익 웃으며 눈짓한다. 어두운 꽃 시장과 반대로 태형의 뒤에서 잔잔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대체 뭔데…. 석진이 미심쩍은 눈으로 태형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와…. 와아…..”

“Joyeux Noël.”


태형의 보여주고 싶은 한국의 크리스마스 마켓이었다. 거진 마감시간에 맞춰 찾아온 인적이 드물지만 그 어느 곳보다 반짝반짝한 곳. 석진을 위해 떠올린 곳. 석진의 커진 눈에 반짝이는 전구들이 반사되어 비쳤다. 갖가지 작고 반짝이는 소품. 끊임없이 흩날리는 스노우 글로브들, 크리스마스 캐럴, 오르골 소리들, 움직이는 기차와 소품들, 온갖 곳에서 반짝이는 꼬마 전구들과, 줄지어 있는 트리들, 장식들, 리스. 서울에 있는 온갖 크리스마스 장식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석진이 감격에 찬 눈으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태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천천히 조용하게 빛나는 크리스마스 장식들 사이를 걸었다. 작은 소품들에 석진이 예쁘다며 소곤소곤 난리가 났다. 태형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을 참느냐 난리였고. 거진 한 층의 반을 구석구석 다 돌아 보고 있었다. 멜로디조차 반짝이는 오르골 소리를 한참 듣고 서있기도 했다. 어둡고 낡은 실내임은 떠오르지도 않았고 그저 크리스마스 시즌의 한 중심에 서있는 듯했다. 미니어처 유리돔을 허리를 숙여 가까이 살피고 일어난 석진을 향해 태형이 물었다.



“어때요?”


그 말에 석진이 뒤돌아 태형을 마주 봤다. 눈에 전구들이 반짝여 마치 까만 눈에 별이 박힌 것처럼 빛났다. 석진이 만난 이래로 가장 해사하게 웃었다.


“행복해.”

“…웃으니까 좋네.” 


태형도 따라 웃었다. 석진이 마저 등돌려 작은 트리들을 구경했다. 태형은 바로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들이마셨다. 활짝 웃는 석진이 정말로 예뻤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심장이 또 쿵쿵 뛰었다. 태형이 석진의 뒤에서 몰래 제 왼쪽 가슴을 꾸욱 눌렀다. 활짝 웃으면 눈 아래에 주름이 생기는구나, 깊게 들어가는 입꼬리가…. 아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


“그, 그거 사줄까요?”


태형이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 못하고 한참 오르골을 보고 있는 석진에게 물었다. 석진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얼굴엔 진심인 행복이 가득했다. 여전히 오르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석진이 일어서며 말했다.



“아뇨. 태형이가 준 게 제일 예뻐요.”

아…!


태형이 그 말에 다시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허리를 숙였다. 아…. 아 진짜 어떡하지. 흑심 품고 데리고 왔는데 되레 심장을 계속 가격 당한다. 안 그래도 설렘을 한가득 주는 시즌 마켓인데. 그 가운데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너무 예뻐, 사랑스러워. 생각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태형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안경을 들어 눈을 훔치자 석진이 눈을 크게 뜨며 물어왔다. 정작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울어요?”

“아, 아뇨…. 눈에 뭐가 들어가서.”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 사줄까요?”

“제 거요?”

“응. 난 받았잖아요. 여기서 골라봐요. 나 돈 많은데 쓸 데가 없으니까.”


그 말에 태형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 능력도 있어. 만족스럽게 웃은 태형이 다시 안경을 들고 눈을 훔쳤다. 이러라고 크리스마스인가 봐 심장 터지게 설레고 행복하라고. “어서요.” 재촉하는 말에 태형이 석진의 옆으로 다가가 함께 선물을 골랐다. 무얼 고를까 고민하던 태형의 눈에 들어온 게 하나 있었다. 



“이거. 이거 선물 받고 싶어요.”

“이거요? 너무… 작지 않아요?”

“아뇨. 딱인데.”


초록 잎사귀를 가진 초록 가지. 동글동글한 하얀 열매가 매달려있는 가지들을 붉은 리본으로 모아 묶은 단순한 장식이었다. 겨우 태형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태형은 그 심플한 장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거 뭔지 알아요?”

“그냥 나뭇가지 장식? 진짜 이거 가지고 싶어요?”

“네. 이걸로 주세요.”


계산을 하고 나서도 미심쩍게 태형을 바라보는 석진이었지만, 정말로 기뻐하는 태형의 모습에 그만 의심을 거두기로 했다. 고맙다고 말하며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니 어쩐지 석진도 기분이 좋아졌다. 상가의 마감 때가 올 때까지 둘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여유롭게 만끽했다.



“고마워요.”

“별 걸 다.”

“…진짜로 고마워요.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석진이 고백하듯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정말 최고였다. 이렇게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만끽할 수 있을 줄이야…. 두 계단 아래에서 그런 석진을 올려다보던 태형이 선물 받은 장식용 나뭇가지를 흔들며 웃었다. “나도. 선물 고마워요.” 그 말에 석진이 미소로 화답했다. 이제껏 짓던 미소와 판이하게 다른 밝은 미소였다. 


돌아가는 길에도 역시나 많은 인파가 북적였지만, 석진은 올 때만큼 그 길이 무섭지 않았다. 가는 길에도 역시 태형이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석진은 이제 그 공간에서 부끄러워하기 보다 모자 챙으로 태형의 가슴팍을 콕콕 때리며 장난을 걸었다. 그 장난에 응하듯 태형이 몇 번 캡을 손가락으로 내리눌러 석진의 시야를 가리거나, 턱으로 그의 머리를 지긋이 내리 눌렀다.

타인이 보기에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태형은 다정하게도 석진이 거주하는 곳의 단지까지 석진을 바래다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미 한참 어두워진 날이었다. 겨울밤은 거진 푸른색을 띠었다. 까만 모자와 패딩 사이에 겨우 조금 보이는 얼굴이 유독 하얗다. 헤어지기가 아쉬워 태형이 가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다가 결국 포기한다.



“갈게요. 오늘도 잠 안 오면 연락하고.”

“근래에 덕분에 잘 자요.”

“아니어도 연락했으면 좋겠고요.”


석진이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쳤다. 태형은 진심을 그 웃음에 묻어가본다. 석진이 가볍게 목례하며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다시 또 태형이 그 야속한 발걸음을 잡는다.



“저…! 그, 고맙다는 인사…. 다시 해도 되나요?”

“……? 아까도 했잖아요.”

“제대로 하고 싶어서요.”


태형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석진이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서 태형을 마주 봤다. 맑은 표정이 해보려면 해보라는 듯 태형의 표현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였다. 태형의 가슴팍이 크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말없이 앞으로 다가가니 석진이 또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뺀다. 아무 말없이 빤히 얼굴만 쳐다보는 눈에 석진은 당혹스러웠다. 괜히 무안해져 눈동자를 땅으로 굴리며 눈을 깜박였다.


순간, 팔을 쥐고 거진 코앞까지 다가오는 태형의 얼굴에 석진이 숨을 참았다. 쿵닥 쿵닥 쿵닥 쿵닥. 멈춘 폐를 타고 심박 음이 귀까지 빠르게 올라온다. 태형이 석진의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며 멈춘 순간은 찰나였지만 석진은 그 사이에 심박음을 족히 열 번은 더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윽고 태형의 뺨이 석진의 뺨으로 스며든다. 오른쪽에 한 번, 왼쪽에 한 번. 떨어지는 듯하다가 오른쪽에 한 번 더. 천천히 멀어지는 태형의 얼굴이 푸른 밤의 색채와 함께 눈에 오롯이 담긴다.


“라 비스la bise. 고마움을 표현할 때도 써요.”


두근거림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석진은 눈을 꿈벅이며 고개를 떨궜다. 석진의 위팔을 쥐었던 큰 손이 팔을 따라 내려오다 석진의 검지를 살짝 쥐었다.


“잘 자요.”







“넌 맨날 뭘 그렇게 번역하냐…? 진로 아예 바꿀 거야?”


지민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태형의 뒤통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근래 하는 짓을 보니 일이 어떻게 잘 풀렸나 본데 뭐 일언반구가 없다. 지민이 목을 빼 태형이 무엇을 변역하고 있는지를 본다.


“그렇게 번역해다가 주면 돈 주냐?”

“글쎄…. 사랑을 주지 않을까?”


……?

일순간 지민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미쳤나, 이거….. 이게 지금 볼장 다 보고 산 친구 앞에서 할 말이야? 눈으로 욕하고 있는데 갑자기 태형이 책상 위에 푹 엎어진다. 그러다 벌떡 일어남에 지민이 화들짝 놀란다. 뒤돌아본 친구의 얼굴에 집주인은 짜증이 솟구침을 느꼈다.


“니 그 표정 뭔데! 이 새끼가…! 나가, 나가! 안 나가?!”

“크흐흐흐흐흑, 지민아하하하핳….”


이 집에 사는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게 발그레한 볼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꼴이 퍽 고까워 지민이 수건으로 태형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태형은 석진을 찾아갔다. 햇빛이 좋다는 이유로 그의 집 근처에서 찾아온 번역 시들과 무료함을 달래줄 온라인 단편선을 건넸다. 단지 내의 벤치에서 태형의 글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시간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햇살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목이 또 휑하다며 둘러준 목도리의 온기 때문일까. 아무렴…. 혼자 미소 짓는 횟수가 늘었다.



V

네시까지 갈게요.



오늘도 해가 떴다. 비록 오후 늦게였지만, 태형은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석진을 찾아갔다. 폐부로 찾아드는 찬 공기가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휴직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겨울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해가 잘 뜨지 않는 흐린 로잔에서 결코 인정받지 못하는 성과들에 대해 번민했었겠지. 그 와중 석진을 만난 것이 이제 와서도 신기했다. 얼어붙어 있었을지언정 이제 뺨에 생기가 도는 사람. 분홍빛 뺨에 웃는 얼굴이 햇빛 받은 눈처럼 잔잔히 반짝이는 사람. 겨울 안에서도 유일하게 태생이 봄같이 느껴지는 사람. 태형은 괜히 석진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마음이 따뜻해져 코를 찡긋거렸다.



“인사해도 돼요?”

“으, 응?”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태형이 볼을 맞춰왔다. 석진은 아직 이 볼 인사가 낯간지러운 듯했다. 태형은 내심 수줍어하는 그 모습이 좋았다. 석진이 애써 아닌 척 태형이 건네준 서류봉투를 열어본다. 시 번역이 쉬운 게 아니라며 많아야 한 편을 써오던 시를 오늘은 두 편이나 가져왔다. 그중에 한 편은….


“어?”

“이건 진짜 내 글씨 맞아요.”


석진이 생일 선물로 받은 번역시였다. 태형의 친필로 원문과 함께 적힌. 두 사람이 지나칠 수 있었던 영원을 보게 해준 시. 석진이 눈으로 태형의 필기체를 훑었다. 휘갈긴 글씨 끝을 어루만지듯이 보는 눈빛엔 햇살이 섞인 다정함이 묻어났다. 태형은 그런 석진의 옆모습을 말없이 관찰했다. 종이에 반사된 햇빛이 석진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태형은 그 순간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엷게 미소 짓고 있는 듯한 반짝이는 눈이 정말 예뻤다.




“말 나온 김에…. 이터너티, 느껴본 적 있어요?”

“…….”

석진이 손끝으로 태형의 글씨를 살짝 어루만졌다.


“이 시를 번역할 때 나는 그걸 몽트뢰, 레만호에서 봤다고 확신했었거든요. 랭보의 시처럼.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석진이 시선을 태형에게로 옮겼다. 나무 벤치 등받이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상체를 기댄 태형이 그윽하게 눈을 맞춰왔다. 잠시간 시선을 주고받는다.



“석진 씨, 처음 본 날. 그날…. 보는 순간 알았어요. 진짜 잠깐이었는데…. 그 시간이 영겁이었어요. 그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이게 영원이라는 순간이구나 하고.”

“나를 처음 본 날?”

“응. 기억 안 나요? 나 책 쏟았는데, 주워줬던 날….”


석진이 인상을 쓰고 눈동자를 위로 굴린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태형의 말에 기억을 차츰 더듬던 석진의 미간이 점차 좁혀진다. 태형이 아랫입술을 비죽였다. 아니, 이거 이제 좀 서운하려고 하네. 곧 석진의 눈이 커지며 미간이 이마를 밀어낸다.



“어?! 혹시, 그때? 그때 그게 태형 씨예요?”

“…아 너무하네. 진짜.”

“아, 아 그래서 나를 알았구나. 나는 또….”

“반갑다는 표정은 뭐야, 또.”


태형이 삐진 듯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석진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되는 듯싶었다. 이제 별 의미는 없지만 제대로 오해했었구나. “근데 그땐 안경 안 쓰고 있었잖아요.” “기억은 하네요. 눈이 크게 나쁜 편은 아니어서.” 뾰로통한 대꾸에 석진이 웃었다. 귀엽네. 아무튼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입가에 잔뜩 웃음기를 머금은 석진이 다시 얼굴을 태형이 써온 시로 돌렸다. 그리고 정말 별말 아니라는 듯 툭하고 말을 던졌다.


“나는 매 순간. 메시지가 올 때마다 느꼈었는데.”

“………….”


태형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한동안 올라오지 않는 태형에 석진이 그제야 왜 그러냐는 듯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긴 낮, 빛, 사랑, 미치게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봄이다, 3월. 부드러운 미소의 4월,

꽃이 피는 5월, 뜨거운 6월, 이 아름다운 모든 달들이 나의 친구!

잠자는 강 가장자리에 있는 포플러 나무들이

커다란 종려나무같이 유려하게 휘어진다.

새는 따뜻하고 평온한 숲의 끄트머리에서 파닥인다.

새들이 모두 웃고 있는 것 같고, 초록빛의 나무들도

모두 시를 읊으며 함께 기뻐한다.

낮은 서늘하고 부드러운 새벽으로부터 영광스럽게 태어나고,

저녁이면 사랑으로 가득 차며, 

밤이면 하늘의 축복 아래 거대한 그림자 사이로

무한히 행복한 노랫소리를 들을 거라 믿는다.

Voici donc les longs jours, lumière, amour, délire !

Voici le printemps ! mars, avril au doux sourire,

Mai fleuri, juin brûlant, tous les beaux mois amis !

Les peupliers, au bord des fleuves endormis,

Se courbent mollement comme de grandes palmes ;

L’oiseau palpite au fond des bois tièdes et calmes ;

Il semble que tout rit, et que les arbres verts

Sont joyeux d’être ensemble et se disent des vers.

Le jour naît couronné d’une aube fraîche et tendre ;

Le soir est plein d’amour ; la nuit, on croit entendre,

À travers l’ombre immense et sous le ciel béni,

Quelque chose d’heureux chanter dans l’infini.



“…빅토르 위고네요.” 

“아무래도 빼놓을 수가 없어서.”

“한 겨울에 봄이라니.”


그건 네가 봄 같아서 그래. 딱딱한 반응에 태형이 대꾸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작가를 아래 기재해 놓지 않았는데 척하고 아는 것이 이미 알고 있었던 시인가 싶어 태형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에 석진이 빅토르 위고의 시를 많이 읽었다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부럽다, 원문으로 읽는 거.”

“의미 없어요, 석진 씨는 내가 가져온 걸 개인적으로 감상하기만 하면 될 텐데.”

그 말에 석진이 피식 웃곤 손가락으로 한 구절을 가리킨다.

“여기, 사랑amour이라는 거. 왜 쓰여있을까." 

“글쎄…. 봄에 사랑이 싹 트는 게 필연적이라서?”

“그러려나…. 난 진짜 사랑에 빠진 때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 말에 태형이 다시 한 번 시를 읽는다. “어째서요?” 감상을 묻는 말에 조금 부끄러워진 석진이 작게 목을 가다듬곤 예쁜 손가락으로 그 아래 즈음의 구절을 다시 가리킨다.


“따뜻하고 평온한 마음의 끝에서, 파닥이는 거. 가슴속에서 파닥거리면 설레지 않아요?”


그 말에 놀람을 눈으로 표현한 태형이 곧 진득이 석진을 바라본다. “그래서 만물이 노래하는 것 같겠지….” 조심스레 말하는 게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무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해도 은은한 미소가 얼굴을 떠나지 않는다. 태형이 물었다.



“빅토르 위고. 좋아해요?”

그 말에 석진이 작게 고개를 젓는다.



“좋아한다기보단…. 위고의 시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기쁨이나 괴로움을 표현할 때 자신과 시를 너무 연극화시키는 것 같아서. 감탄은 많지만 애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대조법도 많은 반면에, 느낄 수 있는 뉘앙스가 부족해요.”


생각보다 분석적인 대답에 태형이 또 한 번 놀랐다. 예쁜데 지적이기까지 하다는 생각 중이었다. 빠져도 한참 푹 빠진 눈빛이 도저히 덜어내어지지가 않는다. 



“19세기에 위고를 차용하지 않은 시인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위고의 낭만주의를 옅게 가져갔던 시인을 되레 더 좋아해요.”

“불어불문학 나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데.”

“연기도 아는 만큼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제야 허공에 시선을 두고 말하던 석진이 태형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넋 놓고 석진을 보고 있던 태형이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자세를 바꾸느냐 얼굴에 스친 제 손가락이 문득 차갑다고 느낀다. 대화하고 있다 보면 정말 추운지를 모르겠다니까….



“난 그 말이 좋던데요. 겨울은 내 머리….”

“아아, 영원한 봄은 내 마음 속에 있다.”

“푸핫, 네. 그거요.”

받아치는 석진의 대답에 태형이 만족스레 웃었다. 






겨울은 내 머리 안에 있지만, 영원한 봄은 내 마음에 있다.

l'hiver est sur ma tête, mais le printemps éternel est dans mon cœur. -Victor Marie-Hugo






“참 이거.”


날은 벌써 어두워져 헤어지기 전 태형이 백팩에서 무언가를 꺼내 석진에게 건넨다. 석진의 두 손에 가득 채워진 건 다름 아닌 돌돌 말려진 앵두 전구였다. 뭐냐는 듯 눈을 들어 태형을 쳐다보자 태형이 백팩을 고쳐매며 코를 긁적였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아, 그랬나요? 날짜 가는 걸 모르겠네.”


그 말에 태형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들린 전구 뭉치를 내려다보느라 태형의 표정을 보지 못한 석진이 말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네…. 뭐. 집에서 분위기 내라고.”


그 말에 석진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참, 별 걸 다 챙겨주는 사람. 이제 잘 자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태형이 앞에서 무언가 머뭇거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기다리다 이번에는 석진이 먼저 태형의 가까이에 다가섰다. 살짝, 발뒤꿈치를 올리며.


“…!”


오른쪽에 한 번. 왼쪽에 한 번. 가볍게 볼을 맞대고 떨어진다. “고맙다는 인사.” “…….” 잔뜩 얼굴이 달아오른 건 태형이었고 홀가분해 보이는 건 되레 석진이다. 석진이 살포시 웃었다. 박사님, 귀여우시네. 얼어있는 태형을 두고 이제 들어가 보겠다는 제스처로 몸을 틀었을 때였다.



“저, 저기….”


석진이 말간 눈으로 태형을 돌아보았다. 숨을 꾹 참고 있었던 태형이 코로 조금씩 이산화탄소를 내뱉으며 말했다.



“그, 제가…. 제2전공이 전기 전자인데….”


“전구 달아드릴까요.”

“……?” 


잠시간 말의 의미를 이해 못하던 석진이 이윽고 웃음을 터쳤다. 얼마간 소리 내며 웃는 모습에 태형이 멋쩍은 듯 목덜미를 주물렀다.








“여기요?”

“거기서 좀 더 아래로, 거기!”


아무래도 심미안은 석진이 더 나은 듯했다. 어설프고 순진한 멘트에 한참 웃은 석진이 찔끔 나온 눈물을 닦고 태형을 초대했다. 이렇게 소리 내서 너털웃음 지은 건 정말 오랜만이라며 집으로 올라가는 길 내내 석진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옆엔 괜스레 수줍어 눈치를 보는 전기 전자 학사 학위 소지자가 있었다.


가구라곤 소파와 테이블, 흔한 TV 조차 없던 단조로운 거실의 하얀 벽에 따스한 크림색의 전구들이 걸렸다. 전공을 들먹인 게 허세는 아니었던지, 중간에 빛이 나오지 않던 전구도 금방 피복을 벗겨 해결해냈다. 그 모습에 석진이 뒤에서 놀림조로 환호했다. 조명 하나 달았을 뿐인데, 제법 분위기가 났다. 아치형 레이스처럼 늘어진 앵두 전구들을 보면서 석진이 말했다. 오늘 저녁도 눈에 별이 비치는 듯했다.



“진짜 예쁘다. 고마워요.” 

“이것도, 같이 달아놓을게요.”


태형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석진에게 받은 나뭇가지 장식이었다. 거실 벽 위쪽 한가운데에 핀을 꼽아 장식을 고정시켰다. 준비하고 온 건지, 척척 벽 고정 핀이 나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석진은 계속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박사님 너무 귀여우신 거 아닌지. 널찍한 태형의 등 뒤에서 손으로 가려도 자꾸만 올라가는 입술을 진정시키느라 혼쭐이 났지만 그만큼 기뻤다. 태형 한 명의 등장으로 적적하고 시렸던 공간이 따스하게 변했다.



“이거 무슨 나무인지 알아요?”

“글쎄요. 뭔데요?”

“미슬토나무인데….”




석진이 어느새 벽을 마주 보고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바닥에 앉아있었다.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는 손길에 태형도 석진의 옆에 앉았다. 벽에 대롱대롱 걸려 따스한 빛을 발하는 전구들과 그 가운데에 소박하게 걸린 미슬토 장식. 그 아래 붙어 앉아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석진이 바닥에 손을 짚으며 상체를 뒤로 기댔다. 태형은 여전히 무릎 위에 팔을 올려두고 있는 채였다. 뭔가 말하기로 결심한 듯 태형의 등이 호흡을 따라 한 번 들썩였다. 석진은 그런 태형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미슬토 나무에 전설이 있는데,”

“오…. 옛날 이야기 시간인가 봐요.”

“그게, 미슬토 나무 아래 누군가를 데려가면….”


반드시 키스해야 하는데…. 태형이 이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고개도 들지 않고 무언가를 머뭇거리기에 석진이 상체를 일으켰다. 멀었던 석진이 곁에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낀 태형이 말하길 결심하며 석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때.


“……!”


태형의 큰 눈이 더욱 크게 뜨였다. 눈앞에 보이는 살포시 감긴 눈이 참 예쁘다. 태형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술에 닿은 말캉함이 그제야 느껴진다. 입술을 맞대고 있는 순간이 비현실적이게 다가왔다. 맞댄 입술로 석진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끼며 태형이 그제야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다른 감각들이 더 선명하게 상황을 전해왔다. 얼굴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체온과, 살짝살짝 닿는 얼굴의 솜털, 마시멜로같이 폭신한 입술의 감촉, 달큰한 숨과 그때마다 풍겨오는 체취. 그 무엇 하나 벅차지 않은 것이 없었다. 태형은 바닥을 더듬어 석진의 손가락을 찾아 꼬옥 쥐었다. 손가락을 쥐는 힘만큼 맞닿은 입술이 꾹 눌렸다.


“좋아해요….”


잠깐 생긴 간극으로 태형이 숨을 불어넣듯 고백했다. 눈동자가 반짝이는 석진의 모습을 모두 기억하려는 듯 끊임없이 움직였다. 빛이 가득한 눈이 일렁이는 건 석진도 마찬가지였다. 옅게 웃으며 석진이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태형도 함께 눈을 감았다. 다시 입술이 완벽히 맞물렸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만…. 한 번만 더요….”


떨어지는 입술이 아쉬워 태형이 다시 입술을 붙여왔다. 겨우 입술만 맞대고 있는 주제에 그렇게 심장이 뛸 수가 없었다. 석진이 제 손가락을 잡은 손을 엄지로 감쌌다. 촉, 촉. 몇 번을 더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심장이 주체 못하게 뛰는 건 석진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어떤 밤들을 지냈었는지는 까맣게 잊은지 오래였다. 한 번 더, 입술이 포개졌다. 손을 꽈악 쥐고.


몰라…. 모르겠다. 이 순간은 그냥 당신이랑 사랑할래…….


이상적인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완벽히.
















저, 전철을 타...? 이불 밖은 위험해.....




겁많은 뷔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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