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달의 연인 OST - Gesture of Resiss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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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 국혼(國婚)

 

w. 도화




 

청명하던 하늘이 금방이라도 어둠 속으로 사라질 듯 잿빛을 머금어가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울렁이던 구름이 폭우라도 왕창 쏟아낼 기세였다. 탁한 회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이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황궁 위에서 꽤나 다급히 울렁이고 있었다. 이제 막 황궁으로 들어선 백현이 그런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고는 걸음을 멈칫했다. 비가 오면 안 될 텐데. 백현이 걱정된다는 듯 잠시 중얼거렸다. 조금 전보다 더욱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그의 표정이 하늘을 따라 어두워졌다.

흑표의 연운궁(煙雲)은 오늘도 역시나 어둡기 그지없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궁이라 보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사나운 기세를 잔뜩 머금고 있는지라,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기운이 꽤나 스산했다. 지나다니는 궁녀들조차 몸을 잔뜩 웅크리게 만드는 그 어둠에 백현 역시 잠시 그 앞에서 숨을 골랐다. 웅장하게 위로 뻗쳐있는 금빛의 휘황찬란함조차 황제 앞에서는 그다지 쓸모 있지 못하는 듯 싶었다. 일곱 개의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황룡이 거대한 황제궁 문을 따라 이리저리 휘감아져 있었다. 백현이 이를 잠시 시선에 담아내다 앞에 서 있는 황제궁 내관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폐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까?”

“예, 책사님. 말을 올릴까요?”


백현의 고개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하지만 오늘따라 웅장한 황제궁 문 뒤로 쏟아지는 열기는 유난히도 더욱 짙어진 상태였으니. 안으로 들어서는 백현이 애써 표정을 또렷이 밝히고는 걸음을 내딛었다.

 




*

 



본디 수인이란 그 개체가 매우 적어 원인과 대적할 수 없는 위치였다. 멸시의 대상이 되었던 그들은 원인들과 쉽게 어울려 살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산골짜기나 황폐화된 국경지대에 무리를 지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전부였으며, 일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들어 도적질을 업으로 삼아 목숨을 이어가곤 했다.

하지만 그런 수인의 위치가 단박에 뒤집어진 사건이 있었는데-. 표범을 종으로 삼는 수인들이 제국을 장악하면서부터 이 세상의 판도는 그대로 달라졌다. 급격히 감소하는 원인의 수. 그리고 이와 동시에 급격히 증가하는 수인의 수. 황실을 차지한 표범들을 중심으로 수인들은 차츰 제국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황제는 물론이요, 정계의 주요직부터 저 아래의 백성들까지. 항상 천시 받았던 수인들은 이제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빠르게 제국을 삼키기 시작한 수인들은 그보다 더 빠르게 세력을 구축했고, 제국을 손에 넣었다. 점차 뻗어나가는 수인들의 세력에 그들이 이끄는 왕조들 역시 순식간에 세계 각지에 들어섰다.


“폐하, 변 책사께서 오셨습니다.”

“…들라고 해.”


문 뒤로 이어진 낮은 목소리에 궁녀들의 행동 역시 덩달아 빨라졌다. 들어오라는 명을 뱉은 목소리는 느릿하게 울렸지만, 그 명 하나에 황제궁의 모든 이들이 순간적으로 몸을 바짝 세웠다. 백현이 급히 열려진 문에 숨을 잠시 죽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느꼈던 황제궁의 매서운 기운이 정녕 틀린 것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더욱 가라앉은 황제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집무실에, 백현이 결국 내딛던 걸음을 잠시 멈칫했다.

잠시 그 앞에 서서 숨을 고른 백현이 애써 표정을 밝히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용상(龍床)에 앉아 업무 보는 것을 원체 싫어하는 황제시기에, 그를 찾는 백현의 행동이 꽤 다급히 이어지고 있었다. 한눈에 담기도 버거운 황제궁 집무실이 어둠에 잠겨있었다.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보였지만 아직 이른 저녁인데, 집무실은 어떠한 빛 하나 용납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용상 앞에 놓인 널찍한 편백나무 책상 위에 거의 아스러져 가고 있는 작은 등불 하나만이 간신히 빛을 머금고 있었다. 백현이 그 등불에 시야를 의지한 채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분명 안에서 명을 내리는 목소리가 들려왔건만, 용상을 비롯하여 그 주위는 그저 텅 비워져 있을 뿐이었다.


“백현.”

“…폐하.”


그런 백현의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또 다시 파고들었다. 집무실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책상으로 백현의 고개가 다급히 돌아갔다. 급한 회의가 있을 적에만 사용되는 짙은 고동빛의 책상 앞에 세훈이 아무런 표정 없이 앉아 있었다. 고요한 집무실 위로 백현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는 소리만이 웅웅 울리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단박에 움츠리게 만드는 삼백안이 자신을 또렷이 바라보고 있었다. 백현이 급히 몸을 숙이며 황제를 향한 예를 표하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빠르게 뱉어지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매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황제로 인해 잔뜩 떨리고 있었다. 세훈을 꽤 오랜 시간 모신 자신이었지만 이리도 기분이 가라앉는 황제를 마주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백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올리며 입술을 한번 축였다.


“곧 비가 올 것 같더구나.”

“예, 폐하.”

“국혼 날에는, 부디, 맑아야 할 터인데.”


결국 백현이 눈을 꾹 감았다 올리며 몸을 뒤로 한발 물렸다. 걱정을 표하는 말이라 하기에는 짓이겨지는 입술 새로 뱉어진 짜증은 결코 숨겨지지 않았다. 뚝뚝 끊어지는 모든 말들과 위로 치켜졌다 아래로 내려오는 눈썹은 지금 세훈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이었다. 날카롭게 번뜩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백현이 차마 세훈을 올곧이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단지 송구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니기에 백현은 이번엔 그저 묵묵히 입을 닫는 것을 선택했다. 세훈 역시 자신이 이리 분노를 표할 대상이 백현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였다. 고동빛 책상 위로 짙게 내려앉는 황제의 한숨이 금방 사라지지 못하고 그 위를 한참동안 맴돌았다. 국혼.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

“….”


꽤 오랫동안 말이 없는 세훈의 앞에서 백현이 입술을 옴짝달싹했다. 다리가 저릿해져오는 느낌이었지만 스스로를 다독이고 또 다독이고 있는 황제를 보니 백현은 이조차도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한참을 앞을 향해 가만히 시선을 던지고 있던 세훈이 이번엔 몸을 뒤로 기대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우중충했던 하늘은 이제 한두 방울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백현이 세훈과 창 너머의 어두운 하늘을 번갈아 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올렸다.

저 시선이 담고 있는 것은 결코 황제의 시선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렇게 표범을 종으로 삼는 수인이 황제에 오른 후로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던 제국. 하지만 약 300년을 이어오던 황실이 그대로 뒤엎어진 사건이 생기고야 말았는데-.

 


본디 흑이란 어둠이요, 암흑이자 만물의 타락.

 


황제가 그리도 총애한다던 황후에게서 태어난 황자의 온몸이 흑(黑)으로 덮여있는 것을 본 순간 제국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흑표. 제국을 망치려는 황자를 당장이라도 죽이라는 목소리가 제국 각지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으며, 당장이라도 반란을 일으킬 듯 보이는 움직임들 역시 꽤나 거셌다. 결국 고작 열 살조차 되지 못했던 황자는 사는 것이 지옥이라던 제국의 끝으로 그대로 버려졌다. 허나 운명의 장난일까, 하늘의 농락일까. 그 핏빛의 지옥에서 처박혔다 살아온 세훈은 제국을 평정하고 그대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섰다.


“국혼은 차질 없게 준비하거라.”

“예, 폐하. 걱정 마시옵소서.”


아까의 상기되었던 목소리와는 달리 차분하게 이어진 세훈의 말에 백현의 고개가 조금은 다급히 끄덕여졌다. 스스로의 감정을 다독인 겐지 말을 잇는 세훈의 표정이 방금 전과는 달리 꽤 담담해보였다.

풍화국(風華) 황후의 자리가 공석이 된지도 어연 5년. 세훈의 첫 번째 황후는 자신의 첫 아들을 낳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황후를 들이라는 끝없는 상소문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황제인지라 여태껏 대신들은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들 역시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태자의 나이가 아직 다섯밖에 되지 않았는데, 여전히 비어있는 황후의 자리에 대신들은 하나같이 걱정을 표했다. 올해 있을 황제의 스물일곱 번째 탄신연 전까지는 황후를 무조건 들이셔야 한다는 대신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했다. 그러나 황후로 맞이할 새로운 가문을 물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흑표에게 그 누구도 자신의 자식을 들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숨조차 온전히 내뱉기 힘든 매서운 삼백안을 본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절초풍할게 분명했다. 모순적이기 그지없는 상황에 세훈은 결국 헛웃음을 한번 내뱉었다.


“폐하, 곧 김(金)가의 공자께서 도착하신다 하옵니다.”

“…그래.”


결국 뼈대 있는 유서 깊은 가문이었지만, 원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시 받았던 김(金)가문에서 황후를 들이기로 결정되었다. 김(金)가문은 수인이 황위를 차지한 이후로 그 세력이 급격히 감소하였지만, 꽤나 굳건히 가문을 유지하고 있는 원인 가문 중 하나였다. 물론, 이번 김(金)가의 외동아들이 황후로 낙점된 것 역시 자신의 자식을 황후로 올리기 겁이 났던 수인들의 모략 아닌 모략 때문이었다.

백현이 그제야 세훈에게 전해야 할 말을 올렸다. 이젠 황궁 바닥으로 세차게 내리꽂아지는 폭우에 백현이 더욱 걱정스런 얼굴을 해 보였다. 오늘 저녁내로 황궁에 도착한다며 연통을 보내왔던 김(金)가문은 아마 예상보다 조금 늦을 듯 싶었다. 비가 이리 쏟아지니 최대한 빨리 도착한다 해도 내일 새벽이 될 게 분명했다. 아니, 도성으로 들어오는 산세(山勢)는 매우 가파르고 험난했기에 이 폭우를 뚫고 온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걱정이었다. 백현이 금군이라도 보내야하나, 잠시 고민하며 창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온 제국을 파헤칠 기세로 퍼붓는 폭우가 황제의 불편한 심기를 알기라도 하듯 매섭기 그지없었다.


“조심히 뫼시거라.”

“예, 폐하. 도착하시는 대로 모시겠나이다.”

“그래.”


창문을 두드리는 비바람에 세훈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쓸데없는 국혼이었다. 아직 어리긴 하지만 황태자 역시 바로 세워져 있는 제국이었다. 후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하러 또 다시 황후라 들이라 하는 겐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집무실을 나가는 백현을 보며 세훈이 머리를 한번 쓸어 올렸다. 아마 황후가 들어온다면 그 역시도 자신의 이 저주받은 모습에 그대로 뒷걸음질 칠게 분명했다. 거기다 그는 원인이라 하지 않는가. 수인도 아닌 이가 온몸이 흑(黑)으로 뒤덮인 자신과 혼인이라. 세훈이 괜스레 뻗치는 화에 또 다시 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깊은 숨을 한번 내쉬었다. 저주 받은 아이. 모두가 버린 아이. 죽어야 마땅한 존재. 세훈이 자신의 귓가로 웅웅 울리는 지독한 울림에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어렸을 적부터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들어온 말이 오늘따라 더욱 심장을 조여 왔다. 흑으로 덮인 온몸에 피를 잔뜩 묻히고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섰건만,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떠받드는 이 자리조차, 자신의 것이 아님을 매순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숙여지는 고개도, 끄덕임 하나로 움직이는 권력도. 그저 흑표에 대한 두려움뿐임을 자신은 모르지 않았다. 세훈이 몸을 다시 뒤로 기대며 눈을 꾹 감아 내렸다. 정녕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게 분명했다. 


온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 생각인지 끝없이 쏟아지는 폭우가 야속했다.

 

 

 


***


 

“악. 오빠, 미안해요!”

“왔어?”

“미안, 미안. 비가 와서 늦었어요.”

“괜찮아. 다음에 일찍 오면 되지.”

“알았어요. 아, 밖에 비 진짜 많이 와요. 우비도 입어야 할 듯.”


편의점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온 윤정이 우산 가득 묻어있는 물기를 탁탁, 털어냈다. 그리고는 준면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눈을 축 내리며 말을 이었다. 다음 타임 알바인 윤정이 30분이나 늦는 바람에 준면의 퇴근 역시 덩달아 30분 늦어진 참이었다. 하지만 준면은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며 별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힐끗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낮부터 하나둘씩 떨어지던 비가 결국에는 폭우로 변해 잔뜩 쏟아지고 있었다. 가로등조차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어둠에 이미 밖은 칠흑 같은 암흑뿐이었다.


“근데 오빠 어디 아파요?”

“아. 어제부터 으슬으슬 한게 감기 걸린 거 같아.”

“헐. 날도 다 풀렸는데 웬 감기. 오빠 따뜻하게 좀 입고 다녀요.”


윤정의 타박 아닌 타박에 준면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찾아온 3월은 빠르게 추위를 내쫓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 급작스런 폭우에 쌀쌀함은 여전했지만, 짙어지는 봄의 열기를 쉽게 막을 수는 없었다. 준면이 괜히 겉옷을 부산스레 챙겨 입으며 윤정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건넸다.

윤정과 빠르게 교대를 한 준면이 가방을 다시 고쳐 매며 편의점을 나섰다. 이씨, 새로 산 우산인데. 준면이 우산을 더욱 꾹 쥐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괜히 여기서 알바 한다고 했어. 돈이 꽤나 급한 바람에 자취방에서 조금 먼 곳으로 알바를 구한 게 문제가 될지는 또 몰랐다. 이미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바지를 보며 준면이 울상을 잠시 해보였다. 신발은 말하나마나였다. 또 말리려면 한참 고생하겠네. 준면이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자취방까지 거리를 생각하며 더욱 걸음을 보채였다. 하지만 감기 역시 단단히 들어선 모양인지 자꾸만 내딛는 걸음이 느려졌다.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온몸의 열기 역시 준면을 쉽게 도와주지는 않을 듯 보였다. 준면이 눈을 애써 또렷이 올려 뜨며 고개를 좌우로 마구 내저었다. 간신히 정신을 붙잡는 준면의 입술 새로 짙어진 숨이 연신 뱉어졌다.

하루에 하는 알바만 두 개였다. 공강인 날에는 낮에 카페에서 알바를 하다 저녁에 편의점으로 넘어왔다. 그나마 이번 학기 시간표가 운 좋게 짜진 게 다행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만 학교를 가면 되니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이랄까. 이렇게 알바를 하지 않으면 방학 내내 꼬박 벌어도 다음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준면이 저 멀리 보이는 자신의 자취방에 이젠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월세며, 전기세며. 먹는 것, 입는 것을 최대로 줄이고 또 줄여도 이번 달 생활비가 빠듯했다.


“내일 카페에 손님이나 없었음 좋겠다.”


우산을 더욱 당기며 준면이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빌 수 있는 소원은 고작 이것이 전부라는 생각에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인도 아닌 원인인 자신이, 그것도 돈도 부모도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이 사회와 마주한다는 것은 꽤나 버거운 일이었다. 이미 각계각층의 웬만한 주요 자리는 전부 수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난 왜 수인이 아니에요? 원망을 담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아니, 묻는 것조차 그저 사치인 상황. 고작 열셋의 나이에 사고로 돌아간 부모라 딱히 물을 사람도 없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머물고 있던 친척집에서도 눈치가 보여 그냥 나와 버렸다. 차라리 경종이라도 수인이었다면 상황은 조금 나아졌을 것이었다. 원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인이니 준면에게 이 생활이 더욱 벅찬 것일지도 몰랐다.


“….”


죽을까. 매번 속에 담고 있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나아질 게 없는 목숨. 여태껏 붙들고 있는 게 우스울 정도였다. 이젠 거의 다 도착한 자취방에 준면이 조금 걸음을 늦추며 고개를 좌우 저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게 아까운 것인지 아님 억울한 것인지, 매번 고민할 적마다 내린 대답은 결국 없었다. 아니, 사실 무서운 게 분명했다.

 

빵- 빠앙-!

 

그때 준면의 귓가로 다급한 경적이 빠르게 파고들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느라 저 멀리서 다가오는 트럭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운전자 역시나 사람 한명 지나다니지 않는 어두운 폭우 속에서 준면을 보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결국 바로 앞에서 가득 쏟아지는 차의 헤드라이트에 준면이 눈을 꾹 감아 내렸다. 미쳤다. 준면이 조금은 허망한 상황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죽을까, 고민한 게 무색해질 정도였다. 정말 이대로 죽는 거야? 이렇게 허무하게? 준면이 들고 있던 우산이 옆으로 떨어졌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우산과 함께 머리부터 준면의 온몸 역시 젖어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젖지 않으려 방금 전까지 아등바등했던 상황이 우스워졌다. 눈조차 뜨지 못할 정도로 들이붓는 폭우가 정말 그대로 자신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야, 미쳤어?!”

“….”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니라고-!”


옆으로 빠르게 빗겨지나가는 트럭에 준면이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내동댕이쳐진 우산 옆으로 거의 쓰러진 채 놀란 숨을 다독이고 있는 준면의 모습이 이젠 애처롭게 보일 정도였다. 트럭과 부딪히지는 않았다만 이미 놀라 벌렁거리고 있는 심장 역시 준면이 버텨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간신히 준면을 빗겨 지나간 트럭은 이미 저만치 나간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준면이 눈을 한번 감았다 올렸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골목길이 집값이 싸다고 좋아했는데, 싼 이유가 다 있었다. 이리 길바닥에 처량히 엎어진 상황에서조차, 이 폭우 속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언제 이리 차오른 것인지 이미 빗물은 배수조차 되지 않아 길가를 아예 물가로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이미 젖은 옷이었지만 설상가상으로 넘어지기 까지 한 바람에, 바지와 신발을 물론 온몸이 물에 빠진 생쥐마냥 전부 축축했다. 거기에다 이젠 머릿속이 웅웅 울리다 못해 눈앞마저 흐려지고 있었다. 이놈의 감기. 어제 밤에 진즉에 약이라도 챙겨먹을걸. 준면이 이제 와서야 후회 아닌 후회를 하며 결국 눈을 꾹 감아 내렸다.

누군가 저 아래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아야 하는데 온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바보 같아, 김준면.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왔으면서. 준면의 입술 사이로 또 다시 헛웃음이 한번 터졌다.


“….”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대로 멀어지는 정신이라 준면은 이조차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옷 사이사이로 새어 들어온 물이 이젠 자신의 온몸을 갉아 먹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리는 없었다. 심해에 빠지기라도 하듯 붕 떠버린 몸. 그리고 그 깊이만큼이나 가라앉기 시작한 몸에 준면의 고개가 결국 뒤로 확 젖혀졌다. 이를 따라 온몸의 힘 역시 그대로 풀려버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눈을 떠 살펴볼 수도 없었다. 들어오는 빛 하나 허용하지 않는 암흑이 끝을 모르고 아래로, 더 아래로, 준면을 계속해서 끌어당겼다. 결국 준면의 몸이 놓아버린 정신과 함께 축 늘어졌다. 


온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 생각인지 끝없이 쏟아지는 폭우가 야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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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도화입니다.

고전물 + 수인물 + 타임리프 + 정략혼까지 (...) 제 취향 마구 섞은 새로운 장편으로 찾아뵙게 되었어요. 11월 새준온3에 가져갈 고전 장편입니다. 현대물 장면은 아마 1편이 마지막일 것 같아요! 완결 목표는 8월 안으로 내는 것인데,,,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桃花 도화 / RPS 찬백 세준 @dohwa_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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