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헤어졌어.”

 

커크는 책가방을 던져놓고 소파에 털썩 앉았어. 위스키를 딴다,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던 친구들의 시선이 모두 커크 쪽으로 쏠렸어. 일순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어. 부스럭 거리느라 그 말을 못 들었던 친구 하나만 야, 감자칩도 먹을래? 하면서 서랍을 뒤적이고 있었지.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얼른 그 옆구리를 쿡쿡 찔렀어. 정작 커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앞에 놓인 맥주를 땄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조금 새어나왔지. 커크는 입으로 거품이 흘러넘치는 걸 막았어. 방 안에 있던 친구 하나가 부엌에 가 있던 친구들을 손짓해서 불러 모았어.

 

“그 의사 남친이랑? 왜?”

“남친? 얘 남친 있었어? 언제부터?”

“넌 눈이 있냐. 그게 애인이 아니면. 친구냐? 친구야?”

“다 조용히 해봐. 그러니까, 진짜 헤어졌다고?”

 

“또 바람피우다가 걸렸어?”

“야, 또는 아니거든. 그 때 한 번이야. 그리고 밤새 술만 마셨다고.”

“어쨌든 자려고 하긴 했잖아.”

“안 잤잖아.”

“니 남친은 안 잔 거 모르잖아.”

“아, 그게 언제 얘긴데. 그리고 어차피 어제부턴 남친 아니야.”

“어쩌다가 헤어졌는데?”

 

커크는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어. 탄산이 입 안에서 톡톡 튀었어. 커크는 본즈와 이별하는 순간을 수십 번도 더 상상해봤어. 어떤 장면에서 둘은 빗속에서 악을 지르며 싸웠어. 어떤 장면에서 커크는 울어서 목이 멘 채로 이별을 고하기도 했지. 어쨌거나 커크는 이별이란 건 조금 더 극적인 것일 줄 알았어. 영화나 드라마처럼 말이야. 하지만 의외로 그 날은 여느 날과 다를 바가 없었어. 그 날 저녁, 커크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장바구니를 손에 들고 들어오는 본즈를 보고 있었어. 우리 헤어지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마치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머릿속은 깨끗했어. 본즈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커크의 눈을 봤어. 그리고 다시 천천히 장본 것들을 정리하며 대답했지. 그래, 알았어.

 

“헤어지자고 했어.”

“니가? 니가 했다고?”

“그래서 뭐래?”

 

“알았대.”

“아.... 끝난 거 맞네.”

“그거 한 캔 더 줄까?”

 

커크는 빈 캔을 테이블 안쪽으로 밀었어. 그리고 찬 맥주를 한 캔 더 건네받았지. 헤어지고나면 정말 몇날며칠을 울어댈 줄 알았는데 정작 헤어져보니 그렇지도 않았어. 오히려 오늘 커크는 오랜만에 제 시간에 강의에 출석했어. 늘 달고 다니던 본즈 생각은 머리에서 떼어냈지. 본즈에게서 짐 정리 끝났다는 문자를 받은, 딱 그 한 번만 빼면 말이야. 그 문자도 확인하자마자 바로 지웠으니까 아무튼 그건 무효였어. 사귀는 동안에는 둘의 사이가 마치 영화같이 느껴졌는데, 돌이켜보면 뭐 별 것도 아니었지. 커크는 감자칩을 한 움큼 쥐고 바삭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씹어 먹었어. 오늘따라 이상하게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질 않았거든.

 

“아, 됐어. 조언이나 해줘.”

“별 거 있나. 사람을 좀 만나.”

“새로운 사람.”

“맞아. 새로운 사람. 새로운 취미나 그런 것도 좀 찾고.”

“좋아. 그리고?”

 

“밤에 전화하지 마.”

“이게 제일 중요해. 찾아가지도 말고.”

“밤에? 왜?”

 

“우리 좋았잖아 이런 소리 하지 말라고.”

“다시 잘해보자 그런 거.”

“아, 진짜 그거 최악이야.”

“그런 건 듣지도 마.”

 

커크는 맥주 한 캔을 또 다 비웠어. 커크가 별 대답이 없으니까 친구들은 저마다 자기들의 전애인 이야기로 화제를 옮겨갔어. 커크에게 본즈는 첫 연애 상대였고, 그러니 이번은 첫 번째 이별이었어. 하지만 커크는 자신이 나름대로 잘 견뎌내고 있는 것 같았어. 하기야 진지하게 슬퍼하는 건 자기한테 어울리지도 않았지. 하루 만나고 보내주는 것도 수번을 반복해봤는데, 이거라고 뭐가 다르겠어. 그저 조금 오래 한 사람과만 섹스 했을 뿐이지. 커크는 핸드폰 화면을 켜서 곁눈질로 살짝 훔쳐봤어. 9시 10분. 커크는 다시 핸드폰을 던져놨어. 정말로 시간만 궁금했을 뿐이었어. 정말로.

 

“너 설마 문자하려고?”

“뭐래. 그냥 본거야.”

“지미, 너 이거 깔끔하게 해. 헤어지고 싶어서 그 말 한 거 아니야? 헤어지자고.”

“어? 당연하지.”

“니 남친은 뭐라고 대답했어.”

“알았다고.”

“그건 무슨 뜻이겠어.”

“......”

“야, 술이나 더 마셔라. 그거 놓고. 와인 따줄게.”

 

커크는 오랜만에 친구 방에서 술을 마시며 밤을 보냈어. 아침에 눈을 떠보니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졸고 있었지. 커크보다 일찍 깨서 엉망이 된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있던 친구 하나가 가볍게 아침 인사를 건넸어. 커크는 몸을 일으켜서 찌뿌둥한 몸을 풀었어. 습관적으로 핸드폰 알림부터 확인해봤지. 마찬가지로 연락은 없었어. 커크는 핸드폰을 놓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물의 페트병 뚜껑을 돌렸어. 주위에는 친구들이 여럿 널브러져서 자고 있었어. 그래, 고작해야 삶에서 한 사람이 조금 멀어졌을 뿐이야. 도리어 마음이 묶여 있는 곳이 없으니 홀가분했지. 조금 허전한 기분은 그냥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런 것뿐이야.

 

 

 

K 그냥 별 거 아니에요. 사랑하지 않는데 계속 사귈 순 없잖아요.

B 지미, 난 그런 적 없어.

K 믿지 마세요. 그랬어요.

B 아니, 그게 -

 

자, 그러면 제임스 씨는 왜 그렇게 느끼셨던 건가요?

K 그냥,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사실 우리가 친구일 때랑 달라진 게 없는 거 같더라고요.

B 달라진 게 왜 없어. 친구끼리는 -

K 그래, 본즈. 섹스는 안하지. 됐어?

B 그 말 아닌 거 알잖아.

 

 

구체적으로 어떨 때, 서운함을 크게 느끼셨나요?

K 서운했던 건 아니에요. 그냥...

네, 그냥?

K 제가 욕심이 많았던 거죠. 그게 레너드를 힘들게 했을 거에요.

B 아니야. 안 그랬어.

K 그랬을 거야. 전 항상 사소한 것들로 불만이 많았거든요. 레너드는 그걸 다 받아주기만 했으니까.

B 그게 아니 -

K 내가 말할 차례잖아, 본즈.

B 알았어. 미안해.

K 아무튼 그래요. 친구일 때 우리 관계가 더 바람직했다고 생각했어요.

 

 

좋아요. 레너드 씨가 느낀 문제점은 뭐였나요?

B 짐은 항상 불안해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두 분 관계가 안정적이지 않았다는 뜻이죠?

B 아니요, 그러니까 -

레너드 씨도 불안정함을 느끼셨던 건가요?

B 아니요. 그게 정확히는, 네.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지미 마음이 떠나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어요.

하지만 두 분이 그 주제로 대화를 해보신 적은 없다고 하셨고요.

B 제가 용기가 부족했죠.

K 용기?

B 아니면 결단력이나.

그래서 레너드 씨는 어떻게 해결하기로 결정하셨나요?

B 기다렸죠.

K 뭘?

B 글쎄. 아마 네가 다시 괜찮아지기를?

 

 

제임스 씨는, 두 분이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가길 바라셨다고 하셨어요.

K 신경 쓸 일이 적어지잖아요. 책임 질 일도 그렇고. 뭐, 그러면 기대할 것도 없고.

연애를 시작하고도 차이점을 못 느끼신 건가요?

K 어... 달라지기야 했어요.

하지만 기대하던 만큼은 아니셨다는 거죠?

K 아니요.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우리 사이의 감정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 감정이요.

K 레너드는 정말 변함이 없었거든요. 친구로서 저를 대할 때나, 뭐 그 이후나 말이에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은, 정말 지금 말이에요. 2018년.

 

한결같다는 건, 파트너로서는 보통 긍정적인 점이 아닌가요?

K 전 사랑을 하면 뭔가 특별할 줄 알았어요.

B 내가 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K 응, 그랬어. 넌 그냥 좋은 사람인 것뿐이잖아. 나한테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B 뭐? 그거야 당연하잖아.

K 그게 어떻게 당연해. 이제 보니까 안 되겠네. 아무한테나 그러면 안 되는 건 나도 알거든?

B 아무한테나 그런 적 없어.

 

K 거짓말. 나한테는 왜 그랬는데?

B 그야...

K 거 봐, 할 말 없네. 아무튼 그래요.

B 난 정말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

K 좋았다고? 뭐가?

B 댐잇.

K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다음 질문 해주세요.

B 당연히 너 말하는 거잖아.

K 어?

B 네가 좋았다고.

 

커크는 앞을 보고 있던 고개를 홱 돌려서 본즈를 봤어. 본즈는 시선을 피해서 물을 홀짝였어. 커크는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는 것 같았어. 목덜미의 핏줄로 심장이 뛰는 게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어. 레너드 씨는 그래서 – 바로 옆에서 상담사와 본즈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한 뼘 너머의 소리처럼 웅웅 울렸어. 커크는 본즈의 어깨를 가만히 보면서 질문에 기계적으로 대답했어. 네. 네, 맞아요. 별 거 아닌 말인데도 갑자기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지 몰라. 커크는 괜히 간지러워진 목덜미를 긁었어. 이런 느낌은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어. 키스해도 되냐는 말에 처음으로 홀리듯 고개를 끄덕였을 때 말이야.

 

 

 

 

상담이 끝나고 커크는 조수석에 올라탔어. 본즈는 차에 시동을 걸고 히터 온도부터 높였어. 그리고 차 앞창에 놓여있는 음악 씨디를 꺼내서 음악을 틀었어. 커크가 예전에 사다두었던 거라, 수십 번도 더 들어본 익숙한 음악이었지. 커크는 옆자리에서 본즈 핸드폰을 구경하려고 집어 들었어. 바꾼 지 채 한 달도 안 된 핸드폰이었지. 별 생각 없이 말 습관처럼 스마트폰 좀 사라고 말했던 건데, 갑자기 본즈가 그럴까? 하면서 바꾸게 된 거였어. 화면을 켜자마자 핸드폰을 산 날 처음으로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이 나왔어.

 

“집으로 가면 돼?”

“응?”

“뭘 그렇게 놀라. 집으로 데려다주면 돼?”

“아, 아니. 나 친구랑 약속.”

“친구? 친구 누구?”

“뭐야. 그건 왜 궁금해.”

“아니, 그냥 어디로 가면 되나 해서.”

“그냥 너 집 가는 길에 내려줘. 적당히 세워 달라 할게.”

“이 날씨에 그렇게 입고 나와 놓고 무슨. 그 사거리에 내려주면 되지?”

 

커크가 대답하기도 전에 본즈는 차를 출발시켰어. 커크는 연애 경험은 별로 없었지만, 연애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말을 들었어. 이 주제만 나오면 누구나 한 마디씩 보태고 싶어 했거든. Can Exes be friends? 술자리에 이 질문이 올라오면 친구들은 몇 십 분씩 토론을 했어. 커크도 여기에는 한 마디를 보탤 수 있었지. 자기랑 본즈는 정말 친구로 잘 지낸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 말을 믿지 않는 친구들도 많았어. 그건 둘 중 한 명이 아직 좋아해서 가능 한 거야. 그 친구들은 확신하듯이 그렇게 말했어. 커크는 운전을 하고 있는 본즈를 뚫어져라 바라봤어. 시선을 느낀 본즈가 힐끗 돌아보려고 하기에 얼른 본즈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어. 별다른 암호가 설정 되어있지 않아서 화면을 쭉 밀고 나니 잠금이 풀렸지. 핸드폰 화면에는 커크의 SNS 페이지가 떠있었어. 커크는 James T. Kirk라고 쓰인 이름과 그 옆에 있는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고 얼른 다시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어. 본즈가 정말 날 아직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이 들려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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