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린의 일본회담 기사를 하나하나씩 정독하고 있던 지훈은 조금 부른 제 배를 매만재며 씩 웃었다.

영상속의 관린은 아직 회담에 참석하기엔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눈빛과 행동, 말투 하나하나에는 긴장감이 없었다.

어제 아침, 자신과 떨어져 있기 싫다고 징징대던 남자와 동일인물이 맞는지 싶었다.

 

"나린아, 아빠봐라. 억수로 멋있제?"

 

15개째 귤을 까 먹으며 제 남편의 얼굴감상을 하던 지훈은 급격히 몰려오는 졸림에 자기도 모르게 귤껍질을 꼭 쥐고 풀썩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시후 그 모습을 본 권상궁은 다시 깨워 편하게 침대에 뉘여드리고 싶었으나, 너무나도 곤하게 잠든 지훈의 모습에 차마 깨울 수 없어 이불만 덮어드리고 조용히 침실을 나왔다.

 

"흐음..."

 

침을 흘리며 맛있게도 잠들었던 지훈은 침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눈을 뜬 순간, 퀘퀘한 냄새에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마마! 마마! 빈궁마마...!!!"

 

자신을 부르는 오열하는 소리와, 비명소리, 둔탁한 마찰소리들. 지훈은 조심스레 침대에서 빠져나와 소리만 들어도 정신없는 바깥상황을 제 두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방 문을 열었다. 열려했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ㅇ..왜이러지..."

 

문의 손잡이를 밀고 잡아당기고 몸에 힘을 주어 부딪혀 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좀 열어줘요! 문이 안열려요!"
 

문을 두드리며 호소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바깥에서 들려오는 오열소리는 더 커졌다.

 

"마마, 마마 제 말 들리시옵니까?"

"권상궁, 이게 무슨냄새에요? 아니, 일단 이 문좀..."

"마마, 지금 빈궁전에 화재가 났사옵니다, 화재가 난중에, 쿨럭! 센서가 고장이 났는지, 문이 열리지 않사옵니다"

"........."

 

입을 열때마다 연기가 목구멍으로 들어와 기침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바깥 상황을 보고하던 권상궁은 말하면서도 침실의 문을 힘껏 당기고 밀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마, 마마.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십시오. "

"..........."

"침대 옆에 물병을 두었사옵니다. 큭, 수건을 물에 적셔 코와 입을 막고 계시옵소서. 후윽... 금방 문을 열겠..쿨럭, 사옵니다"

"...권상궁.."

"얼른요, 마마!!! "

 

다급한 권상궁의 말에 지훈은 얼른 뛰어가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에 물을 들이부었다. 그리고는 코와 입을 틀어 막았다.

그래도 점점 침실을 가득 메우는 퀘퀘한 냄새와 연기에 지훈은 더 세게 틀어막았다.

 

"후으....흑... "


무서웠다. 방 안에 연기가 차올라도 열리지않는 문이 , 바깥에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조금씩 무너지는 건축물 소리가, 코를 틀어막아도 느껴지는 갑갑한 연기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관린아...이관린..."


 지금 제 옆에 관린이 없다는 것, 그것이 제일 두려웠다.


"마마, 쿨럭- 마마! 정신을 붙잡으셔야 하옵니다!"

"마마!!크윽, 제 목소리 들리시옵, 쿨럭- 니까?!"

"마마!!!!"


저를 부르는 목소리들에 대답을 해 주고 싶었으나 방 안을 가득채운 연기때문에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 입을 뻥끗조차 할 수 없었다.

조금 부른 제 배를 만졌다.

나린아, 괜찮아? 엄마는...나는...너무힘든데



탁-


손에 들고있던 술잔은 의건의 발 밑에 떨어져 처참히 깨졌다.


"...불...이라뇨...? 어디에...불이 났다는..."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빈궁전에...불이났다고요...? 지훈이는요? 그럼 지훈이는?!"

"빈궁전 침실에 방범센서가 고장이나 구조가 느려졌다 하옵니다, 다행이도 방금 구조되셨는데 이미 의식을 잃으셨다하옵니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다리고 있던 황제의 사망소식이 아닌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훈아...지훈이 어떡해요, 지훈이 잘못되면..."


낯선 의건의 모습에 별궁의 궁인들은 당황했다. 


"호...홀몸도 아닌데...지훈이... 지훈이가..."


그는 주저앉아 벙찐표정으로 지훈의 이름만 반복했다. 갑자기 받은 너무나 큰 충격에 의건의 얼굴은 하얗게질렸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구조되셨더라면.. 태아는 물론이고 빈궁마마께서도 위험하셨을 것 이옵니다..."

"........."


관린이 한국으로 오고있는동안 간신히 구조된 지훈은 이미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었고, 처소가 불에 타 안정을 취할 곳이 없었기때문에 관린의 처소인 동궁전으로 급하게 옮겨졌다.


"누군가가 작정을 하고 방범센서를 꺼둔 것 같사옵니다. 아예 소등되어있었사옵니다.모든 인력을 동원해 조사를 하고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제 앞에 의식을 잃은채 힘없이 누워있는 지훈의 얼굴만 빤히 내려다봤다.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숨이 막힐듯한 고통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때, 감겨있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

"...지훈아, 지훈아..."


힘없이 떠진 두 눈은 제 손을 붙잡고있는 관린을 바라보고있었다.


"...관린아..."

"괜찮아? 정신이 좀 들..."

"나린이는...? 우리 나린이는...? "


눈을 뜨자마자 뱃속에 있는 아이를 걱정하는 지훈에 울컥한 관린은 꽉잡은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괜찮대...다 괜찮대. 나린이도 괜찮고, 너도 괜찮고 다 괜찮대..."

"..........."


관린의 말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지훈은 맞잡은 손을 더 꽉 쥐며 두 눈을 감았다. 방을 가득채운 연기로 인해 코와 입을 막고있던 손수건은 금새 물기가 말라 제 기능을 잃었고, 급기야 제 얼굴에 물을 들이부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기위해.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단 한가지만 되뇌였다. 이 아기를 살려달라고. 

아이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그제서야 희미하게 웃는 지훈은 손등에 느껴지는 축축한 물기에 깜짝놀라 눈을 크게떴다.


"...이관..린...?"

"잠시만...잠시만 이러고있자"


제 손등에 얼굴을 묻은 관린은 울고있었다.  너무나도 서럽게 흐느끼고있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지훈은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흐읍, 흐으으..."


차가운 성격 때문에 피도눈물도 없다는 말을 많이 듣던 남자가 이렇게 제 앞에서 어린애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있으니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다.


"관린아...."

"흐윽.. 나 진짜..후으...너 잘못될까봐..흐읍... 너 잃을까봐..."


관린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지훈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흘렀다. 자신도 울면서 제가 울자 큰 손으로 눈물을 훔쳐닦아주는 관린이 너무나도 다정해 더 울컥해 눈물을 흘렸다.


"흐읍...왜 울어, 울지마. 너 안정취해야돼"

"흐윽, 흐으으... 지도 울면서.."


둘은 울면서도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기 바빴다.

 놀란만큼 진정되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잠시 뒤 둘은 새빨개진 두 눈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이관린 우는모습도 잘생겼네 쓸데없이"

"이제 알았어? 난 뭘해도 잘생겼어"


피식웃으며 관린의 목을 끌어안은 지훈은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겼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는지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는 지훈의 귓가에 너무나도 잘들렸다. 


"우리 나린이 많이 놀랐겠다"


지훈이 배를 쓰다듬으며 살짝 웃자  관린은 또 다시 울컥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무서운 상황에서도 우리 나린이 잘버텨줬어. 우리 아기 벌써부터 효도하는 것좀봐. 기특해죽겠네"


애써 웃으며 큰 손으로 지훈의 배를 쓰다듬던 관린은 또 다시 눈물을 훔쳐닦았다. 강인하고 든든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사랑하는 제 부인과 아이를 잃을뻔했던 고통스러운 순간의 기억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있던 지훈은 관린의 볼을 감싸고 깊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해맑게 웃었다. 그도 다시 예쁘게 웃어주길 바라면서.


" 아빠, 나린이 오렌지먹구싶어요-"



"마마께서 이런 누추한 곳 까지 납셔주시고. 몸둘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의건은 주위를 둘러봤다. 집안에는 온갖 으리으리한 조각품들과 고급스러운 가구로 가득했다. 그래,  제 이득되는 일이면 무슨짓이든 하는 할배니까, 이런 호사를 누릴만하지.

말없이 집을 둘러보는 의건을 보며 김내관은 찻잔만 매만졌다.

직접 제 발로 찾아온것은 분명 할 말이 있다는 건인데, 도통 입을 열지않아 답답했다.


"마마, 하실 말씀 있으시면 편하게 하..."

"당신이지"

"...무엇을 말입니까"

"빈궁전 침실 방범센서 꺼버린것도, 방화 지시한것도, 모두 당신짓이지"

"...소인은 모르는 일 이옵니다"


의건은 손에 쥐고있던 찻잔을 꽉 쥐었다. 희미하게 걸려있는 저 미소가 역겨웠다. 


"내가 왜 김내관을 내 곁에 둔 줄 알아요?"

"..........."

"당신은 나랑 닮았거든"

"..........."

"갖고싶은것은 무슨짓을 해서라도 가져야되고, 나한테 이득되는것은 어떤 개같은 짓이어도 다 하는사람이잖아, 당신이랑 나랑"

"..........."


흔들리는 김내관의 두 눈을 보며 의건은 비릿하게 웃었다.

너무 정곡을 찔렀나. 


"내가 세자자리 관심없는거 항상불만이었잖아, 당신"

"..........."

"그게 박지훈때문이라 생각해서 그짓을 저지른거고"


급격히 과격해진 의건의 행동에 김내관은 오히려 차분했다.


"예,마마. 잘 알고 계시는군요"

".........."

"그러게 소신들이 간곡히 말렸을때 마음을 접으셨어야지요. 애초에 빈궁마마는 마마께서 가지실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뭐라고요...?"

"저희는 마마께서 동궁전으로 납실때까지 온몸을 다바쳐 도와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

"마마의 앞날에 방해되는 것들은 모조리 없앨것입니다. 그것이 누구든. 어떤사람이든"

".........."

"그러니 마마께서는, 다른곳에 눈을 두지마시고 저희만 믿고 ..."


가만히 말을 들으며 잔에 있던 차를 한꺼번에 들이킨 의건은 그대로 잔을 집어던졌다.벽에 부딪힌 잔은 요란한 소리를내며 깨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의건은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보는 김내관을 서슬퍼른 눈으로 내려다봤다.


"다같이죽죠"

".........."

"나는 당신들의 뜻에 전혀 따라줄 생각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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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보이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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